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56)
1.
마법사, [태고의 지팡이]는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얼마만에 경악이란 감정을 느껴본 지 모르겠구나. 검제. 나는 당신을 볼 수도 없고 당신이 나한테 말을 건네지도 않겠지만, 당신이 천공극점(天孔極點) 공략에 실패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만은 말해둘게.”
마법사는 이마를 짚었다.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여간해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양반일 텐데 이리도 격한 반응을 나타내는 걸 보면, 배후령이 선보인 ‘심검’의 여파가 어지간히도 강렬했나 보다.
“음.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겁니까…?”
나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아직 평면세계에서 본래의 세계로 훅 넘어온 후유증이 사라지진 않았다. 약간의 구토감이 목구멍에 들러붙어 끈적거렸다.
“무슨 일이냐고? 그래. 굉장한 일이 벌어졌지.”
내 질문에 [태고의 지팡이]는 미간을 찡그렸다.
“하마터면 스테이지가 붕괴될 뻔했어.”
“붕괴라면…….”
“말 그대로 붕괴야. 어떤 스테이지는 성좌 그 자체이기도 해. 스테이지가 파괴되면 성좌도 그만큼 상처를 입어. 그런데 네가 데리고 다니는 귀신은…… 아예 스테이지를 베어버렸단다.”
“네에? 공자 씨가 귀신을 데리고 다닌다고요?”
옆에서 약제사가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약제사 입장에선 금시초문이었던 거다. 하지만 [태고의 지팡이]는 설명하기 귀찮았는지 그녀의 의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대로 내버려두었으면 네 귀신이 베어버린 상처가 점점 더 커져서, 급속도로 팽창했을 거야. 진천세계(眞天世界)는 종잇장처럼 잘려나갔을 거고! 75층을 대신해줄 세상이야 몇 개나 있지만, 진천세계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는 영혼들에겐 이게 웬 아닌 밤 중에 홍두깨니?”
마법사는 휙 허공을 노려봤다. 만약 거기에 배후령이 있다면 뺨이라도 때리겠다는 것처럼.
“도대체 생각이란 걸 하고 저지른 짓인지 모르겠구나.”
-아니. 나는 너희들을 믿었을 뿐이다.
배후령은 팔짱을 낀 채 훗, 웃었다.
-설령 세상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너희는 최선을 다해 막으려 들겠지. 그래. 말하자면 나는 너희의 선의를 신뢰했다 할 수 있어. 오히려 나한테 감사를 표해라. 너희의 선함을 나 정도 되는 인간이 기꺼이 인정해준 거 아니겠냐?
“네 귀신이 뭐래니?”
“어.”
김공자, 인생 1초의 고민.
“생각 없이 칼 휘둘러서 미안하데요.”
“그래도 염치는 알아서 다행이구나.”
마법사가 턱을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보자니 구라를 친 내 마음에 양심의 가책이…… 느껴질 리 있는가. 개뿔. 생각해보자. 배후령의 개소리를 고스란히 옮겨 말해서 상대방한테 스트레스를 떠넘기는 거야말로 양심에서 털이 북실북실거리는 짓 아닐까?
“…….”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약제사는 혼자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내게 귀신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고민에 잠긴 건가 싶어서 물어봤다.
“왜 그러세요?”
“아. 별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웅. 다만, 왜 하필이면 제가 75층의 심판으로 선정되었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다행히 배후령과 관련된 고민은 아니었다.
“저기. 공자 씨. 저 이전에 심판을 맡은 게 어떤 분들이었는지, 그분들이 담당한 스테이지가 어땠는지 말해줄래요?”
딱히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기에 나는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내 얘기를 듣는 약제사의 눈빛이, 두꺼운 안경알 너머에서도 확연히 가라앉았다.
“……역시.”
약제사가 중얼거렸다.
“공자 씨. 저는, 만약 죽는다면 진천세계로 가게 될 거예요.”
“예?”
“그게 바로 심판의 기준이에요. 죽은 다음에 어떤 천국에 가게 될 것인가, 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반대로 약제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생각해보세요. 성기사 님이 심판을 맡은 세상은 음악의 천국이라 했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성기사 님은 물론 음악의 전문가예요. 그러니까 악천(樂天)을 담당한 것도 당연해 보이죠. 응,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제가 심판으로 불려와야 할 세상은 약천(藥天)이어야지 자연스럽지요…? 제 전문 분야는 누가 뭐래도 의약이니까요.”
약제사는 소곤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정작 제가 맡은 곳은 진천이었어요. 전문 분야랑 전혀 상관없이, 말이에요. 딱히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특기도 아닌데다, [2차원 평면]에 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것도 아닌걸요.”
“…….”
“그러니까, 누가 심판을 맡는가는 전문가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게 아니에요. 절대로.”
과연.
나 역시 약제사를 따라 눈매가 가벼이 접혔다.
