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95)
7.
스승이 죽고 나서 그는 한동안 세상을 떠돌았다.
독보(獨步)였다.
그는 홀로 다녔다. 하지만 사람들은 열을 이루어 그의 앞을 막아섰고 줄을 지어 그의 뒤를 쫓았다.
[ 멈추어라, 이 사악한 마두야! 너 같은 놈이 태양진인의 제자라 자칭하며 정파를 사칭하는 꼴을 감히 어찌 두고 볼 것인가! ] [ 아들아, 태초의 검이여! 언제 우리들에게 돌아올 것이냐? ] [ 그대, 강한 자로군. 경의를 표하마. ] [ 나리. 소인은 묘후성이라 하는 자로서 나리 가는 길에 등불이라도 들어드리고자….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도, 소매를 잡아 끄는 사람도, 악수를 청하는 사람도, 절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그의 곁을 에워 쌌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그가 남긴 발자국의 깊이를 더할 수 있을 만큼은 무거웠다.
그리하여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큰 길이 생겼다.
대로행(大路行)이었다.
[ 검마. ] [ 검룡. ] [ 검왕. ] [ 검천. ] [ 검존. ]그를 부르던 수많은 호칭들도 큰 길 위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 검제. ]그것이 그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모두가 가로막으나 아무도 막아설 수 없는 자. 아무도 뒤쫓을 수 없으나 모두가 뒤따르는 자. 누구와도 함께 하지 않으나 누구나 함께 하는 자.
검제는 혜성처럼 이 만검세계를 가로질렀다.
그러나 이 시기를 만검세계에서 다섯 번째 참격이라 명명한 것은, 검제의 행보가 칼자국처럼 아로새겨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나타난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수군거렸다.
[ 저게 뭐지? ]그것은 거대한 탑이었다.
하지만 그 탑은 단지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컸다. 높았다. 또한 두꺼웠다.
도시에 살아본 이라면 가장 큰 도시보다 더 커다란 그것을 감히 탑이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산을 올라본 이라면 자신이 올라본 어떤 산의 본맥보다 더 높다란 그것을, 바다에 나가본 이라면 수평선 전체로부터 돋아나 있는 그것을 감히 탑이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 마치 거인이 이 세상을 쪼개기 위해 박아 넣은 칼의 손잡이 같군.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수군거렸다.
그 수군거림은 다음과 같은 말들로 퍼져 나갔다.
[ 누가 세운 걸까? ] [ 저기에는 무엇이 살고 있지? ] [ 꼭대기에는 어떤 존재가 있는 걸까?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수속되었다.
[ 왜 어딜 가도 보이지? ]그 말처럼 탑은 어디서나 보였다.
기이한 일이었다. 무언가 같은 순간 두 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탑은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그 너머에 있었다.
도시 너머에, 산 너머에, 바다 너머에, 길 너머에, 지워지지 않는 배경처럼 시야 저 편에 발치를 드리우고 있었다.
[ 너무 큰가? ]세상은 둥그렇기 때문에 걸어 나가다 보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라고 주장한 어떤 이는 그렇게 추론했다.
[ 신기루인가? ]아무리 다가가도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고, 거꾸로 아무리 달아나도 도무지 멀어지지 않는 것을 희한하게 여기던 어떤 이는 그렇게 추론했다.
[ 아니야. ]분분하던 토론에 명확한 답을 내놓은 것은 검제였다.
[ 우리를 따라오고 있는 거다. ]검제의 그 말을 사람들은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탑이 자신들을 따라오고 있다고? 탑이 살아있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검제는 그렇다고 잘라 말했다.
[ 기다리고 있구만. ] [ 기다린다고요? ] [ 그래. 이 ‘기다림’이 느껴지지 않냐?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분노는 쉽게 느낄 수 있다. 사랑은, 경멸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기다림’을 느낀다는 것은 다소 낯선 말이었다.
그런데 검제는 그 생경한 말을 자연스레 입에 담은 것이다. 심지어 그가 그 뒤에 꺼낸 말은 모여 선 사람들을 더 놀라게 만들었다.
[ 술이라도 한 상 하고 와야겠구만. ]읏차, 하고 검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평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가 말햇다.
[ 잠깐 다녀오마. ] [ 예? 어디를요? ] [ 저 위. ]이 앞 주막에 잠깐 들렀다가 오겠다는 말투였다. 너무도 태평한 그 태도에 사람들은 자신이 들은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 했다.
