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86)
4.
140년.
그 비슷한 시간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 스승님과 논검을 하실 적에 혼자서 130년을 버텼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그게 이거였습니까?
– 앙. 바로 그거다.
그 허허로운 목소리라니.
듣고 있는 내 심장에서 바람이 새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 세상에. 즉, 검제 양반 당신….
[ 아뇨. 갑자기, 저도 99층 정도에서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진천 세계에서 나와 검제가 나누었던 대화가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검제 양반. 하지만 댁 같은 사람마저 99층에서 죽었어요. ]그 말에 검제는 묘한 반응을 보였었다.
[ 흐음. 글쎄, 죽음이라…. ]그가 그렇게 되뇌였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 뒤 어떤 문답이 오갔었는지도.
[ 99층에 뭐가 있는 건가요? ]그때, 검제는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었다.
표면적으로야 ‘그냥 너한테 말해주기 싫다’고 말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게 전부였을 리는 없겠지.
[ 아직도 저한테 말해줄 수 없습니까? ]그 질문에 검제는 이렇게 말했었다.
– 좀 걷자.
나는 눈을 깜박였다.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선 검제와 그때와 똑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어어….
– 따라 와, 임마.
그리고 검제는 그때처럼 ‘걷기’ 시작했다.
“…….”
이곳, 91층이라 불러야 할 스테이지에 들어선 이래, 내 몸은 체중을 잃었다. 세상은 더 이상 나를 붙잡으려 들지 않았고, 아무리 세게 발을 디뎌도 발자국 소리가 울리는 일은 없었다.
세상으로부터 절연당한 것만 같은 기분.
그러기에 이 일주일이 흐르는 동안 나는 점차 [걷는다]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되었다. 배후령이 평소 그러듯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이 더 편했던 것이다.
– 마호스는 그걸 두고 TCL 친 것 같다고 말하더라.
공녀가 말했다.
– TCL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얼추 짐작이 가네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지금, 모든 물리적인 힘은 그 의미를 잃었다. 원한다면 나는 바닥이나 벽을 뚫고 다닐 수도 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 검제가 하는 행위, 그 ‘자연스럽게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진천 세계에서도 굉장한 재주라고 느꼈지만 같은 처지가 되어 보니 정말 제대로 알겠다.
– 뭐 하냐? 안 오고.
검제가 뒷짐을 진 채 나를 흘끗했다. 마치 산책 도중 가볍게 뒤를 돌아보는 태도였다.
나는 문득 이것이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둥실둥실 떠가는 대신,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마음을 다잡았다.
우선 발바닥을 바닥에 대었다. 여전히 닿는 느낌은 전혀 없었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바로 서기]를 해보려고 했다.
-흠.
검제는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재촉하지도 않았지만 조언을 해주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한 것이 바로 서기가 아니라 뭔가 이상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 잠시만 더요.
– 천천히 해.
– 예.
나는 진지한 자세로 고민에 잠겼다.
‘서는 걸 어떻게 하더라?’
스스로 느끼기에도 어처구니없는 생각.
하지만 그보다 더한 확신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게 중요해.’
지금 이 순간이 중요했다.
‘서려면… 일단 발바닥을 바닥에 대고. 그러면 바닥이 나를 받쳐주니까… 지금은 받쳐주는 바닥이 없지. 그렇다면….’
몽실몽실한 덩어리가 머리 주변을 떠도는 듯한 감각.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화두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들이마셨다?
‘아니. 당연하지만 방금 그것도 들이 마시는 흉내잖아.’
나는 의식을 집중시켰다.
‘나는 지금 완전히 유령이나 다름없는 존재. 당연하게도 내가 빨아들일 수 있는 [공기] 같은 것은 없어.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곧바로 다음 의문이 떠올랐다.
‘잠깐. [공기]가 없는데 나는 어떻게 소리를 [들을] 수가 있는 거지?’
나는 그것이 아주 이상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SF영화에서 단골로 지적 받는 모순점이 우주 공간에서 폭음이 울려 퍼지는 것 아닌가.
