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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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제사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녀가 오들오들 떨면서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히-.”
“흐어어어어억!?”
약제사의 비명을 능히 씹어먹고도 남는 비명이 터졌다. 약왕이었다.
검성과 친구를 먹을 정도로 연세가 오래되신 이 양반은, 비명을 외칠 때만은 웬만한 젊은이들도 쌈싸먹을 것 같았다.
“도망치게! 도망쳐! 저딴 건 실리콘밸리에서도 본 적이 없어! 흐어어업, 멸망한다! 세계가 멸망해버린다!”
“여긴 이미 멸망한 세계거든요!?”
나는 재빨리 성검을 꺼내 들어서, 제일 가까이에 있는 좀비부터 베었다. 무협물과 다르게 좀비물은 그래도 영화나 드라마로 꽤 접해봤고, 13층에서는 직접 상대도 해보았다. 그 덕인지 내 칼날은 본능적으로 좀비의 목을 날려버렸다.
-키에에엑!
좀비의 머리통이 공중에 치솟으면서도 으르렁거렸다. 머리를 잃어버린 몸통도 팔다리를 휘저으며 나한테 덤볐다. 제기랄. 뇌 자체를 파괴해야만 활동이 정지하는 타입인가. 최악의 경우였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죠!”
“네, 네놈들은 누구냐!”
드디어 두 명의 무림인도 우리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파의 노인과 마교의 여인이 이쪽을 쳐다보았는데, 우리가 좀비를 보고 깜짝 놀란 것처럼 저들은 우리 일행을 보고 경악했다.
“…노물(老物)아. 마침내 본좌의 눈깔이 삐꾸가 되어버린 것 같도다.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이, 그것도 1명이 아니라 4명이 보이는구나. 염라께서 본좌를 부르심인가.”
“내, 내 눈에도 그리 비춘다. 네년이 상병신이라 놀려서 그런지 정녕 내가 병신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쪽도 얼른 도망치십쇼!”
나는 서둘러 약제사를 등에 업었다.
“기왕이면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도 좀 알려주시고요!”
두 무림인이 서로 쳐다봤다.
“맙소사. 정말로 살아 있는 사람인 것 같도다, 노물이여.”
“혹시 우리가 이미 죽어서 저승의 풍광을 구경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 네놈이랑 본좌가 죽어서 함께 무릉도원에 갔든지 함께 지옥에 떨어졌든지 양자택일이로구나.”
“무림맹주로서 의와 협에 봉사해온 이 몸이 지옥에 갈 것 같진 않으니 필경 무릉도원이라. 헌데 이곳엔 복숭아나무도 없고 선녀도 없으며 강시들이 즐비하다. 무엇보다 네년이 있잖느냐? 도원이라 보기에는 심히 괴이쩍다.”
“허면, 꿈이 아니라 생시일 것이다.”
“이것들은 생사람이고?”
“품이 뜨뜻한 것이 적어도 강시로 뵈지는 않구나.”
두 무림인이 태평하게 만담을 나눈다는 것에서 어쩌면 알아챘겠으나, 우리는 이미 좀비의 숲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독사가 정파의 노인을 챙겼고 나는 마교의 여인을 안아 들었다.
“자네들은 대체 어디서 왔느냐?”
마교의 여인이 신묘하다는 듯 내 얼굴을 올려보았다.
“신기한 보법(步法)을 익히고 있구나. 혹여 새외(窒外)의 아해들인고? 변방에는 아직 오랑캐들이 생존한 게냐.”
“저희는….”
새외가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듣진 못했지만 대충 이해했다. 무림 바깥의 세상에서 왔느냐고 질문한 것이겠지.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고민하던 때, 내 고민을 덜어준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키긱, 기이이익!
-으오오오오!
좀비들이었다. 놈들은 본격적으로 몸이 풀렸는지 우리를 쫓아 뛰어왔다.
아니, 저걸 과연 ‘뛰어온다’고 표현해도 괜찮을까?
