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38)
3.
악어 신사는 나를 향해 달려들기 직전, 기나긴 아가리를 벌렸다.
“탑이여! 약속을 이행하게나!”
악어의 등 뒤편에는 집사들 수십 명이 도열해 있었다. 쨍그랑! 집사들이 들고 있던 와인병이 떨어졌다. 쨍그랑. 깨진 유리가 산산이 튀어올랐다. 포도주에 붉게 물들어, 파편들은 영산홍(映山紅) 꽃잎처럼 만발했다.
[‘가장 붉은 소믈리에’가 탑에 맹약을 요청합니다.] [성역 지정.] [승인.]악어 신사의 권능이 발현된 것이다.
[현 시간 부로 이곳은 ‘가장 붉은 소믈리에’가 소유합니다.] [그는 흡혈하고 뱉어내는 자이니, 경배하여라.]자욱한 안개였다.
유리 파편들이 번쩍거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붉은색. 그것들이 지나간 자리엔 시뻘건 아지랑이가 남았다. 빨간 연무가 세상에 꽃피었다.
“나는 약자한테 강자이며,”
악어 신사가 구욱구욱 웃었다. 악어의 웃음소리는 그런 모양이었다.
“강자한테는 더 강자일세!”
그리고 우리 둘은 충돌했다. 콰앙! 악어의 지팡이와 내 성검이 맞부닥쳤다. 나는 물론 오러를 실어서 단번에 베어넘길 작정이었다. 하지만, 붉은 안개에 잠긴 악어는 멀쩡해 보였다.
“음.”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무투파로 보이진 않았는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도 썩 무투파로 보이는 외관은 아니라네! 젊은이! 검사보단 집사가 어울리는군! 어떤가. 내가 집사를 모집하고 있는데 한번 취직처를 바꿔볼 생각은 없나!”
“전 이미 이반시아 공작가의 귀신이 되기로 한 몸이라서.”
“안타깝군! 무덤에다 새집을 차려주마!”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세 갈래로 검격을 나누어 쏟아냈다. 콰앙! 놀랍게도 악어 신사는 나의 속력을 따라잡았다. 악어는 한손으로 자신의 넥타이를 매만지며, 남은 한손으로 지팡이를 휘둘러 내 검을 막았다.
‘뭐야.’
솔직히 놀라웠다.
‘나를 공격할 정도의 실력은 되었던 건가? 경지는 낮아 보였는데.’
설마 내가 상대방의 실력을 잘못 헤아린 건가 싶을 때였다. 손목에 걸린 실뱀이 끼이이, 진동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권능을 발현합니다.] [폭로.] [당신에게 상대방의 권능이 드러납니다.]히시미트 크리츠. 정보를 관장하는 성좌이자 이제는 내 수하가 된 요르문간드가, 적의 실체를 폭로해버린 것이다.
눈앞에 글자들이 떠올라 뱀처럼 꼬물거렸다.
+
[악의는 선의에 기생하노니]소유자: 가장 붉은 소믈리에
효과: 악어로 둔갑한 흡혈귀(吸血鬼)의 권능. 상대방이 힘을 쓰면 그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귀찮은 권능이다.
상대방의 삶을 채집하고, 감정을 채취하며, 영혼을 착취한다. 그와 상대하면서 진심으로 통한다고, 우리는 동격이라고 느껴진다면 순전한 착각에 불과하다. 착각에 사로잡힌 당신의 눈빛을 그는 감미롭게 탐미할 뿐. 그 실체는 기생충이다.
[가장 붉은 소믈리에]는 기생충 중의 기생충으로, 어느 누구도 1인으로 덤비면 그의 권능을 당해낼 수 없다.+
나는 하, 웃음을 흘렸다.
“무예 실력이 높은 게 아니었나.”
“음? 아, 흐음! 어허. 히시미트 크리츠인가!”
악어 신사는 까다롭다는 듯 혀를 찼다.
