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77)
2.
-당신. 왜 자꾸 기억을 버리는 거예요?
레판타 아이김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명의 여인이 턱을 괸 채 이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름이 이반시아라고 했던가.
-변하지 않기 위해서다.
-변하지 않기 위해서……?
-천 년을 넘게 살겠다고 각오한 자를 본 적 있나.
레판타 아이김은 수첩을 펼치어서 여인에 대한 기록을 읽었다. 몇 줄 안 되었다.
「본래 화원을 가꾸는 시녀였으나 귀족위에 봉해짐.」
「내 얼굴을 좋아한다.」
「나의 아이를 낳았다.」
마지막 줄에 잠시간 레판타 아이김의 시선이 머물렀다. 아이.
지금도 여인은 무릎 위에 갓난아이를 올려두고 있었다. 아이는 “아우”하고 팔을 뻗었으며, 여인은 손가락 하나로 아이를 놀려주었다.
-아니요. 당신 같은 영웅이 흔할 리 없잖아요.
-사람이 천 년을 살기 위해서는 특별한 각오가 필요하다. 무엇이든 변한다. 누군가를 남기기 위해 그려둔 초상화도 색이 바래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칼도 녹이 슨다. 천 년은, 남기고자 했던 것들도 죽이고자 했던 것들도 변해버리기 충분한 시간이다.
그것은 레판타 아이김 자신이 수첩에 적어놓은 구절이었다. 기억을 잃어버릴 때마다 레판타 아이김은 이 구절을 읽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승복했다.
-나는 약하다.
-…….
-천 년의 시간 동안 버틸 자신이 없다. 버틸 수 있노라고 믿어도 될 근거가 없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버리는 것이다. 천 년도 버리고 나면 일순에 불과해. 변절이 두렵다면, 아예 변절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 자체를 없애버리면 된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봄이 섞였다.
봄의 바람은 겨울의 바람과 달라서, 조금 더 습했고, 그 습기가 코끝에 몽실몽실하게 감겨왔다. 여인의 무릎 위에서 아이는 바람을 낚아채고 싶어 이리저리 손을 흔들었다.
녹아 없어지는 시간.
-그것이 내 방법이다.
-그건…….
-너는 내가 어리석다 여기겠지.
여인이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레판타 아이김은 자리에서 일어남으로써 여인의 시간이 자신에게 끼어들려는 것을 뿌리쳤다.
-변화는 사람의 특권이다. 나는 사람으로 남고자 아이를 가져 혈통을 남겼으나 동시에, 영원히 변화하지 않고자 기억을 버렸다. 인간이려 들면서도 인간이길 거부한 것이다. 그야말로 우행이지.
여인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레판타 아이김이 등을 돌리는 것이 더 빨랐다.
-하지만 상관없어.
-…….
레판타 아이김은 등을 돌린 바람에 볼 수 없었으나, 그 순간, 여인은 아주 잠시 어깨를 떨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어’라고 중얼거린 어조에서 여인은 처음으로 무언가를. 아주 낯선 어느 존재를 느꼈기 때문이다.
-어차피 누구나 자신이 인간이라고 속이지. 그런 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상, 나는 언제나 항상 그들보다는 더 인간적일 것이다.
그것이 김율이란 존재가 마지막으로 남긴 잔향과 같은 것이란 사실을, 여인은 몰랐고 레판타 아이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레판타 아이김의 등을 보며 여인이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갈 거예요? 이렇게?
-그렇다. 아기가 걸음마를 할 수 있을 때까지만 머물러달라는 것이 약속 아니었나.
-왜 아무도 당신 곁에 있는 걸 허락하지 않는 거지요?
-필요하지 않으니까.
레판타 아이김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어쩌면 내게도 다른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만일 그랬다면, 나는 너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늦었다고.
-…….
-네가 귀족이 되기 위해서 나를 이용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 역시 상관없다. 다만, 되도록이면 아직 늦지 않은 약자들을 위해 너의 권력을 이용해라.
그것은 그대로 이반시아 공작가의 가훈이 되어 남는다.
여인에게 제국의 백성에 대한 사랑이나 자애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취향과 권력욕을 동시에 만족시킬 방법을 찾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레판타 아이김의 말이 가훈으로 남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반시아에 대한 기억을 모두 버린다.
그 말을 끝으로 레판타 아이김은 화원을 걸어 나갔다.
-전송.
바람이 불었다.
봄이 온 자리에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3.
“지난 29일 동안의 기억을 버린다.”
순백의 섬광이 일순, 내 몸을 꿰뚫으려 달려들었다.
