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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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울에서 흘러나온 피가 주위를 덮쳤다.
처음엔 한두 방울이 떨어졌을 뿐이다. 미처 다 잠그지 못한 수도꼭지처럼 핏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디잉… 디잉…… 멀리서 괘종시계가 울린 순간, 핏줄기가 일변했다. 거울의 틈새에서 피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진 것이다.
디잉…….
열두 시. 열두 번의 타종(打鐘).
한 방울이 한 줄기로 불어났다.
한 줄기는 여섯 줄기로 갈라졌다.
복도는 피로 뒤덮였다.
붉은 피바다.
괘종시계에서 마지막 종을 알렸다.
우리는 피로 이루어진 카펫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공녀님.”
나는 본능적으로 은백합 영애의 어깨를 감쌌다. 발목까지 피 웅덩이에 잠겼다. 슬라임같이 질척거리는 감촉이 불길했다.
“이건……”
“나의 악몽이다.”
은백합 영애가 나의 품에서 소곤거렸다.
“경계심을 늦추지 마라. 집사. 이미 이곳은 이계(異界)와 다름없다.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벌컥! 피바다에서 거품들이 솟아났다.
수천의 거품이 벌어지고 수천의 거품이 터졌다.
그러나 그중, 거품처럼 사라지는 대신에 온전한 모습을 갖춘 놈들이 더러 있었다.
[은으로 도금된 심장이 현현합니다.]그것들은 입술처럼 생긴 악마였다. 아니. 입술 그 자체였다. 얼굴이 없었고 몸이 없었으며, 단지 붉은 입술과 붉은 혓바닥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히죽 웃었다.
-태자 전하.
-증오스러워라.
피거품의 입술은 끊임없이 솟아났다가 터지기를 반복했다. 그것들이 중얼거리는 말은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잘 끊어졌다. 지독한 불협화음을 내는 합창처럼.
-상냥하신 태자 전하.
-아직 태자가 아니시던 시절에, 왕자님은 꽃을 따주셨어.
-내 눈물을 당신의 옷소매로 닦아주셨지. 그래도 착하신 분이야.
-마음이 여리셔서 그래.
-그래도,
파앗!
은백합 영애가 레이피어를 찔러서 피거품의 입술을 꿰뚫었다. 악마가 터졌다. 그렇지만 터진 것보다 두 배, 세 배 더 많은 혓바닥이 피바다에서 숫구쳤다.
악마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빨갛게 울렸다.
-사랑스러워라.
나 역시 칼을 휘둘렀다.
-태어날 때부터 잘난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악마들의 전투력은 보잘것없었다. 저것들은 우리에게 반항조차 안 했다. 순순히 칼날을 맞았다.
단지.
-못나신 분이지만.
-못난 사람을 끌어안아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야.
신경에 거슬렸다.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라 정신적인 공격.
-사랑하고 있어요. 전하.
-나도 사랑할 줄 알아.
-나는 사랑하는 귀족이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불쾌했다. 더 빠르게 검을 휘둘러서 피거품을 베었다.
-나를 죽일 거니?
-소용없어. 비극은 짓밟을수록 더 달콤해지는걸.
-금사매. 그것이 태자 전하께 꼬리치는 거 봤어?
-역겨워라.
피바다가 웃으면서 넘실거렸다.
-그분께서는 순진하시어서 아직도 낭만적인 삶을 꿈꾸시지. 전하께선 금사매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저 황위에서 도망치는 탈출구로 삼으시는 것에 불과해.
-불쌍하신 전하.
-가여우신 전하.
젠장.
나는 이것과 비슷한 현상을 목격한 적 있다.
‘가을비의 마왕!’
아직 내게 거두어져 아귀(飯鬼)라는 이름을 받기 전. 그 시절에 성좌가 이러했다. 마왕은 하늘에서 핏물을 흘렸고, 몬스터 군단을 자유자재로 부렸다.
