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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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런 막장이 다 있냐……”
내가 중얼거렸다. 돌겠네.
낡은 창고. 큼직한 쇠창살로 달빛이 비치는 이곳에서, 이단심문관은 방긋방긋 웃었다. 감옥에 갇힌 것과 다름없는 상황치고는 심각하게 얼굴이 해맑았다.
“아아, 어릴 적에 여장을 당한 적은 많았습니다만. 정말로 여자 영애의 배역을 받아버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것도 인생의 경험이라는 것이군요!”
“당신의 그 무한긍정에너지를 조금만 얻어가고 싶네요….”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사왕! 긍정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이 사람, 웃지 않을 때가 있기는 한가?
눈앞에서 운석이 떨어져도 ‘아앗, 큰일입니다! 세계가 멸망해버리는군요! 어쩔 수 없지요.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고 웃어버릴 거 같다.
“뭐가 그렇게 긍정적인데요?”
“바로 이런 점입니다!”
이단심문관은 양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서 수인(手印)을 맺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신성 술식, 변신(變神).”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서 빛이 흘렀다. 이단심문관의 전매특허, 신성 술식이었다. 변신이라면 뭔가 변화시키는 술식일 텐데… 일단 겉모습만 보기엔 달라진 게 없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이 입술을 열자마자 깨달았다. 무엇이 변신했다는 건지 말이다.
“어떻습니까?”
일순간이지만 소름이 돋았다.
“이젠 조금 영애답습니까?”
“목소리가……”
“네! 성대의 구조를 살짝 바꾸어 봤습니다.”
싱긋. 이단심문관이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제 목소리는 중성적이라는 얘기를 듣습니다. 조금만 다듬어도 적당해질 겁니다. 아핫, 정작 저 자신은 제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들을 수 없습니다만! 어떻습니까.”
“굉장한데요…?”
솔직히 감탄이 나왔다.
“기품이 풍기는 귀족 같아요. 어, 뭐. 입만 다물고 있으면요.”
“감사합니다!”
“음.”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예상치 못하게 [주인공 영애 & 집사]의 역할로 빙의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과 나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이단심문관에겐 신성 술식이 있고….
나에겐 회귀 스킬이 있으니까.
‘오케이.’
얼마든지 도전해볼 만하다.
“…….”
이단심문관이 빼꼼,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쳐다봤다.
“조금 안색이 편해졌군요.”
“예?”
“천마실록에서 귀환한 이래 얼굴색이 쭉 어두웠습니다. 사왕. 묵시록을 공략하면서 스트레스가 상당히 쌓인 것입니다.”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뭐, 소중한 사부를 잃었으니 당연하지요! 그래서 이번 공략에도 걱정이 있었습니다. 사왕이 우울한 감정으로 인해 자기 실력을 발휘 못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기우였군요.”
“…그래도 사람 표정을 보고 감정을 추측할 순 있네요?”
“네! 우울하다는 것이 무슨 감정인지는 모릅니다만,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핫. 기계도 기름때가 끼면 삐걱거리지요. 스트레스란 인간의 기름때일 것입니다. 오래되면 앙금이 되어 닦기 어려우니, 잘 관리하십시오!”
신기하다. 자기 나름대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건가? 싸이코이긴 한데 기특한 싸이코다.
“그나저나 사왕.”
“예.”
“아까부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만.”
“무슨 이상한 점이요?”
“제가 이해하기로, 저희는 현재 부당한 권력에 의해 수감되어 있습니다. 이동의 자유가 억압되어 있지요.”
“저도 현 상황을 그렇게 파악하고 있는데요.”
“상호이해가 증진되어 다행입니다! 그리고 보통 이럴 때, 권력자는 경비인이나 간수를 따로 두어서 수감자를 감시합니다. 안 그러면 손쉽게 탈주를 시도할 수 있으니까요.”
