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94)
===================
5.
……사랑하는 딸.
……기대하지 말렴.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려무나.
……기대하지 말 것, 기대지 말 것. 그것이 삶의 비결이란다.
……네가 ‘이번에는 어쩌면’이라고 혼잣말할 때마다, 세상은 너에게 ‘이번에도 역시’라고 속삭일 거야. 한 번 속는 것은 경험이고, 두 번 속는 것은 비극이지. 그렇지만 세 번 속아버리는 건 희극이란다.
……사랑하는 딸. 너는 귀족이다. 너의 삶이 누군가에게 희극이 되지 않게 조심하렴. 너 스스로에게 세 번의 기회를 허락하지 말거라.
……두 번. 단지 두 번의 상처로도 영원히 기억되기엔 충분하다. 저 옛된 제왕들은 살아생전 미리 자신의 죽음을 추모했단다. 너는 사막에 기념비를 세워버리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마라.
……그런데도 너를 세상에 맡기려 한다면, 딸아. 기억하렴. 너는 너의 삶을 사람들한테 빌려주는 게 아니야. 누군가의 빚쟁이가 되려 하지 말거라. 처음부터, 돌려 받지 않을 생각으로 주어라. 다 주어라.
……사람들이 너의 시체로 사육제(謝肉祭)를 벌이는 걸 용서해라. 머리카락을 주어라. 손가락을 주어라. 너의 가장 순결한 희생부터 가장 순진한 희열, 가장 순수한 희망까지, 다 주어라. 그들은 너의 모든 걸 게걸스럽게 탐하여 만찬을 즐길 거란다.
……그리해서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떠나렴.
아무것도.
어머니는 그리 유언하고 죽었다.
장례는 화장(火葬)이었다.
6.
지하실은 조용했다.
“왜 그러십니까?”
은백합 영애의 목소리만 나지막하게 울렸다. 공기가 차가웠다. 심문당한 하인들이 피를 흘렸지만, 세 명분의 피 웅덩이로는 지하실을 조금도 데우지 못했다.
“어서 이 나라의 국본으로서 처벌을 내리소서.”
“하, 하.”
황태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 저걸 웃었다고 볼 수 있을까? 간신히 입꼬리만 올라가서 부들거렸다. 처참하게 실패해버린 미소였다.
그는 도망치듯이 고개를 돌려 이단심문관과 나를 쳐다봤다. [너희는 이 어이없는 상황을 어찌 생각하느냐?] 황태자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태자전하.”
하지만 도피는 실패했다. 은백합 영애의 날 선 목소리가 황태자의 시선을 끊었다.
“제가 이들의 범죄를 황제 폐하의 특무대에 상고하오리까?”
황태자는 멈칫했다.
“폐태자(廢太子)의 전철을 밟으시려는 것인지요.”
“황제 폐하께서 어디까지 전하를 용서하실지 시험하렵니까?”
협박.
말투는 조곤조곤하여 예절에 어긋나지 않았으나, 공작가의 여식, 은백합 영애는 분명히 황태자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유효한 협박이었다.
“으.”
제국의 후계자는 손을 떨었다. 떨면서, 공작 영애가 바친 검을 쥐었다. 하지만 황태자의 결심은 칼을 잡는 데에서 머물렀다. 칼을 휘두르는 데까지 미치지 못했다.
“실비아……”
태자는 힘없이 칼끝을 늘어뜨렸다. 우두커니, 우리를 쳐다봤다. 누군가가 나서서 은백합 영애를 막아주길 바라는 것인가.
“일 처리가 깔끔하군요!”
그러나 이단심문관은 방긋 웃었다.
“태자 전하뿐만 아니라 저희 둘을 끌어들였다는 점이 좋습니다. 아핫, 여기에 모인 사람 전원이 [공범]이 되어서 입을 다무는 셈이니까요. 황태자 전하께선 본인의 실책이 무마되시어서 좋고. 저는 공녀님이 처벌을 받아서 좋습니다!”
“시…, 실비아?”
“문제는 여기서 오직 공녀님만이 아무런 이득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만.”
이단심문관의 눈이 뒤집어진 달처럼 반개했다.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서 당신이 얻을 이익이 있습니까? 공녀님. 공작가의 충성스러운 하인이 셋이나 죽어버립니다? 심지어 태자 전하를 대신하여 체벌을 받겠다니. 당신의 생각이 무척 궁금합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말했듯 이들은 본가의 하인들이며, 본가의 영애인 내가 이들의 실수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마땅한 일……”
“아하, 예쁘군요! 하지만 논의에 있어서는 비효율적입니다! 보다 효율적인 논의를 위해 피차 솔직해지도록 합시다. 왜 전하를 대신하여 체벌을 받겠다는 겁니까? 혹시 그것이 공녀의 ‘사랑’입니까?”