무슨 놈의 좀비가 저리도 팔팔한지 한 걸음에 십 미터씩 건너뛰었다. ‘뛰어온다’가 아니라 ‘날아온다’라고 말해야 할 지경이었다. 수백 마리의 좀비가 갈매기떼처럼 날아드는 광경은 가히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뭐, 뭐야!?”
독사가 경악했다.
“웬 좀비가 하늘을 날아다녀!?”
“본좌가 창안한 경공(輕功)이다. 곤륜의 잡것들에게 좀 빌려다가 다듬었노라.”
마교의 여인이 으스거렸다.
“저걸 보거라. 답설무흔(路雪無癌)을 넘어 능공허도(達空虛道)라! 과연 본좌의 가르침을 받은 마교의 정예들이 아닌고. 죽어서도 무공을 잊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참된 마인들이다.”
“자, 잠깐만요.”
내가 말했다. 해괴한 단어들이 난무하여 대략적인 뉘앙스만 알아듣는다고 해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말이 방금 들려왔다.
“죽어서도 무공을 잊지 않는다고요?”
“어허? 새외의 아해들이라서 그런지 사정에 어둡구나.”
내 품안에서 마교의 여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강호인은 강시가 되어서도 무공을 펼친다. 상식 아닌고.”
“그딴 상식은 들어본 적도 없어요!”
세상에. 무공을 쓰는 좀비라니!
만일 코미디물이었다면 한번 웃어버리고 넘기겠지만, 지금 이곳은 코미디물이 아니라 진퉁 무협물의 세계였다. 장난이 아닌 것이다.
“저 아해들은 특히나 본좌의 가르침을 직접 전수 받은 마교의 정예들이다. 본좌의 가르침을 받으면 잠자리에 들었을 때조차 몸이 살기에 반응하게 되지. 후. 시체가 되어서도 저리 경공을 펼치는 모습이 참으로 장하구나.”
“흐허어어업!? 따라잡힌다! 이대로는 따라잡힌다, 문주놈아!”
독사의 등에 업힌 약왕이 비명을 질렀다. 공중으로 솟아오른 무공 좀비들이 사나운 매처럼 하강하였는데, 약왕의 머리카락이 거의 쥐어뜯길 뻔했다.
“더 달려라! 더 빨리 달리지 못하겠냐! 내 만약 물려서 좀비가 되어버리면 당장 네놈부터 물어뜯어버릴 게다!”
“씨팔, 이 노인네를 동료랍시고 끌어들인 건 어디 사는 누구야!?”
독사가 꽥 소리를 질렀다.
“게다가 왜 나는 앞뒤로 노인이고 사왕 너는 둘 다 여자인데!”
“지금 좀비한테 무공 맞아 뒈지게 생겼는데 그게 중요해요!?”
“뒈지게 생겼는데 그밖에 뭐가 중요하냐!”
나를 대신해서 후방을 경계해주고 있던 배후령이 외쳤다.
-좀비야! 좀비다!
이런 시발.
“약점!”
내가 마교의 여인한테 말했다.
“저 강시들 약점 없어요!?”
“대가리를 분쇄하면 움직임을 멈추더구나.”
“그런 거 말고, 조금 더 쉬운 방법이요!”
사실 나는 이 순간 죽음을 각오했다. 평범한 좀비라면 모를까. 공중을 휙휙 날아다니고 무공까지 쓰는 좀비들이 천하에 가득하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랐다. 검성은 물론이고 마녀에다 이단심문관까지 곁들여서 올스타 멤버를 뽑아야만 클리어 각이 보일까 말까 했다.
“음.”
마교의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내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햇빛이 나면 멈춘다.”
“……!”
그랬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것이었다.
눈앞에서 좀비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장면, 그 좀비들이 경공술을 펼치며 날아오는 장면이 너무도 충격적이라 미처 생각지 못했을 뿐.
“이름 모를 낭자! 그리고 약제사님!”
“음.”
“네?”
마교의 여인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고, 약제사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팔에 오러를 집중시켰다.
“죄송하지만 좀 던지겠습니다! 알아서 잘 착지해주세요!”
“음.”
“…네?”
그리고 최대한 멀리 여인과 약제사를 차례대로 던졌다. 올림픽 경기에 출전한 투창 선수처럼, 전력을 다하여서.
