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70)
7.
황태자는 측근들을 데리고 어느 소도시에 쏙 숨어들었다. 그건 도주라기보다 도피에 가까웠다. 심지어 현실 도피.
“일단 항복을 권유하는 사신은 한번 보내보죠.”
나는 공작가의 기사단, 황실 기사단, 여기에 내 가신들까지 더해서 소도시를 포위했다. 그리고 예의상 정중하게 항복 사절단을 보냈다.
물론 현실에서 도피해버린 황태자가 예의범절을 갖출 리 없었다.
사신으로 다녀온 자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라면 태자 전하께선 “네놈들은 이세계에서 온 침략자들이다! 난 제국의 국본(國本)이야! 결코 이세계의 무뢰배들 따위한테 고개를 숙이지 않을 테다!”라고 고함을 질렀다던가 뭐라던가.
나는 소식을 전해듣고 혀를 찼다.
“어리석긴.”
그래. 만일 내가 무턱대고 황태자를 겁박했다면 그야 이세계 침략자 취급을 받았겠지.
제국의 귀족과 백성 중엔 이세계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적잖았다. 잘만 하면 이세계의 위협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황태자의 주장에 힘이 실렸을지 몰랐다.
하지만 나는 황제에게서 명분을 얻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부터 제국의 복식이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황제 폐하의 지엄한 명령을 받들어 토벌에 나선 이반시아 공작가의 부인이었지, 이세계의 군주가 아니었다.
체크메이트로군.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아?”
실비아가 내 곁에 다가와서 물었다. 그녀는 제국에 정통한 인물로서 나를 보좌하고 있었다.
“예전에 사귀어본 경험을 갖고 말씀드리자면, 태자가 항복할 거라는 기대는 얼른 버리세요. 그 남자. 자기가 한번 생각한 건 절대로 물리지 않는답니다.”
“제까짓 놈이 항복하지 않는다 해서 별수가 있겠냐.”
“헤에. 즉?”
나는 성검의 칼자루를 쥐었다.
“잡아오겠다.”
그날 밤에 나는 혼자서 성벽을 넘었다.
황태자 세력도 자기들 나름대로 농성전을 준비했는지 경비가 꽤 삼엄했다. 달리 말해 [꽤] 삼엄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날 막으려 거든 어마어마하고도 겁나 철두철미한 경비를 뒀어야지, 이 양반아.
한 시간이 채 흐르기도 전에 황태자의 침실에 침입했다.
“후프으으…. 우으음….”
금발 라면은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침실 바깥에서 호위를 서던 기사들이 죄다 기절했는데도 말이다.
나는 피식 코웃음을 치며 녀석의 뺨을 쿡쿡 찔렀다.
“야. 어이. 안 일어나냐?”
황태자는 멀겋게 실눈을 뜨고 이쪽을 흘겨봤다. 아직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신 눈깔이었다.
“우그흐프읍, 후음……. 무슨… 일이더냐아……?”
“무슨 일이긴 무슨 일. 어서 예를 차리지 못하겠는고. 네놈의 첫 번째 약혼자와 결혼하신 몸이자 네놈의 두 번째 약혼자를 가신으로 맞아들이신 분의 행차다.”
“뭐……? 허억!?”
그제야 황태자는 눈을 번쩍 떴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나는 뺨을 누르던 손가락으로 즉시 태자의 눈꺼풀을 튕겼다.
“아아아악!? 내 눈, 내 누우우운!?”
황태자는 안면을 감싸고 침대에서 떨어졌다.
“짜식. 살짝 때렸는데 엄살은.”
“겨, 경비병! 경비벼어엉! 침입자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경비병은 뭣들 하는 게냐!”
“네 경비병들 다 디비자고 있어. 우동면발 봉골레 홍합짬뽕 같은 놈아. 주문한 지 30분이 지났는데도 안 나오는 설렁탕 사리 같은 놈아. 내가 멀쩡하게 네 눈썹을 쓰담쓰담해주는 거 보면 감이 안 잡히냐?”
