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58)
4.
잠깐 옛날 이야기를 해보자.
원장님이 어렸을 적에는 스마트폰이 아니라 텔레비전을 멍하게 쳐다보는 것이 어린아이의 도락이었다고 한다.
TV에선 자기가 원하는 영상을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 없다. 방송국에서 틀어주는 걸 틀어주는 대로 본다.
방송국도 사람들이 일하는 곳인지라, 사람들이 꿈나라로 떠난 시간대의 TV에선 아무것도 재생되지 않는다.
24시간 영업을 하지 않는 식당과 똑같다. 휴식. 휴무. 거기에 분명히 있되, 그것의 역할은 작동하지 않는 휴지(休止).
지지지직-
그리고 텔레비전은 쉴 때 이상한 화면을 보여준다. 검은 점박이와 하얀 점박이가 지직거리며 난잡하게 얽혀든다. 깜빡, 깜빡. 마치 기계 AI들이 자신들만의 바둑을 초고속으로 두는 것처럼 새까만 점점들과 새하얀 점점들이 뒤섞인다. 어지럽게. 어지럽게, 어지럽게.
지지지직, 지지직-
그것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의 광경이었다.
[76번째 스테이지가 강제로 종료되었습니다.]파랬던 하늘은 어느새 쪼개어졌다. 쪼개어진 틈새에서 마치 곰팡이가 증식하듯, 검은색과 하얀색의 토사물이 쏟아져 넘쳤다. 가장 먼저 하늘이 뜯어먹혔고 하늘 아래 배회하는 인간들이 파먹혔으며, 마지막으로 지평선이 좀먹혔다.
지지지지직!
[여섯 번째 기둥, ‘태고의 지팡이’가 개입합니다.] [‘태고의 지팡이’는 스테이지의 통제권을 유지하고자 합니다.]흑백이 난교(亂授)하는 세상 한복판, 외로운 지팡이에 기댄 마법사가 있었다.
이 탑을 운영하는 기둥 중 한 명. 태고의 지팡이였다.
“……재밌는 얘기를 하는구나. 사왕.”
마법사는 나를 보았다.
“그러니까 방금 당신은, 내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말한 거니? 이 천국층의 심판자로 적합한 이가 누구인지. 누가 기꺼이 당신에게 합격과 불합격을 판단할 수 있는지. 그것을 모두 고려해서 유수하를 심판자로 선택한 내가, 이 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예.”
“…….”
마법사의 눈동자는 칼을 담가놓은 물 같은 은빛이었다. 나는 내 쪽을 향해 겨누어진 은색 칼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유수하는 설령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결코 여기서 환생하길 바라진 않을 겁니다.”
마법사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꾸욱.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마법사는 자신의 지팡이를 강하게 쥐었다.
“……그래. 네 말에 일리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면 여기는 어떠냐?”
마법사는 기나긴 지팡이를 높이 치켜올렸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쿵, 바닥을 내리찍었다.
[‘태고의 지팡이’가 권능을 발현합니다.]촤아아악!
지팡이가 찍은 곳을 중심으로 물결이 일어났다. 흰색의 물결. 하얀 파도는 단숨에 격류로 몰아쳐, 이 세상 곳곳을 뜯어먹고 있던 검은색을 몰아냈다.
그것과 동시에.
[‘태고의 지팡이’가 당신을 전송시킵니다.]지지직거리던 노이즈의 세상이 뒤바뀌었다.
[당신은 77번째 스테이지에 입장했습니다.] [당신은 본래 입장할 수 없는 장소에 발을 들입니다.]“이곳은 기천(機天)이야.”
태고의 지팡이가 마법을 부린 걸까. 우리는 공중에 부유하고 있었다.
까마득한 발 아래로는 휘황찬란한 미래 도시가 펼쳐졌다. 마천루들은 기둥이나 이음새 하나 없이 매끄럽게 솟구쳤고, 빌딩과 빌딩은 뇌 속의 뉴런처럼 이어졌다. 마천루 사이에 거미줄처럼 드리운 통로는 끊임없이 발광했다.
