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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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맨스 판타지 규범1
『주인공 근처에 있는 남자는 일단 수상하다.』
로맨스 판타지 규범2
『제일 평범한 남자가 사실은 제일 비범하다.』
3.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불안해진 것이다. 망가진 피아노 건반처럼 내 심장이 엇박자로 뛰었다. 그만큼, 그 정도로 이단심문관의 웃음은 불길한 향을 머금었다.
이대로 구덩이에 쭉 미끄러질 것 같은 예감.
나는 이 구덩이의 밑바닥을 알 수 없었다.
“이단심—.”
“무사해 보이는군. 금사매 남작 영애.”
내가 탑의 이명을 다 부르기도 전에, 은백합 영애가 먼저 이 세계의 작명을 불러들였다.
이름을 선점당했다.
“암살자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들었다만…. 과연 변방에서 자란 여식이구나. 명줄이 잡초처럼 질기니. 암살자 한 명 정도는 별것 아닌 것인가.”
“흐으응.”
이단심문관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이 비웃음이라는 사실을 나는 좀 뒤늦게 알았다.
평소라면 이단심문관이 절대 입에 담지 않을 말이 그 입술에서 흐른 것이다.
“일부러 제 건강을 칭찬하러 이 늦된 밤에 걸음 하셨습니까? 진심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공녀님. 태자 전하께서도 그러시거니와, 많은 분들께서 이 미숙한 자를 보살펴주시니 행복하군요! 오늘 밤의 불행이 행운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은백합 영애의 눈매가 표독해졌다.
방금 이단심문관의 말엔 두 개의 가시가 삐쭉 세워져 있었다.
‘당신이 암살자를 고용한 장본인 아닙니까?’
협박.
‘황태자 전하께서 나를 걱정하여 몸소 찾아오셨습니다.’
도발.
“……머리까지 잡초를 닮아서 너저분하군. 상상과 망상은 한 걸음 차이다. 그 경계를 제멋대로 밟느냐 마느냐가 인간의 품위를 결정하지. 부디 귀족으로서 예의를 지키길 바라마.”
“앗, 죄송합니다! 무도회에서 다른 사람의 뺨을 때리는 것은 귀족의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군요. 이런. 제가 변방의 가문에서 자라 공작가의 예법은 미처 몰랐습니다!”
“…….”
“만일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언제 공녀님의 살롱에 저를 초대해주시겠습니까? 공녀님께 직접 예절 교습을 받고 싶습니다. 제가 사람을 때리는 일에 익숙지 못해서, 손의 각도와 강도에 관하여 깊이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혓바닥에 오토바이 엔진이 달렸다.
어디서 엔진 소리가 돌아가나 의아했는데, 좀 더 잘 들어보니까 이런 미친? 내 심장 소리였다.
두근두근.
불길한 예감이 심장을 휘감은 다음 내 목을 잡았다.
“영애! 무엄하군요!”
“변두리 남작가 출신 주제에 망언을 일삼다니….”
이단심문관의 혓바닥 왈츠에 공작가 하인들이 분개했다. 저 중에 주인을 배신하고 황태자한테 포섭된 종자도 있을 거다. 배신자가 한 명일지 여러 명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송구합니다!”
나는 서둘러 금빛과 은빛 사이에 끼어들었다.
은백합 영애의 미간이 좁혀졌다.
“너는….”
“오늘 황망한 일이 있어 아가씨가 많이 놀랐습니다. 천한 종자가 헤아리기로 휴식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밤이 늦었기도 하니, 공녀께서도 자리를 파하심이 어떨지요? 오해는 내일 풀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
은백합 영애가 입술을 다물었다.
뒤에서 하인들이 씩씩거리지만 그뿐.
주인이 오른손을 들자 전원, 동작을 멈췄다. 일순간에 정적이 복도를 감쌌다. 평소부터 아랫사람들을 강하게 옭아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잠깐만요, 집사 뭘 말하는 겁니까?”
