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13
Book 3 Chapter 3
―뭘 줄 수 있는지부터 들어 보지.
정성호의 문자를 확인한 주상혁은 절로 웃음이 피었다.
“뭘 줄 수 있냐고?”
주상혁이 바라는 전형적인 답변의 유형이었다.
상대가 S급인 것을 알면서 이런 문자를 보냈다.
그야말로 조건만 맞춰 주면 얼마든지 포섭 가능하단 소리였다.
주상혁이 문자를 보냈다.
―12% 포션을 드리겠습니다.
―15%가 아니라?
―그건 단순히 저를 신뢰해 달라고 드린 그야말로 선물. 사실 제작 조건이 정립되지 않아서 생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물건입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여수로 오기 전에 한 노력이 아직 생생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주상혁에게 정성호는 전동욱과 크게 다르지 않다.
통제할 수 없는 사람에게 더 큰 힘을 쥐여 준다는 건 바보나 할 짓이었다.
15% 포션을 지급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주상혁도 이건 알고 있다.
15% 포션의 맛을 본 정성호가 쉽게 납득하지 못할 조건이라는 것은 말이다.
“그래서 대신 준비한 게 있지.”
주상혁이 그것을 문자로 보냈다.
―대신 12% 포션이라면 정기적으로 매달 50개가량 무료로 공급해 드리겠다 약속하죠. 또 앞으로 10%를 넘는 폴라나 포션은 시중에 판매하지 않겠다고도 약속하겠습니다.
12% 포션의 독점.
이 정도면 십 대 길드 중 난항을 겪는 중인 신라길드 측에서 거부하지 못할 메리트였다.
―두 배.
―네?
―그 개수에 두 배라면 협력하겠다고.
주상혁이 씩 웃었다.
어차피 전과 마찬가지로 12%는 대충 만들어도 금방 찍어 낼 수 있는 제품이다
수량은 두 배든 세 배든 문제없었다.
―좋습니다.
주상혁이 너무 쉽게 승낙했다고 느꼈는지 정성호의 의심이 느껴지는 문자가 도착했다.
―근데 그러고 보니 그쪽은 단순한 고용인 신분이었지? 제작자와는 이야기가 된 건가?
―30분쯤 기다리겠습니다. 박지훈 씨와 통화해 보시죠.
이미 박지훈과는 산삼을 구입하고 오는 길에 공중전화로 입을 맞춘 상태였다. 원한다면 계약서까지 써 주라고 말했다.
주상혁이 기다리는 중에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메시지 목록에는 다양한 메시지가 존재했다.
주상혁이 위조범의 문자를 클릭해 띄워 놓고는 고민했다.
“위치는 거기쯤이 좋으려나?”
경매장을 내려다보며 생각하던 주상혁이 문자를 입력했다.
―위치를 조금 바꾸죠.
* * *
습격이 있었던 어젯밤.
매튜는 여러 가지 의문이 피어났다.
어째서 이렇게 빨리 위조 폴라나 포션인 게 들켰는지. 또한, 어째서 클린트 경매장 쪽에서 과한 전력을 투입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아니면 애초에 우리가 여기 숨어 있다는 걸 알았던 건가?’
그렇게 가정하면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클린트는 상당히 폐쇄적인 조직이고 상당히 권위적인 조직.
그런 그들의 소속원을 처참하게 학살했다.
자신과 샤오링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았다면 앞선 사건을 교훈 삼아 전력을 다해 부딪혀 오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무슨 수로?”
이게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이었다.
어떻게 자신들이 있는 곳을 이렇게 빨리 알았느냐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자 매튜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
밀고자.
밀고자가 있다는 가정이었다.
그것 때문에 당시 매튜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옆자리에 있던 주점의 주인장을 죽이는 일이었다.
아직까지 자신들을 드러낸 존재는 주인장뿐이었던 것.
하지만 그것 역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했다.
자신이 주인장이라면 밀고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의심받을게 자신인 줄 알면서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게 앞뒤가 안 맞았다.
‘박지훈?’
복잡하던 매튜의 머리는 의외로 딱 한 가지 가정을 대입하자 곧바로 스르륵 풀렸다.
바로 박지훈이었다.
박지훈의 입장이 되어서 모든 것을 생각하니 앞뒤가 풀렸다.
위조 폴라나 포션인게 거래 직후 바로 들킨 것.
경매장 전역에 자신들의 수배령이 쫙 풀려 있는 현 상황.
과한 병력이 이곳으로 온 것.
모든 정보가 모이자, ‘박지훈’이라는 인물이 닿은 것이었다.
매튜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재밌군. 잔머리 좀 굴릴 줄 안다는 건가?’
지이이잉.
―위치를 조금 바꾸죠.
오늘 낮에 보냈던 문자에 대한 답이 왔다.
혹시나 그대로 내뺐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위치를 바꾸자라…….”
함정.
어제도 그랬듯 이번에도 함정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탐색전은 이미 끝났다.
“한번 낚여 주지.”
매튜가 박지훈의 문자에 흔쾌히 승낙했다.
* * *
약속한 자정이 되기 삼십 분 전.
주상혁은 숙소를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울을 보고 준비하던 주상혁이 크게 심호흡했다.
“솔직히 좀 떨리네.”
무려 S급과의 전투.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주상혁이 약속 장소로 정한 곳은 얼마 전 강수호와 싸웠던 공원.
자정이 되니 그때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어두웠다.
터벅터벅.
약속한 시간이 되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튜와 샤오링이었다. 두 사람은 주상혁의 10m쯤 떨어진 곳에서 멈춰섰다.
두 사람을 알아봤지만, 주상혁은 모르는 척 연기했다.
“저에게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포션.”
“아…… 대신 나오신 겁니까?”
주상혁이 두 사람의 몸짓 하나하나에 신경 쓰며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조금만 실수해도 변사체가 되기 딱 좋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주상혁이 다가가자 샤오링이 고갯짓했다.
매튜가 들고 있는 상자를 주상혁에게 내밀었다.
주상혁이 포션을 넘겨받는 찰나에 매튜의 손이 주상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박스를 넘겨받던 주상혁이 매튜의 마나가 흐르는 안광을 확인하고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기괴한 웃음을 품은 매튜의 안구에는 서리바람 같은 마나가 맺혀 있었다.
주상혁이 큰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대표님!”
측면 풀 무더기에서 정성호가 쏘아졌다.
이미 쓸 수 있는 손이 하나인 매튜의 머릿속에 두 개의 선택지가 떠올랐다.
주상혁을 잡고 있는 손을 놓고 대응하는 것과 피하는 선택지.
‘피한다.’
매튜가 열심히 순간적으로 후자의 선택지를 고르고 몸을 피하려고했다. 그런데.
‘침?’
찰나의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던 찰나의 대가가 너무 컸다.
물러나는 걸 선택했지만, 주상혁이 뿌리고 간 침이 허벅지에 박히면서 매튜의 동작이 조금 늦어졌고 그 결과.
“츳…….“
우측 허리의 살점이 뜯겨 나가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정성호가 훌쩍 물러난 매튜를 경계하며 말했다.
“미안하군. 단박에 끝내 버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잽싸.”
“아니에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나머지도 잘 부탁하고요.”
끄덕.
정성호의 고갯짓을 본 주상혁이 돌연 경매장 외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예상보다 주상혁의 도망가는 속도가 제법 빠르자 샤오링과 매튜가 다급히 주상혁을 쫓아가려다가 깜짝 놀라 물러났다.
정성호가 살의 잔뜩 담긴 주먹을 휘둘러 왔기 때문.
매튜와 샤오링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샤오링이 말했다.
“다녀와, 버텨 볼 테니까.”
정성호를 협공한다면 처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래서야 주상혁을 놓친다.
지금 자신들이 할 목표는 주상혁.
보스 레이드가 아니었다.
매튜가 주상혁을 쫓기 시작했다.