“겨, 경비벼어엉! 경비벼어어어엉!”
나는 쪼그려 앉아서 황태자를 내려봤다.
소위 일찐 자세.
황족으로 태어나서 이 따위 자세를 구경해봤을 리가 없는 황태자는, 간신히 눈을 떠서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부르르 떨었다.
“어, 어째서 아무도 내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것이냐……!”
“왜냐면 내가 오러로 반경 6미터를 돔처럼 덮었거든. 댁이 암만 꾀꼴꾀꼴 소리쳐봤자 장막에 가로막혀서 안 들려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고요. 계속 벌어질 겁니다. 태자 나리. 어차피 나도 댁이랑 얼굴 마주하고 있기 싫으니까 빨리 빨리 끝내자고.”
나는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황제의 인장이 찍힌 교서였다.
“뭐, 뭣……. 그건……!”
인장을 알아본 태자가 입을 쩍 벌렸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서 이번엔 황태자의 입술을 때렸다. “후이이익!?” 하고 실로 꼴사나운 비명이 울려퍼졌다.
“아가야. 네 덜떨어지는 대가리를 위해서 내가 친히 황제 폐하의 숭고한 말씀을 풀어서 해설하마.”
입술이 벌겋게 터진 황태자를 향해서 나는 방긋 웃어주었다.
“넌 오늘부로 우리 세계로 유학을 올 거란다.”
“유, 유학? 유학이라니. 무슨 헛소리냐.”
“뭐. 말이 좋아서 유학이지 사실은 귀양이지. 이놈아. 감히 라비엘을 독살하려 들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를 겁박하려고 한 네놈이 몸 성하게 지낼 줄 알았느냐?”
태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쪽이 모든 물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황태자도 눈치챘겠지.
“나, 나를 따르는 귀족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이 이런 폭거를 용납할 리 없어!”
“그게 신기하게도 있을 거란 말이지. 봐라. 이대로 있다간 걔들도 죄다 반역죄에 걸려서 모가지가 하직해버릴 예정이야. 하지만 나는 그들한테 기회를 줄 거란다.”
“기회……?”
“어. 너를 손절하고 목숨을 부지할 기회.”
나는 두루마리로 황태자의 이마를 툭툭 두들겼다. 교서가 이마에 찍힐 때마다 태자는 움찔,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귀족들은 너를 따라서 반역에 동참한게 아니야. [황제 폐하께선 너에게 이세계로 유학갈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너는 이세계에 가는 것이 낯설고 두려워서, 마치 사춘기 꼬맹이처럼 싫다고 땡강을 부렸다.]”
“아……?”
“너는 혼자서 땡강을 부리지도 않았어. [귀족들한테 자기를 제발 좀 숨겨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차마 황태자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던 귀족들은 [여기에다 몰래 너를 숨겨줬지만,] 비밀이 오래 가지 못해서 [황제 폐하한테 들통이 난 것]이다.”
태자는 멍하게 나를 올려봤다.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도 상황이 이해되지 않냐? 이게 내 시나리오야. 여기에 따르면 귀족들은 반역죄를 짊어질 필요가 없어져. 그냥 못나고도 못난 황태자의 어리광에 어울려준 죄만 남지.”
“……!”
“자아. 너 혼자만 유학을 보내면 모두가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거다. 과연 귀족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응? 아이고오, 저희 모가지가 날아가고 집안이 멸문해도 끝까지 황태자 전하를 따르겠나이다, 라고 말할까? 어찌 생각하냐.”
“아아악! 아아아아악!!”
황태자는 내 진의를 겨우 알아듣고 발악하기 시작했다.