이단심문관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지금 문밖에선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고, 대신 창문 쪽에서 인기척들이 느껴지는군요. 흠. 이 세계에선 감시인을 문 앞이 아니라 창문 주변에 배치하는 것일까요?”
그 순간.
“제길! 쳐라!”
쇠창살이 나가떨어지며 창문에서 그림자들이 뛰어들었다 .
“남자는 죽여도 상관없다! 여자만 상처 입히지 마!”
그림자들은 얼굴에 복면을 쓰고 있었다. 우리가 걱정되어서 찾아와준 손님들로 봐주기에는 드레스 컨셉이 너무 대단했다. 누가 봐도 불청객들의 습격이었다.
“반짝아!”
[예, 용사님.]나는 성검을 발도했다. 차앙! 습격자의 검과 내 검이 부딪혔다.
영화의 습격씬에서 자주 나오는 습격자와의 문답 따위는 오가지 않았다. ‘네놈은 누구냐!’ ‘알 거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엄청난 권력자를 뒷배로 두고 있지!’ 로 요약되는 대화 말이다. 상대방도 나도 칼 휘두르느라 바빴다.
그러나 내게는 비장의 꼼수가 있었다.
“지금이다!”
번쩍.
성검이 빛을 밝혔다.
“크윽?!”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 있던 습격자는, 찰나에 불과하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 검이 맞부닥친 공방전에서 찰나는 승부를 결정지었다.
나는 왼쪽눈과 오른쪽눈을 번갈아 깜빡거리며 시야를 확보한 뒤, 습격자의 손목을 날려버렸다.
“—익—-!!”
목소리에 비명이 마블링처럼 섞였다.
“사왕! 다 죽이면 안 됩니다! 배후를 밝혀야 하니 살리십시오!”
그렇게 했다.
이단심문관도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활약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펴,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잖아?!”
습격자들이 경악했다. 그들은 별로 실력이 대단치 않았다. 아니, 우리의 실력이 지나치게 뛰어난 걸까. 오러를 쓰지도 못하는 잔챙이들로 우리를 감당할 순 없었다.
결국 네 명에 이르는 습격자들은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그중 한 명은 싸움 도중에 이단심문관에게 사살당했다.
“으흠. 아하핫.”
이단심문관은 드레스 소매로 쓱, 얼굴에 튄 피를 닦았다. 습격자들은 그런 이단심문관을 올려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허약한 귀족 영애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여러분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이단심문관이 단검을 쥔 채 방실 웃었다.
“첫 번째,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여달라고 말함으로써 그냥 죽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저에게 고문당하면서 중요한 정보를 차례대로 실토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순수히 정보를 털어놓으면 죽지도 않고 고문받지도 않습니다! 어느 쪽을 고르시겠습니까?”
“허….”
습격자 중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코웃음 쳤다. 나한테 손목이 날아간 아저씨이기도 했다.
“미친년이로군. 차라리 죽여라!”
“예! 알겠습니다!”
“뭐?”
그리고 이단심문관의 드레스가 조금 더 빨개졌다.
타악, 둔탁한 소리가 창고에 울렸다.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히, 히이이익…?!”
남은 습격자는 두 명.
“여러분은 선택이 끝났습니까?”
“사, 살려주십시오. 영애님. 저희는 그저 일을 받았을 뿐입니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지요. 이해합니다.”
“그러면….”
“하지만 제가 여러분의 처지를 이해하듯이 여러분도 제 입장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왜 저희를 습격했는지 정보를 말씀해주시지요. 대신 여러분을 살려서 보내겠습니다. 제가 많이 양보해드린 거래라고 생각합니다만.”
습격자들이 머뭇거렸다.
“아. 결심이 서지 않는 모양이군요. 알겠습니다! 여러분이 결심할 수 있도록 조금 도와드리겠습니다!”
“저어. 도와주신다는 말씀은….”
“고문입니다.”
