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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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무문의 본부를 22층으로 옮길 거다.”
독사가 툭 말했다.
우리 일행이 [천마실록]을 공략하고 며칠이 흐른 시점이었다.
“예?”
“이사 가기로 했어. 도장을 통째로 옮기는 거지. 네가 마교의 적통을 이어받은 것처럼 나도 무림맹주 스승님의 제자가 됐잖냐? 천무문은 내 길드니까. 나 따라서 무림맹 산하로 들어가는 게 맞지.”
독사는 덤덤히 소설책을 읽었다.
저번에 봤다시피 독사는 이래 봬도 애독가였다. 취미가 매우 편향되긴 했어도, 그런 해괴망측한 취향을 만족시키는 책들이 이 곳에는 넘쳤다.
독사는 안경을 낀 채(도수 없는 안경, 그냥 멋 부리는 용도, 시가 9800원) 마법 커버(어떤 책에든 씌울 수 있으며, 자유자재로 제목과 표지 디자인을 바꿀 수 있는 영웅 등급 아이템, 시가 2000골드)를 씌운 책을 들고 페이지를 넘겼다.
“내 스승도 반쯤 폐인이 됐었다만 사지는 멀쩡하고. 약제사 걔 말이 어떻게든 운신은 가능하게 만들었단다. 그러니 태상호법(太上護法)으로 모실 작정이다.”
“무림맹주를 태상호법으로….”
“어. 천마가 죽어서 상심이 크시더라. 보고 있으면 내가 다 우울해져.”
독사가 툭하니 말했 다.
호법(護法)이란 문파의 수호자. 말 그대로 법통을 지켜주는 자를 뜻한다. 그중에서 태상호법이면 으뜸이다. 독사는 사실상 무림맹주를 가장 큰 어르신으로 모시려는 것이다.
“그럴 때는 차라리 정신없이 움직이는 게 낫지. 후학들 가르치면서 바쁘게 말야. 우리 길드원들 전력 상승에도 보탬이 될 것이고.”
나는 약간 놀랐다. 정말 배려심 깊은 조치이지 않은가?
독사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책 페이지 넘기는 손이 멈칫했다.
“…어이, 사왕. 왜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냐?”
“아뇨. 5대 길드 수장은 확실히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감탄했어요.”
상상을 초월하는 오타쿠이면서 왜 이렇게 부하들한테 인망이 깊은가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자기 사람을 확실히 챙겨주는 것이다.
“그, 그래?”
독사가 얼굴을 붉히며 코를 긁었다.
“크음. 흠흠. 차, 착각하진 말라구! 그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까. 당연한 일을 했다고 칭찬받으면 세상이 너무 쓸쓸해지잖냐. 후우, 고작 나 하나 때문에 세상이 쓸쓸해지면 안 되지.”
“기분 나빠…….”
“어?”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아무튼 독사의 얘기를 듣고 고민에 잠겼다.
자기 사람을 잘 챙겨주는 것. 그것은 나도 천마실록에 들어서기 전부터 생각해오던 문제였다.
나도 랭킹 3위의 헌터에 이르렀다. 단순히 랭킹이 높고 무술 좀 할 줄 안다고 해서 그걸로 끝나는 것일까? 인망. 덕망. 그런 마음 씀씀이도 필요한 타이밍 아닌가.
어디 보자.
여기서 ‘나의 사람’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인물이….
-아, 비무 한판 때리고 싶다. 존나 비무 한판 때리고 싶다. 압도적이고 악마적인 비무. 목숨을 걸고 벌이는 비무가 나는 고프다. 좀비야, 다음 묵시록도 무협 가자. 이번엔 마교 말고 사파(邪派)가 득세한 무림으로 떠나자! 사파 고수 가즈아아아!!
음.
아니다.
이 양반은 진짜 아니야… .
