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36)
5.
나는 성좌가 많다.
좀만 손보면 소설 제목이 될 것 같은 문장이다. [내 성좌 무한]이라거나, [내 성좌 999,999,999] 같은 식으로.
그렇게 내게는 성죄가 많은 것이다.
“삐약.”
우선 내 목에는 여우님.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이 똬리를 틀고 있다.신님은 세계의 시간을 틀어 잡는 대신 나의 시간을 쥐었다. 그 증거일까? 여우님은 항상 꼬리를 목도리로 삼아, 나의 숨을 부드럽게 조인다.
권능은 ‘완벽한 간섭 면역’.
누구도 나의 시간을 부정할 수 없다. 왜곡시킬 수 없다.
단지 그것 뿐이지만, 그로 인해 나는 불가해한 ‘인과 변경’ 등에 대한 면역력을 얻었다.
“끼에…. 끼우우욱….”
그리고 내 손목엔 실뱀.
[미궁에 거하는 눈]이 팔찌처럼 걸려 있다.뱀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알에서 나왔으며 이제 세상의 바깥을 바라봐야만 한다. 머리로 세상을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세상을 깨우칠 계절이 온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라면 머리로 알고 있던 지식이 제법, 아니, 가장 방대하다는 점일까.
권능은 ‘완전한 비밀 폭로’.
어떤 대적자도 내 앞에서 비밀을 숨길 수 없다. 태생. 연원. 근원. 강점과 약점까지.
정보가 부족한 대적자는 있을지 몰라도 정보가 부재한 대적자는 없어진 것이다.
-히야. 아주 그냥 살판났네, 살판났어. 우리 김좀비. 상태 이상 면역템에 실시간 관람 가능한 몬스터 도감까지 손에 넣었구나.
내 뒤에는 배후령.
[검의 성좌]가 있다.이 양반은 그냥 생략하자.
[‘수호의 여신’은 슬슬 서열정리가 필요한 것을 느낍니다.]마지막으로 반짝이가 있었다.
[‘수호의 여신’은 세상만사가 선후배로 줄지어져 있음을 지적합니다. 용사님에게 가장 먼저 합류한 성좌는 자신이며, 가장 멀쩡한 루트를 통해 들어온 성좌는 자신이니, 마땅히 여우와 뱀은 자신을 선배님이라 존칭해야 할 것입니다.] [‘수호의 여신’은 자신이 인간들에겐 관대하고 너그러우나, 성좌들에게는 엄격한 존재임을 숨기지 않고 기꺼이 밝힙니다.]반짝이는…… 얜 뭐지?
정말 뭘까.
김율이랑 지내던 시절엔 어떻게 똘끼를 드러내지 않고 참았을까? 아니면 설마 나와 만난 다음부터 똘끼가 개화한 것인가.
-좀비야. 자고로 칼은 무사를 닮는다 했다. 살천성 칼이었을 때는 살천성처럼 묵직했던 게 니 칼이 된 뒤로는 토끼털마냥 가벼워졌는데, 이게 대체 누구의 탓이겠냐?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미스터리군.
“……입찰이 없네?”
좀 떨어진 곳에서 [태고의 지팡이]가 말했다.
“혹시 내 목소리가 작았니? 다시 말해줄게. 64층은 클리어됐단다. 이제 65층 차례야. 스테이지에 입찰할 성좌가 있으면 어서 참여해 주렴. 언제까지 기다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야.”
그렇다.
내가 전국 성좌 자랑을 시작한 이유가 있다. 아무도 경매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무 비싸서 팔리지 않는 경매품이 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하아…….”
삼 분이 지나도록 경매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법사는 실망한 듯 한숨을 쉬었다.
“다들 겁먹었구나. 쫄았어. 사왕한테 불사조가 한방에 나가떨어지니까 완전히 겁에 질려선. 이러니까 요즘 성좌들은 의지가 없다는 얘기를 듣는 거야. 예전엔 말이야 좀 더…….”
주절주절.
그러는 사이에도, 여우님과 실뱀 그리고 반짝이 사이에서 벌어진 서열 전쟁은 열나게 가속되고 있었다.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은 어디서 B급 성좌들 주제에 깝치냐며 공손히 두개골 안의 지능이 안녕하신지 안부를 묻습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은 자기가 사왕한테 패배했지 너희 잡것들한테 패배하지는 않았음을, 그저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로서 지적해둡니다.] [‘수호의 여신’은 B급 하니 말인데, 실질 B급이야말로 최강이라며 지구의 만화들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이 연중 작가 만화를 근거로 대지 말라고 코웃음 칩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너희들 나이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수호의 여신’은 그러면 님이 제일 어리다는 사실이 밝혀질 텐데 부디 그러라고 말해줍니다.]“삐야악?”
“끼에엑?”
-부르르.
시끄럽다.
얘네 겁나 시끄러워!
성좌가 셋이나 한자리에 모이니까 아주 그냥 사운드가 빌 때가 없구만?!
[‘수호의 여신’은 용사님에게 묘안을 제시합니다.]뭔데.
