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73)
1.
봄에 제일 먼저 핀 꽃은 푸른색이었다.
살천성이 머무르는 세상에 봄이 왔다.
-…….
자신의 눈동자를 닮은 꽃송이를 살천성은 올려보았다.
본래 그가 살던 고향에선 노란색이 가장 일찍 피었다. 아니면 분홍색이. 하지만 그는 고향의 봄을 잊어버렸다. 레판타 아이김에게 봄은 이제 다만 파랑이었다.
-……성좌가 되지 않으려거든 어떻게 해야 할까.
살천성은 하얗게 샌 손끝으로 꽃잎을 건드렸다.
-별자리가 사람들의 인생을 결정짓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평범한 인간들에게 성좌란 지나치게 강력한 존재다. 단지 성좌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결정해버린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에서 도망쳐 버리게 된…….
말을 이어다가다 문득 살천성은 입술을 다물었다.
자신의 논리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주 물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꽃의 향기에 홀려 위이이잉, 날아온 꿀벌이 문득 살천성의 손톱 위에 앉은 것이었다.
-…….
살천성은 오랫동안 꿀벌의 날개를 내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꿀벌을 쓰다듬었다.
찔끔!
꿀벌은 인간이 쓰다듬어 오는 손길을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곧바로 내장을 게워내어 살천성의 손가락에 침을 쏘았다.
이 세상에 호의(好意)란 개념을 두지 않은 벌레의 침은 독했다. 곤충이 일평생 몸속에서 키운 독은 레판타 아이김의 속살에 잘 스며들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자신의 유일한 존재의의를 잃어버린 꿀벌은 곧, 바닥에 떨어져 파르르 떨었다.
안에 쌓아둘 때는 몰랐으나 한번 쏘아보고 나니, 독은 오직 자신을 죽이는 독이었다.
-…….
살천성은 오러를 써서 간단히 미물의 침을 해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한낱 필멸하는 벌레가 자신에게 심어놓은 독침을, 부풀어오르는 살을, 그저 푸른 눈동자로 내려볼 뿐.
-과연.
그는 깨달은 것이었다.
-아이를 가져야겠다.
살천성은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어느 귀족가의 화원(花園)이었다.
[수호의 여신]에게 선택받아 만인지상의 황제가 된 레판타 아이김은, 스스로 황위를 버린 뒤 온갖 세계들을 돌아다녔다.이번에 우연찮게 들리게 된 세상에서 레판타 아이김은 생각보다 오래 머무르고 있었다. 왜일까? 아마도 이 화원이 마음에 들어버린 탓일지 몰랐다.
화원에선 이름 모를 시녀가 일하고 있었다. 시녀는 끊임없이 흙을 퍼냈다. 살천성이 바로 근처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시녀는 그의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시녀의 눈동자는 붉은색이었다.
-제가 무언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나요. 귀인님?
시녀가 일하는 귀족가는 살천성에게 은혜를 입었다. 성좌에게 붙잡혀 있던 아이들 중에 한 명이 귀족가의 영애였던 것이다. 가문에선 살천성을 귀인으로 대접했고, 시녀 역시 그에게 예의를 다하였다.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니겠지만.
-네가 시간이 빌 때마다 나를 몰래 훔쳐본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시녀는 어깨가 움찔거렸다.
어딘지 조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는 살천성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살천성에겐 화를 내거나 질책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시녀는 안심이 되었는지 “후우,” 하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 조금 훔쳐봤어요. 솔직히 귀인님께서 좀 잘생기셨나요?
-나의 얼굴이 취향인가.
-누군가가 길을 걷다가 예술작품을 보고 무심코 고개를 돌려버린다면 그건 행인의 잘못이 아니라, 길 한복판에다 예술작품을 놓아둔 사람의 잘못이지요.
시녀는 한결같이 자기한테 잘못이 없음을 주장하고 싶은 듯했다. 그러나 살천성의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너의 하룻밤을 가지고 싶다.
뚝.
한창 열심히 떠들어대던 시녀가 동작을 멈췄다.
-……에?
-물론 네가 허락한다면.
-어? 에에. 어라? 으으응…?
시녀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 저기. 잠깐만요. 귀인님. 혹시 저한테 마음 있으세요? 헉. 설마, 가끔 가다 화원에 들려서 산책하던 것도 전부 저한테 접근해보려는 작전이었던 건가요……!?