부상 입었다고는 해도 매튜는 S급.
일단 달리기 시작하니 주상혁과 거리는 빠르게 좁혀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점처럼 보이던 주상혁이 점점 선명하게 보일 무렵이었다.
점점 어두운 경매장 외곽을 향해 달리던 주상혁이 모퉁이로 돌아서 골목으로 들어갔다.
주상혁을 따라서 들어간 매튜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망치기는 포기했나?”
주상혁은 길의 중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건 아니고 여기면 적당할 거 같아서.”
매튜의 눈에 주상혁의 손이 허공에서 사라졌다가 나오는 게 보였다.
‘뭐지?’
사라졌다가 나타난 주상혁의 양손에는 성인 남성 주먹 크기의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주상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알거든?”
“관상? 그게 뭐지?”
“있어, 얼굴 생겨 먹은 걸로 운명을 말하는.”
픽 웃은 매튜가 물었다.
“그래서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군.”
“니가 타죽을 상이더라고.”
주상혁이 양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매튜를 향해 던졌다.
“오늘!”
주상혁이 던전 두개의 물체를 확인한 매튜가 고민했다.
‘받아칠까?’
아니었다. 뭔지 모르는 물건.
지금은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매튜가 날아오는 물체를 피하려다가 인상을 구겼다.
허리춤의 상처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골목이라 처음부터 피할 장소가 얼마 없었던 것도 한몫했다.
첫 번째 물체는 피했지만, 두 번째 물체를 도저히 피할 수가 없다고 판단한 매튜가 결국 주먹으로 쳐 냈다.
물컹.
묘한 촉감이 매튜의 손을 타고 전해졌다. 물컹물컹한 감촉이 마치 슬라임을 때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파악.
매튜의 손에 닿았던 물건이 물풍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용물이 쏟아졌다.
“가솔린?”
매튜의 날카로운 후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때마침 주상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주!”
크아앙.
번쩍.
등 뒤에서 푸른색 뇌전과 함께 트럭만 한 생물이 나타났다.
비스듬히 돌아서려던 매튜의 어깨를 주주가 물어뜯었다.
순식간에 온몸을 뒤집는 고압 전류에 매튜가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파지지지직.
매튜를 지배한 전류는 하늘로 역천하는 거대한 용을 연상시킬 만큼 크고 아름다웠다.
* * *
주상혁이 박지훈에게 몇 개 얻어 감춰놓은 스테미너 포션과 마나 회복 포션을 거침없이 들이켰다.
전부 회복할 수는 없었지만, 어지러움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주상혁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전방을 바라봤다.
마나를 빌려 거대화한 주주.
주변의 어둠을 모조리 몰아내는 강력한 전류.
거의 30m 떨어진 이곳까지 지면을 타고 전해지는 스파크.
그 중심에서 가솔린과 함께 타오르는 매튜.
완벽한 작전이 먹혀든 상황이 눈을 통해 뇌로 전해졌다. 하지만…….
‘역시 어림도 없나?’
『Lv.48 청운해태.』
주주의 레벨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레벨의 차이가 너무 심했던 것 같다.
도핑 상태인 주상혁의 마나를 가져갔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십 대의 레벨인 주주가 S급 각성자를 제압하기란 무리가 있었다.
“이게 네놈의 함정이냐?”
“함정? 아직 시작도 안 했거든?”
주상혁이 침술키트에 마나를 주입해 침을 수십 방 투척했다.
허리에 입은 부상과 부러진 한쪽 팔.
‘거기에 주주의 전류까지.’
어쩌면 녀석의 인생에서 최고로 약해진 지금이라면 침이 최대치로 먹혀들 거라는 계산이었다.
평소라면 튕겨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침이 매튜의 몸에 하나둘 푹푹 박혀 들기 시작했다.
‘칫…… 급소는 마나로 강화한 건가?’
그 와중에도 심장과 미간을 비롯한 급소에 침을 던졌지만, 아쉽게도 그런 곳은 침이 박히지도 못하고 튕겨 나왔다.
“이런 같잖은 것쯤…….”
매튜가 움직이려고 하다가 당황한 기색을 지어 보였다.
“왜? 생각보다 잘 안 움직여져서 놀랐으려나?”
매튜가 조소를 짓는 주상혁을 노려봤다.
“무서우니까 그렇게 너무 노려보진 말고.”
주상혁이 침을 추가로 뿌리기 시작했다.
허벅지를 시작으로 전신에 빗발치듯 쏟아지던 침이 우측 어깨를 마지막으로 그쳤다. 매튜가 비틀거리더니 다시 한 번 눈을 부라렸다.
주상혁이 그런 매튜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내며 말했다.
“내가 한가지 궁금한 게 있거든?”
“궁금하다? 이 상황에 호기심이 생기나? 아니면 이걸로 이겼다고 생각하나?”
“별로. 딱히 이겼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매튜가 전신을 지배하는 전류에 저항하듯 이를 악물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주상혁이 말했다.
“나를 노린 이유가 뭐냐?”
“그 목 위에 달린 걸로 생각해 보시지……. 장식이 아니라면.”
매튜의 마나가 주변을 날려 버릴 듯 솟구쳤다. 매튜의 저항이 거세지자 어깨를 물고 있던 주주가 전력을 다해 물고 늘어졌다.
크르르릉.
전류가 더욱 강해졌다.
“끄으윽!”
“미안, 우리 개가 충성심이 좀 강해서.”
“이런 시시한 건…….”
매튜가 불타는 몸을 이끌고 주주의 전류에 저항했다. 과연 S급.
그새 전류에 익숙해졌는지 매튜가 삐걱삐걱 움직이려는 기색을 보였다.
주상혁이 깜짝 놀라 수십 발의 침을 추가로 날렸다.
푸푹푸푸푹.
‘뭐야, 더 없는 건가?’
침술키트에서 더 이상 침이 나오지 않는 게, 지금 던진 침이 전부인 것 같았다.
‘곤란한데…….’
예상보다 저항이 더 거셌다.
주상혁이 침이 떨어졌음에 당황해할 때였다.
티잉.
매튜의 허벅지에 박혀 있던 침 하나가 저절로 튕겨 나왔다. 그러고는…….
성큼.
매튜와 주상혁의 거리가 한 걸음 가까워졌다.
함정에 빠졌던 매튜가 한 걸음 걸어 나온 것이었다.
* * *
주상혁이 가까워진 거리만큼 뒤로 물러나고는 생각했다.
‘뭐, 뭐야 마나로 밀어낸 건가?’
이론상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굉장했다.
저런 상태에서도 이 정도로 저항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
회수를 사용해 바닥에 떨어진 침을 회수했다. 한 걸음 더 걸어오려는 매튜의 허벅지에 다시 투척했다.
침이 날아가 원하는 장소에 박혔지만, 처음 박혔을 때보다 그 깊이가 얕았다.
‘이미 마나로 방어를 시작했어.’
매튜가 주상혁을 노려봤다.
“왜 그렇게 당황하지?”
딱히 당황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결정타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경이로운 생명력에.
‘시간 싸움이라는 거겠지.’
지금까지는 작전이 잘 먹혀들어 갔지만, 이제부터는 초 단위 싸움이 될지도 모를 것 같았다.
매튜가 말했다.
“슬슬 다음 수를 꺼내 보시지 안 그러면…….”
티잉, 티잉.
침 서너 개가 매튜의 몸에서 밀려 나와 바닥을 굴렀다.
“안 그러면 뭐!”
주상혁이 침을 도로 불러들여 본래 자리에 투척하고는 매튜를 바라봤다.
“네가 뭘 어쩔 건데?”
역으로 보란 듯이 비웃어 줬다.
아직 평정심을 잃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상황은 아직 압도적으로 자신에게 유리.
생각보다 매튜의 저항이 강한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순간에 뭐가 어떻게 되고 할 상황은 아니었다.
