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84)
3.
아홉 개의 열쇠를 모으도록 하라.
그 선언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떤 열쇠를 모으라는 말입니까?”
“음! 설명해줄게.”
공녀가 딱, 손가락을 퉁기자, 흘러 내리는 모래 폭포 위에 백금빛 실로 자수한 것처럼 그림이 그려졌다.
언뜻 개미굴의 단면도 같기도, 잔뿌리가 무수히 뻗어 나간 나무를 모사한 것 같기도 한 그림이었다.
“이건…….’
“응! 명천. 니네 탑의 단면도야. 이렇게 보니 좀 색다르지?”
그 말처럼 그것은 탑의 지도를 계층별로 측면으로부터 표시한 것이었다.
내가 해바라기 헌터일 무렵에도 초반 계층들의 지도는 알음알음 헌터들 사이에 나돌고 있었고, 최근에도 흑룡 길드와 만신전이 손을 합쳐 지도 작업에 나선 바가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쉽사리 알아보았다.
공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지휘봉을 손에 들었다.
“이전에 명천이 불려 왔던 [지하 1층]이나, 명천의 고향이 속해 있는 [0층]은 건너뛰고 시작할게.”
지휘봉의 끄트머리가 흐르는 모래 위에 그려진 탑의 1층을 쿡, 찔렀다.
“탑의 1층은 [피난처]야.”
피난처.
“전진기지. 거점. 수용시설 등등. 여러가지로 칭할수 있겠지만 역시 가장 딱 들어맞는 명칭은 그것일 거야. 무언가로부터 도망쳐온 사람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해주는 곳. 적어도 도망쳐온 것들로부터는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되게끔 막아주는 방파제가 바로 1층의 역할이야.”
스윽, 지휘봉이 1층을 길게 평으로 찢으며 옆으로 움직였다.
탑의 도시 바빌론.
그 바빌론을 관통하여 흐르는 커다란 강의 모사도를, 지휘봉은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이곳에는 물이 흘러. 비가 내려. 그 물의 성분은… 으음. 어쨌든 그 물에는 어느 정도 영양분이 함유되어 있어. 무색무취라지만 그것만 마셔도 생존할 수는 있지.”
“…….”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다, 싶은 사람들은.”
스윽.
지휘봉의 끄트머리가 모래를 거슬러 올라 탑의 2층을 가리켰다.
“[전사]가 되기를 선택할 수 있어.”
공녀의 지휘봉이 탑의 2층을 이리저리 훑었다.
“곳곳에 배치된 나무로부터 과실을, 목재를, 바위로부터 석재를, 광석을, 풀들로부터 나물을, 약초를. 늑대나 고블린 같은 몬스터를 쓰러뜨리고 고기를, 가죽을, 아이템을, 골드를 얻을 수가 있지.”
“예, 압니다.”
“응. 명천 또한 걸어봤던 길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공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을까?”
실로 돌연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너무도 오래된 질문이기도 했다.
“그냥 다 주면 안 되었을까? 과실이든 목재든 광석이든 약초든 고기든. 달라는 대로 퍼주면 그만 아니었을까?”
“…….”
“어떻게 생각해, 명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아닌 게 아니라 방금 공녀가 말한 것은 탑의 개척 초기, 수많은 사람들이 되풀이하여 머릿속에 품었던 질문이었다. 탑과 관련하여 사이비 종교가 끊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라고 밤볼리나는 이야기했었다.
내가 말했다.
“아마 자원이 부족해서겠지요.”
“으흠.”
“그만한 사람들의 의식주를 무한하게 해결해준다… 그러자면 정말 방대한 자원이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공녀를 바라보면서 탄식하듯 나는 말했다.
“과연.”
“음음?”
“일부러 입니까?”
그 말에 공녀는 살짝 웃었다.
나는 이마를 꾹꾹 짚은 채 말했다.
“제가 아직 완전한 기둥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답해본다면.”
그렇게 땐 서설에 공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역시 탑을 관리하게 될 기둥으로서 답해보라는 의미였던 모양이다.
“탑주는 자신이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되길 바라지요. 몬스터 등의 위협을 일부러 배치하고 시련을 종용함으로써, 탑주는 만인을 무제한적으로 구원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는 비난을…….”
아니.
음. 아니다.
이건 너무 사상적인 이유야. 좀 더 살에 와닿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뚜렷한 적이 있어야 탑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단결할수 있으니까? …음. 이것도 뭔가 좀 아닌 것 같네요. 그러면….”