“성기사가 죽게 된다면 악천세계에서 환생하게 된다. 백작이 죽으면 금천으로. 독사가 죽으면 무천에, 이단심문관이 죽으면 법천에. 그리고…….”
“네. 제가 죽으면 진천인 것이지요.”
약제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 씨가 스테이지를 공략하는 동안 생각했어요. 제가 만일 죽어서 저승에 갈 수 있다면 어떤 사후세계를 바랄까, 하고요. 잘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음. 전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의 속내가 뭔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세상]에 가고 싶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그렇군요.”
“예. 그랬어요. 따라서 진천은 제가 가고 싶은 사후세계일 거예요.”
나는 시선을 돌렸다. 약제사도 내가 눈길을 돌린 곳과 똑같은 방향을 쳐다봤다.
그곳에선 [태고의 지팡이]가 묵묵히 우리 둘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사실입니까?”
“……응. 맞아. 정답이야.”
마법사는 제법 시원하게 대답했다.
[‘태고의 지팡이’가 당신의 추궁이 옳다고 인정합니다.] [당신은 ‘태고의 지팡이’가 숨겨둔 정보를 간파했습니다.]메세지를 띄워서 확인 사살까지 해줬다. 친절하군.
“원래 계획대로라면 당신이 79층에 도착했을 때 [사실 네가 지금까지 겪어온 천국들은 어쩌고 저쩌고]라면서 폭로할 예정이었어. 최종 보스 분위기를 내고 싶었거든.”
마법사는 꼭 몰래 아껴둔 장난감을 잃어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알아챘구나. 하아. 놀래켜줄 보람이 사라졌어.”
“……혹시 제가 죽으면 가게 될 천국도 정해져 있습니까?”
“흐음.”
마법사는 알 듯 모를 듯 눈웃음을 지었다.
“그건 섣불리 말해줄 수 없는 질문이야. 내가 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아무튼, 약제사라고 했니? 수고했단다. 이만 가보렴.”
마법사가 지팡이로 바닥을 툭 치자, 약제사의 발밑이 늪처럼 울렁거렸다. 강제로 송환이 시작된 것이다. 약제사는 바닥에 빠지면서 허둥지둥거렸다.
“아, 저! 고, 공자 씨! 힘내세요! 화이팅이에요! 저도 이번 일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된다 들었지만, 공자 씨는, 기억할 테니까…….”
“예.”
나는 미소를 짓고 약제사를 배웅했다.
“다음에 약제사 씨가 개발할 특제 포션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퐁당-.
순식간에 약제사의 몸이 밑바닥 아래로 사라졌다. 약제사가 사라진 곳에는 하얀 잔물결만이 일었고 그것조차 빠르게 가라앉았다.
한 박자 지나자, 70층 로비는 스산한 하얀색에 둘러싸였다.
‘오직 나만이 기억하는 스테이지들이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
나는 어깨를 으쓱거린 뒤 마법사를 돌아봤다.
“좋아요. 그래서 다음 심판은 누구입니까? 아나스타샤? 마르쿠스 님? 여태까지 최고의 헌터들만 소환된 걸 보면 틀림없이 랭크의 순위도 심판을 고르는 기준에 포함되겠지요.”
“정확히 말하면 당신과 인연이 깊은 사람들 중에서 선정되는 거야.”
“그럼 우부르카입니까? 아니면, 라비엘?”
“어느 쪽도 당신과 연이 깊긴 하네. 하지만 어느 쪽도 사후세계를 바라는 사람은 아니야. 사왕.”
마법사는 재차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이번에 당신을 평가하게 될 심판은 조금 까다로울지 몰라.”
촤아아악!
지팡이 끄트머리를 중심으로 빛이 피어올랐다. 잘 보면, 빛이 피어나는 모양새는 연꽃을 닮았다. 반듯하게 정돈된 연잎이 갈라지자 빛 줄기 틈새로, 한 사람의 인영(人影)이 드문거렸다.
“어—. 뭐야?”
여태까지 심판역을 맡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인영 또한 퍽이나 낯이 익었다. 내가 죽고 나서도 잊어버리지 않겠구나 싶은 인간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중 하나였다.
그닥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소환? 이게 말로만 듣던 소환이냐? 아니 어떤 상도덕도 없는 놈이 알바하는 사람을 소환하고 염병 지랄이야. 어디 낯짝에 좀 인사나 합시다.”
“…….”
“어라? 뭐냐. 내 눈깔이 잘못됐나? 존나 선비라서 이름까지 선비의 대명사이신 분께서 내 앞에 계신 거 같은데. 하긴, 날 소환할 새끼가 너밖에 더 있겠냐. 내가 멍청했군. 왜? 이번엔 뭐하러 불렀냐. 또 춤이라도 출까?”
나는 새로운 심판자로 불려온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었다.
유수하…….”
“그게 내 이름 석 자이긴 하지.”
하필이면 너냐.
2.
머리가 지끈거렸다.
