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83)
1.
싹둑.
언젠가처럼, 머리 손질 가위가 허공에서 교차했다.
“그래. 정말 곧바로 100층에 오를 셈이니?”
“예.”
커다란 유리창에 비친 내가 말했다.
어깨 너머에선 가위를 든 원장님이 한숨을 짓고 있었다.
“좀 더 쉬었다가 올라도 좋으련만.”
“하무스트라랑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아니, 하무스트라가 원장님이랑 똑같은 말을 하는 거려나요?”
“어느 쪽이든 맞는 말 아니겠니. 지내는 시간이 길다 보면 서로 물들게 마련이란다.”
하무스트라, 김율, 원장님은 플라네타리움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시간은 양쪽으로 트인 것이어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하무스트라씩이나 되는 존재라 하여도 그것은 예외가 아닌 셈이다.
나와 배후령 역시.
“예, 바로 올라갈 거예요.”
내가 머리를 깎는 동안 배후령은 잠자코 옆에서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래.”
원장님도 더 말없이 가위질에 열중했다.
가위.
“이젠 정말 원장님이 되셨네요.”
원장님이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설마 [화원의 관리자가 되셨잖아요? 그러니 원장님이죠.]라고 덧붙일 셈이라면 그만두려무나. 내가 돌보았던 아이가 아저씨가 되었다는 걸 그런 식으로 알게 되고 싶지는 않구나.”
“지구 온난화를 막는데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여긴 지구가 아니잖니.”
한담이 오가는 동안에도 원장님은 계속 내 머리카락을 깎아 주셨다… 그러면서 말했다.
“150년 전에 어떤 기자가 한 등산가에게 질문을 했단다.”
–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는 겁니까?
“기자가 그 등산가에게 그런 질문을 했던 이유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겠지. 바로 몇 년 전에 칼렌베리 씨가 탑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기자들이 앞다투어 물어본 것과 비슷한 이유였을 거야.”
–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왜 안정을 버리겠다는 것인가?
– 거기에 오르는 대가로 무언가 약속 받은 것이라도 있는가?
–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도전하게 만드는 것인가?
– 그냥 내가 궁금하다. 설명해달라.
“그 등산가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는구나.”
–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 그 말. 저도 들어본 적 있어요.”
“그래. 내가 너 나이 때에도 모르는 사람이 드문 말이었지. 패러디도 많이 나왔단다. 게임이 거기에 있어서 산다느니, 치킨이 거기에 있어서 시킨다느니. 별에 별 썰렁한 농담들이 많이도 돌았던 게 기억나는구나.”
“그때도 지구가 많이 더웠나봐요.”
“온난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무렵이기는 하지.”
원장님의 가위가 삐쳐 나온 머리카락을 싹둑, 잘랐다.
잘려 나간 머리카락들이 바람에 파스스 흩어졌다.
“그런 이야기를 지금 해주신다는 건, 원장님께서도 제가 왜 100층을 목표로 하는지 물어보시려는 걸까요?”
“아니, 공자야. 그건 별로 묻고 싶지 않단다.”
언제나처럼 다소 찌푸린 얼굴로 원장님은 조용하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 말은 조금 의외였다.
“제가요?”
“이렇게 번듯한 집을 가졌지 않니.”
원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이곳은 나의 집이었다.
성역, [썩은 꽃들의 화원]이 아니라 내가 본디 살아가는 저택.
20층.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에서는 썩은 꽃들의 화원보다 1층 아래, 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에서는 그보다 60층 아래 위치한 곳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화원도 가졌지.”
성역이 아닌 집에서 머리를 자르기로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 화원에 흙 한 톨, 물 한 방울이라도 꽃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은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잘려 나간 내 머리카락들은 화원이 아닌 내 집 마당에서 민들레 씨앗과 뒤섞였다.
“집을 가졌다는 건 네가 너와 네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성을 가졌다는 뜻이야. 꽃밭을 가졌다는 건 네가 너와 네 가족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온전히 생각하며 배려해줄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는 의미란다.”
“…….”
“그런 네가 도전을 한다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여유도 있을 것이고.”
“여유, 인가요.”
“도전하는 것도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단다.”
찰캉거리는 가위질 소리에 섞여 원장님의 말이 이어졌다.
“사막에서 헤매던 사람이 오아시스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는 걸 도전이라 말할 수는 없지. 굶주림에 허덕이던 아이가 길가에 버려진 빵을 허겁지겁 주워 먹을 적에 그것을 두고 도전이라 부를 사람은 없을 거야. 그냥 닥쳐오는 것들에 맞서 발버둥치는 것이지.”