“이세계의 역병놈! 네, 네놈 때문이야! 네놈이 오고 나서 모든 게 망가졌다! 이반시아 공녀를 네놈이 가로챘고, 나의 귀엽고 아리따운 금사매 영애까지! 네놈이! 네놈만 아니었으면—–.”
“부디 좋은 꿈을 꾸십시오. 전하.”
나는 황태자의 혈도를 꾸욱 짚었다.
“일어나고 나면 세상이 달라져 있을 겁니다.”
그리고, 태자의 세계는 암전했다.
8.
“—–허어억!”
태자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꾸, 꿈이었나. 휴우우…….”
“간밤에 좋은 꿈을 꾸셨습니까?”
“끼아아아아아악!!”
내 얼굴을 보자마자 마치 끔찍한 괴물을 목격한 것처럼 태자는 펄쩍 뛰었다. 저런. 나의 섬세하기 그지없는 하트가 상처를 받을 만한 반응이로군.
“여, 여긴 도대체 어디인가!?”
“이곳은 29층입니다. 고객님.”
나는 싱글벙글 웃었다.
“일찍이 장르는 학원물이었고, [방구석 도서관장]이 다스리던 스테이지였지. 내 가신 중에서 김율이란 녀석이 살았던 장소란다.”
“하, 하아?”
“물론 이런 정보는 너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 제국의 하나뿐인 태자전하이시자 장차 황제의 관을 쓰실 예정이었던 황족 나리. 댁이 머리에 입력해둬야 할 정보는 딱 하나. 바로 이 세계에선 아무도 너를 황태자로 대접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똑똑.
등 뒤로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네에. 들어갑니다아.”
생기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실비아가 문을 들고 들어왔다. 그런 그녀를 맞이한 것은 2평짜리 원룸. 아니, 원룸이란 표현도 과분할 정도의 고시원이었다.
실비아는 방안을 둘러보고 대번 미간을 좁혔다.
“우왓, 좁아……. 가주님. 이렇게 비좁은 공간에서 정말 저 남자가 생활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절대로 불가능한데.”
“그건 이제부터 이놈이 감당해야 할 현실이지. 고시원 주인한테 말씀은 잘 드렸어?”
“아. 넵. 금괴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해지면서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를 해외에서 온 마피아? 뭐 그런 걸로 착각하는 거 같았습니다아.”
좋아.
29층은 현재 학원도시로 운영되고 있었다. 바빌론에도 학원은 있지만 아직 체계적인 공교육 시스템이 정착되진 못했다. 그래서 김율이 살았던 시대에 시간이 고정된 이곳, 29층이 교육의 장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시, 실비아……?”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을 황태자는, 그저 실비아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펑퍼짐한 드레스가 아니라 현대옷을 차려입은 실비아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예, 황태님. 실비아 에바나일이랍니다.”
“오오! 나의 실비아여! 금사매의 이름을 가진 나의 종달새! 그대는 틀림없이 나를 이 악마의 손아귀에서 구해주기 위해서 달려온 것이구나…! 믿고 있었다, 아니, 오직 너만을 믿었다. 한 떨기 가녀린 금사매여!”
“으와아. 뭐지요? 꼭, 흑역사로 점철된 일기장을 들쳐본 거 같은 기분인걸요.”
실비아는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고시원 주인한테 인사드리는 김에 온갖 잡다한 서류도 처리했어요, 가주님. 당장 다음주부터 저 황태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 겁니다. 금발의 귀공자 전학생이 되겠군요.”
“고생했어.”
“예에, 정말로 고생밖에 안 한다구요…. 근데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요. 이 스테이지의 관료들 너무 썩어빠지지 않았어요? 행정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게 그냥 스펀지 수준이던데요.”
“뭐. 금괴의 전지전능하신 위력이 입증됐을 뿐이지.”
“도대체 얼마나 쳐먹인 건지 궁금하네요….”
우리 둘이 허심탄회하게 잡담을 떠드는 광경을, 황태자는 그저 넋을 잃고 바라봤다.
