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78)
4.
[살천성이 소멸합니다.]털썩.
갈 길을 잃은 살천성은 쓰레기장 바닥에 몸을 파묻었다. 은빛의 머리카락은 마치 수면에 잠기어 퍼지는 것처럼 나풀거렸다.
그것이 꼭, 인형의 끊어진 실 무더기를 보는 것 같았다.
[해당 세계에는 성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고요한 목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졌다.
[세계 멸망 조건이 1단계 만족됩니다.] [해당 세계에는 사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 멸망 조건이 2단계 만족됩니다.] [해당 세계에는 신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 멸망 조건이 3단계 만족됩니다.]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소리가 구르르르, 하고 들려왔다.
[경고.] [모든 조건이 만족되었습니다.]처음에 짐승의 울음소리는 세계의 외곽에서만 메아리쳤다. 하지만 이내 빠른 속도로 사방에서 옥죄여 왔다. 땅이 뒤흔들렸고, 지평선에 무수히 솟아나 있는 쓰레기산이 요동쳤다. 와르르르! 산꼭대기에서 쓰레기들이 굴러 떨어졌다.
그것은 짐승의 울음이 아니었다.
이곳이 붕괴되어 가라앉는 소리였다.
[세계가 멸망합니다.]노을이 쩌저적, 쪼개어졌다.
하늘은 유릿장이 되었으며 유리가 되자마자 깨졌다. 파편으로 갈라진 유리 조각들은, 갈라지기 직전의 노을이 그대로 인화(印皇)된 채 낙하했다.
쿠우우웅!
하늘이 1/4로 쪼개진 크기의 유리조각이, 멀리, 어느 쓰레기산에 떨어졌다. 쓰레기산은 무수한 플라스틱 패트병을 토해내며 무너졌다. 유리 조각도 산산이 부서졌다. 수십억의 유리 부스러기들이 튀었다. 그것들 하나하나에 여전히 노을이 찍혀 있어서, 조각들은 붉었다.
그래서 쓰레기장은 허공에 핏방울을 뿌리는 것 같았다.
“……아름답군.”
성기사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살육인형을 상대하느라 온몸에 생채기가 난 성기사는, 부서진 하늘을 올려보았다. 팔뚝의 상처를 쥐어잡은 채.
“마치 세상이 멸망을 축복하는 것 같다. 이런 식의 멸망이라면 나쁘지 않다. 최후에 보게 될 풍경이 이런 것이라면…….”
“뭘 한가하게 품평회나 열고 있니!”
흑룡주가 버럭 소리쳤다.
“어서 도망치기나 해, 바보야! 유리파편 뒤집어써서 죽기 싫으면!”
“하지만 아나스타샤. 봐라. 이런 광경을 눈앞에 두고 도망치다니, 차마 인간으로서 못 할 짓…….”
“지랄하지 마! 나 니샤한테 약속을 강매당했어! 너 무사히 데려오지 못하면 남은 인생이 재미없을 줄 알라고!”
흑룡주는 억지로 성기사의 손목을 잡았다.
“김공자, 이번에 도와준 일은 빚으로 달아두겠어. 난 이 바보를 끌고 바빌론으로 돌아갈 테니까 당신은 마음대로 하렴!”
“아아, 아쉽다. 너무나 아쉽다. 생각해봐라. 만약 내가 죽어야만 한다면 나의 사인은 노을에 찔린 타살이고 싶다. 여기서 조금만 더 머물다…….”
“전송!!”
하얀 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끝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해 아쉬움으로 가득하던 성기사의 얼굴은 곧 빛무리에 휩싸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음! 그럼 저도 실례하겠습니다, 주인님!”
“아버님.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팟! 파앗!
다른 동료들과 가신들도 속속 붕괴하는 세계로부터 벗어났다.
다음 순간에는 어느덧 김율과 나만이 남아 있었다.
“…….”
