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2
chapter 1
각성자.
이들이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약 오십 년 전이었다.
지구의 곳곳에 의문의 던전이 생겨나고 얼마 후.
대항하듯 이곳저곳에서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현대에는 이미 불꽃을 다룬다거나 수 미터를 뛰어오르는 각성자를 목격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각성자의 등장은 인류로 하여금 수많은 생각을 가지게 했다.
어째서 각성을 하게 되는 것일까?
각성자가 되는 이유가 있을까?
각성을 하는 방법은?
수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떻게 각성자가 되는지는 명확한 원인이 밝혀진 바가 없다.
각성자들의 직업군, 성격, 체격, 능력까지 차이점만 해도 수십 수만 가지.
제대로 된 실험이 이루어질 리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시간이 지나면서 정립된 각성의 공식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그건 바로 유전이었다.
부모가 각성자면 아이도 각성자.
각성자가 처음 출현하기 시작하고부터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배신한 적 없던 공식이었다. 그러나.
딱 한 차례, 각성자의 역사상 딱 한 차례 이것을 부정했던 사례가 학계에 생겨났다.
주상혁의 존재였다.
주상혁은 이런 각성의 역사가 정립한 공식을 파괴하는 존재였다.
길드 대표 주재호와 당시 부대표 정채연의 사이에서 난 아이이면서도 비각성자였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쪽만 각성자도 아니고 부모 모두가 각성자인 주상혁이 비각성자라는 것이 알려졌을 땐, 지구촌 변방의 삼류 길드의 일이라도 학계가 상당히 시끄러웠었다.
물론 이미 다 지나간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 * *
띠링.
왜인지는 모르겠다.
어째선지 간밤에 전생의 꿈을 꾸었던 주상혁이 잠에서 깨자마자 헛것을 본 듯 눈을 끔벅였다.
『환생이 완료되었습니다.』
여태 본 적 없는 조그마한 텍스트 창에 적힌 글귀가 허공에서 가물거렸다.
잠이 덜 깨 헛것이라도 봤나 싶은 주상혁이 바쁘게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주상혁이 눈에서 손을 뗐다.
“그럼, 그렇지.”
방금까지 보이던 텍스트 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입가에 흘렀다.
“놀기만 하는 건데 이런 생활도 계속하면 기가 쇠하는 건가?”
그저 수면 부족 등으로 일어나는 기력 쇠진 정도로나 치부하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조금 이르긴 해도 이왕 눈을 뜬 김에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진 방 안을 주상혁이 걷기 시작했다.
컴퓨터 책상 앞에 도착해 엄지발가락으로 전원을 누르고는 여느 때처럼 의자에 앉았다.
평소와 같은 모니터일 텐데 그 모니터를 바라보는 주상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모니터.』
주상혁이 다시 눈을 비볐다. 조금 전 사라졌던 헛것이 다른 모양으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
“헛것이 아니라고?”
어째서인지 눈앞의 창은 이번엔 사라질 생각이 없었다.
몇 번씩 눈을 비비고 확인하기를 반복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기묘한 텍스트 창은 이번에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눈을 감자,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생각이 차분하게 이어졌다.
‘어째서 지금이지?’
새삼스럽지만 주상혁이 전라도 소규모 길드의 적자로 환생한 것은 무려 이십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에서야 뜬금없이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냐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문이었다.
조용히 생각을 하던 주상혁이 눈을 ‘팍’ 하고 떴다.
‘혹시 어제 그것 때문인가?’
주상혁이 우연히 간식거리를 사러 외출했다가 말려들었던 사건에서, 몬스터에게 당한 길드원을 응급처치했던 일이 떠올랐다.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난 주상혁.
주상혁이 그다음 한 짓이라고는 방금까지 하려고 했던 컴퓨터를 하는 일이었다.
“그래 뭐……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자, 안 보이던 게 보여서 조금 난처한 거 말고는 전혀 문제없잖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방 안에서 편안하게…….”
주상혁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게임 클라이언트를 실행시키며 긍정적 사고를 전개할 때였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눈앞에 알림음과 함께 새로운 창이 두 개 떠올랐다.
