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55)
7.
미친 무사와 관련된 뒷처리를 하고 나자, 내게는 덩그러니 빈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세상 한켠으로 눈길을 돌렸다.
[당신은 언제든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할 수 있습니다.]거기엔 그런 문자가 떠올라 있었다.
내가 손을 휘젓자, 모래알이 흩어지듯 글자가 물러났다. 그리고 땅 한복판에 서서(내가 움직이면 세상도 함께 움직이기에 어차피 나는 항상 한복판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두커니 생각에 잠겼다.
바보 「뭐 해? 로비로 안 돌아가냐?」
나 「아뇨. 갑자기, 저도 99층 정도에서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바보 「…」
나 「저는 꽤 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지금의 저라면 깨달음을 얻기 전의 스승님과 칼을 겨룰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 저보다, 그런 스승님보다, 댁은 반 수나 더 강하단 말이지요. 검제 양반. 하지만 댁 같은 사람마저 99층에서 죽었어요.」
도대체 뭐가 99층에서 기다리기에 검제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지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지점. 거기서 불안감이 독버섯처럼 피었다.
나는 배후령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 「99층에 뭐가 있는 건가요? 아직도 저한테 말해줄 수 없습니까?」
바보 「………」
나 「말해주면 저도 대비할 수 있어요. 대책을 세울 수 있죠. 안 그래요?」
바보 「흐음. 글쎄. 죽음이라….」
배후령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바보 「일리 있는 말이다만, 일리밖에 없군.」
나 「뭔 소리여?」
바보 「그냥 내가 너한테 99층의 진실을 말해주기 싫음.」
나 「진짜 꼬맹이입니까, 당신!?」
바보 「됐고. 좀 걷자.」
나 「아니 걷긴 뭘 걸어요. 댁은 귀신이어서 걸을 수도 없잖…….」
그리고 나는 배후령과 만난 이래 처음으로 어떤 모습을 목격했다. 어찌 보면 놀라운 광경이었으며,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풍경이었다.
거의 언제나 항상 공중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던 배후령이, 뚜벅뚜벅, 땅을 걸었다.
바보 「따라오지 않고 뭐 하냐?」
나 「아니…… 댁, 몸도 없으면서. 어떻게.」
아무리 봐도 배후령은 정말로 걷는 것처럼 보였다.
나 「혹시 몸을 얻었습니까? 제가 탑을 오를수록 당신도 점점 더 신체를 얻어간다든지. 그런….…」
바보 「멍청아. 그 경지까지 올랐으면서 아직도 까막눈이냐. 난 그냥 걷는 척하고 있을 뿐이야.」
나 「네에?」
바보 「쯔쯧, 말해서 무슨 소용이겠어. 그냥 따라오기나 해.」
배후령이 등을 돌려서 걸어 나아갔다. 나는 말 그대로 귀신이 홀린 듯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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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이어지고 구름이 흘러갔다. 세상이 소리가 없듯 배후령은 말이 없었다. 나는 말없는 남자의 등을 역시 말없이 쫓았다.
바보 「너와 나의 차이가 반 수에 불과하다고 저 땡무사가 말했지.」
한참 걷고 나서야 배후령이 입을 열었다.
바보 「좀비야. 너는 그 반 뼘 어치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냐?」
나 「심검(心劍)이라고 생각해요.」
바보 「맞아. 심검이다. 나는 심검을 쓸 수 있고, 네 스승도 눈을 감기 직전에 심검을 터득했지. 그러면 어떻게 심검을 깨우쳐 자유로이 휘두를 수 있을까?」
나 「…….」
나는 본능적으로 이 대화가 무척, 더없이 중요하다는 걸 감지했다. 그렇다. 배후령은 지금 내게 무언가를 가르치려 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처음 오러를 깨우쳤을 때처럼.