“공자여! 본좌가 특별히 배려하여 그대의 손가락과 발가락에 맞춤한 깎이들을 만들어 왔소! 이제 본좌의 깍똑깍똑 솜씨를 맛보면 다시는 그대 스스로 손톱과 발톱을 정리하지 못하게 될 것이오! 3분만! 아니, 2분만! 제발 120초만 본좌한테 그대의 손발을 맡겨주시오!”
이 별탱이도 아니다.
더욱 아니었다.
[반짝이는 오늘도 노래합니다. 용사님의 찬란한 위업을. 아이김 제국의 성루에서 늠름하게 사자후를 터트린 용사님의 자태를. 강호에서 처절한 만큼이나 아름다웠던 용사님의 분투를. 아, 반짝이는 오늘도 용사님의 존안을 뵈어 행복합니다. 천세. 만세. 십만세.]“…….”
어?
혹시 내 주위엔 정상인이…… 없어?
없는 거냐?
실화냐?
이상하다. 난 정상인이다. 정상적으로 살아가려 노력하는 모범생이다. 그런데 왜 내 주변에는 정신 나간 귀신, 미친 성좌, 얼빠진 검밖에 없을까?
잘 생각해보면 세 명 전부 ‘인간’조차 아니었다. 미쳤구나. 이게 내 운명일까? 만일 이게 내 운명이라면 좀 개같은 운명 아닌가? 혹시 신은 개인가? 이런 시베리아 허스키 같은….
“아핫, 사왕!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 겁니까?”
“이단심문관 씨. 당신이 13층 가서 아이김 세계 신관들이랑 협상 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요. 뉴비 헌터들 거기서 퀘스트 받고 그러면 좀 좋을 것 아니에요.”
“오! 마침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두에게 보탬이 될 법한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역시 사왕과 저는 통하는군요! 다녀오겠습니다!”
금발 코기베어 같은 양반을 쫓아보내고 나니 더더욱 내 인복에 대해 자신이 없어졌다.
“저어. 사, 사왕님.”
절망한 내 눈앞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좀비 바이러스 치료제를 양산화하는 데 성공했어요. 들어가는 약재도 이만하면 흔하게 구할 수 있구. 미, 미리 예방주사 맞으면 22층을 돌아다녀도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이 양반이다!
“사장님.”
“네, 네에. 사왕님….”
“이사할 생각 없으세요?”
약제사와 약왕 대결이 이루어진 직후에 생각해두었던 계획을 입에 담자, 약제사가 눈을 깜빡거렸다.
“네?”
“지금 가게는 너무 좁잖아요. 이번 스테이지 클리어하면서 사장님 이름값이 더 올라갔는데, 확장하셔야죠. 주문 폭주할 건데 지금 가게에서 물량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아. 그. 가게 확장은 저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1층 부동산 값이라는 게…. 아시겠지만 워낙에 대출을 많이 받아야 해서…. 백작님이 자기가 다 대주겠다고 하시면서 무슨 계약서를 보여주긴 하셨는데.”
“아니 그거 절대 사인하지 마시고요.”
이 고양이가 어디서 남의 생선에 손 올리고 난리야.
“부동산. 그까짓 거 제가 다 드리겠습니다.”
나는 통 크게 질렀다.
“더불어 이사 비용이랑 인테리어 비용. 전부 해결해드릴 테니까 사장님은 가볍게 몸만 챙겨 오세요.”
약제사는 입을 벌렸다.
“에. 어. 지, 진짜요…?”
“네. 20층이 제 소유지인 거 아시죠? 목 좋은 자리로 마련해드릴게요. 몸만 챙겨 오세요.”
약제사가 입을 뻐끔거렸다. 내 제안이 안 믿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땅 놀려서 뭐해.’
훗날 연금성주가 될 동료한테 투자한다고 생각하면 아깝지 않았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대신 제가 부탁드리는 약이나 포션은 조금 우선해서 만들어주세요. 괜찮죠?”
“다, 당연하지요! 이미 그렇게 해드리고 있고… 으으. 어, 어떡하지요? 사왕님한테 받은 게 너무 많아져요….”
