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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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라야, 바라야, 아가바라야……
……마음은 촛불이니 이곳을 태우라……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기도문.
승려들이 아미타불을 외듯, 마교 사람들은 바라야를 읊었다.
……바라야, 바라야, 아가바라야……
……마음은 촛불이니 이곳을 태우라……
아무도 ‘바라야’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소백향도 몰랐다. 소백향을 마교로 데려온 노인도 몰랐다. 모르면서 외었다.
소백향에게 바라야는 민초들의 노래였다. 비명이었다. 비명에는 본래 뜻이 없다. 그러니 민초의 노래에 뜻이 없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않을까?
몰라도 외울 수 있다는 것.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데, 굳이, 많은 걸 알 필요가 없다는 것.
그러기에 사람은 예(禮)를 배워야 예의를 차릴 수 있고, 의(義)를 익혀야 정의를 행할 수 있되, 오직 비명만은 예외여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익히지 못한 민초조차 비명만은 지를 수 있다는 것.
……바라야……
……바라야……
……아가바라야……
비명은, 만국에 공통한 본질이었다.
소백향이 바라본 세상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더는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구나.
노인이 말했다.
-출두(出頭)하여라.
-어디로 가오리까?
소백향이 물었다. 나직한 목소리. 어느덧 그녀는 장성해 있었다.
11살의 어린 아해는 여기에 없었다. 묵빛의 머리카락, 묵빛의 눈동자, 묵빛의 도복. 여인은 한밤의 우물처럼 검었다.
그녀는 하나의 지옥이 되고자 했다.
사람들의 지옥이 되어주기 위해 여인은 그만큼 깊어졌다.
-어디를 가고 싶느냐?
-굶주린 자들이 있는 곳으로.
소백향은 대답했다.
-목마른 자들이 있는 곳, 숨이 막힌 자들이 있는 곳, 추운 자들이 있는 곳, 약에 중독된 자들이 있는 곳, 병에 걸린 자들이 있는 곳, 관아에서 장을 맞은 자들이 있는 곳, 불에 타죽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소백향은 허공을 보았다.
-그곳으로 저는 가고 싶습니다.
-…….
멀리, 멀리.
본당(本堂) 바깥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인들이 절을 올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 그들의 떨림. 바라야, 바라야, 아가바라야……. 그것들이 진동이 되어 나무 마루를 타고 전해졌다.
-허면 백향아.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이 천하가 모조리 너의 갈 곳이다.
소백향. 21세.
무림에 출두하였다.
그 겨울에 강호의 무인 31명과 조정의 관료 47명, 지방의 호족 55명이 목을 잃었다.
2.
“본교의 예법은 특별하다.”
천마는 조용히 사람들을 물렸다. 무림맹주와 독사를 축객했다. 그녀는 나와 단 둘이서 어디론가 향했다.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는 법을 아느냐?”
“아니요. 모릅니다.”
“본교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맞이할 때 아홉 번 절을 올리노라.”
우리가 향한 곳은 동굴이었다. 온천이 서린 동굴. 내게는 이미 집처럼 익숙해진 거처였지만, 천마가 나를 데려간 장소는 익숙치 않았다.
우리 일행에겐 한 번도 허락하지 않은 곳.
동굴의 깊디깊은 심처로 천마는 걸어갔다.
“흠.”
천마가 손을 저었다. 낙낙한 옷소매가 한 차례 펄럭거렸고, 어둠 곳곳에서 촛불이 켜졌다. 무수한 촛불이 동굴의 석순과 종유석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절을 올린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아홉 번의 절을 받아줄지 말지는 전적으로 스승이 정하노라. 스승은 마음에 찰 때까지 제자한테 몇 번이든 구배지례를 요구할 수 있지.”
천마가 싱긋 웃었다.
“요는 본좌의 마음에 달렸구나.”
“음…. 기준이 따로 있는 건가요?”
“있다.”
통로의 끝.
“본디 예의란 겉모습보다 마음이 더 중한 법. 아해야. 예절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는 까닭은, 단지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고 가벼운 탓이니라.”
그곳엔 거대한 서고(書庫)가 있었다.