“이제 보니 사로잡힌 것뿐만 아니라 아예 이 젊은이한테 정보를 갖다 바치고 있었군! 가장 위대한 뱀이여! 쪽팔리지도 않은가! 내 평소부터 그대를 존경했건만, 자신을 떨어트린 자에게 복수하긴커녕 복속해버리다니! 실망일세!”
[거짓입니다.]실뱀이 끼이익,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은 어느 부분이 특히 거짓이냐면 ‘평소부터 그대를 존경했건만’이 거짓이라고 지적하며 이를 갑니다.]성좌들끼리 도통 협력하기 어려운 이유가 다 있었군.
“쌍둥이! 뭣 하는가! 자네 차례라네!”
그 어려운 협력이 적어도 이곳에선 이뤄지고 있었다.
“저희들한테,” “명령하지 마.”
저 뒤편에서 쌍둥이가 입술을 맞추었다. 입술의 각도와 머리의 방향마저 똑같은 키스였다. 그러기에 두 사람의 작은 코가 서로 살짝 짓눌렸다. 하지만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쌍둥이는 천천히 입술을 떨어트렸다. 점점 멀어지는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탑이시여.” “약속이야.”
처음으로, 쌍둥이는 손깍지를 놓았다.
[‘영원한 원무의 쌍둥이’가 탑에 맹약을 요청합니다.]사라락.
회색을 머금고 있던 쌍둥이의 머리카락이 변했다. 한 명은 새하얗게, 다른 한 명은 새까맣게. 백자(白者)와 흑자(黑者)가 선명하게 갈렸다
너무나도 극명한 흑백.
마치 두 사람 사이에서 세계마저 두 쪽으로 깨진 것만 같아서.
[성역 지정.] [승인.]“좋군!”
그 모습을 확인하고 누군가가 움직였다. 악어 신사였다. 악어는 단숨에 뒤로 도약했다. 타앗! 나는 추격타를 날렸지만 악어가 휘저은 지팡이에 가로막혔다.
“무용지물일세, 사왕! 그대의 경지가 곧 내 경지이거늘!”
악어는 꾸욱꾸욱 웃었다.
“나는 이곳의 주인으로서 쌍둥이가 개입하는 걸 너그럽게 인정한다네!”
악어가 물러서서 비어버린 자리로, 쌍둥이 중 한 명이 파고들었다. 공수 교대였다. 하얀 쌍둥이, 백자는 표정이 없는 얼굴로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현 시간 부로 이곳은 ‘영원한 원무의 쌍둥이’가 소유합니다.] [공동 소유가 인정됩니다.]나는 검을 내질렀다.
[그는 상처입고 상처입히는 자이니, 경배하여라.]깔끔하게.
칼끝이 백자의 어깨를 꿰뚫었다.
“아! 아아, 아아아아악!”
백자가 어깨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악어 신사처럼 내 공격을 간단히 막아낸다든가, 그런 기예를 백자는 선보이지 못했다. 성좌의 반편이 바둥거리며 고통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어째서 이리도 무모하게 덤빈 것인가, 내가 의문을 품은 순간.
“괜찮아요.”
저 멀리 테이블 너머, 가만히 서 있는 흑자가 방긋 웃었다. 검디 검어서 시선조차 빨려들 것 같은 흑빛의 머리카락에 속삭임이 흘러내렸다.
“당신은 아프지 않아요.”
“……!”
백자의 눈에 핏기가 돌았다.
“나는, 아프지 않아!”
그것은 고통보다 진한 광기였다.
백자는 주먹을 휘둘렀다. 마치 어깨가 뚫렸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했다. 나는 응당 검을 뻗어서 권격을 쳐냈으며, 쳐내는 것과 동시에 적의 팔을 잘랐다.
“아, 히이?! 읏, 으, 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나는 팔을 베어넘긴 직후에 알아차렸다.
“괜찮아요.”
내가 뚫어놓은 어깨의 상처가 어느덧, 완전히 아물어져 있음을.
“당신은 손상되지 않았어요.”
나는 검격을 토해냈다. 좌, 우, 상단, 상대가 미처 쫓아오지 못할 속도로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적의 사지가 찢어졌다. 그때마다 백자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멀리서, 흑자는 사근사근 속삭였다.
