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60)
3.
나는 하이루 방가방가가 어째서 최신식 인사가 아닌가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니까 탑을 만든 주인한테 하이루 방가방가라는 7글자 단어에 대해 해설하는 시간을 가진 것인데, 설마 내 인생에 이런 시간이 찾아올 줄은 나도 몰랐고 탑주도 몰랐고……. 아무튼 다 몰라. 그걸 누가 알아??
“소인은 알고 있었어요. 사왕. 설마 몰라서 그랬을까요? 그대가 긴장하고 있을까봐 배려하는 마음에서 일부러 조크를 던진 거예요.”
“아하하. 정말로 진짜로 초고급 나이스 조크였습니다, 부장님.”
“부장이 아니라 탑주지만요.”
그러면, 하고 탑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의가 제기되었으니 처리를 해야겠지요.”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그리고 마법사를 흘끗했다.
“사왕과 태고의 지팡이는 앞으로 나와주세요.”
“…….”
마법사는 지팡이를 쥔 채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대회의장에선 국왕이 앉아서 의장을 보던 곳. 옥좌. 탑주는 의자 다리 밑바닥에 앉은 채 자기 머리를 옥좌의 팔걸이에다 슬며시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태고의 지팡이], 두 사람은 옥좌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것이다.
“발의자는 비명을 모으는 하늘. 의제는 태고의 지팡이에 대한 불신임. 이것으로 틀림이 없나요?”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탑주는 턱을 짚은 채 흐응, 소리를 냈다.
“[이의제기]나 [건의]가 아니라 [불신임]이란 말이지요.”
초승달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미소가 그 입가에 그어졌다.
“좋네요!”
탑주는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멈칫하기도 전에, 탑주의 말이 이어졌다.
“먼저, 기둥들은 이러한 상황을 불쾌하게 여기지 말아야해요.”
탑주는 기둥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 자리에 사왕을 좋게 여기지 않는 이들이 많다는 걸 알아요.”
기둥들은 말이 없었으나, 탑주는 그런 기둥들의 내심을 익히 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건방진 것.”
“오만한 것.”
“갓 하늘에 발을 딛은 샛별 주제에 기둥이 하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다니.”
“하물며 불신임이라니!”
“규칙들을 갖고 놀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거늘.”
“예쁘다 예쁘다 해주니까 기어이 선을 넘는구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된 지금도 탑주의 말은 뱀의 쉭쉭거림처럼 들려왔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제한을 두어 왔다.”
“원하는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음에도 스스로를 절제하고 있다.”
“그것만 해도 우리는 은혜를 베풀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방자한 것.”
“아무 상관 없는 너희들의 세계까지 챙겨주고, 네가 빛날 수 있는 여건까지 만들어주었거늘, 사왕. 이것이 네가 우리에게 보답하는 방법이란 말이냐.”
기둥들은 미동도 없었다. 얼굴 근육 하나의 움직임도 없었다.
하지만 탑주의 목소리는 그 기둥들 주변을 떠돌면서 마치 한꺼풀 피부 속의 힘줄처럼 꾸물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히.”
“감히 탑주에게 결투 신청을 하였겠다.”
“50층에 오르기도 전에.”
“별자리의 이름을 얻기조차 전에.”
“건방진 것이.”
“싹수가 노란 것 같으니라고—”
팡! 풍선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졸아 들던 공기가 흩어졌다.
탑주가 손뼉을 친 것이다.
“—라고.”
탑주는 기둥들을 한 차례 더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줄 알아요.”
“…….”
“그러지 말아주세요.”
탑주의 목소리는 대지가 갓 빚어낸 수정처럼 맑고 깨끗했다.
“왜냐하면, 여러분. 지금 사왕이 하고 있는 그런 [건방지고] [오만하며] [싹수가 노란 짓거리]들은, 바로 정확히 소인이 이 자리에 서기 전까지 해오던 짓들이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투명했다.
“단순한 이의제기나 건의가 아니라 불신임을 제기하는 것. 당신이 하는 일은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어서, 조금 손본다고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소리치는 것. 그것이야말로 소인이 탑을 세우기 이전 온갖 방면에서 행하던 일이고, 소인을 초특급 또라이로 만들어준 일이라는 걸, 다른 누구도 아닌 여기 모인 기둥들만큼은 알아주어야 할 것이에요.”
“알지만.”
처음으로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시초를 입법한 자였다.
“탑주와 사왕은 같지 않아.”
