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50)
1.
또 다른 천국을 오를 차례라고 거창히 말했지만 사실 73층과 74층은 별볼일 없었다.
진짜 말 그대로 스테이지에 발을 딛자마자 ‘합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에이, 아서라. 너랑 붙어서 대판 깨진 게 얼마 전인데 내가 뭘 잘났다고 합격이니 불합격이니 심판씩이나 하냐? 그냥 어서 올라가기나 하셔.”
73층의 시험관을 맡은 헌터는 라오판. 천무문주 독사였다.
독사는 [태고의 지팡이]에게 소환되어 자기한테 심판 역할을 내려졌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오만상을 찌푸린 채 휘휘 손을 내저었다.
“자고로 패배자에겐 패배자의 도리가 있어. 생사결을 펼치고도 목이 안 날아갔으니 최대한 승자를 추켜세우고 기쁘게 해주는 게 세상의 법도지! 넌 나한테 합격 받을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73층은 약 2초 만에 클리어를 찍었다.
아, 참고로 73층은 무천세계(武天世界)란 곳이었다. 금천에서 모든 것이 거래로 이루어졌다면 여기선 세상만사가 전부 결투로 이뤄졌다.
일종의 발할라. 죽어서도 칼을 휘두르길 원하는 영혼들의 안식처다. 아마 검제와 같은 독종 무골들이 탑에서 죽었을 때 오게 되는 천국 아닐까?
[당신의 심판자로 선택된 이가 합격을 내립니다.] [당신은 심판자의 인정을 받았습니다.]빠른 클리어 감사합니다.
“여기 왔다는 기억을 잃게 되는데 별로 상관없습니까?”
“엉? 사람이 살면서 잊어버리는 기억이 얼만데. 상관없어, 상관없어.”
독사는 쿨하게 떠났다. 정말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것처럼. 자기 기억을 몹시 소중하게 여겨 끝까지 밍기적거렸던 백작과는 대조되는 성격이었다.
뭐, 73층은 나중에 강자랑 붙고 싶어서 좀이 쑤시면 다시 가자. 결투야 지금까지도 질리도록 했으니 딱히 아쉬울 것도 없지. 적어도 당장은.
그다음 스테이지였던 74층에 관해 말하자면…….
“아하핫! 천국이라니! 흥미로운 개념으로 만들어진 곳이군요!”
웃음소리만 봐도 정체를 짐작하겠지만 바로 밤볼리나, 이단심문관이 심판을 맡았다. 밤볼리나는 [태고의 지팡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 받고 활짝 웃었다.
“하지만 스테이지 클리어 조건이 저의 인정에만 달려 있다면,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님. 앞뒤 가리지 말고 올라가십시오!”
나를 만나고 여러모로 변화했어도 여전히 이단심문관은 효율을 중시했다. [스테이지의 숨겨진 비밀]이라거나 [자신을 진심으로 탄복 시키는 퀘스트 진행]엔 관심이 없었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좋군요! 그래서 거기에 어떤 이득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볼 아이니까.
이단심문관이 눈여겨본 건 좀 더 실용적인 부분이었다.
“잠시 뵙지 못한 사이에 성좌를 몇 명이나 더 굴복시키다니, 굉장합니다! 이참에 주인님의 이명을 사왕에서 성엽사(星鹽師)로 바꿔야 되지 않을까요?”
이단심문관의 눈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수호의 여신]으로 경매에 참여했다는 것도 훌륭합니다. 어떻습니까, 주인님? 휘야가 보유하고 있는 스테이지 중 한 곳을 하무스트라한테 하사하십시오. 그럼 우리 탑에서 쓸 수 있는 성좌만 해도 [수호의 여신], [미궁에 거하는 눈], [폐허를 추수하는 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 [방구석 도서관장] 등등이 됩니다. 멋진 전력이 되어줄 테지요!”
“어…. 안 돼요. 그건 좀 곤란합니다.”
나는 우부르카의 성좌명은 언제 들어도 끔찍하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전 하무스트라가 사람의 삶을 겪어보길 원합니다. 아무리 못해도 수십 년은요. 하무스트라가 [방구석 도서관장]으로 복귀하면 그야 엄청난 도움이 되겠지만 그건 하무스트라의 발전에 소용이 없어요. 본인이 원한다면 모를까.”