공녀는 뒷짐을 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든지 기다려주겠다는 태도였다.
나는 한참 동안 생각한 끝에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네요, 공녀님. 어째서입니까?”
“만약에.”
공녀는 그렇게 운을 떼었다.
“너희들의 세계가 지금만큼 더워지기 전에. 그러니까 너를 키워준 원장이 딱 너만 했을 시기에, 너희 나라에 네 배후령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배후령을 흘끗했다.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뀌는 배후령을 바라보니 대답은 너무나도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어… 또라이요.”
“그리고?”
“그리고 음… 깡패? 체육관 관장? …격투기 선수? 그 정도 아닐까요?”
“응.”
공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3국으로 가서 용병이 된다거나 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그 정도겠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거야.”
“…….”
“그치만 명천. 만약 고대 시대에 검제가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검제를 흘끗했다.
그에 대한 대답 역시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영웅이 되었겠죠.”
“왕이 아니라?”
“왕은 무슨. 저 양반이 무슨 법을 만들어서 뭘 어떻게 통치를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멋대로 떠받들어 나라가 만들어지긴 했겠지만, 검제 양반이 죽고 나서 사분오열되었겠죠. 어쩌면 살아 있을 적에 그렇게 될 수도 있었을 테고.”
“에헤헤. 그러게.”
공녀는 웃었다. 뒷짐을 진 채, 발끝으로 스윽, 스윽, 바닥에 쌓여 오른 모래더미를 헤집으면서 순수하기 그지없게.
“그치만, 격투기 선수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충실한 삶이었겠지? 검제의 입장에서는.”
“……그랬겠죠.”
“그런 세계. 그런 시대… 전사들의 시대가 오래 전에 막을 내린 곳. 칼을 든 용사가 총을 든 군단에게 자리를 내어준 곳에서, 검제와 같은 인물은 어떻게 취급 받을까.”
방해물.
독불장군.
광인.
사회부적합자.
“검제 스스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겠지.”
그럴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동정한다면, 그 사람을 미친 놈 보듯 쳐다봤을 거야.”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검제에게 있어 온당한 세계일까.”
그럼에도 어쩐지.
산이 썩는 것과 동일한 시간을 들여 썩어가는 공룡의 시체를 보는 것처럼, 아주 조금, 가슴이 아팠다.
“사람의 품은 하나여서 무언가를 가지려면 달리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을 버려야만 해. 사회도 자라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버려야만 하지. 그 어떤 문명도 무수한 태아들의 시체 위에 비로소 바로서는 거야.”
“그래서….”
“엄마는 그 어떤 시대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 곳을, 최소한 그런 가능성이 있는 곳을 만들고 싶어 했어.”
다시금, 지휘봉이 2층과 3층을 훑었다.
“전사와 영웅들의 시대. 무언가를 베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확인받을 수 있는 세계.”
쭈욱, 모래 폭포를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간 지휘봉이 10층을 건드렸다.
“신관과 무녀들의 시대. 베어진 것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세계.”
이윽고 지휘봉은 11층에서 한 차례 멎었다.
“그리하여 1층부터 10층까지가 [황금의 시대]라면, 11층부터 20층까지는 [백은의 시대]에 해당해.”
“백은….”
“너희들은 여기서 아이김 제국을 만났지? 다른 탑들도 11층부터 20층까지는 [다른 세계]를 마주하게 돼.”
다른 세계.
“완전한 타자. 너희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접점이 없는 곳. … 다만 아직 50층 이하인 만큼, [완전한 이세계]가 아니라 [이미 한 번 멸망한 세계]를 마주하게 되는 거야.”
지휘봉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행자의 시대. 멸망한 왕국의 무너진 성터에서, 이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조망해볼 수 있는 세계.”
12층, 13층, 14층….
“장군의 시대. 상인의 시대. 병사의 시대….”
모래 폭포를 역주한 지휘봉은 이윽고 20층에 이르렀다.
“자. 이제 여기부터가 [강철의 시대]야.”
“우리 탑에서는 대도서관이었죠.”
“응. 하무스트라는 제갈공명 같은 인물이었지. 굴릴 수록 맛이 배어나온다고 엄마는 이야기했어.”
그건 과연 너무 불쌍한 것 아닌가 싶었지만, 하무스트라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보면 신기하게도 동정심이 산새처럼 날아갔다.
“다른 탑들은 어떻습니까?”
