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59)
1.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나는 이미 여러 번 기둥들과 만난 적 있다. 기둥들이 자리한 회의에 참석했었다. 그래서 탑의 목소리가 [여섯 기둥에게 다수결 회의를 요청합니다]라고 속삭였을 때, 나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일어나십시오. 사왕.”
이번에도 어두운 명계(莫界)에서 눈을 뜨겠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이대로 누워계실 생각입니까? 어서 일어나주실 것을 권합니다. 저는, 당신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예를 갖추길 원합니다. 그러기 전 까진 이곳에 공작을 초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골을 울렸다.
“…….”
나는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조금씩, 시야가 맑아졌다. 꼭 황사 먼지로 더럽혀진 자동차 앞유리가 와이퍼에 닦인 것처럼.
그곳에는 눈썹이 단아한 흑색의 미인이 서 있었다.
“드디어 눈을 뜨셨습니까.”
아름다운 사람美人, 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뚜렷한 눈매. 무심한 눈동자. 어떠한 고집도 망념도 자기 과시도 걸리지 않아 그저 닫혀 있을 뿐인 입술. 이 세상에서 하얘지고 회색된 모든 것을 거부하여 밀쳐내려는 듯, 그녀는 순흑(純黑)의 옷을 입었다.
어디선가.
틀림없이 어디에선가 본 적 있는 옷차림이고 입술이며 눈동자였다.
나는 그 흑빛의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잠시간 멈칫한 것이다.
“……구원하(久違河)…… 자문사?”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이 저의 이명입니다.”
턱짓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턱이 주억거린 주변에선 중력마저, 한점의 공기조차 아주 잠시간 부재한 것 같았다.
“처음 뵙습니다, 라고 인사드리는 것은 옳지 않겠군요. 사왕. 당신이 잠시뿐이지만 저의 몸에 빙의했었단 사실을 공작께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아…….”
그렇다.
나는 탑주 자수정의 세계, 어느 왕국에 간 적이 있었다. 비록 트라우마 속에서 방문한 것이었지만.
그때 그곳에서 나는 한 사람에게 빙의하였다. 바로 눈앞에서 가지런히 양손을 모으고 있는 여인. 구원하 남작이었다.
나는 그녀가 되었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 흑빛의 여인을 보자마자 기시감을 느꼈던 것이다.
“저의 공작께서 신세를 졌습니다.”
구원하 남작은 허리를 숙였다.
구원하가 ‘공작’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만화경 공작’이겠지. 탑주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명이었다.
“아, 네. 아니요. 천만에요….”
나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한때 [나]였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하게 되다니.
“그런데 어째서 당신이…. 음, 남작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왜 남작님께서 저를 맞이하시는 거죠? 저는 기둥들의 회의에 불려나왔는 데요.”
“……눈치가 굉장히 빠른 분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구원하 남작은 허리를 세우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제 목소리를 듣고 떠오르시는 바가 없습니까?”
“네?”
어.
“언젠가 들어본 목소리인 거 같다는 생각은 했어요.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고.”
“그렇습니까. 직접 들려드리는 편이 이해를 돕는 데 편하겠군요.”
구원하 남작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테스트.] [목소리를 재생합니다.] [현재 메세지는 목소리를 재생하는 것 이외에 별도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나는 깜짝 놀랐다. 입이 쩍 벌어졌다.
“어? 어어어……. 어어?!”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나의 경악에 일절 영향받지 않은 채 구원하 남작은 고개를 숙였다.
“저는 만화경 공작가의 가신, 속문(屬門), 두 번째 자문사, 태양왕에게 열한 번째 잔을 하사받은 귀족, 구원하 남작이라 합니다. 진명은 미야입니다. 부디 구원하 남작이라 불러주시길.”
숙여진 머리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금까지 내가 탑을 오르면서 수없이 들어본 목소리— 이른바 [탑의 목소리]와 완전히 똑같았다.
2.
“아니, 잠깐만요…….”
나는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구원하 남작한테서 기나긴 자기 소개를 들었다만, 솔직히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밖에 없었다.
“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시스템에 의해 자동으로 돌아가는 뭐 그런 게 아니라, 설마…….”
“예. 수작업입니다.”
“에에에엑!”
놀랄 노 자였다!
“수작업이라뇨…. 전부요? 아니, 탑의 목소리를 듣는 헌터가 저 한 명이 아니잖아요. 엄청 많잖아요! 모든 헌터가 스킬을 배우거나 스테이지를 오를 때마다 목소리를 들을 텐데 그게…….”
“전부 수작업입니다.”
“말도 안 돼!!”
“그게, 사실은 말이 됩니다.”
구원하 남작은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여러분의 세계에서 흐르는 시간과 이곳에서 흐르는 시간은 다릅니다. 여러분 입장에서 볼 때 이곳은 시간이 멈추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요. 사왕. 당신에게 있어 동시적으로 발생한 사건일지라도, 저에겐 차례차례 해결하면 그만인 업무에 불과합니다.”