“당신은 상처 입지 않았어요. 그렇지요?”
“으응! 응……!”
팔이 떨어진 곳에서 다시 팔이 돋았다. 바스라진 무릎이 다시 일어섰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상대방의 목을 쳤으나, 소용없었다. 그 목 조차 탈피되어 새로이 자라났다.
흑자가 키득거렸다.
“당신은 존귀해요. 아무도 당신을 상처입힐 수 없어.”
“너를 제외하고!”
“아아, 맞아요. 저를 제외하면.”
흑색의 비명과 백색의 속삭임이 섞여들어 공기가 혼탁해졌다.
“우리는 완전하니까요.”
나는 미간을 좁혔다.
‘까다롭구나.’
아무리 치명상을 입혀도 의미가 없지 않은가.
지금 당장만 해도 훅자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만신창이를 조금 더 넝마쪼가리로 만들어줬지만, 적은 금세 회복될 뿐.
“아프지 않아! 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흑자는 광기가 흐르는 눈으로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도대체 어떤 공략법이 먹힐까 고민하는 와중에, 내 눈앞으로, 실뱀이 새로운 글자들을 새겼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권능을 발현합니다.] [폭로.] [당신에게 상대방의 권능이 드러납니다.]그리고 쌍둥이의 힘이 낱낱이 밝혀졌다.
+
[이인완결동맹 (三人完結同盟)]소유자: 영원한 원무의 쌍둥이
효과: 세계를 완결짓는 권능.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을 당신이 아니라 내가 해석하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내가 아니라 당신이 해석한다면, 세계는 그것만으로도 완성됩니다.
세계를 폐쇄하는 주술. 제가 ‘모든 것’을 수집하여 저의 크기를 세상의 넓이에 값하려 든다면, 쌍둥이는 ‘아무것’도 수집하지 않음으로 써 세상의 넓이를 자신들의 크기에 맞춥니다.
쌍둥이 중 한 쪽을 공격한들 반대쪽이 무사하다면, 공격은 무효화됩니다. 물리공격은 물론이고 정신공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
“…….”
즉, 흡혈귀가 기생한다면 쌍둥이는 공생한다.
전자가 [딜레이고 후자가 [탱커]인가.
“어쩔 수 없군.”
그렇다면 백자와 흑자. 두 쌍둥이를 동시에 타격하면 될 일.
나는 단숨에 성검의 그림자를 늘렸다. 겹겹이 펼쳐진 네 자루의 검은 [수호의 여신]이 지닌 권능, 자매검이었다. 휘익! 나는 백자를 상대하는 한편, 여유롭게 남은 칼들을 어검술로 흑자한테 날렸다.
“아!”
백자가 눈을 크게 떴다. 설령 상처가 무효화된다 해도 백자의 무술 자체는 대단할 게 못 되었다. 백자는 허공을 가로짓는 내 영검(影劍)들을 제지할 수 없었다.
“안 돼!!”
“…….”
자신에게 들이닥치는 네 자루의 칼을 보고, 흑자는 미동조차 안 했다. 방긋 미소를 지은 채 가만이 지켜보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탑이여.”
마지막으로 남은 적의 파티원, [마른 손자국의 귀인]이 부채를 접었다.
“약속을 지켜라.”
오러를 머금은 목소리가 찰나 동안에 울려퍼졌다.
[‘마른 손자국의 귀인’이 탑에 맹약을 요청합니다.] [성역 지정.] [승인.] [현 시간 부로 이곳은 ‘마른 손자국의 귀인’이 소유합니다.]악어 신사가 다급하게 전음(傳音)으로 소리쳤다.
“나는 아무 상관없다네!”
[공동 소유가 인정됩니다.]테이블 위에 펼쳐진 장막이 한 차례, 내 공격을 가로막았다. 챠아앙! 네 자루의 검 중에 한 자루가 튕겨져 나갔다. 남은 것은 세 자루였다. 동료가 튕겨지면서 만들어낸 구멍으로 자매검들이 날아들었다.
귀인의 권능이 발동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원망하고 멸시되는 자이니, 경배하여라.]나의 검들이 흑자의 몸을 갈랐다.
