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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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백합 영애는 “단,” 하고 말했다.
“오늘부터 일주일. 세계가 멸망하기 전까지, 금사매 남작 영애의 집사가 아니라 나의 전속 하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공녀님의 전속 하인이……”
“그렇다. 나는 나의 사랑을 알 뿐이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적 없다. 내가 사랑하는 모습을 그대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어. 그러니 내 옆에서 잘 보고 잘 배워야지 않겠는가? 보고 배워라.”
“…….”
“말하고 나니 내가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군. 아니, 확실히 손해다. 나의 부끄러운 사생활을 공개해주는 것 아닌가? 전생, 현생, 내생, 다 합쳐서 삼생의 행운으로 알거라. 평민.”
정말로 도도한 귀족님이다.
2.
다음날부터 나의 이중계약 생활이 시작됐다.
금사매 영애뿐만 아니라 은백합 영애까지 주인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흐음. 왔는가?”
“예.”
은백합 영애는 치장실에서 나를 맞이했다.
새벽 5시.
이미 영애는 깨어나 있었다. 시종 네 명이 한꺼번에 달라붙어서 그녀를 치장했다. 본래 투왈렛 룸, 치장실에 발을 들이는 것은 큰 결례였지만 은백합 영애 본인이 “귀찮다, 신경 꺼라” 하고 일축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공녀는 말했다.
“보여주게.”
“예. 아가씨.”
반백의 하인이 척, 판자를 꺼냈다. 판자엔 백합 꽃무늬가 꾸며졌다. 그리고 멋진 필기체로 문장이 적혀 있었다.
+
LESSON 1. (기초)
사랑은 개새끼를 경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
“…….”
“어젯밤에 고민했다. 그대에게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택해야 좋을지. 내가 그대에게만 신경 쓸 정도로 여유로운 것도 아니거니와, 그대의 첫사랑을 찾아줄 수야 없는 노릇이다. 안 그런가?”
내가 말문을 잃어서 멍하게 있는 가운데, 은백합 영애는 담담하게도 말했다. 그녀의 주변에선 시종들이 주인을 닮은 무표정으로 영애의 오른손 손톱을 다듬었다.
“그래서 그대가 미리 알아두어야 할 진실들을 차근차근 가르쳐주기로 했다. 여보아라. 복창하거라. 사랑은 개새끼를 경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사, 사랑은 개새끼를 경험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렇다. 개새끼다. 어쩌면 개새끼들일 수도 있지.”
은백합 영애가 왼손으로 부채를 꺼냈다 촤르륵! 깔끔하고도 청명한 소리를 내며 부채가 펼쳐졌다. 공작 영애는 하관을 부채로 가렸다.
“첫사랑부터 완벽한 만남을 가지는 연인도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 존재할 것이다. 처음부터 서로 배려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아서, 첫눈에 반한 이후 관에 파묻힐 때까지, 낭만적인 사랑을 나누는 연인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너는 아니다.”
“…….”
“네가 만나게 될 연인은 99%의 확률로 개새끼다. 당장은 개새끼가 아니어도 언젠가는 개새끼가 된다. 어째서인가? 간단하다. 인간이 일 년 내내 개새끼가 아니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치로,”
차르륵.
은백합 영애가 부채를 접어서 반백의 하인을 가리켰다. 그러자 하인은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처럼 무덤덤하게 판자를 뒤집었다. 판자의 뒤편에도 문장이 적힌 것이다.
+
LESSON 1. (심화)
너도 개새끼다.
+
“그대 역시 개새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
“허나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거라. 인간이란 경험의 동물이다. 개새끼에게 당해본 자, 다시는 개새끼한테 당하지 않게 될 수 있다. 누군가한테 개새끼가 되어본 자, 다음에는 개새끼가 아니 될 수 있다. [어떤 인간이 개새끼인가], [나는 언제 개새끼가 되는가], [어떻게 해야 개새끼가 되지 않는가]를 터득하는 것이다.”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처, 처음부터 잘할 순 없어요?”
