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89)
그렇게 하늘과 땅이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지만, 하늘과 땅은 자신들의 건너편이 아니라 곁에도 무언가가 있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하늘이 한 자루의 검을, 땅이 한 자루의 검을 벼려 내었다. 이번에는 상대가 있었으므로, 그것들은 스스로를 베어낼 필요가 없었다.
하늘이 땅을 향해 검을 내리쳤고, 땅이 하늘에 맞서 검을 쳐올렸다.
수백 차례의 참격이 오르내렸다.
골짜기진 하늘의 틈새에서 바람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 패여 나간 땅의 갈래로부터 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조각난 하늘들은 각자 봄, 여름, 가을, 겨울, 극야, 백야, 그믐, 만월 등 다양한 순간으로 봉인되었다. 갈라진 땅들은 각자 수십 개의 대륙과 수십만 개의 섬으로 나뉘어 각자만의 독특한 생태계로 박제 당했다.
기후와 바다, 계절과 생명의 탄생을 기리고자, 사람들은 두 번째 참격이 벌어진 순간을 두고 [검의 달]이라 이름 지었다.
2.
플라네타리움.
사자세계의 중간 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브런치 카페에서, 난데없는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히히히, 아가씨. 나랑 같이 탑을 오르자구~”
모히칸 헤어 스타일에 불량배가 가날파 보이는 여성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 끌면서 말했다. 쉴 새 없이 날름거리는 모히칸 남자의 혓바닥에는 자그마한 피어스가 박혀 번뜩거렸다.
“그, 그만두어주시어요….”
안경을 낀 여성이 겁에 질려 어깨를 움츠렸지만, 모히칸 불량배는 막무가내였다.
“그러지 말고 탑을 오르자고~ 지금 자기가 오른 층수에 만족하지 말고 지치지 않는 향상심을 품고서 100층을 목표하자구~ 무헤헤헤~”
“으읏… 누, 누군가 도와주세요….”
터무니 없는 할당량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밀어붙이는 상사를 눈 앞에 둔 부하처럼, 여성은 훌쩍이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무정하게도, 이 탑에서 그녀를 도와주려는 이는 없는 것 같았다.
그 불의가 잠자코 식사를 하려던 한 소녀의 역린(逆織)을 건드린 것일까.
“하아… 정말. 밥을 먹게 내버려두질 않는군요.”
모삽을 허리춤에 동여매고서 식사를 즐기던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무엇을 숨기랴, 그 소녀야말로 바로 [사왕가의 시종장]이었다. 그 힘은 하늘을 뒤덮고 땅을 으스러뜨릴 정도였다. 소녀가 나선 이상, 무뢰배 따위는 그야말로 일초지적(一招之敵)도 되지 못할 것이 확정적으로 분명하였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소녀가 나서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만두라구, 사왕가의 시종장 나리.”
“음?”
소녀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들.
분명한 정의가, 세상에는 존재했으므로.
“당신들은….”
“우리가 나서지.”
소녀를 막아 세운 것은 웬 남자들이었다.
몸에 걸친 것은 백색의 도복. 그 등 부분에는 커다란 문자로 천(天)이라 적혀 있었다.
“사왕가 시종장 나리의 아름다운 손은 말이야, 이런 시시한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 테지?”
선두에 선 남자의 말에 소녀는 자리에 앉았다.
이어 한 쪽 눈썹을 까닥이면서 말했다.
“아아… 부탁하지요. 저는 지금, 이 [해물 크림 파스타]라는 녀석을 먹어야 하니까요.”
백색 도복의 남자들은 씩 웃고는 일제히 팔짱을 끼었다.
“후… 알겠다고.”
“저런 소악당이 날뛰지 못하게 막는 것.”
“그것을 위한 우리들, 이니까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선 백색 도복의 남자들이 천천히 걸어갔다.
그 중 한 명만은 후드를 깊이 눌러쓴 채 아무 말도 없었으나, 좌우간 모두가 모히칸 불량배를 향해 걸어간 것이다.
터벅, 터벅.
차림새는 그렇듯 소박한 백색이었지만, 그들의 걸음걸이에는 세렝게티가 아직 초원이었을 적에 거기 살았다고 전해지는 코끼리를 연상케 만드는 무게가 있었다.
“어이어이… 거기까지 하라구?”
“아앙? 뭐야, 네 놈들은?”
모히칸 불량배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선두에 선 남자는 이런이런, 어쩔 수 없군, 하는 태도로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늘에 가려져 있던 선두에 선 남자를 보고서 모히칸 불량배가 히죽거렸다.
“뭐야뭐야. 기세 좋게 나서더니만, 그냥 예쁘장하게 생긴 꼬맹이 아냐?”
그랬다.
선두에 선 도복 차림의 남자는, 자세히 보면 차라리 소년이라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모히칸의 불량배와 여리여리한 미소년. 척 보기에도 후자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극악(極惡)의 조합.
그러나 소년은 소녀들의 마음을 1초만에 빼앗을 법한 미소를 지은 채 이렇게 말하였다
“내 이름은 가해일.”
“뭐?”