지하실의 숨소리.
금빛의 영애와 은빛의 영애가 잠시간 시선을 주고받았다.
“신하 될 도리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일세. 금사매 영애.”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은백합 영애는 눈썹조차 미동하지 않았다.
“이익과 대가를 따지는 것은 불충(不忠)이지. 그대는 변방의 가문에서 자라나 쉽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네만.”
“달리 말해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내 대답을 바라는가? 포기해라. 그대가 나를 이해하냐 이해하지 못하냐는 나의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흥미롭군요……”
이단심문관이 숨결을 하아, 흘렸다. 그 숨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로선 당장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단심문관의 반응은 결코 황태자가 바라던 게 아니었다. 이단심문관은 은사매 영애를 말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사랑에게 매달렸던 황태자는 얼굴빛에 절망이 물들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가씨.”
그러기에 내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단심문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예. 집사? 무엇입니까.”
“정말로 저 하인들이 암살을 사주한 범인들이라면, 저희에게도 복수할 권리가 있어요. 태자 전하께만 처벌을 맡기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입안이 텁텁했다. 머리를 돌렸다. 이번 사태, 정치적으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사건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의 방책]을 떠올리기 위해 몰두했다. 나는 집사의 지식을 사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7%입니다.]혀가 바싹 말랐다. 아직은 괜찮다.
“…은백합 영애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성스러운 하인들에게 배신당한 것이니까요. 종자들을 처벌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호오. 즉?”
“마침 죄를 지은 하인이 세 명. 처벌할 자격이 있는 사람도 세 분입니다.”
나는 의자에 묶인 하인들을 봤다.
“한 분이 한 사람씩 맡아서 처벌하는 것이, 어떨지요?”
침묵.
“어차피 은백합 영애께선 저희를 공범으로 만드시고 싶겠지요. 그래서 저희를 데려오신 것입니다. …태자 전하께선 홀로 처벌을 감당하기 어려우신 것 같습니다. 세 분께서, 평등하게 책임을 지면 적당할 줄로 아룁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흐음.”
이라고 이단심문관은 한쪽 눈을 감았다.
“…….”
은백합 영애는 말없이 미간을 좁혔으며.
황태자의 안색은 급하게도 밝아졌다.
“그렇군! 실비아의 종자가 한 말이 옳다. 공녀는 부하들에게 배신당했다. 실비아는 습격을 당했다. 나는 국법을 바로 세울 필요가 있다! 모두에게 저마다 사정이 있으니, 각자 한 명씩 처분을 담당하는 편이 좋으렷다!”
“태자 전하. 군왕은 남과 책임을 나누지 않아야—
“시끄럽다!”
황태자는 신경질적으로 은백합 영애한테 칼을 내던졌다. 터억! 칼집이 영애의 다리에 맞고 튕겨 떨어졌다.
은백합 영애는 무표정했다. 멍이 들 정도로 강하게 부딪혔을 텐데.
“무슨 일이 벌어지면 죽이라! 처단하라! 처벌하라! 네가 할 줄 아는 말이라곤 그것밖에 없다! 지금까지, 여태껏, 내가 얼마나 많은 인간을 처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장차 이 제국을 이끄실 분의 의무입니다.”
“나는 살인마가 아니다! 학살자가 아니다! 독한 것. 악독한 것! 그렇게도 피를 보고 싶다면 네가 먼저 죽여보거라!”
황태자가 씩씩거렸다. 공작 영애는 가만히 태자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었다.
공기의 살얼음은, 영애가 천천히 허리를 구부리면서 깨졌다. 그녀는 칼을 들었다. 손놀림이 이어졌다. 왼손으로 칼집을,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능숙하게.
은백합 영애는 칼을 꺼내었다.
“전하.”
칼날의 색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닮았다.
“그렇다면 최소한 제게 명령이라도 내리소서.”
“며, 명령?”
“예. 전하. 제게 처형을 명하시지요. 왜 망설이십니까? 혹여 명령하시는 법마저 잊으셨나이까. 군왕의 권리를 포기하시렵니까.”
황태자가 숨을 들이마셨다.
“주,”
마치 헛발질을 디디는 것 같은 한마디.
“죽여라….”
그러나 은백합 영애는 결코 헛디디지 않았다.
피가 튀었다.
지하실의 공기가 갈렸고, 그보다 좀 더 묵직한 살점이 갈라졌다.
“하아.”
은백합 영애는 작게 한숨을 쉬는 것처럼 어깨가 미동했다. 그뿐. 한 명의 목숨을 한 번의 한숨으로 취한 다음, 은백합 영애는 우리를 쳐다봤다.
“…….”
불길함이 밀려왔다. 심장이 불온하게 두근거렸다.
