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69)
5.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해서, 무언가를 할 수 없단 뜻은 아니다.
“푸른 사자 기사단을 소집하세요.”
라비엘의 침실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공작가 가솔들에게 명했다.
공작의 가신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 당황스럽겠지. 여태껏 내가 이반시아 공작가에 간섭한 적은 일절 없었으니까.
나한테 혈도가 짚인 바람에 반나절 동안이나 차디찬 복도바닥와 키스한 시종들의 경우, 아예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부인. 외람된 말씀이오나 아무리 부인이라도 기사단에 명령하실 수는……!”
“없을 줄 알았나요? 그런데 짜잔. 사실은 있었군요.”
나는 품에서 가문패를 꺼내서 보였다.
“라비엘이 제게 전권을 부여했습니다. 저의 명령은 곧 이반시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이번 기회에 직업을 반란군으로 바꿀 생각이 아니라면 조용히 따르세요.”
“…….”
시종들은 이빨을 깨물고 가문패를 노려봤다. 계속 노려보면 가문패가 가짜로 바뀌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피식 웃었다.
“왜요? 의심되면 제 말이 진짜인지 구라인지 공작께 달려가서 여쭤보든지요. 물론 그래봤봐 이미 한번 짓밟힌 자존심에다 발자국이 하나 더 찍힐 뿐이겠지만, 뭐든 소중한 경험이죠. 여러분의 인생에 양분이 되어줄 거예요.”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공작 부인.”
“오. 고마워라.”
나는 가문패를 거둬들이고 휘이휘이 손을 저었다. 철저히 인간을 제일 빡치게 하는 각도에 따라 손짓을 했는데, 무슨 소리냐면, 유수하의 포즈를 따라했다는 거다. 어떤 의미로는 최고의 모범 예시 아니겠는가.
“그럼 얼른 일하러 뛰어나갈 것이지 뭐 하세요? 가문밥은 꽁으로 잡수셔요? 이반시아에서 신민들한테 자선사업하는 줄은 알았지만 가신들한테까지 공짜밥을 주는지는 미처 몰랐네. 예? 부인인 제가 집안일에 너무 소홀했지요, 그치요?”
“……크읏!”
“크읏거릴 시간 있으면 명령부터 받듭니다. 복창합니다. 기사단 소집.”
“기사단, 소집!”
시종들은 ‘어디 두고 보자’라는 눈빛을 남기며 뿔뿔이 흩어졌다.
물론 하나도 안 무서웠다. 라비엘이 독살 따위에 노출되도록 방기한 시점에서 저들은 나한테 두고두고 까일 거다.
저들이 나를 찍힌 게 아니라, 나한테 저들이 찍힌 것임을 깨닫는 데엔 오랜 시일이 필요하지도 않으리라.
“실비아 에바나일.”
“아, 네. 가, 가주님…….”
소집령을 하달한 뒤엔 실비아를 불렀다.
나를 뒤따라온 가솔들은 이미 공작가 별궁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중 측근들은 침실 바깥의 복도에서 대기했으며, 과거 금사매 영애라 불렸던 실비아 또한 거기에 포함됐다.
실비아는 쭈뼛쭈뼛 내 안색을 살폈다.
“아까보단 기분이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아, 참고로 실비아 입장에서 나는 침실에 들어간 지 1시간 만에 다시 나온 거다.
사실 라비엘과 나는 자그마치 2주일이나 하루를 반복해가며 놀았는데 말이다. 서로 인식하는 시간이 다르다.
“뭐. 아까는 어때 보였길래?”
“솔직한 대답을 원합니까, 아니면 듣기 좋은 대답을 원합니까…?”
“그냥 솔직하게 대답해.”
“원래부터 또라이였던 새끼가 눈깔 뒤집힌 채 입술 끄트머리만 까닥까닥 미소 짓는 게 아 이 새끼가 더 또라이가 될 수 있었구나 와아, 얘는 스스로 또라이란 단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드는구나, 싶었답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실비아가 저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나의 분위기가 많이 나아졌음을 뜻한다. 농담을 건네도 후환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내 안색이 좋다는 거니까.
“실비아.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뭡니까아?”
“예전에 황태자와 연애했잖아. 꽤 진지하게 혼담까지 오갔고. 그래서 말인데, 황태자는 정말로 너를 사랑했냐?”
“…….”
실비아는 눈썹을 찡그렸다.
“……와.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질문인데요.”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을 뿐인데도 얼굴에서 귀족 특유의 오만함이 돌았다. 좋게 말하면 귀티였고 나쁘게 말하면 띠꺼움이었다.