여전히 이단심문관은 방실거렸다.
“고통은 인간이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지요. 고통이 극도에 달했을 때 사람의 생존본능도 정점에 이릅니다. 자아. 여러분의 살고 싶다는 소망을 제가 극대화해드리겠습니다.”
“사, 살려주십쇼!”
“살아주십시오!”
미친.
이러다 장르가 19금 로맨스로 바뀔 것 같아서 내가 끼어들었다.
“잠깐요. 이단심문관 씨.”
“네?”
“꼭 그렇게 갈 필요가 없습니다. 저한테 맡기세요.”
“으흠…?”
이단심문관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왕, 고문에도 능하셨습니까? 상당히 능숙하지 않은 이상 그냥 저한테 맡기시는 걸 추천합니다. 저는 심문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아니. 굳이 고문을 할 필요가 없죠. 그리고 얼굴 좀 닦으세요.”
나는 이단심문관한테 손수건을 건네주고 습격자들 앞에 섰다.
습격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데, 미안. 나도 먼저 습격해온 사람들한테 그리 너그럽진 못하거든.
“아저씨들. 뭣 좀 물어봅시다.”
“뭐, 뭡니까.”
“아까 습격할 때 창문으로 들어왔잖아요. 쇠창살이 너무 쉽게 잘리던데. 혹시 저희가 여기에 갇힐 거라는 정보를 듣고, 쇠창살을 미리 잘라둔 겁니까?”
“…….”
습격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로 눈치만 볼 뿐. 하지만 입으로 대답하지 않았다고 해서 정답을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인물창.’
그들의 심리가 내 눈에 보였다.
「창고에 여자가 들어올 거라는 얘기는 들었지.」
「제기랄, 평범한 아가씨라고 했는데 사기였어!」
역시.
습격자들은 우리가 이곳에 올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저희를 공격하면서 [남자는 죽여도 상관없다, 여자만 상처 입히지 마]라고 소리쳤죠. 여기 영애를 납치하려고 했나요?”
“그, 그게…… 그것이……”
습격자들이 눈을 껌뻑거렸다.
「여기서 여자를 납치하라는 게 의뢰였다.」
「저 여자한테 절대로 상처를 내진 말라고, 의뢰주가 단단히 주의시켰지만 말야. 그래서 넉넉하게 네 명으로 습격했던 건데.」
음.
그래. 알겠다.
“하아….”
나는 한숨을 쉬었다. 뒤를 돌아보니 이단심문관이 손수건으로 열심히 얼굴을 닦고 있었다. 꼭 새끼 햄스터가 해바라기 씨앗을 갉아 먹는 것 같았다.
“범인이 누구인지 감이 잡히네요.”
이단심문관이 귀를 쫑긋 세웠다.
“어라. 정말로 벌써 아시겠습니까?”
“예.”
“사왕이 추리한 걸 듣고 싶군요.”
이단심문관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머리를 끄덕이고 귓속말로 속삭였다.
“일단 범인은 엄청난 권력자예요. 암살자를 네 명 고용해서 학원 내부로 침투시킬 정도인데, 이건 학원의 경비 시스템을 속속들이 꿰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죠.”
“호오. 일리 있습니다!”
그러나, 하고 이단심문관이 반론했다.
“범인이 굳이 [엄청난 권력자]일 필요가 있습니까? 왕궁도 아니고 학원의 경비 시스템을 알아내기는 비교적 쉬워 보입니다. 단순히 힘 좀 쓰는 권력자여도 가능할 겁니다!”
“날카로운 지적이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수상한 정황이 하나 더 있어요. 이단심문관 씨. 아까 [악역 영애]가 저희를 쫓아낼 때 뭐라고 외쳤는지 기억해요?”
“으음.”
이단심문관이 손수건을 옷소매에 집어넣으며 고민했다.
“예, 기억합니다. 분명히 [어서 내 눈앞에서 치워라, 당장 저 주종을 가두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왜 여쭈십니까?”