오히려 이단심문관, 금사매 영애가 나한테 반발했다.
“저는 아직 공녀께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마음대로 대화를 매듭짓지……”
“조용히 하십시오.”
나는 이단심문관의 손목을 잡았다. 잡아서, 끌고 가다시피 걸었다. 이단심문관이 “앗, 잠깐, 집사! 잠깐 기다리십시오!” 바동거렸지만, 절대로 손목을 놓지 않았다. 여기서 인물에 대한 몰입이 더 심화되면 진짜 안 된다.
“공녀님.”
복도에서 빠져나오기 직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은백합 영애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무엇이냐?”
“저는 평소부터 공작가의 하인들이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을 보고 동경했습니다. 오늘밤에 다시 보니, 과연 저 같은 어중이떠중이와 다르게 공작가의 종자들은 정숙하더이다.”
나는 그녀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깨달은 것이 많습니다. 미천한 몸이지만 공녀님께 저의 존경을 바칩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단심문관을 끌어서 복도를 나왔다.
처음에 반항하던 이단심문관도 어느덧 얌전해졌다.
봄밤의 화원. 무도회장과 기숙사 사이에는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핀 지 얼마 안 된 목련들이 무거운 머리를 떨궜다. 하얀 나무들 아래로 향이 자욱했다. 어느 밤새가 꽃향기에 홀려 발톱으로 톡, 건드리니 창백한 목련의 꽃잎이 떨어졌다.
“세상에.”
이단심문관은 떨어진 목련을 밟았다.
“아.”
멈춰 서서, 이단심문관이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잠시 뒤에 이단심문관은 고개를 돌려서 나를 쳐다봤다. 무표정한 얼굴.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탑에서 제일 미쳤다고 얘기 듣는 헌터는,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왕……. 제가 방금 저기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4.
나는 숙소의 문을 닫자마자 말했다.
“암호를 정해요.”
기숙사로 걸어오는 동안 우리는 조용했다. 둘 사이에 아무런 말도 흐르지 않았다. 발목이 침묵에 감겨 조금 걷기 힘들었다.
인물에 대한 몰입도가 심해진 탓인가? 정원에서 숙소로 가는 길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어쩌면 몰입이 심해질수록 인물의 기억까지 또렷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지금은 판단하기 힘들다.
“암호……”
이단심문관이 눈을 깜빡거렸다.
“비밀 암호입니까……?”
“이대로 놔두면 저희 진짜 위험해요. 정신 똑바로 차려야죠.”
“그래야지요. 사왕. 옳은 말씀입니다. 예……”
이단심문관은 꼭, 자꾸만 미끄러지는 목소리를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목소리의 속도가 사고의 속도를 앞질러버리는 것. 눈앞의 인간이 위험해지고 있다는 빨간불 신호였다.
나는 이단심문관의 얼굴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시선을 맞췄다.
“봄이 오면 목련이 진다.”
“예……?”
“제가 [봄이 오면]이라고 말하면 이단심문관 씨가 [목련이 진다]라고 대답하세요. 그게 저희 둘 사이의 암호입니다. 정신 좀 차리라는 암호요. 자, 알았으면 말해보세요. 봄이 오면?”
“목련이……”
“다시. 봄이 오면.”
“목련이 진다.”
이단심문관의 눈길이 조금씩 되돌아왔다. 먼 허공이 아니라 가까운 정면을 보기 시작했다. 이단심문관이 “음,” 하고 머리를 저었으며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신 차렸습니다!”
“오케이. 잘했어요.”
“감사합니다, 사왕! 아핫. 정말로 오늘은 놀라운 일들이 폭풍처럼 몰아치는군요. 영원히 잊지 못할 하루로 기억될 거 같습니다.”
“차 한잔 마시고 진정할래요?”
“부탁드립니다!”
좋다. 아직이야. 이번 회차를 포기하긴 이르다.