이것은 성좌가 지닌 힘이다.
저 악마들은 은백합 영애의 사역마다.
[은으로 도금된 심장의 존재가 한층 더 뚜렷해집니다.]피바다에서 입술 이외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손이었다.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와 신랑처럼 두 개의 손이 서로 맞잡았다.
-라비엘. 너의 가문과 황실이 우리를 약혼시켰어.
-약혼, 인가요
-응. 하지만 나는 정략결혼을 원하지 않아.
악마의 손이 서로 깍지를 꼈다.
피로 이루어진 손에서는 끝도 없이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나는 저 악마들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연극같이 시연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른들이 멋대로 맺은 약혼은 무시해. 어른들과 상관없이 나는 너를 사랑할게. 오늘은 너한테 정식으로 청혼하러 온 거야.
-왕자님.
-라비엘. 우리가 조금 더 자라면, 나와 결혼해주겠어?
수십 개의 입술이 주위를 둘러쌌다.
그것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예.
-꼭 너를 사랑할게.
-저도 왕자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저런, 개자식.
저딴 말을 지껄여 놓고도 책임을 안 졌다고?
-아마도 태자 전하께선 잊어버리셨을 거야.
-어린 시절에 한 약속이니까.
-어쩔 수 없어.
-사람들은 잘도 망각하지.
피거품의 입술들이 까르르 웃었다.
-어쩔 수 없어!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나는 열이 뻗쳤다.
철퍽! 한 걸음 나아가면서, 앞발에 오러를 집중시켰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팔식第八式.
소사연검燒死連劍.
피의 물결이 퍼지면서 내 오러도 번졌다.
복도에 뒤덮인 피바다를 오러로 지져버린 것이다.
-어쭈.
내 뒤에서 배후령이 말했다.
-이제 이런 잡몹들은 한방거리도 안 되네? 많이 컸다, 우리 뱁새.
평소라면 배후령의 이죽거리는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복도를 쓸어버렸다. 악마들이 타올랐다. 악마들은 사라지면서 비명도 안 질렀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웃어서 사람을 열 받게 했다.
“제기랄.”
일격에 악마들을 불살랐지만, 여전히 나는 속이 부글거렸다.
황태자에 대한 분노. 경멸.
저런 작자 때문에 은백합 영애처럼 고귀한 사람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 심지어 영원히 돌이키지 못할 소원이 되어버렸다는 것. 그것들이 나를 화나게 했다.
“언제부터……!”
훅, 하고 내가 숨을 들이마셨다.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열 받았다고 해서 은백합 영애한테 소리를 높이고 싶진 않았다.
“……언제부터 성좌가 되신 거예요? 이것들은 성좌의 사역마입니다. 공녀께서 만드신 것들이지요.”
그러기에 우리를 아군으로 인식하고 저항도 안 한 것이리라.
은백합 영애 또한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심장에 단검을 박은 순간 벌어졌던 일이다.”
어느덧 핏물이 거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꾸물럭. 꾸물. 피의 줄기들이 거울의 틈새로 기어들었다.
역행(逆行). 마치 거머리들같이 꾸물꾸물거리는 핏방울을, 은백합 영애는 조용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본래 이 세계엔 성좌가 없는 듯하다. 원래 있었으나 살해당한 것인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 어느 쪽인지는 알기 어렵군.”
아마도 레판타 아이김이 성좌를 죽였겠지. 하지만 당장은 그걸 논할 때가 아니다. 나는 은백합 영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지날 동안, 악마들은 점점 더 강대해진다. 그리고 그 숫자도 방대해지며, 형태도 거대해지지. 지금과 같은 통제도 힘들어진다. 그리고 열흘째가 되면.”
열흘째가 되면.
거기서, 은백합 영애는 잠시 말을 멎었다. 그리고 한 차례 고개를 젓고는 말을 달리 이어갔다.