나는 성검을 들어 반격했다. 반격하는 와중에 나는 살육인형들이 어디에서 29일 어치의 기억을 모았을까 생각했다. 1체는 검성 어르신과 싸웠다 해도 나머지 12체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마 여기에 있었겠지. 이 쓰레기장에. 오직 버리기만을 위한 시간을 썩히면서.
“어디를!”
흑룡주가 소리쳤다. 살천성이 토해낸 섬광과 나의 칼날이 맞부닥치기 직전, 흑룡주의 거울들이 끼어들어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김공자를 죽이려면 먼저 나한테 허락받고 죽여! 쟤 비싼 자식이야!”
파챵, 쨍그랑, 챠아앙!
세 개의 거울이 섬광을 받아내며 깨졌다. 그러나 네 번째 거울부터는 섬광을 비스듬히 반사했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거울에 되튕겨질 때마다 섬광은 점점 더 급격하게 꺾였으며—- 마침내 살천성을 향해 역으로 달려들었다.
“……!”
살천성이 발사했을 때에 비하면 한없이 약해진 일격이었으나, 그렇다고 검을 들어 막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살천성이 자신의 공격을 스스로 막는 틈을 노려. 나는 주저없이 그에게 파고들었다.
“1달이 아니라 1년의 기억을 모았다면, 저희가 패배했을 수도 있습니다.”
살육인형은 나와 아나스타샤의 콤비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성검은 인형의 어깨를 베어넘겼다.
13:9.
아군과 적군의 머릿수 차이가 또다시 벌어졌다.
“하지만 당신은 차마 한 달의 시간을 보낼 수 없었겠지요.”
김율과 우부르카를 위시로 한 별동대는 머릿수의 이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힘겹게 싸움을 버티고 있던 성기사를 도왔다. 살육인형 가운데 누군가가 시간을 버리려 들면 김율과 우부르카가 합심하여 맞섰다.
“한 달보다 더 살게 되면, 그때부터 삶이 시작해버리니까.”
사방에서 파열음이 낭자했다.
“저라는 미지의 강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시간을 모아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기억을 버리지 않은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당신은 불안해졌을 겁니다.”
나는 곧바로 다음 살육인형을 향해 달려갔다. 내가 돌격해오는 걸 살육인형은 가만히 내버려두진 않았다. 콰아아앙! 살육인형이 쏘아낸 섬광이 유성우처럼 빗발쳤다.
나는 자그맣게 난 틈새를 찾아 발을 내디뎠다. 내가 왼쪽으로 길을 틀면 유성우들이 왼편으로 쏠렸다. 쿠우웅! 섬광이 떨어진 곳에서 쓰레기들이 갈려나갔다.
허리가 분질러진 패트병이 허공에 치솟았다.
과자봉지는 갈기갈지 찢어져 파편이 되어 흩날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어떤 것도 가두지 못한 쓰레기들 사이를 뚫으며, 나는 살육인형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버리고 싶지 않게 될까봐.”
“지난 29일 동안의—–.”
“당신이 어쩌다 13체의 인형이 되었는지 대충 짐작이 갑니다.”
인형은 기억을 버리려 했으나 이번엔 내 검이 조금 더 빨랐다. 어제, 아니 내일 기습을 받았던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나의 사지에 매달린 인형들이 없었고 오히려 주변엔 동료들이 즐비했다.
13:8.
“당신은 90층까지 클리어한 헌터예요. 그렇지만 90층까지 오르려면 80층부터 시작되는 천국들도 깨야 하지요.”
나는 다음 사냥감을 찾아 방향을 틀었다.
“천국층을 깨려거든 심판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신도가 되어줄 타인이 필요해요. 하지만 당신은 신도들을 가지는 걸 거부할 뿐만 아니라, 애당초, 타인이 당신과 엮이는 것 자체를 거절하지요.”
번쩍,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붉은색 광선이 솟아올랐다. 시뻘건 핏물을 닮은 광선은 쓰레기의 무덤을 꿰뚫고 그대로 노을 진 하늘까지 갈랐다. 잠깐 시선을 돌려 힐끗 쳐다보니, 에스델이 거칠게 숨을 쉬며 칼자루를 꾹 쥐고 있었다.
에스델 앞에서 한 체의 살육인형이 털퍼덕, 쓰러졌다.
13:7.
“그러니까 당신에겐 인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하하핫!
이단심문관의 웃음소리가 쓰레기장에 메아리쳤다. 그 어떤 쓰레기와도 닮지 않은 웃음소리는 너무나 명랑하여서, 도리어 을씨년했다.