Q. 또다시 의원 [메인퀘스트].
「칠백 년 전 최고의 명의로 살았던 장진수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주상혁으로 환생했다. 삶과 죽음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직업. 그 때문에 생명을 누구보다 중시했을 직업. 하지만 그토록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생명의 끝이 ‘환생’이라는 사실에 당신은 지난 시간 동안 회의감에 빠져 살아왔다. 당신은 마침내 다시 손에 침을 쥐었다. 이제 전생에 못다 한 의술을 마저 연마하자.」
[달성 조건: 의술 마스터] [보상: ?] [페널티: ?]“…….”
Q. 의원으로서 의무 [일일 퀘스트].
「환생자 주상혁은 이십 년간의 ‘잉여 생활’을 청산하고 마침내 의원으로서 환생을 끝마쳤다. 의원은 응당 환자를 멀리해선 안 되는 법, 신장개업을 개시하고 환자를 진료하자.」
[목표 진료 수치: 0/3] [달성 시 명성 상승(명성은 스테이터스 창에서 확인 가능)] [제한시간: 23:31]―단, 제한시간 내에 달성 실패 시 랜덤 질병 획득.
“오호라…… 협박하겠다 이거냐?”
하라고 살살 달래도 안 할 텐데 협박한다고 ‘네네 알겠습니다.’ 하면서 굴복할 주상혁이 아니었다.
얼굴을 팍 구기고는 침대로 다시 돌아가 이불을 확 덮어썼다.
절대로, 이번 생에는 의원질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 * *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의원질을 하지 않겠다는 주상혁의 의지는 예상외로 빨리 꺾였다.
그도 그럴 게 첫날 몸살감기, 둘째 날 치질에 이어 셋째 날 배탈이 찾아왔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주상혁의 표정이 곱지 못했다.
“아오, 진짜 뒤지겠네…….”
버텨 봐야 자신만 손해라는 걸 통감한 주상혁이 바쁘게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언제 다시 배가 아파질지 모르는데 이사이에 빠르게 사 올 물건이 있었다.
1시간쯤 흘렀을까?
외출한 주상혁이 지친 얼굴로 들어왔다.
손에는 필통 크기의 직사각형 물체가 들려있었다. 침통이었다.
한 시간 동안 분주하게 걸어 다닌 탓에 극렬히 화를 내는 항문을 인지한 주상혁이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배를 깔고 누운 주상혁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이제 환자를 구해야 하는데…….’
이점이 가장 문제였다.
현대에는 엄연히 의료 행위를 하려면 자격증이나 자신이 치유를 담당하는 보조 계열 ‘각성자’라는 걸 증명할 자격증이 필요하다.
아무나 잡아 놓고 푹푹 찔러 댄다고 해서 뒤탈이 없을 리 없었다.
‘적어도 비밀을 지켜 줄 법한 그런 사람이어야 해.’
하지만 현생에 방구석에서 외출다운 외출 한 번 안 해 본 주상혁이다.
사람을 떠올린다고 마땅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머리가 복잡해지자 한숨이 절로 튀어나올 무렵이었다.
똑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주상혁이 생각에 잠겼다.
주상혁의 방이 위치한 곳은 길드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본관이 아닌 인적이 드문 후관이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심지어 주상혁의 방은 삼 층 복도 끝이다.
방까지 찾아올 사람은 지극히 한정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 무시하자.’
애초에 중요한 일이면 핸드폰으로 연락을 했을 것이었다.
주상혁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중요도 낮은 일에 움직일 만큼 최근 주상혁의 그곳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
30초쯤 지났을 때였다.
복도 밖에서 들리던 소리가 사라지자 주상혁이 베개에서 얼굴을 뗐다.
“갔나……?”
똑똑똑.
어림도 없다는 듯 재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고 버티기 시작하자.
“실례하겠습니다. 계시나요?”
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지부동이던 주상혁의 고개가 방문을 향해 돌아갔다.
방금 방 밖에서 들려온 중저음의 목소리.
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주상혁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방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정 때문에 마지못해 치료했던 길드원이었다.
‘박상운…….’
주상혁을 본 박상운이 꾸벅 인사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이시죠? 박상운 씨.”
“아, 그……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말입니다.”
어째선지 강한 적개심을 보이는 주상혁의 모습에 박상운이 땀을 삐질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주상혁도 막상 문을 열기 전까지의 기세만 보면 무슨 일을 낼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무도 박상운을 탓할 수 없는 상황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이유였다.
“뭔데요?”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주상혁이 어질러진 방 안을 슬쩍 봤다.
평소라면 절대 사람을 들이지 않을 방이었다.