“집사.”
은백합 영애는 무표정했다.
“인간한테 기대를 하지 마라.”
“…….”
“인간은 자기가 한 말을 잊는다. 결심했다가 포기한다. 망각과 포기. 이 두 단어를 연애의 기본 철칙인 줄 알아라. 그대가 정말로 사랑을 잘하고 싶다면 정반대로, [기억]하는 법과 [결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 기억과 결심이란 것도 배우는 건가요?”
“완전 어린애로군….”
은백합 영애가 한숨을 쉬었다. 뭐지.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진짜 전혀 모르겠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내가 직접 보여주마.”
직접 보여준다고?
어떻게요?
“두 눈으로 봤는데도 모르는가.”
은백합 영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기 고양이들처럼 붙어 있던 시종들이 일제히 물러섰다. 하인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은백합 영애는 당당히 말했다.
“천하제일의 개새끼를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어.
왜 멋있냐.
“가지.”
은백합 영애가 걸어갔고 나는 따랐다. 나만 아니라 하인들도 종종 뒤따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인들은 물통을 들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아카데미에서 가장 화려한 숙소. 황태자가 머무르는 곳이었다.
“고, 공작 영애.”
황태자의 시종들이 당황하며 우리를 맞이했다. 기가 눌렸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공작가라 해도 황실보다 격이 높을 리 없는데, 이상하게도 은백합 영애한테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는 분위기다.
“드, 드셨습니까?”
“들었다.”
“아침이 아직 밝지도 않았사온데….”
“태자 전하께선 기침하셨는가? 군왕의 아침은 무릇 백성의 아침보다 일러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
“안 하셨겠지. 안내하거라.”
황태자의 시종이 떨었다.
“태, 태자 전하께서 엄명을 내리셔서….”
“무슨 엄명인가? 아니다. 알 만하다. 앞으로 내가 방문하거든 절대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런가?”
“아뢰옵기 송구하게도….”
“황상께서 국본을 이 학원에 보내실 적에 특별히 나를 부르셨으니. [국본의 생활이 나태하고 자칫 방자해질 수 있으니 약혼자인 네가 수고해주어야 겠다]라고 명하신 바 있다. 내가 태자 전하를 돌봄은 폐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너는 황실의 시종이렷다. 고해보거라. 네가 태자 전하의 하인이냐? 아니면 황제 폐하의 백성이더냐.”
“고, 공녀님.”
“너희가 주제에 태자 전하의 하인이라고 폐하의 황명을 거부하느냐? 황상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면 참으로 기뻐하시겠군.”
1분 만에 상황이 종결됐다.
황실에서 파견된 하인들 가운데 은백합 영애를 막아선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공작 영애는 정원을 가로질렀고, 로비를 건넜으며, 마침내 황태자의 침실에 당도했다.
“전하.”
세 번의 노크.
“기침하셨사옵니까?”
“들어오지 마라!”
“기침하셨군요. 들어가겠나이다.”
은백합 영애는 당연하다는 듯 열쇠를 꺼내어 방문을 열었다. 철컥. 황태자의 침실이 열리며 우리를 환영했다. 정작 침실의 주인은 침대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지만 말이다.
“히익?!”
“전하, 새벽이 밝았는데 아직도 침대에 누워 계시다니요. 아니 될 일입니다. 황상께서는 매일 4시에 일어나시어 제국의 국무를 돌보시옵니다. 장차 대업을 이으셔야 할 국본이 그보다 게을러서야 되겠습니까?”
“여 보아라! 게 아무도 없느냐! 누가 나 좀……”
“문을 닫아라.”
방문이 쿵, 닫혔다. 침실엔 황실 소속의 시종이 한 명도 없었다. 오직 은백합 영애의 수하들이 무표정하게 도열했을 뿐. 황태자는 어깨 떨림 증세가 악화되었다.
은백합 영애는 입술을 열었다.
“집사여.”
“예, 예에.”
“그대에게 두 번째 가르침을 내리마.”