“이 세계에선 무수한 기계인형들이 살아가고 있지. 너희들의 어법을 빌리자면 NPC들이야.”
미래도시엔 수많은 인간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알려준 바가 옳다면 저것들 중 절대다수가 NPC. 즉, 영혼을 가지고 환생한 헌터들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성좌… [기계장치의 신]은 무려 수억 체에 이르는 기계인형을 조종한단다. 물론, 이곳에서 환생한 인간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지. NPC들도 전부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도 믿어. 당연하지. [기계장치의 신]이 지배하는 인형들은 모두 사람이랑 다를 바 없이 생생하니까. 그리고…….”
“그리고?”
“인형들은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언제나 인간들한테 패배해준단다.”
도시의 전광판에선 복싱 비슷한 경기가 비추고 있었다.
“여기서 환생한 인간들은 [항상] 인형들을 이겨. 인형들이 일부러 져주었다는 것을 절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아니, 자기한테 패배한 사람들이 사실은 인형에 불과하단 사실을 결코 눈치채지 못하게.”
퍼억!
적색 글로브를 장착한 권투 선수가 상대방을 때려눕혔다. 와아아아! 전광판 너머로 관객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청색 글로브 선수는 비틀거리며 코너에 몰렸고, 적색 선수는 의기양양하게 상대를 몰아넣었다.
“이곳에서 다시 태어난 자들은 승승장구하는 인생을 살게 돼. 패배할 것 같은 위기가 몰아 닥쳐도, 결국 승리하는 건 그들이야. 승리의 달콤함. 일생의 난관을 극복했다는 자신감. 모든 기쁨은 오직 인간들을 위해 [기계장치의 신]이 마련해놓은 선물이지.”
결국 적색 선수의 어퍼것이 정면으로 들어갔다.
쿠웅! 청색 선수는 버티지 못하고 링 위에 쓰러졌다. 심판이 급히 달려와 두 선수의 사이를 가로막았지만, 이미 적색 선수의 얼굴에는 빛처럼 환한 확신이, 자기가 이겼다는 기쁨이 얼룩졌다.
“게임이야. 일종의 놀이. 언제나 승리를 대접받는 게임. 하지만, [내가 대접받고 있다]는 의혹은 절대로 들지 않아. 마치 자기가 잘나서 모든 승리를 쟁취한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지.”
“…….”
“어떠니. 사왕. 이곳이야말로 유수하의 천국으로 걸맞지 않아?”
우오오오오!
적색 선수가 포효했다. 심판은 그의 손목을 잡고 위로 치켜올렸다. 적색 선수는 자신이 거둔 승전에 도취해 고릴라처럼 울부짖었으며, 관객들은 여기에 호응했다. 더욱더 큰 함성이 그를 보답해주었다.
“당신이 유수하에 대해 잘 아는 건 인정하겠어.”
환호로 물들어진 상공에서 마법사는 나직이 말했다.
“그래, 어쩌면 나도 한 번쯤 실수를 저질렀을지 몰라. 미안. 관리자의 책임이야. 사죄하는 의미에서 76층은 자동으로 클리어한 걸로 인정해줄게. 그러니 이제부턴 77층 공략을…….”
“언제까지 이럴 수 있겠습니까?”
“……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바깥에서 세상을 버리고 싶은 자들은 탑에 들어왔습니다. 탑의 세상을 버리고 싶은 자들은, 71층에서 79층까지 마련된 천국층 중 한 곳으로 가게 되지요. 그걸로 끝입니까? 여기 도착하게 된 영혼들이 다시 한 번 더 세상을 버리겠다면?”
“…….”
“그때는 또 다시 천국의 천국을 만들 것인가요? 탑 안에 탑을 만들고, 다시 탑 속의 탑을 만들어서, 백 층, 천 층, 일만 층, 십만 층, 백만 층, 영원토록 올라가는 탑을 쌓아올릴 겁니까?”