나 「심검은 마음의 칼이지요. 칼에 마음을 담으면 되지 않을까요?」
바보 「넌 이미 마천신공의 극의에 이르렀다. 마천신공을 자유자재로 파훼하여 진법까지 창안했지. 칼에 마음을 담는 분야에 있어서 너는 딱히 나와 유의미한 차이가 없을걸.」
나 「그렇다면 담는 마음의 종류에 달린 문제입니까?」
바보 「멍청아.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어라.」
터벅. 터벅.
나는 배후령을 쫓다가 뭔가를 눈치챘다. 멀다. 멀었다. 배후령의 등이 아까보다, 아주 조금 더 멀어져 있었다.
나 「…….」
보폭은 달라지지 않았다. 배후령이 걷는 모양새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어째선지 지평선을 가로짓는 발의 속력이 달라진 것이다.
나는 배후령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발놀림을 빠르게 했다.
바보 「평생 수련을 해도 심검을 구경조차 못 해보는 무인이 태반이다. 태반이 뭐야. 그냥 99.99%지. 그런데 너는 개쩔게 운이 좋아서 심검을 두 번이나 견식했잖아? 그럼 거기서 깨달음의 단서를 잡아야지.」
나 「두 번…….」
바보 「오냐. 내 것이야 심상에 불과했다니 뭐 일단 논외로 치자. 하지만 네 스승은? 네 스승이 마지막으로 너한테 심검을 보여주고 세상을 떠나지 않았냐.」
터벅, 터벅.
배후령의 등이 더욱 멀어졌다. 여전히, 배후령은 그저 일정한 보폭으로 걸을 뿐이었다.
나 또한 속력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바보 「물어보마. 그때 네 스승에게 내공이 남았었냐?」
나는 스승님의 어깨를 마지막으로 안았을 때를 떠올렸다. 죽어서는 안 될 무언가가 내 품안에서 죽어가는 감각을. 힘든 기억이었지만,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이란 원래 힘든 것이었다.
나 「아니요.」
바보 「네 스승은 진원진기를 깨트려 썼지. 그때 네 스승에게 진기가 남았더냐?」
나 「……아니요.」
바보 「그때 네 스승에게 체력이 남았느냐?」
나 「아닙니다. 스승님께선 기력이랄 게 전무했어요.」
바보 「그래. 내공도 진기도 체력도 없었다 이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네 스승은 심검을 쓴 것이지? 어째서 설산이 갈라진 거냐? 태산이 마천의 교주에게 감읍하여 스스로 갈라진 것일까.」
나 「…….」
나는 이를 악 물었다.
고민이 깊어져서 이빨이 으득거린 게 아니었다. 어느덧 배후령이 너무나 빨라져서, 전속력을 다해 달리지 않으면 단숨에 시야 너머로 사라질 정도가 되어서, 이를 물고 경신술을 써야만 했다.
터벅! 터벅!
바보 「네 스승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나 「바깥에서 끌어다 쓰신 것이지요.」
풍경이 쉴 새 없이 빠르게 지나쳤다.
나 「내기(內氣)가 없다면 외기(外氣)를 쓸 수밖에 없어요.」
바보 「그래. 당연한 귀결이지.」
구름이 지나치고 산과 숲이 지나쳤다. 수많은 마을을 지나쳤다.
우리 두 사람이 바람처럼 지나칠 때 누군지 모를 마을사람들이 경악했다. 마을을 지날 적에는 배후령도 나도 속력을 잠시 낮추었지만,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마을 어귀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빨라졌다.
바보 「외기가 무엇이냐?」
나 「자연……. 생명력, 그런 것 아닙니까?」
바보 「오, 굉장하군. 그딴 추상적인 어휘로 용케도 호모 사피엔스 흉내를 내는구만.」
나 「이 바보 귀신이…….」
바보 「내공은 달리 말해서 오러다. 너의 의지를 구현한 것이지. 네가 마음속에 품은 심상을 글자로 적어다가 종이 위에 새기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종이가 세상이면 글자는 오러다. 그렇다면 외기란 뭐냐?」
터벅.
바보 「이 세상의 의지라고 부를 만한 것이 뭐 있냐?」
그 순간, 나는 불현듯 혀가 움직였다.
