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85)
1.
모래의 커튼이 좌우로 갈라져 드러난 계단을 나는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재질을 알 수 없는 계단은 든든하게도 나를 받쳐주었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나를 되튕긴 소리가 허공을 수놓았다.
공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곳은 90층.
그 아래는 자연히 89층, 곧 나의 성역이었다.
“…….”
썩은 꽃들의 화원. 나는 그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정원사 역할을 맡은 사왕가의 가신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두 이반시아 공작가의 전속 재단사가 디자인하고, 아이김 제국의 인어들이 물실로 짜낸 제복들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상태였다. 손에는 가위와 삽, 물 주전자 등 각자 정원을 가꾸는데 필요한 것들이 들려 있었다.
‘이크.’
그 중 실비아가 정원 가위를 든 채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본 나는 다급히 바위 뒤로 피했다.
– 사왕, 뭐해?
그런 나를 참 희한한 것 본다는 듯 쳐다보면서 공녀가 물었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 아니 뭐냐. 폼이란 폼 다 잡고 머리까지 깎은 다음 올라가더니만 왜 벌써 내려왔냐는 소리 들으면 과연 좀 쪽팔리지 않겠습… 어라. 말하다가 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 어어… 음? 제 목소리의 상태가…?
내 입에서 나온 것은 그야말로 입술만 달싹여서 만들어내는 속삭임, 아니, 머릿속으로 소리를 [상상]했을 적에 느껴지는,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 바로 그런 소리였다.
– 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주춤 물러선 나는 내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 잉?
두어 차례 제 자리 걸음을 디뎌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터벅, 터벅, 내 체중에 해당하는 만큼의 소리를 되돌려주던 바닥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 헤에.
그대로 제 자리에서 서전트 점프를 뛰어보았다.
폴짝 하는 소리도, 떨어졌을 때 탁 하는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소리만이 아니라 모래 한 톨, 잎새 한 점도 움직이지 않는다.
– 설마?
– 응. 바로 그 설마야.
공녀가 활짝 웃었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목소리와 움직임 역시 주변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알아차렸다.
– 지금 저랑 공녀님은 검제 양반과 똑같은 상태군요?
– 응! 맞아.
공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신기한 기분에 이리 저리 몸을 틀어 보였다가, 내 쪽으로 다가오던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곧….
“에휴.”
내 코 앞에서 실비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주님께서 올라가신지 이제 대충 2시간이 지났네요.”
역시나.
실비아는 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치겠네. 돌겠네. 아, 쫌.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꾸역꾸역 올라가고 난리인지.”
바닥에 쭈그려 앉은 실비아가 모종삽으로 팍팍 흙을 뒤집으면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런 실비아의 말을 누군가가 받았다.
“우거, 시종장.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뒷담인가?”
정원사 차림을 한 우부르카가 커다란 양동이를 대머리에 이고 걸어오면서 꺼낸 말이었다.
실비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헹. 댁 빼고 듣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렴 그 정도 밑작업은 해놨으니까 저도 뒷담을 하는 거죠.”
“우고르. 확신하는 거냐?”
“거럼요거럼요. 저는 그 소르므윈 아카데미에서 두 차례나 영애질을 해먹었던 인물이라고요. 이반시아 공작을 한 차례 찍어내기까지 했었죠.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이냐? 눈치가 만렙이다, 이 말입니다.”
실비아는 잔뜩 뻐기는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당장 내가 코 앞에서 듣고 있는데.’
실비아의 자신감이 실비아라는 존재만큼이나 안타까워지는 순간이었지만, 그만큼 현재 내 스텔스 기능이 완벽하다는 뜻이겠지.
‘아무튼 이거 재미있네.’
나는 실비아와 우부르카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그냥 걸어서 돌기도 했고, 물구나무 서서 돌기도 했으며, 재주넘기를 하면서 돌기도 했고, 코사크 댄스를 추면서 돌기도 했다.
배후령이 드물게도 쪽팔리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좀비야… 웬 숯불갈비 뼈다귀를 눈앞에 둔 누렁이마냥 입맛을 다시면서 지랄발광을 떨고 있느냐?
– 그렇게 느껴준다니 고맙네요. 제가 오러를 익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참에 댁이 했던 것이 딱 이 짓거리였거든요. 지금 댁이 느끼는 감상을 저도 똑같이 느꼈었다 이 말입니다.
– 그랬구나, 이 새끼야…. 그걸 몰랐네. 알게 된 지금은 아주 깊이 반성을 하는데, 그거랑 별개로, 내가 했다고 네가 똑같은 짓을 해서야 쓰겠냐? 이어지는 악의 고리를 팍 하고 끊을 수 있는 건 언제나 후배와 제자들의 몫이란다.
– 저도 그 악의 연쇄를 끊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제 힘이 닿지 않았어요. 제 마음 속 깊은 곳에 사는 괴물이, 심장에 또아리 튼 뱀이 제게 자꾸만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도 똑같이 해봐. 당하고만 살 거야? 어서 해. 지금이 바로 네가 갚아줄 수 있는 기회야…] 저는 번번이 제 속의 악마에게 굴복해버리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것이야말로 저의 무능이자 불능, 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내가 졌다.