부끄럽다기보다 들어올 사람의 기분을 생각해서였다.
주상혁이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더니 말했다.
“들어오시죠.”
잔뜩 어질러진 방을 흡족한 얼굴로 주상혁이 가로지를 때였다.
등뒤를 따라 쫄래쫄래 들어온 박상운이 말했다.
“저…… 이건 어디에다가 둘까요?”
주상혁이 박상운의 한쪽 팔에 들린 쇼핑백을 보고는 말했다.
“그게 뭔데요?”
“그…… 답례라고 하기엔 부족하겠지만 산삼입니다.”
“혹시 몇 년 짜리……?”
“이십 년 삼입니다.”
전생에 의원을 했기 때문인지 산삼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주상혁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년수는 만족스럽지않아도 이정도면 합격이었다.
조금 전까지 ‘극대노’였다면 ‘대노’ 수준으로 분노가 사그라 들었다.
어질러진 물건을 대충 발로 밀어 자리를 만들었다.
“여기요.”
“아, 넵.”
쇼핑백을 말한 곳에 내려놓은 박상운이 방안 을 쓱 훑어보더니 말했다.
“근데 좀 어질러져 있네요.”
“그래서요? 무슨 불만이라도?”
“아뇨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만…….”
아까부터 심기가 불편한듯한 주상혁의 태도를 의식한 박상운이 슬쩍 물었다.
“저, 근데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 예 하셨죠.”
“구체적으로 어떤……?”
주상혁 말했다.
“말한다고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박상운이 주상혁의 말에 곰곰이 고민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저……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죄송합니다.”
“됐고요. 다 지나간 일입니다.”
다 지나간 일이었다. 이 쓸모없는 환생을 완료해 버린 것도 되돌릴 수 없는 지나간 일이었다.
“아뇨. 분위기를 보아하니 저도 모르게 실례를 범한 것 같은데 사과해야죠. 그리고 또…… 감사합니다.”
주상혁이 눈을 두어 번 끔벅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감사요?”
“그 왜…… 응급 처치를 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날 행했던 지혈 행위를 말하는 것 같았다.
“의사가 그러더군요.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응급 처치가 신기할 정도로 잘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아마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응급 처치 덕분이라고…….”
“츳, 난 또 뭐라고.”
주상혁이 혀를 차며 대수롭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당연했다. 과장을 조금 더하자면 죽은 사람도 살린다던 명의로 한세월을 살았던 게 주상혁이다. 지혈 조금 한 걸로는 어디 가서 자랑도 못 할 일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듯 답하긴 했어도 주상혁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박상운에 대한 분이 조금 사그라지자 주상혁의 사고가 자연스레 다시 퀘스트 쪽으로 넘어갔다.
퀘스트에 관한 것을 생각하던 주상혁이 돌연 다채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지 잠깐?’
우연히 박상운에게서 시선이 멈췄던 주상혁이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그토록 고민하던 환자가 자신의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있었다.
주상혁이 조금 전과 달리 또 한 단계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덕분에 아주 건강합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예……?”
주상혁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진짜로 어디 아픈 데 없다는 거죠?”
“네, 이제 막 퇴원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박상운이 주상혁말에 그렇게 답했다. 안색을 유심히 바라보던 주상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박상운의 말마따나 얼굴 전체적으로 생기가 넘치는 게 질병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박상운이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주상혁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 죄송합니다.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괜찮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꾸벅 인사하고 나가는 박상운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던 주상혁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딱 얼어붙었다.
『Lv.17 박상운.』
박상운의 머리 위의 레벨. 다급히 박상운을 불러 세웠다.
“잠깐!”
“예?”
“잠깐만요.”
주상혁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박상운이 있는 현관까지 빠르게 나온 주상혁이 박상운을 잡아끌며 말했다.
“저기 좀 잠깐 누워 보시죠.”
주상혁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의 침대였다.
* * *
주상혁이 방을 나가려던 박상운을 붙잡은 것은 한 가지 생각이 문뜩 들었기 때문이었다.
의원이 왜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었다.
주상혁은 여태까지 병든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의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상혁은 방금 그 개념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다.
‘건강한 사람도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면?’
과연 ‘그건 진료라고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주상혁의 사고 전환은…….
띠링.