“시, 실비아? 혹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거냐? 그리고……. 왜 아까 나를 황태라고 부른 것이냐?”
“아, 참. 까먹은 것 좀 봐.”
실비아는 서류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카드였다.
“이게 이제부터 전하의 신분을 증명해줄 유일한 수단이랍니다.”
실비아가 공손하게 건네준 것은 바로 학생증이었다. 갓 만들어진 학생증에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는 황태자의 사진이 네모낳게 인쇄됐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글자가 적혀 있었다.
+
[학생증]이름: 김황태
소속: 신서고등학교(神模高等學校)
+
“……기, 김황태?”
“오냐. 그게 오늘부터 너의 이름이다.”
나는 상콤하게 미소를 날려줬다.
“황태야. 너는 해외교포 2세인데 어쩌다 귀국했다. 하지만 집안에서 쫓겨나 이 고시원에서 혼자 살고 있지. 당연히 용돈 같은 건 없고 아르바이트든 허드렛일이든 일을 찾아다가 돈을 벌어야 한다. 이해했니?”
“아르바이트? 허, 허드렛일? 네 녀석,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래. 우리 황태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참 흡족하구나.”
나는 김황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기 고시원 월세가 3달 밀리면 그대로 아웃이야. 학교에 가지 않고 1주일 이상 등교거부를 해도 아웃이고. 평생 황족으로 떠받들여진 우리 황태한테는 여기 세상이 좀 험악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 하지만, 황태야……. 그것이 바로! 진정한 현실이란다!”
“…….”
“견더라! 힘을 내! 너는 할 수 있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록 이 도시의 어느 누구도 널 황태자로 취급해주지 않을 거고! 네가 어디서 구르다 온 개뼈다귀인지 관심도 없을 테지만! 원래! 세상은! 너한테 아무런 관심이 없어!”
“…….”
“일해라! 학생 신분으로 돈을 벌 구석이 별로 없겠지. 하지만, 원래 그래……! 본래 돈이란 건 벌기 어려운 것이다……! 일하고 또 일 하여서 너의 노력과 땀으로, 하루를 버틸 음식을 구해라! 구하지 못하면 굶어죽겠지만……. 죽어버리고, 말겠지만……! 그 또한 자연의 당연한 섭리다!”
“…………..”
“황태야아!”
나는 김황태의 두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영혼이 가출해버린 얼굴에 대고 물었다.
“너, 며칠까지 굶어봤니?”
“뭐…. 뭐어……?”
“걱정하지 마렴. 이틀 굶어보면 세상이 달라보일 거야! 우리 김황태 새로운 인생이 시작하는 걸 멀리서 응원하고 있을게! 화이팅!”
나는 3만 원을 내려놓고 등을 돌렸다.
실비아도 꾸벅, 김황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계세요, 황태님. 사실 제가 가주님한테 신세가 조져진 이후 한번이라도 절 찾아줬으면 지금 뭐라도 해드렸을 텐데. 뭐. 어쩔 수 없죠! 저도 멀리서나마 응원하고 있겠습니다아!”
우리 두 사람은 총총걸음으로 방을 나왔다.
음침한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서 실비아가 말했다.
“그래서 몇 년 버티면 제국으로 보내줄 생각입니까?”
“보내주긴 뭘 보내줘. 평생 살아야지. 이미 2황자를 후계자로 내정했는데 쟤가 돌아가봤자 숙청이나 더 당하겠냐. 여기에 내버려두는 게 자비야, 자비.”
“가주님도 참 악마군요오…….”
고시원 계단 너머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이 날, 29층 신서고등학교엔 금발의 귀공자 유학생이 한 명 전학해왔다.
후일담에 따르면 4일을 내리 굶은 김황태가 결국은 고시원 주인의 허드렛일을 도우며 제 2의 학창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던가.
힘내라, 김황태! 그 스핀오프의 주인공은 바로 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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