“과거 백도 진천검문의 후계자로서 [사일검(射日劍)]이라는 [무림명]를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여러 경과를 거쳐 천무문에 호적을 두게 된 지금의 [이명]은[하루토(春堂)].”
하루토라 자신을 소개한 소년은 손가락을 퉁겼다.
“그 밖의 소개는 이것으로 대신하지. —헌터 카드, 오픈.”
팟 소리와 함께 허공에 카드 모양의 빛무리가 반짝였다.
“하? 헌터 카드라고? 네 까짓 꼬맹이의 등급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끄아아아악! 이, 이 등급으으으은……!?”
코웃음을 치며 카드를 들여다보던 모히칸 헌터가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그 또한 필연(必然). 이 역시 필지(必至).
무엇을 숨길 것인가. 숨긴다고 어디 숨겨질 일인가.
도복 남자들의 헌터 등급은 무려 평균 [B랭크].
헌터 카드를 내보인 하루토에 이르러서는 자그마치—
“A, A랭크 헌터라니이이……!!”
참고로 [헌터]라는 것은 탑을 오르는 자를 뜻하는 단어로서, 그들은 그 중에서도 [최강]급에 속하는 헌터들이었다. 무려 [5대 길드] 중 하나인 [천무문]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이들이라고 말한다면, 그 강력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 몰라뵈었습니다!”
뱀을 만난 개구리처럼 모히칸 헌터가 털퍼덕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소악당에 걸맞는 그 초라한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하루토는 우수에 찬 얼굴로—.
“보고 있기 좀 너무 엿같으니까 이 시공 좀 제발 멈춰주면 안 될까???”
“아니 왜, 후배… 딱 좋은 시점이었는데….”
하루토가 난처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지금껏 한 마디도 없이 후드를 눌러쓰고 있던 도복의 남자가 왈칵 짜증을 내면서 옷을 벗어 던졌다.
“좋기는 염병! 아주 진짜 염병을 해라. 니들은 진짜… 하루토고 나발이고 아, 진짜 그냥 다 염병들이라고!”
도복을 벗어 던진 그는 묵빛 말총 머리를 가진 미남자였다.
하루토가 쩔쩔맸다.
“아니 염병이라니 유수하 후배, 그건 과연 좀 너무 말이 심하지 않나….”
“심하긴 뭐가 심해!? 심한 건 니들의 존재 자체라고!”
“아니 우리가 뭘….”
“뭐얼? 우리가 뭐어어얼!?”
“아니….”
하루토는 ‘아니’라거나 ‘그게 아니고’ 라는 말만 반복했다. 마치 헬스와 등산을 즐기는 아웃도어 파에게 게임과 만화를 즐기는 인도어 파가 핍박당하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워낙에 익숙한 모습이었는지, 플라네타리움 손님들과 종업원들 중 누구도 그 소란에 숟가락을 얹지 않았다. 사왕가의 시종장도, 그 곁에서 식사를 마친 다른 두 가신도 어느새 자신들의 성역으로 돌아갔는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유수하는 다른 이들을 가리키며 울분을 토해냈다.
“댁들도 그래! 뭘 보고만 앉아 있어!?”
유수하가 가리킨 곳에는 튤립처럼 모아 펼친 양 손바닥 위에 턱을 괸 채 즐겁게 이 소란을 구경하던 노인과 소년이 있었다.
소년이 먼저 말했다.
“그거 아시오? 슈르스트뢰밍도 처음에는 뭐 이런 음식이 세상에 다 있지 싶지만, 먹다 보면 그 오묘한 맛의 이치를 알게 된다오.”
노인도 말을 이었다.
“헹. 누구 좋으라고 말리냐? 이 나이에 이런 거 지켜보는 낙이라도 있어야지.”
“너무하세요…! 그러니까 영감님이 물벼룩 소리를 듣는 거라구요…!”
모히칸 불량배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안경 여성이 노인에게 성을 냈다.
노인은 도리어 역정을 냈다.
“너야말로 뭐하는 거냐! 지금은 연금성주 자리 꿰어찬 녀석이 뭘 저런 꼬다리한테 당하는 척 힘숨찐을 하고 앉았어!?”
이 말에는 모히칸 불량배가 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연금성주라 불린 안경 여성은 그런 모히칸 불량배를 가리키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히, 힘숨찐이라뇨…! 이 사람 생긴 걸 보세요…! 무섭잖아요…!”
“아이고, 니가 더 무서워요!! 니 제자 녀석이 틈만 나면 나한테 와서 얼마나 읍소를 해대는지 아냐!? 스승님이 너무 무서워요, 돌아가면 스승님이 또 저를 갈굴 거예요, 숀 교수님 저 조금만 과외해주세요 이러면서는….”
“네에…?”
연금성주가 마른 손으로 안경을 꾹 눌러썼다.