Q. 의원으로서 의무 [일일 퀘스트].
「환생자 주상혁은 이십 년간의 ‘잉여 생활’을 청산하고 마침내 의원으로서 환생을 끝마쳤다. 의원은 응당 환자를 멀리해선 안 되는 법, 신장개업을 개시하고 환자를 진료하자.」
[목표 진료 수치: 1/3] [달성 시 명성 상승(명성은 스테이터스 창에서 확인 가능)] [제한시간: 23:31]―단, 제한시간 내에 달성 실패 시 랜덤 질병 획득.
운 좋게도 적중이었다.
주상혁이 진료 수치가 올라가자 입가에 옅은 미소를 품었다.
웃통을 까고 침대에 누워 있던 박상운이 말했다. 등짝에 박힌 수십 개의 침이 불안한 듯 보였다.
“근데 이거 진짜 괜찮은 겁니까? 뭔가 좀 불안한데…….”
“벌써 그날의 기억을 잊어버리신 겁니까?”
사경을 헤매던 박상운을 응급 처치해 준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박상운도 그 사실은 알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한건 어쩔 수 없었다.
“뭐……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사실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데다가…….”
“아아, 괜찮다니까 그러시네?”
박상운이 일어나려는 걸 저지하던 주상혁이 문뜩 무언가 떠오른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미 수치가 올랐으니까 더 놓고 있을 필요가 없나?’
본래라면 차분하게 기다려서 침의 효과가 최상이 되도록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환자의 거부감이 크다. 만류할 필요성이 없었다.
“알았어요. 그냥 지금 뽑죠, 뭐.”
조금 이르지만 주상혁이 침을 하나씩 뽑기 시작했다.
한쪽에 펼쳐 놓은 하얀 수건 위에 뽑은 침을 따로 하나씩 내려놓던 주상혁이 마지막 침을 빼내고는 말했다.
“자, 끝났습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상체 스트레칭을 하며 박상운이 말했다.
“뭐, 괜찮은데요? 샤워한 것처럼 개운하네요.”
한쪽에 벗어 놓은 옷가지를 박상운이 챙겼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박상운이 놀란 눈을 그렸다.
“버, 벌써 시간이……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급히 뛰어나가는 박상운의 머리 위에 시선이 머물러 있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뭐, 별 상관없나?”
다시 방에 혼자 남은 주상혁이 서 있느라 지친 다리를 느끼고 침대에 철퍼덕 앉았다.
거의 한 시간 만에 느껴 보는 침대 감촉은 푹신하고…….
“윽……? 이게 뭐야!”
축축했다.
* * *
주상혁의 침대를 차갑게 적시고 있었던 것은 석유같이 시꺼먼 액체였다.
“왜 그런 게 거기에 있었지?”
주상혁도 저런 액체는 난생처음 보는 액체였다. 다만…….
‘박상운의 몸에서 나온 건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예측할 수 있었다. 박상운이 배를 깔고 드러누웠던 자리.
그중에서도 시침했던 상반신이 있던 부분만 검은색으로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냄새는 어찌나 고약하던지 주상혁은 지금 그 액체를 발견하고 이십 분이 지난 시점에, 복도 중앙에 있는 빨래방에 있었다.
빨래방 의자에 앉아 멍 때리고 있던 주상혁이 돌연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닌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더 어지러워지는 듯한 착각이 몰려들었다.
당장에라도 퀘스트를 완수하기 위해 이동해도 모자를 판에 빨래방에서 침대 커버나 빨고 있다니 불안해도 너무 불안했다.
“오늘은 치질이었지만 내일은…….”
지금까지야 운 좋게 컨디션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의 질병만 걸렸지만, 다음도 그러라는 보장이 없었다.
머리가 복잡해진 주상혁이 깍지를 낀 손에 이마를 들이박은 채 고뇌에 잠겼다.
“환자로 적당한 사람이 없으려나?”
아까 박상운과 같은 침은 곤란했다.
침을 놓기 위한 마땅한 장소도 없었으며 뒤처리를 하는 것도 귀찮았다.
“음…….”
주상혁이 고민에 잠겨 있을 때였다.
“어머나, 도련님 아니시데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Lv.3 최경희.』
목소리의 주인은 ‘최경희’라는 이름의 오십 중반쯤의 여자였다. 뽀글이 파마를 한 여자는 길드에서 숙직하는 길드원들의 가사를 담당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주상혁이 가볍게 목인사를 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Lv.3이면 각성자는 아니란 거네?’