“역시 하무스트라인 경우가 많아. 그 다음으로는 무티아나 마호스의 비중이 높은 편이야. 아. 정말 가끔 바비트가 맡기도 하고. 네 목에 걸려 있는 여우가 맡은 적도 한 번은 있었어.”
“바비트가 맡는다는 부분에 딴지를 걸까 싶었지만, 헤에, 여우님이 말이죠, 하고 무난하게 반응하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응응. 그리고 나는 반응하지 않는 길을 선택할게.”
공녀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해설로 넘어간 것이다.
“황금의 시대 동안 자신들이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을 알게 된 이들은 백은의 시대에서 타인을 대하는 방법을 알게 돼. 그리고 강철의 시대에서 마침내 자기 세계의 왕을 맞이하게 되지.”
“왕….”
우리의 왕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니, 하고 묻던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문득 머릿속에 스쳐갔다.
“그래서 거기서부터는 상위 랭커들만 공략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거였군요.”
“응응. 세계의 왕을 자칭하고 싶다면 일단 그 세계를 대표해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결국 검제 양반도 왕이 된 셈이네요.”
– 좀비야. 넌 방금도 나를 검제라고 불렀는데 그 제가 무슨 제 자 같냐?
배후령이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이 고막을 건드리고 내 뇌에 닿는 것보다 먼저 대답했다.
“혹시 미친 개 제(猁)라는 한자 아세요? 저도 몰랐는데 언제 검색해보니 있더라고요.”
– 유니코드 문자에서 니 대가리마냥 깨져서 ■ 로 표시될 것 같은 한자를 잘도 찾았구나.
“그렇게 되면 劍■으로 표기가 되는 셈이네요. 뭔가 떡밥 같군요.”
– 떡이 될 때까지 패고 싶다 진짜….
나는 머쓱하니 뒷머리를 긁었다.
공녀는 우리 둘의 농짓거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그리고 30층 대… [청동의 시대]. 여기서 너희들은—”
“아이들을 갖게 되는군요.”
공녀는 살짝 웃었다.
“응. 단순히 [아래]를 갖게 된다고 해석하는 탑들이 더 많기는 했지만.”
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잿빛 거미가 떠올랐던 탓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구조는 알 것 같았다.
“황금의 시대에서 자기 자신을. 백은의 시대에서 타인을. 강철의 시대에서 위를. 청동의 시대에서 아래를.”
“응. 그리고 40층 대. 돌의 시대가 있지.”
돌의 시대.
“여기서 너희들은 [평가 당하는 쪽]이 돼. 여기에 대해서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예. 마지막 투표를 할 적에 이미 한 차례 훑고 지나간 적이 있으니까요.”
“응. 이렇게 1층부터 49층까지가 하나의 사이클을 이루게 되는 거야. 그래서 그 다음에는 이 사이클을 한 층 더 깊이 반복하게 되고. 엄마는 음악을 좋아하거든.”
태고의 지팡이가 했던 말과 같은 말을 입에 담으면서, 공녀의 지휘봉이 스윽, 50층을 가리켰다.
“다만 이 사이클부터는 좀 더 공격적인 의미가 가미돼. 50층은 안식처가 아니라 완전한 [거점], [전진 기지]로 기능하고, 60층 대는 본격적으로 다른 세계들과 투닥거리게 되는 거야.”
“70층 대는 저승이었지요…. 과연. 그것도 어떤 의미로는 [위]군요.”
“응. 80층 대가 어떤 의미로 기능하는지도 명천은 이제 잘 알았을 거야.”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클리어된 층들이 어째서 계속 그 자리에 남아, 다른 이들이 드나들 수 있는지도 이제야 알 것 같고요. 사라지는 시대가 없게 하기 위함이군요.”
“맞아.”
“흥미 깊은 설명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어요.”
나는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래서, 모아오라는 아홉 개의 열쇠는 결국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한 말들에 힌트가 있어!”
탑주의 딸은 방긋 웃으면서 한 바퀴 돌았다.
“명천, 지금까지 네가 지나쳐온 세계를 돌아봐. 살펴봐. 지금까지 네가 탑을 올라오며 남긴 것들을,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궤적을 바라봐.”
탑주를 닮은, 탑주와 다른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비추었다.
“100층으로 향하는 열쇠들은 바로 거기에 있을 거야.”
“과연.”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90층부터 99층까지는,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응.”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는 손가락을 퉁겼다. 이 90층의 한복판에 흘러 내리던 모래 폭포가 좌우로 갈라지면서 계단이 드러났다.
그 계단은, 위가 아닌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내려가기]를 시작할 시간이야.”
38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