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68)
3.
“일단 진정하여라. 공자여. 눈에 살기가 도사리는군.”
라비엘은 자신의 옆에 놓인 의자를 툭, 건드렸다.
의자 팔걸이를 두들기는 데 쓰인 부채 역시 내가 선물한 상등품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단순히 값비싼 선물이 아니었다. 내 스승님의 호적수였으며 이젠 천무문의 태상호법으로 물러난 무림맹주, 부월선 남궁운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부채였다.
라비엘은 내가 들이닥치리란 사실을 미리 짐작했겠지. 그녀는 현명했다. ‘진정하거라’라는 말 한마디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내 감정을 잠재울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과연 라비엘의 의중은 적중했다. 스승님의 인연이 끝자락에라도 닿아 있는 물건을 보자 불타오른 심장에 얼음이 부어졌다.
그래봤자 용암에 얼음조각을 쏟았을 뿐이지만.
“……제가 만일 지금 살기를 품지 않는다면 언제 품어야 할까요.”
“그것이 언제가 되었더라도, 그 언제가 지금 이 순간일지라도, 그대가 살기를 품어야 할 장소가 내 눈앞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장소의 문제로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분노가 뭉툭해지는 걸 바라지 않아요. 라비엘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저의 이성이 감정에 고삐를 물릴 테지요.”
나는 나직이 말했다.
아니, 라비엘의 죽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내 목소리는 조용하게만 흘렀다.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한낱 목소리 따위로 심장을 물든 분노의 열기가 새어나가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 한 점이라도.
“저는 순수한 분노로, 오롯한 감정으로 피를 묻히고 싶습니다. 감히 누가 라비엘에게 손을 댔는지 먼저 알려주세요.”
“내 귀에는 그저 미치고 싶다는 얘기로 들린다만.”
“바로 들었습니다.”
“…….”
라비엘은 입술 끝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만족하는 것 같았으며,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것 같았고, 아주 잠깐 내 감정의 파도를 보고 어깨를 떤 것도 같았다.
하얀 얼굴에 새겨진 입술의 곡선을 보고 나는 깨달았다.
끝났다.
라비엘은 자기 자신의 죽음보다, 그 죽음에 격노하고 있는 나의 반응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나를 죽인 자를 죽이고 싶은가.”
“……예.”
입안에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입술을 깨문 이빨이 기어코 붉은 속살까지 파고든 것이다.
“어떻게 죽이고 싶은가?”
“찢어, 죽이고 싶습니다.”
나는 이 대화가 어느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어느 바다로 흘러갈지 알았다. 알면서도, 내 이빨을 한 굴레의 바퀴로, 내 혀를 한 줄기의 냇물로 삼아 대답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의 질문에 침묵할 수는 없었으므로. 결코.
“이빨의 선에 따라 입술을 잘게 썰고 싶습니다. 벌어진 이빨의 틈새와 잘려진 입술의 틈바귀로 그 녀석의 목소리가 꼴사납게 비틀어지는 것을, 기어이 봐야만 하겠습니다.”
“눈은?”
“파내어다가 그놈이 잃어버린 혈관과 신경을 제 오러로 이어두렵니다. 그리고 다시 눈구멍에 넣겠습니다. 한 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차라리 장님이 되길 바랄 정도의 고통을 안겨주지요.”
“…….”
라비엘의 웃음은 한층 더 짙어졌다.
이제는 눈으로도 보였다. 그녀의 왼쪽 귀밑, 가느다란 목선이 짧게 경련했다. 라비엘은 내가 완전히 이성을 놓아버린 광경을, 희귀하기 그지없는 남편의 광기를 맛보고 있었다.
“.라비엘.”
“그렇군. 내 사려가 깊지 못했다. 문을 닫아라.”
라비엘은 내 등 뒤로 활짝 열려 있는 침실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대의 이런 목소리와 이런 얼굴을, 행여라도 다른 자가 감상하도록 내버려둘 순 없지. 온전히 나에게만 허락되어야 할 사치니까.”
“닫아다오. 공자여.”
문을 닫았다.
침실의 공기가 한층 독해졌다.
독은 푸른 백합향이었다.
“손은? 손목은? 손등은. 손가락은. 손톱은 어찌할 작정인가.”
독의 근원지는 빨간 눈동자였다.
“듣고 싶구나.”
나는 입을 열었다.
“들려다오. 나의 사랑.”
들려주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지옥이, 지옥조차 미지근하다며 비웃어버릴 백열의 연옥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심장의 온기와 피의 독기를 머금은 채.
라비엘은 내 온기와 독기를 마음껏 탐닉했다. 포식했다, 고 말해도 좋으리라.