우리는 말없이 붉은빛으로 부서지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문득 지금 이 세상의 정원이 2명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기사의 기벽이 나한테도 옮은 걸까. 세상이 세상이기 위한 최소한의 단위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어서 몸을 피해야 할 텐데도, 어쩐지 이곳에서 조금 더 머뭇거리고 싶었다.
“왜 쓰레기장이었을까.”
옆에서 김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나란히 세상의 붉음을 올려보았다.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시선을 마주쳐야만 하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그저 숨결이 같은 허공에 흘러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이가 있었다.
“왜 하필 여기였을까.”
“…….”
“집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이 없어. 수요일에 실내화를 잃어버리고 토요일까지 신발을 신고 학교를 다녔지. 토요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돌아와서, 집 주변의 쓰레기장을 뒤지면서 누가 버린 실내화가 없는지 찾았어.”
나와 단 둘이 남게 된 세상에서 김율의 말투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어쩌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돌아온 것에 불과할지 몰랐다.
“한 짝은 찾았는데 나머지 하나를 찾지 못했지. 그렇다고 실내화를 한 발만 신고 갈 수는 없잖아. 일요일이 넘어도 못 찾아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남은 한 짝이 놓여 있었어. 밤 동안에 아버지가 찾아놓은 거야.”
“그렇군요.”
“응. 그런데 짝이 안 맞았어. 서로 사이즈가 달랐거든. 나는 아버지가 나를 염려하고 아껴서 밤을 샜다고 생각하지 않아. 주말 내내 쓰레기장을 돌아다니는 걸, 아들이 아비한테 눈치를 주는 거라고 느꼈겠지.”
김율이 중얼거렸다.
“그게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 중에 가장 좋은 추억이야.”
김율이 손을 움직였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김율은 머리에 묶여진 끈을 풀어 주머니 속에 도로 집어넣고 있었다.
“살천성은 김율일 적의 기억을 전부 버렸을 텐데. 어째서 이런 곳을 자기 성역의 풍광으로 삼은 것인지, 어떻게 삼을 수 있었던 건지, 알 수 없군.”
머리끈이 풀려나간 잠깐의 시간 동안 어느새 김율의 말투는 평소로 돌아왔다.
“뇌리에서 잊혀졌다 해도 영혼에는 각인되어 있다는 것인가. 시답잖은 이야기다.”
“하지만 이렇게 탑의 한켠에 풍경을 수놓았습니다. 저와 당신을 포함해서 열세 명이 여기를 보았고요.”
“……그래.”
그리고 나는 그때 김율이 아주 작게 웃었다고 생각했다.
“그 날 이후로 집 한 구석엔 쓰지도 않을 실내화들이 몇 켤레씩 쌓여 있었지.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추억 같기도 하다.”
툭. 김율은 팔꿈치로 내 몸을 쳤다.
“먼저 돌아가 있겠다, 가주(家主). 여기는 더 이상 나의 집이 아니다.”
전송, 이라는 말과 함께 김율은 빛무리에 감겼다.
그리하여 나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지평선은 다 무너져 내렸다. 하늘에서 발가벗겨진 유리 조각은 모두 지상에 충돌하여 부서졌고, 플라스틱과 고철은 산산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칠흑의 어둠이 세계를 변방부터 집어삼켰다.
나는 마지막으로 살육인형의 잔해를 내려보았다.
“…….”
13체의 실 끊어진 인형을들 마지막으로 시야에 한 차례 담고 나서, 나는 이 세계에 마지막으로 기록될 목소리를 흘렸다.
“전송.”
[당신은 81층으로 전송됩니다.]그리하여 세상은 눈을 감았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반겨주면서.
5.
81층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를 반긴 것은, 어딘지 모르게 권태로운 마법사의 목소리였다.
“수고했어, 명천. 아무리 당신이어도 이번엔 패배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얄밉게도 살천성을 죽였구나.”
