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51)
3.
졸지에 2차원 졸라맨이 되어버린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황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진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이보다 더 평면일 수 없을 만큼 평면이었으며 나는 이보다 더 졸라맨일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졸라맨이었다.
바보 「오, 신기하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졸라맨으로 전락해버린 자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배후령도 졸라맨 귀신이 되었다.
내가 실선이었다면 배후령은 점선으로 표현됐다는 게 그나마 차이점이려나?
참고로 배후령은,
ヘ(一▽一ヘ)
이 따위 표정이나 짓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열받는 것이 참으로 배후령스러운 이모티콘이었다.
배후령의 머리 위로 말풍선이 모락모락 풍겼다.
바보 「지금 내 눈에는 요놈의 세상이 종잇장에 그려진 그림처럼 보인다만. 좀비야. 너한테도 그리 보이냐?」
“아, 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의뭉스러워 했다.
“저한테도 똑같이 비춥니다. 그런데 왜 말풍선으로 얘기해요? 목소리로 말하지 않고.”
바보 「응? 나한테는 너야말로 말풍선으로 얘기하는 걸로 보이는데?」
어라.
배후령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딱히 거짓말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정말이에요?”
바보 「엉. 너가 말할 때마다 네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 목소리는 안 들리고.」
“아아……. 과연. 어쩌면 이 세계에선 자기 자신의 목소리만 들리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이 스테이지엔 소리조차 없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모든 것이 소리로 들리는 대신 문자로 표시되는 것이다. 꼭 만화와 같이.
자기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은 가능하지만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불가능. 둘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길래 이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다.
여우님 「삐약.」
실뱀 「끼에엑.」
성좌들도 똑같았다. 울음소리가 말풍선으로 치환됐다. 그리고 말풍선 옆엔 사람의 이름이 적혔다.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이 아니라 여우님으로, [미궁에 거하는 눈]이 아니라 실뱀으로 호명된 걸 보면 아마 ‘객관적인 이름’이 적히는 건 아닐 테지. 내가 편하게 여기는 이름으로 표시되고 있다.‘잠깐만. 그럼 배후령의 이름이 바보로 표현된다는 건…?’
나는 배후령을 돌아봤다.
배후령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바보 「음? 뭘 쳐다보냐.」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댁이 말풍선이랑 잘 어울린다고요.”
나는 시치미를 뚝 뗐다. 세상엔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는 진실도 있는 법이지. 긁어부스럼이다.
바보 「그래? 하긴. 내가 좀 뭘 해도 멋진 놈이긴 하지.」
“어쨌든 여기서 뭘 해야 할까요?”
배후령을 내버려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四方)을 두리번거린 게 아니라 이방(三方)을 둘러봤다고 해야 할까. 본래 세계와 달리 여기선 왼쪽, 오른쪽, 두 방향으로만 이동할 수 있었다.
내 눈에 비친 광경을 그림으로 간단히 표현하면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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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왼편에 보이는 건 산. 멀리서 몽글몽글게 떠다니는 건 구름. 산과 구름 아래에 양옆으로 쭈우욱 펼쳐진 밑변은 지평선. 요컨대 땅이다.
뭐랄까, 참. 심플한 세상이로군.
바보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아무튼 나아가볼 수밖에 없지 않겠냐?」
무공밖에 모르는 바보가 말했다.
바보 「여기도 저승이잖아. 그럼 어딘가에 영혼들이 모여서 살고 있겠지. 안그래? 뭐,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야 이런 장소를 천국으로 여기게 되는 건지는 도통 모르겠다만.」
“오케이. 일단 이동합시다.”
나는 앞으로. 아니, 오른쪽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물론 뚜벅뚜벅 소리가 들린 건 아니었다. 오른발을 내딛자, 이번에는 마치 만화에서 효과음이 표현되듯이 「뚜벅」이란 글자가 떠올랐다.
“우와. 발소리 같은 거까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냐….”
시험 삼아서 발을 크게 디뎌봤다. 그러자 「뚜벅!!」하고 큼직한 글자가 표시됐다. 폰트도 웅장하고 사나웠다.
반면 도둑걸음질을 쳤을 때는 「또박… 또박…」하고 글씨가 작게 떠올랐다. 폰트 역시 얌전했다.
“굉장하구만.”
정말 문자 그대로, 뭐든지 평면상에서 표현되는 천국이라니.
주민A 「오. 우리 마을에선 처음 보는 얼굴이군. 여행자인가?」
한참을 걷고 나니 사람과 마주쳤다.
처음으로 이 세상의 현지인과 만난 것이다.