영애가 반백의 하인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하인은 미리 준비한 종이 판자를 들어 올렸다.
+
LESSON 2. (기초)
개새끼를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
“즈, 즐기다니….”
“그대도 언젠가는 사랑을 할 테지. 그리고 첫사랑으로 개새끼를 만날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조언하는데, 어차피 그리될 것이라면 차라리 즐겨라.”
은백합 영애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개새끼와의 만남을 즐기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
반백의 하인이 능숙하게 판자를 뒤집었다.
+
LESSON 2. (심화)
상대방보다 더한 개새끼가 되어라.
+
촤아아악!
하인들이 물통을 들어서 침대에 뿌렸다. 바로 지금 순간을 위해서 여기까지 물통을 들고 온 것이었다. “흐억?!” 물벼락을 맞은 황태자가 펄쩍거렸다. 라면사리가 탱탱 불었다.
“—개새끼와의 연애는 전쟁이다.”
그런 태자를 은백합 영애는 담담히 쳐다봤다.
“가능하다면 전쟁은 피하는 편이 좋다. 평화는 최고의 가치다. 상대방이 친절하다면? 그대도 친절해져라. 상대방이 착하다면? 그대 역시 착해야 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불가피한 개새끼라면, 명심하라.”
은백합 영애가 부채를 꺼냈다. 아까와는 또 다른 부채였다. 놀랍게도 이 부채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오늘의 표어:
개새끼한테 착해지지 마라.
+
미친.
“복창해라. 착해지지 마라.”
“차, 착해지지 마라.”
“인간은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동물이다. 멋진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뭘 좀 아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인간이 있다. 그리고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인간도 있지. 내가 볼 때 그대는 마지막 부류에 속한다. 자제해라.”
그러나 공녀님은 자제하지 않았다. 전혀.
“문을 열거라.”
하인들이 방문을 열었다. 문 앞 복도에선 황실 소속의 시종들이 안절부절 서 있었다.
“무엇들 하느냐?”
은백합 영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태자 전하께서 젖으셨다. 아무리 계절이 봄이어서 선선하다지만 자칫 국본의 몸이 상해버릴까 두렵구나. 어서 환복해드리거라.”
“저, 전하!”
황실의 시종들이 헐레벌떡 달려들었다. 그들은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수건을 한 장씩 들었다. 여기서 내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은백합 영애가 물벼락 작전을 쓴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새겨들어라. 이것이 연애의 방정식이니.”
은백합 영애는 천천히 복도로 나섰다.
“잘생긴 사람이 똑똑한 사람한테 진다. 똑똑한 사람이 개같은 사람한테 진다. 따라서 사랑의 정점에 오르는 자는, 개같이 똑똑한 미인이다. 집사여. 그대는 이러한 진실을 깨우쳐서 열심히 자기 자신을 연마해야 할 것이다.”
“어….”
뒤를 돌아 보면, 황태자의 침실에선 여전히 난리가 벌어지고 있다.
“제가 생각한 사랑이랑 좀 많이 다르네요. 저는 뭔가……”
“더 낭만적인 것을 기대했다고?”
“예, 그리고……”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사랑을 하는 것인 줄 알았으렷다.”
“네…….”
“그것도 맞다.”
은백합 영애는 부채를 던졌다. 휙. 반백의 하인이 솜씨 좋게 부채를 캐치해서 품에 갈무리했다. 우리는 응접실로 걸어가며 말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대의 행운에 달린 일이다. 첫눈에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인연을 만나는 것.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대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누구를 보고 두근거릴지 또한 결정된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사실, 상대방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한눈에 보여서 그러는 것이다.”
“어려운 말씀이네요….”
“어렵지.”
영애의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정 어려우면, 시험해볼 테냐?”
시험.
“무슨 시험인가요?”
“그대가 내게 두근거릴지 시험해보겠냐는 말이다.”
“……어떻게 해야 두근거리게 됩니까?”
“그대가 기특한 짓을 하면 된다.”
기특한 짓.