[‘수호의 여신’은 자신도 성좌라는 매우 당연한 사실을 언급합니다.]“응… 그치. 그래서?”
[그렇다면 자신도 경매에 입찰하여 스테이지를 낙찰받으면 될 일 아니냐고 제안합니다.]“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잠깐. 그게 되나?”
[‘수호의 여신’은 규정상 위반되는 일은 없다며 칼날을 폅니다.]“아, 펴지 말고. 베였잖아. 나 지금 피나잖아… 아니 아무튼.”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사라락. 칼손잡이를 매만지며 하나하나 견적을 짜보았다.
“근데 낙찰을 받으려면 뭔가 대가가 필요하잖아. 신앙심이라거나, 뭐 그런 걸 판돈으로 내걸어야 하는 거 아니야? 성좌들에겐 그게 일종의 화폐라며. 너 돈 있어?”
[‘수호의 여신’이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반짝이가 설명한 바는 이러했다.
1. 원래 자신은 [수호]와 [불멸] 등을 관장하는, 제법 격이 높은 성좌였다.
2. 그 와중에 살천성이 아이김 제국을 세웠다. 자신은 명실공히 아이김 제국의 수호신으로 자리잡았다. 말하자면 평생 연금을 획득한 셈이었다.
3. 그런데 딱 그 시점에 김율이 자신을 봉인해버렸다.
4. 줄곧 신도들이 신앙심을 보냈지만, 자신은 봉인당한 바람에 쓸 기회가 없었다. 입금만 되고 출금이 안 되는 상황에서 마치 적금 통장처럼 신앙은 쌓이기만 했다.
5. 기나긴 세월이 지나고 나에 의해 봉인이 풀렸다.
6. 그동안 내버려둔 통장을 돌아보니까, 어머나?
반짝이가 반짝반짝거렸다.
[‘수호의 여신’은 자기만한 현금 동원력을 가진 성좌는 없을 거라 자신합니다.]한마디로 말해 반짝이는 예금 부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연……. 봉인당한 게 어떤 의미로는 전화위복이었구나.”
[‘수호의 여신’은 자신의 격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합니다.]그건 격이 아니라 돈지랄이 아닐까 싶었지만, 차마 그걸 지적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반짝이는 자기가 할 수 있으며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수호의 여신’이 입찰합니다.]다른 성좌들에게 경매에 참여할 걸 재촉하던 [태고의 지팡이]가 이쪽을 돌아봤다. 매사에 태평할 것만 같았던 마법사의 눈에도, 아주 조금이지만 경악이 서렸다.
그 미세한 표정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진짜? 진짜로 그렇게 치사한 짓을 한다고?’ 정도에 해당하려나.
“사왕아. 진짜 그렇게 치사한 짓을 할 거니?”
내 번역 실력이 죽지는 않았군.
“어,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제 칼이 했어요.”
“소매치기들도 자기 손이 했다고 말하고는 하지.”
“아니 다르죠. 제가 명목상 주인이긴 한데 그렇다고 얘한테 자유의지가 없는 건 아니거든요. 자기가 한다는데 제가 뭔 수로 말립니까?”
“아니 그래도 말이야. 사람이 상도덕이라는 게….”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이 적금 통장을 깨트립니다.]여우님이 내 목덜미에서 으르릉거렸다.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이 입찰합니다!]마법사가 침묵했다.
내가 항변했다.
“제가 아닙니다. 제 목도리가 했어요.”
[‘미궁에 거하는 눈’이 입찰합니다.]“제 팔찌가 그만….”
“아 나 진짜.”
마법사가 이마를 짚었다.
“이런 발싸믹소스 같은 것들. 그래. 언제 인생이 내가 의도한 바대로 굴러간 적이 있기는 하니? 규정상 위반된 것도 없겠다, 마음대로 하려므나.”
[‘수호의 여신’은 됐고, 그래서 누가 입찰가를 제일 높게 쳤는지만 묻습니다.]“에휴.”
마법사가 한숨을 쉬었다.
“……65층의 관리자를 ‘수호의 여신’으로 변경할게.”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이 이럴 순 없다고 항의합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은 대체 얼마나 퍼부은 거냐며 경악합니다.]딱히 내가 움직인 것도 아닌데 성검의 칼집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수호의 여신’은 후배님들의 헐거운 지갑 사정에 참으로 안쓰러운 눈길을 던져줍니다.]그리고 예상된 난장판이 벌어졌다.
[퀘스트 클리어.] [64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65층 관리자가 당신에게 퀘스트를 하달합니다.]+
[용사의 검법]난이도: B
임무 목표: 65층을 지배하는 자 [수호의 여신] 휘야는 당신에게 [용사의 검법] 포즈를 취할 것을 요구합니다.
※단, 수호의 여신이 보기에 흡족하지 못할 경우, 당신은 한 번 더 포즈를 취해야만 합니다.
+
음.
나는 검을 빗겨 잡았다. 마치 변신 로봇이 클라이맥스 씬에서 칼을 뽑아 적을 겨누는 것처럼 말이다.
걸맞게도, 빗겨 잡는 순간 번쩍 …! 하고 칼날에서 휘광이 폭사되었다.