하긴. 지금이야 우리 집안의 시종장이 되었지만 원래는 라비엘과 더불어 제국 사교계를 양분한 영애 아니었던가.
“사랑? 글쎄. 태자 전하가 절 사랑했느냐라. 태자 전하가 저한테 빠졌었냐고 묻는다면 그야 제가 꼬셨으니까 당연히 그러했다고 대답 하겠지만, 흐으음.”
실비아는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들겼다.
“……아마도, 아니에요. 음. 가주님이 말한 사랑은 아니었을 거예요.”
“왜 그렇게 판단하지?”
“일단 제가 가주님한테 거둬들여진 이래 태자 전하는 한번도 저를 찾지 않았으니까요.”
실비아는 간단히 팩트로 조졌다.
“저랑 태자 전하가 단 둘이 있을 때 무슨 얘기를 가장 많이 나눴는지 알아요?”
“전혀 상상할 수 없는데.”
“상상력 좀 발휘해봐요. 뒷담화예요, 뒷담화. 저희는 모일 때마다 은백합 영애……. 아, 이젠 이렇게 부르면 경을 치겠구나. 하여간. 이반시아 공작의 뒷담화를 깠답니다.”
실비아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가 일부러 학생들한테 잘 보이는 데이트 코스만 잡아서 걸은 이유는 딴 게 아니에요. 저희가 꽁냥거리는 모습을 누군가 목격하고, 바로 이반시아 공작한테 달려가서 꼰지르길 원했던 거죠.”
“라비엘이 모욕감을 느끼도록?”
“예에.”
“생각보다 너무 한심한 커플이로군….”
“오죽하면 그랬겠어요? 당신이, 아. 미안해요. 가주님이 가장 잘 알잖아요? 이반시아 공작은 남들이 무슨 짓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인간인걸요.”
실비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여자의 유일한 약점은 사랑이었죠. 사랑. 태자 전하는, 저와 바람을 피는 방법 이외엔 이반시아공작을 뒤흔들 수 없었어요. 그것 밖에 몰랐던 거예요.”
“…….”
“공부에서도 딸려, 외교에서도 딸려, 행정에서도 딸려, 인심에서도 딸려, 모략에서도 딸려. 아마 검술에서도 딸릴걸? 제국에서 제일 고귀한 황실에서 태어난 주제에 단 하나라도 이반시아 공작보다 나은 게 없었어요.”
“그러니까 너랑 밀애(密愛)해서, 자기가 라비엘보다 더 위에 있다는 걸 느끼고 싶었다는 소리야?”
“네.”
“역시 쓰레기잖아.”
“쓰레기 처음 봐요?”
실비아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세상에 많잖아요, 그런 사람.”
많다.
문제는 설령 세상에 그런 인간이 많다 하더라도 하필이면 그가 제국의 황태자라는 점이다.
“……지금까진 얌전히 지내라는 경고 차원에서 가만히 놔뒀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실비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나 역시 실비아를 쳐다보고 말했다.
“끌어내린다.”
실비아는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실비아가 내보인 놀라움은 딱 그 정도까지였다.
도리어 그다음에 실비아가 입에 담은 말이 나를 놀라게 했다.
“으으음. 저어는, 좀 반대할게요….”
“왜? 옛 연인에 대한 의리?”
“의리는 거북이등껍질 뜯어먹는 소리고. 아니 그냥, 이대로 태자 전하가 황제 자리를 이어받는 편이 훨씬 더 편해요.”
“무슨 얘기야?”
“그 남자가 황제가 되고 나서 순조롭게 제국을 통치할 리 없답니다.”
실비아는 단언했다.
“길어도 10년. 짧으면 5년. 제국 방방곳곳에서 황제의 무능함과 포악함을 규탄하는 소리가 터지기 시작하겠죠. 귀족들은 물론이고 백성들도. 그럼, 바로 그때 이반시아 공작가에서 황제를 끌어내리면 완전 편하잖아요?”
“…….”
“뭐, 지금도 물론 황태자를 갈아치우려면 갈아치울 수 있죠. 쉽게. 어차피 제국의 실권은 이반시아한테 넘어오고 있으니까. 그래도 백성들은 아직 황태자가 어떤 망나니인지 잘 몰라요. 기왕 이반시아가 새로운 제국의 황가가 되려거든 백성들의 지지까지 얻는 시점에서…. ……뭐예요?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요?”
“아니. 좀 의외여서. 너한테도 정치 머리가 있긴 있었구나.”