길드 내에서 제일 말단 길드원인 박상운이 처음에 Lv.17이었다.
그와 비교한다면 각성자일 리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래요? 직접 빨래를 다 하시고?”
“냄새가 좀 고약해서…….”
“제가 방앞에 내놓으시면 해 드렸을 건디.”
최경희가 짐짓 아쉽다는 표정을 그렸다가 돌연 다른 표정을 지었다. 남사스러운 기색의 웃음이었다.
“아고, 내가 눈치가 없었구만, 아들 키우는 입장에서 알아챘어야 한디.”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게 분명했다.
“지금 무슨 생각하시는지는 알겠는데 그런 거 아닌데요?”
“부끄러워하실 것 없어요. 어디 가서 몽정하셨다고 소문 안 내니까요.”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그냥 뱉으려던 말을 삼켰다.
지금 무슨 말을 하든, 말 몇 마디 나누는 걸로 오해를 풀 수 없을 것을 느낀 이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성자가 아니니까 더 쉬울지도?’
어쩌면 멈춰 있던 퀘스트의 수치를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저…… 아주머니.”
잠깐 생각하는 사이 최경희는 미리 돌려 놓았던 빨래를 바구니에 옮겨 담고 있었다.
최경희가 빨래를 바구니에 바쁘게 옮겨 담으며 말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생리 현상…….”
“아니요. 그거 말고.”
잠깐 생각하던 최경희가 세탁기를 향하던 몸을 펴고 주상혁을 바라봤다.
“그럼요? 무슨 하실 맬씀이시라도?”
“혹시 어디 아프신 데 없으십니까?”
“어디 아픈 데라…….”
최경희가 픽 웃음 지어 넘기더니 다시 세탁기의 빨래를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 건강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우리 아들내미는 얼굴도 본체만체인디.”
그냥 가벼운 대화 정도로 받아들이는 듯한 최경희에게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편찮으신 데 없으시나구요.”
“저희 나이 때에야 안 아픈 데가 없죠. 다리며 허리며 목이며.”
빨래를 카트 위의 바구니에 담은 최경희가 말했다.
“그럼 먼저 가 볼게요?”
카트를 밀고 빨래방을 나가려는 최경희를 쫓아간 주상혁이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왜 그러신대요?”
최경희의 약간 귀찮은듯한 말투에 주상혁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제가 그…… 안마라도 해 드릴까요?”
다시 한 번 눈을 끔벅이던 최경희가 피식 웃었다.
“마음만 받을게요.”
능글맞은 아줌마 특유의 목소리와 함께 최경희가 카트를 밀고 옆을 지나갔다. 주상혁이 최경희의 팔목을 잡고 멈춰 세웠다.
“에이 그러지 말고 딱 5분만 쉬었다가 일하세요.”
“…….”
최경희가 주상혁에게 고용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은 주상혁이 길드장의 아들인 것은 최경희도 알고 있다.
반 고용주나 다름없는 주상혁의 부탁을 마냥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난처한 얼굴을 하던 최경희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그럼 딱 5분만 쉬었다가 갈게요?”
* * *
주상혁의 제안에 다시금 빨래방으로 향한 최경희.
그녀는 지금 기다란 빨래방의 의자에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으, 으…….”
뭉친 어깨를 주무르는 척하며 혈 자리를 중점적으로 문지르던 주상혁이 말했다.
“어때요? 시원하시죠?”
“네…….”
최경희의 늘어지는 듯한 답을 들은 주상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혈 자리의 지식을 안마 따위나 하면서 사용한다는 게 기분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띠링.
Q. 의원으로서 의무 [일일 퀘스트].
「환생자 주상혁은 이십 년간의 ‘잉여 생활’을 청산하고 마침내 의원으로서 환생을 끝마쳤다. 의원은 응당 환자를 멀리해선 안 되는 법, 신장개업을 개시하고 환자를 진료하자.」
[목표 진료 수치: 2/3] [달성 시 명성 상승(명성은 스테이터스 창에서 확인 가능)] [제한시간: 18:22]―단, 제한시간 내에 달성 실패 시 랜덤 질병 획득.
수치가 하나 더 채워진 것이었다.
안마를 계속해 나가던 주상혁이 말했다.
“저…… 근데, 혹시 동료분들 중에 안마받는 거 좋아하실 법한 분 따로 없을까요?”
많지는 않아도 최경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아줌마는 하나가 아니다.