“…..아무튼 열흘이 반복되기 시작하면서 나는 저절로 [세계의 대표자]가 되었다. 설령 원치 않더라도, 이 세계의 시계침은 나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흐음.
배후령이 턱을 짚었다.
-정상적인 승천(昇天)은 아니야. 무림으로 따지면 정파가 아니라 사파의 방법을 써서 경지에 오른 거다. 쟤가 거울에 꽃은 검은, 조각 난 파편에 불과하긴 해도 일단 [수호의 여신]이었던 성물이니까.
배후령은 ‘뭐,’ 하고 중얼거렸다.
-저런 걸 심장에 박아버리면 그야 싫어도 성좌로 등극해버리지…. 심지어 회귀까지 반복하면, 그건 사람의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인과가 아니게 되거든. 온전한 성좌가 아니라 반푼이 성좌지만. 아무튼 여러 우연이 겹쳐서 빚어진 결과겠어.
‘사람이 원하지 않는데도 성좌가 될 수 있어요?’
-엉. 그럼 좀비 너는 원해서 인간으로 태어났냐?
진짜, 이 양반은 말을 해도 꼭.
-중요한 건 조건이지. 의지가 아니야. 자기가 인간이라 괴로워하는 사람이 널렸고, 성좌가 되어서 괴로워하는 놈들도 의외로 흔해. 삶을 불행으로 만들긴 참 쉽거든. 알겠느냐, 마교 소교주야?
“후우……”
나는 황태자에 대한 분노를 가슴 속에서 삭혔다. 삭여진 분노는 입안에서 쓴맛이 났다.
그런 내 모습을 은백합 영애가 바라보았다.
“이상하군. 실망하지 않았는가?”
“네?”
“그대가 한 말이 맞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저 악마들은 나의 사역마다. 저것들은 없는 말을 지어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전부 내가 꿈속에서 중얼거린 소리들이고, 무의식에서라도 읊은 말들이다.”
은백합 영애는 머리를 기울였다.
“나는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했다. 그 사랑을 순수한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날마다 내 사랑에 쌓이는 먼지와 허물을 덜어내야 한다.”
실망감.
답답함.
해주는 만큼 보답받고 싶다는 심정.
“그 결과물이 저것들인 것이다.”
마음의 기름때.
가장 순수한 의미로서의 저주.
“추악하지 않은가.”
은백합 영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그대한테 사랑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알려주었을 뿐. 이쯤에서 사랑을 거두려 했다. 환상을 깨주기 위하여 일부러 여기로 데려 왔거늘.”
“실망이요?”
나도 모르게 숨이 새어 나왔다. 한숨이 아니다. 간신히 분노를 정제한 숨결이다.
“추하지 않느냐고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공녀. 이 정도 일 가지고 당신께 실망할 일은 절대로 없어요.”
“……이 정도?”
“당신은 비밀을 알려주었어요. 저한테 심장을 있는 그대로 꺼내서 보여줬어요. 정말로 추악한 사람은 말입니다, 영애. 절대로 자기 심장을 다른 상대한테 보여주지 않아요. 태평한 척. 태연한 척. 사람을 상처 입힐 줄만 알지요.”
염제 개새끼.
“오히려 제가 심하면 더 심한 인간입니다. 제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알면 공녀야말로 질색하실걸요?”
“궁금해지는군.”
“저를 떼어낼 생각으로 여길 데려온 거라면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공녀. 저는 당신이 추악하지 않은 인간이라서 사랑하게 된 게 아니에요.”
은백합 영애가 아주 잠깐 멈칫했다. 사랑. 이 말 때문이다. 이 낱말을 입 밖으로 낼 때 내 얼굴도 화끈해졌지만, 그렇다고 머뭇거릴 생각은 없었다.
“나를 사모하게 된 지 이제 겨우 하루다. 교언이 영롱하다.”