주민은 나와 다를 바 없이 작대기 졸라맨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뭔가를 든 채 땅바닥을 내리찍는 중이었다.
주민이 손에 든 도구는……. 검? 삼지창? 아니다. 땅을 파는 걸 보면 갈퀴일 확률이 높다. 저 사람은 지금 갈퀴로 밭을 갈고 있는 거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나는 머리를 꾸벅 숙였다.
“그런데 혹시 제 얼굴이 구분되시나요?”
주민A 「음? 얼굴?」
“예. 저를 보시자마자 초면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왜, 다른 사람들이랑 제가 쉽게 구분되시는 건가 싶어서요.”
주민A 「허? 그야 물론일세. 다른 사람과는 아주 잘 구분되지. 이상한 걸 물어보는군.」
농부는 당연하다는 어투로 대꾸했다.
(一□一)?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 내 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정말로 기이한 감정에 휩싸인 쪽은 나였다. 난 아무리 집중해서 농부의 얼굴을 살펴봐도 딱히 내 작대기 페이스와 구분하기 어려웠다. 세상에, 여기 사람들은 작대기만 보고도 뭐든 잘 알아보는 거냐.
주민A 「그보다 우리 마을에 출입하려거든 몇 가지 절차를 걸쳐야 한다네.」
“절차, 입니까?”
주민A 「뭐 어려운 건 아닐세. 그저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주기만 하면 돼. 혹시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 우리 마을을 방문했는가?」
나는 바로 머리를 저었다. 도리도리, 라는 효과음이 피어올랐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주민A 「좋군.」
농부가 흔쾌히 말했다. 마치 내 대답으로 모든 의혹이 말끔하게 개였다는 듯, 이 이상 추궁할 필요 따원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주민A 「계속 질문하겠네. 우리 마을에서 난동을 부릴 생각이 있는가? 다른 주민들과 불화를 일으킬 것인가?」
“엑. 아니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 쪽에서 저를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에야….”
주민A 「좋네. 만일 원치 않은 불상사가 생길 경우엔 우리 마을의 관습과 법규에 따라 성실히 조사 및 재판에 임할 것을 맹세할 수 있나?」
“당연하죠.”
주민A 「오오. 훌륭한 여행자로군!」
농부가 웃었다. 왜인지 매우 만족한 낯이었다. 그는 내 어깨를 팡, 팡, 두들겼다.
주민A 「설령 외부인이라 해도 자네 같은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지. 어서 오게나! 우리 마을에선 자네를 환영한다네!」
“어어…….”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반겨준다니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됐다.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 둘은 기껏해야 몇 가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그 이상의 취조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단순문답으로는 내가 어떤 인물인지 절대로 알 수 없다. 내 대답에 진심이 담겼는가 어땠는가도 모를 텐데. 어째서.
실뱀 「끼이익.」
그때였다. 나의 의아한 마음을 헤아렸는지 실뱀이 반응했다. 내가 궁금해하는 부분을 알고 있으며, 그에 따른 해답도 알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권능을 발현합니다.] [폭로.] [해당 스테이지의 정보가 당신에게 공개됩니다.] [감추어진 정보가 드러납니다!]화면 한쪽에 창이 띄워졌다. 설명창이었다. 반듯하게 네모로 각진 설명창에 좌르륵, 좌르륵, 글씨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
[진천세계(眞天世界)]층수: 75층
성좌: ‘얼굴 없는 지휘자’
난이도: B~A
해설(Lv.1): 그림과 문자로 이루어진 평면 세계.
해설(Lv.2): 이곳은 탑에 마련된 사후세계 중 하나입니다.
해설(Lv.3): 진천. 거짓과 위선에 지친 영혼들이 도착하게 되는 저승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상대방의 말에서 진실을 모색하는 데 지쳐버린 자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매번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일에 탈력해버린 자들, 복잡한 인간세상을 싫어하게 된 자들은, 죽고 난 뒤 이곳에 정착합니다.
진천세계에선 결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
아.
그런 거였나.
의문이 단숨에 해소됐지만 아직 설명창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히시미트 크리츠가 폭로해준 정보를 계속 읽어나갔다.
+
이 천국에 발을 들인 이상, 당신은 상대방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대의 진의에 관하여 의심할 필요 또한 없습니다.
그저 물어보십시오.
진솔한 대답이 돌아올 것입니다.
상대방은 미묘한 표정과 정교한 말투로 자신의 진의를 왜곡할 수도 없습니다. 이곳에선 어떠한 표정과 말투도 전부 ‘적나라하게’ 표시 되니까요.