“이렇게 할 거다……!”
매튜가 젖 먹던 힘까지 다시 마나를 짜냈다.
‘여기서 더 오른다고?’
전신에 박힌 수십 개의 침이 하나둘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건 좀 상정범위 밖이긴 했다.
‘진짜 내가 다시는 S급하고 엮이면 사람이 아니다.’
질린 얼굴을 해 보인 주상혁이 침이 떨어질 때마다 회수로 집어 와 잽싸게 다시 박아 넣기 시작했다.
삼 분쯤 대화 없이 공방을 이어 가던 매튜가 웃음을 흘렸다.
“크크큭…….”
삐걱, 삐걱…….
매튜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그저 한 걸음씩.
거북이처럼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트럭만 한 주주를 질질 끌고 다가오는 모습이 마치 악귀 같았다.
“글쎄, 가진 패가 있다면 꺼내 놓으라니까?”
주주가 안간힘 쓰며 늘어지는 게 보인다.
하지만 이제 슬슬 한계였다. 주주의 전류는 어느덧 많이 약해져 있었다.
‘어쩌지……?’
선택한다면 지금 여기서 해야 했다.
더 늦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지 모른다.
들어 놨던 보험이 반응이 없었던 것.
신호가 가고 오 분이 넘게 지났다. 오고도 남을 시간일 텐데 이상했다.
‘도망쳐? 아니면 최후까지 시간을 벌어?’
주상혁의 생각이 도망치는 쪽으로 기울었다.
‘끌어들여 놓고 혼자면 내빼는 게 정성호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역시 이대로 같이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오, 진짜 뭐 하는 거야 그 양반은!”
매튜가 다가올 때마다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던 주상혁이 도망을 선택하고 휙 돌아섰을 때였다.
뒤편에서 때마침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역지사지’란 사자성어 아십니까?”
* * *
전주를 떠나기 전 주상혁이 들어 뒀던 보험.
그 보험은 당연히 이번 상황을 역전시키기에 최적화된 패였다.
바로, 전동욱.
주상혁이 여태 봐 왔던 각성자 중 다섯 손가락 안에드는 강자였다.
휙 돌아선 주상혁이 답했다.
“뭐요? 역지사지?”
“그렇습니다. 이 경매장에서만 제가 벌써 닷새를 기다렸습니다만.”
전동욱이 주상혁에게 말했다.
“인성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고작 5분 기다린거 가지고.”
“됐고, 인성 타령할 시간 있으면 일단 저 녀석부터 어떻게 하시죠?”
“…….”
싹퉁바가지 없는 말 때문인지 전동욱이 조용히 선글라스와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봅니까?”
“목소리까지 닮았다 싶어서 말입니다.”
주상혁이 내심 움찔했지만, 역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거 안보입니까? 빨리요!”
“뭐, 일단 알겠습니다.”
주상혁이 일단 매튜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전동욱을 보며 안도의 숨을 뱉었다.
지금만큼은 누구보다 듬직한 등판을 보며 주상혁이 생각했다.
『Lv.74 전동욱.』
‘포션 먹었나 보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주상혁이 보낸 포션을 전동욱도 먹은 것 같았다. 정성호와는 다르게 18% 포션이기 때문인지 상승도 더 컸다.
전동욱이 매튜를 향해 말했다.
“급한 용무가 있어서 빨리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전동욱의 마나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만들기 시작했다.
“강력한 거로 준비하세요. 저놈 보통 놈이 아니니까.”
전동욱이 엄청난 전류 속에서도 이쪽을 향해 점점 다가오는 매튜를 응시하다 말했다.
“예. 그럴 생각입니다.”
주상혁이 거대한 화염구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주주에게 말했다.
“주주, 됐어!”
주상혁의 말에 주주가 푸른색 안개가 되어 팔찌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화르르르륵.
전동욱을 기점으로 부채꼴을 그리며 불꽃의 해일이 뿜어졌다.
순식간에 불꽃이 매튜를 집어삼켰다.
불꽃은 멈추지 않고 백 미터 정도를 쭉쭉 뻗어나간 뒤에야 시꺼먼 숯덩이를 뱉어냈다.
불꽃에 기반이 몽땅 타버린 건물들이 뒤늦게 일제히 무너져 내리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입이 쩍 벌어지는 엄청난 화력을 눈으로 감상하던 주상혁이 말했다.
“해치웠습니까?”
주상혁의 물음에 아직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하던 전동욱이 말했다.
“아니요. 불청객이 있군요.”
“불청객?”
그딴 게 있을 리가 없다. 샤오링은 정성호가 맡고 있었으니까.
‘혹시 다른 일행이 있나?’
괜히 다급해진 주상혁이 말했다.
“그럼 뭐 해요 추가로 공격하지 않고?”
“체력 낭비입니다.”
“체력 낭비여도 여세를 몰아서 공격해 둬야…….”
“그 말이 아닙니다.”
전동욱이 조금 전 매튜가 있었던 장소를 보며 말했다.
“싸움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조금 전에 불청객이 있다면서요?”“설명하는 거보다 보는 게 편할 겁니다.”
전동욱의 말이 들리고 잠시 후였다.
방금 전까지 매튜가 서있던 곳만 불꽃이 사라졌다.
불꽃이 사라진 그곳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전동욱의 공격도 완전 효과가 없진 않았는지 한쪽 팔이 불타 사라진 매튜와…….
‘저 여자가 어떻게?’
『Lv.71 샤오링.』
샤오링이 있었다.
분명히 불꽃이 삼켜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신기했다.
‘아니, 그보다 설마 정성호가 당했나?’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리 레벨이 승패를 결정하지 않는다지만, 어제 전투에서 지켜본 바로는 전투에 특화된 각성자가 아니었다.
주상혁이 일단 정성호에 대한 생각은 뒷전으로 밀어 놓았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저게 뭐죠? 배리어 같은 마법입니까?”
매튜와 샤오링의 주변으로는, 직경 5m 남짓의 검은 구체형태의 투명한 막이 존재했다.
“처음 보십니까? 전이 아티팩트입니다.”
“전이 아티팩트요? 저게요?”
전이 아티팩트, 들어 본 적이 있다.
아티팩트를 발동하면 지정해 놓은 지점으로 전송시켜 주는 아티팩트.
당연하지만,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물건은 아니었다.
주상혁이 말했다.
“듣기로는 꽤나 비싼 물건이라던데?”
“맞습니다. 제가 알기로도 전 세계에 열 개 내외 존재하는 걸로 알고 있으니까.”
주상혁이 점점 검은색 막이 짙어지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근데 정말로 공격해도 효과 없는 거 맞아요?”
“하는 수 없군요. 보여 드리겠습니다.”
전동욱이 이번엔 하늘에 전류를 일으켜 번개처럼 떨어트렸다.
주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설명이 됐습니까?”
이 정도 떨어져 있음에도 피부가 익어 버릴 것처럼 강렬한데 검은 막에 닿자마자 번개는 어딘가로 사라진 상태였다.
당연히 검은 막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색이 짙어졌다. 전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매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쪽 팔 값은 언젠가 반드시 받아 가도록 하지.”
주상혁이 사라지기 직전의 매튜가 남긴 말에 중얼거렸다.
“내가 이래서 관상은 안 믿는다니까.”
번쩍.
눈을 차마 뜨고 있기 힘들 정도로 강한 번쩍임이 일어났다.
눈을 멀게 만들 정도로 강했던 빛이 남긴 여운을 만끽하던 전동욱이 안경을 스마트하게 밀어올리며 뒤돌았다.
“자, 그럼 이제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 볼……?”
전동욱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상황 파악을 한 전동욱이 이마를 짚었다.
“설마…… 이런 전개는 예상 못 했는데…….”
* * *
주상혁은 전이가 완료되기 전에 미리 눈치를 보다 내뺐다.
