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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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도 거취를 조금 더 고민해봐야 돼!”
마녀가 말했다.
그녀는 돌돌 말아버린 신문 뭉치로 계속 내 팔뚝을 때렸다. 툭! 툭! 너무 신이 나서 주체를 못 하겠다는 게 온몸에서 풍겼다.
“거취요?”
“응. 지금은 당신이 5대 길드에 전부 가입한 상태잖니. 하지만 사실상 무소속이나 다를 게 없어. 이왕 일이 이렇게 잘 풀린 이상, 당신 스스로 길드를 새롭게 창설하는 것도 좋단다.”
마녀가 즐거운 듯 후후 웃었다.
“명색이 랭킹 3위나 되는 헌터라면 ‘길드장’정도의 직함은 가져야지. 아무리 5대 길드에 동시로 가입되어 있다고 해도 평범한 길드원 이어서야 구색이 안 맞는걸.”
실감이 잘 들지 않았다.
“길드장이라.”
내가 어떤 길드의 우두머리가 되다니. 실감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상도 안 됐다. 애당초 헌터를 부하로 부릴 필요가 있을까?
나한테는 스켈레톤 군단이 있는데.
“하긴.”
내 안색이 별로라는 사실을 알아봤는지, 마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의 어깨 너머에선 검성이 묵묵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도 저 할아범처럼 솔로 플레잉이 성격에 맞을지도 모르지. 독고다이로 모든 걸 깨부수는 데 로망을 가진 사람들, 의외로 많더라. 별생각이 없으면 강권하진 않을게.”
“어허. 지금 본인의 뒷담화를 까는 것인가?”
“그건 그렇다 치고….”
마녀가 검성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렸다.
“저것들은 뭐니?”
아카시아 숲길 저편.
작은 평야에서 대륙의 병사들이 뭔가를 짓고 있었다. 막사였다. 그들은 아귀의 낙원을 공격하는 것을 단념한 대신, 오늘 하루 휴식하고서 회군할 것이다.
“아.”
내가 턱을 쓰다듬었다.
“저 병사들은 대륙 곳곳에서 몰려온 애들이에요.”
“대륙 곳곳에서?”
“이게 말씀드리자면….”
내 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아귀에 대한 이야기는 쏙 뺐다. 내가 어떻게 대륙의 군세를 속였는지만 말했다.
마녀와 검성이 함께 얘기를 들었는데, 설명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두 사람의 표정이 묘해졌다. 마녀의 한마디가 두 사람의 생각을 대변했다.
“사왕…. 당신 거짓말에도 일가견이 있구나.”
“뭐. 덕분에 아무런 피도 안 흘리고 클리어했으니까요.”
“아니, 탓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정말 잘했어.”
마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흉한 계획을 떠올린 장사꾼의 눈빛이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여기 대륙과도 무역할 수 있게 됐는걸. 바깥세상의 늙은이들한테 더 굽실거릴 필요가 없어졌다는 거지. 나쁜 놈들! 맨날 식량으로 가격을 후려치고. 어디 앞으로도 그럴 수 있나 두고 보겠어.”
목소리에서 원한이 철철 흘렀다.
“기본적으로 탑과 바깥세상의 무역은 불공정하니 말일세.”
검성이 말했다.
“자본, 자원, 기술. 무엇이든 바깥세상이 탑보다 풍요롭지. 물론 바깥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영약과 재료도 탑에는 있긴 하네만….”
“식량! 항상 식량이 문제야!”
마녀가 발로 땅을 찼다.
처음 봤을 땐 무뚝뚝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셋이서 함께 12층부터 19층까지 돌파한 덕분일까? 우리 앞에서는 감정 표현이 무척 다채로워 졌다.
그만큼 우리가 친해졌다는 뜻이겠지.
“흑룡주. 아무튼 여기 대륙의 사람들과 교역을 시작하겠다는 말이죠?”
“응? 당연하지. 바깥세상도 쓴맛을 좀 봐야 해.”
“그럼.”
내가 씩 웃었다.
그리고 평야에 차려진 군영을 가리켰다.
“이제부터 저 사람들이랑 대화를 해야 할 텐데. 그냥 무턱대고 ‘교역합시다’ 하고 말해봤자 씨알이 안 먹힐 거 아니에요? 대륙인들한테는 우리가 이방인이고, 우리한테는 대륙인이 이세계인이니까요.”
“그렇지.”
“제 이름을 빌려드리죠.”
