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80)
3.
검은 흙이 가득 찬 플라스틱 화분 안에 녹슨 볕이 고였다. 은방울꽃은 그 속에 뿌리를 담근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태고의 지팡이가 말해왔다.
“하늘을 빚고 땅을 지었으니, 이제 바다를 만들 차례겠구나.”
“네니요.”
“그래, 천지창조의 순서는…… 잠깐. 지금 그거 무슨 대답이니?”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태고의 지팡이가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나는 더 대답 없이 행동을 개시했다.
먼저 에스델을 불러왔다.
[‘비명을 모으는 하늘’이 사도를 부릅니다.] [당신의 사도가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비명을 모으는 하늘’의 사도가 현현합니다.]한 때 약자들의 성녀라 불리웠고, 현재는 내 가문의 자문사를 맡고 있는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발끝이 바닥을 딛는 것보다도 먼저 그녀의 목소리가 세계에 퍼졌다.
“가주님. 이번에는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에스델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전투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그녀를 진정시키고는 말했다.
“진정해라, 자문사. 싸우기 위해 부른 건 아니니까.”
“앗, 그렇습니까…. 지난 싸움 때 충분히 활약하지 못했던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만….”
“요즘 좀 쌈닭이 된 것 아니냐 너…?”
“시종장은 인터넷 게임과 같습니다. 주변에 있는 이들의 공격성을 높이는 경향이 있지요. 저는 그 가엾은 피해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건 인터넷 게임에 실례되는 말 아닐까?
인터넷 게임이 폭력성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실비아가 폭력성을 높인다는 것은 반복적으로 검증 가능한 팩트인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 게임은 스트레스를 풀어주는데 반해 실비아가 풀 수 있는 것이라곤 인내심의 끈 뿐이다….
“투지를 불태우는 건 좋은 일이다만 아껴둬. 싸울 일이야 언제든 생기게 마련이니, 그때 칼을 뽑아도 안 늦는다.”
“예, 가주님… 음. 그래서 저를 부르신 이유는?”
에스델이 머뭇 눈을 깜빡였다. 그 보랏빛 눈동자에 이제야 내가 아니라 우리가 서있는 이 장소가 비친 듯했다.
“저어, 이 곳은…?”
“내가 만들고 있는 세계.”
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 가문이 자리잡게 될 곳이야.”
“과연. 여기가 우리들의 나자릭입니까.”
“나자릭이 뭐야?”
“독사가 추천해준 가주님 세계의 옛 소설에 나오는 장소입니다.”
그 양반, 설마 우리 가문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릴 계획인가…?
“그렇군요. 여기를 요새화하는 것이군요. 좋습니다. 화원마다 [정원사]를 두지요. 정원사들은 각기 강대한 스킬과 아이템을 지니고 있어서, 자신이 수호하는 화원 안에서는 가주님조차 능가하는 절대적인 파워를….”
“일-단 라오판하고는 나중에 이야기 좀 해야겠고. 음. 에스델. 지금 널 부른 건 그런 보안 시스템을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하옵시면?”
“에스델. 너 비를 내릴 수 있지?”
가을비의 마왕.
한 때 약자들의 성녀라 불리웠고, 현재는 내 가문의 자문사를 맡고 있으며, 그 전에 하나의 세계를 붉은 홍수 아래 침몰시켰던 소녀는 눈을 깜빡였다.
“예? 비… 말씀이십니까?”
“응.”
나는 언젠가 배후령이 읽어 주었던 에스델의 스킬 카드를 떠올렸다.
+
[원한은 비처럼 흐르고]랭크: S-
효과: 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무언가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눈이 멀어버린 자들이지.’ 그렇습니다. ‘무지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보여주십시오.
얼마나 많은 생명이 저들의 무지 속에서 죽어나갔는지 적나라하게 보이십시오. 이 세계에 무고히 흐른 피만큼, 하늘은 기꺼이 붉은 비를 내려줄 것입니다.
※단, 당신이 직접 목격한 핏물만 비가 되어 내립니다.
+
“이 화원에 비를 내려줘.”
내가 부탁했다.
4.
그 모습은 기도를 닮아 있었다.
에스델은 두 눈을 감았다. 고개를 수그렸다. 백금빛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흘러내려 목과 가슴을 덮고는 맞잡은 두 손 위에 고여 들었다.
입술이 벌어졌다.
“아.”
일순간 다물렸다가, 다시 벌어졌다.
“아.”
다시.
“아—”
그것은 일종의 되새김질이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을 때, 믿기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을 어떻게든 자신의 속에 받아들이기 위해서, 소화시키기 위해서, 몇 번이나 오물거리는 것과 같았다. 그러기에 입술을 열 때마다 울리는 소리는 성대가 아닌 심장 안쪽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것이었다.
그녀의 트라우마에서 수없이 보았던 모습.
“—-, —-, —————······.”