‘이상해.’
실제로 나와 같은 층위에 있는 배후령이나 공녀와 이야기할 때는 소리를 상상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실비아나 원장님 등의 육성은 그냥 육성으로 들려왔었다….
‘소리는 공기의 진동을 통해 전해진다… 그런데 지금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공기 같은 것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야 해. 즉….’
그것을 깨달은 순간.
고요가 나를 감싸 안았다.
-…….
그것은 가히 우주 공간에 들어선 듯한 침묵, 아니, 그보다 더 오래 된 옛날.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공간도 의미를 갖지 않았을 적에 이러했을까 싶은 태초의 적막이었다.
– 흐음.
어느덧 뒷짐에서 팔짱으로 자세를 바꾼 검제가 슬며시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어디까지나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가 스러질 뿐이어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정적을 방해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이 새하얀 순간에 완전히 경도되었다.
‘새하얀.’
그리고, 곧 그 또한 이상하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하얄 수는 없어. …같은 이치로 검을 수도 없어.’
그것은 고요에 색깔을 붙일 수 없다는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의미였다.
‘나는 지금 어떻게 이 풍경을 [보고] 있는 거지?’
색은 빛의 파동이다.
소리가 공기의 진동이어서 그 어떤 소리는 울려 퍼지기 위해서는 공기가 필요한 것처럼, 무언가를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빛]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아무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잖아. 중력도. 반발력도. 그 어떤 물리력도 나한테 작용하지 않아.’
빛만은 특별하여 예외인 걸까?
그럴 리가 없다. 게임 같은 데에서야 빛이 특별한 속성으로 분류되곤 한다지만, 빛도 그저 물리 현상의 한 갈래에 불과할 뿐이다.
빛의 이름을 가진 성검을 휘두르던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야….’
그것을 느낀 순간.
그리고 빛이 없었다.
-…….
완벽한 어둠. 순수한 빛의 부재가 나를 삼켰다.
5.
내가 태어날 무렵 지구는 너무나도 반짝이는 별이었다.
곳곳마다 도시가 있었다. 도시를 나서 조금만 걸어도 곧 다음 도시가 나타났다. 사람들의 숫자는 정점을 찍고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지만 세워지는 건물들의 숫자는 오히려 늘어났다. 마치 사람들을 내버려둔 채 도시들끼리 서로 눈이 맞아 부지런히 새끼를 치는 것만 같았다.
늘어난 건물마다 빛이 넘쳤다. 심지어 사람이 없어진 뒤에도 빚처럼 빛이 남았다. 을씨년스러운 유령 도시, 불 꺼진 폐허 같은 것이 분명 사리에 맞을 텐데, 그 이치가 어째서인지 들어맞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특이점이라고 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단지 암세포의 무제한적인 증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밤하늘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두웠던 적이 있단다. ]원장님이 그렇게 말했지만 어릴 적의 내게는 그 풍경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 자라는 내내 밤하늘은 항상 뿌연 막 같은 안개에 감싸여 자색으로 번들거렸다.
[ 이 별은 열병을 앓고 있어. ]그래서 내가 처음 본 어둠은 밤이 아닌 물 속에 있었고.
그보다도 더, 사람의 마음 속에 있었다.
– 그랬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이것이 어둠이군요.
진정한 어둠은 검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여백.
공백.
그러기에 그것은 눈부시게 희게 느껴지기도 했고, 아득할 정도로 검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분명 둘 중의 어느 쪽도 아니었다.
비어 있는 것. 아직 아무것도 담지 않은 세계를 나는 바라보았다.
– 아름답네요.
– 그래, 공자야.
어디선가 검제의 대답이 느껴졌다.
– 가득 찬 것은 비어질 일만 남아서 아름답지. 같은 이치로 텅 빈 것도 담길 일만 남아 예쁜 것이다.
나는 그 대답이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바보야. 니가 지금 무슨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는지 알고 있냐?
– 과연.
나는 신음했다.
– 제겐 지금 고개가 없지요.