[ 따라올 놈은 따라와라. ]그리고 검제는 그들이 이해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 날, 만검세계에 박힌 칼 안으로 사람들이 벼려낸 칼 한 자루가 들어섰다.
150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8.
스승님의 빈소에 구배지례를 올리고 들어선 98층.
[ 98층에 입장합니다. ]그곳에 발을 딛자마자 나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 …….
낯익은 기분.
익숙한 것을 들여다보는 감각.
– 여기는…….
아이김 제국.
반짝이와 만났고, 에스델과 싸웠던 바로 그 세계.
적막한 제국의 알현실에 나는 서있었다.
– 오랜만에 오는 곳이네요.
내가 중얼거렸다.
내 옆을 둥실둥실 떠다니던 배후령은 팔짱을 낀 채 씩 웃었다.
– 오랜만에 보는 사람과도 만나게 될 거다.
–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라면….
– 너희 집 자문사가 했던 말 기억하냐?
– 네? 에스델이요?
– 그래. 너희 집 자문사 되기 전에.
– 어어, 잠깐만요. 좀 오래된 일이라…… 아. 혹시 저를 99층으로 보내주겠다던…… 아아.
과연.
내가 이해한 표정을 짓는 것에 맞추듯, 투둑,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 …….
빗방울이었다.
툭, 투둑… 투두두둑. 투둑…
비. 하늘에서 버려진 물방울이 알현실 창문에 부딪혔다. 흐릿한 자욱이 느릿하게 번졌다가, 오래지 않아 새로이 내려 꽂히는 물길에 쓸려 내려갔다.
– …….
멎어 버린 세계에도 빗물만은 흐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나는 고개를 들었다.
멀찍이서 에스델이 걸어오고 있었다. 하도 오랜만에 보는 그 얼굴은, 어째 귀신을 본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주님? ……진짜 가주님입니까?”
음.
나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한 손을 들었다.
– 응, 자문사. 아주 오랜만에—
다음 순간, 무시무시한 충격이 나를 후려쳤다.
– 으헉……!!
파리채에 두드려 맞은 파리마냥 내가 바닥에 엎어졌다. 그 위로 다시 한 차례, 폭포처럼 오러의 일격이 내리 꽂혔다. 소멸할 뻔했다!
– 잠깐, 갑자기 왜—으억!
“어째서일 것 같습니까!?”
음.
그야 너무 오랜만에 보기 때문이겠지… 아니. 잠깐만.
– 나를 어떻게 볼 수 있는—크헉!
“그야 제가! 여기! 98층의 시험관이니까요!”
– 98층의 시험관이라는 건—으억 !
“기둥인지 뭔지가 와서 설명했습니다! 곧 가주님, 당신이 올 테니까 준비하라고!”
– 나한테 접촉이 가능한 것도—끼악!
“예에에! 세상에, 도대체가… 대체 뭡니까, 진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납득이 되는 속사포 설명들이었다. 심지어 거기에 칼빵까지 덤으로 얹혀 오는 상황인 것이다. 질문 하나 던질 때마다 온몸이 박살 날 것 같은 충격이 더해지는 것은 과연 입을 여는 것을 신중하게 만들었다.
에스델은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운지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다시금 붉은 오러에 휘감긴 대검을 들어 올렸다.
“아무튼 좀 더 처맞으십시오!”
아니.
입 다물고 있어도 아무튼 칼빵은 들어오는 건가?
– 잠깐만, 자문사. 오랜만에 만나는 그 반가운 마음을 폭력으로 갈음한다는 것은—갸아악!
한참 동안 매타작이 이어졌다. 쏟아지는 장대비 소리와 충격으로 윙윙 귓가에 울리는 이명이 구분가지 않을 즈음에 들어서야 에스델의 검이 멎었다.
에스델의 의지에 의해서는 아니었다.
“거기까지만 하세요, 자문사님.”
그것은 반짝이의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떡이 된 시야 속에 반짝이가 나폴, 나폴, 내려서는 모습이 잡혔다.
에스델이 잇소리를 냈다.
“휘야.”
“예에.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요.”
이해하는 건가.