[태고의 지팡이]가 부러진 지팡이를 어깨에 기댄 채 서 있었다.아직은 어둠밖에 없는 스테이지. 언젠가 나의 성역으로 꾸며질 이 암흑의 공간에서, 마법사는 하얗게 핀 난초 같았다.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지?”
“정신만 없었겠습니까. 라비엘이 아주 약간이라도 망설였다면 저는 그 날로 영원히 여기에 박제되었을 건데요.”
“그래. 바깥 사정을 모르고 있을 당신을 위해 알려주자면, 너 때문에 지금 탑에 입주한 모든 성좌들이 난리를 치고 있단다. 살천성의 죽음이 바로 조금 전에 통지됐거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 때문에 난리난 게 솔직히 한두 번은 아니잖아요. 성좌들도 이젠 저라는 존재에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재수없어……. 당신, 유독 내 앞에서만 재수없게 구는 거 같은데 이건 내 착각이니?”
“그나저나 상담을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뻔뻔하게 말 돌리는 거 봐.”
마법사가 한숨을 쉬었다.
“뭐, 패자는 기꺼이 치욕을 감내해야 하는 법이지. 무슨 상담이야? 혹시 성역이랑 관련된 질문이니?”
“예. 제가 가진 스킬 가운데 [백귀환생]에 관한 상담이에요”
나는 손바닥을 펼쳤다.
“스킬 카드, 오픈.”
화아아악-.
손바닥 한복판에서 금빛 싸라기가 흘러넘쳤다. 그것이 곧 카드의 형태를 이루었다.
+
[백귀환생(百鬼還生)]랭크: SSS+
효과: 당신이 직접 죽인 자들을 소환합니다. 사자(死者)는 생전의 능력을 계승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할 경우, 사자는 생전의 기억과 외형을 계승합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만 몬스터로 소환됩니다.
+
마법사는 나의 카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신의 전매특허잖아. 당신이 가장 많이 애용했고 신세를 진 스킬인데, 이제 와서 나한테 상담을 받을 일이 남았어?”
“네. 특히 이 부분……. [당신이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만 몬스터로 소환됩니다]라는 구절이요.”
“그게 왜?”
“어떤 몬스터로 소환될지 제가 결정할 수 있습니까?”
마법사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건……, 음. 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
그녀는 잠시 턱을 짚었다가 나를 흘겨보았다.
“일단 왜 이런 질문을 던졌는지 모르겠지만. 원래 당신이 백귀를 몬스터로 소환하면 스켈레톤의 형태로 구현이 돼. 당연하지만 벨런스를 맞추기 위해서야. 똑같은 몬스터라면서 본 드레곤으로 소환된다고 해보렴. 망하잖아. 그러니까 몬스터의 종류를 당신이 결정할 수는…….”
“아, 그 부분은 문제 없어요.”
나는 손을 저었다.
“스켈레톤보다 오히려 훨씬 더 약한 형태로 소환할 생각이거든요.”
“……스켈레톤보다도 더?”
마법사는 미간을 좁혔다. 내 저의를 조금도 상상하지 못하겠다는 기색이었다.
“만일 그게 정말이라면 상관은 없지만. 왜? 뭘 하려고? 스켈레톤보다 약한 몬스터라면 슬라임 정도밖에 안 떠오르는데. 그리고 그게 네가 성역을 건설하는 일과 무슨 연관이 있어?”
“보시면 알아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몬스터의 정의부터 내리지요. [이성을 갖추지 못한 생명체] 정도면 될까요?”
“딱히 상관은 없지만……. 이거로 뭔가 장난을 칠 생각은 하지 마. 탑주가 이미 스킬들에 관해서 너한테 한 번 호의를 베풀었다는 걸 잊지 마렴. 절대로.”
“당연하죠.”
“좋아. 임시적으로 스킬을 변경해줄게.”
마법사는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쳤다.