“하루에만 수천 수만 수십만 번은 헌터들한테 응답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만.”
남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기울였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어느 쪽인가 하면 문제 밖에 없다.
“비, 비효율의 극치…….”
“비효율이란 결국 시간과 공간이 한정되었을 때 발생합니다. 이곳에선 원하는 대로 시간을 제어할 수 있으며, 원하는 만큼 다른 세계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비효율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 지치세요……?”
“공작을 위한 일입니다. 지칠 이유가 없군요.”
진심인 듯했다. 세상에.
“지금 중요한 것은 저의 업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왕. 먼저 의복을 단정히 차려입으십시오.”
그제야 나는 주변을 제대로 둘러봤다.
구원하 남작의 안면이 내게 익숙한 것처럼, 내가 눈을 뜬 장소도 굉장히 낯익었다. 왕국의 대의회장. 모든 귀족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던 그곳. 일찍이 구원하 남작한테 빙의했었을 때 왔던, 바로 그 장소였다.
“왜 여기에…….”
기둥들이 모여서 회의를 벌이는 곳은 어두운 명계 아니었나?
“곧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의복부터 정리해주십시오. 당신이 설령 공작을 개인적으로 안다 하더라도, 제가 있는 이상 예의를 갖춰주셔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몰골로 공작을 알현하도록 내버려둘 순 없습니다.”
“모, 몰골? 제 옷이 뭐 어때서요?”
“천박합니다.”
“…….”
구원하 남작은 지그시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당연하지만 현재 내 옷은 아나스타샤 패션. 즉 새까만 가죽옷이었다.
나는 차마 반박할 순 없어서 눈길을 피했다.
“……그래도 이거 되게 비싼 옷인데.”
“얼마입니까?”
“네?”
“비싸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실례지만 얼마인지요?”
나는 아나스타샤한테 들었던 대로 가격을 말했다.
구원하 남작은 옷값을 듣고 가벼이 턱을 끄덕였다. 그리고 책상 위에 늘어진 옷 중에 한 벌을 집어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엉거주춤 옷가지를 건네받았다.
“저기. 이건?”
“그보다 120배는 더 비싼 옷입니다.”
“…….”
“갈아입으십시오.”
얌전히 갈아입었습니다.
“이곳은 모든 탑들을 관찰하는 상황실입니다.”
내가 옷을 비적비적 갈아입는 동안, 구원하 남작은 등을 돌린 채 나직이 말해나갔다.
“왕국의 대의회장을 본따 만들었지요. 생긴 것만 똑같을 뿐이지 엄연히 다른 공간입니다. 여러분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그렇군요. 여기는 탑의 [지하 1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하 1층.
나는 바지통에 왼발을 집어넣으면서 물었다.
“혹시 지하 2층도 있나요?”
“없습니다. 행여라도 당신이 100층을 깨고 난 뒤 [사실은 지하 1층부터 지하 100층까지 있었고 우리의 진정한 모험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경) 사왕 일대기 제2부 개막 (축)] 같은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테니, 부디 안심하십시오.”
그런 끔찍한 건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왠지 모르게 진짜 있을 법한 이야기로군….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내 영혼이 불살라지고 온 세상이 활활 타오를 일이다.
“다 입으셨습니까?”
“아, 예. 환복 끝났어요.”
“실례하겠습니다.”
구원하 남작이 등을 돌렸다. 왕국풍 복식을 차려입은 나를 구원하 남작은 꼼꼼히 뜯어보았다.
“본래 헌터들은 결코 이곳, 지하 1층에 들릴 수 없습니다. 헌터뿐만 아니라 성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에 하나, 천만분의 일의 우연으로 어쩌다 출입하게 되더라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겐 그저 새까만 암흑이 비출 뿐이지요.”
“헤에.”
“예전엔 당신에게도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사왕.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임시로나마 자격을 얻었습니다. 탑이 세워진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구원하 남작은 내 손목에 감긴 실뱀을 내려봤다.
“죄송합니다만, 자격을 얻은 사람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미궁에 거하는 뱀],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 [수호의 여신], [검제]의 인식 활동은 정지시켜 두었습니다. 보안을 위해서니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래서 여기 당도한 이후로 모두가 조용했던 거구나.
“다행히 옷이 잘 어울리는군요.”
복장 체크가 끝난 건가.
구원하 남작은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나를 일별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공작을 알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제가 원래 어떤 패션이든 소화한다는 풍문을 듣습…….”
“그럼, 개회(開會)토록 하겠습니다.”
구원하 남작은 내가 개소리 타임에 진입할 틈을 안 주고 짝, 손뼉을 두들겼다.
끼이이익-.
대회의장의 정문이 열렸다.
마치 문가에서 기다렸다는 듯 인영(人影)들이 걸어나왔다.
“참가자를 확인합니다.”
[참가자를 확인합니다.]똑같은 목소리가 두 번, 동시에 겹치었다. 구원하 남작은 턱을 꼿꼿하게 들어올리고 정문에 들어서는 자들을 직시했다. 그리고 그들을 한 명 한 명 불렀다.