주상혁이 알고 있는 사람만 두 명이었고,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 희숙 씨라면 좋아하실지도…… 평소에 어깨가 결린다거나 이야기를 많이 했으니까.”
“혹시 희숙 아주머니는 어디 계실까요?”
* * *
최경희의 안마를 해 주고 30분쯤 지난 후였다.
주상혁이 웃는 얼굴로 자기 방에 들어왔다.
“흐흐흐, 일이 쉽게 풀리는군.”
최경희와 동료 김희숙을 안마해 주면서 퀘스트를 완료했다. 심지어 최경희와 김희숙에게는 내일도 부탁한다는 확답을 받은 상태.
일이 술술 풀리고 있었다.
Q. 의원으로서의 의무. [일일 퀘스트]
「환생자 주상혁은 이십 년간의 ‘잉여 생활’을 청산하고 마침내 의원으로서 환생을 끝마쳤다. 의원은 응당 환자를 멀리해선 안 되는 법, 신장개업을 개시하고 환자를 진료하자.」
[목표 진료 수치: 3/3] [달성 시 명성 상승(명성은 스테이터스 창에서 확인 가능)] [제한시간:17:56].―단, 제한시간 내에 달성 실패 시 랜덤 질병 획득.
퀘스트의 보상을 수령하시겠습니까? Yes/No.
퀘스트 창을 킨 주상혁이 보상 수령에 대한 의사를 묻는 질문에 ‘Yes’ 터치했다.
퀘스트의 보상을 수령합니다.
명성이 소량 상승합니다.
주상혁이 퀘스트의 보상이 수령되었음을 알리는 알람을 보고는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 떠오른 주상혁이 스테이터스 창을 켰다.
여태 시스템과의 자존심 싸움을 벌이느라 한 번도 스테이터스 창을 켜 본 적이 없었다.
‘명성? 하필 올라도 그딴 게 오르네.’
스테이터스.
Lv.4 주상혁 (환생 의원).
―능력치
힘: 6 / 민첩: 8 / 지식: 5 /행운: 6
회복: 0% / 체력: 0
방어: 0 / 마나: 0 / 명성: 1
―스킬
Lv.1 초급 의술[passive].
Lv.1 초급 조제술[passive].
Lv.1 초급 침술[passive].
Lv.1 초급 진맥[active].
딱히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한 주상혁의 얼굴에서 흥미가 사라졌다.
다시 평소와 같은 졸린 눈을 뜬 주상혁이 스테이터스 창을 종료했다.
터벅터벅터벅.
침대로 걸어간 주상혁이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역시 의원질은 수지에 맞지 않는다니까…….”
* * *
“하아아아아아아암.”
그날 자정이 막 지난 시점이었다.
스테이터스를 살펴보고 잠들었던 주상혁이 침대에서 눈을 떴다.
“몇시지……?”
한숨 자고 일어나서 시계를 확인한 주상혁이 언제나 그렇듯 컴퓨터 책상으로 향했다.
‘오늘은 뭐 하면서 시간을 때워야 하나…….’
툭.
어질러진 방을 가로지르다가 발끝에 무언가 닿자 주상혁이 쪼구려 앉았다.
‘이건…….’
아침에 들렀던 박상운이 주고 간 쇼핑백이었다.
주상혁이 생각에 잠겼다.
“이십 년 삼이랬지……?”
이십 년 삼 정도면 주상혁의 전생의 지식으로 놓고 볼 때 귀한 약재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초 수준은 또 아니었다.
산삼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포장을 벗겼다.
산삼의 질을 확인하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이걸 어쩐다…….”
품질은 제법 쓸 만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 그냥 먹자니 쓴 건 싫어하는데…….’
전생에도 그렇고 현생에서도 그렇다.
변하지 않고 주상혁은 단 것을 좋아했다.
인생도 하루하루가 쓰디쓴 약재를 생으로 씹는 느낌인데 먹는 거라도 달콤해야 기분 전환이 됐다.
고민이 깊어지던 주상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가공해서 먹을까?”
약발이야 가공해서 먹으면 떨어진다.
하지만 주상혁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 효능의 감소를 최소화하고 가공할 능력이 있었다.
‘번거롭지만 이런 거 먹을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고…….’
남 주기에는 솔직히 아까웠는지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초콜릿이나 만들어 먹자.”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을 후관 일 층에 위치한 식당 주방으로 향했다.