나는 이단심문관에게 담요를 둘러주고 주방으로 향했다. 황족과 귀족이 다니는 아카데미의 기숙사답게, 금사매 영애의 독실엔 작으나마 주방이 있었다. 나는 찻잎과 주전자를 쉽게 찾았다.
“와.”
차를 달이는데 어이가 없어졌다.
“그냥 몸이 저절로 움직이네….”
나는 티백 말고 차를 본격적으로 끓여본 적 없다. 평생 그랬다. 하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차주전자를 다룬 것처럼 내 손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몰입의 부작용이다.
심지어 내 몸은 차 끓이는 걸 [즐거워]하고 있다.
‘아가씨께선 홍차에 우유를 섞어서 꿀을 한 스푼 넣으면 가장 좋아하시지.’
나는 콧노래를 흥흥거렸다.
‘이럴 때를 위해서 귀한 꿀을 아카데미 전속 하인에게 부탁해서 얻어왔다. 돈이 조금 들었지만, 워낙 검소하셔서 낭비를 안 하시는 분이니. 이 정도 사치는 괜찮……’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6%입니다.]괜찮지 않다!
안 괜찮아!
염병!!
개같은 로맨스! 왜 홍차에 벌꿀을 넣자는 생각으로 기뻐하는 거냐! 두개골 개방해서 시냅스에다 꿀 발라줄까?! 머리통에 벌집을 쑤셔 넣어버릴라!
[반짝이는 용사님의 상태를 걱정합니다….] [하지만 용사님의 집사 복장은 참 바람직하다며, 반짝이가 소수 의견을 밝힙니다.]내 무기가 혼자서 희희낙락 반짝였다. 기분 탓인지 반짝거리는 때깔이 좀 더 고와졌다. 지 주인은 머리를 붙잡은 채 쭈그려 앉아서 괴로워하는데 말이다.
‘집사한테 정신이 잡아 먹힐 순 없다.’
나는 이를 꽉 물었다.
‘진짜 안 돼. 지금까지 얼마나 어렵게 스테이지들을 클리어했는데!’
오기가 생겼다.
나는 차를 끓여도 원래 인물처럼 안 끓이기로 다짐했다. 평소에 안 쓰는 주전자를 썼고, 평소에 안 쓰는 찻잔을 꺼냈다. 그리고 이단심문관한테 차를 주었다.
“사왕.”
이단심문관이 차를 몇 모금 마시더니 머리를 갸웃거렸다.
“예.”
“차에서 이상한 맛이 납니다!”
“그래서요?”
“제 미각이 둔해진 것이 아니라면 이 쪼르잡잡한 맛은 소금입니다아?”
“원래 이 차가 그래요.”
“오호. 차라기보다는 소금물에 가까운 이것이 말입니까? 객관적으로 염도를 측정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단순한 소금물로 판정될 것 같습니다만.”
“그냥 닥치고 마시기나 해요.”
“알겠습니다! 닥치고 잘 마시겠습니다!”
이단심문관이 후루룹, 차를 마셨다.
“잘 마셨습니다! 짜군요!”
이단심문관은 활짝 웃었다. 그래. 이래야지. 우리의 내츄럴 싸이코가 드디어 예전과 같은 순수함을 되찾았다.
“자아, 그래서 이제부터 어쩔 생각입니까?”
“악역 영애가 황태자와 이어지게 해야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면 적어도 금사매 영애랑 황태자의 러브 라인을 가루가 되도록 부셔야 하고요. 두 가지 엔딩 중 하나를 노립시다.”
“뽀작뽀작 작전입니까……”
이단심문관이 마음대로 작전명을 정했다.
뭐, 상관없다. 나도 두 가지 엔딩 중에서 후자를 선호한다.
연애란 걸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기는 하지만—
‘맺어주는 것보다 깨트리는 게 훨씬 쉽지 않을까?’
황태자를 은백합 영애와 이어주긴 어렵겠지만, 금사매 영애와 헤어지게 만들긴 쉬울 거다.