“확실히.”
“버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새로이 무언가를 준비할 수 있어. 자신을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남을 남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그렇게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만이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게 되는 법이야. 할 수 있는 사람이 뭔가 더 해보겠다는데 나는 별 의문을 갖지 않는단다.”
찰캉.
“오히려 도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의문을 갖고는 하지.”
찰캉.
“그 사람은 왜 사막에서 헤매게 되었을까. 그 아이는 왜 굶주리게 되었을까. 왜.”
대체 왜.
“그러니까 나는 마르쿠스 칼렌베리나 숀 맥칼리스터가 왜 그 모든 걸 내려놓고 들어왔는지 궁금해하지 않아. 같은 이치로 비명을 모으는 하늘이 왜 100층을 목표하는지도 궁금해하지 않고. 단지 나는,”
무거운 한숨과 함께, 원장님은 말을 이었다.
“스무 살의 김공자가 왜 탑에 들어왔는지, 그것만은 못내 궁금하구나.”
음.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틀면서 머리카락의 모양새를 살폈다.
“탑이 여기에 있어서… 는 어떨까요?”
“그 등산가는 결국 등정에 실패했단다.”
찰캉.
차가운 가윗날이 두피를 스치는 느낌에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눈보라 속에 텐트 바깥으로 잠시 나갔다가 그대로 사라져버렸지.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아 그 벗과 가족들은 빈 관으로 장례를 치러야 했어. 거의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시체가 발견됐단다.”
“그건… 처음 듣네요.”
“언제나 사람보다는 그 사람이 했던 말이 더 널리 퍼지고 오래 남게 마련이지.”
찰캉.
“공자야.”
원장님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왜 탑에 들어왔던 거니?”
거울에 비친 원장님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탑이 여기에 있어서였니?”
2.
내 성역과 90층이 이어지는 갈림길에서 태고의 지팡이가 나를 맞아주었다.
“어서 와, 사왕. 산뜻하게 차려 입었네.”
“예에.”
“표정은 별로 산뜻하지 않고. 무슨 일 있니?”
패배한 이래 꿀꿀한 표정이 디폴트가 된 이 마법사 양반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어지간히 티가 나는 모양이다.
나는 이마를 닦으면서 말했다.
“아뇨 뭐. 그냥 좀 옛날 생각이 나서요.”
“노인네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앞으로 살 날이 창창하다 못해 살 날 밖에 안 남은 주제에 그러면 안 되지.”
태고의 지팡이가 지팡이를 입에 문 채 말했다.
“아니, 죽어갈 날밖에 안 남았다고 해야 할까? 본인은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해?”
“가능하다면 행복할 날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싶네요.”
“그거 좋네. 하지만 네게 그 말을 해주어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겠지.”
그건 그렇다.
“갑시다.”
태고의 지팡이는 콧방귀를 뀌고는 나를 선도하여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탯줄처럼 드리워진 계단을 담담히 걸어 올라갔다.
그런 내 목에는 언제나처럼 여우님 목도리가 둘려 있었고, 손목에는 실뱀 팔찌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곁에서는 검제가 둥실둥실 뒤따르고 있었다.
평소 성검이 걸려있던 허리춤만이 허전했다.
‘검제 양반.’
– 왜?
검제가 곧바로 대답해왔다.
나는 입 바깥으로, 그리고 마음 속으로 동시에 물었다.
“이 다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태고의 지팡이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검제 역시 나를 흘끗하지 않았고.
그저 둘의 대답만이 동시에 들려왔다.
“탑주는 예술가였어.”
– 나는 싸움꾼이지.
저벅.
“탑주의 인생을 보았다니 대충은 알겠지. 그녀는 전쟁군주였고 정치가였으며 귀족이었지만, 그만큼이나 검투사였고 배우였으며 건축가였단다.”
– 지금껏 날 봐왔으니 알 거 아니냐? 이리저리 재고 따지는 건 내 취향이 아냐. 보통 세상의 취향과 내 취향이 어긋날 때도 있다만은 결국은 내 취향이 세상의 취향이 되더라고.
“동시에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이기도 했지.”
– 나한테 자기 취향 강요하려던 녀석들은 다 대가리가 깨졌거든.
한 단의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그만큼 하늘이 가까워졌다.
“어떤 의미로는 당신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
– 솔직히 너도 나랑 비슷한 방식으로 탑을 오른 거 아니냐?
“탑주는 누구도 목줄을 매어놓을 수 없을 만큼 자유분방했어. 하지만 그 자유에는 분명한 테두리가 있었지.”