* * *
토요일 아침이었다.
청초길드의 길드원이 어째선지 아침 일찍 후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이 일 년에 딱 두 번 있는 간이 심사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후관으로 향하는 사람 중에는 박상운도 있었다.
“아, 하필 간이 심사를 해도 이번 주에 하냐?”
간이 심사는 길드 자체적으로 길드원들의 능력치를 심사하는 행사이다.
길드 입장에서도 상당히 번거로운 관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모든 길드는 일 년에 한 차례씩 반드시 간이 심사를 자체적으로 실시했다.
이유는 단 하나.
정부에서 길드를 설립할 때 강제성을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각성자들은 반드시 컨트롤해야 하는 폭탄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사설 길드들의 전투력을 시시각각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박상운의 투덜거림을 듣고 복도를 걷던 동기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이번 주가 마지막 휴일이던가?”
“그래.”
박상운은 지난주 금요일 심각한 부상을 당했었다.
결과는 알려지다시피 입원.
덕분에 박상운은 이번 주가 마지막 휴식 주였다.
박상운이 옆자리의 동기에게 말했다.
“재성아.”
“뭐.”
“친구의 비통함을 비웃지만 말고 구원의 손길을 주지 않으련?”
동료의 이름은 이재성.
이재성도 다음 주가 마지막 휴식 주다. 박상운을 돕자고 자신이 지옥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응, 안 돼.”
이재성이 박상운의 어깨에 다독이듯 툭 손을 얹고는 말했다.
“그냥 포기하고 빌어라, 능력치라도 몽땅 성장해 있기를.”
“칫, 그럴 리가 있냐?”
보통 각성자의 평가는 각성의 징후가 일어나고 일 년 후에 실시된다.
이유는 그때쯤이면 일반적인 경우 각성자의 성장이 완전히 멈추기 때문이다.
물론 드물게 예외도 있다.
처음에 비해 성장 속도가 느려지긴 하겠지만, 그 뒤로도 꾸준히 성장하는 부류였다.
명백히 말해 간이 심사는 그런 이들을 고려한 시스템이기도 했다.
지금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랭커들도 성장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이런 성장이 더디게라도 이루어지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박상운은 아쉽게도 전자.
성장이 완전히 정지해버린 대부분의 경우에 해당했다.
“어?”
일 층 복도를 걷던 박상운이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틀었다.
식당 아주머니들 사이에 주상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터벅터벅터벅
“야 어디가?”
이재성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식당 안으로 걸어 들어간 박상운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주상혁이 슬쩍 흘기고는 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주상혁의 미지근한 반응에도 유심히 그를 살펴보던 박상운이 말했다.
“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입니다.”
“뭔데요?”
“여기서 뭐 하시는 건지 궁금해서요.”
“보면 아시잖아요.”
주상혁을 보던 박상운의 시선이 슬쩍 내려갔다.
그곳엔 의자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보기에는 안마를 하고 계시긴 한데…….”
“잘 보셨네요. 보시다시피 안마 중입니다.”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박상운의 호기심을 유발했다.
박상운의 시선을 받으며 안마를 계속하던 주상혁이 자리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자, 다됐습니다.”
이마와 관자놀이에 맺힌 땀을 주상혁이 소매로 닦아 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행복한 얼굴로 일어났다.
아주머니의 개운해하는 얼굴을 보고 무언가 떠올랐는지 박상운이 말했다.
“혹시 지난번에 저한테 침을 놓아 주신 이유랑 같은 겁니까?”
“뭐, 그렇죠.”
박상운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 거라면 저도 한 번만 더 해 주시면 안 됩니까?”
“안마를요?”
“아니요 침이요. 사실 그 뒤로 컨디션이 아주 좋아서…….”
주상혁이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휙 돌아섰다.
주상혁이 조리실로 들어가 인사했다.
“저 이만 가 볼게요.”
조리실 안에서 조심히 들어가라는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저…….”
돌아선 주상혁이 박상운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휙 식당을 나갔다.
식당을 쫓아 나온 박상운이 이 층으로 올라가는 주상혁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쭉 지켜보던 동료 이재성이 말했다.
“뭔데 그래?”
“…….”
멍한 얼굴로 간이 심사가 이루어지는 체력 단련실로 향하는 박상운의 표정이 무거웠다.
‘뭐지? 내가 또 뭐 잘못한 게 있는 건가?’