내가 말했다.
“저는 이세계에선 시황제의 전인이고 여신의 사도입니다. 여러분도 여신이 보낸 사도라는 식으로 말을 꾸며내면, 적어도 교역을 시작하는 데엔 쓸모가 있을 거예요.”
“…….”
마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마운 제안이네. 유효한 제안이고. 하지만 공짜로 당신의 이름을 빌려주겠다는 얘기일 리는 없으니… 뭘 원해?”
“20층이요.”
“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카시아 숲길. 작은 평야. 에스델의 고향.
이 자그마한 세상이 20층의 전부였다.
“저는 20층을 원합니다.”
일순간 마녀가 말을 잃었다.
“…잠깐만. 20층이라니. 설마 20층을 통째로 가지겠다는 거야?”
“예. 정확히는 20층의 땅이 전부 제 소유면 좋겠네요.”
“그건….”
“대신. 11층에서 19층을 공략한 대가는 아무것도 받지 않겠습니다. 대륙과 교역해서 얻는 이익도 다른 헌터들이 나눠 가지세요.” 다시 마녀의 입술이 다물렸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보통 헌터들이 스테이지를 공략하면, 일단 참가자들끼리 성과를 나눠 갖는다. 아이템의 소유권. 나아가서 자원의 소유권까지. 그렇지만 약 절반에 이르는 권리는 모든 헌터가 공유하도록 둔다.
누군가가 [한 층]을 통째로 가진 적은 전례가 없다.
“이건… 내가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야.”
마녀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길드장들도 불러서 논의해야 돼.”
“뭐. 앞으로 24시간 동안 할 일도 없는데 기다리죠.”
“…진짜로 여기 스테이지를 가지고 싶어?”
마녀가 주위를 힐끔거렸다.
“척 봐도 별로 가치가 없어 보이는 땅인걸. 아카시아 꽃길…은 예쁘지만. 농사를 지을 만한 땅도 적어. 스테이지의 크기도 비좁아.”
“음.”
“내 경험담이지만, 사왕. 이럴 때는 그냥 11층부터 20층까지 클리어한 성과를 분배받는 게 훨씬 이익이란다.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내가 웃었다.
“전 돈보다 부동산이 더 좋아서요. 땅이 최고죠.”
“콜?”
마녀가 한숨을 쉬었다.
길드장들을 모아볼게. 1층에서 논의해보자꾸나.”
“그러죠.”
“응. 어차피 당신도 한 번쯤 사람들한테 얼굴을 보여줘야 하니까. 그런데….”
마녀가 서서히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예.”
“…저건 또 뭐니?”
마녀가 가리킨 방향을 나도 보았다.
“씨, 발… 흑… 새까 이거 좀, 멈춰…! 멈춰 달라고! 이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냐, 시발!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
그곳에는 탑 제일의 춤꾼이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춤꾼의 땀과 눈물이 처절히 흘러내려서 아카시아 숲길을 곱게 적셨다.
아름답군.
“흑룡주.”
내가 환히 웃었다.
“흑룡주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응?”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겁니다. 아시겠죠.”
“…….”
마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일생일대의 미스터리와 맞닥뜨린 생물학자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 세상에는 이런저런 인간이 있는 법인걸. 이해해줄게. 하지만, 하고 마녀가 중얼거렸다.
“역시 당신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그것 또한 소수의견이었다.
2.
나는 아귀와 염제를 20층에 두고, 헌터들과 함께 1층으로 전송했다.
“회합 장소는 저번의 커피숍으로 해도 괜찮을까?”
“예. 전 아무 곳이든 상관없어요.”
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1층 도시. 바빌론.
남들이 볼 때는 고작 닷새 만에 귀환한 것으로 비출지 몰라도, 내겐 아니었다.
그야말로 수백 일. 수년 만에 도시로 돌아온 것이다.
“하아.”
“왜 그래?”
“아뇨. 이제 좀 스테이지를 깼다는 실감이 들어서요.”
마녀가 피식 웃었다.
“글쎄. 아마 조금 더 들어야 할걸.”
“네?”
“말했잖아. 지금 탑에서는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얘기밖에 안 한다고. 마음의 준비를 해놓으렴.”
무슨 마음의 준비인가, 라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어?”
“저거 혹시….”
1층 전송석을 밟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길거리를 오가던 행인들. 길가에 가판대를 세워놓고 장사하는 사람들. 막 사냥터로 떠나려고 채비하던 헌터들이 하나둘씩 소곤거렸다.