내 분노가 붉은 피를 원한다며 으르렁거릴수록, 라비엘의 붉은 눈동자에선 윤기가 돌았다. 반들반들해졌다. 나의 독기가 그녀에겐 생기처럼 달콤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 죽일 것인가?”
라비엘은 배부른 사자처럼 나른하게 물었다. 모든 포식을 끝마쳤다는 듯.
“예.”
“그대가 거둬들인 그림자들 중에선 살인자가 아닌 자가 더 드물겠지. 더러는 살인마도 있을 것이며 더러는 학살자마저 있을 것이다.”
“아아…….”
“나를 죽인 자는 마땅히 대가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공자여. 나의 사랑이 그 대가를 실현시켜주겠노라 나서는 것까지야 말릴 생각이 없다. 허나, 과연 대가의 무게가 정당하게 매겨질지는 모르겠구나.”
나는 이마를 짚었다.
라비엘은 내게 공정해질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에스델을 받아들이고 유수하마저 용서한 나였다. 그들을 수용했을 때 내세운 기준이, 이번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라고 라비엘은 말한 것이다.
“라비엘……, 하지만.”
“그대가 죽었을 때 내가 똑같은 분노를 느끼지 않았을 것 같은가?”
심장이 느려졌다.
“나와 반지를 나눈 이후, 그대가 몇 번이나 죽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몇 번을 참았다고 생각하는가.”
“공자여.”
라비엘이 미소를 지었다.
“그대도 내가 참은 만큼 인내해야 할 것이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라비엘은 나의 분노를 알았다. 분노를 잠재울 방법도. 절대로 분노를 터트리지 못하게 할 한마디의 말도.
설령, 나에게 무언가 더 할 말이 있었다고 해도 입밖으로 흘러나오진 못했을 것이다.
라비엘은 나의 손목을 잡아당겨 입술을 막아버렸다. 뜨거웠다. 혀가 데일 정도로. 내 심장에서 토해진 열기는 역시, 그녀가 모조리 빼앗아간 게 분명했다.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4.
결국 우리가 진정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한 건, 해가 지고 노을이 번져 은빛달이 창문 너머로 히끗거릴 무렵이 되어서였다.
“황태자다.”
라비엘은 한결 열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목소리의 저음이 얼음바다에 잠긴 것만 같은 울림. 내가 좋아하는 라비엘의 목소리였다.
“빌어먹을.”
하지만 라비엘이 밝힌 내용은 결코 내가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라면사리 새끼. 금발로도 부족해서 이젠 뇌 속까지 우동면발이 되어서 퉁퉁 불어터졌답니까?”
“음. 나는 언제나 그대가 황태자를 뭐에 비유할지 기대하노라. 이번에도 만족스럽군….”
네 시간에 걸쳐서 간신히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점화되었다.
그러나 이미 한번 불길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잿더미밖에 안 남았다. 라비엘이 의도한 대로, 아까에 버금가는 수준의 분노는 일어나지 않았다.
불씨가 태우지 못한 곳에서 물기가 스며들었다. 이성이었다. 차가운 판단력이었다. 오래된 습기처럼 내 두개골에 늘러붙은 이성이 나로 하여금, 거의 습관에 가까운 판단들을 흘려보냈다.
“……하긴. 황실이 아니라면 감히 이반시아의 공작을 해치울 엄두조차 못 내겠지요.”
일단 윤활유가 돌아가자 나머지는 간단했다.
내 사고는 빠르게 회전했다.
“그렇지만 작금의 황제는 현명한 군주입니다. 제국의 권력추가 이반시아가(家)에 기울었음을 알고 있어요. 이건, 황실 전체의 수작질이 아니라 황태자 한 사람의 독단일 겁니다.”
“흐음.”
라비엘은 턱을 괴었다.
그녀는 즐거워하고 있었으며, 내게 계속 말해보라 눈짓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비엘이 죽으면 누구나 바로 황실을 의심하게 됩니다. 황제는 자기가 무고하다고 주장하겠지만, 사람들의 의심을 막기란 어렵겠지요. 바로 그때 황태자가 황제를 향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빠득.
어금니를 깨물면서도 나는 나의 추론을 말하였다.
“[황제가 권력에 눈이 멀어 제국의 충신을, 이반시아의 공작을 암살했다. 황태자가 된 몸으로서 차마 제국이 무너지는 모습을 두고볼 수 없다. 이에, 피눈물을 머금고 봉기하겠다. 나는 비록 부친에게 불효를 저지르게 되겠으나 나 홀로 오욕을 짊어져 제국을 구할 수 있다면 기꺼이 칼을 들리라.]”
라비엘은 내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나한테 확신을 심어주었다. 미친 새끼. 권력에 눈이 먼 라면발 새끼. 꼴에 제국의 후계자라고 살려줬더니, 황제와 황실의 체면을 배려해서 눈 감아주었더니. 감히.
