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6)
용사의 이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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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번 회차.
일찍이 탑의 튜토리얼이 종료되었을 때였다.
-전사들이여.
-탑에 오르는 자들이여.
헌터들은 광장에서 힘차게 카운트 다운을 외쳤다. 그런 광장의 상공으로 여신이 강림했다. 여신은 엄숙하게 기도를 올리는 사제처럼 읊조렸다.
-열한 번째 층에서 스무 번째 층까지.
-그대들은 시험에 직면할 것이에요.
-믿음의 시험을.
헌터들은 여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스테이지.
여태까지 기다려온 무대가 드디어 개막했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너도 나도 서둘러 11층으로 올라갔다. 심지어 여신이 칼에 베이는지 시험하는 헌터마저 있었다.
-그대들은 답을 찾을 것이에요.
하지만.
-그대들이 찾은 답은 다시금 그대들이 누구인가 밝혀주겠지요.
나는 그러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들었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그대 스스로를 알게 되리니.
지금 와서 생각하건대.
그 때 이미 우리는 계시를 받았다.
12층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탑에 오르는 자들이여.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보상을 받느냐가 아니었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누구를 의심할 것인지가 아니었다. 탑은, 단지 우리가 찾아낸 정답이 중요할 뿐임을 암시해주었다.
-그대들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여신은 단지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제 다시금 12층에 도착한 순간.
나는 그 때의 광경으로 마음을 물들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하였다.
“제가 5일 안에 20층까지 클리어하겠습니다.”
내가 결정한 답을.
2.
사위가 적막했다.
제일 먼저 말문을 연 자는 흑룡의 주인이었다.
“잠깐 기다려줘. 5일···?”
마녀는 어리둥절한 낯빛이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거니? 방금 5일 안에 20층까지 공략하겠다고 말한 거 같은데. 농담으로 한 말이면 별로 재미없으니까 물려주렴.”
“아뇨, 잘 들으셨어요. 농담도 아니고요.”
“······.”
마녀가 입술을 다물었다.
알현실에 내려앉은 적막함은 점차 술렁거림으로 퍼졌다. 헌터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보는 자, 믿을 수 없다는 낯빛으로 보는 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보는 자···.
‘이런 반응이 당연하지.’
나는 담담하게 모든 헌터의 시선을 견뎠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선언이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김공자.”
잠시 후에 마녀가 말했다.
“알잖아. 우리가 10층까지 클리어하는 데만 수년이 걸렸어. 물론, 방금 한 시간도 안 되어서 11층을 공략했으니 자신에 넘칠 순 있겠지만··· 과해. 너무 과한 자신감이야. 좀 지나치게 흥분한 거 아니니?”
“흑룡주.”
나는 머리를 숙였다.
“부탁합니다.”
“······.”
“제가 10층을 공략했지요. 여러분을 위해서 공략한 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성공하고 싶어서 클리어한 거니까요. 하지만, 제가 10층을 공략해서 얻은 보상과 성과는 여러분한테 나누었습니다.”
이제부터 집단전이 벌어질 거라는 정보도.
보스 몬스터의 위치를 알려주는 미니맵도.
나는 정보를 공유했고 덕분에 길드들도 피해를 최소화했다.
“-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득을 본 겁니다.”
그러므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저는 여러분한테 부탁을 할 자격이 있어요.”
“······.”
“20층을 클리어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5일. 제가 20층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든 실패하든 관계없이, 그냥 딱 5일만 기다려주십쇼. 이게 저의 부탁입니다.”
알현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내게 결코 불리하게 느껴지는 침묵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때문일지 몰랐다.
[환영합니다, 헌터 김공자.] [당신은 11층을 1위로 공략했습니다.] [11층 클리어 보상이 주어집니다.]지난번 회차보다 훨씬 더 빨리 알림음이 들려온 이유는.
예전엔 검성의 칼부림이 다 끝난 다음에 비로소 보상이 주어졌다. 시간이 한참 걸린 거다. 반면에 이번엔 달랐다. 내가 말문을 열자마자 보상에 대한 이야기가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오냐.’
마치 다급하게 내 주의와 시선을 끌려는 것처럼.
[수호의 여신이 당신에게 보상을 제시합니다.] [가을비의 마왕이 당신에게 보상을 제시합니다.]알림음이 연달아서 울렸다.
나는 어떠한 보상도 택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씨익 웃을 뿐.
‘우리가 싸우지 않으니까 조급해졌냐, 마왕?’
곧 여신의 보상과 마왕의 보상이 주르륵 떠올랐다. 힐끗. 나는 한점의 시선을 던져주었다. 그 이상의 관심이나 흥미는 일절 내비치지 않았다.