마법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태고의 지팡이’가 당신을 전송시킵니다.]마법사가 꽉 잡은 지팡이가 흔들거렸다.
[당신은 78번째 스테이지에 입장했습니다.] [당신은 본래 입장할 수 없는 장소에 발을 들입니다.]“……여긴 어떻겠니?”
세상이 또 달라졌다. 한적하지만 모자랄 것 없는, 어느 해변가의 마을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한 쌍씩 짝지어서 평화로이 담화를 나누거나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이곳은 쌍천(雙天)이야. 누구나 자신과 천생연분이 될 짝을 찾을 수 있어. 설령 전생에선 자신의 운명과 만나지 못한 인간이더라도, 이곳에선 반드시 만나게 되어 영원토록…….”
“끝이 없어.”
나는 말했다. 마법사의 눈에 담긴 칼날을 내 목소리에 쟁여둔 칼로 비스듬히 쳐내기 위해서.
“태고의 지팡이. 당신의 정체에 대해선 이제 알겠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탑에서 죽은 영혼들이 어느 천국층으로 갈지 판결하는, 말하자면 염라대왕과 같은 [저승의 재판관]이겠지요.”
“…….”
“차이점이라면 절대로 지옥행을 선고하지 않는다는 점일까.”
머릿속에서 탑의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은 ‘태고의 지팡이’의 정체를 간파합니다!] [‘태고의 지팡이’가 기둥으로서 지닌 특권이 발동합니다.] [기둥과 관련된 당신의 기억이 왜곡됩니다.] [불발.] [당신의 기억을 왜곡하는 일체의 작용이 실패합니다!]여우님이 목도리처럼 내 목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해서 눈앞의 마법사를. 탑에서 죽어버린 모든 영혼을 판결하고 분배하는 재판관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두 가지 실책을 범했어요.”
“……실책이라니, 무슨.”
“탑은 절대로 바깥세상의 인간들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강요하지 않아요. 그건,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지요. 과연 자기한테 탑의 세계가 어울리는지…. 정말로 바깥세상을 한 번 버려버릴 것인지. 여기 살아가는 헌터들은, 그걸 스스로 결정해서 오게 된 사람들이야.”
나는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상대의 의사를 묻지 않았어요. 성기사에게, 자신이 죽는다면 이 천국을 고르겠냐고 묻지 않았어. 그저 성기사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천국층은 악천세계이겠거니 당신 혼자 판단했을 뿐. 백작도, 독사도, 이단심문관도, 연금성주도, 유수하한테도, 당신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들을 소환했습니다.”
“…….”
“하지만 더 최악의 실수는 따로 있어요.”
그건.
“당신이 관리하는 천국층들에 간 사람들은, 전생의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립니다.”
“……그게 어때서? 세상을 버리고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천국으로 가게 된 영혼들이야. 싫었던 기억, 자기가 버린 세상에 관한 것들 따윈, 기억할 필요가 없잖니.”
“우리는 바깥세상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지만, 탑은 우리가 선택한 세상입니다.”
“…….”
“태어나길 원해서 태어난 세상입니다. 가자고 결심해서 오게 된 세계입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떨어졌을 뿐인 바깥세상과 달리—우리는, 우리가 이곳을 선택했어요. 바로 그러기에 탑은 의미가 있는 겁니다!”
나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법사의 마법이 풀린 걸까.
순간적으로, 내 발은 허공에서 무게를 잃어버리고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오러를 동원하여 투명한 디딤대를 만들었다. 허공답보(虛空路步). 하늘은 더 이상 내게 추락을 의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 선택한 기억]들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윽.”
“당신이 관리하는 천국층들은, 탑이 간신히 이룩해놓은 의미를 없애버렸어요. 똑같아. 그저 바깥세상과 똑같은 세계를, 탑안에 다시 지어버린 거나 다름없어요.”
나는 하늘에 서서 말했다.
“당신에겐 천국의 재판관을 맡을 자격이 없습니다.”
태고의 지팡이가 잇소리를 냈다.
