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20
Book 4 Chapter 4
벌떡.
다섯 번째 7월 31일.
주상혁이 잘려 나간 목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속은 후련하긴 하네!”
히죽.
면상에 발차기라도 한 방 먹여 주니 꽉 막혔던 속이 조금 뚫리는 기분이었다.
주상혁이 후련한 마음을 가지고 이불에서 나왔다.
이제 강혜영을 만나러 가야 했다.
공원으로 가는 길에 주상혁의 머릿속은 그동안의 정보를 정리하기 바빴다.
“생각한 거보다 깊게 관여되어 있는 거 같은데…….”
닉스라는 단체가 이번 회장 선거에 발을 깊게 들이밀고 있다.
그래서 전에는 몰랐던 문제가 생겼다.
‘정보가 부족해…….’
4회차를 거듭했지만, 정보가 부족했다.
첫 번째야 기억이 별로 없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세 번이나 회귀를 했음에도 정보가 적은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기껏 해 봐야 얻은 정보는…….’
닉스가 회장 선거에 깊게 관여한다는 것.
그리고 그 닉스가 주상혁을 노린다는 것.
멜레나의 현시점 위치.
강태섭이 잠든 이유정도였다.
주상혁은 정보가 부족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매번 같은 방식으로만 행동 패턴을 가져갔기 때문.
‘조금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해…….’
한번 멜레나에게 쓴맛을 본 경험이 있어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벌써 네 번의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무엇하나 차도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당연히 더 많은 정보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몇 번 던져 주며 정보를 얻어 볼까……?’
이번 회차는 탐색용.
그렇게 결정하자 때마침 재미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멜레나 그년…….”
복수도 할 겸 꽤나 괜찮은 표적이었다.
이 시점 멜레나는 그 병원에 강태섭을 치료하는 의사의 모습으로 머무는 시기였다.
주상혁이 때마침 모습을 드러내는 강혜영을 보고 다가갔다.
“야.”
깜짝 놀란 강혜영이 훌쩍 물러나더니 경계심이 느껴지는 눈을 떴다.
주상혁이 강혜영을 이번에 처음 만난 것처럼 연기했다.
대화가 이어지고 결국에는 주상혁이 클린트 카드를 넘기며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보름만 기다렸다가 치료해라.”
강혜영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어째서 보름이에요?”
“그건 말해 줄 수 없는데?”
강혜영이 말했다.
“그냥 보름만 기다려 주면 되는 거죠?”
“그래.”
“알았어요.”
강혜영이 클린트 카드를 받아들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뒤돌아서 걸음을 옮기던 강혜영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비스듬히 돌아섰다.
“근데요.”
“또 뭐, 궁금한 게 있냐?”
“제가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주상혁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땐 조진 거지 뭐,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고 생각할 련다.”
* * *
클린트 카드를 건네주고 약속받은 보름.
당연히 다 이유가 있었다.
멜레나는 지금의 주상혁이 제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또 보름 수련한다고 멜레나는 이길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상혁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보름이면 멜레나는 제압할 수준으로 만드는 게 충분했다.
주상혁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길로 광주로 향했다.
청초길드가 아닌 외가인 대호길드로 향한 것.
주상혁이 광주에 도착해서 집무실로 향했다.
주상혁의 얼굴을 알아본 건지 다행히 막는 사람은 없었다.
“할아버지!”
주상혁이 문을 쾅 열며 급하게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랄 법도 한데 정지호의 의문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차분히 그릴 뿐이었다.
“그래, 상혁이 왔느냐?”
“그때 도와줄 일이 있으면 말하라는 거 아직 유효하죠?”
정지호가 여유로운 노년 신사의 미소와 함께 말했다.
“물론, 그래 이 할애비가 어떤 걸 도와주면 되느냐?”
주상혁이 미리 인벤토리에서 꺼내 메고 있던 가방을 열어 침을 꺼냈다.
“일단, 거기 소파 위에 대충 누워 보세요.”
정지호가 순순히 응했고 주상혁이 침을 놨다.
“껄껄껄, 우리 외손주에게 못 볼 꼴 보였구만…….”
침을 놓는 동안 들렸던 숨넘어갈 듯한 효과음에 관한 이야기겠지만, 말이 그렇지 크게 신경 쓰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보다…….’
『Lv.75 정지호.』
‘이 정도면 되겠지?’
정지호의 레벨을 확인한 주상혁이 미소지었다.
굳이 정지호를 선택한 건 저번 회차의 강태섭과 레벨이 비슷했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적어도 독이 치명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준은 되어야 했다.
“일단 샤워하고 계세요. 그리고 전 옥상 좀 이용할게요.”
“그래그래.”
보충제와 탕약을 만들어 두 사람을 성장시킨다.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
* * *
주상혁의 보름간의 노력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정지호의 경우 80레벨에 달하는 수준까지 성장했으며 레벨이 급격히 오른 탓인가 피부 주름도 조금 사라지는 등 회춘에 가까운 효과를 얻은 상태였다.
정지원도 마찬가지였다.
55레벨에 불과했지만, 두 방의 침과 보충제와 탕약으로 무려 71.
단번에 S급의 영역에 도달했다.
심지어 주상혁의 폴라나 포션까지 먹자 두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수준이었다.
“저 건물이야?”
“어.”
주상혁이 정지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지원이 말했다.
“지금 습격하면 안 돼?”
“안돼, 가끔 병원을 비우는 거 같더라고.”
일전에 강혜영을 따라 들어갔을 때가 그랬다.
지금 소란을 일으키고 습격했는데 멜레나가 없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정지원에게 병원의 감시를 맡기고 잠시간 앉아서 기다릴 때였다.
2시간쯤 지나자 병원을 감시하던 정지원이 손짓했다.
“저 사람 맞지?”
가까이 다가간 주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으로 들어가는 금발의 외국인 한 명이 보였다.
“누나는 밖을 부탁할게.”
주상혁이 정지원에게 외부를 맡기고 정지호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이리 오너라.”
주상혁이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가자 아직 일 층에서 머물던 멜레나가 주상혁과 눈이 딱 마주쳤다.
씨익.
주상혁의 입가에 걸린 묘한 웃음에서 불길함을 느끼고 멜레나가 말했다.
“두 분은 누구시죠?”
“저 몰라요? 저는 알겠는데?”
“안다고요? 저를?”
주상혁이 멜레나의 말에 대한 답 대신 웃음기 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독을 쓰거든요? 일단 양팔 정도는 분질러 놓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하마.”
정지호가 멜레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멜레나가 품 안에 손을 집어넣는 걸 목격한 정지호가 엄청난 속도로 돌진했다.
품에서 꺼낸 독 병을 높이 치켜들었던 멜레나의 팔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크윽…….
한쪽 팔을 잃고 멜레나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멜레나가 곧이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크크, 하하하하…….”
피시이이익.
팔이 잘려 나가긴 했어도 손과 함께 떨어진 독 병이 깨진 것이다.
뭉게뭉게 보랏빛 독 안개가 피어나 일 층을 덮기 시작했다.
“멍청하긴 처음부터 목을 노렸어야지. 팔 정도는 회복하면 그만이거든?”
멜레나가 지혈을 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지금 깨진 독은 자신이 지닌 최고의 극독.
설령 로이터라고 해도 마나 운용에 지장을 줄 만큼 강력했다.
멜레나가 어떻게 요리할까 혀를 날름거렸을 때였다.
터벅터벅.
짙은 독 안개 속에서 나지막이 들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정지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멜레나의 눈이 소눈처럼 커다래졌다.
황급히 남은 손으로 다른 독을 꺼내려던 멜레나의 팔이 또다시 잘려 나갔다.
마찬가지로 바닥에 부딪혀 초록색 독 안개가 퍼졌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정지호의 얼굴은 조금 퀴퀴한 곰팡이 냄새를 맡아 불쾌한 느낌, 딱 그 정도였다.