시초를 입법한 자는 조용하지만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탑주는 단순히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소리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어. 더 나은 [대안]을 제시했지. 불신임을 제기하는 데에서 그만 두지 않았어.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말하고 시행했지.”
시초를 입법한 자가 나를 보았다. 열없는 눈동자였다.
“손가락질을 하는 건 쉬워. 비난을 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건 편해. 비웃는 것은 재미있고, 규탄하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야.”
“…….”
“그리고 많은 이들은 그냥 거기서 그만두지. 그 이상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아.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고 자신이 더 낫게 하겠다고 말하지도 않으며 그에 따른 책임을 짊어지고자 하지도 않지. 이해하고 납득하지만, 글쎄. 그걸 공정한 태도라 여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건 사왕에게 공정하지 않은 말이군요.”
탑주가 곧바로 말했다.
시초를 입법한 자가 멈칫했다. 탑주는 시초를 입법한 자를 바라보면서 턱을 괴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또한 지금까지 사왕이 걸어온 여정을 알잖아요.”
“…….”
“사왕은 그치지 않던 가을의 비를 거두어 들였고 영원한 동토에 모란을 피워냈지요. 심장의 도금을 녹여냈으며, 스스로를 잃어버린 인형에게 스스로를 찾아주었어요. 그 밖에도 자신을 향한 비판과 비난들을 피하는 대신 하나하나 받아냈고요.”
탑주는 조용히 말을 맺었다.
“그러니 사왕을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일이에요. 이 부분을 분명히 해두고 싶군요.”
“…….”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탑주는 나를 돌아보았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기도 해요. 사왕.”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조용히 경청할 뿐.
탑주의 말이 이어졌다.
“이미 알고 있을 사실을 다시 한 번 알도록 하세요, 사왕. 누군가를 불신임한다는 선언은 결코 속 편한 이의제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그 누군가의 자리를 직접 자신이 대신하며, 그 누군가가 해왔던 일들을 모두 자신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예요.”
“예.”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말했다.
“물론입니다.”
“좋아요.”
팡! 다시 한 차례, 탑주가 손뼉을 쳤다.
“전제가 명료해졌으니 해야 할 일은 간단하군요.”
탑주는 팔을 펼쳤다.
“언제나 해오던 것처럼, 사왕. 스스로를 증명하세요.”
4.
탑주는 우리에게 룰을 선언했다.
“사왕이 자신에게 그만한 실력과 의지가 있음을 증명할 경우, [태고의 지팡이]에 대한 불신임은 가결. 태고의 지팡이는 기둥직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에요. 그 말은 곧, 사왕이 태고의 지팡이를 대리하여, 이 탑의 [저승]을 맡는다는 뜻이지요.”
“반면, 그러지 못할 경우. 마땅히 그만한 대가를 각오해야 할 것이에요.”
그 대가가 무엇인지, 탑주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특유의 미소를 지은 채 이렇게 덧붙였을 뿐.
“적어도 소인에게 도전할 자격이 없어진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 없겠지요.”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알겠습니다.”
“좋아요.”
탑주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미소는 이번엔 마법사를 향했다.
“태고의 지팡이는 어떤가요?”
“……문제 없어.”
태고의 지팡이가 대답했다. 가을의 나뭇가지가 붉은 단풍잎을 사려 쥐듯이.
우리를 제외한 기둥들은 멀찍이서 원형을 그리며 둘러앉았다. 인원이 작을 뿐이지 이곳은 콜로세움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결투에 걸린 대가는 여느 검투장보다 작지 않았다.
[다수결 투표 현황을 공지합니다.] [사왕 0표, 기권 2표, 태고의 지팡이 3표, 입니다.]당연하지만 시작은 내게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여러차례 괘씸죄를 지어왔다. 탑주가 그것을 고려하지 말라 말했다고 해도 영향이 없을 수는 없겠지. 또한 태고의 지팡이는 긴 시간 같은 기둥으로서 일해온 동료이기도 했다.
하지만 거꾸로 보면 그럼에도 2표나 기권이 존재하는 것이다. 기둥 중 2명이나 유보적 입장을 취해주고 있다. 나로선 기분 나쁜 상황이 아니다.
“이 상황이 대단히 서운하다는 것부터 이야기해야겠구나.”
먼저 입을 연 것은 마법사였다.
“사왕. 나는 당신에게 편의를 봐주었어. 관리자로서 선을 지키는 동시에, 선이 허락하는 한 되도록 당신을 배려했지. 그런데 이게 배려의 대가니? 검제 이후로 등장한 신성인 당신을 밀어주려 했는데. 나는 네 후원자가 될 수 있었어. 나를 기둥직에서 탈락시켜봤자, 너는 네 손가락을 스스로 잘라버리는 거나 다름없단다.”