[퀘스트 클리어.] [65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굉장한데.”
나는 전율했다.
“이거 최고로 치사하잖아….”
“네가 치사한 거란다.”
추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수호의 여신’은 자기를 선배님이라고 부를 것을 후배들한테 요구합니다.]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이 바로 66층 스테이지 경매에 뛰어듭니다!]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여우님이 삐약 울부짖었으며, 실뱀도 끼에엑 울었다.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이 입찰합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입찰합니다.] [‘수호의 여신’은 안타까운 얼굴로 한숨을 내쉽니다.] [‘수호의 여신’이 입찰합니다.]뭘까….
얘네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러는 걸까….
-원래 마스코트 결정전은 달아오르게 마련이지.
배후령이 낄낄거렸다. 폼이 딱 불구경을 즐기는 동네 형이었다.
-내버려둬라. 자기들끼리 서열정리 들어간다잖아. 저것도 일종의 충성경쟁이야.
“저는 저런 충성은 바란 적이 없는데요….”
-가만히 있어도 스테이지를 깨주겠다는데 그럼 뭐가 충성이냐? 기꺼운 마음으로 꿀이나 빨아라.
굉장히 미묘한 꿀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난장판은 치열해져 갔다.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은 재산을 털어넣습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자신의 숨겨둔 비밀통장을 [폭로]합니다.] [‘수호의 여신’은 입찰금을 두 배로 늘립니다.]마법사가 이마를 짚었다.
“……66층의 관리자를 ‘수호의 여신’으로 변경할게.”
한 명의 여우와 한 명의 뱀이 하늘이 찢어지도록 울부짖는 시간이 잠시동안 있었다.
+
[검무]난이도: B
임무 목표: 66층을 지배하는 자 [수호의 여신] 휘야는 당신에게 검무를 출 것을 요구합니다.
※단, 수호의 여신이 보기에 흡족하지 못할 경우, 당신은 한 번 더 추어야만 합니다.
+
66층은 고적한 평야였다. 시간대는 밤, 덩그라니 달이 떠있었다.
때 아닌 달밤에 나는 반짝이를 든 채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해도 좀 많이 미친 놈처럼 보일 것 같았다….
[퀘스트 클리어.] [66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대단했다.
“축하해. 사왕. 탑이 세워진 이래 이런 식으로 스테이지들을 깨부수는 헌터는 니가 최초야.”
“최후이기도 했으면 좋겠네요.”
“그건 다음 층 경매를 보고 판단하자꾸나.”
마법사가 진절머리를 쳤다.
“자. 해서 67층 경매를 시작하겠어.”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이 입찰합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입찰합니다!] [‘수호의 여신’이 입찰합니다!]바로 그때였다.
[‘가장 붉은 소믈리에’가 입찰합니다….]그제야 새로운 참가자가 나타났다. 마법사는 눈을 번쩍였다. 그리고 즉시 지팡이를 높이 들어올렸다.
“낙찰! 67층의 관리자는 ‘가장 붉은 소믈리에’로 변경!”
“삐약?!”
“끼에엑! 끼이이익!”
“불만은 안 받아. 진행자도 심판도 나야. 입찰가는 당연히 비공개니까 알려줄 수 없어. 지금 그렇게 룰을 정했단다.”
마법사가 소리쳤다.
“야, 사왕! 얼른 올라가! 쟤 마음 바뀌기 전에!”
그렇게 했습니다.
6.
[당신은 67번째 스테이지에 입장했습니다.] [‘가장 붉은 소믈리에’가 현현합니다.]혹시 악어의 눈물이라고 들어봤는가.
악어가 사냥감을 잡아 우그적우그적 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 하여, 통칭 거짓된 울음의 대명사로 통용된다. 죽이면 죽인 거고 슬프면 슬픈 거지, 전부 죽여놓은 다음에 슬프다는 듯 우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냐면서.
“흐윽…… 흐어윽….”
그런데 지금 내 앞에서 떨어지는 악어의 눈물은 좀 많이 진실되어 보였다.
“어흐윽… 흑, 어윽흐윽…….”
그것은 망토를 입은 악어였다.
네 발이 아니라 두 발로 다닐 것처럼 생긴 악어는, 앞발이 아니라 양손으로 땅을 쿵쿵! 내려찍었다. 어깨에 망토뿐만 아니라 온몸에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어서, 만일 머리만 악어 머리가 아니었더라면 그럴싸한 신사처럼 비췄을 것이다.
“어째서, 왜, 하필이면 나한테 이런 일이……!”
그 악어 신사가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야비하다, 사왕! 야비해! 어찌 이리도 치사한 짓을 저지르는가! 얌전히 다른 성좌들이 경매에 나설 때까지, 기왕이면 100년 200년 정도 기다릴 것이지! 왜! 그 새를 기다리지 못하고 스테이지를 사재기하는 것인가!”
“그런 악질적인 지연 작전을 세우고 있었냐, 너희….”
“치사한 놈! 네놈처럼 악랄하고 악독하며 치사한 놈은 처음이다!”
내가 한 짓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33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