“으으음……. 과연. 주인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군요….”
내 의지가 확고한 걸 느꼈는지 이단심문관도 더 강권하진 않았다. 입맛을 다셨을 뿐.
기본적으로 이단심문관은 내 의사를 절대적으로 받들고 있었다. 좀 극단적인 얘기지만, 만약 내가 성좌가 되라고 명령한다면 ‘알겠습니다! 30년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대답할걸.
그런 이단심문관이 심판하게 된 74층은 법천세계(法天世界)였다.
여긴 결투만 벌이면 해결되는 무천세계와 달리 다소 복잡했다.
히시미트 크리츠가 폭로한 정보에 따르면, 법천세계의 법칙은 다음과 같았다.
+
[법천세계 (法天世界)]층수: 74층
성좌: ‘비헌법재판관’
난이도: C~A+
해설(Lv.1): 모든 것이 법칙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은 누구나 물리법칙에 버금가는 세계법칙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단, 살아가면서 오직 한 번만.
여기선 누구나 일생에서 단 한 번은 입법의 권능을 가집니다.
‘서로 간에 싸움을 영원히 금지한다’는 법칙을 누군가는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싸움이 금지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서로 간에 싸움을 영원히 금지한다는 법칙을 없앤다’라고 말하면, 그 길로 법칙은 다시 무효화됩니다.
무효화되면 끝입니다! 일생에서 두 번이나 입법할 순 없으므로, 자신의 일회용 권능을 어떻게 써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법칙이든 마음대로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몇 가지, 예외적으로 불허되는 법칙들도 있습니다.
불가능한 법칙의 예시를 3가지만 들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폭군 금지! 다른 사람들의 입법권을 부정하는 법칙은 인정되지 않습니다.(ex: ‘이 세계에서 오로지 나만이 법을 세울 수 있다.’)
-똑똑한 알라딘 금지! 일회용 입법권을 무한정 늘리는 법칙 또한 불가합니다.(ex: ‘나는 100번 입법할 수 있다.’)
-욕심쟁이 금지! 다른 사람이 세운 법칙을 무효화하는 건 인정됩니다만, 한 번에 두 개 이상의 법칙들을 없애버릴 순 없습니다.(ex: ‘지금까지 세워진 모든 법칙을 제거한다.’)
이런 예외들을 제외하면, 당신은 무엇이든 소원을 빌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법칙을 인정한다면 말입니다. 그냥 당신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일생의 권한을 써버리는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간을 잘 보십시오!
+
……그저 정보만 접했을 뿐인데도 굉장히 난감한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뭐 어떻게 해야 클리어 각이 보일지도 모르겠으니.’
과연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법칙들이 도사리고 있을까?
예컨대 [오러 사용을 금지한다]라는 법칙이 반드시 있을 거다. 오러를 쓸 줄 아는 사람보다 쓸 줄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 중과부적이다. 그러면 당장 나부터 가장 큰 무기를 잃어버리고 시작한다.
어디 그뿐인가? [스킬 사용을 금지한다]는 법칙도 수립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내 주위에 워낙 괴물 같은 헌터들만 득실거려서 그렇지, 사실은 스킬 하나를 터득하는 것도 기연이다. 대다수는 스킬이 없다.
과연 사람들이 스킬을 용납할까? 아서라. 설령 용납되더라도 [스킬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힐 수 없다]는 법칙 정도는 세워졌을 걸.
‘이런 위험한 장소엔 애초부터 오래 안 머무르는 편이 나아!’
자고로 군자는 위험한 곳에 들어가지 않는 법.
내 이름은 공자니까 군자 중의 군자라, 행차를 조심하는 데 거리낌이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어. 무슨 개소리냐면, 그래서 얌전히 이단심문관의 합격 도장을 받았다고.
[당신의 심판자로 선택된 이가 합격을 내립니다!] [당신은 심판자의 인정을 받았습니다!]이단심문관은 “행운을 빕니다! 아하핫!” 하고 쏙 사라졌다.