– 빅토리 어치브드.
우리가 그렇게 한 차례 지랄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우부르카와 실비아는 우리들을 알아차린 기색이 없었다.
이쯤 되면 과연 나도 좀 뻘쭘해지는군.
– 공녀님. 검제 양반. 그래서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열쇠가 대충 어디쯤에 있죠?
– 흐흥, 글쎄? 한 번 짚이는 곳들을 쭉 둘러보는 게 어떨까?
공녀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음.
‘그런 얼굴로 그런 소릴 들으니 어째 좀 불안해지는데….’
나는 그 불안감을 꾹 눌렀다.
아직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우부르카와 실비아 곁을 떠나 걷기 시작했다.
– 어디 가, 명천?
– 아니 뭐… 짚이는 곳부터 둘러 보라면서요? 그러려고요.
– 활동적이네! 응응. 좋은 일이야. 좋은 일.
그것도 무척이나 불안해지는 말이었지만 나는 꾹 참고 걸음을 옮겼다.
우선은 원장님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2.
내가 도착했을 무렵, 원장님은 막 김율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김율 씨. 정원사들을 모아주세요.”
“그러지.”
김율은 원장님의 지시에 따라 정원사들을 불러모았다. 에스델이 가장 먼저 달려왔고, 수호의 여신이 날개짓을 하면서 내려왔다. 구석에 짱 박혀 노닥거리던 실비아와 우부르카 역시 얄짤없이 불려와 원장님 앞에 서는 신세가 됐다.
원장님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 화원의 관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특유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원장님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
“당장 지금 여러분을 이렇게 한 자리에 불러모은 것만 해도, 아니, 웬 정기 조회를 하자는 거야… 하고, 못마땅하게 여기실 분들이 있으실지 몰라요. 그럴 때면 그냥, 아, 나이 든 사람… 아니지. 여러분과 비교하면 나이 든 사람도 아니지요. 부족한 사람이라 그렇구나, 하고 가엾게 여겨주시면 고맙겠어요.”
모여 선 사람들은 그 말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겉으로 크게 드러나는 종류의 반응이 아니었다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이겠다.
바로 나처럼.
– 원장님….
나는 뭉클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원장님은 물론 날 인식하지 못했다. 단지 눈 앞에 있는 이들을 향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들어 아시겠지만, 오늘 공자가 다음 층으로 올라갔어요.”
“…….”
“저는 헌터로 치면 풋내기라 불리지도 못할 사람이예요. 아마 2층에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살아 돌아오기 힘들겠지요. 그래서 90층 대가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어요. 혹시 이 중에 그걸 아시는 분 있으신가요?”
그 질문에 손을 드는 이가 있었다.
에스델이었다.
“99층에 대해서만 아주 약간 알고 있습니다. 탑과 나눈 계약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위험한가요?”
“……예, 굉장히.”
에스델이 말했다.
원장님은 안경을 벗고서 엄지와 검지로 자신의 콧대를 꾸욱꾸욱 누르고서 말했다.
“돌아올 수는 있나요.”
“가주께서 돌아오겠다고 결정한다면 당장이라도요.”
에스델은 그렇게 말하고서, 살짝 고개를 수그렸다.
“다만 그 경우, 기본적으로는 재도전할 수가 없게 되는 걸로 압니다. 그것이 내로라할 성좌들 대다수가 100층에 오르지 못한 채 적체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원장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돌아올 수 있다니 마음이 좀 놓이네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절대 돌아오지 않겠지요.”
원장님의 한숨 농도가 짙어졌다.
에스델도, 수호의 여신도, 우부르카도 비슷한 종류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어, 뭐냐 이 사왕가 대동단결은.
“어릴 적부터 어지간히 고집이 강했던 아이였어요.”
원장님이 말했다.
실비아가 귀를 쫑긋 세웠다.
“어땠는데요?”
“시종장. 어째 그 호기심으로부터 불온한 느낌이 느껴지는군요.”
“아니이, 자문사님. 절 너무 나쁘게 보시는 거 아닙니까? 섭섭해라아. 저는 그냥 우리 가문의 주인이 그래서 대체 어떤 양반인지 궁금할 뿐이라구요오. 그리고 그러는 자문사님도, 음음? 되-게 궁금한 표정 짓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야말로 자문사로서 가주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을 뿐입니다.”
이 가신들이….
“나도 좀 궁금하군. 우거. 애비는 어릴 적에 어떤 인물이었는가? 아니, 어릴 적이라는 게 있기는 했는가?”
이 아들 내미가….
“모두 공자에 대해 궁금해하시는군요. 하기사 그럴 만하지요.”
원장님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안경을 썼다.