확실히 [나와 인연이 깊은 사람]으로선 더없이 적합한 인사이긴 하다.
“왜 네가 여기로 오고 난리야…….”
“하? 그걸 나한테 묻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네가 나 소환한 거잖아.”
유수하는 미간을 좁혔다. 날렵하지만 색이 굵은 눈썹이 단아하게 말렸다.
“아니, 잠깐만. 야. 나 네 그림자에서 사는 생활 끝났잖아. 아직도 너한테 소환될 수가 있어? 이거 합법이냐?”
유수하는 [백귀소환]의 소환체 신세를 벗어난 지 오래되었다. 내가 탑주로부터 얻은 스킬 [지골룡의 두개골]을 통해 새로운 육신을 얻은 것이었다.
허구한 날 불려와서 내 명령에 따르던 나날은 이제 그만 굿바이라 생각했을 텐데, 갑작스레 또 소환당했으니 눈썹을 찌푸릴 만하지.
“새꺄. 그만 좀 부려먹어. 나 마음 새로 고쳐먹고 열심히 사는 중이야! 지금 내가 입은 옷 안 보여? 이거 카페 알바복이야. 너한테 불려나오기 전까지 플라네타리움에서 알바하고 있었어, 알바!”
유수하는 내가 소환술을 펼쳤다고 착각한 듯했다.
설마 또 다시 코사크 댄스 따위를 명령받을지 모른다 생각한 것일까. 꽤나 다급함이 느껴지는 말투로 자기 자신의 불쌍한 처지에 관하여 설파하기 시작했다.
“알바 끝나면 천무문(天武門)에 가서 뛰어야 돼! 네가 날 천무문주 문하생으로 집어넣은 바람에 내가, 앙? 얼마나 개노가다로 고생하는지 알기나 해? 새끼가 양심이 있으면…….”
“쫄았어?”
“뭐?”
“내가 너한테 이상한 거 시킬까 봐 쫄았냐고.”
“이 새끼가…….”
유수하가 인상을 콱 찡그렸다.
“지금 네가 랭크 2위짜리 헌터고, 서열 1위 헌터를 개인 경호원으로 두고 있는데다, 거대길드 수장들이랑 죄다 친분이 있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랑 결혼했다고 해서 날 물로 보는 거냐?”
“어.”
“시발.”
유수하는 그 정도면 자기를 H2O로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 것 같았다.
“아무튼, 이번엔 내가 소환한 게 아니야.”
“그럼?”
“설명하자면 좀 길다.”
좀 긴 설명에 들어갔다.
현재 내가 70층~79층을 깨고 있다는 거. 이 권역을 돌파하려면 나만 잘해선 안 되고, 심판으로 선택된 자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거. 그리고 이번엔 빌어먹게도 네가 선택되었다는 것.
“……으으음.”
유수하는 팔짱을 꼈다.
이야기를 듣기 전엔 눈썹과 눈썹 사이에 불안함이 살짝 일렁거렸는데 지금은 싹 사라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시꺼먼 눈동자가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을 뿐.
“네가 한 말을 정리하면. 다음층으로 올라가려거든 무조건 내가 인정을 해야 한단 거, 맞냐?”
“오냐.”
“십 년이 걸리근 백 년이 걸리든 상관없이 난 여기 앉아서 네가 스테이지에서 발발거리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고 말이야.”
“그래.”
“심지어 스테이지에 있는 너랑 여기 있는 나 사이엔 시간의 흐름도 다르게 적용돼서, 내가 원하기만 하면 긴 시간을 빨리빨리 스킵할 수도 있다?”
유수하가 꼬치꼬치 캐묻는 모습에서 강한 불안감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빤히 들킬 구라를 칠 수도 없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아봤자 어차피 [태고의 지팡이]가 설명해줄 테니.
“……맞아.”
“과연. 답 나왔네.”
유수하는 씨익 웃었다.
악마와 같은 미소였다.
“우선 춤부터 춰봐라. 김공자.”
뭐?
“아, 당연하지만 춤이란 건 내가 췄던 춤이다. 그 춤. 코냑 댄스인지 뭔지…. 하여간 네놈이 제일 잘 알겠지. 네가 시켰던 거잖냐? 일단 네 춤솜씨부터 견학하자고. 스테이지에 대한 얘기는 그다음부터 생각하지 뭐.”
어이.
“왜? 안 춰? 추기 싫으면 마. 가볍게 백 년부터 찍고 갑시다. 네가 아무리 괴물 같은 새끼여도 백 년 이백 년 똑같은 스테이지에만 갇혀 있다 보면 까짓거 춤 정도는 출 마음이 생기겠지. 안 그래?”
어이.
“물론 춤 한번으로 끝낼 생각은 없어. 그러면 섭섭하지. 아아. 그럼. 우리 둘 사이에 해결해야 할 감정이 참 많지 않냐, 김공자 씨?”
야 이 개새끼야.
35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