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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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배후령.
이른바 검제(劍帝)는 싸이코패스와 꼰대를 5:5로 섞어서 흔들면 튀어나올 것 같은 양반이다. 이 황금비율 덕분에 검제가 나한테 해주는 말의 99%는 미쳤거나 쓸모가 없다.
-검을 휘두를 때 중요한 건 진짜 네 실력뿐만이 아니야.
달리 말해, 1%에는 싸이코패스와 꼰대의 정수가 담겨 있다.
-믿음! 자신감! 자기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제일 중요하다.
배후령이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구라도 똑같다!
실로 인생의 경험이 담긴 일갈!
-상대를 속이려면 먼저 나 자신이 속아야 한다! 너의 구라를 너 스스로 믿어라. 자신을 가져라! 아무리 그럴싸한 구라여도 자신감 없이 치면 상대방은 안 믿어. 하지만 아무리 허황된 구라여도 자신감만 있으면 혹하게 된단다.
‘그래요?’
-내가 많이 해봐서 알아!
어쩌면 싸이코패스와 꼰대의 비율이 6:4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완전히 100% 거짓말이어서야 상대도 안 믿고 너도 못 믿지. 그러니까 구라에다가 진실을 섞어라! 10%의 진실에 90%의 구라를 섞어버려!
‘섞어요?’
-오냐. 원래 구라의 묘미란 그런 거야. 네가 10%의 진실을 믿으면, 나머지 90%의 구라는 저절로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
과연.
-기억하거라. 좀비야. 구라는 자신감이다!
“음.”
나는 눈앞을 바라보았다.
대륙 각지에서 마왕 에스델을 잡기 위해 몰려온 군세들…. 그중에서 선봉대를 맡은 아이김 제국군의 병사들이, 다시 병사들을 이끄는 장군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이들을 속이지 않으면 내 쪽이 위험해지는 상황이었다.
“시황제의 전인이라니….”
“그렇지만 저 검은 확실히….”
“왜 이런 곳에 전인이 있는 건데?”
수군수군.
병사들 중 일부가 의심스럽다는 듯 날 힐끔거렸다. 아이김 제국군은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뿐. 소속이 다른 병사들은 영 미심쩍다는 얼굴이었다. 역시 수호성검의 약빨이 먹혀드는 것은 제국군까지가 한계인 걸까.
“그, 그런데 시황제의 전인이시여…?”
바로 그 제국군의 통솔자가 조심스럽게 내 안색을 살폈다.
“무지한 말예가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무엇인가.”
“저희가 오늘 온 이유는, 말씀드렸다시피 마녀를 토벌하기 위함입니다만. 시황제의 전인께서는 어찌 이 자리에 오시게 되었는지…?”
나는 잠시 눈을 감았고,
‘구라는 자신감이다.’
눈을 번쩍 뜨면서 외쳤다.
“제군들! 마녀는 내가 이미 토벌하였다!”
오러를 담은 내 목소리는 쩌렁쩌렁 아카시아 숲길에 울렸다.
사르바스 아이김 장군이 흠칫했다.
“예, 예에? 이미 토벌하셨다뇨. 그게 무슨….”
“이쪽을 보아라!”
나는 길을 비켰다. 그러자 내 뒤에 숨어 있던 아귀의 모습이 드러났다. 에스델의 외모에 대해서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는지, 몇몇 사람이 그녀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에, 에스델이다!”
“서쪽의 마녀다!”
“내가 예전에 봤어! 저 여자가 확실하다!”
“마녀를 불태워 죽여라!”
아귀가 헉, 소리를 내며 움찔거렸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아귀.”
“네…?”
“와서 저들 앞에 무릎을 꿇어라.”
“…….”
단호한 명령.
나의 백귀로 전락해버린 아귀에겐 명령을 거스를 힘이 없었다. 그녀는 비틀비틀 걸어와서 무릎을 꿇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여라.”
아귀는 고개를 숙였다.
“바닥을 짚어라.”
“…….”
아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분노 때문일까? 아니면 치욕 때문일까. 이빨을 악물다 못해 혀를 깨물었는지, 아귀의 양 볼은 깊이 패어 있었다. 조금 뒤에는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가 턱선을 타고 떨어졌다.
“이마를 땅에 대어라.”
“으… ”
아귀가 내 명령에 따랐다.
