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96)
1.
“예상은 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은 이미 몇 차례, 99층에 대고 묘한 이야기를—”
정정하자.
시작하려고 했다.
“시끄럽다, 좀비야! 이거부터 먹어라!”
하늘에 뜬 구름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하늘은 그 다음에 쪼개졌다. 두 쪽 난 하늘의 실선을 따라 허공에 금이 갔다. 그 직선은 나를 향해 이어졌고, 급격하게 굵어졌다.
나는,
“이런 염……!”
내가 단검을 들어 올리자 마자, 폭음이 터졌다.
쾅……!
단검에 불어넣은 오러가, 모래 맞은 불처럼 팍, 꺼졌다. 나는 다급하게 손잡이를 통해 오러를 주입했지만, 곧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으갸아아아악!”
몰려오는 쓰나미에 맞서 방패를 들어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을 돈키호테라 부를지언정 용사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때 용사라 불렸던 입장에서 말하자면 어쨌든 유의미한 결과가 남는 일을 하는 것이 최저 조건이다.
“잇,”
그러자면—
“작작, 조오오오오옴!!”
나는 잇소리와 함께 단도를 비껴 쥐었다.
입사각이 틀어지자 검제의 일격(溫擊)도 조금쯤 흐트러졌다. 원체 무지막지한 양이었던 만큼 그렇게 흘려봤자 막을 수 없는 건 똑같았지만, 적어도 숨 돌릴 틈은 얻었고, 사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내가 외쳤다.
“하십쇼오오오오오!!”
땅이 기우뚱, 흔들렸다.
그 안에 뻗친 뿌리들이, 그 위에 난 풀들이, 해바라기, 바람꽃, 원추리, 수선하, 노루귀, 별노랑이, 불두꽃, 금잔하, 나팔꽃이 일제히 흔들렸다. 꽃가루가 흐드러졌다. 생기가, 삶에 대한 의지가 흘러 넘쳤다.
그렇게 흔들거리는 땅 위에서, 그러나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굳건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이미지하는 것은 기둥이 아닌 거목.
세계수(世界樹).
발바닥 아래로 뿌리가 돋아나 있다고 상상한다. 그 뿌리를 깊게, 아주 깊게, 그리고 넓게, 한없이 넓게 뻗어 간다. 땅이 흔들린다 해도 나는 그 반대편 끝까지 뿌리를 뻗고 있으므로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을 뿐더러, 애초에 땅의 흔들림 자체가 내 뿌리의 진동으로 인한 것이다.
빨아들인다.
흐드러진 생기를, 땅 전체에 고루 퍼진 양분들을, 흰개미의 둥지에 저장된 곡식을, 겨울 잠에 빠져든 이름 모를 곤충의 한 호흡을, 빨아들인다. 거꾸로 터진 폭포처럼 내 안에 몰려 들어오는 에너지를, 그러나 축적하지 않고, 그저 한 곳, 단도를 꼬나 쥔 내 왼손을 향해 흘려보냈다.
이제 나는 수로(水路)였다.
무진장한 에너지가 나를 통과하여 내가 쥔 단도를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폭발했다.
쾅……!
하늘에서 뻗쳐온 검제의 일격이, 땅으로부터 터져 나온 내 일격으로 튕겨 나갔다.
검제는 봄 날의 나비처럼 휘돌아, 회전해, 사뿐하게 풀잎을 딛고서 멈추어 섰다.
“그래.”
검제가 씨익 웃었다.
“외기(外氣)를 다룰 줄 알게 됐구나.”
“뭐하는 짓입니까!”
내가 씩씩거리면서 소리쳤다.
검제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잘 했다.”
“예? 아니 뭐, 그렇게 칭찬받으면 좀 쑥쓰러운데… 진천세계에서 댁이 가르쳐주고 91층에서 아예 대놓고 힌트줬던 걸 그동안 쭉 연습했을 뿐이니까요. 아니아니 이게 아니고. 왜 다짜고짜 공격을—”
“아는 것과 쓰는 것은 다른 법이지. 네놈 하는 일이니 실전에 응용하는 법을 모를 수도 있다고 여겼고.”
“나 참….”
내가 뒷머리를 긁었다.
“생각해보면 댁이 말해주기 전에도 힌트는 많이 있었습니다.”
“…….”
“강기를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내공을 쌓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그 내공을 쌓기 위해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이 바로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가부좌 틀고 명상을 하는 겁니다.”
이른바 [운기법] 또는 [축기법], [내공심법]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즉 무인들이 사용하는 기(氣)의 대부분은 애초부터 외부에서 받아들인 겁니다. 그것들을 소화하고 정제하여 안에 녹여낸 것이 비로소 [내공]이라 하는 겁니다.”