-아니. 그런 의미의 마음은 없다.
-…….
시녀는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저어기. 그으럼, 왜 지금 저한테 작업을 거시는 걸까요…?
-나는 오래 전부터 어떻게 해야 성좌가 되는 길에서 벗어날지 고민해왔다. 아니, 나의 인간성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고 말해야겠군. 하지만 나는 기억을 잃어버리는 자다. 인간으로 남으려 해도 남을 수가 없지.
시녀는 여전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고, 살천성이 하는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레판타 아이김은 상대방의 이해 유무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요컨대 생까고 계속 말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진다면 혹시 달라질지도 모른다. 내가 인간이었다는 증거. 인간이라는 증거가 명명백백하게 남는 것이니까.
-어…….
시녀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음, 제가 잘 알아들었는지 자신이 없는데. 아무튼 자기가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어서 지금 저랑 그, 하룻밤을 보내겠다는 말씀 맞나요?
-그렇다.
-…….
시녀는 간신히 이 상황이 이해되는 것 같았다.
즉, 눈앞의 상대방은 예쁘게 생긴 미친놈이었다.
-자아암깐만요…. 생각 좀 해볼게요…….
-그러도록.
시녀는 삽을 내려놓은 후 팔짱을 꼈다.
-……어쨌든 이 나라를 구한 영웅 중의 영웅이고. 으음. 그런 사람의 혈통을 이어받는다는 건 한번 인생을 역전해볼 깜냥이 나오는 이야기인데. 말하는 꼬라지를 보면 딱히 아이한테 신경 쓸 것처럼 보이진 않으니까, 이건 전적으로 나한테 달린……. 하지만 뭐 일종의 도박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도 않나…….
시녀는 뭔가를 하염없이 중얼거렸다.
힐끔.
시녀가 진지한 얼굴로 살천성을 쳐다봤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그러다 문득 시녀의 눈길이 살천성의 손에 머물렀다. 손가락이 독침에 부풀어올라 있었다.
-물렸네. 안 아파요?
-아니, 아프군.
-그런데 왜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시녀는 턱을 짚었다. 무언가를 알았다는 듯 “과연……”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당신은 혼자로군요.
어떤 뜻일까.
살천성이 그 의미를 헤아리기도 전에, 시녀는 짧게 혀를 찼다.
-좋아요. 귀인님. 당신과 자겠어요.
시녀의 빨간 눈동자가 살천성을 올려봤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무엇인가?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까지 제 곁에 있어주세요. 저와 아이를 보호해주세요.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당신의 자식이란 걸 세상 사람들한테 공표해주시죠. 만약 이 조건이 어렵다면 당신과는 절대…….
-알겠다.
-……어, 제가 말해도 될련지 모르겠지만 너무 쉽게 받아들인 거 아니에요? 이거 저 나름대로 조건을 쎄게 불렀던 건데.
-쉬운 조건이니까.
시녀는 떨떠름하게 살천성을 봤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미친놈 씨. 그럼 오늘 제가 일 끝낼 때까지만 기다려줘요. 애들이 봄앓이를 하고 있어서 세심하게 돌봐줘야 하거든요. -그러지.
-미친놈도 영웅이 될 수 있는 거였구나…….
시녀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삽을 들었다. 퍼석. 퍽. 화원 한켠에 쌓인 흙무더기를 퍼나르는 시녀의 뒷모습을 보고 문득, 살천성이 입술을 열었다.
-아직 이름을 모르는군. 네 이름은 무엇인가?
-이반시아.
시녀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평민이라서 성은 없이 이름만.
-이반시아. 그게 제 이름이에요. 오래 전.
푸른 꽃에 붉은 눈동자가 비추었다.
2.
자그마치 13체의 살육인형이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살천성보다 강했다. 확실하게 강했다. 그러나 과연 살천성이 13명으로 늘어났을 때도 내 강함이 유효할지는 불확실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쫄렸다.
무진장 쫄렸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일식第一式.
아사유검飯死流劍.
원래 무인이 쫄리면 가장 자신 있는 일격부터 펼치고 보는 법. 나도 그랬다. 나는 전가의 보도를 뽑아들어 살육인형들한테 갈겼다.
“이건 어떻습니까!”