이 브런치 카페, 플라네타리움은 만상의 대도서관을 깎아 만들어진 곳이다. 만상의 대도서관은 여러 세계절편(世界切片)들을 [묵시록]이라는 이름으로 모아 놓은 장소였으며, 그리하여 이 플라네타리움은 얇은 종이 한 장 너머로부터 수많은 세계의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공간의 분위기는 원래 그곳에 위치한 사람들의 언동에 따라 결정되게 마련이라지만, 플라네타리움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모히칸 불량배가 소란을 피울 때는 싸구려 술집 같았고, 천무문도들이 나섰을 때에는 뭔지 모를 기이한 느낌이었으며, 유수하가 고함을 지를 때는 불처럼 뜨거웠던 이 카페는, 연금성주의 그 간단한 동작 하나로 겨울 밤을 맞이하게 됐다.
“아하아아아… 그렇단 말이죠오… 그래요오… 이 배은망덕한 녀석을 대체 어떻게 꾸짖어야 하려나아… 일단 돌아가봐야겠네요….”
강한 사명감을 느끼면서 연금성주가 플라네타리움 밖으로 나섰다.
소년은 물끄럼 노인을 바라보았다.
“뭐?”
“약제사 양의 제자에게 미안하다 느끼지 않으시오?”
“그러게 누가 저 녀석 라인 타래냐? 이게 바로 자업자득이란 거다.”
“그거 아시오? 난 그대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오….”
노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는 동안 모히칸 헌터는 사사삭 기어서 도망쳤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유수하가 이마를 짚었다.
“미친 것들….”
전직 천무문도들이 주눅 들어 유수하의 눈치를 살폈다.
유수하는 이들이 자신의 선배라는 사실이 새삼 다시 환장하겠는지 가슴을 쳤다.
“아, 진짜. 공자야. 이 망할 놈의 공자님아! 보이냐!? 알겠냐!? 이게 바로 니가 만들어낸 세계다!”
“아니 별로 나쁜 세계 같지는….”
“선배님은 좀 아가리 여물기 열차 발진하십시다…. 발진까지 앞으로 3~ 2~ 1~”
“아니….”
하루토가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재차 부아가 치민 유수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토해냈다.
“그 새끼가 난데없이 코사크 댄스 추기 시작할 때 그렇게 보내주는 게 아니었어… 좀 더 추게 만들어야 했어. 아무도 안 보는 공허한 곳에 갖다 놓고 아주 그냥 영원히 춤이나 추게 만들었어야….”
[ 공허에서 춤추는 신이 심각한 우려와 심심한 유감을 표시합니다. ]그러한 탑의 선언은 유수하에게 들리지 않았다.
유수하는 다시 후드를 눌러 쓰고는 노인에게 걸어가서 말했다.
“어이 영감탱이…. 밥 좀 싸주쇼.”
“뭘로?”
“아, 늘 먹던 걸로… 큰 늙은이 좋아하는 거 있잖아. 그 뭐냐, 리조또? 그거.”
“하여간 이 자식은 진짜 싸가지가… 나 젊을 때를 완전 빼다 박았다니깐. 에잉.”
그렇게 말하면서도 노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문을 받고 주방 화구에 불을 붙였다. 이어 에비앙이 멘토로 삼고 싶어할 생수들을 꺼내어 요리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유수하가 자신의 선배들을 닥달했다.
“아 뭣들해요! 선배들도 빨랑 올라갈 준비해요. 점심시간 다 끝나가거든 지금?”
“아니 우리 지금 밥도 다 못 먹었는데….”
“그럼 손에 들고 가면서 먹든가! 하여간 시원찮은 선배들이라니깐.”
“아니….”
쩔쩔매는 모습과는 또 별도로 그들 또한 명색이 백도의 후기지수들이었다. 능숙하게 손에 그릇과 젓가락을 들고서 식사를 마저 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수하는 다시 노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뭐냐… 큰 늙은이가 있잖아. 댁 좀 휴가 내서 언제 놀러 오라던데. 검성 양반도 좀 데리고.”
“또 왜?”
“아 왜기는. 노인네라 같은 노인네가 그립나보지. 가서 바둑이나 좀 둬줘요.”
“하여간 부월선 그 양반….”
투덜거리면서도 노인은 썩 싫지는 않다는 얼굴로 요리를 끝마쳤다.
포장된 요리를 받아 들고서, 유수하가 선배들을 향해 말했다.
“갑시다들.”
천무문도들은 훗 웃으면서 그릇과 젓가락을 여미었다.
“그래, 후배.”
“돌아가자구, 우리들의 [성]으로.”
“백도의 정점, [천무림맹]으로—”
유수하는 탄식했다.
“공자신이시여, 댁의 크나큰 죄를 제발 부탁이니 좀 깨달아주소서….”
[ 열쇠 조형 완료. ] [ 당신이 영입했던 모든 사도들이 당신에게 진심 어린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어디선가, 다시 한 차례 탑의 선언이 울려 퍼졌다.
[ 92층이 클리어됩니다! ]그 선언을, 이번 역시 유수하는 듣지 못했다.
그저 욕지거리와 푸념을 섞어 내뱉고는 선배 문도들을 데리고 플라네타리움 바깥으로 나섰을 뿐.
그리고 그 뒤를, 탑의 선언을 들은 자가 천천히 따라 걸었다.
[ 93층에 입장합니다. ]39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