실비아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저기요오. 가주님만 아니었으면 전 태자비가 되고 황후까지 되어서, 이반시아 공작가를 몰락시켰을 인재거든요…? 예에?”
그래. 그랬었지. 실비아도 회귀자였다.
“적절한 조언이지만, 시종장은 뭔가를 좀 착각하고 있어.”
“착각이요?”
“그래. 나는 황태자를 끌어내릴 거지만 딱히 라비엘이 새로운 황제가 되길 바라는 건 아니야.”
“엑? 어째서요?”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황제가 되어버리면 안 그래도 바쁜 라비엘이 지금보다 더 바빠질 테니까.”
“…….”
실비아는 입술을 벌렸다.
“……진짜로? 진짜 꼴랑 그런 이유로?”
“오히려 이거 말고 어떤 이유가 더 필요할지 모르겠는데.”
“이런 미친 또라……. 아니, 그래. 가주님이라면 그러겠죠. 그러고도 남죠. 젠장. 당신이랑 같이 있으면 세상만사에 무게를 메기는 기준이 이상해져서 짜증납니다.”
실비아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하긴 이러니까 저런 여자랑 서로 사랑할 수 있겠죠’라고 중얼거렸다.
“아무튼, 현재 황실은 그대로 두고 황태자만 갈아치우고 싶다는 겁니까? 맞아요?”
“바로 봤어.”
“그으럼…. 2황자나 3황자, 1황녀, 4황자, 2황녀 중에 한 명을 옹립해야겠네요. 제기랄. 이거, 제국 정세에 빠삭한 가신이 저 혼자뿐이어서 가주님의 상담자로 선택된 거죠?”
실비아는 투덜거렸다.
“저보고 후보를 추천하라면 2황자예요. 스스로 생각할 능력 따윈 없지만 태자 전하처럼 스스로 개판을 칠 깜냥도 없죠. 무난무난.”
“이 사람은 황제가 되면 성군이 될 거라든지, 명군의 기질이 있다든지, 그런 황족은 없나?”
실비아가 콧방구를 뀌었다.
“있었으면 태자 전하가 보위를 유지했겠습니까?”
역시 팩트로 후려치는 시종장이었다.
6.
다음날, 나는 라비엘과 함께 황궁에 입궐했다.
황궁이라 해도 진짜 수도에 있는 궁전은 아니었다. 소르므윈은 제2수도로 성장했으며, 그 중요성에 걸맞게 별궁이 설치됐다. 때마침 황제는 이곳에 들려 머무르고 있었다.
“수도의 궁전이었다면 감히 시종에게 독살을 명령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라비엘이 말했다.
“허나 이곳은 다르다. 폐하의 수행원을 제외하면 허드렛일을 맡는 시종들은 대체로 황태자의 사람들을 가져다 썼다. 비교적 쉽게 독살을 꾀할 수 있었을 터.”
물론 어디까지나 비교적인 수준이었다.
황태자는 자신이 가진 인맥과 권력을 총동원하여 이번 암살 작전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별궁에서 실제로 독살을 담당한 시종은 2명에 불과했다.
몰랐을 때야 황태자의 마지막 발버둥에 당했다지만, 지금 우리는 누가 독살에 참여했는지 전부 꿰뚫고 있었다.
지난 2주일의 유희. 보름에 가까운 휴식 동안, 라비엘과 나는 그저 침실에 틀어박혀 퇴폐미를 만끽했던 것만이 아니다. 시종들의 가족, 집안 사정, 황태자와의 관계.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전부 알아낸 것이다.
“제, 제발 저희 가족에게만은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노예로 삼으셔도 좋습니다. 제 육신을 토막내어 바다에 던져도, 달게 받겠나이다. 제발. 제발 가족만은…….”
결국 우리는 간단히 시종들의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
범인들의 자백은 곧바로 황제에게도 보고됐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황제도, 범인들을 직접 문초한 이후에는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리석도다. 그 아이가 이리도 어리석었던가….”
황제는 탄식했다.
모자라긴 해도 후계자로 점찍었던 아들이었다. 한스럽지 않을 리 없겠지. 그러나 나는 황제에게 더 큰 슬픔을 안겨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폐하. 이반시아 공작을 독살한다는 어리석음만으로도 이미 경악할 만하나, 폐하께서 살피셔야 할 어리석음은 그보다 더욱더 참담합니다.”
“……그게 무엇이오? 이세계의 군주여.”
황제는 나를 이반시아의 공작 부인이 아니라 사자세계의 군주로 대우했다.