여인은 날아갈 적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냥 눈이 쌓인 설원에 폭! 하고 머리부터 떨어졌다. 반면에 약제사는 장대한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그녀가 떨어진 눈밭엔 대(大) 자가 큼직하게 새겨졌다.
“죄송해요!”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과한 다음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자 수백 마리의 좀비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어어어어!
-기익!
-으오오! 크오오오!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13층에서도 좀비들과 싸운 적 있었지만, 하늘에서 모기떼처럼 날아드는 무공 좀비들과는 과연 격이 달랐다. 진지하게 말해서 쫌 많이 무서웠다.
-죽는 거구나!
왠지 몰라도 배후령이 희희낙락했다.
-좀비 새끼가 진짜 좀비한테 죽는 모습을 또 보게 될 줄이야! 아, 좋다! 버킷 리스트가 하나 달성되는 순간이잖아!
저 양반은 귀신이 되어서도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고 앉았나.
“아직,”
설원 한복판에서 나는 좀비의 무리와 마주했고.
“안 죽거든요!”
수호의 성검을 칼집에서 빼 들었다.
코앞까지 당도한 좀비의 이빨을, 이빨에 늘어붙어 그대로 냉동된 누군가의 살점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급히 말했다.
‘반짝아!’
[반짝이가 용사님의 부름에 답합니다.]‘반짝여라!’
파아아아앗!
성좌의 파편. 다섯 자매검 중에서 첫 번째를 차지하는 우상(偶像)의 성검이 빛을 내뿜었다. 설원이 검광(劍光)을 반사하여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작명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반짝이를 반짝이라고 이름 붙인 건 참으로 올바른 선택이었다.
-으어어어!
-그오오오오…….
멈칫.
성검의 빛에 쬐인 좀비들이 허공에서 일제히 멈췄다. 마치 벌레잡이 스프레이에 직격탄을 맞아버린 모기처럼 좀비들은 지상에 떨어졌다. 좀비들이 낙법을 취하지 않았으므로, 설원을 뒤덮은 눈밭에는 벌집마냥 숭숭 구멍이 뚫렸다.
“흐어어억!”
마침 좀비한테 머리끄덩이가 잡혔던 약왕이 신음했다. 좀비는 약왕의 하얀 머리카락을 잡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 살았나? 내가 또 살아버렸나? 아이고오. 마르쿠스 그놈만 아니었어도 탑에는 안 왔을 텐데. 아이고 내 팔자야….”
“모두 무사하시죠?”
나는 경계심을 안 풀었다. 아직이었다. 하늘에서 먹구름이 물러나지 않았고, 여전히 지상은 어두웠다.
수호의 성검이 발하는 불빛만이 유일한 조명.
잠시라도 빛이 꺼지면 저 무시무시한 무공 좀비들이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으으. 네, 얼굴이 좀 아프지만 괜찮아요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사왕님….”
“씨벌, 검성도 그렇고 이 양반도 그렇고! 늙은이들이랑 거리 둔 인생을 살고 싶다, 좀!”
약제사와 독사가 각자의 방식으로 무사함을 알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문주. 제가 좀비들 처치하는 동안에 다른 분들 좀 부탁드릴게요.”
“넌 뭐 하려고?”
“이놈들이 안 움직일 때 얼른 처치해두려고요.”
내가 성검으로 좀비를 겨누었다.
“일일이 뇌를 갈아버려야 하니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어렵지는 않을….”
“잠시 기다리거라. 새외의 아해야.”
마교의 여인이 눈밭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천천히 도복에 묻은 눈송이를 털었다.
“먼저 생면부지인 본좌를 구해준 것에 감사를 표해야겠구나. 허나 자네가 강시를 참하려 한다면 본좌는 말릴 수밖에 없노라.”
“…이유가 뭐죠?”
온갖 상상이 다 들었다.
설마 좀비에게 특이한 저주가 걸려 있어서, 죽이면 그 저주가 옮아오는 것일까? 사실 좀비만큼 바리에이션이 풍부한 괴물도 별로 없다. 세계관에서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잡몹이 되기도 하고, 무시무시한 재앙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교의 여인이 우리한테 해준 말은 완전히 의외였다.
