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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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천신공엔 본래 아홉 갈래의 검이 있다.”
나의 비무를 본 뒤에 천마는 논평했다.
“네가 선보인 아사유검은 첫 번째 식이다. 알고 있으렷다.”
“예.”
“아사의 식 다음은 갈사의 식이니라.”
갈사(渴死).
“목마름이군요.”
“그렇다. 새외의 아해야. 너는 아사유검을 썩 괜찮게 시연했다. 그러니 수련에 매진하면 좋은 마인이….“
“잠깐만요.”
척.
내가 손을 들었다.
“기다려주십쇼.”
미안하지만 손을 들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지금 눈앞에 가부좌를 틀고 계신 분께서 구렁이 담벼락 넘어가듯 술술 넘어가려 하시는데, 그 담벼락, 내가 보기엔 쯤 높았다.
“…뭐냐.”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죠? [썩 괜찮게]요?”
천마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허어, 이상하네요. 저 꽤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천마님께는 썩 괜찮은 정도에 불과했구나…. 아! 죄송해요. 갑자기 자존심이 사라지고 자신감이 없어지려 해서요. 기가 막 죽어버리는 거 있죠.”
“이놈….”
천마의 입가가 꿈뜰거렸다.
“…오냐, 인정하마. 너는 아사유검을 솜씨 좋게 선보였다. 어디 가서 건방지게 마천신공을 대성했다며 까불지만 말거라.”
“예? 뭐 라고요? [ 솜씨 좋게 ]요?”
“말장난으로 본좌를 희롱할 작정이더냐!”
천마가 말했다.
“본좌가 머리라도 숙여서 너한테 구배지례를 올려야 만족하겠구나. 정말로 정도란 걸 모르는 아해로고! 그냥 네가 스승 하여라! 본좌가 제자 하마.”
오케이. 입질이 왔다.
나는 낚시하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아 그러니까 제가 천마님의 제자로 인정 받았다는 말씀이죠? 맞죠? 외가 제자가 아니라 내가 제자. 진짜 진품 직통 수제자요.”
천마는 이번에도 바로 대답을 못 했다.
1초. 2초.
뜸이 약간 들고 나서야 서서히 입이 열렸다.
“딴소리는 자제하거라. 아해야. 본좌가 이제부터 가르침을 하사할 것이니 집중하려므나.”
음.
‘역시 그런 거구나.’
방금 천마는 내 말을 억지로 무시했다. 억지는 고집에서 나오고, 고집은 진심에서 나온다. 그녀의 진심이 어느 부분에서 망설이는지 나도 알겠다.
‘제자로 삼겠다는 말은 죽어도 안 하시네.’
사제(師弟)의 인연.
이미 천마는 내심 나를 제자로 점 찍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절대로 [너를 본좌의 제자로 받아들이마]라고 소리 내 말하지 않았다.
검제와 티격태격하느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잦기는 했지만.
천마에겐, 즉 강호인들에겐,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그만큼 무거운 것 아닐까.
‘무거운 인연은… 때로 무서운 인연으로 바뀌고.’
그러기에 마교의 여인은 사제지간을 선언하지 않는다.
망설인다.
나라는 인물을. 생전 처음 보았을 뿐 아니라 중원무림 출신도 아닌 아이를. 그런 아이가, 그런 아이를, 정녕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도록 허해야 할 것인지.
조금 더 인생에 희망을 품어도 될지.
마교 교주 천마 소백향은, 갈피를 못 잡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잘 들어라. 아사유검을 그만한 수준으로 펼쳐냈다면, 적어도 본교의 가르침을 귀동냥해서 훔칠 자격은 될 터다. 단……”
비록 겉모습이야 무덤덤하기에 이를 데 없으나.
‘인물창.’
내 눈에 비추는 속마음은 완전 딴판이다.
