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41)
“자. 서로 잡담은 그쯤으로 해두렴.”
성기사와 나 사이로 지팡이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태고의 지팡이]는 무뚝뚝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71층에 올라가기 전에 마지막 설명을 들어.”
“아, 넵.”
“사왕. 당신이 입장하게 될 세계는 이미 성좌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어. 하지만 여태까지랑은 달라. 당신은 성좌들과 싸울 필요가 전혀 없어.”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요? 착한 성좌들입니까?”
“글쎄. 정확히 말하면 ‘싸울 수단이 없다’고 해야겠구나. 지금까지 당신은 인격이 있는 성좌들만 만나왔지. 비교적, 인간의 형태에 가까운 성좌들을. 하지만 71층부터 79층까진 [인격이 없는 성좌]들이 군림하고 있어.”
인격이 없다.
“그럼 물건이나 식물 같은 건가요?”
“비슷해. 세계의 법칙 그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중요한 건 당신이 그 성좌들이랑 싸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야. 심검(心劍)을 자유 자재로 쓸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면 모를까. 아직은, 아니지.”
“…….”
“내가 굳이 당신의 동료들 중에 이 기사를 소환한 이유는 단순하단다. 71층은 뭐랄까. [음악이 지배하는 세계]거든. 이른바 악천세계(樂天世界)라 불리는 곳이야.”
“호오.”
음악, 이란 단어에 먼저 반응한 건 파트리시아였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적임자라 할 수 있겠군. 자랑은 아니지만 이래 봬도 나는 우리 탑에서 가장 훌륭한 연주자 중 한 명이다. 이번에도 콘서트가 전석 매진을 찍었지. 탁월한 인선이다.”
파트리시아는 팔짱을 끼고 자신만만하게 [태고의 지팡이 ]를 쳐다봤다.
왜 저렇게 자신만만한 눈빛인가 하면…… 나도 잘 모르겠다. 다시 재즈를 공연하기 시작한 이래 파트리시아는 이전에 비해 좀, 많이 자유로워졌다.
“왜 나한테 자랑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아무튼, 그래. 사왕. 당신도 악천세계의 연주자가 되어 살아갈 거란다.”
“꼭 연주자여야 합니까?”
“직업선택의 자유 따윈 없어. 악천세계에선 모든 존재자가 연주자야. 모든 세계가 너희 동네처럼 자유발랄할 거라고 생각하진 말아 줘.”
그게 뭐야. 심한 세계로군.
“제가 파트리시아한테 피아노를 좀 배우긴 했어도 완전 초보 수준인데….”
“대부분 헌터들이 그래. 전문 분야를 제외하면 다 아마추어지.”
마법사는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수많은 헌터들이 70층 권역에서 좌절하는 거겠지?”
“……확실히. 일리 있네요.”
“걱정하지 마라, 김공자.”
파트리시아가 내 어깨를 두들겼다.
“말하지 않았나. 네가 아무리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어도, 나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합격 도장을 찍어줄 속셈이다. 혈화극이라면 모를까. 네가 평범한 음악으로 나를 감동시키기란 어차피 불가능하다. 마음을 편하게 먹어라.”
“묘하게 기분 나쁘구만. 어이.”
“사람은 자신의 재능에 겸손해져야 하는 법이다…. 가령 김공자. 너는 패션의 재능이 다소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너의 가죽 패티쉬는 심각한 지경이다.”
“365일 내내 갑옷 입고 다니는 사람한텐 듣고 싶지 않거든요?! 게다가 이거 아나스타샤가 지정해준 스타일이야! 나한테 뭐라 그러지 말라고!”
“과연.”
마법사가 턱을 깊이 끄덕였다.
“당신은 친구랑 내버려두면 끝도 없이 잡담을 떠는구나. 강제로 전송해야겠어.”
물컹, 발밑이 무너졌다.
[‘태고의 지팡이’가 당신을 전송시킵니다.]내려다보니 노란색 물감으로 철렁거리는 바닥으로 내 양발이 빠져들고 있었다.
“어? 어어어?”
“어서 가버리렴.”
순식간에 허리까지 잠겼다. 전신이 완전히 빠져버리기 직전, 파트리시아가 나를 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김공자! 비록 네가 패션에 재능이 없다고 해도 나는 괜찮다!”
“파트리시아…….”
“왜냐하면, 너는 사실 얼굴에도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너의 패션과 얼굴은 깔맞춤을 이루고 있다.”
“당신, 71층 클리어한 다음에 나 좀 봅시다.”
“잘 다녀와라.”
그리고 나는 밑바닥에 빠져들었다.
3.
[당신은 71번째 스테이지에 입장했습니다.] [당신은 본래 입장할 수 없는 장소에 발을 들입니다.] [소정의 페널티가 주어집니다.]눈을 떴다
그곳은 통상적으로 ‘천국’이라 하면 머릿속에 떠오를 것 같은, 마치 동화속 엘프 왕국을 수채화로 펼쳐놓은 듯한 마을이었다.