“저것들은 모두 본 마교의 일재들이다.”
“예?”
“본좌의 제자들이고 수하들이란 말이다.”
여인은 진지했다.
“백도(白道) 놈들의 싹을 끊어버리는 대전(休戰)이 눈앞에 당도하였니라. 한명한명의 고수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안그래도 쪽수가 쪼들리는데 여기서 더 정예를 잃을 순 없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우리 일행은 여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전이라니? 천마실록의 세계는 이미 멸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전쟁을 벌일 만한 세력이나 인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도서관장은 우리를 묵시록으로 안내하면서 말한 것이다.
「제군들이 눈을 뜨면, 그곳은 아직 천마실록이 불행한 연재중단을 맞이하기 10일 전의 세계일 것이라오.」
「부디 멋진 결말을 보여주시길 기대하겠소.」
완전한 멸망까지 앞으로 불과 열흘.
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 생존자가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10일이 지나면 전부 죽는다. 마교의 여인도 정파의 노인도 이 운명에서 예외일 순 없다.
그런 미래를 아는지 모르는지 두 명의 무림인은 태연하였다.
“본좌는 저 노친네….”
“무림맹주. 부월선이라고 하네.”
“…저 노친네와 벌써 3년째 대전을 이어나가고 있노라. 정마대전이 선포된 지 오늘로 정확히 989일째로군. 본좌와 노친네는 각자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바, 누구 한 사람이 패배를 인정하기 전까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도다.”
마교의 여인은 진중하게 말했다.
“비록 강시로 전락했다고는 하나, 마교의 무공을 쓴다면 그가 곧 마인이다. 본좌가 보살펴야 하는 수하들이지. 함부로 죽이지 말거라. 죽이려거든 저기 승복 입은 놈들만 골라서….”
“어림없는 소리! 어떻게 긁어모은 명문정파의 정영들인데!”
정파의 노인이 펄쩍 뛰었다.
“약조하지 않았느냐, 천마(天魔) 년아! 강시들에게는 손대지 않고 너와 나 둘이서 정마대전의 끝을 보기로!”
“약조란 본디 깨라고 있는 것이다.”
“이 사악한 년! 그럼 나도 저 마인 강시 놈들의 대가리들을 하나하나 깨부수겠다!”
“이놈, 정파의 수장이란 자가 약조를 깰 셈이냐! 위군자의 본색을 드러냈구나!”
좀비들이 움직이기 직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둘은 당장이라도 생사결을 벌일 듯한 태세였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세계가 멸망했는데 지금 정마대전인지 뭔지를 계속하고 있다는 거예요?”
“순번이 틀렸구나.”
천마라 불린 마교의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대전을 치르는 도중에 천하가 제멋대로 멸망했을 뿐이니라.”
“…….”
즉.
정파의 노인, 무림맹주와 마교의 여인, 천마는 운명을 걸고 싸웠다. 여기까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갑자기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바람에 수하들이 전부 좀비로 변해버린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전쟁을 멈추고, 도망치든가 숨어버리든가 알아서 할 텐데—.
“그렇다고 이미 시작한 승부를 뒤로 미룰 순 없는 법!”
무림인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림맹주와 천마는… 부하들이 죄다 좀비로 전락했음에도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두 사람은 강시로 변해버린 부하를 여전히 자신들의 부하로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좀비 아포칼립스가 벌어진 세계에서 3년째 정마대전(正魔大戰)을 이어온 것이다.
“저 노친네에게서 승리를 얻어낼 때까지 본좌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직 본좌에게는 오백의 강시병이 남았나니. 이들을 이끌고 백도 놈들을 깨부수겠노라.”
“내가 할 소리다. 마두야! 원혼이 되어서도 네년에게 맞서 싸우는 무림의 동량들이 나와 함께한다! 989일 동안 이어진 이 지긋지긋한 전쟁에 종지부를 찍어주마!”
그렇다.
꿈과 희망이 없는 것은 우리 원정대뿐만이 아니었다.
이 세계 자체에 꿈도 희망도 없었다.
6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