이해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는데—거기까지 생각했을 적에, 휘야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에스델 씨의 지금 그 모습 마치 독사 씨가 애독하는 소설 장르에 나오는 여자아이 같잖아요….”
“아아아아아악!”
에스델이 비명을 질렀다. 휘야는 날개 하나를 길게 뻗어 그런 에스델의 머리를 툭툭 다독여주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음.
내가 말했다.
“안녕, 반짝아. 너는—”
“저도 이 98층의 시험관이니까요.”
“아. 과연. 에스델과 같이—”
“저도 11층부터 20층까지의 관리를 맡고 있었으니까요.”
“음. 지금 말을 끊는 이유는—”
“묻고 싶으세요?”
“아니요…….”
나는 어깨를 떨구었다.
휘야도, 겨우 무너져 내린 자아를 수복한 에스델도 나를 얼음장 같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휘야였다.
“빨리 좀 돌아오세요.”
“……음.”
한숨 섞인 그 말에 차마 변명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 긴 시간 동안 사람들 사이를 거닐었던 것이다.
“미안해.”
나는 진심을 다해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금방돌아갈게.”
“예. …음.”
휘야는 다섯 쌍의 날개를 쭉 펼쳤다. 칼의 여신의 기지개는 그렇게 아침 햇살에 말린 이불처럼 폭신한 향기를 주변에 흩뿌렸다.
“저랑 자문사도, 용사님이 그럴 수 있게 돕도록 할게요.”
잠시 후, 메시지 창이 열렸다.
[수호의 여신이 당신에게 보상을 제시합니다.] [가을비의 마왕이 당신에게 보상을 제시합니다.] [두 가지 보상 중에 선택하십시오.]-어.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거기에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메시지들이 적혀 있었으니까.
– 너희들…….
그런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눈앞에 선택창이 스르륵 떠올랐다.
+
[수호의 여신]설명: 아이김 제국을 수호하는 여신이 당신의 헌신에 감동했습니다! 여신은 당신에게 밥을 차릴 수 있는 영광을 제안했습니다…….
+
– 어어…… 아니 잠깐. 이거 내가 밥을 차리라는 거지? 나한테 차려주겠다는 게 아니라? 그걸 지금 영광이라고 표현한 거지?
+
당신은 계란 후라이 간장밥을 차릴 수도 있고, 소르므윈 식 만한전석을 차릴 수도 있으며, 치킨을 튀겨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당신이 만든 요리는 엄정한 평가를 받고 그 점수가 매겨질 것입니다…….
+
– 저기요!?
+
여신의 용사여! 빨리 좀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실비아를 좀 때찌해주십시오!
※단, 마왕의 보상을 선택하면 여신의 보상을 어째서 받을 수 없다는 겁니까?
+
– 아니! 마지막 문구는 아예 좀 이상하거든!? 퀘스트 메시지 갖고서 반짝이 너…….
황당한 얼굴로 반짝이를 바라보던 나는, 하지만 곧바로 떠오르는 새로운 메시지에 더욱 당혹하고 말았다.
+
[가을비의 마왕]설명: 당신의 활약에 마왕이 감탄합니다. 마왕은 당신에게 자신과 은밀히 협력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는 여신과 정확히 똑같은 보상을 약속하되, 한 가지 선물을 더 얹힙니다.
후딱 끝내고 돌아와서 에스델의 추천 소설 99개를 읽고 최소 1200자 이상의 감상문을 남기십시오!
그럴 것을 약속한다면, 마왕은 권능을 발휘하여 당신을 탑 99층까지 단번에 전송할 것입니다.
※ 단, 오직 1명만 마왕의 보상을 받습니다. (어차피 당신 혼자 뿐입니다만.)
※ 다수가 이 보상을 택할 경우, 그 중 무작위로 1명만 뽑습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만.)
※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경우, 마왕의 보상은 강제적으로 선택됩니다.
+
-에스델 너까지… 야, 너희들…….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나는 둘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웃고 말았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 너희 참…….
옛날.
자신의 모든 것이 불태워지는 바람에 복수의 화신으로 전락한 어떤 마왕이 있었다. 그 마왕으로 인해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이 홍수에 잠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어떤 여신이 있었다.
– 에스델…….
마왕은 다른 이들이 티끌만큼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미래도. 분명 자신의 행복도.
마왕은 그저 자신을, 자신의 소중한 존재들을 불행에 빠뜨린 이들을, 살아있음으로써 그것을 방관한 모든 이들이 지옥에 떨어지길 바랬다.