“이, 이럴 리가…….”
양팔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자 잠시 후 독 안개가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멜레나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시선을 받은 주상혁이 씩 웃었다.
병원문을 열고 환기시킨 주상혁이 병원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럼 우리 이야기 좀 해 볼까?”
* * *
주상혁은 대호길드에서 준비한 리무진에 타서 계곡으로 이동했다.
계곡으로 이동하는 주상혁의 표정은 곱지 못했다.
수차례 이어졌던 고문에도 멜레나가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
“당신 거짓말을 했군요.”
생각에 잠겨 있던 주상혁이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봤다.
정지원과 정지호 사이에 앉아서 노려보는 강혜영이 보였다.
“거짓말? 무슨 거짓말?”
“강태웅의 끄나풀이었어.”
어이가 없는지 주상혁이 픽 웃었다.
“야, 지금 흥분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건 알겠는데 내가 강태웅의 편이었으면 그때 김밥집 앞에서 널 그 녀석들에게 딸려 보내면 됐지, 널 왜 구했겠냐?”
“그, 그건…….”
맹점을 찔린 강혜영이 어버버거리다가 화제를 바꿨다.
“그럼 선생님은 왜 저렇게 만든 거죠?”
고문을 했지만 입을 열지 않고 기절해 버린 멜레나는 지금 꽁꽁 묶는 것도 모자라 침으로 결박해 트렁크에 넣어 놓은 상태였다.
“고문해야지.”
“고문이요? 어째서죠? 강태웅의 편이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저 녀석, 뭔가 수상한 건 없었냐?”
난데없는 질문에 강혜영이 살짝 당황했다.
“수상한 거요?”
“예를 들어 저 사람이 의도적으로 너에게 접근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거나 그런 거 말이야.”
강혜영도 얼핏 그런 걸 느꼈던 적이 있었는지 표정에 다 드러났다.
“3년 전 강태섭을 재운 사람이 저 여자라면? 너도 아까 이 층에서 몰래 지켜봤겠지만, 저 녀석 의사나 보조 계열 쪽이 아닌 독쟁이야.”
“…….”
“어떻게 녀석이 강태섭을 치료할 수 있을까? 그냥 뛰어난 독쟁이라서? 아니면 애초에 본인이 만든 독이었기 때문에?”
주상혁이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난 아무리 봐도 후자가 일 거 같은 생각이 드는데 기분 탓이려나?”
“그렇지만…….”
주상혁이 강혜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치만이고 자시고 믿으라고는 안 해. 근데 저 녀석에게 치료받아 봤자 좋을 꼴 못 본다는 건 내가 장담해.”
한참을 주행하던 리무진이 펜션 앞에서 멈췄다.
‘그럼 이번엔 어떻게 변하나 볼까?’
저번엔 강태섭을 강하게 만들었더니 강태섭이 죽었다.
그럼 이번엔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벌써 궁금했다.
* * *
주상혁의 펜션 생활은 멜레나를 고문하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거부 반응을 보이던 강혜영도 결국엔 협조했다.
아무래도 강태섭을 진심으로 간호하는 주상혁을 보고 협조하기로 한 듯했다.
던전 브레이크의 일로 계곡에 도착한 유정을 정지호의 힘을 빌려 협조를 얻어 내고 클린트 경매장에서 베르토프를 만나는 일까지.
순탄하게 이어진 주상혁의 5회차.
“이렇게 되는 건가?”
주상혁이 청초길드에서 모습을 나타낸 머리수를 세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한 명.
일전에 네 명만 모습을 드러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전개였다.
멜레나가 갑자기 죽은 이유인지 제법 많은 인원이 몰려왔다.
정지호와 베르토프의 선전에 전투는 제법 치열했다.
닉스의 숫자를 절반 가까이 줄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주상혁의 패배.
베르토프와 유정의 레벨도 올려서 응전했다면 결과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상혁은 후회는 없었다.
‘이 방법은 아군의 피해도 너무 커.’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했더라도 정지호나 정지원이 죽는다면?
그건 완벽한 방법이 아니었다.
주상혁에게는 아직 여섯 번 가까이 기회가 남아있다.
모든 기회를 소모하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 어쩔 수 없이 선택해도 늦지 않았다.
주상혁이 자신의 심장을 찌른 김진성을 보며 씩 웃었다.
찬란한 빛과 함께 다섯 번째 회귀가 찾아왔다.
* * *
5회차.
강혜영을 데리고 계곡에서 지내며 레벨 업을 한 뒤에 강태섭의 죽음을 막아 보려다가 마법에 타 죽음.
6회차.
강태웅의 뒤를 캐다가 로이터의 주먹에 피 반죽이 되어 죽음.
7회차.
순순히 따라가는 척하다가 정지호와 정지원 베르토프를 데리고 병원을 습격했다가 목이 잘려 죽음.
8회차 9회차 10회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찔려 죽고, 죽고, 또 죽었다.
정보가 늘어 갔다. 전체적인 구도도 하나둘씩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주상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거대한 바위.
정보가 쌓일수록 닉스는 이미 바위이고 자신은 계란인 게 점점 선명해졌다.
‘애초에 주어진 시간이 너무 적어…….’
불과 두 달 남짓의 시간.
그저 죽고 살아나는 것이 반복되면서 레벨도 스킬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회귀이기에 더욱 절망적이었다.
주상혁이 시계를 바라봤다.
어느덧 주상혁의 시계에는 하나의 숫자만 남아 있었다.
‘그 방법밖에 없나?’
이전에 큰 희생을 낳기 때문에 미뤄 뒀던 방법.
베르토프를 끌어들이고 정지호와 정지원을 성장시킨 뒤 닉스를 박살 내는 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펜션 뒤에서 탕약을 달이던 주상혁이 볼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고개를 틀었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생수통을 들고 있는 강혜영이 보였다.
“그런 게 있어.”
느슨한 뚜껑을 열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주상혁이 아궁이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강혜영이 말했다.
“아, 뭔데요. 말해 봐요.”
주상혁이 강혜영을 보다가 삼키려던 말을 결국 뱉었다.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야, 약혜영.”
“네네, 뭔데요?”
기대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강혜영이 보였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치자? 너라면 어떻게 할래?”
“그때 그 잘 먹고 잘사는 이야기예요?”
“비슷해.”
주상혁이 순순히 인정했다. 잠시간 생각하던 강혜영의 입이 열렸다.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다’라는 말이 있죠?”
“포기하란 거냐? 포기하면 다 죽어.”
“죽어요? 그럼 곤란한데…….”
강혜영이 주상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저도 죽어요?”
“적어도 내 가족이랑 너랑 나 그리고 네 아빠는 100% 죽어.”
혹시 모른다. 닉스에 어찌어찌 빌붙으면 주상혁은 살 수 있을지.
“음…… 뭔가 무서운 조건인데…… 그럼 사실상 방법이 없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묻잖아. 너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하겠냐고.”
“저라면…….”
강혜영이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도망갈…… 텐데…….”
강혜영이 슬쩍 눈치를 보며 말하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건 안 되겠죠?”
뭔가 맥빠지는 대답.
하지만…….
“도망…….”
“아, 그…… 못 들은 걸로 해요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주상혁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 * *
주상혁은 자신의 머리가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머리 좋기로 따지자면 전생이든 이생이든 항상 더 대단한 사람들이 많았고 훌륭한 업적을 세운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
‘하지만 멍청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정정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이번에는 매우 간단한 문제를 떠올리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전액을 말씀하시는 거죠?
“네, 제 계좌로 보내 주세요. 지금 당장.”
무언가 말하려던 박지훈이 머뭇거리다가 끝끝내 답했다.
아마도 여러 가지 비밀의 노출이라거나 그런 것에 이야기겠지만, 이제 상관없는 일이었다.