+
이름: 소백향(舊白香)
호감도: 51
선호 장르: [ 무협 ]
불호 장르: [고전], [신화], [역사], [동화]
선호 캐릭터: [민초], [라이벌]
불호 캐릭터: [억압자], [기만자], [한량]
선호 플롯: [전력을 다하는 승부]
불호 플롯: [도피], [망각], [무의미한 죽음]
심리 상태: ‘제자인가. 본좌도 결심해야 할 때가…. 아, 아니다. 몹쓸 생각이다! 남궁운 그놈과 대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인생이 늘그막까지 와버린 지금 와서 제자라니, 과욕이다! 추한 노욕인 것이다.’
+
그래.
내가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고민해주세요.’
천마의 고민.
그것은 내게 청신호였다.
‘더 깊이 흔들려주십시오.’
바로 내가 그녀한테 갈림길을 제시한 장본인이니까.
가망 없이 무림맹주와 정마대전을 이어나갈 것인가? 아니면 한 명의 제자를 두어, 다음 세대까지 마교의 교리가 이어지도록 조치할 것인가.
과연 [무의미한 죽음]에서 빠져나올 탈출로는 어느 쪽인가.
‘이대로 삶을 놓아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말은 가볍다.
헛되다.
가벼운 말로는 가벼운 사람밖에 책임질 수 없다.
아니, 그것은 아예 책임지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살아주세요.’
얼마나 공허한 말인가.
‘세상이 멸망해버리고 무림에 당신 홀로 남게 되었다 해도, 저는 여전히 당신이 살기를 바랍니다. 살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단어를 쌓아올린다고 그 말에 무게가 실리겠는가.
‘제가, 당신이 조금 더 살아갈 이유가 되기를 바랍니다.’
헛되고 헛된 말.
나는 이 말을 소리내서 말하지 않았다.
천마가 사제의 연을 선언하지 않은 이유도 나와 똑같겠지.
말의 가벼움은 행동의 무거움으로 짓누를 수밖에 없다. 그래야 날아가지 않는다.
아직 천마도, 나도, 하고 싶은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 만큼 노력하지 못했다.
「아직 결심할 때가 아니다.」
라고 천마는 속마음으로 생각했다.
‘아직 결심을 끌어내지 못했어.’
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
“…….”
천마와 내가 마주 보았다.
“새외의 아해야. 집중한 눈빛이 아니구나. 본좌의 말을 잘 듣고 있느냐.”
“예.”
잘 보고 있다.
“당연히 집중하고 있죠. 무슨 말씀이에요.”
“농이 아니라 진담이렷다.”
“그럼요. 옥황상제건 염라대왕이건 누구한테든 맹세하죠.”
우리는 눈길을 주고받았다. 손길과 다르게 눈길이란 겹치면서도 엇갈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눈길은 사람의 마음과 조금은 닮았다.
몇 번이나 엇갈린 끝에 천마가 입을 열었다.
“좋다. 자신이 넘치는 걸 보니 곧장 다음 시험을 치러도 되겠도다.”
천마가 눈을 털고 일어섰다.
그녀는 어디로 훌쩍 떠났다.
“따라오지 말거라. 발이 바쁘다.”
그렇게만 말하고 갔다. 천마는 설원을 딛고 걸었는데, 눈밭에 발자국이 안 남았다. 오직 가녀린 그림자가 빙판에 미끄러질 뿐이었다. 답설무흔(路雪無癌). 이 세계에 떨어지고 첫날에 들은 말을 여인은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붙고 싶다.
배후령이 툭, 말했다.
-한판이라도 좋으니까 승부 뜨고 싶다. 진심.
나는 무심코 옆을 돌아봤다.
‘네?’
-귓구멍에 염 먹었냐. 비무(比武) 한판 조지고 싶다고.
그리고 나는, 배후령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목격했다.
-제길. 제기랄, 제길!
검제(劍帝)는 진심으로 분하게 여기고 있었다.
-알고 있냐, 좀비야! 내가 태어난 무림 세계에선 마교가 겁나 약했다! 그나마 그 마교졸개 놈들이라도 족치는 게 유일한 낙이었어! 꼴에 천마 행세하는 놈은 있었다만, 내가 그놈 똥구멍을 땅구멍에 박아준 순간부터 지마(地魔)로 명패 변경했지! 씨벌! 내가 강호대협이라고 돌아다니는 잡것들 중에 수백은 성씨를 갈아줬는데. 아! 진짜!!
