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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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만큼 그대를 어여삐 여기는 자가 있습니까?
저만큼 그대를 아끼어서 쓰다듬은 자가 있습니까.
저의 눈보다 더 다급한 눈길을 보았습니까?
저의 손보다 더 부드러운 손길을 느낀 적 있나이까.
없을 것입니다. 없었을 것입니다.
없게 할 것입니다.
2.
웃-호호호호!
로맨틱한 웃음이 정원에 울렸다.
웃음소리를 정통으로 맞아버린 황태자는, 얼굴빛이 완전히 울상이 되었다.
“시, 실비아여…?”
“오호호호! 말씀하십시오, 태자 전하!”
“웃는 모양새가 다소 경박하지 않느냐? 무, 물론 네 목소리는 아기새와 같다. 어떻게 지저귀어도 내 귀에는 음악처럼 들린다. 그래도 귀족의 체면을 조금 생각하면….”
“오-호호호홋! 저는 이 웃음에 매우 만족합니다만!”
“그, 그래?”
황태자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 그런가…. 그렇구나…. 아니. 잘 들어보면 괜찮은 것 같다. 음…. 으음. 음! 괜찮다. 아주 괜찮도다! 아름답구나. 오늘 너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 이 라면 면발 사리를 보게?
저래도 금사매 영애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는다고? 주변에서 구경하는 학생들은 전부 짜게 식은 눈빛을 하고 있는데?
-좀비야.
묵시록에 들어온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배후령이 입을 열었다.
-내가 가만히 이번에 네가 하는 플레이를 지켜봤는데 말이다. 그리고 웬만하면 간섭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야. 답답해서 더는 못 보겠다. 야, 너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냐?
‘착각요? 무슨 착각인데요?’
-넌 사랑을 맺어주는 것보다 깨부수는 게 쉽다고 생각하지?
‘예.’
-미안한데 그거…… 케바케야.
배후령이 말했다. 밀림에서 왕자로 군림하다가 갑자기 동물원에 갇혀버린 마운틴고릴라의 표정이다.
‘케바케라고요?’
-엉. 네가 모태쏠로답게 모쏠력을 진하게 풍기는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마다 형태가 조금씩 다르단다. 꼬맹아. 네가 아무리 가위질 해서 도려내려 애써도 안 잘리는 사랑이란 게 있어. 내가 보기에 저 황태자라는 놈이 그런 거 같…….
배후령의 말이 끝나기 전에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실비아! 너는 참으로 만화경과 같이 다채롭게 빛난다. 어제 눈꽃이 되어 내리면 오늘 매화가 되어 피는군. 그래, 사람의 웃음이란 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겠느냐. 귀족의 웃음이 법률로 정해져 있던가. 나도 이참에 웃음을 바꿔보겠다. 음핫하하하!”
저 미친놈?
그리고 정원에는 기막힌 듀엣곡이 하늘 높이 퍼졌다.
“오호호!”
“음하하!”
“오-호호호호!”
“음핫하하하!”
세기의 커플이 그곳에 탄생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사, 사랑이 대체 뭐길래…?’
충격이다.
-너 모태쏠로잖아. 연애 감정을 모르는데 저 꼬마들의 꼬인 관계를 어련히도 잘 풀겠다.
배후령이 혀를 쯧쯧 찼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잘 보이겠다며 나라를 거덜 내버린 인간도 있어. 불량해져서 몰입도를 막아보자는 아이디어는 좋았다만, 그거로 사랑을 부숴버리기엔 쫌 부족하지. 암. 부족할 수도 있지.
어라, 갑자기 배후령이 되게 어른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쏠로라서 자격지심을 가지는 것인가? 이 마운틴고릴라한테?
그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
“……..”
뚜벅.
나는 황태자와 이단심문관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여길 보란 듯이. 그걸 목격한 황태자는 당연히 오만상을 찡그렸다.
“자네….”
“금사매 영애께서는 저를 제일 신뢰한다 말씀해주셨습니다.”
자. 이래도 당신의 사랑이 식지 않나 보자.
“태자 전하께서는 고귀하시지요. 저는 비천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먼 곳에 계시며, 저는 언제나 주인님의 곁에 있습니다. 주인님의 가문이 곧 저의 집이고, 주인님의 삶이 곧 제가 모실 삶입니다. 전하.”
정원에서 “꺄아아!” 하는 비명이 울렸다. 우릴 구경하는 영애들의 목소리였다.
-아니. 야. 미친. 야. 야!