가문원 대부분이, 아마도, 아니 분명 내 흑역사를 탐하여 초롱초롱한 눈으로 원장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러나 원장님은 괜히 자신이 수십 년간 아이들을 돌보아온 스페셜리스트가 아님을 증명해보였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다음 조례 때 이어서 하도록 할까요.”
“아앗.”
딱 호기심이 자극 당한 시점에 이야기가 끊어진 가신들이 안타까운 소리를 냈다.
“괜찮아요. 느긋하게 기다려주세요.”
원장님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쭉 여기서 서로 얼굴을 맞대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 조례는 끝이 났다. 아쉬운 얼굴로 발걸음을 돌리며 흩어지는 정원사들을 바라보던 나는 손을 들어 이마를 닦았다.
– 빨리 여길 벗어나야겠네요… 되도록 오늘 중에는요.
– 흐응. 아무리 그래도 보는 앞에서 흑역사가 폭로당하긴 싫다 이거구나?
– 예에. 음. 해서… 어어, 열쇠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렇다 싶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원장님의 품을 뒤져보았는데도 마찬가지였다.
– …여기는 아무것도 없네요?
– 그러게. 여기가 아닌가 보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공녀는 그렇게 말했다. 이 또한 불안감을 자극하는 말투였다.
거기에 쐐기를 박듯 검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좀비야.
– 넵?
나는 검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딱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검제를 보게 되었다.
– 힘내라.
어어…….
– 검제 양반. 지금 그 얼굴의 의미는 뭡니까?
– 뭐 같냐?
– 엿 같은데요….
– 그래….
– 에이, 아니아니. 잠깐만요. 좀 더 성 내고 그러지 그래… 는 뭔데요. 혹시 좀 전에 내가 장난 쳤다고 삐친 겁니까? 만약 그런 거면… 아니, 진짜 표정이 왜 그런데요! 차라리 비웃지 대체 뭔….
검제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저 가엾은 것을 보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
‘이건 진짜 무슨 불안감이 똥두간 거름 냄새마냥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고 앉았네….’
으.
나는 두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나게 부딪혔다. 이어 호흡을 가다듬고서 걷기 시작했다.
– 아무튼 원장님 주변은 아니라 이거죠. 음. 그러면 아마 거기겠지요.
내 성역은 하나의 세계지만, 갓 만들어진 것도 있어 그렇게까지 넓지는 않다. 짚이는 부분들을 하나하나 뒤지다 보면 열쇠인지 뭔지도 발견될 것이다…. 그런 생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틀린 생각이었다.
3.
나의 성역, 썩은 꽃들의 화원.
붉은 파도가 몰려오는 바닷가에 쪼그려 앉아 있던 내가 퀭한 얼굴로 말했다.
– 제 생각이 틀렸네요.
사실 정말 퀭한 얼굴이기나 한지 모르겠다. 바닷물의 표면에는 내가 비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건 내 성역의 바다가 붉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온기가 필요한 꽃을 위해 이곳에는 온실도 마련해 놓았지만, 그 온실 유리에도 내 모습은 일절 비치지가 않았다.
– 크흐. 과연 눈치가 빠르구나, 좀비야.
검제가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서 손톱 끝으로 이를 쑤셨다.
– 고작해야 [일주일] 만에 그걸 깨닫다니 말이다.
그렇다.
89층, 아니, 91층이라 불러야 할 이곳에 들어선 이래 어느새 일주일이나 흘러버린 거다!
– 아니! 왜 단서 같은 게 하나도 없는 겁니까!?
나는 불을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외쳤다? 망할. 실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여기서는 그것조차 애매한 느낌이다.
마치 존재 자체가 애매해지는 느낌이랄까? 바다표범이나 시바견이 평소에 짓고 있는 표정처럼 말이다!
– 원장님 옆에 가면 뭔가 있을 줄 알았어요. 아니면 살천성 꽃, 제가 처음 심었던 그 은방울꽃 앞에 가면 막 주변이 반짝반짝 빛나기라도 할 줄 알았다고요. 근데 이건… 제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압니까?
– [이건 무슨 이벤트 처리가 안 된 테스트 맵에 덩그러니 던져진 거 같사와요.]
공녀가 내 옆에 폴짝 뛰어오르면서 꺼낸 말이었다.
– 어떤 등반자는 그렇게 비유하더라고.
– 누굽니까? 그 등반자.
– 마호스.
영원한 평야의 군마라고 불리던 바로 그 성좌 말인가.
– 그 양반, 그런 말투를 쓰는군요….
– 우웅. 명천은 탑 속을 게임 취급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니깐, 그 비유에 대해 화낼 지도 모르겠지만….
– 예에… 아니아니. 어떤 느낌이진 잘 알겠습니다. 검제 양반도 잘 아시죠?
– 그럼, 알지, 좀비야. 왜 모르겠냐.
검제는 깎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친 채 벌러덩 드러누웠다.
부서진 노을빛으로 붉게 물든 하늘에는 각진 구름들이 떠가고 있었다.
– 당장 내가 140년 동안 그 지랄을 겪고 있는데.
38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