약제사의 입꼬리가 우르르 떨렸다. 이러니 저러니 말해도 좋은 건 좋은 것. 약제사는 당황하면서도 기쁜 기색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양손을 꽉 오므린 모습이 꼭 ‘아싸! 아자자!’ 하고 속으로 외치는 듯했다.
내 마음도 흐뭇해졌다.
‘과연. 이게 사람을 챙겨주는 보람인가.’
그 때.
“으흠. 흠! 크흐흠. 어흠, 크흡!”
“…….”
“어허. 꼬맹아. 뭐 잊은 거 없더냐?”
약왕이 어느새 서 있었다. 등 뒤에 다가올 때까지 전혀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이 어르신, 설마 나 모르는 사이에 무림에서 경신술을 배운 건가…. 엄청난 경지로군.
“나도 늘그막에 땅 좀 더 있으면 좋겠는데….”
힐끔.
“아이고, 요즘 내 가게가 너무 오래되어서 냄새가 퀴퀴해. 습기도 자주 차고 말야. 허리 건강에 아주 나빠! 3층이라서 매일 올라가고 내려가는 데 무릎이 삐끽거리는데….”
힐끔.
“어디 참한 젊은이가 공기 좋은 곳에 대충 10만평쯤 떡하니 내주면 참 좋겠는데….”
“미안하네. 내 친구가 실례를 저질렀구만.”
검성이 다가와서 약왕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끌고 갔다.
끌려가면서도 약왕은 목청을 세워서 꽥꽥 소리 질렀다.
“아니! 친구가 비즈니스 영업을 하는데 도와주진 못할망정 방해하는 건 어느 나라 심보냐! 북유럽에서 그렇게 가르쳤누! 마르쿠스, 이 노옴! 명문 재벌가 출신이면서 상도덕은 거지만도 못하구나!”
“친구. 안 그래도 늙어서 서운한데 제발 추해지지만 맙세…. 거 돈도 많이 벌면서.”
“적자야 적자! 요즘 주문이 뚝 끊겼다구! 약제사! 거기 약제사 꼬맹아! 지난번 승부는 제가 야료를 벌였습니다 사실 저는 숀 맥칼리스터 님의 빅토리 로드를 가로막을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한 마디만 해라! 됐으니까 해주라 좀!”
대도서관에 있는 헌터들이 약왕을 쳐다봤다. 공동 연구와 협동 수술을 거치면서 약왕을 어르신이라 부를 만큼 새로 보았던 약제사는 다시금 물벼룩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우와…. 소리를 내면서 그를 보았다.
조용히 소설책을 읽고 있던 독사가 툴툴거렸다.
“아니, 씨, 왜 내가 보는 소설은 다 히로인이 죽어? 이게 요즘 유행인가?”
역시 정상인이 없는 집단이다.
2.
약제사의 새 약집을 20층에 열어주는 것은 무리없이 진행되었다. 공사 자재는 복권으로 받았던 골드로 충분히 충당할 수 있었다. 공사 인력에 대해서도 문제가 없었다.
“이보게 사왕. 공사 자재 값을 깎아줄 수 있다니까? 그 뿐이겠냐고. 인력도 충분히 모집해줄 수 있네. 그냥 약제사랑 같이 이 계약서에 사인 한 줄만 그어주면……”
“아, 됐다구요!”
노트북 위의 고양이처럼 자꾸만 얼쩡거리는 백작을 떨쳐내고서, 나는 아귀를 돌아보았다.
“잘 되가고 있어?”
“예, 주군. 공사 진척은 순조롭사옵니다.”
노란색 안전모와 녹색 완장, 분홍색 호루라기를 입에 문 아귀가 공사를 지휘했다. 공사에 쓰일 인력은 백귀환생으로 불러낼 수 있는 스켈레톤들이 대신했다.
“이런 씨발! 제기랄! 야! 이 거지 발싸개 같은 새끼야! 대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냐! 왜 내가 뼈다귀들 사이에 끼어서 돌이나 날라야 하는 거냐고! 말 좀 해보라고 이 새끼들아!!”