내 바깥에 존재하는 기를 내 것으로 녹여내는 것.
그것이 내공심법이며, 만년설삼이니, 천년하수오니, 공청석유니, 약제사가 만들어준 약들이니, 거의 오러로 이루어진 그 거대 거북이니 하는 것들은, 바로 그러기에 영약(靈藥)으로 기능한다.
“그치만 저와 세계는 외떨어진 것이 아니지요.”
마도에서, [나]는 [세계를 엮는 밧줄]이다.
정파에서, [나]는 세계의 각 사물과 동떨어진 것이지만, 바로 그러기에 [나 자신 또한 세계 단말의 일부]이다.
주관화와 객관화. 그 장단점은 각 유파의 무공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흔히 마도가 일정 경지까지는 쉬이 오르지만 그 이상의 경지가 어렵다고 여겨지는 것도, 정파가 일정 경지까지 오르기는 어렵지만 극을 넘어선 고수들의 숫자는 마도보다 더 많다고 여겨지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니 굳이 [제 안의 내공]을 키우는데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말하면서 나는 발바닥 아래에 뻗쳤던 뿌리의 심상을 거두었다.
“아무리 내 안의 내공을 키워봤자, 그야말로 반로환동을 하고 환골탈태를 할 정도로 내 속의 내공을 키워봤자, [나]라는 그릇 자체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뿌리의 심상이 거두어지자 외기를 받아들이던 통로가 닫혔다.
“그보다는 [나]를 [하나의 통로]로 만드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요.”
자연히 내 몸을 통해 단도로 흘러들던 세계강기(世界罡氣)도 흩어졌다.
“물론 그 [통로를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나 자신도 단단해질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외기에 딸려 나가 텅 빈 내기(內氣)를 진원진기라는 그릇에 채워졌다.
“그조차도 필요조건은 아니지요.”
나는 검제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래서, 스승님께서는 내공 한 점 없음에도 설산을 가르실 수 있으셨던 겁니다.”
“그래.”
검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심법의 핵심 구조는 크게 둘. [명상]과 [순환]이다. 구양신공(九陽神功)이든 자하심법(紫露心法)이든 발켄하임류 마나연공법이든, 빠져드는 명상의 심도와 기를 운반하는 경로가 다를 뿐 두 가지는 반드시 있어야만 해.”
“…….”
“이 중 명상은 외기를 내 안에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세계를 깊이 이해함으로써, 세계와 나 자신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세계 전체로부터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거지. 순환은 그렇게 받아들인 기를 단전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네가 방금 말했듯 이미 갖고 있던 나의 기에 받아들인 기를 합쳐 주물러 녹여냄으로써 나 자신의 기를 키우는 거지.”
검제는 잘려 나간 구름을 한 조각 불러 그 위에 앉으면서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하지만 그것을 진정코 이해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깊은 명상에 잠겨 세계와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릴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인 세계의 기를 원하는 곳에 곧장 운반시킬 수 있다면, 구태여 [나 자신의 내공]은 필요하지 않다.”
검제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이 심검이다.”
이 일련의 과정에는 어떤 거창한 이념도, 추상적인 형해화도, 신비하기 그지없는 불가해도 없었다.
전제들을 알고 보면 자연히 논리적으로 가능해지는 것들뿐.
모든 마술의 비밀이란 원래 그러할 것이다.
“쭉 여기 있었던 겁니까?”
“앙.”
검제가 팔짱을 낀 채 웃었다.
“너랑 영감한테 붙어 있던 내 귀신들은… 으음. 내가 조종하긴 하는데, 이게 심검보다도 영 좀 설명하기가 어렵네.”
“그래도 설명해보십쇼.”
“보여주마.”
그러면서 검제는 손가락을 퉁겼다.
+
[검의 성좌- 본(本)]랭크: A+
효과: 당신은 당신의 생령(生靈)을 만들어내어 탑을 오르는 자들에게 조언을 건넬 수 있습니다. 99층까지 탑을 오른 당신의 경험담을 그 귓가에 속삭여주십시오. 조언을 들은 인물은 당신의 풍부한 지식에 그만 깜짝 놀라 자지러질 것입니다.
※ 단, 해당 인물은 이 스킬의 짝이 되는 스킬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아무도 당신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 당신과 당신의 생령(또는 생령들) 사이의 동기화는 특정 주기마다 이루어집니다. 이 주기는 대체로 하루입니다만, 피조언자가 오르는 계층에 따라 그보다 더 짧아지거나 더 길어질 수 있습니다.