천마가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발걸음이 가로지르는 양옆으로 촛불들이 켜졌다. 촛불이 하나씩 켜질수록 서고의 진면모가 밝혀졌다. 드높은 동굴 천장. 그 천장까지 닿도록 서책과 죽간이 켠켠이 쌓여 있었다.
“마음의 가벼움을 잡기란 쉽지 않다.”
천마가 걸었다.
그녀의 발목에 촛불이 비추었다.
“그러기에 사람은 신성한 시절과 성스러운 곳을 고르노라. 때와 장소에 의지하노라. 하늘과 땅에 기대어서 가벼운 마음을 무겁게 잡으려는 것이다.”
“천마님. 여긴…?”
“본교의 무공비고(武功秘庫)다.”
천마는 말했다.
“그리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공비고이기도 하다. 본좌는 이곳을 천무관(天武館)이라 부르지.”
배후령이 입을 벌렸다.
-개쩌는군. 완전 보물창고잖아! 좀비야, 난 무공서들 좀 보고 있으마! 나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일 해라. 웬만하면 내가 다 읽을 때까지 시간 좀 끌어봐!
무공에 미친 배후령이 호다닥 달려갔다.
-아싸! 이 세계 무림의 절기들은 이제 다 내 꺼다! 깨달음이란 깨달음은 다 싹쓸이해주마! 크하하하!
자기 서재에서 귀신 한 마리가 날뛰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천마는 담담했다.
“본좌는 스물한 살 때 무림에 출두했다. 본좌가 무림에 출두하면서 제일 먼저 품었던 생각이 무엇이었을지 짐작하느뇨?”
“어. 재수없는 정파의 백도놈들 대가리를 전부 부숴버리겠다 뭐 그런 건가요?”
“그것은 세 번째로 한 생각이구나.”
“마교가 제일 잘났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마…?”
“그것은 두 번째로 한 생각이로고.”
천마가 왼눈을 찡긋했다.
“본좌는 말이니라. 어릴 때부터 무림(武林)이라는 말이 정말 싫었다.”
“네?”
“무림이란 무를 숭상하는 강호를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강호에 무인만 있겠느냐? 뱃사공이 있고 농사꾼이 있다. 장사치가 살고 창기가 산다. 하나의 숲을 이루는 나무가 무수하다. 나무마다 이름이 다르고 결이 다르거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그곳을 하필이면 무의 숲이라 이름하였다.”
마음에 안들더구나.
천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본좌는 그들에게서 무(武)를 빼앗기로 결심했다.”
“무를 빼앗았다는 건…?”
“그놈들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무공서들을 모조리 강탈했지!”
천마가 헤살하게 웃었다.
장난기 물씬 풍기는 미소였다.
“후후. 곤륜의 도사놈들이 짓던 낯짝이 아직도 선명하구나. 지들 모가지를 비틀어 쪼갤지언정 운룡(雲龍)의 묘리가 담긴 서책만은 제발 놔두어 달라고 사정했지! 본좌가 어떤 위인인고. 내 기꺼이 도사들을 땅바닥에 묻어버리고 머리만 튀어나오게 했다. 그리고 놈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공서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튀었노라!”
와오.
우리 스승님 한성깔 하시네.
“그러길 수십 년이었다. 이제는 이곳이 곤륜이고 무당이다. 사천당문이다. 제갈세가다. 모산파다. 천하의 모든 무가 이곳에서 숲을 이루노니 마땅히 무림이라 칭할 만하다. 본좌는….”
천마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서 너의 절을 받고 싶구나.”
“올리겠느냐.”
“예.”
“겉모습은 따지지 않겠다. 새외의 아해야. 네 몸이 따르는 대로 절하려므나.”
그리 했다.
신발을 벗어 다소곳이 놓았다. 무릎을 꿇었다. 이마로 바닥을 짚으려는 순간. 천마의 목소리가 흘렀다.
“모두 아홉 번 절을 올리되, 각각의 절에 다른 마음을 담거라.”
각각의 마음.
“첫 절에는 굶주림의 마음을 담는 것이다.”
“알겠느냐?”
그런가.
“예. 알겠어요.”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란 정녕 막중했다.
마교에서 이 의식은 단순히 아홉 번 절을 올리는 게 아니었다.
구배지례.
그것이 곧 마천신공과 다름이 없었다.
“후우….”
천천히. 심호흡으로 숨을 삼키었다.