“하루라서 문제입니까? 당신을 사랑하고 1년이 지나면 되겠습니까? 1000일이 지나면 되겠습니까? 제가 그다음에 오면 될까요.”
“…….”
“저는 당신이 어떤 인간을 혐오하고 경멸하는지 눈에 보여요. 제가 혐오하고 경멸하는 것을, 당신도 똑같이 싫어하겠지요. 당신이 무엇에 상처를 입고 아파하는지도 알 수 있어요. 저는 당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저도 당신도 똑같은 삶을 살고 있으니까.”
내 말이 전해질까? 내 뜻이 제대로 표현되고 있을까?
알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해본 적 없다.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눈앞의 사람을 가지고 싶다. 은백합 영애가 나를 가지기를 원한다. 서로가 서로를 소유하여 하나의 삶을 나누고 싶다.
“제가 저 자신을 좋아하는 만큼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저를 사랑하게 되면 좋겠어요.”
그것이 나의 진심이다.
그리고 나는 내 진심에 전력을 다하는 방법밖에 모른다.
“반드시 당신이 저를 사랑하도록 만들 거예요. 황태자를 버리라는 말씀은 안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당신이 황태자를 버리게 될 겁니다.”
“나의 심장은……”
“예. 당신의 심장이 세계에 저당이 잡혀 있든 말든 상관없어요. 그게 문제라면, 제가 해결할 거예요. 그런데도 당신이 여전히 황태자를 사랑한다면, 제가, 황태자보다 압도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어서 당신 눈앞에 얼쩡거리지요.”
“…….”
“어린 시절에 황태자가 당신한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했어요? 그것도 상관없어요.”
나는 은백합 영애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희 두 사람은 회귀자예요. 이 세상에서 두 사람밖에 없는.”
알 수 있다. 지금 내 얼굴은 빨개졌다. 그래도 해야 할 말을 했다.
“당신과 저만이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많고도 많을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황태자의 기억 같은 것은 빛이 바랠 정도로 숨 막히는 추억을 선물하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흐음.”
은백합 영애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최후의 열흘을 무한히 반복할셈인가? 지쳐 떨어질 것이다.”
“협박이 안됩니다. 제가 똑같은 날들을 반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그대에게 지쳐 내 눈앞에서 사라져달라 말한다면?”
“사라지겠지만.”
나는 손을 움직였다. 움직여서, 악마들과 싸우던 도중 등잔불을 잃어버린 은백합 영애의 손끝을 잡았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무척. 다행히도 나에겐 필요한 만큼의 용기는 있었다.
“애초부터 그럴 일이 없을 거예요.”
“왜인가?”
“공녀께서는 황태자에게도 지치지 않으신 분이고, 저는 황태자보다 나은 인간이니까요. 만약 제가 껄끄럽다면 지금 말씀해주십시오. 사라지겠습니다.”
침묵.
은백합 영애는 내 얼굴을 보았다.
“……난감하군.”
공녀의 입술이 열렸다.
“귀찮다 여겨야 할 터인데, 지금 나는 그대가 귀찮지 않다. 쉽게 귀찮아질 것 같지도 않구나.”
그 순간이었다.
“……사! ……!”
복도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한 소리였다. 하인들마저 잠들어서 조용하기만 했던 공녀의 숙소는 불현듯 소란스러워졌다.
“……어디에……! 집……!”
곧이어 발소리가 우르르 들렸다. 시종들이 깨어난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불이 밝혀졌고, 얼마 안 가서, 우리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반백의 하인이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은백합 영애는 내 손을 놓았다.
“이 야심한 시간에 무슨 소동인가?”
“아뢰기 송구하오나……”
그 때. 멀리서 소란을 피운 목소리가 지금까지보다 확실하게 들려왔다.
“집사! 어디 있습니까, 집사!”
나는 얼굴이 굳어졌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반백의 하인이 우리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금사매 남작 영애가 난동을 피우고 있습니다.”
10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