몸 주인이 사라진 곳에 웃음소리가 남아 한동안 잔향을 일으켰다. 독사에 이어서 연달아 초고속 클리어가 이뤄진 것이다.
그럼 이쯤에서 내가 70층대 권역에서 잡은 전략을 알 수 있다.
관심이 생기면 머무른다. 필요가 있다면 공략을 심화한다. 하지만 만일 그럴 필요가 없다면, 기꺼이 건너뛴다.
웬만큼 신기한 천국이 아니라면 75층도 스킵할 작정이었다. 따라서 이 또한 쉬이 짐작할 수 있겠는데, 75층에선 바로 그 웬만한 별일이 벌어졌다.
먼저 75층의 심판관으로 불려나온 헌터를 소개하겠다.
“여, 여긴 어디죠? 왜 갑자기 제가 소환된 거지요? 히익…… 다, 당신은 누군가요!? 이제 와서 절 납치해봤자 연금성(鍊金省)의 운영은 제 손에서 떠났어요! 전 약 개발만 담당할 뿐이지 판매나 유통엔 관여 안 한다구요! 전 그냥 20층에서 가게만 가지고 있으면 그걸로 만족하는데……! 어, 어째서 세상은 저의 작은 소망조차 배려하지 않는 건가요!?”
그 헌터는 소환되자마자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머리를 감쌌다.
과민한 반응이 아니냐 말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럴 만했다.
나는 물론이고 백작 등의 길드장들도 저 헌터의 재능을 인정했다. 비록 최전선에서 칼을 쥐진 않았으되 누구 못지않게 탑 공략에 기여했으며, 실시간으로 기여하는 중이며, 무엇보다 [천마실록]을 깨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헌터.
“……어? 고, 공자 씨?”
약제사가 한박자 늦게 내 존재를 깨닫고 멍하니 쳐다봤다.
“제가 지금 어디로 오게 된 거죠……?”
나는 활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긴 사후세계의 입구입니다.”
약제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왜. 딱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2.
딱 한 번의 농담은 나한테 거센 후폭풍으로 돌아왔다.
약제사는 내가 구라를 쳤다는 가능성을 상정조차 안 했는지 여기가 저승문이란 얘기를 듣고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당연히 정신을 차리고서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되자, 약제사는 나한테 냉수처럼 화를 냈다.
왜 불처럼 화를 낸 게 아니라 냉수처럼 화냈다고 표현하느냐 하면, 음, 약제사의 분노는 이런 식이거든.
“이제부터 공자 씨한테 특효약 공급하는 걸 중단하겠어요.”
“죄송합니다!”
약제사는 차갑게 식은 안경알 너머로 나를 내려봤다.
“공자 씨한테 제공하는 표션들에서만 딸기맛을 없앨 거예요. 쑥맛 어떤가요? 시금치맛에 관심 있으세요…? 개구리 눈알맛? 모기 날개맛? 아니면 독감 4일차의 콧물맛을 구현해드릴까요…?”
“그, 그런 바깥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판타지 소설의 초콜릿 같은 플레이버를!”
“하아…….”
약제사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꼭 옆집에 사는 말괄량이 꼬맹이를 대하는 듯한 취급이군. 한번쯤 콧물 포션을 먹어보고 싶다 생각하는 시점에서 그리 틀린 취급은 아니다.
뭐든지 경험인걸. 고급지게 말해서 익스페리언스다. 익-스페리언스. 마침 마법 주문이랑 닮지 않았나?
“아무튼 제가 뭘 해야 할지는 알겠어요. 탑에 천국이, 그것도 여러 개의 천국들이 있다는 건 많이 놀랍지만…….”
원래 탑이란 놀라운 장소겠지요. 약제사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심판역으로 불려나온 사람들 중에 아무도 입에 담지 않은 말을, 그러나 누구든 머릿속에 떠올렸을 법한 말을 꺼냈다.
“공자 씨. 저희도 죽으면 이곳으로 보내지는 걸까요?”
“…….”
“기억을 잃어버린 채. 전생 같은 과거를 잊은 채. 각자의 성격에 따라, 소망에 따라, 아홉 개에 이르는 천국들로 뿔뿔이 흩어지는 걸까요.”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약제사의 말투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지금의 세상에서 뿔뿔이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씁쓸함이 훨씬 더 짙게 배어 있었다. 망각과 작별. 죽음이란 건 사실 그 두 가지 단어를 한데 묶은 것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으으.”