이단심문관이 손가락을 놀려 수인을 맺었다. 자그마치 여섯 종류의 신성이적이 겹쳐져 폭풍이 몰아닥쳤다. 흑룡주는 이적들로 몸을 두른 채, 오른손으로 살육인형의 가슴을 꿰뚫었다.
13:6.
“당신은 천국을 오를 때마다 인형들에게 의지했을 거예요. 아니, 인형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은 타인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인이 당신을 믿는 것마저 끔찍하게 여깁니다. 오로지 인형의 존재만을 당신은 겨우 용납할 수 있었을 테지요.”
으랴아아아! 차차차!
독사의 기합이 호기롭게 울려 퍼졌다. 사마군(四魔君)이 한 체의 인형을 붙잡았고 독사가 그 틈을 찔러 들어갔다. 인간이, 사람이, 삶을 살아가며 소소하게 누릴 수 있는 한 줌의 행복을 담아 천무문주는 검을 내려쳤다.
13:5.
“당신은 끝까지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하지만,”
13:4.
“절대로 사람을 믿지는 않습니다.”
13:3.
“어느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했던 겁니다. 제가 홀몸이었다면 당신이 이겼을 거라고.”
13:2.
“당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잘못된 건, 빌어먹을 개새끼들이겠지. 이 세상에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이매망량이고 축생들이겠지. 그렇지만.”
13:1.
“모두가 당신과 똑같을 거라는 생각만은 하지 마십시오.”
나는 검을 겨누었다.
“당신의 피만 피라고 생각하지 마. 살천성.”
마지막 남은 살천성이 무릎을 꿇은 채 나의 칼끝에 턱이 들렸다.
“저 역시, 저의 피를 흘려가며 지금의 저를 손에 넣은 것입니다.”
“…….”
살천성의 무릎에 눌린 플라스틱 패트병이 우지끈, 숨 빠지는 소리를 내며 일그러졌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뒤편에 서 있는 동료들을.
“……성좌는.”
살천성의 폐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미 힘이 있는 자를, 더 강하게 만든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지금 살천성은 유언을 남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어쩌면 경고이고 아마도 저주일 말의 파편들이 피 묻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오로지 바칠 것이 남아 있는 자들만 성좌에게서 권능을 빌린다. 돈이 되었든. 비밀이 되었든. 인연이 되었든, 영혼이 되었든. 아직 무언가가 남은 자들이, 결국은 성좌의 별빛에 감싸여 삶을 이어나간다.”
살천성의 목소리는 간절하지 않았다. 표정 또한 간곡하지 않았다. 그것은 쓰레기장에 깃든 노을처럼 단지 저물고 있었다.
점차 핏빛의 색깔을 잃어가면서.
“……더는 건넬 것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다. 목소리를 내어도, 숨을 죽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세계에서 하루에 하루를 더해가는 자들이 있다. 그대들만,”
너희들만.
“성좌에게 감싸여 살아가는 것은.”
왜.
“그것조차 누릴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한 모욕이다.”
살천성은 무표정하게 나를 올려보았다.
“모두가 천국에 도달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모두가 지옥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
“너는 내가 어리석다 여기겠지. 하지만 상관없…….”
“아니.”
아니, 라고 대답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살천성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내 어깨를 잡아 뒤로 밀어내며, 살천성의 코앞으로 걸어나왔다.
김율이 살천성을 내려보았다.
“김공자는 너를 어리석다 여기지 않는다.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너를 어리석다고 여기는 것은 나다.”
“그리고 동시에 너이기도 하다.”
살천성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눈앞에 비춘 김율을 보고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추측할 길이 없었다. 살천성에겐 어찌하여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인간이 여기에 있는지, 그가 정말로 자신과 똑같은 인간인지, 그렇다면 왜 자신을 적대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아낼 방법이 전무했다.
그러므로 살천성의 반문은 논리적인 것이라기보다 본능적인 것이었다.
“두렵지 않은가?”
살천성은 다만 물었다.
나의 얼굴과 김율의 얼굴을 번갈아 올려보며 한없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쩌려고 그러는가. 너는.”
“도대체 어쩌려고.”
한참이 지나서야 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렵다.”
그리고 칼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상관없어.”
노을이 잘렸다.
칼날이 석양을 가로지르며, 석양보다 조금 더 붉은 목숨을 베었다.
[살천성이 소멸합니다.]그것이 별빛들 사이에서 가장 두려움을 받던 사냥꾼의 종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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