어차피 그곳에 더 있어 봐야 달라질 게 없다.
그렇다면 혹여나 전동욱이 귀찮은 짓을 하기 전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전동욱과 거래하는 일.
다시 생각해 보니 여차여차 가능성이 있어보여서 감행했지만 가까이 뒀다가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제명에 죽긴 힘들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묘하게 예리하단 말이지, 그 양반.”
혹시 알아차린 건 아닐까, 간이 콩알만 해진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허억…… 허억…….
안전한 지역까지 전력으로 달린 주상혁이 거친 숨을 고르다가 허리를 폈다.
아까 도망치는 와중에 떠올랐던 알람이 보였다.
침술키트의 침이 최대 범위 밖을 벗어났습니다. 침이 자동으로 회수됩니다.
알림창을 이제야 치운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정성호 그 양반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았다.
“여기도 없네?”
주상혁이 돌아온 곳은 처음 접선 장소였다.
뺑 돌아오는 터라 거리가 훨씬 길어지긴 했지만, 여하튼 떨어트린 포션을 회수했다.
인벤토리에 포션 상자를 집어넣고 주상혁이 돌아섰을 때였다.
지이이잉
주상혁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무사한가?
정성호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여자 제 쪽으로 왔던데?
―설명하자면 좀 긴데 만나서 이야기하는 건 어떠신가?
―아니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그건 곤란합니다.
정성호가 하는 수 없이 문자로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정성호의 이어지는 문자를 읽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뭐야, 그럼 전이 아티팩트가 두 개였다고?”
전이 아티팩트는 거대한 마나를 소모하는 만큼 한 번 사용하면 충전해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성호가 말한 바에 따르면 어두운 곳에서 갑자기 번개가 일어나길래 잠깐 한눈을 팔았더니 그사이에 전이 아티팩트를 사용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놓고 말하면 운이 안 좋게 적절한 시기에 샤오링이 도착했을 뿐이고 종합하자면 그녀가 처음부터 두개의 전이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진짜 귀한 물건인 거잖아?’
근데 무슨 동네 완구점에서 구하는 장난감 같은 느낌이다.
지이잉
정성호의 문자가 도착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알고 있으리라 믿네.
주상혁은 정성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떼먹어서 무슨 골치 아픈 일이 생기라고 떼먹냐?”
본래 계약 조건을 이행할 생각이었다.
주상혁이 정성호의 문자에 답장을 보내고 집어넣었다.
“그럼 슬슬 가 볼까?”
* * *
전동욱이 경매장에 오게 된 이유는 하나의 소포 때문이었다.
폴라나 포션이 담겨 있던 소포에는 이런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클린트 경매장에 참가하라, 그리고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면 그 장소로 나오라고 말이다.
처음엔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한밤중에 일어난 강력한 스파크.
못 보려야 못 볼 수 없었다.
약속 장소에 나온 전동욱은 지금 심경이 복잡했다.
‘라이센스…….’
메시지가 시키는 대로 포션을 먹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하지만 결과는 허탕.
남자를 도왔지만, 정작 라이센스를 회수하지 못한 것이었다.
전동욱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후…….”
각성자 활동을 하려면 라이센스는 필수다.
물론 재발급을 한다는 방법도 있겠지만, 라이센스는 재발급 시 전산에 이력이 남는다.
즉, 괜히 남자의 협박을 무시했다가 이번 사건이 언론에 공론화되면 가장 손해 보는 건 전동욱이었다.
그래서 비교적 완만하게 일 처리를 하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착각인가……?”
라이센스는 둘째 치고 잠깐 대화를 나눈 것이긴 했지만, 그 남자의 목소리.
몇 번 대화해 본 적은 없지만, 주상혁과 매우 흡사한 느낌이었다.
전동욱이 주상혁과 조금 전 각성자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생각하다가 픽 웃었다.
이전과 마찬가지의 이유 때문이었다.
조금 전 남자의 수준은 소환수만 해도 족히 A등급 수준은 되어 보였다.
남자는 적어도 ‘A등급 각성자’라는 말이었다.
주상혁이 B등급도 아니고 벌써 A등급 수준이 되었을 리 없었다.
전동욱이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이곳에 도착해서 이것저것 묻던 정성호가 보였다.
문자를 열심히 보내다가 씩 웃는 정성호를 보고 전동욱이 말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죠?”
“뭐, 그런 게 있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정성호가 미소지었다.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깊게 물어도 딱히 답해 줄 것 같지 않았는지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정 대표님도 그 고용인이라는 사람에게…….”
말을 하던 전동욱이 입을 다물었다.
혹시 그쪽도 약점을 잡힌 거냐고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니라면?
되려 자신만 약점이 존재한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닌 거나 다름이 없었다.
전동욱의 행동에 의아했는지 정성호가 물어왔다.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간에 끊긴 말이지만, 정성호는 다르게 이해했다.
‘혹시, 이 녀석도 계약했나?’
자신은 12% 포션의 독점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기억을 되짚어 보면 12% 이상의 포션은 시중에 판매하지 않겠다는 조건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지 않겠다는 조건은 아니었다.
15% 포션의 존재를 알고 있는 정성호이기 때문일까?
정성호가 슬쩍 전동욱을 떠볼 생각을 했다.
“뭐, 그 친구가 한 번만 도와 달라고 사정사정해서 말이지.”
“그렇군요.”
전동욱이 대충 답하고는 어디론가 향하려는 듯 등을 돌리자 정성호가 말했다.
“자, 잠깐!”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정성호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오랜만에 같이 한잔할까?”
* * *
정성호와 문자를 마무리 지은 주상혁은 지금 숙소가 아닌 다른곳에 서있었다.
어젯밤 레온과 매튜의 전투가 일어났던 창고 앞이었다.
“그나저나 굉장하긴 하네…….”
어제 매튜가 레온을 얼려 버렸던 얼음은 아직도 그 자리에 존재했다.
한여름인 계절을 고려한다면 무려 하루 동안 녹지 않고 유지됐다는 게 대단할 뿐이었다.
레온의 시신은 당연하지만, 낮에 회수된 듯했다.
지금은 반쯤 녹아 버린 얼음뿐 핏자국 하나 없었다.
“그럼, 현장 견학은 이쯤하고…….”
주상혁이 이곳에 도착한 본 목적을 위해 걷기 시작했다.
“이 창고에서 나왔었지?”
어젯밤 네 자루의 나이프를 던지고 매튜와 샤오링이 등장했던 창고.
주상혁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창고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어디서 회수한 거지? 클린트? 아니면 그 녀석들인가?’
주상혁이 누가 회수한 건지 실마리라도 찾기 위해 조사할 때였다.
주상혁이 달빛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흠칫 놀라 뒤돌았다.
창고 입구 아래 서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검은 정복과 한쪽 가슴팍에 ‘클린트’라고 금색 실로 쓰인 증표가 보였다.
클린트 측 관계자였다.
세 사람 중 가운데 서 있던 여자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숙소에 안 계셔서 부득이하게 위치를 추적했습니다.”
“제게 볼일이 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클린트 측에서 볼일이라…… 조금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
‘……지 않네?’
폴라나 포션. 그리고 매튜와 샤오링.
그 외에도 찾을 법한 일이 여러 가지 있었다.
‘조금 전 크게 불장난하고 온 참이니까…….’
여성 가드가 말했다.
“저희에게 잠시 시간을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떠한 일로?”
“새로운 총지배인님이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 * *
주상혁은 순순히 가드들을 따라갔다.
딱히 적개심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만약 남은 포션을 회수한 게 클린트라면 퀘스트를 완료할 단서가 이들에게 있기 때문.
주상혁은 세 사람이 안내하는 곳으로 삼십 분쯤 걸어 호텔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는 십일 층에서 멈췄다.
‘여긴…….’
주상혁의 숙소였다.
“안에 있는 겁니까?”
“…….”