배후령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멍청아! 아, 이 쏠로 자식아! 얘 진짜 연애의 방정식을 모르네! 쟤가 제국의 황태자인데 자존심이 오죽 세겠냐! 네가 그러면 황태자는 더 질투해버리……!
“허!”
황태자가 이를 갈았다.
“자네가 집사라는 핑계로 영애의 곁을 서성이더니 기고만장하군. 좋다. 그러면 나도 실비아의 수발을 들겠다! 학원에 있을 때는 내가 알아서 실비아를 보살필 테니 자네는 알아서 낙향하게.”
아니.
당신 일국의 황태자잖아!
사랑에 미쳤다고 해서 정말로 미쳤냐!
“웃호호호호!”
이단심문관 씨. 당신은 이제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 좀 웃읍시다.
“—대체 지금 무슨 소란이 벌어지는 것이더냐?”
그 때였다. 학생들이 웅성거리던 소리가 멈추었다.
아주 잠시. 1초에 지나지 않을 순간 동안에 소란이 가라앉았다. 정적은 1초에 불과했지만 그거로도 충분했다.
귀족가의 영애들과 영식들은 고개를 숙이고 길을 비켰다.
“……은백합 공작 영애.”
오로지 황태자만이 미간을 찌푸린 채 바라봤다.
그곳에선 머리에 달빛을 담은 영애가 걸어오고 있었다.
3.
“오전에 병가(病假)를 제출했다고 들었다만.”
황태자는 말했다.
“그래서 오늘 학원을 결석할 줄 알았는데, 몸이 다시 괜찮아진 것인가. 허. 영애의 심장은 참으로 말썽꾸러기인 모양이다.”
“…….”
은백합 영애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차례 좌중을 훑어봤다.
움찔.
시선이 마주치자 학생들이 머리를 푹 숙였다. 여태껏 황족의 스캔들에 떠들썩하게 달아오른 학생들이었다. 그들이 얼어붙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은백합 영애는 입술을 열었다.
“평안하신지요. 전하께서 염려해주신 덕에 저는 간밤에 평안했나이다.”
“…그런가? 다행이군. 그대는 일 년의 절반을 병가로 드러누우니 오늘 같은 날이 귀할 것이다. 마침 봄날에 볕이 좋으니 느긋이 산책이라도 즐기게.”
차디찬 얼굴.
[산책이라도 즐겨라]는 [여기서 떠나라]와 뜻이 같았다. 황태자는 금사매 영애한테 그토록 절절히 매달렸지만 은백합 영애에겐 박했다.어쩌면 조금 이상할 만큼 야박했다.
‘아무리 황족이어도 공작가를 너무 박하게 대하긴 어려울 텐데…?’
그러나 은백합 영애는 담담했다.
“산책, 좋군요. 봄바람이 여기서 조금만 더 거칠어져도 목련의 잎은 떨어집니다. 저 혼자서 즐기면 꽃들도 외로워할까 걱정됩니다.”
어젯밤 무도회에서 힘겨워하던 것과 다르게 은백합 영애는 미끄러지듯 혀를 굴렸다.
“전하. 이리 소란스러운 곳에서 먼지를 묻히지 마소서. 저와 함께 산책하시며 봄을 위로함이 어떨지요?”
“하. 내가 왜……”
“금사매 남작영애.”
은백합 영애는 이단심문관을 보았다.
“그대도 같이 산책하지.”
황태자가 입을 다물었다.
주위의 모든 시선이 이단심문관에게 모였다.
“흐음.”
이단심문관은 부채를 지피며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사왕.’ 눈동자가 말하고 있다. ‘따라가는 편이 좋겠습니까?’ 전적으로 내 판단에 순종하겠다는 눈.
괜찮을까?
은사매 영애와 황태자. 두 사람 모두 위험하다. 저 둘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몰입도는 심화된다. 이단심문관이 금사매 영애에 가까워지고 내가 집사에 가까워진다.
그만큼 위험하지만, 가만히 있어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거다.
“…지금 몰입률이 몇입니까?”
나는 이단심문관한테만 들릴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올랐어요?”
“예. 조금 올랐습니다.”
이단심문관이 귓속말로 대답했다.
“현재 제 몰입률은 17퍼센트입니다. 아핫, 황태자가 저에게 말하는 걸 듣는 동안 1퍼센트가 올랐군요. 은백합 영애를 보니까 또 1퍼센트 올랐고요. 어제보다 총 2퍼센트가 더 올랐습니다.”
2%.