그리하여, 아이김 제국의 세계에 들어섰을 때 처음 보았던 광경이 펼쳐졌다.
나의 화원에 붉은 비가 내렸다.
“…….”
“…….”
홍수였다
넓게 펼쳐져 세차게 내리는 빗물은 금세 이 화원을 뒤덮었다. 매달아둔 노을마다 물방울이 묻어 어지러이 산란했다. 붉은 비와 붉은 조각이 마주친 곳에서는 기이하게도 검푸른 무지개가 피었다.
플라스틱 화분 안에 스미는 핏방울들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거세구나.”
“예.”
태고의 지팡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소나기 같지요.”
“…….”
“저 비도 처음에는 소나기로 받아들여졌어요.”
나는 오래 전에 읽었던 책으로부터 인용하듯 말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있어왔던 비. 세찬 만큼이나 곧 그치고 말 비. 그러니 그저 우산을 쓴 채 이웃과 담소하거나 천장이 있는 집 안에서 체스를 한 판 두면 개어 버릴 비라고 여겼어요.”
그것은 여러 책들로부터 인용된 문구들이었다.
사람이 각자 한 권씩의 책이라면 나는 독서가의 삶을 산 셈이었으므로. 도서관장 정도는 아니라도 내겐 인용할 수 있는 책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지요.”
“…….”
“그렇지가 않았어요.”
태고의 지팡이는 부러진 지팡이를 입에 문 채 숨을 들이마셨다.
애용하는 곰방대를 피워 마음을 가라앉히는 흡연가를 연상케 하는 모습. 실제 효과도 그와 다르지 않았는지, 마법사는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어디서든 벌어지는 일이야.”
“…….”
“상대의 원한을 과소평가하는 것. 자신이 상처 입힌 상대가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일지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태만하고 방심하여 목줄이 물어뜯기거나 내장이 썩어드는 것. 모든 제국이 겪는 일이고 어떤 강자도 피해갈 수 없는 길이겠지…… 왜 웃는 거니?”
“그냥요.”
나는 빈 페트병 하나를 들어 그 중간을 잘라내며 말을 이었다.
“기둥씩이나 되는 존재들도 심장에 굳은 삶이 배기는군요.”
“내가 지금 센 척을 하고 있다는 거니?”
“아닌가요?”
“……내가 하던 일이 좀 많이 엿같았어야지.”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저승의 재판관 역할을 해왔던 마법사는 다시금 지팡이를 입에 물었다가 떼었다.
지금 내리는 비는 몸 속에 흐르는 피와는 온도가 달라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웠고, 그래서 마법사의 진절머리는 입에서 피어 오르는 하얀 김으로 표현됐다.
“그래. 그치만 내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건 맞는 말 아니니. 아이김 제국이 멸망한 이유는 자신이 강자라 착각하고 방심했기 때문이야.”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또한 저었다.
“아니요.”
하늘 전역을 뒤덮은 구름으로부터 쏟아지는 가을비는 자연히 땅 전체를 적셨다, 고였다. 차오른 빗물의 수위가 구두 안 쪽으로 스밀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빗방울마다 그 무게는 제각각이었고 플라스틱 화분에서 흘러 넘친 빗물도 있었던 만큼 자연히 강약이 생겼다. 평평하던 바닥은 처음에는 평탄하게 높아졌다가 수면을 때리는 힘의 차이에 따라 출렁이기 시작했다.
이 세계의 바다였다.
“거기에 더해서, 두 가지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에요.”
눈물로 만들어진 바다 속에 발을 담근 채 서서 나는 말했다.
“누군가 울고 있다는 걸요.”
이어서 말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고 있다는 걸요.”
나는 태고의 지팡이를 향해 말했다.
“마치 탑주가 그러하듯 말이예요.”
태고의 지팡이가 멈칫했다.
부러진 지팡이에 열이 고였다. 위대한 마법사답게 그녀는 곧바로 내 말의 요지를 알아들었던 것이다.
“탑주가 하는 일이야말로 어디서나 있을 법한 흔한 일이라는 말이니?”
“당신들이 탑주에게 끌린 이유가 바로 그 때문 아니었습니까?”
“예.”
그 어떤 무자비한 존재가 다스리는 절망의 세계가 어딘가 있다고 해도, 그곳에서조차도 누군가는 울 것이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위해 울어줄 것이다.
“잊어버리면 안 되는 일이지요.”
아이김 제국은 살천성 레판타 아이김이 세운 제국이다. 제국의 개조는 줄곧 아무도 초대받은 적 없는 쓰레기장에서 자신이 아닌 이들을 위해 검으로 울고 있었다.
누군가 울고 있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고 있었다.
아이김 제국이 멸망한 것은 그것은 단지 그러한 유지를 잊었기 때문이리라.
“—————······.”
제국의 건국주가 피어 있는 화분 안에, 제국을 멸망시킨 마왕의 눈물이 흘러 넘쳤다.