이 부분에서 이단심문관과 나는 100% 공감했다.
“그러려면 금사매 영애에 대한 황태자의 사랑이 식어야 합니다! 혹시 떠오른 묘책이 있습니까?”
“있죠.”
아까 차를 끓이다가 정신이 돌아버릴 뻔했을 때 깨달았다. 이번 스테이지에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방법은 있다.’
금사매 영애에 대한 황태자의 호감도를 떨어트리는 것만 아니라, 우리 두 사람, 특히 내 정신을 유지하는 데 몹시도 효과가 뛰어난 방법.
“그 묘책이 무엇입니까?”
“결국에 이단심문관 씨가 [금사매 영애다운] 행동을 하면 할수록, 제가 [집사다운] 태도에 빠지면 빠질수록, 저희 두 사람의 몰입률은 올라버려요.”
반대로 생각해서.
“그럼 만약에 [금사매 영애가 절대 하지 않을 짓]이랑 [집사가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하면?”
“인물에 대한 몰입률이 떨어질지 몰라요. 떨어지지 않아도 더 올라가진 않겠죠. 어때요?”
이단심문관이 눈을 빛냈다.
“……호오. 과연. 단순하면서도 좋은 방법입니다. 역시 사왕! 난공불락의 10층을 공략하고 20층까지 파죽지세로 클리어한 헌터답습니다!”
“칭찬 좋고요. 음. 아무튼 저희의 결론은 간단해요.”
나는 손을 튕기면서 스킬을 발동했다.
“이제부터, [불량 영애]와 [불량 집사]가 됩시다.”
이단심문관이 고개를 기울였다.
“네?”
그리고 백귀환생(百鬼還生)이 펼쳐졌다. 천마실록처럼 백귀를 많이 불러들일 필요는 없었다. 우리에게, 나한테 지금 당장에 절실한 백귀는 단 한 명에 불과했다.
내 그림자가 꼬물꼬물 움직여서 한 사람분의 백귀로 변했다.
“…….”
뒤로 묶은 포니테일.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생명체보다도 재수 없는 눈.
“야…….”
염제. 유수하였다.
유수하는 내게 소환되자마자 오만상을 찌푸렸다. 표정이 휴지뭉치처럼 구겨지면서 입이 열렸다.
“씨벌, 개놈아. 이번엔 무슨 개짓거리를 시키려고 또—.“
“자. 합죽이가 됩시다, 합.”
“—읍 으읍!! 으으으으읍!”
아무리 말이 험악해도 내 명령에는 거스를 수 없는 백귀였다. 유수하는 테러리스트한테 잡혀 입이 봉해진 인질처럼 “읍! 읍!” 소리를 연발했다.
염제의 모습을 보니까 우울한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뭐라고 할까? 쓰레기통에 뚜껑을 닫아준 기분? 마음의 미세먼지가 개운하게 청소되는 듯했다. 염제. 그는 청소기의 먼지통 같은 남자였다.
“이단심문관 씨.”
“예, 사왕!”
“당신은 겉모습만 보면 너무 모범생이에요.”
나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몸짓이든 뭐든 행동거지가 순수하다고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불량 영애로 전직하려면 지금 상태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한참 부족해요.”
“앗.”
이단심문관이 쫑긋 귀를 세웠다.
“제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가르쳐주십시오! 배우겠습니다!”
“예, 가르쳐드리죠. 1대 1 속성 과외로요.”
나는 천천히 유수하를 쳐다보았다.
“최고의 과외 선생님이 이단심문관 씨를 불량의 길로 인도할 겁니다.”
“아핫, 기대됩니다!”
“읍—, 읍!! 으읍으읍!”
이단심문관은 강아지처럼 해맑게 웃었다. 유수하는 개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강아지와 개자식 사이에서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 불량해집시다.”
다음날, 소르므윈 아카데미는 폭발했다.
9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