병사들은 숨을 죽인 채 전직 마왕이 이마를 땅바닥에 찧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귀의 숨소리에 조금 더 분노와 치욕이 뒤섞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작은 낙원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는 나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다.
어찌 보면 고귀한 장면.
그런 아귀에게 나는 근엄하게 명하였다.
“그대로 양발에 힘을 주어 바닥을 차 앞구르기를 시행해라.”
침묵.
잠시간 아카시아 숲길에 정적이 흘렀다.
“……네?”
아귀가 고개를 돌려서 날 올려봤다.
방금 자기가 뭘 잘못 듣지 않았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안 들렸나?”
“어, 어어…?”
“어서 앞구르기를 시행하여라!”
아귀가 움찔거리고 마지못해 명령에 따랐다. 즉, 양손으로 땅바닥을 짚은 다음 그대로 한 바퀴 앞구르기를 했다.
데구르르!
조그만 몸집이 길바닥을 굴렀고, 몸집보다 긴 금발이 흩날리며 바닥에 있던 아카시아 꽃잎을 쓸어 올렸다. 그렇게 한 바퀴를 구르고 난 다음에도, 아귀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물구나무를 서라.”
“…….”
아귀가 한번 더 나를 돌아보았다.
자기가 새로 모시게 된 주인의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눈길이었다.
물론, 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서 물구나무를 서지 못할까!”
“힉.”
아귀는 부들부들 떨면서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천천히 물구나무를 서려다가, “아앗!” 힘이 딸렸는지 털퍼덕 넘어갔다. “아코코…” 마치 맨바닥에 헤엄을 치듯 아귀가 울상을 지은 채 허우적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준엄한 목소리로 명령을 이어갔다.
“팔벌려뛰기 스무 번을 거행하라!”
“앉았다 일어서기 열 번. 실시!”
“끝나면 곧바로 팔굽혀펴기 열 번!”
“윗몸 일으키기 스무 번을 명한다!”
“플랭크 자세를 20초간 유지하라!”
잠시 후.
“더, 더 이상은 안 돼요, 주군…. 몸이, 몸이 안 움직여요오….”
전직 마왕은 손끝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져 쭉 뻗어버렸다.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음.”
나는 사르바스 아이김을 돌아보았다.
“이제 이해되었는가?”
사르바스 아이김은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사실 장군뿐만 아니라 휘하의 병졸들도 낯짝이 비슷했다. 한낱 여린 어린아이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아귀를, 대륙의 군세는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았다.
“저, 전인이시여. 이게 대체….”
“말했다시피.”
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마녀는 이미 내게 토벌되었도다.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마녀는 나의 명령에 거스르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히, 하고 내가 덧붙였다.
“더는 대륙의 백성들에게 피해를 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제군들. 그대들은 마녀에 관해서는 완전히 안심해도 좋다!”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졸병들이 흔들리자 우두머리들도 덩달아 혼란했다.
“음. 전인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아니 잠깐만!”
성검의 권위에 복종하는 사르바스 아이김은 내 말을 어떻게든 믿으려 하는 것 같았지만, 다른 지휘관들은 대체로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이었다.
그중에서도 성기사장은 아예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지금 이게 대체 뭐 하는 거요!? 우리는 마녀를 토벌하러 왔소이다.”
“아니. 시황제의 전인께서 말씀하시길, 마녀는 이미 토벌되었다지 않소이까….”
“그걸 어찌 믿겠소!”
“거, 거꾸로 그대는 어찌 믿을 수 없다는 거요? 시황제의 전인께서 명하시는 저…… 하여간 거시기들을 철저하게 이행하는 마녀의 모습을 그대도 보았지 않소!?”
사르바스 아이김이 되려 역정을 냈다. 성검의 위력이 대단하긴 대단했다.
성기사장은 미치고 팔딱 뛰겠다는 얼굴로, 실제로도 팔짝 뛰면서 외쳤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믿느냐는…… 아니아니 애초에! 저 청년이 대동방시황의 전인이라는 증거부터가 저 칼 한 자루 뿐이지 않소이까!? 그깟 칼 한 자루 때문에 아까부터……”
“그, 그깟 칼 한 자루?”
사르바스 아이김의 언성이 높아졌다.