– 그래. 그런데 고개를 돌리다니. 뭐 나쁘지는 않다만,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해서야 지금 이 어둠을 보기 전과 똑같은 노릇 아니냐.
검제는 도포 자락이 흩날리는 것 같은 소리로—아니, 그것은 결코 소리가 아니었지만—말했다.
– 알고 움직여라. 그래야 제대로 움직일 수 있다. 자각하고 느껴라. 그래야 똑바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에 앞서, 먼저 [ 나 자신 ]을 만들었다.
– 나… 김공자.
신체의 나이는 약 스물 다섯살.
실제로 겪어야 했던 시간은… 얼추 1천, 아니, 대충 1만.
‘아니지.’
[약]이나 [얼추], [대충] 같은 것으로는 안 된다.정확하게.
-…….
나 자신을 생각한다… 상상한다.
태어나 지금까지의 나를, 시작부터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김공자를, 더하고 빼는 일 없이 떠올리기 시작한다.
-…….
정신이 아득해지는 작업.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 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시스템에 의해 자동으로 돌아가는 뭐 그런 게 아니라, 설마……. ] [ 예. 수작업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 사왕. 당신에게 있어 동시적으로 발생한 사건일지라도, 저에겐 차례차례 해결하면 그만인 업무에 불과합니다. …… 비효율이란 결국 시간과 공간이 한정되었을 때 발생합니다. …… 비효율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하 자문사.’
한 때 내가 빙의했던 인물과 그녀가 맡은 작업들을 생각했다. 그 양에 비하면 나 자신의 인생을 되새기는 것쯤은 모래 한 톨에 지나지 않았다.
‘모래… 여우님.’
여우님께 기억을 주물럭거려졌던 그 순간들조차 지금은 참고가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명계.’
죽었을 때 도착했던 그 공간은 이곳과 닮았다.
‘성역.’
처음 성역을 쌓아 올리던 그때, 비어 있던 세계를 채워 넣었던 경험이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승님.’
너무도 하얗던 그 계절과 이 어둠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둠에 품어 안긴 채 나는 나를 떠올렸다… 상상했다… 만들었다… 생각했다… 그리고.
이윽고, 나는 눈을 떴다.
-……,…….,…………
숨을 쉬었다.
숨결의 온도와 윤곽, 방향, 음정, 음량, 이 느껴진다.
샅샅이.
자신이 내뱉는 숨결에 목덜미가, 그렇다, 내게는 지금 목덜미가 있었는데—쭈뼛거린다.
– 하아, 하아아… 음…….
입술에서 침이 흐른다.
나는 내가 이 감각을 설명할 어휘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
단순히, 경험이 부족한 것이다. 그토록 죽고 죽어,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의 삶을 대신 살아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감각을 나는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의 몸 상태를 직관하지 못했다.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잘 느껴지는 것이다.
– 자신과 바깥을 가르는 것이 감각의 소관이라지만, 지나치게 선명해진 감각은 그 경계선을 뭉개버리지.
언젠가.
어디선가.
– 잘 기억해라.
검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것이 [본다]는 것이다.
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와 함께 어둠이 저물었다.
빛이 터졌다—둑이 무너졌다—세계의 경계가 저 멀리서, 이글거리는 빛에 산 채로 구워졌다—그리하여 어둠이 저물었다.
– 그래.
그리하여 나는 나의 성역, 썩은 꽃들의 정원에, 80층부터 89층이자, 91층에 해당하는 바로 그곳에 돌아와 있었다.
팔짱을 낀 그대로 검제가 나를 맞아주었다.
– 좀 걷자.
바로 조금 전에 권했던 것을 다시 권하는 것처럼, 아니, 분명히, 그것은 바로 조금 전에 벌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 예.
아직 얼떨떨한 머리를 휘휘 저으면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 좀 걷지요.
나는 천천히 나의 발을 바닥에, 검제의 옆을 향해서 뻗었다.
터벅.
딛었다.
터벅.
나는 검제와 걷기 시작했다.
터벅!
38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