[가을비의 마왕이 보상을 택할 것을 권합니다.]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가을비의 마왕은 아예 보상을 포기할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몇 차례나. 계속해서.
내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재촉하든지 말든지.’
변함 없이 목석같이 굳건했다.
여신이 보상으로 제시한 역할들도, 마왕이 보상으로 제시한 것들에도 눈길을 안 줬다.
말 그대로 무시하였다.
괜찮다. 조급하게 굴지 마라.
계속 얼 타고 있으면 내가 직접 찾아가줄 테니까.
“음···.”
알현실에는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단심문관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제일 먼저 말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문제는 단순합니다! 김공자 헌터는 11층의 공략 정보를 저희와 공유했습니다. 그 대가로 부탁 한 가지를 들어달라고 요청했으며, 저희는 불가능한 부탁이 아닌 이상엔 들어주기로 약조했지요!”
이단심문관이 빙그레 웃었다.
“5일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전원, 여기서 대기할 것. 언론에서 5일 내내 난리 칠 것을 생각하면 마냥 간단한 부탁은 아니긴 해도··· 불가능한 부탁은 더욱더 아닙니다! 따라서 저는 찬성입니다!”
“물론 불가능한 부탁은 아니지만···.”
“약속은 약속입니다! 흑룡주!”
마녀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녀는 몇 번 입술을 뻥긋거리더니 결국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약속은 약속이지.”
사실상 내 부탁을 승낙하겠다는 말.
나머지 헌터들도 차례차례 내 부탁에 찬성했다. 마녀와 이단심문관. 이곳에서 제일 교양이 높은 헌터와 제일 똘끼가 높은 헌터, 둘이서 나란히 찬동해준 것이다. 길드장이 아닌 헌터들도 주위 분위기에 떠밀려서 5일의 침묵을 약속했다.
“본인은 그런 약속에 동참한 적 없다네.”
여기서 제일 꼰대 레벨이 높은 헌터를 제외하면 말이다.
“이 사람이 나눈 약속은 하나일세. 앞으로 5일 동안 젊은이를 지켜보겠다는 것이지. 그밖의 부탁은 들어줘야 할 까닭이 없네.”
“······.”
“자네가 20층을 클리어하기 위해 떠나겠다면, 나는 그저 약속에 따라 자네의 뒤를 밟을 뿐이라네.”
“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홀로 마왕을 상대할 것이다.
혼자서 이길 자신이 있긴 하지만··· 내 뒤에 검성이 있어 준다면 천 명의 아군을 더 얻은 셈. 굳이 따라오겠다는 걸 거부할 필요까진 없다.
나는 알현실을 둘러보았다.
“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습니다. 여러분.”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부터 5일 뒤에 뵙죠.”
끼이이익-.
알현실의 대문을 열고 나는 나아갔다.
대문 너머엔 드넓은 궁전이 펼쳐져 있었다. 궁전을 걸어 나가면 높은 담벼락이 줄지어 이어졌으며, 담벼락마저 넘어서 나아가면 이젠 아이김 제국의 수도가 펼쳐졌다.
이미 지난 회차에서도 한번 지나친 광경.
-어엉?
그렇지만, 달랐다.
-뭐야. NPC들이 다 멈춰 있네?
배후령은 나와 함께 거닐면서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봤다.
배후령의 말이 맞았다.
궁전을 지키던 기사 NPC도. 저잣거리에서 과일을 파는 노점상 NPC도. 따분하다는 얼굴로 순찰을 도는 경비병 NPC도. 궁전에서 도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NPC가 멈춘 채 가만히 정지되어 있었다.
‘퀘스트가 시작되지 않아서 그래요.’
일시정지 버튼이 눌러진 시간이었다.
나는 멈추어진 길거리를 터벅, 터벅, 가로질렀다.
멀찍이 내 뒤에서는 검성이 따라오고 있었다.
-퀘스트?
‘예. 아직 아무도 [역할]을 선택하지 않았잖아요.’
지금 제국에는 재상도 없고 기사단장도 없다.
원래는 반드시 있어야 할 나라의 중진들인데도 말이다.
이걸 헌터들이 대신해주는 것이 바로 12층부터 20층까지의 퀘스트였다.
‘11층 스테이지에선 입장하자마자 먼저 퀘스트부터 주어졌어요. 아마 그게 올바른 순서일 거예요. 그런데 12층에선 한참이나 머뭇거리지 않았습니까? 무슨 퀘스트가 주어지는 데 한 세월이 걸려요?’
먼저 역할을 선택한 다음에 겨우 퀘스트가 열렸다.