[스킬 ‘백귀환생(SSS+)’의 권한이 수정됩니다.] [주의. 해당 수정 사항은 임시적인 것입니다.]아무리 나한테 패배해서 지팡이가 꺾였다지만, 아직 이런 일 정도는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나 보다.
나는 두 눈을 반쯤 감았다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마치 세수할 때처럼 두 손을 모았다.
“…….”
머릿속에 떠올린 건, 방금 세상에 버려져 부서진 13체의 살육인형.
살육인형들에 대해 세밀하게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내 발밑이 어두워졌다. 그림자였다.
살천성의 성역에 침공할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까맣게 칠해진 팔들이 내 발목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팔들의 숫자가 13쌍이라는 것일까.
‘조금 더 올라오렴.’
나는 팔들을 내버려두었다.
내 마음속을 헤아렸는지, 아니면 본래 그림자의 본능이 그러한지, 팔들은 꾸역꾸역 내 몸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해서 그 팔들을 한 곳으로 이끌었다.
그림자 팔들은 내 골반을 잡고, 팔꿈치를 타서, 손목을 경유하여—- 마침내 나의 손바닥 안으로 기어들었다.
13쌍의 그림자들이 모두 손바닥에 고인 순간.
“……백귀 환생.”
나는 기원을 담아 말했다.
[스킬을 발동합니다.]꾸물,
발밑의 그림자부터 길게 이어져 있던 팔들이 점차점차 내 손바닥으로 빨려들었다. 쏠렸다. 칠흑이 소용돌이쳐서, 일점(一點)에 모여들어, 조금씩 조금씩 형상을 갖추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던 [태고의 지팡이]가 의아하다는 듯 입술을 벌렸다. 어떤 몬스터를 소환하려는 것일까 궁금했을 테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였으므로.
“……꽃?”
그것은 은방울꽃이었다.
내 손바닥에 잠긴 은방울꽃은 썩어 있었다.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그것은 길게 고개를 뻗었으며, 이미 쇠퇴한 은방울이 13송이, 목줄기에 매달렸다.
“예.”
나는 썩은 은방울꽃이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물컹. 진흙과 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던 81층의 토양은 은방울꽃을 부드럽게 받아주었다.
“이 아이가 살천성입니다.”
“이성을 갖추지 못한 생명체, 가 조건이라면 굳이 짐승으로만 소환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나는 13송이의 은방울이 매달린 꽃을 이 세상에 심었다. 조금 전에 멸망한 세계에서 이, 아직은 어둠밖에 없는 세상으로 이식(移植)했다.
“이제부터 저는 백귀들을 사람의 육신으로 되살리거나, 아니면 단지 꽃으로 옮겨심을 거예요.”
나는 마법사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이 세상은 다른 세계들에서 피지 못해 저물어버린 꽃들로, 썩어서 문드러진 꽃들로 만개할 것입니다. 지금은 한 떨기만 심어졌지만 곧 수백, 수천, 수만 송이의 꽃들이 여기에서 썩어갈 거예요.”
“……..”
“썩은 꽃들의 화원(花圍).”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저의 성역입니다.”
아마도 내 맹세를 들은 사람은 마법사만이 아니었겠지.
[당신의 스킬이 개명됩니다.]언제나 탑주는 나를 지켜보았으며, 이번에도 내게 축복을 빌어주듯 손길을 내밀었다. 하얀빛이 나의 스킬 카드를 휘감은 것이다.
빛이 가라앉은 그곳엔 나의 스킬이 마지막으로 도달하게 된 종착역이 그려져 있었다.
+
[백화환생(百花還生)]랭크: SSS+
효과: 당신이 직접 죽인 자들을 소환합니다. 사자(死者)는 생전의 능력을 계승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할 경우, 사자는 생전의 기억과 외형을 계승합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만 꽃으로 소환됩니다.
+
언젠가.
여기는 천만 송이의 꽃들이 환생을 꿈꾸는 곳이 될 거다.
37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