―음…… 알겠습니다.
박지훈과의 통화를 끊자 강혜영이 질문했다.
“근데 어디 가요?”
주상혁이 짐을 싸는 모습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강혜영의 목소리였다.
“당장 여기를 떠날 건데…….”
주상혁이 입을 멈추고 고민하다가 말했다.
“넌 어떻게 할래?”
“뭘요?”
“따라올지 아니면 너 알아서 갈지 묻는 거야.”
“그럼 따라…….”
강혜영의 말을 자르고 주상혁이 말했다.
“일단 따라오면 중간에 도망가는 거 불가능. 도망가면 쫓아가서 죽일 거야 내키지는 않지만.”
“왜 그래요 무섭게…….”
“절대 정보가 새어 나가면 안 돼서 말하는 거야.”
적어도 이번회차는 준비가 끝날 때까지는 롱런해야 한다.
강혜영이 잠시 생각하다 농담하는 거 같지는 않자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돌아갈게요. 죄송해요.”
주상혁이 말했다.
“참고로 믿든 믿지 않든 자유겠지만, 앞으로 너희 아빠가 죽고 강태웅이 회장이 될 거야.”
“어제의 그 이야기에요?”
“비슷하긴 한데…… 그냥 하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럼요?”
“굳이 말하자면…… 그래, 예언 정도 되겠네. 적중률 100%의.”
확신에 찬 주상혁의 눈빛을 읽은 건지 강혜영이 질문했다.
“제가 오빠를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래도 너희 아빠는 죽어. 적어도 이번에는.”
강혜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죽으면 죽는 거지, 다음이 있다는듯한 말이네요….”
주상혁이 그냥 말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주상혁의 얼굴을 보고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강혜영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 * *
도망간다.
어찌 보면 맥빠지는 말이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현 상황에서 주상혁이 놓치고 있던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였다.
주상혁은 죽으면 7월 31로 회귀한다.
이건 아마도 변하지 않는 정해진 사실이다.
죽은 시기가 언제든 실제로 그날로 회귀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 말은 주상혁이 이번에 도망가서 세상과 단절하고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살아만 있다면 숫자는 줄지 않는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주어진 시간은 두 달이 아니었어…….’
열두 번의 회귀를 최대한 늘어트려 사용한다면 여든 살까지 산다는 가정하에 칠백이십 년짜리 회귀였다.
물론 이제 주상혁에게 남은 기회는 한 번.
하지만 그렇다고 늦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은 충분했다.
계곡에서 며칠간 이사 준비를 하다 도착한 곳은 강원도의 어느 산골 마을이었다.
주상혁이 회관 앞에 도착한 택배를 하나 뜯어 확인했다.
“약초는 무사히 도착했고…….”
백여 개를 훌쩍 넘길 것 같은 박스 안에는 유적에서 채집한 약초가 몽땅 들어 있었다.
주상혁이 마을 회관 안으로 박스를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마을 이장에게 큰돈을 주고 회관을 빌렸다. 이제 이곳이 집이었다.
그날 결국 따라오기로 결정한 강혜영이 말했다.
“근데 여기랑 펜션이랑 다른 게 있어요?”
“펜션은 강태웅한테 노출됐거든.”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것도 그 적중률 100의.”
“예언이지.”
강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뭐 하면 돼요?”
“뭐 하긴 그냥 주주랑 깜깜이 데리고 놀아라.”
“놀아요?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주상혁은 이번 회차에서도 독 만들기를 비롯해 강혜영을 바쁘게 굴렸다.
항상 자신은 물론이고 강혜영도 노는 꼴을 못 보던 주상혁이 놀라고 먼저 말하는 건 강혜영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주상혁이 풀던 짐에서 때마침 호미가 굴러떨어졌다.
주상혁이 그걸 집어 내밀었다.
“뭐, 심심하면 감자라도 몇 개 캐 오던가, 서리하다 걸리진 말고”
강혜영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진짜로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거죠?”
“그렇다니까?”
주상혁이 짐을 다 풀고 회관 담벼락 그늘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람도 선선하게 부는 게 탕약을 달이기 좋았다.
쪼르르 따라온 강혜영도 옆에 앉더니 말했다.
“여기서 언제까지 살아요?”
“글쎄다…….”
머릿속으로 대충 기간을 가늠하던 주상혁이 말했다.
“대충 이삼 년쯤?”
“그럼 그 후에는요?”
“그후에?”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다.
아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육십 년의 시간이라지만, 주상혁의 계획은 간단했다.
레벨과 스킬 레벨은 회귀와 동시에 초기화.
하지만 감각까지 초기화 되는 건 아니다.
완벽한 중급 정화의 탕약을 스킬 보정을 받지 않고 완성할 수 있을 정도의 감각과 정보를 습득 하는것.
이게 계획 중 하나였다.
그러니 대략 이삼 년 정도면 탕약을 완성할 거라고 생각한 주상혁의 입장에서 그 이후의 계획은 필요 없었다.
‘어차피 준비하는 회차니까.’
주상혁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 * *
삼 년이라는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강태섭이 죽고 강태웅이 회장이 되었다.
청초길드는 무사했다.
주상혁이 없기 때문인듯했다.
하지만 청초길드에도 슬픈 소식은 있었다.
학폭으로 쌍둥이 중 하나인 주재혁이 죽은 것이다.
그 외에도 유정이 죽었고 전 세계적으로 다섯 번밖에 출현한 적이 없던 S급 던전이 국내에 출현하면서 시끌벅적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사건을 수습하느라고 S급 각성자들이 많이 죽어 나갔다.
물론 그 외에도 유독 삼 년 사이 큼지막한 사건들이 몇 개 더 있었지만, 주상혁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많은 일이 일어났다가 사라졌지만.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파멸이 되는 일들이었지만.
강원도의 촌구석에서 시간을 보내던 주상혁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주상혁은 몇 달 전부터는 탕약을 달이지 않고 있었다.
스킬의 도움 없이도 탕약을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었다.
주상혁은 지금 앞으로의 있을 전투 전에 이번 회차의 마지막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와왕!
주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혜영이랑 같이 산책을 다녀온 주주의 새하얀 털 위에는 차가운 눈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주상혁이 주주의 털 위의 눈을 털어 주며 말했다.
“오늘은 도라지냐?”
주주는 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심심하면 한 번씩 영초를 구해 왔다.
물론 자신이 먹을 걸 스스로 구해 오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끔씩은 이십 년 삼 이상의 산삼도 구해 오기도 했다.
주상혁이 어지간한 칡보다 더 큰 도라지를 보고 말했다.
“주주는 좋겠네?”
와왕!
주주가 꼬리를 신나게 흔들어 댄다. 그리고…….
딸랑딸랑.
검은색 강아지를 품에 안은 여성이 들어왔다.
삼 년이란 시간에 이제는 누가 봐도 어엿한 성인이 된 강혜영이였다.
가뜩이나 예뻤던 강혜영은 젖살이 빠지며 연예인 저리 가라 할 만큼 예뻐져 있었다.
“다녀왔냐?”
주상혁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건네는 말에 강혜영이 머리 위의 눈을 털면서 답했다.
“식사는 하셨어요?”
“그냥 고구마 대충 까먹었다.”
“치…… 좀 기다리면 덧나요?”
주상혁이 익숙한 일상 대하듯 옅게 웃었다.
“널 기다려서 뭐 하게 어차피 시꺼먼 독이나 쑬 텐데.”
“그래도 사람이 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주상혁이 바깥에서 들어온 차가운 공기에 이불을 싸맸다.
곧이어 강혜영이 주상혁의 옆에 눕더니 이불을 당겨 쏙 들어왔다.
“아 따뜻하다…….”
“저기 이불 더 있잖아.”
“저건 차갑잖아요.”