무척이나 조용하고.
죽음처럼 고요한.
[‘미궁에 거하는 눈’이 권능을 발현합니다.] [해당 스테이지의 일반 정보가 당신에게 공개됩니다.]생전 처음 발을 디더본 세계였지만 정보를 얻는 데 불편함은 딱히 없었다. 이미 최상급 성좌인 히시미트 크리츠가 내게 복종한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의 공기를 두 번째 들이마시기도 전에 문자들이 떠올랐다.
+
[악천세계(樂天世界)]층수: 71층
성좌: ‘천국을 노래하는 악장’
난이도: B~A+
해설(Lv.1): 모든 것이 음악으로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사려거든 판매자에게 ‘음악’을 들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음악일수록 가격이 높고, 형편없는 음악이면 가격이 낮습니다.
이 세상의 주민들이 섭취하는 영양분 또한 오직 음악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음악을 들으면 양분이 채워지고, 일주일 동안 음악을 듣지 못하면 굶어 죽습니다. 화폐. 음식. 권력.
그야말로 모든 것이 음악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십시오.
+
모든 것이 음악으로 이루어졌다라.
‘예전에 비해 훨씬 편리하네.’
히시미트 크리츠를 수하로 받아들인 이후, 정보 수집에 애를 먹는 일이 사라졌다. 이래서 성좌들이 권능을 빼앗기는 걸 그토록 두려워했던 걸까. 성좌계에선 새내기에 불과한 나조차, 파죽지세로 성장하고 있으니.
‘자. 그러면 어떻게 공략을…… 음?’
머릿속으로 루트를 짜고 있을 때였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권능을 발현합니다.] [폭로.]또다시 새로운 메세지가 당도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메세지였다.
[당신은 히든 정보를 획득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강제적으로 조건을 충족시킵니다!] [감추어진 정보가 드러납니다!]꾸물꾸물!
눈앞에 떠오른 글자들이 돌연 분해되고 재차 조립되었다. 새까만 지렁이처럼 허리를 움직이며 문자들은 새로운 의미로 변했다.
+
[악천세계(樂天世界)]층수: 71층
성좌: ‘천국을 노래하는 악장’
난이도: B~B+
해설(Lv.2): 모든 헌터가 수백 년을 넘게 사는 행운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죽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그렇다면, 탑에서 죽은 자의 영혼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이곳은 탑에서 죽은 영혼이 도착하게 되는 천국. 사후세계. 이른바 탑의 저승입니다.
+
나는 눈을 깜빡였다. 뭐?
‘저승이라고?’
입안에서 경악이 피어올라 혀가 경직되었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과 상관없이, 히시미트 크리츠는 계속해서 문자들을 수놓았다. 실뱀이 내 손목을 휘감은 채 꼬리를 살랑거렸다.
정보의 격류는 멈추지 않았다.
+
탑에는 9층의 저승이 존재합니다.
아홉 하늘의 천국이라 하여, 구천(九天).
탑의 인간들은 죽더라도 만일 그대로 사라지길 원하는 대신 어디엔가 계속 잔류하길 원할 경우, 그들은 구천을 떠돌게 됩니다. 구천 중에서 어떤 하늘 아래를 헤맬지는 전적으로 헌터의 마지막 소망에 달렸습니다.
이곳은 71층.
구천의 첫 번째 하늘. 악천(樂天)입니다.
+
거기까지 정보가 이어진 순간.
“■■■■!”
돌연 문자들이 요동쳤다. 꼬물, 실뱀이 혀를 낼름거렸다. 그리고 머리를 바싹 치켜든 다음 허공을 노려봤다.
히시미트 크리츠는 척 봐도 스트레스를 받은 기색이었다. 왜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물어뜯으려 하나 싶었지만, 곧바로 이유가 밝혀졌다.
[당신은 히든 정보를 획득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강제적으로 조건을 충족시킵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강제적으로 조건을 충족시킵니다!]나는 상황을 파악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히시미트 크리츠의 권능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것이 시스템의 간섭인지 아니면 이 스테이지를 관장하는 성좌의 방해인지 아직 알 순 없었다. 하지만 히시미트 크리츠는 전혀 기세가 죽지 않았다. “■■! ■■!” 도리어 이빨을 드러내며 그 무언가를 위협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강제적으로 조건을 충족시킵니다!] [당신은 히든 정보를 열람할 권리를 얻습니다.] [감추어진 정보가 드러납니다!]마침내 문자들의 동요도 진정되었다.