“뚫린 입이라고, 멋대로 지껄이기는……!”
“예. 그리고 아직 안 끝났어요.”
나는 천공을 올려보았다.
“유수하!”
지지직-.
“듣고 있겠지! 네가 골라라! 네가 결정해! 여기 있는 [태고의 지팡이]가 판단한 대로, 76층, 77층, 78층 중에 네가 기꺼이 가고자 하는 천국층이 있는 것인지! 그래서 [태고의 지팡이]에게 재판관으로서 자격이 있는 건지! 아니면…….”
하늘이 지지지직, 거리면서 틈을 벌렸다.
“아니면, 꺼지라고 말하든지! 네가 살아있는 곳, 내가 살아있는 곳, 사자세계(觸子世界)만이 너의 세상인지! 만일 죽는다면, 죽어서도 네가 다시 태어나고 싶은 곳인지 말해라! 그래서 [태고의 지팡이]와 나, 둘 중에 누가 옳은가를 네가 결정해라!”
『뭐 줄 건데?』
하늘의 벌어진 틈구멍에선 아까 전과 똑같은 노이즈가 엿보였다. 백색점과 흑색점이 시끄럽게 점멸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유수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맨입으로 선택하라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잘 모르겠다만 아무튼 네놈이 저 기둥인지 뭐신지랑 승부를 하고 있다 이거잖아? 나보고 네 손을 들어달란 얘기고. 그럼 이것도 거래다. 뭘 줄 건지 말해봐.』
“이런 뼛속같이 현실적인 새끼…….”
『뉘집 새끼한테 한번 뒈지고 나니까 나도 현실을 챙기게 되더라고.』
나는 이빨을 물었다. 하지만 이빨과 이빨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건 으드득거림이 아니라 웃음이었다.
“미친 놈.”
나는 웃었다.
“넌 나한테 뒈지기 전부터 그랬어, 이 새끼야.”
유수하. 넌 그런 놈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은 놈이고, 이승이 개똥 같아도 자기가 살아온 기억만 온존할 수 있다면 온 세상에 엿을 쳐날릴 놈이다. 천국에 갈 수도 없고 가지도 않는 남자다. 지금 자신의 현생에 기쁨이 될 쾌락이 아니라면 사후세계든 뭐든 꺼지라고 말할 인간이다.
“코사크 댄스를 춰주마!!”
나는 빌어먹을 웃음을 흘리며 소리쳤다.
“하루든 이틀이든 일주일이든 상관없다! 네놈이 그만하라고 말할 때까지 춤솜씨를 보여주지! 네가 춤을 춘 시간보다 10배 20배 넘게 추어줄 테니까, 개같은 새끼야! 천국 따윈 꺼지라 그러고 내 세계에서 계속 살아!”
『음…』
하늘은 잠시 침묵했고.
『나쁘지 않은 세계처럼 들리는데?』
태고의 지팡이가 표정을 일그러뜨리기도 전에, 심판자는 나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콜.』
경고음이 의식을 수놓았다.
[76번째 스테이지가 강제로 종료됩니다.] [77번째 스테이지가 강제로 종료됩니다.] [78번째 스테이지가 강제로 종료됩니다.]“진짜,”
태고의 지팡이가 이마를 짚은 채 욕지거리를 내뱉은 순간,
“이 망할 꼬맹이들—–.”
탑의 선언이 떨어졌다.
[‘태고의 지팡이’가 기둥으로서 부적합하다는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즈라쿠아에 확인을 요청합니다.] [확인 불가.] [해당 질문은 탑의 권한을 넘어섭니다.]오랜만에 들어보는 선언이었다.
[탑은 질문을 재확인합니다.] [통과. 현재 제기된 문제는 적합합니다.] [탑은 사왕의 문제 제기를 정식 의제(議題)로 인정합니다.]그리고.
[탑은 만생(萬生)의 여섯 기둥에게 다수결 회의를 요청합니다.]하얗고 검은 모래가 다시 한 번 내 시야를 뒤덮었다.
35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