“다섯 번째 기둥,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참석합니다.”
[다섯 번째 기둥,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참석합니다.]제일 먼저 들어선 이는 공녀.
나에게 누구보다 호의적인 기둥.
금색이 백색에게 자기를 절반쯤 양보한 듯한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공녀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닮은 동물을 말하라면 병아리일까.
“안녕, 사왕! 오랜만! 그동안 잘—-.”
“죄송합니다만. 아가씨. 정숙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앗, 미야 자문사. 너무해…….”
공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구원하 남작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서 다음 입장자들을 호명했다.
“네 번째 기둥, 맹목을 관조하는 달이 참석합니다.”
[네 번째 기둥, ‘맹목을 관조하는 달’이 참석합니다.]우주의 태초부터 종말까지 모든 일들을 귀찮게 여길 것만 같은, 굉장히 뚱한 얼굴의 기둥이 문안으로 들어왔다.
닮은 동물을 꼽자면 해달.
“세 번째 기둥, 시초를 입법한 자가 참석합니다.”
인생의 시작부터 끝장까지 쓴맛 단맛 달콤한맛 매운맛 플러스 민트초코맛까지 다 봐서 이제는 그냥 놀고 싶을 뿐인, 굉장히 집에 돌아 가고픈 기둥이 밍기적밍기적 슬라임걸음으로 이동했다.
동물에 비유하자면 고슴도치.
“두 번째 기둥, 공허에서 춤추는 신이 참석합니다.”
[두 번째 기둥, ‘공허에서 춤추는 신’이 참석합니다.]세계가 태어나든 멸망하든 상관 않고 오직 자신의 관심사만 건지면 된다는… 어? 뭐지? 정문에 들어오는데 정상적인 발걸음이 아니라 마치 발레를 추듯…… 아니 그야말로 정진정명 100% 발레를 추면서…… 입장했고, 입장하고 나서도 춤을 추고 있다.
뭐지?
아니 진짜 뭘까…?
동물로 비유해보라면 어딜 봐도 아프리카 플라밍고.
“여섯 번째 기둥, 태고의 지팡이가 참석합니다.”
[여섯 번째 기둥, ‘태고의 지팡이’가 참석합니다.]태어났을 때는 태어났구나 라고 한숨을 쉴 거 같고 죽을 때는 죽겠구나 하고 한숨을 쉬고 말 것 같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갖가지 일들을 다만 한숨으로 받아들일 법한 마법사는,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동물에 비유하자면 늙은 사자일까.
“…….”
그리고.
뚜벅, 발걸음이 울렸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다섯 명의 기둥이 입장할 적에는 그저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구원하 남작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허리를 굽혔다. 머리를 조아렸다.
“바쁘신 와중에 회의를 요청드려 죄송합니다.”
명백히 다른 태도였다. 다른 기둥들을 맞이할 때와 달리 구원하 남작은 ‘탑의 목소리’를 쓰지 않았다. 메세지를 안 날렸다. 오직 자신의 목소리만을 써서, 직접, 발걸음의 주인을 경배했다.
“일전에 명하신 규정에 따라 회의를 소집했습니다만, 소집의 정당성 여부는 온전히 공작께서 판단해주십시오.”
“괜찮아요. 아주 정당해 보이는걸요? 언제나처럼 믿음직스러운 일처리예요, 소인의 자문사.”
“예. 감사합니다.”
탑주.
어떤 표정이든 지을 수 있고 어떤 목소리든 흉내낼 수 있는 자, 이 세계에선 만화경 공작이란 이명을 가졌으며, 나에겐 자수정이란 이름으로 익숙한, 백금발의 귀족이 나를 향해 화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탑의 주인이자 이곳의 귀족다운 체통으로 내게 인사—–.
“하이. 사왕.”
“…….”
“방가방가.”
“………….”
“어라? 반응이 옅네요. 최신식 인사법이라고 들었는데요. 이게 아니었나요? 하이염? 하이잉. 하여? 으흠. 할로할로?”
아니…….
댁, 아니요, 당신…….
여기저기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구원하 남작이 한숨을 쉬었고, 태고의 지팡이는 원래부터 한숨을 쉬고 있었으며, 다른 기둥들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새로이 한숨의 대열에 합류했다. 한숨 풍년일세.
“엄마! 그게 아니지!”
오로지 공녀만이 한숨을 쉬는 대신 인상을 팍 찡그린 채 따박따박 말했다.
“하이루 방가방가야!”
“아아. 그렇군요. 고마워요, 소인의 딸.”
“응. 엄마의 고마움을 기꺼이 받아줄게. 이제부터는 꼭 내가 가르쳐준 걸 헷갈리지 않고 써먹어.”
탑주 자수정은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굉장히 예스러운 동작으로 인사했다.
“다시 인사할게요, 사왕. 하이루 방가방가.”
당신 최종보스 포스 어따 갖다 팔았어.
그리고 그거 절대로 최신식 인사법 아니거든요….
36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