공식석상에서야 내가 황제를 극진히 떠받들지만, 지금처럼 보안이 철저한 공간에선 황제도 굳이 위엄과 체면을 내세우지 않았다.
“태자는 현재 자신의 측근들을 데리고 사냥을 떠났습니다. 첩보에 따르면 사냥을 간 것치고는 행장이 가볍지 않다고 하더이다.”
나는 고개를 조아렸다.
“말에 마갑까지 둘렀다는데 한낱 짐승들을 잡기엔 무장이 과하지 않습니까?”
“…….”
황제의 침음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자기 아들에게 무를 뿐이지 그는 본디 영민한 군주였다. 내 말 속에 숨겨진 뜻을 단번에 헤아렸을 것이다.
황제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시종장(나를 양아들로 삼았던 바로 그 노인이다)에게 명했다.
“지금 즉시 정문과 후문에 가서 경비 병력을 점검하라.”
“예, 폐하.”
노인은 곧바로 별궁의 경비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폐하. 정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사오나, 후문을 경비해야 할 자가 자리를 비웠으며, 그 휘하 졸개들도 머릿수가 정원의 채 절반도 되지 않았나이다.”
“아아.”
황제는 길게 한탄했다.
“그 아이가 정녕……. 정녕 짐을 해하고자 했다는 말인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라비엘은 시종일관 침묵했다. 그저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라비엘은 충분했다.
독살에 대해 고변하는 것, 범인의 자백을 상세히 아뢰는 것, 황태자의 저의를 밝히는 것 등. 행여라도 황제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는 말들은 오직 나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황제에게 참변을 고할 때도 나는 이반시아의 부인이 아니라 이세계의 대표자로서 말했다. 나중에라도 책 잡힐 일은 만들어두지 않는 게 나았다.
“폐하. 사냥을 떠난 태자를 이곳으로 소환하십시오.”
나는 그에게 마지막 쐐기를 권하였다.
“만일 태자가 스스로 떳떳하다면 황제의 부름에 응하여 올 것입니다. 부름을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만약 태자가 진실로 이 모든 참극을 꾀했다면, 혹시라도 계획이 탄로났을까 두려워 스스로 도망칠 것입니다.”
“……좋소. 그리 하리다.”
황제는 내 권고에 따라 전령을 보냈다.
숨이 졸여지는 듯한 시간이 흘렀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전령은 돌아왔다. 황실의 시종장은 전령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해들었다. 전령이 알현실을 나가자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폐하.”
“그 아이가 온다던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태자는 말머리를 돌려 수하들과 함께 떠났다고 하옵니다.”
알현실에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황제는 5년은 더 늙은 것 같았다. 이세계의 인간들이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함을 유지하며 최대한 평화롭게 제국을 통치한 황제였으나, 아들의 반역에는 염통이 끊어진 듯했다.
“공작…….”
황제는 처음으로 공작을 불렀다.
라비엘은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예, 폐하. 말씀하소서.”
“짐이 공작에게 어찌 해야 되겠는가…?”
“소신은 언제나 폐하께 충성할 따름이옵니다.”
이번 사건을 명분으로 삼아 제국에 반기를 들 생각은 없다. 라비엘은 그렇게 말해준 것이다.
황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적이 흐르고.
“……내가 너에게 참으로 못할 짓만 하는구나.”
황제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제국을 다스리는 군주라기보다 한 아이의 아비에 가까웠다.
“내 아들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것은 진즉에 알았다. 네가 총명한 아이란 것 또한 알았다. 설령 부족하더라도 너의 보필을 받으면 능히 나라를 살림할 수 있다 여겼거늘, 그것조차 부정(父情)에 눈이 멀어버린 판단이었는가. 그것조차.”
“……폐하.”
“너를 버려두고 남작가의 영애에게 눈이 팔렸을 때부터 이미 끝이 나버린 이야기다. 어찌 아들만 두고 어리석다 탓하겠느냐? 나의 어리석음이 더 크구나.”
“폐하께서는 소신이 영애이던 시절부터 항상 관심과 호의를 베푸셨나이다.”
“미안하다.”
황제는 눈을 감았다.
“……태자는 더 이상 제국의 태자가 아니다. 그리고 짐의 아들도 아닐 것이다.”
이 순간 황태자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태어날 때는 황자로 태어났으되 죽을 때는 아니리라.
“이번 일은 이반시아공작가에서 알아서 처리토록 하여라.”
그 날, 나는 공작가의 기사단을 이끌고 황태자를 추격했다.
37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