이불 안에서 살짝 닿는 강혜영의 발끝이 뜨뜻미지근해질 무렵 강혜영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오늘도 탕약 안 달이셨죠?”
“그렇지.”
“눈 때문은…… 아니죠?”
“그렇지.”
강혜영도 눈치가 없지는 않은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터였다.
이곳 생활의 끝.
길었던 강원도 생활의 끝이 다가왔다는 것쯤 그녀도 모를 리 없었다.
“강태웅에게 갈 거예요?”
“그래야겠지?”
주상혁이 천장을 바라보며 답하고 잠시 뒤였다.
강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안 가면 안 돼요?”
예상 밖의 말에 주상혁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뭐라고?”
“안 가면 안 되냐고요.”
강혜영의 얼굴이 보였다. 거짓말이라기에는 우수에 찬 눈이 진심을 전해 주고 있었다.
강혜영의 눈을 바라보던 주상혁이 다시 원상태로 누웠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천장이 보였다.
“안 돼.”
“왜요?”
주상혁이 언젠가를 떠올리는 눈으로 쓰게 웃었다.
―믿을게요, 의원님.
병실에서 달빛을 맞으며 웃던 강혜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약속했거든.”
“누구랑요?”
“너랑.”
아빠를 고쳐 주겠다고 약속했다.
의원으로서의 자부심, 명예, 그딴 것이 아니었다. 강혜영은 의원님이라고 말했지만, 주상혁은 사람 대 사람으로 약속했다.
지금 이 녀석은 분명히 그 녀석이지만 동시에 다른 녀석이었다. 녀석의 투정 때문에 약속을 외면할 수 없었다.
강혜영은 별말이 없었다.
“…….”
주상혁도 이기적인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대로 모든 걸 잊고 살아 가는 것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결과는 같았다.
‘돌아간다, 돌아가자…… 돌아가는 거야…….’
많은 것을 과거에 두고 왔다.
바로 잡아야 할 것이 있었다.
주상혁이 있어야 할 곳은 청초길드의 삼 층 끝방이었지 이런 강원도 누가 사는지 관심도 없는 촌구석이 아니었다.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 강혜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자신이 무슨 약속을 했냐며 묻지도 않았다.
적적한 적막이 한참 계속됐다. 이불 속으로 같이 들어왔던 주주랑 깜깜이의 꼼지락꼼지락하던 움직임이 조금 전부터 없었다. 잠든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강혜영의 입이 열렸다.
“있잖아요. 저는 추운 날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야야기를 나누는 게 좋아요. 약간 느껴지는 체온이 혼자가 아닌 걸 알려 줘서 안심되거든요.”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주상혁이 픽 웃었다.
“갑자기?”
강혜영의 말은 계속됐다.
“여름날에는요…… 이 앞 냇가에서 같이 물장구치던 게 생각나요. 에어컨이 없어서 더웠는데 그럴 때마다 매년 너무 시원했어요.”
“…….”
“가끔씩 읍내에 외출해서 먹었던 짜장면이 생각나요.”
“…….”
“진짜 맛있었는데.”
“…….”
“또…… 또…… 주주랑 산책……할 때…….”
말을 하던 강혜영의 목소리가 잠겨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누가 대신 갈지 내기……하던 게…… 생각나요……. 그럴 때……마다 제가 매일 이겼는데.”
“뭐래, 내가 매일 이겼잖아.”
훌쩍…… 훌쩍…….
시선이 천장을 향하고 있음에도 들려오는 소리가 강혜영의 얼굴 상태를 대신 알려 줬다.
보지도 않았는데 눈물범벅인 얼굴이 그려졌다.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돼요?”
“안 돼. 말했잖아.”
“이대로 몇 년만 더 살면 되잖아요.”
“…….”
주상혁은 딱히 입을 열지 않았다.
굳은 결의가 지금도 이렇게 흔들리는데 몇 년이 더 지난 후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강혜영의 울음이 끝끝내 터졌다.
“완……전 부러워요. 그 약속했다는 본 적…… 없는 내가…….”
주상혁은 그냥 말없이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나자.
깜깜한 밤이 되었다.
울다가 지쳐 잠이든 강혜영을 확인한 주상혁이 이불에서 나와 이불을 곱게 덮어 줬다.
회관을 나서기 전에 주상혁이 신발을 신고 돌아섰다.
“부럽긴 뭐가 부럽냐? 어차피 걔라고 뭐 다를 거 같아? 독 만들어라, 채집해 와라, 잔소리나 들으면서 고생만 할 텐데.”
주상혁이 문을 열면서 중얼거렸다.
“그냥 꿈이었다고 생각해.”
그렇게 회관 앞의 새하얀 눈길 위에 발걸음이 생겨났다.
* * *
야밤에 강태웅을 찾아가 그대로 전사한 주상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열세 번째 7월 31일.
혹시나 해서 주상혁이 시계를 확인했다.
마침내 시계 안의 숫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야말로 마지막 찬스.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 있었다.
앞선 경험으로 누적된 수많은 정보.
이전 회차에 삼 년간 철저히 준비한 것들.
실패하고 싶어도 실패하기 힘들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자리에서 일어나 공원으로 향한 주상혁은 강혜영에게 클린트 카드를 넘겼다.
강혜영을 돌려보낸 주상혁은 그길로 버스를 탔다.
날이 밝고 점심 무렵.
주상혁이 설악산 입구에 도착했다.
“그럼 준비물을 챙기러 가 볼까?”
등산로를 따라 한 시간쯤 등반하던 주상혁이 멈춰섰다.
등산로를 이탈해 나뭇가지를 헤치며 주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던 주상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쯤이었는데 분명히…….”
와왕!
때마침 주주의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상혁이 주주에게로 다가가 주주의 앞발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찾았다. 팔십 년 삼.”
당연한 말이지만 탕약 하나만을 위해 도피 생활을 한 건 아니다.
탕약을 완성하고 강태섭을 치료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변하는 게 없다는 것쯤 알고 있다.
즉, 주상혁은 3년간 다른 것도 준비했다.
바로 3년간 질 좋은 산삼을 판매하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채집한 장소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구만…….”
『팔십 년 삼.』
[마나 +30]당연한 말이지만, 오십 년 삼 때는 마나가 오른다는 정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팔십 년 삼은 달라도 뭔가 달랐다.
그냥 먹기만 해도 마나 +30.
하지만 당연히 주상혁은 그대로 먹을 생각이 없었다.
조제술과 어우러지면 또 던전 한의학과 어우러지면 지금이라면 그 효과가 훨씬 커질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있겠어?”
정보를 제공했던 사람들은 이번 회차에 산삼을 채집할 일은 없다.
그래도 별 탈은 생기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산삼을 캘 운명이었다는 것조차 모를 테니니까.
주주의 도움으로 손쉽게 산삼을 찾아 하산한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다음은 그 마을인가?”
주상혁이 3년간 머물렀던 마을.
그 인근의 산들은 산세가 험해서 문제였지, 그 덕에 주주가 산삼을 비롯해 영초들을 자주 캐 왔다.
주주의 분신들까지 이용해 레벨 업에 도움이 될 만한 건 싹 다 챙긴 주상혁이 다음 목적지를 정했다.
“그럼 다음은…….”
지리산.
그곳에는 무려 육십 년 삼 한 뿌리에 오십 년 삼이 한 뿌리가 추가로 있었다.
“아 지친다, 지쳐…….”
와와왕…….
장소가 전국 단위로 흩어져 있다 보니 채집하는 데에만 삼일이 꼬박 걸려서 마지막 산삼을 채집한 주상혁이 집으로 귀가했다.
주상혁이 짐을 대충 내려놓고 샤워를 준비할 때였다.
띠링.
강혜영에게 클린트 카드를 넘겨 줄 때 생겼던 퀘스트가 실패했단 알림이 울렸다.
주상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나도 서둘러야겠네.”