“…….”
“지금도 안 늦었어.”
마법사는 나의 이익을 논했다. 자기가 베풀어준 것과 앞으로 베풀어줄 것을 내게 상기시켰다. 자신의 지위와 권능으로 얼마나 너를 도울 수 있겠느냐며.
태곳적부터 가장 단순하면서도, 그러기에 가장 강력한 설득법이었다.
“맞아. 유수하를 심판역으로 지정한 것은 내 오판이었을지 몰라. 네 지적이 옳아. 인정하고 사과할게. 하지만 기둥도 실수를 저지를 수 있어. 단 한 번의 실수로 나를 규탄하겠다니, 이 무슨 오만이니?”
다음으로 마법사는 자신의 인간성을 강조했다. 한걸음 물러서는 척하면서, 한걸음 물러서게 만든 내 쪽을 비방했다.
이 또한 유효한 공격이었다. 마법사는 이 결투가 어디까지나 다수결에 의해 결딴난다는 걸 잘 알았다. 나를 설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둥들을 설득하는 일.
“무엇보다 나를 끌어 낸다손 치자꾸나.”
마법사는 가벼이 한숨을 짓고서 말을 이어갔다.
“탑이 세워진 시초 이래, [저승]을 어찌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어. 그리고 그 중 내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내가 70층부터 79층까지의 설계를 점유하게 되었지.”
탑의 역사.
“기둥들에 대한 불신임 선언이 이번이 처음이라 생각하지 말렴. 탑이 세워진 이래, 많은 별자리들이 기둥의 자리를 탐했거든. 그리고 나는 가장 민감한 사안을 맡고 있는 기둥으로서, 그만큼 많은 공격을 받아왔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둥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법사는 지팡이의 끄트머리를 가볍게 입술로 물었다.
곰방대를 입에 물듯이.
“결국은 시초를 입법한 자가 말한 것과 정확히 같은 문제가 그들을 가로막았지.”
“…….”
“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건 간단해. 누구나 지적은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책임은? 나의 천국들을 대신할 대안이 과연 당신에게 있을까?”
마지막으로 마법사는 자신이 승리해야만 하는 이유를 논했다. 자신이 유능하고 내가 무능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상대적인 문제에 불과했으나, 상대적인 고로 다수결로 결정될 수 있었다.
“나는 영혼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어. 그들이 바란 행복이고, 그들이 누리고자 원한 행복이며, 내가 줄 수 있는 행복이야. 내가 그들에게 주는 만큼 당신이 그들에게 줄 수 없다면, 사왕. 너는 결코 나를 이길 수 없단다.”
칼과 같은 논리가 세 갈래로 나를 끊어쳤다.
하나만 막아내면 끝날 공격이 아니라, 세 방향의 공격을 전부 쳐내야만 비로소 내 몸은 온전해질 터였다.
“답을 들어볼까.”
“음.”
나는 검지로 손수건을 지그시 문질렀다.
그래. 남의 무덤을 파려거든 자신의 무덤 자리부터 먼저 펴야지. 그리고 나는 항상 심장에 몇 개의 무덤을 파두고 있다.
“당신이 저를 배려해준 것은 맞습니다. 마법사 씨.”
급할 거 없다.
가장 쉬운 검로부터 쳐낸다.
“제가 검제 이후로 오랜만에 다시 등장한 신성이라 했습니까. 그래서 밀어줄 생각이었다고요. 하지만, 애당초 왜 저를 밀어주려는 건가요? 설마 제게 개인적인 호감이 있어서, 그냥 밀어주고 싶어서 밀었던 건 아닐 테지요.”
“…….”
“당신은 검제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도 않아요. 괜히 말썽을 피우는 자라고 여깁니다.”
진천세계(眞天世界)를 클리어하고 나서 당신의 반응을 보았다.
「이, 천하의 둘도 없는 골칫덩어리들아!」
「검제. 당신이 천공극점 공략에 실패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만은 말해둘게.」
절대로 호의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즉, 당신은 100층에 도전하는 헌터라고 해서 무조건 밀어주진 않아요. 저만이 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판단한 거 아닙니까?”
“…….”
“당신에겐 당신만의 숨겨진 이유가 있겠지요. 이유가 있어서 저를 지지했습니다. 그 이유가 탑주와 관련된 것일지, 100층의 비밀과 연관된 것인지, 모르지만. 당신은 그저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절 이용하려 한 것입니다. 제 이익이 아니라 당신의 이익을 위해서요.”