“어디에, 어느 장소에 가두라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죠.”
“…….”
“악역 영애는 그냥 저희를 무도회장에서 치우라는 말만 했어요. 그런데 이 습격자들은 저희가 어디에 갇힐 것인지 알고, 미리 쇠창살을 잘라뒀지요. 저희를 이 창고에 데려온 자들은 악역 영애의 하인들이었고요.”
“오호….”
이단심문관의 눈매가 실눈처럼 가늘어졌다.
“과연. 악역 영애가 습격자들을 고용한 장본인일 수도 있겠습니다. 미리 어디에 가둘지 하인들한테 명령해두고, 습격자들한테 감금 장소를 알려주기만 하면 되니까요. 아핫. 공작가 영애이니 권력도 있을 테지요.”
“예. 그렇지만-.”
“그렇지만, 너무 뻔합니다.”
이단심문관이 턱을 쓰다듬었다.
“[저]는 이래 봬도 묵시록 세계의 주인공. 황태자와 썸을 타고 있는 귀족 여식입니다. 그런 저를 악영 영애가 쫓아내고, 쫓아낸 장소에서 습격한다? 아무리 공작가 영애라 해도 어마어마한 스캔들에 휘말리겠지요!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큰 악수(惡手)입니다.”
역시 이단심문관은 머리가 좋다.
이런 이야기가 빨리 통한다.
“즉 악역 영애는 범인이 아니에요. 악영 영애가 [범인인 것처럼] 보이길 원하는 사람이 진범이죠.”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 진범은 습격자들한테 [절대로 여자를 다치게 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로 이단심문관 씨를, 여자 주인공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요. 남자 집사인 저는 죽든 말든 아무런 상관도 안 하는데요. 마지막으로, 공작가의 하인들을 매수할 정도로 권력이 강하죠.”
“아하핫.”
이단심문관이 눈웃음을 지었다.
“슬슬 진범이 누구인지 저도 알겠습니다!”
“아마 저랑 생각이 똑같을 거예요.”
“음. 저는 사랑의 감정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습성은 알고 있습니다! 사왕이 추측한 대로 진범이 정말 [저]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이런 습격자들한테 저의 신변을 정말로 넘겨줄 리 없습니다.”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서 대기 타고 있겠죠. 언제든지 돌입할 수 있게.”
콰앙!
창고의 낡은 문짝이 부서진 건 그 때였다. 먼지가 피어올랐고, 일단의 기사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맨 앞에는 평생 손에 먼지를 묻혀본 적 없을 것 같은 남자가 있었다.
“실비아! 괜찮은가, 실비아?!”
남자는 뛰어와서 이단심문관을 꽉 안았다. 생라면 면발 사리 같은 금발이 찰랑거렸다. 이단심문관만큼은 아니지만 저 남자도 잘생겼다. 외모 레벨이 0.6 이단심문관이라고 할까?
“맙소사. 온몸이 피투성이로군! 무도회장에서 쫓겨났다는 얘기를 듣고 불안한 마음에 찾아왔더니만…. 감히 이토록 악독한 짓을……!”
그리고 아마 싸이코패스 레벨도 0.6 이단심문관 정도 될 것이다.
남자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명령했다.
“여 보아라! 수상한 놈들을 어서 잡아들여라! 내 친히 심문하여 배후를 낱낱이 밝혀낼 것이다! 어떤 가문이 한 짓인지 모르겠으나, 설령 제국의 공신이라 할지라도 용서치 않겠다!”
기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예!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렇다.
“실비아 영애. 걱정하지 마라. 내가 그대를 지켜주겠다. 공작가의 여식이 얼마나 악랄한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나,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가 그대를 지키겠다. 그대는 나에게만 의지하면 된다….”
저 남자가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
그리고 이단심문관을 사랑하는 황태자였다.
9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