* * *
주상혁은 예정대로 계곡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탕약보다는 침술 쪽에 처음부터 집중했다.
『완벽한 중급 정화의 턍약.』
이쪽은 삼 년간의 철저한 준비로 이미 완성이 되어 있었다.
산짐승들을 찾아서 침술 노가다를 시작하던 주상혁은 본격적으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자 금세 휩쓸고 다니며 중급 침술을 완성했다.
『Lv.63 주상혁.』
도핑 없이 63레벨.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결과였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지금 먹고 있는 오십 년 삼 초콜릿과 강원도 산지에서 캔 영초들로 만든 보충제를 제외하더라도 다른 게 존재했다.
『기운가득 산삼 양갱 (폴라나).』
「뛰어난 영력을 지닌 팔십 년 삼을 통으로 갈아 넣은 양갱이다. 환생 의원의 뛰어난 조제술과 한데 어우러져 엄청난 효력을 자랑한다. 쓴맛을 꾹 참고 먹으면 뛰어난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마나 +250]하나가 아니었다.
[마나 +100]육십 년 삼 버전도 있었고.
[마나 +50]오십 년 삼 버전도 있었다.
주상혁이 양갱을 들고 와구와구 씹어 먹기 시작했고 레벨이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Lv.77 주상혁.』
계곡의 생활을 마치고 보름쯤.
『Lv.79 주상혁.』
주상혁의 레벨은 한 번 더 올라가 있었다.
양갱으로 만들어 단번에 섭취했던 산삼들과는 달리 영초들로 만든 보충제 덕이었다.
Q. 의원으로서의 약속 (완료).
「처방전에 따라 탕약을 제조했지만, 어째서인지 강태섭은 깨어나지 않았다. 완벽한 약을 만들어 강태섭을 일어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당신. 환자의 생명을 걸고 한 약속이니만큼 의원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달성 조건: 강태섭의 수면 상태를 정화.
달성 보상: 환생 의원 전용 상점, 명성+300
실패 시 페널티: 모든 능력치 20% 소실
도로변을 걷던 주상혁이 픽 웃었다.
“잘 됐나 보네…….”
몇 주 전 계곡을 벗어난 주상혁은 오늘 아침 강혜영에게 탕약을 쥐여 주고 헤어졌다.
퀘스트가 완료된 걸 보니 강태섭은 무사히 치료된 것 같았다.
혹시나 완벽한 탕약으로도 치료가 안 되면 어쩌지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지만, 믿었던 대로 처리가 됐다.
‘그보다 두 달 만인가?’
주상혁이 걸음을 멈춰 섰다.
거대한 저택이 보였다.
수백 평의 정원이 딸린 저택은 강태웅의 저택이었다.
얼굴을 가린 수상한 복장으로 주상혁이 저택을 바라보고 있자, 정문을 지키던 각성자들이 다가왔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주상혁이 익숙한 대사에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야기 좋지. 근데 그전에 너 뺨에 밥풀 붙었다.”
각성자가 살짝 미간을 찡그리더니 자신의 뺨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니 거기 말고.”
주상혁이 답답하다는 듯한 말투와 함께 각성자의 뺨 위에 손을 올렸다.
각성자가 뺨에 홍조를 그렸다.
“고맙군.”
“고마울 거 없어.”
싱긋 웃은 주상혁의 손이 전력을 다해 남자의 뺨을 밀었다.
콰드드득.
요상한 소리를 내며 목이 돌아갔다.
털푸덕.
각성자가 짚단 쓰러지듯 허물어지자 정문을 지키던 각성자들이 요란을 떨었다.
“정문에 침입자 발생. 수준을 알 수 없다. 증원 바란다.”
주상혁이 천천히 걸어갔다.
‘어디지……?’
각성자들의 마법이 주상혁에게 날아들었다.
화염구가 날아오기도 했고 걸음을 멈춰 세우려는 듯 바짓단까지 얼리는 냉기가 발목을 덮치기도 했다.
주상혁이 날아오는 마법과 병기를 슬로우모션 대하듯 피할 건 피하고 쳐 낼 건 쳐 냈다.
주상혁이 얼어붙은 다리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자 남아 있던 얼음이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나갔다.
마치 수십 개의 마법과 암기들이 빗발치는 그곳을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오는 주상혁을 보고 각성자들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피어났다.
물론 주상혁은 이 와중에도 한결같이 눈을 굴리고 있었다.
‘어디지……?’
이쯤 되면 항상 모습을 드러내던 공격이 있었다.
주상혁이 걸음을 멈추고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주변의 각성자들까지 덮쳐 버릴 듯한 기세로 발밑에 피어나는 붉은빛이 보인 이유였다.
퍼어어엉.
언젠가 마법에 불타 죽었던 기억.
솟구치는 화염 기둥을 간발의 차이로 피한 주상혁이 정면을 바라봤다.
“마법 계열 각성자가 그렇게 무방비 해도 돼?”
『Lv.74 스즈키.』
주상혁이 눈앞 남자의 머리 위를 살폈다.
닉스의 멤버 중 하나였다.
“…….”
스즈키라는 남자는 주상혁의 말에 답하지는 않았다.
주상혁이 저택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각성자들도 하나둘 몰려와 에워싸는걸 지켜봤다.
숫자가 족히 수십은 되어 보였어도 레벨이 보이는 주상혁은 여유로웠다.
그나마 조심해야 할 만한 건 스즈키라는 녀석뿐이었다.
주상혁이 각성자들의 머리 위를 쓱 살피다가 돌연 흠칫 놀라며 몸을 틀었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측면에서 왜소한 체구의 구리빛 피부의 남성이 나타났다.
“와…… 아깝게 됐네?”
『Lv.76 쿠머스.』
한 손에 들려 있는 나이프를 확인한 주상혁이 씩 웃었다.
이 녀석 역시 닉스의 일원이었다.
‘다른 멤버는 없나?’
주상혁이 알고 있는 닉스의 멤버는 총 열두 명.
강태웅과 어느 정도 교류하는 만큼 더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주상혁이 조금 더 기다려 봤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명이란 건데…….”
생각한것보다는 방지가 허술하다 싶었다.
전력파악을 마친 주상혁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주상혁이 가장먼저 한일은 여러 개의 침을 스즈키에게 던지는 것이었다.
각성자들의 몸이 붕 뜨더니 스즈키라는 남자의 앞에 장벽을 쌓았다.
대신 맞은 각성자들이 독 때문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화염 속성 말고도 바람 속성을 하나 더 지닌 스즈키가 거만하게 웃었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듯한 눈치였다.
주상혁이 스즈키를 바라보다가 후면에서 서성이는 암살 계열 각성자 쿠머스를 경계했다.
“귀찮네.”
주상혁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주주, 처리해.”
주상혁의 말과 함께 푸른 안개를 일으키며 해태 한 마리가 나타났다.
저택을 집어삼킬 듯한 강력한 전류가 일대를 덮친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 * *
김진성은 자신의 능력을 맹세의 서약이라고 부르고 있다.
마치 기사가 제후에게 복종을 맹세하듯.
김진성의 편이 되겠다고 답하면 어떠한 명령이든 내릴 수 있었다.
기억, 심리, 감정을 시작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까지 명령이 가능하다.
김진성의 능력은 그야말로 만능이었다.
철천지원수끼리 감정을 지우라고 말하면 절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었고 수천수만을 살해한 살인귀도 명령을 내리면 불살의 성인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능력이었다.
김진성은 이 능력으로 닉스를 만들었다.
자신에게 악감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대답을 끌어내는 것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능력이 발동되고 나면 이미 늦었다.
자신이 죽거든 따라 죽으라는 명령을 내린다거나, 자신을 무조건 적으로부터 지키라는 암시를 내린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에게 가족 이상의 감정을 가지도록 지시해서 따르도록 만들면 간단했다.