“마녀랑 검성이잖아.”
“그럼 저 사람은….”
“사왕이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것이 기점이 되었다
“사왕이 나타났다!”
가판대에서 중고 무기를 유심하게 살피던 손님이 고개를 돌렸다. 야외 카페에서 커피를 즐기던 남녀가 일어섰다. 희귀한 꽃을 파는 상인, 동료와 잡담하던 헌터, 수십 명, 수백 명이, 일제히 이쪽을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인파가 몰려 들었다.
“우와, 와—.”
“혼자서 20층을 클리어했다는 루머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여기 봐주세요! 잠깐만요! 여기요!”
웅성웅성.
뭘 어떻게 대처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냥,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사람들이 우리 일행을 둘러쌌다. 거기서 끝난 것도 아니었다. 눈을 두 번 깜빡였을 때는 포위망이 배로 두터워졌다.
“어….”
“아무 말도 해주지 마.”
마녀가 나한테만 들릴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직 언론을 상대해본 경험은 없지?”
“예, 뭐. 당연하죠.”
“신비주의? 인기 스타?”
“네?”
“컨셉 말이야. 신비주의 컨셉으로 할래, 아니면 인기 스타 컨셉으로 할래?”
마녀가 속삭이는 와중에도 인파는 3배로 불어났다. 우리 일행의 발걸음 속도는 30배쯤 느려진 것 같았다. 찰칵! 찰칵! 한 발짝 걸을 때마다 핸드폰 카메라가 요란히 울렸다.
맙소사.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번 정한 컨셉은 웬만하면 바꾸기 어려워. 지금 대답하려무나.”
“어. 신비주의 컨셉은 알겠는데, 인기 스타는 또 뭐예요?”
“영화판 스타랑 비슷해.”
마녀가 말했다.
“일단 SNS 계정을 새로 파야지. 이미지 관리해주는 비서랑 언론 담당해주는 비서는 따로 두고. 당신 외모와 패션을 돌봐주는 사람도 물론 고용해야 한단다. 아, 돈은 걱정하지 마. 흑룡에서 전담해줄게.”
안 그래도 없는 정신이 더 없어졌다.
우리 옆에선 검성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가 툭 중얼거렸다.
“본인이 저 지랄을 하기 싫어서 혼자 다닌다네.”
지당하신 말씀으로 들렸다.
“신비주의 컨셉으로 부탁드리죠….”
“괜찮아? 사람은 관리를 받으면 달라진단다.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생겨지는 건 당연하고, 다른 인간을 대하는 방법도 어느 정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거야.
이단심문관 같은 경우엔 잡지 모델로도 나오고 개인 화보도 찍는걸?”
그건 나도 잘 알았다.
4000일을 회귀하기 전에 내가 하던 짓이 바로 그런 잡지와 화보를 오려다가 모으는 덕질 아니었던가? 당장 눈앞의 흑색마녀만 해도 잡지 표지의 단골 모델이었다.
“아니요. 신비주의! 제발 신비주의로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당사자가 나라면 얘기가 달랐다.
“왜? 화보 찍기 싫어?”
내가 머리에 총 맞았나!
“부끄러워서 죽어요!”
“원래 처음엔 다들 부끄러워해. 아니, 이단심문관은 처음부터 부끄러움을 몰랐지만… 그건 걔가 예외고. 사왕. 사실 부끄러운 걸로 치면, 당신이 아이김 제국 누각에 올라서 소리친 게 훨씬 더….”
“신비주의 아니면 저 5대 길드 탈퇴합니다.”
진심을 담아서 한 말이었다.
마녀가 작게 웃었다.
“그래. 그러겠지. 그런 성격으로 보이는걸.”
“신비주의 컨셉은 뭘 어떡해야 하는데요?”
“간단해. 무표정을 잘 지으렴.”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표정을 잘 지어라’ 같은 조언을 들었다.
“SNS 활동은 절대 금물. 잡지 및 방송 출연 금지. 개인 방송 스트리머나 언론사가 인터뷰를 요청해도 거절해. 1년에 2번 정도는 인터뷰해도 괜찮지만. 내가 미리 검증해둔 기자들만 보내줄게.”
음.
“…그게 전부예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직 모르는구나.”
마녀가 키득거렸다.
“관심이란 건 마약이야. 제일 잘 중독되는 마약.”