내 마음의 정중앙에 그림을 그렸다.
곡괭이 휘두르는 농부를. 강변을. 진흙을.
「굶주림이란 해를 기다리는 아이들이다.」
절을 올렸다.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일배(一拜)를 받아준 것이다. 나의 굶주림에는 거짓이 없어서 하나의 예절로 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마교의 경지는 크게 넷으로 나뉜다.”
이제 곧 제자가 될 나한테, 천마는 오래된 가르침을 내렸다.
“첫 번째 경지는 입마(入魔)이니라. 입마란 자신의 고통을 말할 줄 아는 자다. 본교에 입교한 마인은 말이 아니라 칼로 말한다. 하므로, 입마의 경지란 자신의 고통을 칼로 말할 줄 아는 자를 이른다.”
나는 다시 절을 올렸다.
굶주림 다음은 목마름이었기에, 내 마음에 바닷물을 그렸다.
“두 번째 경지는 극마(極魔)다. 극마란 다른 이의 고통을 말할 줄 아는 자다. 하므로, 극마의 경지란 능히 타인의 고통을 칼로 살풀이 할 줄 아는 자를 가리킨다.”
천마는 나의 이배(二拜) 또한 묵묵히 받아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익사한 아비를 그리며 다시금 절했다.
“세 번째 경지는 탈마(脫魔)다.”
이번에도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삼배(三拜)를 기꺼이 받아준 것이다.
“탈마란 모든 이의 고통을 말할 줄 아는 자다. 길을 거닐며 사람을 만나는 족족 그 사람이 무엇으로 고통스러워하는지, 탈마는 능히 느낄 줄 알아야 하노라.”
나는 사배(四拜)를 올렸다.
“이 경지에 오른 자는 극히 드물다! 본교의 역사에서도 탈마는 다섯 손가락을 못 다 채우니. 본좌가 바로 탈마에 자리하노라.”
이번에도 천마는 내 절을 받아주었다.
“마지막으로 신마(神魔)의 경지가 있다. 신마란 만인의 고통뿐만 아니라 만물의 고통을 말할 줄 아는 자다. 가로되 삼라만상의 고통을 말할 수 있는 것이렷다. 그러나 이는 증명되지 않은 경지로다! 그저 그러한 경지가 있으려니 넘겨 짚을 뿐. 실제로 신마에 이른 자는 없다.”
내가 오배(五拜)를 올리려던 때였다.
“멈추어라.”
“다시 올리거라.”
“…….”
마천신공의 다섯 번째 검로는 독사(毒死)의 식. 약에 중독되어 죽어가는 자들의 손짓이다. 아직 나는 다섯 번째 검로를 익히지 않았다. 천마가 나직이 말했다.
“다시 올리라 말하였다.”
절을 올렸다.
“다시 올리거라.”
절을 올렸다.
“다시 올리거라.”
다시. 다시. 다시. 다시.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허리에 식은땀이 찼다.
천마의 얼굴은 변함 없이 담담하였다.
“다시 올리거라.”
독사(毒死)한 자의 마음을 어설프게 라도 담는 데 336번.
병사(病死)한 자를 마음속에 그려내는 데, 189번.
장사(杖死)한 자를 그려내서 몸으로 표현하는 데, 510번의 절이 필요했다.
땀이 흘렀다.
나는 묵묵히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혔다.
“……올곧은 아해구나.”
천마는 미소를 지었다.
“태생이 고와서 올곧은 아이가 있다. 태생이 흉하나 제 의지로 올곧아진 아이가 있다. 새외의 아해야, 너는 분명 후자로구나. 어떤 삶을 살아서 이리도 고와지려는고.”
조금은 슬픈 미소였다.
“어찌 삶을 살려고 이리 고와지는 것이냐……”
촛불이 흔들렸다.
불빛이 흔들리니 그림자가 흔들렸다.
흔들리면서, 천마의 그림자와 내 그림자가 겹쳤다.
“태양이 삶을 뜻한다면 그늘은 아픔이다.”
야윈 그림자가 입술을 열었다.
“삶을 사는 인간의 윤곽은 저마다 따로이지만, 아픔은 겹쳐지고 또 겹쳐진다. 그리하여 인간은 살아있음으로 해서 하나인 것이 아니라, 다만 아픔으로 인하여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의 교리(敎理)였다.