“기특한 짓이란 건, 뭡니까?”
“그것까지 내가 알려주어야 하겠는가. 아예 그대의 님을 찾아서 대령해달라 부탁하지 그러느냐?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여 답을 내보거라. 집사여. 그대는 똑똑하니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른다.
“…….”
“정답인지 오답인지 정도는 무료로 알려주마.”
우리는 응접실에 도착했다. 분명 황태자가 머무르는 숙소인데, 공작 영애는 자기집 안방처럼 편히 걸어 다녔다. 그녀는 나를 제외한 하인들을 모두 물리고 의자에 앉았다.
붉은 카펫이 깔린 방.
밑바닥과 똑같은 색깔의 눈동자가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음.
“후우……”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식도를 타고 들어간 숨이 폐에서 단단한 알맹이처럼 고였다. 단순한 호흡에 불과했어도, 나는 그걸 결심(決心)의 증거로 삼기로 했다.
품속에서 카드를 꺼냈다.
+
[안면인식장애 카드] [이런 우연이? 결정적 비밀 엿듣기! 카드] [ 아차!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 ! 나도 모르게 그만 말실수! 카드]+
묵시록에 들어오기 전, 도서관장이 ‘천군만마가 되어줄 것’이라며 준 선물. 본래는 이번 스테이지에서 사용할 예정인 카드들이다. 은백합 영애가 머리를 기울였다.
“……? 무엇인가?”
“방구석 도서관장이 저한테 준 카드들이에요.”
그리고.
“공녀의 말씀에 따르면 이것들도, 일종의 [공략집]이겠지요.”
지이익!
나는 망설임 없이 카드들을 찢었다.
찢어진 카드들은 빛깔 고운 모래처럼 흩어졌다. 흔적도 없이.
[방구석 도서관장이 당신의 결단에 놀랍니다.]어쩌면 저 카드들이 스테이지를 공략하는 데 정말로 큰 도움을 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한테 진심을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방구석 도서관장이 당신의 진의를 깨닫고 박수를 보냅니다.]보상은 보상에 불과하다.
지름길은 지름길일 때 의미 있는 법.
내가 보상에 집착해야 할 까닭이 없고, 지름길이 아니게 된 길에 뜻을 두어야 할 이유도 없다.
“……호오.”
은백합 영애는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았다.
“과연.”
빨간 눈동자가 피를 머금은 것처럼 반짝였다.
“기특하군.”
은백합 영애는 가볍게 손짓했다.
“이리 오거라.”
다가섰다.
“턱이 높다. 머리를 숙여라.”
숙였다.
은백합 영애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잘했다.”
영애는 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그것이 무엇인지 처음엔 몰랐다. 하지만, 뽕, 하고 뚜껑이 열린 순간에 깨달았다. 파란색 향기. 향수병이었다.
은백합 영애는 장갑을 벗었다.
새끼손가락으로 향수병 입구를 훑었고.
“미리 말해두마.”
내 목덜미로 손을 뻗어서, 스으윽. 귓등에 점을 찍었다.
“나는 그대를 책임지지 않겠다.”
향香.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강한 꽃향기.
“——.”
흰 백합의 냄새.
한순간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향기롭느냐?”
은백합 영애가 내 오른손을 쥐었다. 깍지가 끼워졌다는 사실을, 나는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향기가 머릿속을 방해해서 시간이 버벅거리고 있었다.
“예…….”
“마음에 들었느냐.”
“……예.”
은백합 영애의 붉은 눈이 기울어졌다.
“내 마음에도 드는구나. 내가 제일 아끼는 향기다. 좋아하는 향이지.”
소곤. 목소리가 목덜미에 기어올랐다.
“그대가 내게 스스로 비밀을 고백하여 파기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 계속해서 나를 시종하여라. 오늘 밤, 나 역시 그대에게 하나의 비밀을 알려주마.”
심장이 두근거린다.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큰일이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15%입니다.]나, 이 사람한테 꽂힐 거 같다.
9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