“칼 한 자루라고!? 세상에. 지금 제국을 일으켜 세운 시황제 폐하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이외까! 우리가 여신의 총애를 받는다는 증거가 바로 저 성검이거늘. 감히!”
성기사장이 움찔했다.
“아니, 장군. 진정하시오…. 본관이 하려던 말은 어디까지나,”
“시황제께서 저 검을 쥐고 황야를 나섰소! 벌판을 달렸고, 도시마다 족적을 남기며, 화산에 올라, 폭포를 타내려, 산맥을 꿰뚫고! 마침 내 제국을 일으켜 세우셨소! 그대들의 조상 모두가 시황제와 함께하였으니, 그대들 모두가 시황제께 빚을 진 것이오! 그런데 ‘그깟’ 칼 한자루라니!”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대체 무슨 말인 거요!”
“교, 교황성하께서 내게 명령을 내리셨단 말이오. 반드시 사특한 마녀를 토벌하라고 본인에게 준엄한 명령을… 그런데 저런 말 한 마디 때문에,”
제국의 장군이 기어이 고함을 질렀다.
“저런 말 한마디라니! 그대야말로 교황의 명령 따위에 시황제의 전인께서 하신 말씀을 의심하고 있잖은가!”
와오.
“뭐, 뭣….”
성기사가 입을 뻐끔거렸다.
황당함이 분노로 진화하기까진 정확히 2초가 걸렸다.
“그대야말로 감히 신전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인가!?”
“네놈이 먼저 수호성검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았느냐!”
“오오, 좋다! 알겠다! 아무래도 그대가 따르는 제국의 3황자에겐 교황 성하의 지지선언이 필요없는 모양이로군!”
“하, 그까짓 지지선언. 이미 시황제의 전인께서 모습을 드러내시어 마녀를 토벌하셨다. 여신의 총애가 제국과 사직을 굽어살피거늘 무슨 상관인가!”
“그것이 정녕 3황자 파벌의 뜻이렷다!”
제국의 장군과 신전의 성기사가 바락바락 다투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좋아.’
여러 집단이 뭉쳤을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한번이라도 갈등이 드러나면, 단숨에 파탄을 향해 질주한다는 것.
‘멀리도 갈 것 없지.’
우리 헌터들이 12층에 올라섰을 때. 그때도 공교롭지만 세력 구도가 딱 8개였다.
나, 검성, 5대 길드장들이 각각 하나씩. 그리고 공헌도 8위부터 10위까지의 군소 세력.
‘탑을 공략한다’라는 대외적인 목적 아래 함께하던 우리는, 그러나 결코 하나의 견고한 덩어리가 아니었다.
서로 쌓인 게 있었다. 불신이 있었다.
그러기에 [마왕의 보상]이라는 변수가 하나 생겼을 뿐인데도 한심하게 파탄을 맞이한 것이었다.
「전사들이여. 탑에 오르는 자들이여.」
나는 11층이 개방되던 순간, 여신의 홀로그램이 한 말을 떠올렸다.
「열한 번째 층에서 스무 번째 층까지, 그대들은 시험에 직면할 것이에요. 믿음의 시험을.」
내가 속으로 히죽 웃었다.
그 잘난 믿음의 시험.
‘헌터들뿐 아니라 탑의 주민들도 한번 겪어봐야겠죠?’
그래야 세상이 좀 공평하지 않겠는가?
4.
제국과 신전이 본격적으로 [믿음의 시험]에 돌입한 가운데.
다른 세력들도 이에 질세라 하나둘 끼어들기 시작했다.
“하아, 여러분….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요정의 숲에서 온 엘프 레인저 대장이 한숨을 쉬었다.
“마녀가 저 청년의 지배에 들어갔다는 것이 정말인지 좀 더 확실하게 검증해야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아무리 어리석은 인간이어도 그렇지 제발 때와 장소를 가려주십시오.”
싸움을 말리겠다는 건지 부채질을 하겠다는 건지 도통 모를 말투였다.
당연하지만 아무런 도움이 안 됐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렇네요. 신전 쪽에서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 아닐까요? 아이김 시황제의 수호성검이란, 신전에서 숭배하는 수호의 여신으로부터 하사된 것. 성검의 권위를 의심한다는 것은 곧 여신의 권위를 의심함 아니겠어요? 이래서 짧게 사는 인간들이란 우매하기 그지없어서….”