히시미트 크리츠는 ‘어디서 허접이 감히 나를 막으려 드느냐’ 같은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이제 내 존재의 가치가 [수호의 여신] 따위보다 훨씬 값지다는 걸 알겠지?’ 하고 뽐내려는 듯 글자들을 띄웠다.
+
[악천세계(樂天世界)]층수: 71층
성좌: ‘천국을 노래하는 악장’
난이도: B
해설(Lv.3): 악천. 삶에 지쳐버리고, 언어에 질렸으며, 대화에 신물이 난 영혼들이 당도하게 되는 하늘.
이제 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어를 믿지 않습니다. 서로 다가서려 하지도 않으며, 만일 다가선다면, 오직 음악으로 다가갑니다.
이곳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영혼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낮은 하늘을 가로짓는 민들레. 고개를 떨구고 있는 수선화. 냇가의 바위 그늘에서 족욕하는 가시고기. 모든 생명이 다만 환생(幻生)한 영혼입니다.
그들은 전생의 기억을 잊었습니다. 때때로, 어쩌면 항상, 꿈을 꿀 때마다 전생의 기억이 어스름한 안개처럼 피어올라 그곳에서 헤엄칠 뿐.
음악이 메아리치는 이 구천에서 지친 영혼들은 달래질 것입니다.
그들이 바란다면, 영원히.
+
과연.
“…….”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고요한 하늘 아래 철새들이 편대를 이루지 않고 낱낱이 떨어져, 각자가 가고 싶은 방향대로 날았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폭로해준 정보에 따르면 저것들도 영혼이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탑에선 죽은 다음의 거처까지 마련해버렸나.’
도처에 환생이 즐비했다.
마을로 이어지는 흙길의 양옆으로 꽃이 포개어졌다. 시리도록 새하얀 수국. 불두화(佛頭花)들이 줄지어 좌선하여 소리없이 염을 외고 있었다.
‘한 사람도 놓치려 들지 않는구나. 탑주는. 한 사람도.’
하얀 꽃이 많았다.
하양은 계절을 안 가렸다.
불두화들이 꽃잎을 오므려 합장했고, 그 뒤에서 아카시아가 고개를 떨구었다. 흰 상사화가 손끝으로 하늘을 오독오독 뜯었다. 벚나무는, 다 자란 손톱 같은 꽃잎을 깎아다가 허공에 버렸다.
색(色)을 버리고 싶은 것들이 전생을 지우고 있었다.
‘……하지만, 음악은 안 들려오는데.’
나는 울렁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딴 생각을 했다.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
71층에 올라온 이래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기이하게도 적막했다. 아까 히시미트 크리츠가 울부짖었을 때도 묵음으로 처리된 진동만 손목에서 전해진 것이었다.
-응? 조용하다고?
배후령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야? 난 거의 시끄러울 지경인데.
‘예?’
나는 흙길을 밟았다. 세상이 고요했으나 어디로 향해야 할지는 명백했다. 길 저편, 아련히 펼쳐진 마을 한복판에, 하늘을 뒤덮을 만큼 거대한 나무가 자라나 있었다.
세계수(世界樹)라고 할까.
거대한 나무통에 마을들은 다닥다닥 붙었다. 꼭 영지버섯이 층층이 자라난 것 같았다.
오러로 안력을 강화하여 바라보니, 나무로 만들어진 대계단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슴이나 기린 같은 동물도 아무렇지 않게 뒤섞였다. 모든 영혼이 식물로 환생하진 않은 것이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그렇다 쳐도 꽃들까지 노래하고 있잖아. 여기.
‘네?’
-잘 보니까 벌레들도 소곤소곤 노래하고 있어. 물론 굉장한 합창이란 건 인정한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질 것도 같아. 그런데 이런 스테이지는 개인적으로 취향이……. 아니. 잠깐만. 김좀비 너, 진짜 아무것도 안 들리는 거냐? 아무것도?
“…….”
설마.
나는 입을 열었다.
혀를 움직여 아아, 하고 고음을 내보았다.
“…….”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오러를 움직여서 청각을 보충했다. 인체의 청력을 이루는 기관을 다시 한 번 오러로 감싸서, 구멍이 날 틈조차 없이, 완벽하게 청각을 보충했다. 그리고 입으로 소리를 내었다.
“…….”
역시 아무런 소리도 안 들렸다.
청력이 고장난 것이 아니라, 마치, 청각 그 자체가 삭제된 것처럼.
‘제기랄.’
나는 깨달았다. 71층 스테이지에 떨어진 직후 떠올랐던 메세지인 [소정의 페널티가 주어집니다]가 무슨 뜻인지. 왜 히시미트 크리츠가 울부짖었는데도 나한테는 그저 ■■로 들렸는지.
‘저. 여기선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음악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소리 없이 클리어하는 것.
그리하여 연주자인 파트리시아의 마음을 얻어 신도로 만들 것.
이것이 내게 주어진 페널티였다.
34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