질문에 답하듯 긍정의 눈빛을 보이던 선두의 여자가 옆으로 비켜섰다.
‘지들이 클린트면 다인가?’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방 주인이 없는데 마음대로 들어가다니 기본 예절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따지지는 안았다. 주상혁은 강약약강에 충실한 진정한 현대인이었으니까.
주상혁이 방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Lv.81 베르토프.』
새하얀 은발이 상당히 인상적인 러시아계 남성이었다. 와인을 마시는 모습이 조각상이 따로 없었다.
베르토프가 주상혁을 슬쩍 흘기고는 다시 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급한 일이라 방에 좀 들어왔습니다. 이해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일전에 레온이 사용하던 번역기와 같은 디자인의 기계가 책상에 있었고 거기서 번역된 음성이 들렸다.
‘나도 저거 하나 장만할까?’
주상혁이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맞은편에 앉았다.
‘어차피 내방인데뭐.’
주상혁이 말했다.
“용무가 있으시다고요.”
“그놈들 어딨습니까?”
매튜와 샤오링을 말하는 것일 거였다.
“저도 이제 모릅니다.”
“거짓말은 좋지 못합니다. 오래 사는 것을 목표로 하신다면요.”
“됐고, 모르는 걸 안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잖습니까? 오래 살고 싶으니까.”
베르토프가 픽 웃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가지고 와.”
조금 전 문 앞까지 주상혁을 안내했던 여자가 목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작은 태블릿PC 하나를 들고 왔다.
여자가 테블릿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물러났다. 태블릿에서는 영상이 하나 재생되고 있었다.
접선 장소에서 주상혁과 매튜 일행이 만나는 장면이었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대?’
불과 한 시간쯤 전에 있던 일인데 벌써 영상까지 따서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적대적이지 않은 이유는 이거 때문인가?’
두 사람과의 몸싸움이 생생하게 찍혀있다. 이것 덕분에 공범으로 오해받지는 않을 듯했다.
영상이 멈추자 베르토프가 다시 말했다.
“또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놈들 어디 있습니까?”
“저도 세 번은 말하지 않을 겁니다. 모르겠습니다. 도망가 버렸거든요.”
“도망? 당신에게 말입니까?”
상당히 주상혁을 무시하는듯한 발언이었다.
하긴 무려 80레벨대에 달하는 베르토프의 시선에 주상혁은 그저 한낱 반딧불 같은 존재일 테니 당연했다.
“다른 사람의 힘을 좀 빌렸습니다.”
“뭐, 좋습니다. 그럼 도망친 경로라도 말씀해 주시죠.”
“그것도 모릅니다. 전이 아티팩트를 사용했으니까.”
새롭게 도착한 무전을 등을 돌리고 듣던 여성 가드가 베르토프의 귀에 속삭였다.
베르토프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긴 했다. 아무래도 추가적인 영상 정보가 존재했던 것 같았다.
베르토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정보를 얻게 되면 연락해 주시죠. 그럼…….”
베르토프가 숙소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여성 가드가 번역기를 챙겨 따라 나서려고 할 때였다.
“잠깐.”
주상혁의 목소리에 베르토프가 걸음을 멈추고 비스듬히 돌아섰다.
“그건 그거고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원래 계약 내용이 그 연놈들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에 폴라나 포션을 돌려받기로 했었거든요?”
베르토프가 여성 가드를 바라봤다. 여성 가드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긍정의 의미였다.
“레온, 그 쓰레기 자식이 한 약속인가?”
약간의 오물 보는 듯한 혐오가 느껴지는 말투.
베르토프가 별 흥미 없다는 듯 주상혁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약속한 조건을 들어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베르토프가 방을 빠져나가자 여성 가드가 말했다.
“따라오시죠.”
* * *
주상혁은 여성 가드를 따라 중립 구획에 존재하는 어느 창고에 도착했다.
여성 가드가 몸짓으로 신호 보내자 두 명의 가드들이 암막을 걷어 냈다.
핏자국이 조금 튄 상자를 비롯해 수백 개의 상자가 보였다.
위조된 폴라나 포션.
전부 다 위조 포션이었다.
“원하시면 숙소로 옮겨 드려도 상관없습니다만.”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 1분만 자리를 비켜 주시죠.”
“원하신다면.”
여성 가드가 주상혁의 요청대로 창고에서 가드들과 나갔다. 주상혁이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상자에 손을 댔다.
포션을 회수하시겠습니까?
주상혁이 YES를 선택했다.
선택과 함께 포션이 보라색 빛을 발하는 반딧불이 되어 흩어지는 게 보였다.
Q. 복제품의 회수 [돌발] (완료).
「누군가가 당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했습니다.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한다면 이런 불명예가 언제가 당신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클린트 경매에 참석해 위조된 복제품을 회수하고 복제품이 양지로 풀리는 것을 저지해야 할 것입니다.」
달성 조건: 위조된 폴로나 포션을 전부 회수할 것.
달성 보상: 오십 년 삼.
단 실패 시 스킬 레벨 페널티 적용.
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창을 확인한 주상혁이 퀘스트를 완료했다.
인벤토리에 보상이 지급됩니다.
인벤토리에 확실히 지급된 오십 년 삼을 확인한 주상혁이 창고를 나갔다.
창고 밖에서 주상혁을 기다리던 여성 가드가 말했다.
“끝났습니까?”
“뭐, 대충은요.”
창고 안을 확인한 여성 가드가 포션 상자가 쌓여 있던 목제 팔레트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슬쩍 흘기고는 말했다.
“신고 보상인 천억은 내일 오전 중으로 지급될 겁니다.”
“천억?”
“그런 약속인 것으로 알고 있습다만, 금액에 착오가 있습니까?”
‘그거야 토벌에 성공한다면 지급하기로 했던 거 아니었나?’
애초에 별 기대도 안 하고 있던 돈을 준다니 주상혁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주상혁이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목소리로 냉큼 답했다.
“오케이, 땡큐!”
* * *
간밤에 조금 불쾌한 기분도 느꼈지만, 다음 날 아침 주상혁의 그런 기분은 싹 가셨다.
통장에 그대로 박힌 ‘천억’이라는 금액 덕분이었다.
‘이걸로 오십년 삼이 두 개란 말이지?’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산삼을 초콜릿으로 만들고 어디 이상한 일에 말려들 일 없는 피서지라도 가서 쉴 생각이었다.
“주주야.”
주상혁의 말에 침대에서 자고 있던 주주가 벌떡 일어났다.
“가자.”
주상혁의 말에 안개로 변해 사라지는 주주의 모습을 끝으로 주상혁이 가방을 멨다.
일주일 남짓 지냈던 클린트 경매장과의 작별이었다.
* * *
신지은.
클린트 경매장 서쪽 접수처에서 일하는 그녀는 태생적으로 운이 좋다.
일반인이라면 취직이 힘든 요즘 엄청난 고액 연봉을 챙겨 주는 틈새시장을 찾아 취직한 것도 그렇고 얼마 전 있었던 불행을 피해 간 것도 그랬다.
그날 밤 그녀가 당직이었다면 그녀도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그날 이후로 충격에 퇴사한 사람도 제법 된다.
하지만 신지은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날을 계기로 가뜩이나 높던 연봉이 배는 더 뛰었고 야간 당직도 당분간 사라졌다.
덕분에 그녀는 매우 만족해하며 며칠 전부터 일하고 있었다.
퐁당퐁당 당직으로 푸석푸석해진 피부도 그새 회복된 게 무엇보다 기분을 좋게 했다.
“그럼 재운이 함께하시길!”
신지은이 상큼한 미소와 함께 안내를 마무리하고는 손거울을 바라봤다.
흐트러진 옷매무시랑 머리를 다시 정리하며 준비를 마친 그녀가 다음 손님을 받았다.
‘19번이지?’
띵동.
바깥에 들리는 버저 소리가 미약하게 신지은의 귀에도 들려왔다.