– 반짝이……. 휘야.
여신은 그것을 어떻게든 막아내려 했다.
넘쳐 흐르는 댐의 물을 손으로 일일이 퍼내는 것처럼. 우리들이 마왕의 꾐에 빠지지 않게끔, 이미 멸망해버린 자신들의 세계에 부디 한 번 더 기회를 가져다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필사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했다.
– 너희….….
그리하여 둘은 서로와 대치하면서, 퀘스트 창에 떠오르는 문자 하나하나로 서로의 목을 겨누었다. 우리들이, 내가 자신을 선택하도록, 상대를 선택하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간원하고, 조롱하고, 한탄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 …….
그러던 둘이, 바로 그 퀘스트 창으로 지금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빨리 다녀오세요, 라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라고.
그것은.
그것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일이라고 나는 느껴서.
– ……응.
지난 91층부터 97층까지 느꼈던 것을 나는 다시 한 번 느꼈다.
내가 탑을 오르며 겪었던 일들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 다녀올게.
[ 열쇠 조형 완료. ]나는 눈가를 닦으면서 말했다. 정말이지 겨우, 간신히 말했다.
에스델과 휘야는 서로를 마주보더니 살짝 웃었다.
[ 98층의 관리자—당신이 처음 조우한 이계의 관리자들이 당신의 통행을 허가합니다. ]“예.”
“다녀오세요.”
[ 98층이 클리어됩니다. ]그렇게 그녀들은 나를 보내주었다.
[ 99층에 입장합니다. ]■.
모래 바람이 흩어지자마자 나를 덮쳐온 것은 가히 폭력적이기까지 한 꽃향기였다.
나의 성역, 후화원의 꽃향기는 비 내리는 날의 커튼처럼 축 처진 느낌이다. 삶에 지친 자들의 향은 아스라히 깔리고 그윽하게 스밀 뿐 밀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가득찬 것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생기로 가득 찬 냄새.
거침없이 살아있는 자들. 아낌없이 삶을 구가하는 자들의 향기였다.
“……후우.”
나는 어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또 다른 이변을 알아챘다.
내 손바닥에 분명한 촉감이 있었다.
숨소리가 느껴졌다.
온도가 느껴졌다.
“……과연.”
나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한 차례 눈을 감았다가 떴다. 향기만큼이나 찬란한 천연색의 향연이 눈을 찌르듯 펼쳐졌다.
살아있는 것들 속에, 나 또한 살아 있었다.
“…….”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그를 보았다.
범람하는 꽃밭 위에, 그는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아마도 아주 오랜 시간 그렇게 있었으리라. 천변만전하는 계절 속에 산 채로 풍화된, 풀. 꽃. 나무를 넘어 이끼 낀 석상이 그 자리에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너무나도 멈추어 있었기에 처음에는 그의 도포자락만 펄럭이는 것 같았다. 그 펄럭임에 눈길이 사로잡힌 탓에 그가 옆으로 팔을 뻗었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큼지막한 그의 손이, 꽃밭에 날 아래가 잠겨 든 거대한 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어깨부터 팔을 타고 손까지 독립된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검이 뽑혀 나왔다
용오름처럼 거센 동작이었다. 짓이겨지는 꽃들은 없었다. 으깨어진 풀잎들도 없었다. 그저 호수의 수면이 흔들리듯 한 차례 거세게 꽃밭이 파도쳤을 뿐이었다.
꽃밭에 발치를 적신 채 그가 일어섰다.
돌아섰다.
뻗어온 햇살이 각진 근육의 굴곡에 명암으로 부서졌다. 부서진 햇볕 조각들이 구슬처럼 꽃잎의 외곽을 빙그르르 돌면서 반짝였다. 풀썩 쓰러진 그림자는 바닥에 깔려 있던 풀밭의 그림자에 빨아 먹혀 스러졌다.
탁 트인 창공에 산처럼 거대한 구름이 떠다녔다. 세로로 좁은 이 세계 속에 그는 외따로이 존재하는 산맥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었다.
민들레 씨앗들이, 확, 흩날렸다.
“어서 와라.”
파아란 하늘을 머리에 인 채 검제가 웃었다.
“너무 늦었다, 이 좀비 녀석아.”
39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