“지금은 파혼되었다지만 황태자는 한때 라비엘의 약혼자였습니다. [비록 불우한 결말을 맞이하긴 했더라도 과거 약혼을 나누었던 귀족의 죽음을 방관할 순 없다.] 그럴싸한 명분을 울부짖어서 공작가의 지지를 얻어볼 작정이겠군요.”
“실로 안타깝구나…….”
라비엘은 달게 졸여진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은 항상 그대의 무위에 경탄하지. 그대의 머리에도 한 자루의 잘 버려진 칼이 숨겨져 있음은 다들 모른다. 하기사 사람들이 뭘 알겠는고?”
“…….”
나는 헛기침을 했다.
“……황태자가 공작가의 지지만 얻는다면 실상 귀족파를 등에 업는 셈입니다. 반정이 성공할 가능성은 높다고 제 딴에 머리를 굴려 계산했을 테고요. 예. 제 딴에는.”
나는 라비엘을 바라보았다.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이반시아 공작을 시해한 범인은 황제다]라는 확신을 사람들한테 심어줄 필요가 있어요. 라비엘. 내일, 어디서 눈을 감게 되었습니까?”
“이반시아의 달이 이리도 현명하니 제국인들은 기뻐해야 할 것이다.”
라비엘은 나의 추론을 전적으로 긍정했다.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황궁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역시.
“……암살이 아니라 독살이었군요. 라비엘을 내버려두고 금사매와 열애한 병신이 그놈입니다. 반반한 얼굴로 황궁의 시종이라도 꼬셨겠지요.”
“옳다. 100점 만점의 답안지에 120점을 그려준다 한들 본인을 질책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보나마나 황태자 본인은 그때 황궁에 없었을 거고요. 그래야 의심을 피할 테니. 뭐 어디 사냥이라도 갔습니까?”
“150점이로군.”
“하. 사냥을 핑계로 황실근위대를 몇 명이라도 끌고 갔겠군요. 라비엘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병사들을 앞세워 황궁에 들이 닥칠 수 있으니까요!”
“200점인가……. 곤란하다, 공자여. 제아무리 본인이 공작이라 하여도 만점의 두 배 이상을 줘버리면 과연 심사자로서 공정한 것인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대는 나를 편파판정에 시달리게 할 작정인가?”
“좋습니다. 잠깐 황태자를, 황태자의 사냥에 동참한 잡것들을 죽이고 오겠습니다.”
“다시 100점을 빼서 도로 100점으로 맞추었으니, 그대의 배려가 참으로 깊다.”
“…….”
나는 라비엘을 바라보았다.
라비엘도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까 다섯 시간은 제 분노를 잠재우기에 너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호오.”
“더 생각해보니까 라비엘이랑 만나서 이렇게 단 둘의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만인가 싶은데, 그까짓 황태자 새끼 때문에 이 시간을 오롯하게 즐길 수 없다는 것이 무척 빡치는군요. 개새끼!”
“하여?”
“그냥 하루 내내 저랑 놀아요.”
“하루라는 시간을 황태자의 무리한테 넘겨줄 작정인가?”
“아니요. 하루 논 다음에 하루를 돌릴 겁니다.”
“명안이로군. 그대의 제안을 거부해야 할 이유를 본인은 찾지 못하겠다.”
우리는 하루종일 놀았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그리고 하루 더 놀았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놀다 보니까 하루 더 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워졌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세상? 암살? 권력투쟁과 정치싸움? 다 꺼져.
나는 일단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놀 거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우리가 제정신을 차리는 데엔 자그마치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창문 너머엔 여전히 은빛달이 똑같은 위치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라비엘과 나는 나란히 턱을 짚고, 나란히 숙고하며, 나란히 중얼거렸다.
“조금 심했는가?”
“조금 심했던 것도 같네요….”
“역시 일주일은 심했는가…….”
“역시 일주일은 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하루만 더 놀아야겠군.”
“예. 하루만 더 놀고 자제해요.”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그래서 이주일이 흘렀다.
이주일의 시간 동안 우리가 어떤 개판을 쳤는가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겠다. 다만, 만일 당신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으며 되돌린 시간 동안에 무슨 짓을 해도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면, 과연 어떤 일을 벌일지 상상해보라. 딱 그 상상의 3배 정도만 이루어졌다.
우리는 완벽하게 만족했다.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인가, 공자여?”
완벽하게 만족한 라비엘의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황태자를 찾아가겠습니다.”
“죽이진 말 거라. 죽이려면 지금이 아니라 훗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을 때 조용히 없애야 한다.”
“예. 다녀올게요.”
그래. 죽이진 않는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보여줄 뿐이다.
36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