얼마 전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강태웅을 포섭했던 김진성은 휴일에도 협회의 협회장실에 있었다.
침쟁이의 정보가 들어온다면 바로 낚아채기 위함이었다.
김진성이 강태웅의 아이디로 전산망을 들여다볼 때였다.
김진성의 휴대폰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리더 지금 TV 볼 수 있어? 그럼…….
미간에 약간 주름을 만들더니 김진성이 협회장실의 TV를 켰다.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박나연 기자, 지금 임시협회장이자 협회장 후보 중 한 사람이었던 강태웅 씨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만 사실입니까?
―네, 지금 저는 조금 전 수수께끼의 폭발이 일어난 임시회장 강태웅 씨의 저택에 나와 있습니다. 지금 이곳의 모습은 처참합니다. 폭발의 규모가 상당했기 때문인지 저택도 그 흔적을 제대로 찾아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리포터의 뒤로는 바쁘게 움직이는 구급대원들이 잔해를 뒤지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김진성이 조금 더 딱딱해진 얼굴로 들고 있던 휴대폰을 들었다.
“쿠머스와 스즈키는?”
―연락이 안 되는 거 봐서는…….
딱히 죽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아 떨어졌다.
스즈키와 쿠머스 역시 S급.
“일단 통화를 끊지, 다른 멤버들에게는 아지트에서 대기하라고 전해.”
통화를 끊은 김진성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강태웅을 누군가 죽였다.
강태섭 측의 보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생각하던 김진성이 곧이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스즈키와 쿠머스를 죽였다는 게 말이 안 됐다.
강태섭 측의 요주 인물이라고 해 봐야 기껏 전동욱이라는 남자와 강태섭뿐.
둘이서 덤빈다고 해도 스즈키 하나 처리할 수 있을까 말까인데 심지어 강태섭은 얼마 전 멜레나와 로이터를 시켜서 처리한 상태였다.
‘그럼 도대체 누가…….’
S급 둘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했다.
김진성의 생각이 깊어졌을 때였다.
TV의 화면이 바뀌면서 앵커의 얼굴로 화면이 가득 찼다.
―예, 속보입니다. 조금 전 강태웅 씨의 저택에서 일어난 폭발. 우연히 당시 현장의 상황을 담은 영상이 저희 방송국에 입수됐습니다.
화면이 다시 전환되며 영상이 재생됐다.
제법 높은 높이로 비행을 하던 드론으로 찍은 영상인지 화질은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상황은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저택으로 침입한 남자 하나가 각성자들과 대치하는 모습.
그중에는 쿠머스와 스즈키도 있었다.
남자와 두 사람의 신경전이 오간 다음이었다.
번쩍.
정원에서 시작된 푸른색 거대한 안개가 곧이어 전류를 일으키며 폭발했다.
도저히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 * *
강태웅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담은 영상은 삽시간에 모든 커뮤니티로 퍼져 나갔다.
영상에 관련된 뉴스도 연달아 쏟아졌다.
―5M는 거뜬할 것 같은 해태의 주인은 과연 누구?
―해태의 등급, 전문가들은 SS급으로 추정.
―강태웅 사망, 공교롭게도 회장 선거 보름 전.
⌙와, SS급 소환수면 주인도 SS급이란 소리 아님?
⌙전 세계에 다섯 명밖에 없는 SS급이 우리나라에도 나타난 거임?
⌙그건 아닐 수도 있음. 환수종 같은 경우엔 실제로 주인 등급이 좀 낮아도 그것보다 더 강하니까. 대표적인 예가 혜성길드의 대표가 그렇지.
⌙어찌 됐든 S급 이상인 건 확실하다는 거잖아. 대체 누구지? 우리나라 각성자면 좋겠다.
⌙ㅇㅈ
⌙이 와중에 강태웅 죽음에 대해서 애석하게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는 거 실환가……?
⌙ㄹㅇㅋㅋ
⌙솔직히 개쌤통임, 5년 전에 임시회장 되고서 반대파 지방 발령으로 조진 것만 봐도 인성 답 나온 거임.
화려한 등장 덕분일까?
주상혁이 다수의 사람을 학살했다는 내용은 아직까지 크게 다루지 않는 분위기였다.
물론 일각에서는 주상혁을 살인자라며 매도하는 물결도 있었지만, 대세는 과연 그가 누군가에 대한 것에 아직까지 초점이 향하고 있었다.
물론 주상혁은 못 알아 봐도 주주를 알아보는 사람도 몇 있었다. 첫 번째로 강혜영이었다.
“어? 주주다.”
“주주?”
병실에서 사과를 깎던 강혜영이 아차 싶었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병실의 TV를 같이 보던 전동욱이 말했다. 전동욱도 저 해태를 경매장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때보다 족히 네다섯 배는 거대해진 해태를 보고는 전동욱이 물었다.
“혜영 양, 저 남자가 우리를 돕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강혜영이 움찔했다.
“네……? 그걸 왜 저한테…….”
“감추실 거 없습니다. 어제 같이 왔던 그 남자의 소환수인 건 사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무슨 말씀이신지…….”
“뭔가 들은 게 있다면 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로 모르는데요……?”
강혜영이 슬쩍 시선을 피하자 강태섭이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부장님 혜영이도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지요.”
“추궁하려던 건 딱히 아니었습니다.”
전동욱이 강혜영에게 살짝 고개 숙였다.
“죄송하군요, 혜영 양.”
“아, 아니요, 괜찮아요.”
강태섭이 사과를 깎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그나저나 혜영이, 과일 깎는 게 많이 익숙해졌구나. 연습했니?”
안도한 강혜영이 사과를 깎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그러네?”
* * *
해태를 알아본 건 강혜영과 전동욱뿐만이 아니었다.
해태를 보자마자 눈이 뒤집혀서 아지트를 뛰쳐나온 매튜도 그랬다.
“드디어 찾았군.”
좁은 골목 한복판에 서 있던 주상혁이 피식 웃었다.
“찾은 게 아니라 찾게 해 준 거야.”
실제로 이 장소는 강태웅의 저택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주상혁도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를 핸드폰으로 체크해서 안다.
주주의 모습을 봤다면 닉스 쪽에서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근데 혼자 왔냐?”
솔직히 이건 좀 의외였다.
닉스의 전력을 각개격파할 생각이긴 했지만, 한 명은 너무 적었다.
“건방 떨 수 있는 것도 지금 뿐일 거다.”
매튜가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제법 영리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복수심에 사로잡힌 모습 매튜가 주상혁에게 달려들었다.
주상혁이 일순간에 거리를 좁히는 매튜를 피해 물러나며 침을 뿌렸다.
“근데 넌 학습 능력이 있냐, 없냐?”
매튜가 흠칫 놀라 몸을 피했지만, 다리에 침이 하나 적중했다.
푹.
비교적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길목이라는 게 한몫했다.
침을 맞은 매튜가 인상을 팍 쓰며 뽑아 던졌다.
“그때 생각나네. 그때처럼 또 고슴도치로 만들어 줘야 하나?”
“건방 떨지 말라고!”
매튜가 흥분한 황소처럼 다시 달려들었다.
주상혁이 또 침을 뽑아 던지려다가 말고는 매튜의 공격을 요리조리 한 끗 차이로 흘렸다.
매튜의 레벨은 높았지만, 지금 주상혁의 상대는 아니었다.
“건방 떨더니 이젠 또 도망만 다닐 셈이냐?!”
“그때 꽁무니 빠지게 도망친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공격을 연달아 날리는 매튜의 눈이 더욱 매서워졌다.
계속해서 물러나던 주상혁이 매튜의 왼손을 슬쩍 흘리고는 크게 물러났다.
바닥에서 날카로운 빙하가 연달아 솟아나더니 주상혁의 코앞에서 멈췄다.
“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있었었지?”