어젯밤에 미친 듯이 치솟던 거에 비하면 확실히 몰입의 속도가 둔해졌다. 지금 위험을 감수해서 호랑이굴에 들어갈 것인가? 만약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가 적절할까.
나는 이단심문관의 눈을 보았다.
“봄이 오면?”
이단심문관이 방긋 웃었다.
“목련이 집니다, 사왕.”
오케이.
결심이 섰다.
“좋아요. 따라가도록 하지요, 아가씨.”
“저는 당신의 판단을 믿습니다. 집사.”
이단심문관이 부채를 착, 접었다.
“오-호호호! 은백합 공녀께서 친히 산책을 권하시는데 거절할 수 없지요. 기쁜 마음으로 초대를 받겠습니다!”
은백합 영애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가볍게 등을 돌렸다.
“조용히 따라오게.”
4.
그녀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숙소였다. 가문의 위세가 대단한지 은백합 영애는 기숙사에서 머물지 않았다. 마치 별장에서 지내듯, 외따로 세워진 빌라에서 숙식했다.
“여기를 [산책]하자는 말인가?”
반 억지로 따라오게 된 황태자가 투덜거렸다.
은백합 영애의 숙소는 학생이 머무르는 곳답지 않게 화려하지만 그뿐. 태자는 황궁에서 자란 남자다. 이런 사치스러움에 새삼 감격하진 않은 것 같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은백합 영애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걸었다. 따박. 따박. 영애의 구두가 복도에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산책은 변명이었습니다.”
“뭐?”
“정원엔 보는 눈이 많았지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나이다. 비밀을 요하는 일이기에.”
“…비밀?”
“예.”
따박.
“감히 귀족들의 요람을 침범한 암살자들을 다루는 일입니다. 전하. 섣불리 입 밖에 내어서 민심이 동요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지요.”
“…….”
황태자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추리하기로 암살자를 고용한 장본인은 황태자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은백합 영애의 담담한 어조는, [네가 한 짓을 이미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범인을 잡았다는 말인가? 나도 아직 수사의 갈피를 잡지 못했거늘. 네가 어찌.”
“금사매 영애의 시종이 제게 단서를 주더이다.”
따박.
“저는 어젯밤에 금사매 영애와 종자를 무도회에서 내쳤습니다. 과민한 반응이었지요. 그러나 무도회장에서 내치라고 말했을 뿐, 저 둘을 어디에 가두라 명령한 적은 없습니다. 저의 아랫사람들 중에 아마도 못된 마음을 품은 것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공작 영애의 숙소에는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그 앞에 서서 은백합 영애는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무표정했다.
“내려가실까요, 전하.”
“……하인들이 안 보이는구나. 기이하다. 공작가의 하인들은 어디로 물러난 것인가.”
“염려되십니까? 그러겠지요. 제가 먼저 앞장서겠나이다.”
은백합 영애는 질문을 받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따박, 은백합 영애의 발소리가 지하로 스며들었다. 따박. 따박…. 지하 계단의 어둠에 은백합 영애가 파묻혔다.
황태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계단을 내려갔다.
우리도 뒤를 따랐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무언가가 진해졌다. 나의 코에, 나의 삶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것. 피의 냄새다. 이단심문관과 나는 당황하지 않았지만, 앞서 걸어가는 황태자는 어깨가 움찔거렸다.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 송구합니다. 태자 전하.”
지하실에는 세 명의 인간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세 명 모두 어젯밤에 얼핏 본 공작가의 하인들이었고,
“이들이 바로 금사매 영애를 습격한 암살자들의 배후입니다.”
세 명 모두 피에 젖어 있었다.
“…….”
황태자의 손이 떨렸다.
나조차 조금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 중에서 계단을 내려오기 전과 내려온 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사람은, 이단심문관과 은백합 영애뿐이다.
이단심문관이 태연한 것은 이해된다. 탑에서 수많은 고문과 심문을 집행한 만신전의 길드장이니.
그렇지만 다른 한 사람은 공작가의 영애다. 달빛을 닮아서 금방이라도 휘청거리며 쓰러질 것 같았고, 연약해 보였다. 그녀는 이런 장소에 무척 익숙하다는 듯 서 있었다.
“제가 어제 밤새어 조사해본 결과.”
그리고 나는 떠올렸다.
“이들은 그저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범행을 저질렀음이 드러났습니다.”
눈앞의 영애가 이 세상을 멸망시킬 사람이라는 것.
“개인적인… 복수심이라고?”
“예. 들어보시렵니까.”