“무어라!? 엘프들은 우릴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단 말인가!?”
“이래서 귀큰 녀석들은 못 믿을 연놈들이다!”
심지어 방해만 됐다.
“신전과 제국은 대체 무얼 하는가! 명예로운 약조를 지키기 위해서 온 우리 앞에서 그런 말싸움이나 벌이다니!”
화산에서 온 용기병 단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사답게 결투로 해결해라! 무기는 뒀다가 뭐에 쓸 생각인가!”
얘네는 그냥 단세포였다.
우리 헌터로 따지면… 그래. 천무문주인 독사로군.
“저희들 자유도시연맹은 제국의 검과 신전의 망치 두 분 모두 옳다고 여깁니다. 다만 더 옳은 분이 또한 계시겠지요. 제안하실 것이 있다면 열린 마음으로 듣겠습니다.”
“이래서 농사짓는 찌질이들이란… 아, 그래서 저 마을은 언제 약탈하면 된다는 건데? 니네가 약탈해도 된다매? 그래서 기껏 와줬더니만은.”
“여, 여러분. 여러분… 마녀의 소굴이 바로 앞에 있는데….”
대놓고 [제시염]을 시전하는 무장상단, 말들을 어르면서 투덜거리는 유목민의 여족장.
아귀의 낙원과 가장 가까워 그래서 낙원을 절실하게 토벌하려 했던 최초의 불씨, 군소국의 영주들만이 전전긍긍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크흐!
반면에 나와 검제는 그만큼 여유로워졌다.
배후령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아귀가 헌터들 싸움 붙여 놓았는지 이해되네. 이거 이간질하는 맛이 있구먼!
‘인정합니다.’
솔직히 꿀잼이었다.
그러나, 물론 저들에게도 트롤러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하아. 여러분. 좀 비켜보세요!”
우리로 따지자면 이른바 ‘자경단장’에 해당하는 사람. 중재자. 어떻게든 혼돈과 파괴를 향하여 질주하는 상황을 정리해보겠다며 나서는 자도, 당연하지만 있었다.
인어의 폭포에서 온 리저드맨 마법사가 한발짝 앞으로 나왔다.
“소첩이 보기에 결국 지금 문제 되는 사항은 간단해요. 저,”
리저드맨 마법사는 물갈퀴 달린 손가락으로 내 쪽을 가리켰다.
“청년이 정말로 시황제의 전인인지. 저 여인네가 정말로 마녀인지. 진실로 시황제의 전인이 마녀를 토벌하여서 거두어들인 것인지. 이것들만 확인하면 끝나는 문제예요.”
제국의 장군과 입씨름을 하다 지친 신전의 성기사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그걸 무슨 수로 확인한다는 것이오?”
“걱정하지 마세요. 소첩에게 다 방법이 있답니다.”
리저드맨 마법사가 품에 물갈퀴를 넣었다.
그녀의 손아귀엔 심해를 응축시킨 것 같은 푸른색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이것은 인어의 현왕께서 내려주신 영혼의 보옥.”
리저드맨 마법사는 매우 진지했다. 마치 이제부터 굉장히 귀중한 보물을 보여줄 것이며, 너희가 이런 보물을 보게 된 것은 일생의 행운이라는 듯한 목소리였다.
“여기에 핏방울을 떨어트리면, 그 피의 주인이 [선한 영혼]을 지녔는지 [악한 영혼]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답니다. 선한 영혼을 지녔다면 보옥이 하얗게 밝은 빛을 뿜어낼 것이요, 악한 영혼을 가졌다면 검은빛으로 물들지요.”
음.
‘그러니까 자경단장의 [거짓말 탐지기]랑 검성의 [탐정의 혜안] 비스무리한 거네요?’
-어. 아무래도 그런 거 같은데. 아인종들이 저런 짬뽕을 잘 만들지.
나와 배후령은 태평했다. 인어왕이 내린 보옥이니 뭐니 말은 거창했지만… 딱히 우리한테 새롭지는 않았다.
그런 우리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지 리저드맨 마법사는 자신만만했다.
“자! 저 아낙이 진실로 변방의 마녀이며, 당신이 진실로 시황의 전인이라면, 이 보옥의 시험을 받아들이세요!”