입이 유난히 걸걸한 포니테일의 미청년이 하나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지만, 그렇게 노가다 인력 절대다수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스켈레톤들인 이상 공사 진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문제없이 공사가 진행되는 속에서, 나와 약제사, 천무문주는 협약을 한 가지 맺어두었다.
“자, 대충 이러면 되겠네요.”
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22층에는 아직 강시들이 많습니다. 몹들이 많다는 거죠. 그리고 곳곳에 폐허가 된 도관들이 잔뜩 있습니다. 던전들도 많다는 거죠.”
“앙. 그러니까 거기에 우리 천무문이 거점을 딱 잡고……”
“그…… 22층에 가고 싶어하는 헌터분들은, 그 전에 20층…… 제 새 약국에서 예방 접종 맞고 간다…… 는 거지요?”
“바로 그거죠. 그 과정에서 수수료 좀 받고…… 물론 상식적인 선에서.”
20층의 주인인 나, 20층에 새 둥지를 트는 약제사, 22층에 본부를 이전하는 천무문 모두가 득을 보는 계획이었다.
‘참, 내가 부동산 수수료 받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실로 흐뭇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약집이 오픈하자 그 계획에 문제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구체적으로는 20층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약신 님!”
“약제사왕 님!”
“약황 님!”
“약성지존천무고제 님이시여! 제게 약 좀 팔아주세요!”
20층까지는 이명이 없이도 왕래가 가능하다. 따라서 22층에 가고자 예방 접종을 맞으려는 헌터들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많은 헌터들이 20층을 향해 쇄도해왔다.
좀비 바이러스 백신을 놓기 위해서는 다소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그런 와중에 일반 약품도 제조하자니 계속해서 동선이 꼬였다. 처음에는 어떻게 자기 선에서 대응해보려던 약제사가 비명을 질렀다.
“사왕 님, 이대로는 안 되요!”
결국 22층 공략조 중 마지막 일원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독사가 약왕에게 어깨 동무를 하고는 말했다.
“약왕. 당신 사업 요즘 재미없지? 22층 천무문 본부에 좋은 자리 내줄게. 와서 전속 의원 노릇 좀 해볼래?”
“어허, 천무문주! 이 숀 맥칼리스터를 뭘로 보고!”
그렇게 큰 소리를 치긴 했지만 실제로 약왕의 사업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약왕이 경영하는 약집의 메리트는 고급 약품들을 취급한다는 것이었는데, 초 상위호환인 약제사가 나타난 이상 그것은 어정쩡한 고급화 전략으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모두가 알았고, 약왕도 사실 알았다. 결국 몇 차례 촉구를 받자 약왕은 끙 소리를 냈다.
“알겠네. 당분간 22층에서 주사나 놔주고 급환이나 봐주면서 수수료 좀 챙겨먹지.”
“응, 부탁이야. ……스승님을 전속으로 돌봐줄 주치의도 필요하던 참이었고.”
“흥. 뭐 그 양반이 마르쿠스 놈보다야 말이 통하기야 했지. 알았어. 나도 적적하던 참이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도 공략은 계속됐다.
스테이지를 깨기 위해 뛰어드는 헌터는 우리 말고도 많으니까.
+
21층: 만상의 대도서관
22층: 천마실록 (장르: 무협, 퓨전)
23층: 우주 철기사 연대기 (장르: SF)
24층: 여명산장 일기 (장르: 추리, 역사)
+
“훌륭해. 정말로, 정말, 훌륭해.”
마녀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어느덧 그녀는 헌터들을 지휘하면서 어떤 묵시록을 공략할지, 공략할 때 인원은 어떻게 꾸릴 것인지, 세심하게 결정하고 있었다.
“사왕. 당신이 [천마실록]을 멋지게 공략해준 영향이 커. 다른 헌터들도 당신한테 질 수 없다면서 의욕을 활활 불태우고 있거든. 평소엔 내가 하는 말을 전부 귓등으로 흘려들은 사람들이! 아아, 옛날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마녀는 정다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황금 거위를 보는 시선이라고 할까? 이제는 이 탑이 세워진 것도 전부 내 덕분이라고 말할 기세였다.