어떻게 된 건지 녀석은 마법 계열의 능력도 사용하긴 했었다.
주상혁이 침을 하나 장전해 아무것도 없는 측면에 뿌렸다.
그대로 빗나가나 싶었던 침이 때마침 나타난 매튜의 어깨에 적중했다.
“크윽…….”
“슬슬 끝내자고 재미없으니까.”
주상혁이 침을 장전해 연달아서 뿌렸다.
뿌리는 족족 매튜의 몸 이곳저곳에 그대로 박혔다.
“왜? 슬슬 독 기운 좀 돌았냐?”
주상혁이 이번에 장착한 독은 마비 독이었다.
가뜩이나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침과 상성이 가장 좋은 독이었다.
“죽여 버리겠어!”
그날 경매장에서의 트라우마를 자극받은 매튜의 큰 괴성이 골목이 떠나가라 울렸다.
성큼성큼 다가간 주상혁이 매튜의 미간에 침을 박아 넣었다.
푸욱.
“미안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일그러진 얼굴 그대로 굳어 버림 매튜가 곧이어 스르륵 미끄러져 넘어졌다.
“나도 마지막 기회거든.”
* * *
다음 날 아침도 헤드라인 뉴스는 강태웅 저택의 폭발과 해태에 관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 없는 뉴스 사이에 한 남자의 죽음 이야기도 끼어 있었다.
183cm 남짓의 백인 남성.
매튜의 소식이었다.
아지트에서 뉴스로 매튜의 죽음을 접한 김진성의 두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렇군…… 침쟁이었나?’
사실 어젯밤.
매튜가 뛰쳐나갔다는 것을 듣고 설마설마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저택을 습격한 건 자신이 찾던 침쟁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추가로 몇 명 보낼 걸 그랬어…….’
매튜의 능력은 제법 쓸 만했다.
상대방의 기술을 훔칠 수 있었기 때문.
“로이터.”
“불렀나?”
옆에서 팔짱을 끼고 같이 뉴스를 보고 있던 근육질의 흑인 남성이 말했다.
“깨어났던 이후 매튜의 수준은 어느 정도나 됐지?”
“제법 강했지, 멤버 중에서는 삼 위쯤? 그래도 나나 안드레보다는 약했다고 장담하지.”
로이터의 말에 불만이 있다는 듯한 십 대 소년이 말했다.
“매튜가 나보다 강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말인데?”
“에반, 조용히 해.”
“사실상 전투 계열 중에서는 여덟 명 중 세 번째라…….”
김진성이 표정을 굳었다.
‘꽤 강하군…….’
매튜를 쓰러트렸다면 로이터와 안드레 수준으로 놔야 맞을 터였다.
‘더군다나 소환수까지 고려한다면…….’
안드레와 로이터보다도 강하다고 봐야 했다.
정원만 수백 평에 가까운 저택을 고작 전격 몇 번에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소환수를 고려한다면 전혀 아깝지 않은 평가였다.
‘녀석의 목적이 뭐지?’
김진성은 처음에는 저택을 습격한 이유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게 침쟁이와 강태웅의 접점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
“개인적인 원한인가?”
김진성은 차마 닉스와 연관이 있다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주상혁과의 악연은 경매장에서 잠깐 있었던 것뿐이다. 닉스에게 칼을 겨누고 했다기에는 행동이 너무 뜬금없었다.
‘일이 꼬이는군…….’
본래라면 협회를 장악하기 위해 필수적인 강태웅이 죽었다.
이건 조금 곤란했다.
김진성이 말했다.
“샤오링, 침쟁이를 본다면 알아볼 수 있나?”
“어느 정도는.”
김진성이 로이터와 안드레라는 백인 근육질 남성을 바라봤다.
“로이터, 안드레 전력손실 때문에라도 녀석을 닉스로 합류시킨다. 샤오링과 함께 저택 근처를 확인해 봐.”
상대의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아는 로이터가 말했다.
“저항이 거세면?”
“어쩔 수 없지, 죽이는 수밖에.”
“그렇게 하지.”
김진성의 말에 세 사람이 나갔다.
김진성이 남은 멤버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강태섭의 행방을 찾는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빨리 강태섭을 찾아서 죽기 전에 해독하고 암시를 걸어야겠어.”
* * *
다음 날 주상혁은 아직도 그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수사를 위해 각성자들이 수시로 오갔지만, 수준이 고만고만해서 주상혁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일대에는 대피령이 내려졌다.
새로운 S급의 등장이긴 했지만, 주상혁이 행한 행동은 명백한 학살.
지금 한쪽에서는 S급들을 모아 수색해 잡아들여야 한다는 여론도 슬슬 생겨나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 곳의 피난령은 당연했다.
‘몇 명 더 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만 운이 좋은데?’
『Lv.82 안드레.』
『Lv.83 로이터.』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이곳을 떠나려고 했던 주상혁이 눈을 빛냈다.
남은 9명의 멤버 중 가장 레벨이 높은 둘이 왔다.
심지어 제법 떨어진 옥상에는 전이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는 샤오링도 보였다.
“그래서? 따라가기 싫다면 어떻게 할 건데?”
“힘으로 데려간다. 저항이 거세면 죽여도 좋다고 하더군.”
좁은 길목에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 양쪽을 순서대로 흘겼다. 두 명의 근육질 남성이 순서대로 보였다.
‘전이 아티팩트부터 처리해 볼까?’
주상혁이 소리 냈다.
“주주!”
샤오링의 발밑에서 주주가 나타났다.
파지지지직.
『Lv.57 청운해태.』
작은 강아지의 상태였지만 샤오링 정도는 당분간 묶어줄 수 있을 터였다.
“자 그럼…….”
샤오링의 뒤편에서 갑자기 번뜩이는 스파크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이 시선을 뺏겼을 때였다.
주상혁이 로이터 쪽으로 일순간에 거리를 지우고 나타났다.
주상혁을 향해 로이터가 뒤늦게나마 주먹을 휘둘렀다.
주상혁의 주먹과 로이터의 주먹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콰아아앙.
주먹의 충돌 여파로 충격파가 일어났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바닥이 쩍쩍 갈라지더니 결국엔 지면이 한단계 움푹 내려앉았다.
로이터가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자 주상혁이 씩 웃었다.
“그래도 생각한 것보다는 가볍잖아.”
당황한 로이터의 얼굴이 그려지고 동시에 주상혁이 돌연 훌쩍 뛰어 물러났다.
안드레의 모습이 나타나며 방금전까지 주상혁이 서있던 곳을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쩌저저저적…….
가뜩이나 사방으로 일어났던 균열이 깊게 번졌다. 양옆에 서있던 건물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로이터가 안드레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주상혁이 그 모습을 보고 재차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자 로이터가 외각으로 빠졌고 홀로 남은 안드레가 전력을 다해 지면을 강하게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건물이 무너지며 생긴 모래 먼지가 일순간에 주변을 아득히 뒤덮었다.
주상혁이 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흠칫.
모래 먼지에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주상혁이 왼손을 치켜들어 가드 했다.
콰드득.
주상혁의 팔이 요상한 소리를 내더니 곧이어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처럼 수십 미터를 날아갔다.
건물 서너 개를 그대로 관통한 주상혁이 팔을 확인했다.
‘이거 살짝 금 갔으려나……?’
막았음에도 팔한 쪽이 제법 아프다.
“하…….”
주상혁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날아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주상혁의 멀쩡한 한쪽 손이 바쁘게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침술이 중급에 오르면서 한층 더 커진 불꽃이 주상혁의 몸 이곳저곳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모래 먼지 앞에 주상혁이 도착하자니 곧이어 모래 먼지가 걷혔다.
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방을 준비한 건가?’
두 남자의 주먹에는 조금 전까지 없던 강력한 마나가 응어리져 있었다.