약제사는 상념에 잠겼다가 도리도리 고갯짓을 쳤다.
“이런 걸 생각해도 소용이 없겠죠. 알았어요, 공자 씨. 마음 놓고 스테이지에 오르세요. 만약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합격을 인정해드릴 테니 돌아오시구요.”
“……음. 다녀오겠습니다.”
“네, 고생하세요. 조심하라는 말은 안 할게요. 죽지 않고 숨줄만 붙어 있으면 제가 살려놓을 수 있으니까…. 적당히 목만 보존하세요.”
작지만 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이 이젠 내 성격을 잘 아는구나.
하긴 약제사랑도 알고 지낸 지 꽤 됐다. 내가 회귀하자마자 친해지려고 노력한 사람이 약제사였지. 내가 없었다면 약제사는 한참 고생하다 나중에야 성공했을 테고, 약제사가 장만해준 감각증폭 포션이 없었으면 나도 오러를 깨우치기 어려웠을 테니, 우리는 성공을 함께 나눈 동지였다.
“옙.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약제사에게 손을 흔들며 곧장 다음층으로 향했다.
밑바닥이 꿀렁거리며 내 몸을 집어삼켰고.
[당신은 75번째 스테이지에 입장했습니다.] [당신은 본래 입장할 수 없는 장소에 발을 들입니다.]눈을 떴다.
“……?”
그리고 나는 눈을 뜨자마자 이변을 눈치챘다.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엥?”
온 세상이 흑백(黑白)으로 되어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유채색이 없었다. 오직 무채색. 그것도 흑색과 백색만이 선명하게 줄지었다.
만일 색깔이 알록달록하지 않을 뿐이라면 나도 놀라지 않았을 거다. 여태껏 기상천외한 풍경을 하도 많이 접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세상이 평면이었단 거다.
“어어? ……어라?”
그것도 좀 많이 평면이었다.
적나라하게 밝혀서 [2차원 평면]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물상(物像)이 3차원으로 안 잡혔다. 계속 눈을 깜빡거리니까 새로운 차원에 뇌가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는데, 마치 모니터에 횡스크롤 RPG 화면이 비추듯 세상이 인식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3인칭 시점으로 내 시야가 한정되어 버린 것이다.
“뭐, 뭐야. 이거?”
나는 본능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꾸물.
그러자 화면 한복판에 뭔가가 꾸물거렸다.
화면 한복판의 ‘그것’이 움직이자 화면도 덩달아 이동했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는 네모낳게 한정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동하면 시야도 함께 이동하여, 새로운 경치가 조명되었다. 그래봤자 거기도 어린애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린 것처럼 산은 △△△로 표현되고 구름은 OOO로 표현됐지만 말이다.
그리고 화면 한가운데에 놓인 ‘그것’은,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묘사하자면…….
맨위엔 (‘-‘) 있었다.
그 아래는 ㅡ. 수평으로 작대기가 그어졌다. 작대기의 양쪽 끝에는 삼지창이 달렸는데 이걸 그림으로 표현하면 ∋ㅡ∈였다.
다음으론 한동안 수직선이 이어졌다. 수직선은 양갈래로 나뉘었고, 이 횡스크롤 세상의 땅바닥을 굳게 딛고 서 있었다.
놀랍게도 내가 발을 움직이면 ‘그것’의 아래쪽이 움직였다. 내가 팔을 움직이면 삼지창이 움직였다.
설마.
혹시나 하고 내가 입을 뻐끔거리자.
(‘д’)
곧바로 ‘그것’의 표정이 바뀌었다.
“…….”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가끔 피치 못할 결론에 이르고는 한다. 지금 내 경우, 이 순간 마주하게 된 진실은 참혹하지만 이거밖에 없었다.
“……이, 이게 나야!?”
그러자 2차원 화면 한복판의 졸라맨이 지 딴에는 정교하면서도 역동적인 표정을 지었다.
∑(°v°)!?!?
아니.
너 왜 쓸모없이 귀엽냐….
35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