즉.
‘역할을 선택하지 않으면 퀘스트도 시작하지 않는 거죠. 마왕군의 침공도 일어나지 않고, 제국군도 침공에 맞서 싸우지 않아요.’
그래서 NPC들은 정지되어 있다.
그리고 계속 정지해 있을 것이다.
‘저희가 역할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에는.’
일종의 트리거.
상위 공략자들이 역할을 택하는 것 자체가 퀘스트의 시작을 발생시키는 조건이다.
‘그런데 말이죠, 검제 양반.’
나는 길거리를 건넜다. 행인들이 제각각의 자세로 멈추어 서 있었기에, 나는 행인과 행인 사이의 빈틈을 구불구불 돌아가서 빠져나갔다. 미로를 걷는 느낌이라 할까.
사람의 몸으로 이루어진 미로를 걷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알림음이 울렸다.
무시했다.
[가을비의 마왕이 보상을 택하지 않을 것이라면 아예 포기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 경우, 보상을 선택할 권리가 다음 공략자에게 넘어갑니다.]무시하고 걸었다.
[가을비의 마왕이 당신의 선택을 재촉합니다!]마침내 나는 성문을 빠져나갔다.
제국의 도시를 넘어가자 광활한 평야가 펼쳐졌다.
‘만약에 말이에요. 이 상태에서 마왕이 죽으면 어떻게 될 거 같아요?’
-뭐?
내 눈에는 보였다.
전장의 가호를 통해 비추어진 미니맵.
반투명한 지도에서 틀림없이 반짝거리고 있는, 단 하나의 붉은색 점.
아직 어떠한 몬스터도 소환되지 않은 지금 이 시점에서 빨간 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퀘스트가 시작하기도 전에 보스 몬스터가 뒈지면 어떻게 될 거 같냐고요.’
마왕.
‘간단해요. 아무도 마왕의 보상을 고르지 못하게 돼죠.’
-······.
‘당연히 배신자도 나올 수 없고요. 그냥 뭐, 수작질을 쫌 부려보기도 전에 아웃되는 겁니다.’
나는 평야를 가로질렀다. 붉은 점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붉은 점의 바로 코앞까지 도착. 조금만 더 걸어가면 보스 몬스터가 표시된 위치였다.
[가을비의 마왕이 당신에게 분노합니다!]이제 내 의도를 깨달은 것일까.
여기까지 와서야 내 머릿속에선 조금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의 하늘이 검게 일렁거렸다. 블랙홀처럼 새까만 구덩이가 벌어지더니, 그 틈에서 구정물 같은 진액이 흘러나왔다.
한 방울. 한 줄기. 한 덩어리.
진액들이 모여서 점차 형태를 크게 이루었고, 그 형태에선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감히.
마왕은 격분하고 있었다.
-제대로 순서를 밟도록 하여라, 여신의 용사여.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고 이곳에 오다니 무엄하도다. 제국의 관을 이어받은 자만이 비로소 내 검을 받을 자격이 있다.
“웬 헛소리람.”
나는 칼자루를 꾹 쥐었다.
“난 제대로 선택했는데?”
-무슨···.
“봐. 이게 최선의 선택이잖아.”
아직 퀘스트가 시작되지 않은 시간.
제국의 도시가 아직은 마왕군에 침공받지 않고.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죽지 않은 세계.
“마왕. 나는 퀘스트가 시작하기 전에 너를 죽인다. 그러면 단 한 명의 헌터도 죽지 않을 거고, 단 한 명의 제국인도 죽지 않겠지. 물론 배신자 따위도 나오지 않아.”
-······.
“이해했냐. 아무런 희생도 없는 해피엔딩이다.”
내가 씩 웃었다.
“옛날부터 난 배드엔딩은 쫌 그렇더라. 성격 탓인가? 가능하면 아무래도 해피엔딩을 선호하거든. 댁이 좀 지랄같이 방해해서 해피엔딩을 못 보겠으니까, 미안한데 좀 죽어줘라.”
-감히···.
마왕의 형체가 꿈틀거렸다.
-감히 혼자서 이 나를 막아보겠다는 말인가! 제국의 도움을 받지도 않고!
“그래.”
나는 칼을 뽑아 들었다.
시커먼 형체를 향하여 칼끝을 정확히 겨누었다.
“도움은 무슨 도움.”
드넓은 평야.
멈추어진 시간과 정지해버린 세계 한가운데.
나의 검은 하나의 시침이 되어서 적을 겨냥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원래 용사는 혼자 싸우는 거다.”
영원의 5일이 시작되었다.
3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