검성이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사람을 가장 철저히 망가뜨리는 마약이기도 하다네.”
“그래. 불과 10명의 인간만 자기한테 관심을 기울여줘도 그 사람은 행복한 기분이 들 거야. 그런데 이 자리에 오르면, 몇 마디 말만 던져도 수십 수백만 명의 인간이 반응하거든. 이런 마약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얼마 없단다.”
인파가 더 몰려 왔다.
꼭 도시 전체의 인구가 이곳에 모인 것 같았다.
“다 헛것일세.”
검성은 그렇게 말했고.
“응. 하지만 기분 좋은 헛것이지.”
마녀는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이런 마약을 즐길 줄 아는 것도 유명해진 사람의 소양일지 몰라. 마약에 질릴 때까지. 아니면 같은 마약을 들이켜는 동료들한테 환멸을 느끼기 전까지, 조금 버티는 거지. 사왕은 어떻게 할래?”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인의 장막.
빈틈 하나 없이 사람들이 빼곡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끊임없이 터져서, 나는 실눈을 떠야만 했다. 실눈으로 바라본 플래시의 행렬은 신기루 같았으며, 인의 장막은 거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저만큼 다른 사람들한테 목메는 사람도 없을 테지만.”
내가 입을 열었다.
“제가 얻고 싶은 것은 인정입니다. 그리고 잘 몰라도… 관심을 받는 것과 인정을 받는 것은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염제를 떠올렸다.
4000번 회귀 하기 전에 탑의 모든 관심을 독차지 하던 절대자를.
“전 수백만 명의 관심은 없어도 괜찮아요. 관심은 그냥 주변 사람들이 보내주는 거로도 충분합니다. 수십만이든 수백만이든, 제가 세상 사람들한테 얻고 싶은 건… 관심이 아니라 인정입니다.”
“그래.”
마녀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둘이 아주 별개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그게 당신의 대답이라면 존중할게.”
“예.”
“당신이 그런 사람이어서 다행이야.”
그건 언젠가 예전에도 들은 말이었다.
“그래서 무표정은 어떻게 하면 잘 지어요?”
“비법을 알려줄게.”
사방에서 군중의 소리가 터졌다.
슬슬 우리 일행의 속도는 초당 10cm 정도로 줄어들었다.
“정말로 안 좋은 기억을 떠올려.”
“안 좋은 기억이요?”
“응. 나 같은 경우는, 바깥세상에 있을 때 내전으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거든.”
마녀가 담담히 말했다.
“일곱 살 때야. 부모랑 같이 도망치는데, 아마도 군인들이 쫓아왔던 거 같아. 아버지께서 뒤에 남으셨고. 그때 아버지가 ‘뒤돌아보지 말고 어서 가렴’ 하고 소리쳤거든. 그런데….”
마녀가 인파를 헤치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나는 정말로 뒤를 돌아보지 않고 뛰었어. 총소리가 들렸는데, 안 돌아봤어. 계속 뛰었지.”
찰칵! 찰칵!
카메라의 플래시는 멈추지 않았다.
“어릴 때 일이잖아요.”
“어릴 때 일이지.”
마녀가 중얼거렸다.
“도망쳤다는 게 싫은 건 아니야. 어린애였는걸. 하지만, 왜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을까? 그건 쉬운 일이었을 텐데. 그냥 보기라도 하지.”
“……..”
“난 무표정을 지어야 할 때면 그때를 떠올려. 심장이 가쁘도록 뛰었던 기억을 되새기면, 무표정이 아주 잘 지어지거든. 나만의 작은 마법인 셈이야.”
마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도 그런 기억이 한두 개 정도 있지?”
있다.
어두컴컴 골목.
염제한테 머리가 잡혀서 온몸이 불태워지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게요.”
거울을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완벽한 무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여기 좀 잠깐 봐주세요!”
“뭐라도 말씀해주시죠!”
“흑룡주, 공식 발표는 언제면 들을 수….”
“두 분이서 어떤 관계인가요!”
“검성님! 사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시 시선을 둘러보면, 어느새 카메라 플래시에도 눈이 익숙해져서 주위가 잘 보였다. 이렇게 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플래시 세례를 받는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효과 직빵인데요?”
아까처럼 정신이 없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평소와 같이 마음이 착 가라앉을 뿐.
마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빨리 배우네. 금방 익숙해지겠어.”
분명히 5일 만에 세상은 바뀌었다.
하지만 내가 달라져야 할 정도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5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