신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오는 손님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어?’
들어온 손님의 얼굴이 낯에 익다. 정확히는 특이한 복장이 낯에 익다.
검은색 선글라스와 검은색 정장, 마스크.
이런 독특한 차림을 잊을 리가 없었다.
신지은이 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퇴장 절차를 도와 드릴까요?”
“아…… 네, 뭐.”
“왼쪽 바구니에 클린트 폰과 클린트 워치를 반납해 주세요.”
주상혁이 바구니에 물건을 넣자, 신지은이 회수하고는 뒤편의 금고에서 해당하는 번호 보관함을 꺼내 휴대폰과 라이센스를 건네준 후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손님이 물품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걸어갔다.
신지은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 손님에게 말했다.
“손님.”
“네?”
“경매는 만족스러우셨나요?”
주상혁이 잠시 생각하다가 픽 웃으며 말했다.
“뭐…… 만족스러웠죠, 아주.”
* * *
“크윽…….”
그날 곤욕을 치르고 아지트로 전이하는 데 성공한 매튜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침이야 전이를 하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문제는 혈 자리에 남아 있는 마나가 문제였다.
매튜를 지켜보던 샤오링이 물었다.
“치료할 방법은 없어?”
“축복이나 힐이 통하지 않는다면 당장에 방법이 없달까?”
몽땅 타 버려서 뼛가루 하나 챙길 수 없었던 매튜의 팔을 그대로 회복한 S급 보조 계열 각성자다.
그런 그의 축복도 어째서인지 매튜의 몸을 장악하고 있는 마나는 제거할 수가 없었다.
“당장에? 그럼 나중엔 방법이 있단 거야?”
“놔두면 자연적으로 치료되겠지. 힐과 축복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정상이라는 거니까.”
“그럼 별문제 아닌 거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반대지. 자연적으로 치료되는 건 이 녀석이 버텨 냈을 때의 문제. 운이 좋아 버텨서 안정기에 접어들어도 예전 상태가 되기는 좀 힘들 거라고 말할 수 있겠군.”
“병신이 된단 거야?”
“내 예상에는 그럴 거 같다는 거지.”
매튜의 상태는 많이 심각했다.
고통에 울부짖다가 혼절하는 것을 며칠째 반복하고 있을 정도였다.
남자가 매튜의 전신에 피어나 있는 도깨비불을 보고는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보고 싶은데?”
“몰라, 다만 짚이는 건…… 침에 당했을 거야.”
“침?”
“있어, 바늘같이 생긴 의학 물품.”
남자는 의문이었다.
의학 물품으로 어떻게 하면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지 말이다
남자가 말했다.
“여하튼, 리더의 반응이 궁금하긴 하네. 아끼던 매튜가 이렇게 됐으니까 말이야.”
* * *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주상혁은 그날 오후 집에 도착했다.
“조금 허기지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다.
일 층의 식당까지 내려간다면 허기야 때울 게 있겠지만, 잔반 처리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책상 서랍을 열었다.
간식거리로 사 둔 과자를 몇 개 집어 온 주상혁이 침대에 앉아서 TV를 켰다.
과자를 우물거리며 TV 채널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여러분 수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흉악범 강수호를 아십니까? 그 흉악범 강수호의 시체가 얼마 전 여수 앞바다에 떠올라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버리려면 좀 깔끔하게 버리지. 뭐냐, 저게?”
그냥 태워 버리거나 하는 쉬운 방법도 있었을 텐데 구태여 저렇게 처리해야 했나 싶었다.
주상혁이 채널을 돌렸다. 이번엔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강태백 협회장 별세.
주상혁이 우측 상단에 떠 있는 메인 타이틀을 읽고는 말했다.
“오늘내일한다더니 강태백이 죽은 건가?”
강태백.
대한민국 최초의 S급 각성자이자, 몇 년 전 몸져눕기 전까지 협회장 자리를 역임하고 있던 각성자였다.
‘지금은 큰아들이 임시협회장을 맡고 있지 않나? 그럼 이제 차기 협회장은 어떻게 되는 거지?’
공공 기관에 속하는 협회지만, 태생적으로 강태백에 의해 설립된 기관이다.
그것 때문에 정부가 막대한 지원금을 주면서 흡수를 했지만, 여전히 협회장을 뽑는 것은 전적으로 협회 내부의 일이었다.
“뭐, 그대로 큰아들이 하려나?”
주상혁이 적당한 채널을 찾기 위해 쭉 돌려봤지만, 마땅한 프로를 찾지 못했을 때였다.
왕! 왕!
팔찌에서 어느새 나온 주주가 구석에서 고무공을 물고 왔다.
“자.”
주상혁이 멀리 던지자, 주주가 신이 나서 뛰어가 물어 왔다.
“아이구, 잘했다.”
주상혁이 칭찬해 주자 주주가 좋다고 침대 위를 굴렀다.
주상혁이 이번엔 조금 더 멀리 공을 던져 줬다.
신이 나서 뛰어가는 게 영락없이 강아지였다.
‘너무 똑똑해서 가끔 소름 돋는 거 빼면 말이야.’
주상혁이 공을 찾는 주주를 보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돌연 인벤토리를 켰다.
“내친김에 그냥 지금 먹여 볼까?”
『오십 년 삼.』
주상혁은 지난번 매튜와의 전투에서 주주의 덕을 아주 제대로 봤다.
실제로 주주의 레벨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더 여유로운 상황이 연출됐을 가능성도 많았다.
주상혁이 공을 물어온 주주에게 오십 년 삼을 내밀었다.
“자, 그때 주기로 했으니까.”
오십 년 삼이라도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성인 남성 손가락 굵기 정도에 길이도 15cm 남짓이었다.
주상혁이 산삼을 주주에게 내밀자 주주가 냉큼 입에 물었다.
오독오독 씹어 먹는 주주를 주상혁이 지켜볼 때였다.
『Lv.24 청운해태.』
…….
…….
『Lv.31 청운해태.』
주주의 레벨이 급격하게 상승하더니 31에서 멈췄다.
‘비싼 값을 하긴 하네.’
주상혁이 수백억을 꿀꺽한 주주의 레벨을 확인한 다음 한 생각이었다.
왕! 왕!
주주가 시선을 떼려는 주상혁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 짖기 시작했다.
“뭐? 보여 주겠다고?”
주상혁이 관심 있게 주주를 지켜봤다.
주주가 똥을 누듯 끙끙대기 시작하자 주변에 푸른색 안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둥그런 구체 모양으로 주주의 옆에 모이던 안개가 곧이어 형체를 만들었다.
주주보다 조금 더 작은 크기의 강아지였다.
『Lv.20 청운해태.』
‘그러고 보니까…….’
처음 던전에서 만났을 때는 해태가 모두 다섯 마리였다. 주주의 몸속으로 들어갔던 해태를 주상혁은 기억한다.
주상혁이 새로운 기술을 자랑하는 주주를 칭찬했다.
“그래, 나는 우리 주주만 믿는다.”
두 마리의 강아지가 동시에 짖었다.
왕!
주상혁이 무럭무럭 자라는 주주의 모습을 보고 흡족하게 웃을 때였다.
지이이잉.
주상혁의 핸드폰에 걸려 오는 전화가 있었다.
한혜지였다.
* * *
불과 두 달 전쯤.
주상혁을 도우려고 잠깐 광주에 갔었던 한혜지는 주상혁과 헤어질 때 선물을 받았다.
예쁜 로자리오였다.
새벽의 로자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한혜지는 솔직히 기뻤다.
주상혁에게 받은 선물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새벽의 로자리오가 보통 물건이 아닌 아티팩트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솔직히 말해서 부담스러웠다.
새벽의 기운이 쌓이면 신비로운 일이 일어난다나 뭐라나?
여하튼 딱 봐도 자신이 사용하기에는 과분한 물건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한혜지는 처음에 선물을 성의만 받기로 했었다.