달랐다.
나한테 내기에서 졌을 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 때도 분하다며 몸부림쳤지만… 지금 배후령이 짓는 표정은,
-여기서 태어난 무림맹주 새끼가 존나 부럽다!
훨씬 더 강렬했다.
-나 였으면 말이야, 어? 딱 생사결(生死結)로 한판 뜨고! 아 이 죽음이 댁 죽음이신가 내 죽음이신가 갈라볼까요 해서 짝 갈라보고! 거 다음엔 아무 설봉(雪案)이나 기어 올라가서 탁주 한사발하고! 탕초리적 한 조각 우물우물하면, 카으! 그게 바로 강호를 내려다보는 참맛 인데!
승부욕. 호승심. 투지.
날고기처럼 생생해진 얼굴이었다.
-내가 진짜! 귀신만 아니었어도!
“…….”
나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고민에 빠져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턱을 받치었다.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찼으므로, 손으로 지탱할 필요가 있었다.
-엉? 좀비야. 넌 또 왜 누가 좀비라고 욕하지 않을까 봐 좀비 면상을 하고 있냐. 이거 이놈 요즘 좀비가 아니라 뱁새라 불러주니까 또 삐졌구만. 야, 그냥 좀새라 불러줄까?
“……그거예요.”
-응?
“그거라고요.”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사장님이 전염병 치료약을 만든다. 제가 천마의 정식 제자로 인정받는다. 다 좋아요. 다 좋은데… 이거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싶었거든요. 피날레라 할까? 근데 방금 댁이 마지막 원샷을 날려줬어요.”
-어….
“나이쓰 플레이. 잘하셨어요, 검제 양반.”
내가 씩 웃었다.
왠지 몰라도 날 보고 검제는 뒷걸음질쳤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네가 그딴 표정 지을 때마다 나한테 흉사(凶5E)가 덮치더라고. 운이 안 좋아진다고 할까? 내 체면과 위상에 먹칠이 가해질 일이 벌어져서.
“제가 마음속으로 검제님을 얼마나 존경하는데요. 제 마음 아시죠?”
-고맙다. 이제 나는 네 면상에 토하면 되는 각이냐?
“음.”
내가 뒷짐을 지고 먼 하늘을 보았다.
“우리 사이에 안 갚은 빚이 하나 있었죠.”
-…….
배후령이 멈칫했다.
-…빚? 무슨 빚? 나는 평생 빚을 지고 살아본 적이 없는 인간이야. 에헤이, 이 공자놈이 또 아가리로 주술을 시전하려 드네. 그러지 마라. 어허! 너 그러다 다쳐!
“[19층까지 미는 데 내가 몇 번 죽을지 내기합시다].”
-…….
“우리 검제님은 제가 100번 이하로 죽는다는 데 걸었고요. 저는 99번 이하에 걸었죠.”
-아니….
“맞죠?”
나의 웃음이 좀 더 순해졌다.
-아니이, 그게 벌써 언제적 얘기인데….
“제 기억력에 골병이 든 게 아니라면 이 내기, 분명히 결론이 97번으로 끝났거든요?”
-…….
“제 계산력이 골로 간 게 아니라면 97번은 99번 이하고요. 맞죠?”
-…….
“검제님.”
-너 나한테 자꾸 왜 그르냐….
“부탁 좀 하나 들어줍시다.”
배후령이 울상을 지었다.
-그래, 나쁜놈아. 날 조지든 죽이든 알아서 하거라….
완전한 항복이었다.
2.
천마가 돌아왔다.
설원을 건너갈 때는 혼자였지만 건너올 때는 아니었다. 그녀는 좀비 한 명을 짊어지고 왔다. 장풍 좀비와 마찬가지로 이 좀비도 검은색 도복을 입었다.
“본교에는 혈귀(血鬼)라 하여 정예만 모아둔 부대가 있다. 살수들만 모아서 만든 최고의 실전부대다. 오직 본좌의 명령을 실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아이들이지.”
즉 두 번째 대련 상대였다.
나는 성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저번엔 촉망받던 후기지수더니 이번엔 실전부대의 살수예요? 난이도 팍팍 뛰네요.”