– 위령은 좀 많이 의외였다만 가을비의 마왕을 물리칠 때 딱 확신이 왔다. 와. 이런 세상 막무가내 또라이 공친놈을 봤나. 그치만, 그래. 퀘스트랍시고 주어지는 게 마음에 안 들면 퀘스트 주는 놈을 족쳐야지. 마음에 안 드는 규칙이 있으면 규칙 정하는 놈이 마음에 들 때까지 패는 거고.
한 단에 한 걸음만큼 변하는 풍광에는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런닝머신 위를 걷는 것처럼,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데 주변만 한 걸음 한 걸음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탑주는 특히 푸가를 좋아했어.”
– 이 탑도 똑같다, 공자야.
“음과 율을 이어 곡을 자을 적에, 처음과 끝이 이어지도록 하는 걸 좋아했고, 서로 다른 시작점을 갖는 선이 같은 종점을 갖도록 하는 것을 좋아했지.”
– 기억을 갖고 노는 고약한 것들이 있다만은, 그런 것들도 내가 탑을 오를 적에 그 짓거릴 했다가는 나한테 다 대가리가 깨졌을 거야. 니가 한 것처럼.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냐?
이윽고.
둘은 호흡을 맞춘 것처럼 동시에 말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 너머에 있는 것들은 있어왔던 것들의 연장이야.”
-이 너머에 있는 것들 중에서 새로운 것은 없다.
세상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색깔을 가진 고무 점토를 한 데 섞어 뭉개는 것처럼, 까마득한 아래 위치한 땅이 먼저 녹아 없어졌다. 하늘이 뒤를 이었다. 녹았다. 점점이 녹아 문드러진 하늘은 이윽고 무수한 모래알들로 변하여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아마도 당신이라면 100층에 오를 수 있겠지.”
– 듣자하니 회색이가 마지막으로 올랐던 계층이 94층이었다매?
아니.
그것은 폭포가 아니었다.
“1층부터 90층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오르지 못할 일은 없을 테니까.”
– 그야 50층부터 출발한 그 녀석으로서는 그 이상 오르기 힘들었을 거다.
그것은 거대한 모래시계였다.
언젠가 보았던 무티아의 성역과 비슷했다. 막막하다시피 넓게 펼쳐진 황야. 땡볕에 아지랑이 진 것처럼 일그러진 허공은 헤아릴 수 없이 두꺼운 유리로 인한 것이었다. 중앙 부분에서는 서서히, 뱀의 심장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핏물마냥 서서히 모래 폭포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래시계의 한복판에 나는 서있었다.
잘 아는 목소리가 그런 나를 반겼다.
“어서 와, 사왕! 아니, 이제는 명천이라고 불러야 할 사람!”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 인물을 바라보았다.
“공녀님?”
“응! 나야! 오래간만!”
신기루를 떠도는 공녀가 폴짝, 폴짝 뛰면서 나를 반겼다. 변함없이 활기찬 아가씨다.
“별로 오래간만은 아닌 것 같지만요… 어. 혹시 절 안내하러 오셨나요?”
“응! 맞아.”
배시시 웃은 공녀는 한 바퀴 그 자리에서 빙글, 돌아 머릿결을 흩날리더니, 태고의 지팡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 이모. 이제부턴 내가 맡을게.”
“그래그래. 끈 떨어진 노인네는 이만 가보도록 하마.”
“응응. 한가하면 가서 미야 좀 도와주구.”
“그 녀석, 남이 자기 일 돕는 거 싫어하잖니.”
“이모… 바로 그러니까 도우라는 거잖아.”
“너란 애는 진짜…….”
태고의 지팡이는 질색하면서도 묘한 미소를 띄운 채 물러났다. 어째 딱 좋은 스트레스 해소감을 발견했다는 얼굴이었다.
음.
“구원하 자문사가 고생이 많네요….”
“원래 자문사는 고생하는 직종이야. 명천네 자문사도 고생하지 않아?”
“그럴지도요. 하지만 제가 걔로 인해 했던 고생이 더 많지 않을까요?”
“바로 그거야. 유비도 제갈량을 굴릴 적에 뽕을 뽑겠다는 심정으로 굴렸을걸.”
촉나라 팬들을 두 쪽으로 갈라지게 만들 발언을 태연하게도 하더니만, 읏차,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는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자그마한 석판이었다.
“그건…….”
“응.”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는 석판 양 옆을 두 손으로 잡고는 힘껏 들어올렸다.
“명천. 지금부터 당신이 할 일을 말해줄게.”
석판 한복판에는 모두 아홉 개의 구멍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홉 개의 열쇠를 모으는 거야!”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선언했다.
38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