“네가 누군가와 아픔을 주고받겠다고 한다면, 오직 그 사람과 일생을 함께하겠다는 뜻이리라. 그러므로 만인에게 상처를 입는 자는 오로지 만인과 함께하고 싶은 게다. 아해야.”
이 세상에 전해질 입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교리.
“공자야.”
그 입이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에게 상처를 줄 것인지만 결정하는 게 아니요, 누구에게 상처를 입을지 또한 결정할 수 있다. 네가 구하고자 하는 민초는 결코 선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구한 무리는 결코 고결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사랑한 자는, 결코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자가 속삭였다.
그림자의 속삭임은 촛불의 온도를 품었다.
“그럼에도 만일 네가 만인에게 상처를 받고자 한다면. 기꺼이 그들에게 맨살을 내어준다면. 그들이 너를 손톱으로 할퀴었을 때는, 그저 너를 너무 꽉 껴안으려다 할퀸 것이다, 여기려므나.”
“삶은 고통이다. 그러나 오직 인간의 고통인 것이다. 바라야, 바라야. 아가바라야. 너의 마음은 뜻불이니. 태워서 다른 이의 그늘을 보아라.”
촛농이 미끄러졌다.
“여덟 번째 마천은 소사(燒死)다.”
흘러내렸다.
“공자야. 불에 타죽는 마음으로 절을 올리거라.”
나는.
「하지만 형씨는 내가 염제라는 걸 알잖아.」
「그럼 뒈져주셔야지.」
「잘 가라.」
나는 절을 올렸다.
“…….”
꾸욱.
그림자가 입을 다물었다.
독사에 336번. 병사에 189번. 장사에 510번.
줄곧 1035번 동안 동굴을 울린 ‘다시 올리거라’라는 말이, 이번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의 소사는 단 1번으로 족한 듯 싶었다.
“……그러했구나.”
촛농이 흐른 자국.
자국이 진 자리에 목소리가 스몄다.
“마천의 마지막 검은…… 정해져 있지 않다. 공식(空式)이다. 대대로 교주는 마지막 검에 자기 자신만의 죽음을 새기노라. 그래서 마천신공의 아홉 번째 검로는, 펼치는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다르다.”
자신의 죽음이 들어갈 자리.
“너의 죽음으로 구배(九拜)를 올리거라.”
“…….”
나는.
4090번을 자살하는 동안, 나는.
목이 아팠다.
단검으로 찌르는 목이 아팠다. 손이 떨렸다. 팔이 흔들렸다. 떨리고 흔들리는 것 때문에 칼날이 비뚜루 빗나갈까 봐, 두려웠다. 잘못 찔러서 고통이 길어지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단검의 칼자루에 청테이프를 감았다.
칼자루에 감은 청테이프를 내 오른손과 왼손에도 감았다. 고정시켰다. 그래야 떨지 않을 것 같았다. 회귀해야 할 날이 4050일에 이르렀다. 하지만 나는 4090번을 죽었다. 죽어야만 했다. 도중에 포기할 뻔했으므로. 며칠 간 도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 있었다.
그걸 용서하고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다시 청테이프를 감았다. 죽음이 느릴수록 결심이 흐려졌고, 결단은 느려졌다. 결단이 늘어질수록 내가 죽어야 할 날이 더 늘어날 뿐. 잡다한 생각을 끊었다. 망설임을 무시했다.
필사적으로 살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죽었다.
자살自殺.
나는 그것을 마지막 그림으로 그려서, 천마에게, 절을 올렸다.
“…….”
그림자가 흔들렸다.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라고. 나는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천마는 내 어깨를 안고 있었다.
“공자야,”
동굴에 두 개의 그림자는 겹쳐 있었다.
“나의 제자야.”
“……예.”
“너는 나의 제자다.”
“예.”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어디에 가더라도, 어디에 있어도, 너는 천마 소백향의 제자다. 너의 심장에 우리의 교리가 있다. 강호가 멸하고 천하가 저물어도, 너의 심장이 멈추지 않는 이상, 마천(魔天)은 이어질 것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예, 스승님.”
목이 아팠다.
아픈 날들이었다.
그것을 나는 이제 알았다.
7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