분명히, 베었다.
“히윽?! 이, 읍, 아아아악!!”
하지만 비명을 터트린 쪽은 흑자가 아니었다.
“아아아, 우… 아아아아…….”
백자였다.
내 코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던 백자는 돌연 무릎을 꿇어 앉아, 자신의 양팔을 감쌌다. 뚜욱. 내가 벤 적 없는 부위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나는 그 상처들이 모조리, 본래 흑자가 입어야 했던 것임을 알아보았다.
“……과연.”
나는 한발자국 물러섰다.
“이건 히시미트 크리츠한테 폭로를 요구할 필요도 없군요.”
그리고 손을 들어 자매검들을 회수했다.
“대미지 전이입니까.”
“그렇다.”
[마른 손자국의 귀인]이 부채를 펼쳤다.“나는 누군가가 입은 상처를 다른 이에게 전이시킬 수 있다. 그것이 정당하다면 말이다.”
“재밌네요. 상처를 전가시키는 게 정당할 리 없습니다.”
“내가 보기엔 다르다.”
귀인은 백자를 노려보았다.
“으으…, 흑…….”
백자는 여전히 상처를 끌어안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자를 보는 귀인의 눈동자는, 나를 봤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오직 증오만으로 차 있었다.
“너의 잘못이다. 너의 탓이다.”
“아……?”
“네가 사왕을 막았더라면 너의 반쪽한테 칼이 날아들 일도 없었다. 너의 반쪽이 위험에 처할 일 역시 없었다. 네가 무력하고 네가 미력하여서 벌어진 일이다. 못된 것. 천한 것. 태어날 때부터 모자란 것. 그러니, 모든 것은 너의 잘못이다. 이곳에 피가 흘러야 한다면 오직 너 이여야만 한다.”
“…….”
말의 단칼들이 백자를 무참히 쑤셨다.
백자는 망연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어 자신의 반쪽을 돌아봤다.
“괜찮아요.”
흑자는 사근사근 웃고 있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아아…….”
“모든 것은 우리를 공격하는 저 사왕이라는 자의 잘못. 당신은 그저 저를 지키려 했을 뿐. 우리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에요.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몇 마디의 말에 상처가 아물었다.
생살이 돋아나 피를 집어삼켰다
백자는 언제 쓰러졌냐는 양, 조용한 적의를 눈동자에 품고 일어섰다.
“…….”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가장 붉은 소믈리에]. [영원한 원무의 쌍둥이]. [마른 손자국의 귀인].완전한 딜러이고, 완성된 탱커이며, 완벽한 서포터인가.
“어허, 그러게 말하지 않았나. 젊은이.”
악어 신사는 무대에 오른 광대처럼 지팡이를 돌렸다.
“세 성좌를 한번에 감당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알게 될 것이라고. 기억나는가? 이제는 깨달았겠지만 이미 늦었네. 그만 밤하늘에서 미끄러 떨어지고 과거의 어리석었던 자신을 미워하게나.”
“확실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좌들이 작정하고 합공을 펼치니 만만치 않군요. 조금 감탄했어요.”
“그거 다행이군! 한탄 속에서 몰락하는 것보다 감탄 속에서 패배하는 편이 그래도 자기만족을 안겨줄 것일세.”
“다만, 성좌가 셋이란 건 잘못되었습니다.”
“흐음?”
악어 신사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소리인가?”
“저를 잘 모르시는군요. 소믈리에. 원래 제 특기는 일대일 결투가 아닙니다.”
나는 성검을 쥐었다.
“마왕 잡던 시절부터, 난 패싸움으로 때려눕히는 게 특기였어.”
칼날에서 빛이 흘러내렸다.
[‘수호의 여신’이 탑에 맹약을 요청합니다.]악어 신사가 뭣, 하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 짧은 신음이 나를 막는 데 쓸모가 있진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를 막는 데 쓸모가 없었다.
[성역 지정.] [승인.]탑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현 시간 부로 이곳은 ‘수호의 여신’이 소유합니다.]33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