“누구나 그러지. 나를 속물이라 여길 셈이니?”
마법사의 낯빛은 태연했다.
내 말이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다 이거로군.
나는 구원하 남작 쪽을 쳐다봤다.
[사왕 0표, 기권 2표, 태고의 지팡이 3표]남작의 머리 위에 투표 현황이 마력으로 새겨져 있었다. 스코어엔 아직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는 태세를 재정비했다.
“아니요. 그리고 전 당신이 한 번의 실수를 저질렀다고 규탄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안타깝네. 내 눈엔 그리 보일 수밖에 없거든.”
“실수란 의도치 않았는데 저질러진 잘못입니다. 하지만 만약 의도되었다면요? 알면서도 방치해버렸다면요? 뻔히 일어날 줄 알고, 일어날 것이 자명했는데 단지 방관했을 뿐이라면 어떻습니까. 그것도 실수입니까?”
“마치 내가 일부러 심판을 잘못 골랐다는 듯 말하는구나.”
“유수하가 처음일까요?”
“뭐?”
“유수하가 과연 당신이 저지른 첫 번째 실수이자 유일한 실수이겠냐는 말입니다.”
“…….”
처음으로 마법사가 멈칫했다.
“헌터들이 죽으면 어느 천국층에 배속될지 당신이 결정하지요. 판단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유수하가 천국을 원할 거라는 오판을 범했어요. 이번엔 제가 실수를 알아채서 다행히 지적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유수하 말고 다른 헌터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졌습니까?”
“…….”
“당신이 잘못을 저질러도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아무도 지적할수 없었고. 그러니까 이것이 유일한 잘못처럼 보이는 거고, 실수처럼 보일 뿐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실수들이 그동안 숨겨졌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기둥들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굳이 오러로 감각을 증폭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시선이 내 얼굴 가죽에 들러붙어 따끔거렸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제가 71층에서 76층을 깨는 동안 총 6번의 천국이 있었습니다. 6번 중에 1번, 당신은 실수를 범했어요. 그래요. 어쩌면 이번만 우연히 실수가 터진 걸 수도 있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60번 중 1번 꼴로 실수가 있었다면? 하다못해 600번 중에 1번이었다면? 당신의 오판으로 인해, 실수로 인해, 잘못된 천국으로 가버린 영혼들이 언제나 항상 있어왔다면, 어쩌겠습니까.”
“…….”
“그런데도 여전히 그걸 실수라고 부르시겠습니까.”
꾸욱.
지팡이를 쥔 마법사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있겠지. 있고. 있을 거야. 하지만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한단다. 사왕. 네가 나보다 더 잘 판단할 수 있니? 누가 어느 천국에 가야 하는 건지 어디에 가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 태고의 지팡이인 나보다 더 유능하여서 잘 할 수 있다는 거니?”
넌 그럴 수 없다.
확신이 담긴 반문이었다.
여태껏 태고의 지팡이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판결을 내려왔겠지. 수없는 판단 착오와 시행 착오를 거쳐서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다. 무한한 시간과 무수한 눈물로 자신만의 경험, 노하우, 팁을 쌓아올렸을 것이다.
그것을 부정할 도리는 내게도 없는 것이다.
“예. 저는 당신보다 더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게 없을 뿐이다.
“그러니까, 직접 물어보지요.”
“뭐를 말이니?”
“죽어버린 사람들에게. 죽어서 당신 앞으로 와서 판결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것만이 대답이다.
“헌터들은 스스로 결정해서 탑에 왔습니다. 어디로 갈 것인지 결정하는 건 그들의 몫이에요. 지금처럼 질문도 없이 당신 혼자서 판결한다면 계속해서 똑같은 실수들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로 가고 싶은가 그들에게 물어보세요.”
“……하. 그들에게 물어보라고?”
마법사는 헛웃음을 흘렸다. 명백하게도 나를 질타하는 음색이었다.
“좋아. 어디 한번 네가 직접 물어보렴! 물어볼 수 있다면 말이지!”
툭.
마법사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들기자, 허공에 하얀 물결이 쳤다.
그리고 물결 아래에서 새까만 손가락이 올라왔다.
-우어어어….
인간의 손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인간의 형태로 일렁거리는 그림자였다.
-구으, 우으으으.
-그어어어어!
손가락도 손바닥도 손목도, 모조리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명암마저 없었다. 오직 흑색. 새까맣게 소용돌이치는 노이즈들만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했다.