흘러 넘친 가을비는 반투명한 화분 바깥에 검붉은 자욱을 남기면서 바다에 섞였다. 갓 생겨났음에도 그렇게 바다는 바다의 일을 했다. 세상에서 흘러 넘치는 모든 것을 바다는 잠자코 받아들였다.
그리고 주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새로 만든 플라스틱 화분으로 바닷물을 펐다… 손을 펼친 채 말했다.
“백화환생.”
[스킬을 발동합니다.]두레박에 담긴 우물물처럼 출렁이는 화분 안에, 자그마한 연꽃이 피어났다.
오래 된 폐허 저택에 펼쳐진 아무도 걷지 않은 커튼처럼 헤진 연꽃에는 중량이 없었다. 무거운 빗방울과 가벼운 빗방울이 번갈아 내려치며 만들어내는 파도 위에 너덜너덜한 꽃잎은 잠자코 자신을 내맡겼다.
“……이 꽃은.”
태고의 지팡이는 금세 그 연꽃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은방울꽃이 담긴 화분을 가리켰다.
“이 세계에 하늘과 땅이 있어야 한다면, 오로지 저 아이에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어요.”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바다가 있어야한다면, 그건 이 아이에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발목까지 차오른 수면 위에 화분을 내려놓았다. 이 세계의 바다 위에 처음 뜬 배였다.
화분은 자신이 담은 연꽃처럼 무게가 전혀 없는 듯 파도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파도가 만들어내는 언덕을 타고 그만큼 높이 솟았다가,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가길 되풀이했다.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이던 그것은, 그러나 점차 일정한 박자를 갖추고 자신만의 항해를 시작했고.
어디론가 흘러가, 이윽고 보이지 않게 되었다.
5.
[당신의 세계에 바다가 생겼습니다.] [83층이 클리어됩니다!]그렇게 나는 나의 성역을 가꾸어 나갔다.
“백화환생.”
[스킬을 발동합니다.]“백화환생.”
[스킬을 발동합니다.]먼저, 꽃을 피웠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마련해둔 화분에 옮겨 심었다.
그리고 가신들을 불러 일감을 주었다.
“우고르. 애비여. 지금 바닥에 대고 주먹질 좀 해달라는 말인가?”
“바로 그거야.”
“하라니 하겠다만… 무슨 의미가 있나?”
“이 꽃은 높은 곳을 좋아하거든.”
나는 너덜너덜한 구름국화를 든 채 말했다. 내 가문의 무사장은 하얀 비닐에 흙을 담아 만들어진 화분과 거기에 피어난 꽃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알았다. 애비 하는 일이 뭐 늘 그렇게 알아먹기 어려운 것들이지. 우거. 물러나 있어라.”
“부탁할게.”
“큼!”
우부르카가 주먹을 휘둘렀다. 쾅……!! 평평하던 바닥과 그 위에 출렁이던 바다가 수직으로 폭발했다.
높이 솟아오른 물줄기가 다시 한 차례 이 세상을 빗물로 적시고 그쳤을 적에, 나의 성역의 바닥은 더 이상 평평하지 않았다.
[당신의 세계에 산맥이 생겼습니다.] [84층이 클리어됩니다!]그런 식이었다.
[당신의 세계에 봄이 생겼습니다.]봄바람을 좋아하던 어떤 꽃과 영원한 겨울에 지쳐 쓰러진 어떤 꽃을 위해 나는 봄을 데려왔다.
[당신의 세계에 여름이 생겼습니다.]들끓는 뙤약 속을 고향으로 여기는 어떤 꽃과 여름날 가족과 함께 한 번이라도 바다에 가보고 싶어했던 어떤 꽃을 위해 나는 여름을 만들었다.
[당신의 세계에 가을이 생겼습니다.]어떤 꽃을 위해서.
[당신의 세계에 겨울이 생겼습니다.]단지 어떤 꽃을 위해서.
[축하드립니다! 당신의 세계에 계절이 생겼습니다!] [85층이 클리어됩니다!] [당신의 세계에…….]오직 한 송이 한 송이의 꽃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로 나는 나의 세상을 채워 나갔다.
“피어라.”
꽃을 피웠다.
“달게 여기고 편히 느끼며 간절하게 바라던 것들 속에서 쉬어라.”
꽃을 심었다.
“원하는 동안 원하는 만큼.”
바란다면 영원히.
하지만.
“언젠가 그때가 오면.”
상한 꽃잎이 다시 아무는 날이 오면.
잎사귀의 구멍이 스스로 메워지고, 꺾였던 줄기에 힘이 들어가는 그 날이 오면.
온전히 자신만의 의지로 다시 한 번 활짝 피어 보고 싶은 그 순간이 온다면.
“비로소 너희는 화분을 나오게 될 거야.”
그렇게 나는 화원을 가꾸었다.
38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