“걱정 말거라. 본좌가 알아서 네 급수에 맞는 아이를 데려왔으니.”
아마 천마는 정말로 [나한테 딱 맞는 상대]를 찾아왔을 것이다. 설원을 뒤져서. 수백 명의 좀비를 일일이 살펴보면서.
마음이 깃든 배려였다.
품이 들어간 정성이었다.
나는 이것을 일종의 칭찬으로 감사히 받아들였다.
“네가 시연해야 할 것은 오늘 아침과 다를 바 없다. 강시병과 싸우되….”
“저의 마음속에는 오직 목마름. 목마름의 고통만이 자리해야 합니다.”
“흠.”
천마가 미소를 지었다.
“옳거니. 목마름 이외의 감정이나 생각이 심상에 자리하는 것을 불허하마!
“좋습니다!”
나는 호쾌하게 돌진했다.
“이번에도 뭔가 보여드리죠….”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존나게 쎄네! 젠장!”
뭔가 보여주긴 했다.
우주에서 제일 빠른 초고속 사망씬을 말이다.
에라이.
“약제사 씨. 약왕 씨. 좀비 바이러스 치료제 연구는 이렇게 진행을 하시고….”
“세상에! 마치 제가 한 연구 같아요! 아니, 제가 한 연구를 꽃단장하고 귀족위를 받은 것처럼 잘 정리해놨달까요. 그, 그것도 마치 백작위쯤 받은 것처럼 막 완전 정장을 한 느낌이에요!”
“뭐야 이건? 사왕인지 뭔지 하는 애송이, 너도 실리콘 밸리 출신이냐? 이거 꼭 내가 정리해놓은 것 같은 방식인데…..”
우선은 매번 해왔던 것처럼 치료제 연구 결과를 갱신하고.
“백귀환생 (百鬼還生)!”
이번 역시 설산에 틀어박혀 폐관수련을 하기로 했다.
아귀와 스켈레톤들을 불러들여서 죽음의 수집을 명한 것까지는 동일. 굶주린 시체가 아니라 목마른 시체를 찾아오라는 게 달라지긴 했어도, 명령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흩어져라. 흩어져서 목마른 시체들을 모아와라.”
“예, 주군이시여. 명을 받들겠나이다.”
다만.
“너희에게 시킬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여기서부터 저번과 달라졌다.
아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키실 일이라 하옵시면….”
“근방에 무공을 쓰는 강시들이 대중 없게 널려 있을 거다.”
이 세계에 떨어지자마자 목격한 ‘시체의 숲’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지난 3년. 천마와 무림맹주는 고독하게 정마대전을 벌였고, 전쟁통에 하나둘씩 시체를 잃어버렸다.
눈보라가 며칠이나 쉬지 않고 휘몰아쳤을 때. 밤이 길어져서 낮이 오지 않았을 때. 그 때 마교와 정파는 조금씩 전력이 누수되어 실종되고 말았다.
지금 내가 말하는 강시란 이 ‘실종자’들.
“그들을 찾아.”
내가 말했다.
“검은 도복을 입은 마인을 찾아. 하얀 도복을 걸친 협객을 찾아. 그것이 백 리가 되었건 삼백 리가 되었건 간에, 스켈레톤들을 풀어서 반드시 찾아내서…. 아니. 아예 지도를 만들어서 강시들이 위치한 곳마다 표시를 새겨라.”
아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목숨들을 구해서 어디에 쓰시려는 것이옵니까, 주군…?”
“멸망한 세상인데 아직까지 전쟁을 벌이는 사람이 둘 있다. 제대로 된 결판을, 제대로 된 결말을 원하는 것이지. 그런데 안타깝지만 내가 보기엔 서글픈 병정놀이에 불과하거든.”
나는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달이 떠 있었다.
“기왕 결판을 보겠다는데 진짜 전쟁을 마련해줘야지.”
“진짜 전쟁, 말인지요?”
“그래.”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꼭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는 산타가 된 기분이었다.
“제대로 된 정마대전(正魔大戰)을 준비할 거야.”
7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