※ 당신의 생령(또는 생령들)에게 적용되는 지식은 탑을 거치는 과정에서 왜곡 또는 첨삭될 수 있습니다. 이 대체적인 가이드라인은 기둥 회의에 따라 결정됩니다.
+
과연.
나는 이해했다.
“채팅 프로그램도 메시지가 상대한테 바로 가는 게 아니라 먼저 [서버]를 거치지요. 댁이 배후령을 통해 보내는 메시지도 탑이라는 [서버]를 거치는 동안 검열된다 이거군요.”
“비슷해. 어, 뭐라 그러지. 채팅 프로그램보다는—”
“아아. 기억을 공유하는 [인형술사의 퍼레이드]에 더 가까운 겁니까. 아니, 기억을 공유한다기보다는….”
“응. 내 기억을 붙여넣기 해서 만들어내는 거지. 그렇게 만들어낸 배후령들의 기억은 또 주기적으로 동기화해서 흡수하고. 그 다음에 다시 붙여 넣어서 업데이트하고. 그치만 바로 그 과정에서 탑의 검열이 들어가는 데다가, 그게 또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보니까 말이야….”
검성 어르신으로부터 막 복사했을 적에 검제의 배후령이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 떠올랐다.
하긴 자다 깨니 이세계에 떨어진 것만큼이나 황당한 경험이었겠군.
“한창 제가 여우님한테 털리고 있을 적에도….”
“앙. 그렇게 일정 주기마다 동기화하는 과정이 있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건 진작에 알아챘지.”
그치만 타임 러그에 더해서, 여우님과 탑의 이중 기억 조작이 있다 보니 그런 식으로 빙 둘러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완전 납득했다.
“어. 그러면 저랑 검성 어르신 말고도 댁이 붙어있는 양반들이 있을 수 있겠네요….”
“알고 싶냐?”
“아뇨. 솔직히 궁금하긴 한데 물어보진 않겠습니다. 왜냐면.”
나는 새 청테이프를 꺼내, 조금 전의 공방으로 인해 헐어버린 손잡이를 새로이 동여 매었다.
“댁이 여기에 있다는 건, 어쨌든 제가 1등으로 왔다는 소리니까요.”
검제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기에, 나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99층의 퀘스트는 뭡니까?”
“뭐 같냐?”
“글쎄요.”
나는 턱을 짚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변함없이 찬란한 꽃밭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검제와 나 모두 방금 있었던 공방전에서 외기를, 이 세계의 강기를 뽑아 썼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에서 물 한 스푼 덜어낸 것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건 비단 우리가 뽑아 쓴 외기가 소모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 환원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강력한 세계를 둘러본 내 시선은 자연히 검제에게 가서 멎었다.
웃었다.
“우리 둘이 한 판 뜨고 끝냅니까?”
검제도 웃었다.
“많이 컸다, 우리 좀비.”
“성장기라서요.”
“너 이제 사실 나보다 더 아저씨 아니냐?”
“공자 아저씨라고 불러보세요.”
“좀비 아재.”
“님의 그 유치뽕짝함을 보자면 확실히 제가 어른은 어른이네요….”
“아재. 함 뜰까요?”
“아, 좀.”
그 즈음 나는 단도의 손잡이에 청테이프를 감는 걸 마쳤다. 이빨로 찍, 테이프를 끊어 내면서 말했다.
“그래서, 뭔데요? 대체 아홉 번째 열쇠가 뭐길래 당신 같은 사람을 이 99층에 백 수십 년도 넘게 못 박아 두고 있는 겁니까?”
바로 그런 내 말을 기다린 것처럼,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
[아홉 번째 열쇠]당신은 자신이 탑에 처음 들어왔던 순간을 기억합니까?
+
검제는 이미 그 퀘스트 창을 여러 차례 본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는 이어지는 문장들을 읽었다.
+
당신이 탑에 들어설 적에 품었던 마음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처음 손에 넣었던 스킬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증명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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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제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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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명의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모두가 자신처럼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지막 열쇠는 자연히, 자신처럼 된 누군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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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퀘스트 창을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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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명의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처럼 될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지막 열쇠는 자연히, 그 자신이 되고 싶은 누군가여야 할 것입니다.
+
퀘스트 창이 말하고 있었다.
+
그리하여 지금 여기.
마침내 두 명의 남자가 있습니다.
+
나는 검제를 바라보았다.
검제가 나를 보고 있었다.
+
여러분의 열쇠는 서로 자신입니다.
+
다음 순간, 세계가 크게 울렸다.
39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