머리가 복잡했다.
왜냐하면 솔직히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침을 맞고 난 뒤부터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박상운은 그때 그 혈관에 사이다를 들이붓는 듯한 상쾌함을 다시 한 번 더 경험하고 싶었다.
“바, 박상운 굉장한데? 너 원래 이렇게 힘이 셌냐?”
침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던 박상운이 정신을 번뜩 차렸다.
목소리는 측정기 옆에서 수기를 작성하던 선배에게서 들려온 것 같았다.
측정기에 적힌 디지털 계측기에 ‘D’라는 등급을 확인한 박상운이 소리 냈다.
“에에엥?”
등급이 올라 있었다.
* * *
방 안으로 들어온 주상혁이 투덜거렸다.
“츳, 좋은 건 알아 가지고.”
침을 놓아 달라던 박상운이 왜 그러는지는 주상혁이 가장 잘 안다.
’23레벨이었지?‘
자신의 방에 들렀을 때 17레벨이었던 박상운이다.
그런데 오늘 또다시 확인해 본바 그날 방을 나가던 때와 레벨이 여전히 같았다.
레벨이 오른 게 일시적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즉, 노골적으로 그 속내가 보였다.
일단 퀘스트를 위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해 줬다. 하지만 또 해 줄 마음은 당연히 없었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저번엔 어디까지나 실수였다.
침이 큰 폭의 레벨 업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평화로운 일상을 위해서라도 자중해야 했다.
주상혁이 안마의 여파로 후들후들 떨리는 팔을 확인했다.
“근데 그나저나 이것도 점점 힘들어지는데…….”
아주머니들을 상대로 하는 안마는 처음에는 5분 안팎으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강하게 지압한다고 해도 크게 피로하지 않았다. 안마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요 일주일간 쭉 해 본 결과 안마의 효과가 줄어 가고 있었다. 안마를 하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어쩐다…….’
난처한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평온한 일상이 무너지는 그림이 그려졌다.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다른 환자를 구해야겠어.”
* * *
청초길드는 매주 수요일 주간 회의가 있다.
팀별로 운영하면서 불편한 점이있다면 그 점을 이야기하고 의견을 나누는 목적성이 강했다.
주간 회의는 보통 오전 9시부터 10까지 진행된다.
주간 회의가 끝나면 길드 대표 주재호는 안건을 종합하고 동시에 실질적인 결재를 시작하는 시간을 혼자 갖는다.
주상혁의 아버지 주재호는 오늘도 주간 회의가 끝나면 그 작업을 앉은 자리에서 할 생각이었다.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주재호가 서류를 향하던 고개를 들었다. 방을 분주하게 나가는 팀장들과는 다르게 자신을 바라보는 팀장이 있었다.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작업복 차림의 남자는 ‘정태수’라는 이름으로 길드의 환경 조성에 힘쓰는 내부 관리 팀의 팀장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정태수가 마지막 팀장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따로 결재받을 일이 있습니다.”
“따로요?”
정태수가 파일철 하나를 내밀자 그것을 받아든 주재호가 말했다.
“이건 뭡니까?”
“일단 읽어 보시죠.”
약사발 약절구 약탕기를 비롯한 한의학 도구들과 처음 보는 약재들이 결재 서류에 적혀 있었다.
“큰아드님이 구입해 달라고 하더군요.”
“상혁이가요?”
예상외의 이름에 주재호가 당황한 기색을 표했다.
주상혁은 마음에 상처가 많은 아이다.
출생과 동시에 생모 정채연과 이별해 엄마 없이 자랐다. 거기에 비각성자라서 각성자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것도 그 아이만의 상처였다.
주재호에게 있어서 주상혁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럴 리가요? 방 안에서 웬만하면 나오지 않는 아이인데…….”
“제가 직접 다시 물어보기까지 한 사항입니다. 무를까요?”
그간 주재호가 정태수를 쭉 지켜봐 온 세월만 십 년이 넘는다.
거짓말이 아닌 것 정도는 그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진지해진 얼굴로 생각하던 주재호가 서류를 노려보다가 중얼거렸다.
“2억 원이라…….”
삼류 길드에는 상당히 큰 금액이었지만, 망설이던 주재호가 펜을 들었다.
주상혁은 정채연의 유산과 같은 아이이다.
해 달라는건 가능한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주재호가 눈을 딱 감고 사인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