나 「성좌.」
바보 「………」
나 「성좌로군요. 성좌예요. 성좌는 세상의 법칙을 규정합니다. 아니, 세상의 법칙을 규정하는 성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테이지의 주인이고, 스테이지가 하나의 세상이라면, 한 세상의 주인이에요. 그들이 의지를 낸다면 곧 세상이 의지를 발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말을 하는 와중에 스스로 깨달아 갔다. 깨달아서 말하는 게 아니라, 말하기에 깨달은 것이었다. 그저 마음속에 꿍쳐만 놓으면 불분명한 채로 뭉쳐 있을 덩어리가, 글자로 낱낱이 풀어지며 비로소 분명해졌다.
나 「그저 자연일 뿐이어선 외기를 쓸 수 없어요. 성좌가 있는 곳. 성좌가 지배하는 곳. 그런 세상이어야 외기를 끌어다 쓸 수 있고, 그 외기란 곧 성좌의 내공입니다. 심검은, 성좌의 내공을 끌어다 쓰는 거예요.」
바보 「맞다! 그 세상을 지배하는 별과 혼연일체 되어야만 비로소 쓸 수 있는 게 심검이다. 성좌 없는 세상엔 의지가 없고, 의지 없는 세상에는 심검도 없다.」
배후령의 웃음소리가 작게 흘러갔다.
바보 「네 스승이 살던 세상에선 [대호에 머무는 황룡]이란 성좌가 군림하고 있었지. 그 성좌는 살천성의 칼이 심장에 박혀 죽어도 죽지 못하는 저주에 걸렸다. 성좌의 ‘죽어도 죽지 못한다’는 원념이 세상의 규칙을 규정했고, 그리하여 그 세상에서 살아가던 인간들은 ‘죽어도 죽지 못하는 몸’, 강시, 좀비가 되었다.」
우리가 달려가는 대지에선 조금씩 마을이 드문드문해졌다.
우리는 사람들이 몰려서 사는 대륙을 지나쳐, 인적이 드문 변방으로 점점 더 나아가고 있었다.
바보 「겨울 또한 마찬가지야. 영원한 겨울이란 성좌의 심상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아. 영구동토에 파묻힌 세상이란, 거기에 있긴 있되, 어떠한 생기도 허락하지 않지. 좀비다. 그것이 네 스승이 살던 세상이다.」
휙, 휘익.
마지막 마을을 지나치고 마침내 산과 숲, 구름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바보 「어떻게 해야 그런 세상의 성좌를, 성좌의 내공을 끌어다 쓸 수 있었을까?」
나 「……그 성좌보다 더 성좌다워지면 됩니다.」
나는 어쩐지 정답을 알 것만 같았다.
나 「성좌는 김율의 칼에 박혀, 죽어도 죽지 못하는 몸에 괴로워했지요. 하지만……. 스승님이 더 괴로웠어요. 죽어도 죽지 못한다는 고통에서, 스승님은, 틀림없이 그 성좌보다 고통스러웠습니다.」
즉.
나 「무티아의 힘을 자유롭게 끌어다 쓰고 싶다면, 무티아보다 더 강하게 시간에 집착하면 됩니다. 무티아보다도 강렬하게 회귀를 바라게 되면 그 자는 무티아의 세상에서 자유롭게 심검을 쓰게 될 거예요.」
상대방보다 더욱더 상대방처럼 되는 것.
나 「히시미트 크리츠의 힘을 마치 자신의 것마냥 쓰려면, 지금처럼 명령해서 쓰는 게 아니라 정말 자유자재로 쓰기 위해선, 히시미트 크리츠보다 더 사람의 비밀에 집착하게 되면 됩니다.」
그것이 심검의 원리였다.
나 「겨울을 죽이려거든, 겨울보다 더 겨울이 되어야겠지요.」
어디까지 달려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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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평평해져 지평선과 맞닿았으며 숲은 사그라들어 바닥에 엎드렸다. 하늘만이 겨우 구름 몇 점을 건사하였다. 배후령이 터벅, 걸어 나가고 내가 달려갈수록, 세상은 조금씩 하얘졌다.