리저드맨 마법사가 보옥을 들어올렸다.
“당신들이 저지른 악업. 당신들이 쌓아 올린 선행. 모든 것을 보옥이 증명해줄 거랍니다!”
“좋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시험해보아라.”
“후회하지 마세요. 말씀드린 것처럼 보옥은 당신의 영혼을 있는 그대로 폭로할 테니까요.”
“갈라진 헛바닥이 길기까지 하구나. 후달리는가.”
리저드맨 마법사의 뱀눈이 날카로워졌다.
“그 자신감이 허세가 아니길 빌지요. 그럼 먼저, 저 아낙의 영혼부터 검증해보겠어요.”
리저드맨 마법사가 성큼성큼 우리한테 다가왔다. 그녀는 아귀의 손목을 휘어잡았다. 그리고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서 아귀의 손바닥을 쓰윽, 긁었다.
손바닥에서 핏물이 흘렀다.
“힉.”
아귀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검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려 뚝, 뚝, 인어왕의 보옥에 스며들었다.
화아아악!
보옥이 단번에 검은 빛깔로 물들었다.
“저런!”
“맙소사.”
영혼의 시험을 지켜보던 지휘관들이 질겁했다. 보옥을 물들인 색깔은 평범한 검정색이 아니었다. 무저갱이 저럴까 싶은 색깔. 마치 검은 빛깔의 뱀이 쉭쉭거리듯, 새까만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이렇게나 사악한 영혼이라니…!”
시험을 주관한 리저드맨 마법사조차 침을 꿀꺽 삼켰다.
“가히 믿기 어려울 정도예요. 얼마나 많은 악업과 살생을 저질렀기에…. 이런 것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돼요. 그야말로 저주받은 존재… 마녀가 틀림없어요!”
툭.
마법사는 구정물을 피하듯 아귀의 손목을 얼른 놓았다. 아귀를 바라보는 마법사의 뱀눈에는 어마어마한 경멸과 그에 버금가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아니. 마녀조차 아니네요. 마왕이 분명합니다!”
아귀가 어깨를 조금 더 움츠렸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리저드맨 마법사가 아귀의 정체를 공언해준 탓일까? 병사들의 술렁거림이 잦아들었다. 지휘관들은 말다툼을 멈추고 무섭게 아귀를 노려봤다. 그럴수록 아귀는 더 움츠러들었으며, 슬그머니 뒷걸음질 쳐서 내 뒤로 숨었다.
“자. 이제 당신의 차례예요.”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한테 몰렸다.
리저드맨 마법사가 긴 손톱을 세웠다.
“자칭 시황제의 전인이여. 마음의 준비는 되었나요?”
“나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허세로 꾸미어도 소용없는 일을…. 자, 소첩에게 손을 주시지요.”
기꺼이 왼손을 내밀어주었다. 찔끔! 리저드맨의 손톱이 지나간 자리에 아가미처럼 살이 벌어졌다.
벌어진 틈새로 붉은 핏물이 흘렀다. 아귀의 피로 인해서 새까맣게 물들게 된 보옥으로, 내 핏방울이 조용히 떨어졌다.
그리고.
“아…?”
빛이 있었다.
“어, 어라…?”
보옥에서 시꺼먼 기운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새하얀 빛이 뭉치고 뭉쳐서 환해지더니, 마침내 주변으로 폭발하듯이 퍼졌다.
파아아아앗!
아카시아 숲길이 순식간에 하얗게 밝혀졌다. 이곳저곳에서 작은 비명이 터졌다. 병사들이 놀라서 눈을 감았으며, 지휘관들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보옥을 쥔 리저드맨 마법사도 마찬가지.
“어, 어떻게…….”
그녀는 입을 뻐끔거리며 망연해했다.
“잠시만, 이 영혼은 도대체……?”
“이게 대체 무슨 난리요!?”
신전의 성기사장이 소리쳤다.
“현왕이 보낸 물방울이여! 왜 보옥에서 이런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오!?”
“영혼이……”
마법사는 그런 성기사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토록… 대체 얼마나 되는 생명을 구해왔으면, 이렇게나 새하얀, 이건… 이건 그야말로……”
아아, 하고 리저드맨 마법사가 말했다.
“이분은…… 빛이십니다……!”
그렇다.
나는 빛이었다.
4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