“역시 강하군.”
촤아아악-.
피보라가 튀었다. 나의 검에 직격으로 얻어맞은 살육인형이 팔 한짝을 날려버린 것이었다.
단 한 번 참격을 휘둘러서 ‘그’ 살천성의 오른팔을 잘랐다는 점에서 나는 분명히 어마어마한 무위를 뽐냈다. 하지만 나의 객관적인 실력 따위 알 게 뭔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나는 싸우고 있었고, 싸움에선 결과만이 중요했다.
적은 13체에 이르렀으며 당연하지만 전원이 양팔을 가졌다.
즉, 나는 적 전력의 1/26밖에 깎아내지 못한 것이다.
“네가 나보다 강력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상정해둔 바였다.”
오른팔을 잃어버린 살육인형. 거기에 더해 다른 1체의 인형이 나를 양옆에서 덮쳤다. 내가 검풍(劍風)을 일으켜 녀석들의 다리와 팔을 하나씩 잘라냈지만, 제기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살천성은 애당초 내 공격을 막지 않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두 체의 살천성이 각기 나의 오른팔과 왼팔을 붙들었다. 나는 기겁해서 소리쳤다.
“뭐하는 짓거리입니까! 이런 걸 당하고 기뻐할 놈은 하무스트라밖에 없다고요!”
나는 온몸에서 오러를 끌어올려 두 체의 살천성을 뿌리치려 했다. 한 명을 뿌리쳤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또다른 살육인형이 달려들어 내 팔을 꽈악! 붙잡았다.
“자, 잠깐만…….”
그러는 와중에 나머지 살육인형들은 검에 오러를 싣고 있었다. 무려 9체의 인형이 말이다. 그들과 똑같이 생긴 인형들이 내 몸에 들러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칼을 겨누었다.
목덜미가 싸했다.
“설마, 자살공격이냐!?”
“지난 30일 동안의 기억을 버린다.”
섬광이 나를 덮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처음엔 시끄럽기 그지없었던 폭발음은 순식간에 이명이 되어 내 귓속에서 웅웅 울렸다. 눈앞이 새하얬다.
어찌저찌 오러로 온몸을 도배하다시피 방어벽을 만들어두어, 살천성의 공격을 코앞에서 맞았는데도 죽진 않았다. 몸도 제법 멀쩡했다.
그렇지만 청각과 시각을 복구한 순간, 2번째 살천성 인형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지난 30일 동안의 기억을 버린다.”
번쩍,
눈앞이 명멸했다.
처음엔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 그 일격에도 내 몸은 버틴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화악! 내 몸안에 돌아다니는 핏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격통에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 일격을 막기 위해, 핏줄이 타버릴 정도로 오러가 소모된 것이었다. 급격하게.
“이런,”
어금니의 잇몸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씨발……!”
“지난 30일 동안의 기억을 버린다.”
3번째 인형이 말했다.
살천성의 30일이 다시 한 번 나를 후려쳤다.
“——–!!”
전신에서 미칠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성좌로 거듭난 이래, 사자세계의 절대강자로 발돋움한 이후, 이렇게까지 오러가 바닥난 적은 처음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숨이 가빴다.
심장이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나는 가까스로 존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내 양팔을 붙잡고 있던 2체의 살육인형은 방금 일격들에 쓸려나갔다. 나는 버텼지만 인형들은 버티지 못한 거다.
불운하게도, 살천성의 3연격에 버티지 못한 건 인형들만이 아니었다.
[‘미궁에 거하는 뱀’이 소멸합니다.]미친.
나는 목구멍에서 핏덩이가 튀어나올 뻔했다. 소멸. 소멸이랜다. 소멸이라니!
히시미트 크리츠는 최상위급 성좌였다. 나한테 된통 걸려서 신성이 약화되긴 했으나 그렇다고 어디 가서 맞고 다닐 급은 아니었다.
그런 녀석이, 방금 살천성이 쏘아댄 섬광들에 맞고 죽어버렸다.
심지어 여기서 끝나지도 않았다.
“지난 30일 동안의 기억을 버린다.”
4격째.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이 깊은 상처에 신음합니다.] [‘수호의 여신’이 용사님에게 정신을 잃지 말라고 비명을 지릅니다.]안 돼.
이건 미친 짓이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미쳤다.
37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