문득, 이 세상에도 끝이 있을지 생각했다.
나 「심검은 언제나 쓸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아니에요. 오직 그 세상을 이해했을 때만. 그 세상보다 더욱더 그 세상을 뼈저리게 느꼈을 때, 간신히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나는 멈추었다.
배후령 역시 발을 멈추어 나를 돌아보았다.
나 「당신은 스승의 세상에서 어떻게 심검을 쓸 수 있었던 겁니까?」
그곳은 구름마저 사라진 이 세계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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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지평선.
산천과 초목이 없었다.
세상의 밑변만이 무한하게 이어졌다. 한 줄기의 흑색과 사방의 백색. 오러로 감각을 증폭시켜, 되도록 넓게 시야를 조망해보았다. 오러가 강화될수록 나의 시야가 성큼성큼 커졌다. 나는 평소보다 열 배, 서른 배, 백스무 배 드넓은 세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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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세상은 백색일 뿐.
아름다웠다.
고요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창백의 망망대해가 그곳에 있었다. 숨소리도 허락되지 않을 듯한 경계선, 아니, 허락하고 싶지 않은 안식의 세계였다. 표정도, 목소리도, 어조도…… 모든 것이…… 숨을 놓아…… 탈색되는 곳.
나는 생각했다. 누군가는 이곳을 천국으로 삼겠지. 그리고 이곳은 누군가의 천국이 될 자격이 있었다.
그곳에서 배후령의 눈동자가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검제 「잘봐라.」
배후령이 팔을 들어올렸다.
검제 「세 번째로 보여주마.」
그의 팔은 천천히 움직였다.
검제 「다음에 보게 된다면, 그건 너와 내가 싸울 때뿐이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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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소리없이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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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이 덮히고 열리는 찰나 동안, 소리없이 갈라진 틈새는 더욱더 소리를 죽인 채 가만히 벌어졌다. 마치 그 틈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이 세상의 시간을 잡아먹어 없애버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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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얀 틈은 걷잡을 수 없이 팽창했다. 세상이 무너진다, 가 아니었다. 파괴된다, 조차 아니리라. 그저 없어졌다. 삭제되었다.
칼에 베이고 있었다.
[‘얼굴 없는 지휘자’가 스테이지의 이변을 알아차립니다.]칼에 베인 세상의 주인이 말했다.
[‘얼굴 없는 지휘자’는 즉각 당신들의 퇴거를 요청합니다.] [‘태고의 지팡이’에게 퇴거 요청이 전달됩니다.] [승인.]그리고 마침내, 나의 눈앞마저 완전히 하얘졌다.
[70층으로 강제 전송됩니다.]시야가 뒤죽박죽 뒤섞였다.
검은색이 묽어지고 하얀색이 진해지며, 온갖 잡다한 색깔들이 소용돌이쳤다. 정신이 구역질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2차원 세상에 완벽히 적응해버린 나의 감각이 다시 강제적으로 원래 세상에 끌어당겨진 것이다.
“터무니없는 짓을……!!”
아주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내 머리를 후려쳤다. [태고의 지팡이]였다. 꼭 천둥과 같이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쪼개어졌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질 뻔했는지 알아!? 스테이지를 클리어했으면 얌전히 돌아올 것이지, 게다가, 맙소사. 도전자조차 아닌 부외자가 감히……!”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당혹감과 분노로 얼룩진 마법사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이, 천하의 둘도 없는 골칫덩어리들아!!”
“…….”
나는 구토감에 시달리면서도 입을 열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말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란 게 있었으므로.
“그건 틀렸습니다. 저희는 둘이니까 둘도 없는 골칫덩어리라기보다, 둘밖에 없는 골칫덩어리라고 해야 옳은…….”
까앙!
마법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내 머리를 쳤다.
35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