지금 사용하는 로자리오는 각성 심사를 받을 때 협회 로비에서 산 싸구려 로자리오긴 해도 잘 쓰고 있는 물건이다.
아직 잘 쓰고 있는 로자리오가 있는데 이런 고급 로자리오는 사치였다.
“역시 그때 받는 게 아니었어…….”
하지만 주상혁은 완고했다.
기어이 한혜지에게 그것을 넘겨줬다.
전주로 돌아온 한혜지는 이렇게 된거 감사히 받고 기대에 부응하자고 생각했다.
각성자의 등급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스킬의 숙련도는 존재한다.
틈틈이 스킬이라도 사용하며 숙련도를 쌓기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던 중.
문제는 어느 새벽에 생겼다.
로자리오가 일출의 햇빛을 받아 번쩍이기 시작하더니 절정에 달한 하얀빛이 자신에게로 스며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별일이 아닌 듯 그렇게 한혜지는 넘겼다. 하지만…….
C등급.
전주의 어느 길드에 면접을 보러 가서 간이 심사를 하는 도중에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다.
광주에서 주상혁을 돕던 와중에 얼렁뚱땅 D등급이 되었던 자신이 어느새 C등급 판정을 받은 이유였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티팩트 덕분이었다.
카페에서 기다리던 한혜지가 주상혁이 오자 새벽의 로자리오를 내밀었다.
“여기요. 저…… 이거 못쓰겠어요.”
“왜요?”
“말했잖아요. 제가 C등급이 됐다니까요?”
『Lv.33 한혜지.』
주상혁도 이미 한혜지의 레벨을 보고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욱더 한혜지가 가져야 해.’
한혜지는 주상혁이 제법 신용하는 사람이다. 일단 착하고 근면 성실했다. 하지만 흠이 하나 있다면 그건 레벨이 낮다는 것.
비밀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녀의 레벨 업을 도와주지 못하는 와중에 드디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한혜지를 부려 먹어야 하는데 도로 받아 와선 곤란했다.
“괜찮아요. 각성자가 강해지면 좋은 거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저…… 이런 아티팩트는 들어 본 적도 없어요.”
주상혁도 마찬가지다.
등급 업을 시켜 주는 아티팩트라니.
어쩌면 전이 아티팩트보다 좋은 물건일지 모른다.
“괜찮아요.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면 되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주상혁과 한혜지뿐.
물론 한혜지가 고속 성장을 하면 주상혁이 그랬듯 다소 위험 요소도 생기겠지만, 그건 방법이 한가지 있긴 했다.
주상혁이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혜지 씨, 부탁할게요. 저는 혜지 씨가 그걸 꼭 받아 줬으면 좋겠어요.”
주상혁의 돌발 행동에 한혜지가 얼굴을 붉혔다. 눈도 못 마주치고 시선을 슬쩍 카페 구석으로 던지며 한혜지가 말했다.
“그…… 꼭 저여야만 해요?”
“네. 헤지 씨 말곤 없어요.”
“그렇다면…….”
로자리오를 겨우 다시 맡긴 주상혁이 말했다.
“저, 그리고 혜지 씨 지금 이후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일정이요?”
“네.”
한혜지가 조금 생각하더니 말했다.
“딱히 없는데요?”
“그럼…… 혹시 강아지는 좋아하세요?”
“강아지는 갑자기 왜……?”
“제가 한 마리 분양해 드릴게요.”
* * *
주상혁이 분양해 주겠다는 강아지.
당연히 그건 주주의 분신이었다.
당장에 강력한 전력은 되어 주지 못하겠지만, 한헤지의 위기를 언제든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메리트가 있었다.
한혜지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저, 그…… 애완동물은 좀…….”
“강아지 싫어하세요?”
한혜지가 손사래 치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뇨 딱히 그런건 아닌데… 돌봐줄 자신이 없달까..”
“그런 거라면 걱정할 거 없어요. 이 녀석들 품종이 좋아서 그런지 영리해서 똥오줌도 잘 가립니다.”
“음 그래도…….”
주상혁이 한혜지가 고민하자 말했다.
“그러지 말고 직접 보고 결정하시죠?”
“네?”
“잠깐만 기다려 봐요. 금방 데리고 올 테니까.”
한혜지가 말릴 틈도 없이 주상혁이 카페를 나섰다.
이십 분 정도 지나자 주상혁이 다시 들어왔다.
주상혁의 품에는 주주의 분신이 한 마리 들려 있었다.
“어때요?”
주상혁이 테이블 위에 내려줬다. 주주의 분신이 작전대로 조심스레 다가가 한혜지의 손등을 살짝 핥았다.
분신이 한혜지에게 눈빛 공세를 펼쳤다. 흔들리는 한혜지의 표정이 보였다.
‘끝났군.’
귀여운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여자들이 주주의 귀여움을 이겨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한혜지가 결국 분신을 품에 안았다.
“저, 힘내 볼게요.”
“잘 생각하셨어요.”
한혜지의 품에 안긴 주주의 분신을 보며 주상혁이 말없이 신호를 보냈다.
잘 부탁한다는 뜻이었다.
* * *
한혜지와의 만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주상혁은 생각했다.
‘근데 그러고 보니까 괜찮은 방법이긴 하네?’
근래 들어 박민지나 주화영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염려되고 있었다.
이 기회에 주주의 분신을 붙여 주는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주상혁이 팔찌를 노크했다. 주주가 나왔다.
“두 마리만 더 가능할까?”
왕!
주주가 첫 번째 분신을 만들었다.
『Lv.17 청운해태.』
‘어?’
분신의 레벨을 본 주상혁이 의문을 가졌다.
‘레벨이 더 낮네?’
한혜지에게 넘겨줬던 분신은 레벨이 20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만든 분신은 어째선지 그것보다 3레벨이나 낮았다.
주상혁이 집히는 게 있었는지 중얼거렸다.
“혹시……?”
하지만 아직 가설일뿐.
결론은 주주가 만드는 두 번째 분신을 확인한 다음에 하기로 했다.
주상혁이 바라보고 있자 주주가 곧이어 두 번째 분신을 만들었다.
『Lv.13 청운해태.』
“역시…….”
주상혁의 예상대로였다.
이번 분신은 역시나 레벨이 더 낮았다.
‘분신의 개체가 많아질수록 레벨이 낮아지는구나.’
뭐 그렇다고 해도 애초에 본체인 주주의 레벨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당연한 페널티라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연달아 분신을 만들어서 지쳤는지 혓바닥을 내밀고 헥헥거리는 주주를 주상혁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 줬다.
“고생했어, 주주. 코하자.”
주상혁이 주주의 등을 쓰다듬어 주자, 곧이어 주주가 하품을 늘어져라 하더니 잠들었다.
두 마리의 분신도 폴짝 뛰어올라 침대 위에서 솜사탕을 만들었다.
자는 폼도 꼭 주주와 비슷했다.
주상혁이 두 녀석이 잠드는 것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디 보자 오늘이 토요일이었나?”
경매장에서 며칠간 있다 보니 요일 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
토요일인 걸 확인한 주상혁이 핸드폰을 통해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주화영이었다.
일 분쯤 지났을까?
주화영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주상혁이 문을 열어 줬다.
본관에서부터 전력으로 달려왔는지 숨이 조금 거친 주화영이 보였다.
『Lv.34 주화영.』
‘확실히 레벨이 좀 오르긴 했네.’
주상혁이 보충제를 먹이면서부터 레벨이 오르긴 했어도 조금 불안한건 여전했다.
주상혁이 주화영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천천히 와도 된다니까.”
“오빠가 불러 줬는데 바로 와야죠.”
주화영이 부른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주상혁이 옆으로 물러났다.
덕분에 주상혁에게 가려져 있던 침대 위에서 자고 있던 두 마리의 분신이 주화영의 눈에 보였다.