“이 기세대로 가면 다음 달이 오기 전에 30층까지 뚫을 수 있겠는걸.”
안타깝지만 마녀의 예언은 빗나갔다.
천마실록이 클리어된 지 2주째 되던 날.
[금일, 25층 스테이지 공략에 실패했습니다.]마녀를 비롯한 수백 명의 헌터가 멍하게 허공을 올려봤다.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알립니다.] [금일, 25층 스테이지 공략에 실패했습니다.]“뭐, 뭐……”
마녀가 당혹해했다. 검정으로 아롱진 눈동자에 경악이 스몄다.
“최고의 공략조를 짜서 보냈는데…… 실패야……?”
대도서관의 허공에는 홀로그램이 떠 있었다. 스크린을 통해서 공략 실황이 중계되는 것이다. 홀로그램 스크린 속에서, 무수한 악마들이 낄낄 웃으면서 인간들을 학살했다.
학살당하는 인간 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랭킹 4위의 헌터. 백작(伯爵).
랭킹 9위의 헌터. 성기사(聖驗士).
한 명은 바빌론의 금맥을 다루는 헌터였고, 한 명은 인맥을 다루는 헌터였다. 경제와 치안의 담당자. 마녀가 경악하면서 중얼거린 것처럼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최강의 카드패였다.
그러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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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르므윈 학원 이야기]장르: 로맨스, 판타지
난이도: D급
제한 인원: 2명~5명
※현재 연재가 중단되어 있습니다.
소개: 소르므윈은 유서 깊은 마법 학원입니다. 우정과 경쟁, 사랑과 질투가 오가는, 평범한 학원이지요. 이 묵시록도 평범한 학원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학원 지하에 세계멸망급의 아티팩트가 봉인되어 있지만 않았다면 말입니다!
연중 사유: 악녀 영애가 약혼자(황태자)를 2회차 환생한 여학생한테 빼앗겨버림. 빡 돌아서 아티팩트의 봉인을 풀어버리자 대악마가 해방되어 세계를 멸망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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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난이도가 D급에 불과한 묵시록.
‘마법이 발달했고 미스릴 같은 광석이 풍부하다’라는 이유로 채택된 세계였다.
“어허. 안타깝구료.”
망연자실해진 헌터들을 도서관장이 내려다봤다.
“그러나 엎어진 물은 엎어진 물! 쏟아진 것을 다시 담을 수 있다면 모르겠소만, 이미 실패한 공략을 본좌가 봐주기란 불가하오. 제군. 본좌의 입장을 이해해주시소.”
도서관장은 눈웃음 짓고 있었다.
달리 말해, 쏟아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있는 능력자가 있다면—논외로 인정해준다는 얘기였다.
도서관장이 가리킨 논외가 누구일지는 뻔했다.
“…….”
나는 도서관에 마련된 화장실로 향했다. 천마실록에 들어가기 전에도 한 번, 이곳에 들렸다. 세면대 유리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남자가 비추고 있었다.
“젠장. 로맨스 소설은 읽어본 적도 없는데.”
-뭐, 무협지도 읽은 적 없는데 잘만 해결했잖아. 문제없을걸?
“그거야 그렇지만요….”
나는 한숨을 쉬면서 단검을 쥐었다.
“백작이랑 성기사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고. 다른 사람 보낸다고 클리어될 것 같지도 않고. 역시 제가 직접 도전해야겠어요.”
포기하고 다른 묵시록을 공략하면 되지 않느냐, 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야기가 그리 단순하지만 않다.
저 묵시록을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반짝이가 용사님의 결단을 응원합니다.]바로 성검의 파편이 저곳에도 숨어 있으니까.
“……오케이.”
나는 단검의 칼자루를 만지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한 판 뛰어보죠!”
그리고 공략조가 정해지기 전의 날까지 회귀했다.
내 다음 스테이지가 [로맨스]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8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