드넓은 대의회장은 순식간에 수백 개의 노이즈로 뒤덮였다.
“…….”
구원하 남작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차르르륵! 철컹, 철컹!
밑바닥에서 쇠사슬이 솟구쳤다. 쇠사슬은 단숨에 노이즈들을 한 명씩 얽매었다.
-우어어어어!
-그으…. 그르르륵….
노이즈들은 속박된 채 으르렁거렸다. 말 그대로 흉(凶)한 기세였다. 쇠사슬에서 풀려나면 당장이라도 우리들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자! 이것이 네가 영혼이라 부르는, 탑에서 죽어버린 것들의 말로야!”
마법사는 소리쳤다.
“살아생전의 감정만이 남아 비명밖에 지를 줄 모르는 것들이지.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상처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 넝마짝이야! 저것들은 죽음에 이르고 만 목숨이고, 부서져버린 돌들이다! 본질적으로 그것과 다를 바 없어!”
“…….”
“어디 네가 물어보렴. 나를 대신해서 물어봐줘. 어디로 가고 싶느냐고. 이미 세상을 버렸다가 다시 한번 세상에 버려진 당신들이, 어디로 가야 마침내 만족하겠느냐고. 사왕. 네가 대신 물어봐서 알아주면 정말 좋겠구나.”
마법사는 누군가를 비웃는 듯했다,
비단 나만을 비웃는 것은 아니리라.
“저것들에겐 기억도 없어. 죽었으니까. 왜 상처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원인은 사라지고 그 상처만이 남아서 저것들을 괴롭힌단다. 아니, 괴로움 그 자체가 바로 저것들이라고 할 수 있지. 저것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대답은 [아프다]라는 비명뿐이야. 어쩌면 대답조차 아닐 거란다. 돌이 바스라지면서 내는 소음을 대답이라 할 순 없지. 궁금하구나. 내가—-, 저것들에게 무엇을 물어볼 수 있겠니?”
지지직,
마법사가 퍼트린 허공의 물살에서 희미한 그림이 비추었다.
움직이는 영상이었다.
“난 그저 볼 수밖에 없어.”
사방에서 영상들이 재생되었다.
살아생전, 노이즈들이 겪은 일생의 축약본.
시꺼먼 소용돌이에 잡아먹히기 전에 그들이 가졌던 얼굴과 웃음이 영상 속에선 재현되고 있었다.
“최대한 꼼꼼이 살펴보고 난 다음에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어. 그게 다야. 전부야. 맞아. 보는 것만으로는 알지 못해. 알지 못할 때가 있어. 하지만, 뭘 더 할 수 있을까? [지켜보는 것] 말고 여기서 무엇을 더.”
과연.
그랬구나.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오오오오.
-우그으, 우으으으…!
노이즈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시선이 없었다. 더는 어떤 것도 바라볼 수 없었고 비출 수 없었다. 오직 외부에 의해 바라봐 지거나 부서질 수밖에 없는 죽음들. 수없는 죽음.
“…….”
죽음.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게 익숙한 것.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우리는 아직 무언가를 더 할 수 있다.
나는 얼굴을 돌려 태고의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뭐?”
“그저 일생을 바라보고 지켜보는 것 이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마법사 씨. 아직 있어요.”
“도대체 뭐가 있다는 말이니?”
마법사는 이해하지 못한 낯빛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모든 것이 명확했다.
내가 할수 있는 일. 내가 하고자 하는 것. 나의 이명, 만일 내가 성좌가 된다면 어떤 성좌가 될 수 있는지, 모든 것이 돌연 분명해졌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이제껏 해온 것들을 행하는 법이겠지요.”
그 분명함으로 나는 행동했다.
“자.”
천천히 걸어가, 망자의 앞에 서서 양 팔을 펼쳤다.
“나를 죽여라.”
마법사가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망자가 내 목을 물어뜯었다.
[당신은 죽었습니다.]태고의 지팡이가 경악하여 눈을 치켜뜨는 것이 슬로우모션처럼 읽혀졌다. 그렇게, 내 행동의 의미를 마법사가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기둥들 중에 누군가 한 명은 내 속내를 간파한 것일까.
목소리가 울렸다.
[다수결 투표 현황을 공지합니다.] [사왕 1표, 기권 1표, 태고의 지팡이 3표, 입니다.]그리고.
[페널티 심도는 상상(上上).] [인간도(人間道)입니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생합니다.]자아.
지켜보는 것 이상을 해볼까.
36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