“뭐, 뭐예요? 얘네는?”
“글쎄 전에 주주가 있던 곳에 또 버려져 있지, 뭐야.”
“두 마리나요?”
“아니, 원래는 세 마리였어.”
주상혁이 두 마리의 분신을 보고 있는 주화영에게 말했다.
“혹시 화영이가 한 마리 키워 줄 수 없을까 해서…… 나는 이미 주주가 있잖아.”
“할게요.”
역시 주화영.
주상혁의 부탁이기 때문인지 흔쾌히 승낙했다.
주상혁이 주화영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직 어려서 학교에도 데려가야 할 텐데 괜찮지?”
“네네 괜찮아요. 선생님한테는 소환수라고 말할게요.”
“혹시 민지도 강아지 좋아할까?”
“그건 잘 모르겠네요. 부탁하시게요?”
“마땅한 데가 없어서.”
주화영이 말했다.
“제가 전화로 한번 물어볼게요.”
* * *
레벨 업을 위해 약초로 달인 탕약을 마신 주상혁이 인상을 팍 썼다.
“크…… 쓰다 써.”
정말 오랜만에 일상으로 돌아온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초콜릿은 아직 좀더 기다려야 하고…….”
꿩 대신 닭이라고 주상혁이 보충제를 대충 털어 입에 집어넣었다. 콰득콰득 씹어 먹으며 주상혁이 컴퓨터를 바라봤다.
“괜찮은 데가 없네.”
며칠 전부터 괜찮은 피서지를 찾아보는데 마땅치가 않다.
초콜릿이 완성되는 대로 한 달쯤 펜션을 잡아 은거할 생각을 계획 중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솔직히 사건이 다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생긴 거 아니겠어?’
생각해 보면 주상혁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으면 외할아버지가 부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 사건이 발생해서 돌발 퀘스트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추천 목록에 여수가 보이자 주상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수는 좀…….’
물론, 전망 좋은 곳이 많이 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피하고 싶었다.
“목포도 좀 그렇고…… 남은 건 순천인가……?”
주상혁이 펜션 계획을 세울 때였다.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네, 혜지 씨.”
저, 준혁씨! 큰일이에요.
무슨 급한 일이 생겼다면 분신을 통해 알아차린 주주가 신호를 보내 줬을 것이었다.
하지만 주주는 지금 침대 위에서 여느 때처럼 자고 있었다. 얼마나 곤히 자는지 바라본 주상혁도 나른해질 정도였다.
‘이상하네…….’
주상혁이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얘, 아픈 거 같아요.
“아프다니요? 분……이 아니라 강아지가요?”
밥을 안 먹어요. 병원에도 데려가려고 해도 그때마다 요리조리 피해 다니고…… 어쩌죠?
주상혁이 이마를 ‘탁’ 쳤다.
그러고보니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다. 최고급 소고기도 마다하는 주주를 빼닮은 분신이 개 사료를 먹을 리가 없었다.
‘근데 그러고 보니 분신이라서 원래 밥을 안 먹는 것인지 아니면 약초만 먹는 것인지는 모르겠네.’
주상혁이 말했다.
“한…… 세 시간 뒤쯤에 전에 봤던 카페 옆에 공원 있죠? 거기서 봐요.”
* * *
전화를 끊은 주상혁은 곧바로 약초를 갈아 사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주주처럼 입이 고급일 것을 감안해서 되도록 값비싼 폴라나 같은 재료들만 엄선했다.
분신이니까 고급 재료를 사용할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기껏 만든 사료를 입에 대지 않는 것도 문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와, 얘가 이렇게 맛있게 먹는 얘였군요?”
주상혁이 손바닥에 사료 몇 알을 올려서 내밀자 허겁지겁 먹는 분신을 바라봤다.
『Lv.20 청운해태.』
‘역시 레벨은 오르지는 않네’
주상혁이 말했다.
“혜지 씨가 한번 줘 볼래요?”
“그래도 돼요?”
위생 봉투에 여러 겹 싸서 담아 온 사료봉투를 내밀자 한혜지가 주상혁을 따라 했다.
주상혁이 줄 때처럼 맛있게 먹는 분신의 모습이 보였다.
‘뭐, 이걸로 문제 해결이네.’
주상혁이 좋아하는 한혜지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혹시, 사료 다 떨어지면 말씀하시고요.”
“네, 알겠어요.”
주상혁이 볼일을 마치고 한혜지와 헤어지려고 할 때였다.
한혜지가 주상혁을 불러 세웠다.
“준혁 씨.”
“네, 왜요?”
한혜지가 몸을 비비 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혹시…… 점심 전이시면 같이 식사하실래요? 뭐, 간단한 거밖에 못 먹겠지만…….”
일단은 강아지의 외견을 하고 있는 분신 때문에 장소가 한정적이다.
주상혁의 답이 곧바로 들려오지 않자 한혜지가 말했다.
“그, 왜…… 전에 약속하셨잖아요. 밥 사 주시기로…….”
‘그렇긴 한데…….’
주상혁이 들릴 듯 말 듯한 말로 중얼거렸다.
“그게 진짜 밥이었냐고…….“
주상혁이 말했다.
“뭐, 대단한 거 못 먹을 텐데 괜찮겠어요?”
“물론이죠.”
주상혁이 한혜지와 함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마땅한 음식점이라도 말이지…….’
실제로 구하자니 더 없었다.
애완동물을 데리고 출입하는 게 의외로 눈치 보이는 일이었다.
주상혁이 삼십 분쯤 찾다가 안 되겠는지, 한혜지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다음에 먹죠? 마땅한 데가…….”
“그, 그럼 그냥 김밥이라도 포장해서 벤치에서 먹어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당사자가 좋다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주상혁이 가까운 김밥헤븐에서 적당한 메뉴를 서너 가지 골라 나왔을 때였다.
‘뭔 상황이야 이건 또…….’
주상혁의 눈에 한혜지와 그녀를 둘러싼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레벨이 제법 높네?’
두 남자 모두 B등급은 되어 보였다.
주상혁이 다가가서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두 분이 어떤 여자애를…….”
‘여자애?’
주상혁이 한혜지의 뒤편에 숨어있는 인기척을 확인했다.
주상혁의 눈에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뭐야? 얘가 왜 또 여기에…….’
뭔가 주상혁의 게으름 세포가 위험하다고 외치는 것 같은 기분이 순간적으로 솟구쳤다.
『Lv.43 강혜영.』
클린트 경매장에서 만났던 그 여자아이였다.
다행히 녀석은 주상혁을 못 알아보는 듯했다.
주상혁이 두 남자를 바라봤다.
두 남자가 주상혁에게 말했다.
“그 여자애만 넘기면 별 탈 없이 보내드리겠습니다.”
“말 한번 개같이 하는 재주가 있으시네?”
주상혁이 남 일에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상황을 들어 보고 완만하게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단어 선택이 주상혁의 심기를 건드렸다.
주상혁은 그간 가뜩이나 각성자들의 눈치를 보며 사려 왔던 상태.
그동안은 성질부려 봐야 본인만 손해니까 참아 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좋게 말할 때 넘기는 게 좋을 거요. 계속 그렇게 감싸고돌면 우리도 힘을 쓸 수밖에 없거든.”
“써 보던가.”
“뭐?”
“써 보라고.”
두 남자가 눈짓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꾸웩.”
남자 하나가 뭐에 얻어맞은 줄도 모르고 그대로 수십 미터 밖까지 날아가 뻗었다.
놀란 얼굴로 딱딱하게 굳어 버린 다른 한 명을 픽 비웃어 준 주상혁이 천천히 다가갔다.
검은색 봉투를 부스럭부스럭 뒤지던 주상혁이 김밥 한 줄을 꺼내 호일 채 입에 물려 주고는 말했다.
“이건 ‘깽값’이니까 맛있게 먹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