나는, 은백합 영애한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로 [이 사람은 언젠가 금사매 아가씨의 앞길을 막게 된다]라는 본능적인 직감.
눈앞의 인간을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증이었다.
“아하핫. 당신에게 점점 더 흥미가 가는군요! 음, 좋습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몰입률이 오르는 것이었다.
“암살을 사주한 사람을 살려서 내버려 두기는 곤란하지요. 저에게 검을 넘겨주십시오. 두 명째는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공범이 되어볼까요!”
이단심문관이 지금까지 죽인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될까?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단심문관이 이 방면에서 아마추어가 아니란 건 너무도 확실했다.
이단심문관은 검을 받자마자, “흠!” 일격에 처형을 집행했다.
이제 남은 하인은 한 명.
“아….”
처벌을 주관할 사람도 한 명 밖에 안 남았다.
황태자는 입을 벌리고 이단심문관을 바라봤다. 설마 이단심문관이 저토록 쉽게 처형을 실행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윽 으…!”
그리고 놀라운 일, 아니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황태자가 뒷걸음질을 치더니 도망치려 한 것이다. 은백합 영애가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 이단심문관이 “앗!” 하고 소리를 낸 순간, 황태자는 뛰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황태자는 도망치는 데 성공할 뻔했다. 그래. 일행들의 뒤편에 있던 내가 지하실 계단을 막아서지 않았다면.
“무, 무엄하군! 일개 종자 주제에 누구의 앞길을 막는 것인가!”
“당신.”
나는 황태자의 손목을 낚아채서 쥐었다. 꾸욱! 작정하고 힘을 줬다.
황태자는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실패했다. 낮은 비명이 흘렀다. 애당초 상대방은 나와 악력에서 비교가 안 되었다.
“당신이라니… 크윽! 당장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당신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닙니까.”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서늘했다. 평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당신이 시답잖게 암살을 사주하지만 않았어도 이럴 일은 없었습니다. 사랑에 미쳐서 납치극을 벌인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미쳤다는 이유로 책임까지 외면할 생각입니까?”
나는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잡으십시오.”
“자, 잡으라니… 무엇을….”
“칼. 잡으라고.”
황태자가 움찔거렸다.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9%입니다.]몰입이 심해졌지만 상관없다. 지금 나의 심정은 집사 본인과 똑같았다. 비겁한 도피에 대한 분노.
나는 황태자의 손목을 잡아서 끌었다. 태자가 저항했다. 내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악했다. 하지만 나는 무시하고 황태자를 데려갔다.
“칼자루를 잡으십시오.”
“윽, 무엄한, 것…! 감히…!”
잡으려 하지 않았기에 억지로 잡게 했다.
“검을 똑바로 올리십시오.”
“놓아라! 놓으라고 명령했다! 아, 아무도 없느냐?!”
올리지 않으려 했기에 억지로 올렸다.
“이 때까지 당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탓하면서 살아왔을지 보입니다. 더러운 일, 추잡한 일, 손대기 싫은 일. 전부 은백합 공녀한테 떠넘겼을 테지요. 일국의 황태자라는 인간이 말입니다.”
“시, 실비아! 너의 종자를 말려다오! 부탁이다! 실비아!”
“검을 내리쳐서 베십시오.”
황태자의 팔힘은 보잘것없었다. 떨쳐내기 쉬웠다.
그래서, 떨쳤다.
“아.”
지하실에 피 냄새가 좀 더 진해졌다. 의자에 묶인 하인의 몸이 축 미끄러진 것이다.
황태자는 망연자실해진 얼굴로 눈앞을 바라보았다. 그런 황태자의 발치에서, 은백합 영애는 서서히 무릎을 굽혔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피 웅덩이에 내려앉아 붉게 물들었다.
“국본께서 법도를 바로 세우셨으니 만인의 홍복입니다. 전하.”
“…….”
황태자는 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등을 돌렸다. 이번에는 나도 손을 놓아주었다.
“마음을 굳게 잡으시어 앞으로도 신상필벌의 규율을 지키소서.”
태자가 힘빠진 걸음이로 지하실 계단을 올라갔다. 뚜벅, 뚜벅…. 그 동안에도 줄곧 은백합 영애는 충언을 올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황태자의 등에 부딪혀 지하실에 조곤조곤 흘렀다.
“이 나라의 명운과 백성들의 운명은 오직 태자 전하의 마음가짐에 달렸나이다. 전하께서는 홀로이신 듯해도 홀몸이 아닙니다. 전하의 행동과 결단 하나 하나가 제국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부디.”
발소리가 멀어지고 끊어졌다. 여전히 머리를 조아린 은백합 영애를 우리는 바라보고 있었다.
“강해지소서.”
나는.
이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9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