이곳에선 당신과 타인의 외모마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습니다.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당신은 교묘하게 표정을 연기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교언영색(巧言令色) 따원 이 땅에서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인간에게 지쳤고, 인간이 되는 일에 지쳤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자를 위하여 이 천국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대에게 안식이 있기를.
+
주민A 「곤란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게나!」
농부는 갈퀴를 짊어매고 걸어갔다. 뚜벅뚜벅. 어느덧 농부는 화면 바깥으로 나가, 더 이상 나의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구나.”
나는 농부의 이상한 행동을 전부 이해했다. 그리고 방금 얻은 정보를 배후령과 공유한 뒤에 말했다.
“단순히 저와 문답을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이 세계에선 충분한 겁니다. 어차피 제 말은 몽땅 다 진실이니까요. 문제를 일으킬 생각이 없다, 는 대답만 얻으면 딱히 제가 외부인이어도 경계할 이유가 없는 거죠.”
바보 「과연.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세계라….」
무공바보는 팔짱을 낀 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 「대부분의 헌터는 속이 음험하니까 말이야.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조건이 죽을 만큼 괴로운 헌터들도 많겠지. 물론, 나 처럼 마음이 시냇물보다 맑고 언제 어디서나 진심밖에 말하지 않는 인간에겐 전혀 어려운 스테이지가 아니다만…….」
“네?”
바보 「응?」
우리는 대화를 나누면서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바보 「좀비야. 너 한번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해봐라.」
“또 뭔 이상한 걸 시키려고요?”
바보 「검제님은 너무 멋져서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는 존경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해봐.」
이 양반이 미쳤나.
바보 「아 제발! 쫌! 어서. 빨리. 지금 당장. 롸잇 나우!」
배후령이 독촉했다. 진심이 담긴 독촉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검제…….”
그리고 입을 연 순간, 쿠웅! 막대한 충격이 내 온몸에 전해졌다.
[금지!] [당신은 이 세계의 규칙을 어길 수 없습니다.] [당신은 거짓말을 발언할 수 없습니다!]“…….”
나는 곧바로 입이 다물렸다. 자발적으로 입을 다문 게 아니기에 다시 시도해봤지만, 뻐꿈, 입이 소리없이 움직일 뿐. 배후령이 제발 말 해달라고 부탁한 문장은 도저히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바보 「어이. 김좀비.」
그 모습을 배후령은 짜게 식어버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바보 「너…… 설마. 검제님이 ‘너무 멋져서’에서 말이 걸린 것도 아니고, 검제님을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에서 걸린 것도 아니라……. 그냥 검제‘님’에서 말문이 막힌 거냐!?」
젠장.
바보 「나한테 ‘님’ 자를 붙일 수도 없어?! 검제님, 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너한테는 거짓된 마음이냐! 어!?」
“아, 당연하죠. 상식적으로 어떻게 댁을 님이라 부릅니까? 네? 양심이 가출해서 동해를 건너 태평양을 헤엄쳐 하와이까지 갔어요?”
바보 「맙소사. 네가 인간이냐? 내가 네놈한테 가르쳐주고 베풀어준 게 얼만데 나를 마음속에서 얼마나 깔보고 있는 거냐!」
“아니……. 잠깐만. 기다려봐. 그러는 댁도 방금 나를 ‘김좀비’라고 불렀잖아요! 진심으로, 한점의 거짓 없이 마음속으로 나를 좀비로 취급하고 있다는 뜻이잖아! 댁이야말로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바보 「난 그래도 되지만 넌 그럴 수 없다!」
“저리 꺼져!”
참고로 우리는 마을을 지나치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둘이 말싸움으로 투닥거리는 모습을 주민들은 무료로 관람했다. 주민들은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쳐다봤다.
(‘ ロ ‘ ? ) ‘ㅅ’ )/”); ,(๑˃̵ᴗ˂̵), ( ͡° ͜ʖ ͡°)
딴 사람은 몰라도 마지막 주민은 왠지 모르게 짱난다….
심지어 말풍선까지 「ㅎ」라고 표시되어 있다. 뭐지?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건가.
주민F 「거기. 자네!」
마을을 다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멀찍이 서 있던 주민 중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달리 말해 말풍선을 큼직큼직하게 띄우며, 허둥지둥 달려왔다.
“네?”
주민F 「그 이상은 걸어가지 말게나!」
마을 주민은 땀(;)을 잔뜩 흘리며 나를 제지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 화면 저편, 오른쪽 방향을 지목했다.
주민F 「거기엔 미친놈이 살고 있다네!」
35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