은백합 영애는 하인 한 명의 머리카락을 잡아 들었다. “아악!” 하인이 괴로워하며 눈을 떴다. 오른쪽 눈이 뜨이지 않는 걸까. 하인은 왼쪽 눈만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태자 전하께서 행차하셨다. 예를 갖추거라.”
“아가씨, 욱…… 아가씨이……”
“너는 동료들과 작당하여 암살자를 고용했다. 금사매 영애를 노린 것이다. 어째서 금사매 영애의 목숨을 노렸는지 태자 전하께 이실직고하라.”
“아가씨… 아가, 씨……”
“진실을 고하면 너의 가족에겐 화가 미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
“그, 금사매 영애가… 비천한 변두리 남작가의 여식이 감히, 주제를 모르고 황태자 전하께 꼬리를 쳐서…… 아, 아가씨야말로 태자 전하의 정당한… 예에, 약혼녀이신데. 오래전에 그리 되었는데, 그것을.”
위험하다.
“그것을 저 남작가의 여식이 어질러서… 화가나고 분이 터져… 그만,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아가씨. 송구합니다, 전하……”
“너희에게 암살자를 고용하라 시킨 배후가 따로 있느냐.”
“어, 없습니다. 없어요, 그런 배후는……”
아니다.
“오직 너희 세 명이서 벌인 짓이라는 말이냐.”
거짓 증언이다.
“예… 그렇습니다, 아가씨.. 그렇습니다….”
황태자를 지키기 위해.
“정녕 그러했느냐.”
“틀림이 없사오니……”
“그래. 그러하구나.”
이 나라의 태자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은백합 영애는 [거짓 증언]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그녀가 세 명의 입을 맞추고,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모든 증거를 완벽하게 조작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이[황태자의 끄나풀]이었다는 사실은 절대 밝히지 못할 것이다.
황태자가 우리 두 사람을 창고로 가두도록 만든 [배후]라는 것.
그리하여 우리 둘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이 끼어들어 [영웅 행세]를 하려 들었다는 것.
그 모든 진실을 은백합 영애는 지하에 묻어버리려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황태자.
진실이 밝혀지면 제일 큰 타격을 입을 남자를 위해.
“전하.”
은백합 영애는 고개를 들어 황태자를 보았다.
“처단하소서.”
황태자가 움찔거렸다.
“처단하라니……”
“전하께서 애틋하게 여기시는 금사매 영애를 죽이려 한 자들입니다. 귀족들의 요람을 침범한 범법자들입니다. 처단하심이 마땅하고, 처단하실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현재 이 나라의 국본(國本)이십니다.”
“…….”
“무엇을 망설이시나이까.”
혹여, 라고 은백합 영애는 입술을 열었다
“제가 조사한 것과는 다른 진실이 이번 사건에 도사리는 것입니까?”
“…….”
“본 학원의 학생이 아니라 전하의 신하 될 이로서 고합니다. 국본이시여. 소신의 조사가 미흡하다면 처벌을 미루소서. 사안이 중하니 황제 폐하의 특무대(特務隊)에 기별을 넣도록 하겠사옵니다.”
황제 폐하의 특무대.
그 말을 듣자마자, ‘집사’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일인지하(一人之下)이자 이명불복(異名不服)의 사냥개들. 제국 제일의 검사이자 마법사들로 구성된 이들은 절대적인 독립수사권을 부여 받는다.
현재의 황태자가 태자위를 맡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들이 비리를 저지른 전(前) 태자를 먹어치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신의 조사에 흡족해하신다면, 구태여 일을 번거로이 처리할 것이 없을 터.”
은백합 영애가 허리를 숙였다.
지하실 바닥에는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검이 놓여 있었다.
“이 자리에서 처단하시고,”
은백합 영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소매를 걷어올렸다.
그렇게 드러난 양 팔은, 무수한 흉터로 가득했다.
“가문의 하인들을 제대로 관리치 못한 제게,”
찔리고, 베이고, 긁히고, 쥐어뜯기고, 매맞고, 지져진 흉터들이, 본디 백합처럼 희었을 공작 영애의 양 팔을 무수히도 좀먹고 있었다. 아니, 양팔만이 아니다. 파고든 지렁이를 뜯어낸 것처럼 어깨로 길게 패인 자국으로 보아, 온몸이 만신창이일 것이라고 나는 어쩐지 알 수 있었다.
고개 숙인 은백합 영애가 속삭였다.
“벌을 내려주소서.”
은백합.
이 세계의 악역영애惡役令愛.
“언제나와 같이, 죄는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황태자가 떨었다.
9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