주상혁의 모습을 본 이유인지 두 사람 역시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아깝네, 처음부터 전력을 다 했어야지.”
『Lv.91 주상혁.』
풀 도핑도 모자라서 점혈까지 사용하자 주상혁의 레벨은 어느덧 91, 88에 머물고 있던 조금 전보다 훨씬 올라 있었다.
주상혁을 바라보던 로이터의 눈에서 주상혁이 갑자기 사라졌다.
“뒤다, 로이터.”
로이터가 황급히 뒤돌았다.
“이미 늦었어.”
뒤돌던 로이터의 허리에 주상혁의 주먹이 박혔다.
주상혁이 조금 전 관통하며 생긴 작은 건물의 구멍 위로 4배는 더 큰 구멍이 도장 찍듯 일순간에 생겨났다.
콰앙.
“로이터!”
로이터가 눈을 까집고 병 걸린 들소처럼 옆으로 넘어갔다.
주상혁의 왼쪽에서 주먹을 장전한 안드레가 나타났다.
“너무 뻔하잖아.”안드레의 몸 이곳저곳에 언제 던진지 모를 침이 잔뜩 박혔다.
안드레가 고통을 참아내고 이내 주먹을 휘둘렀다.
안드레의 주먹보다 주상혁의 주먹이 먼저 안드레의 복부를 가격했다.
강력한 돌풍이 안드레의 등 뒤로 불어 닥쳤다.
로이터를 따라 안드레도 그렇게 허물어졌다.
* * *
조금 떨어진 건물 옥상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샤오링의 눈이 흔들렸다.
‘어서 도망가야…….’
하지만 발목을 물고 있는 작은 강아지가 어찌나 억센지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 힘들었다.
안드레마저 쓰러지고 잠시 후였다.
옥상 문을 열고 주상혁이 나타났다.
주상혁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대뜸 샤오링이 갇힌 초록빛의 전류 기둥 속으로 손을 쓱 들이밀었다.
주상혁의 몸으로도 전류가 흐르며 주상혁의 머리가 일자로 쭈뼛쭈뼛 섰다.
“오, 찾았다.”
샤오링의 몸을 뒤지던 주상혁이 무언갈 쓱 꺼냈다.
『첨단 공간이동 장치.』
「천재 과학자가 만든 아티팩트다. 충전형으로써 내부에 강력한 마나를 충전해 강제로 공간을 전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전이 아티팩트는 15cm 정도의 기다란 원형의 막대같이 생겼다.
이곳저곳 신비한 마나의 빛이 번쩍이고 있는 게 꼭 기관실에서 부품 하나 빼 온 듯했다.
주상혁이 주주를 그대로 회수하려다가 멈칫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이거 두 개잖아.”
주상혁이 다시 몸을 뒤져 하나 더 챙기고는 그제야 주주를 물렸다.
“잘했어, 우리 주주. 있다가 맛있는 거 많이 먹자.”
와왕!
주주가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주상혁이 그 모습을 보다가 흡족하게 웃고는 고개를 들었다.
전류에서 벗어난 샤오링이 주춤 물러나다가 쓰러졌다.
감전의 여파로 마비 증상이 남아 있는 듯했다.
주상혁이 주저 없이 침을 미간에 던졌다. 샤오링이 그대로 철퍼덕 쓰러졌다.
“잘 가라. 이건 내가 잘 쓸게.”
주상혁이 내친김에 아티팩트를 사용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왼쪽 팔에 금이 갔던 걸 이참에 치료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주상혁이 자리에 주저앉고는 내친김에 다친 팔을 내밀었다.
주주가 팔을 열심히 핥기 시작하자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서 팔이 멀쩡해졌다.
쥐락펴락한 움직여 보는 건 물론 이렇게 저렇게 휘둘러 보던 주상혁이 점검을 마치고 주주를 안아 들었다.
주상혁이 본격적으로 아티팩트를 살피기 시작했다.
전이 아티팩트를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던 주상혁이 버튼 하나를 발견하고 눌렀다.
마력장을 전개합니다.
주상혁의 주변으로 검은색 막이 하나 생겨나더니 들고 있는 아티팩트의 머리 부분에 작은 판넬 같은 게 하나 올라와 작은 모니터를 만들었다.
1번부터 5번까지 번호가 떠올랐다.
“등록된 위치는 두 군데인가?”
1번은 아지트라고 적혀 있었고 2번은 전주라고 적혀 있었다.
2번도 대충 짐작 가는 곳이 있었지만 주상혁이 주저 없이 일 번을 눌렀다.
전이를 시작합니다.
주상혁이 검은색 막이 짙어진 것을 확인하고 혹시 있을 전투에 대비했을 때였다.
파스슥.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지면을 타고 흩어지는 검은색 스파크가 전송이 완료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펍 분위기의 로비 모습이 보였다.
자동 충전 모드에 돌입합니다.
알림이 들려오며 판넬이 안으로 들어갔다.
전이 아티팩트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근데 아무도 없나?”
혹시 있을 전투에 잔뜩 대비하고 있던 주상혁이 맥이 빠진 얼굴로 지하 아지트를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방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확인한 주상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보니까…… 진짜 아지트가 맞기는 한 거 같은데…….’
불과 얼마 전까지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이 있었다.
“설마 벌써……?”
자신을 데려오라고 로이터 일행을 보냈다.
그것 때문에 아지트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더니 김진성은 벌써 강태섭을 찾아 나선 듯했다.
주상혁이 하는 수 없이 인벤토리에서 두 번째 아티팩트를 꺼냈다.
이번엔 2번에 등록된 전주를 누르고 주상혁이 아지트에서 사라졌다.
* * *
주상혁이 멜레나의 병원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2번에 전주라고 등록된 곳은 주상혁의 짐작대로 멜레나의 초라한 병원이었다.
와왕.
“배고프다고?”
어깨 위에 모습을 드러낸 주주를 주상혁이 안아 들고 협회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밥 안 먹은 지 좀 되긴 했네.’
생각해 보니 어제 점심부터 별로 먹은 게 없었다.
일단 인벤토리에서 폴라나를 꺼내 주주의 입에 물려 주고는 주상혁이 전주협회로 향했다.
협회 앞 편의점에서 빵이랑 우유를 대충 사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2,500원입니다. 담아 드릴까요?”
“아니요.”
카드를 돌려받고 편의점을 나온 주상혁이 팥빵을 우물우물 먹으면서 생각했다.
‘얼마나 걸리려나……?’
일단 강태섭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닉스의 입장에서는 이틀쯤은 걸리지 않겠느냐 하는 게 주상혁의 생각이었다.
닉스가 강태섭을 노리고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 꼼짝없이 잠복이란 말이었다.
함께 산 우유를 개봉해 입가심을 하다가 주상혁이 그대로 뿜었다.
“켁켁…….”
사레들린 기침을 하던 주상혁이 찡그린 얼굴로 입 주변을 닦아 내고 시선을 치켜들었다.
『Lv.67 김진성.』
‘저 녀석들이 어떻게 벌써?’
김진성을 포함한 남은 닉스의 전원이 건너편 도로를 걷다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저 방향은 병원인데…….’
강태섭이 입원한 병원.
이동하는 방향을 가늠하면 이미 강태섭의 위치를 파악한 거나 다름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주상혁이 녀석들을 단박에 따라잡기 위해 달렸다.
다행히 주상혁에게는 그들을 따라잡을 방법이 있었다.
6차선 도로를 일순간에 무단횡단한 주상혁이 협회 로비를 관통했다.
‘그러게 착하게들 살았어야지.’
로비 뒷문을 통과해 바깥으로 나온 주상혁이 입가에 만연했던 웃음기를 지우고 멈춰섰다.
‘엥……?’
또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 눈앞에 보였다.
『Lv.57 청운해태-클론.』
병원 대문을 지키고 있는 흙빛의 해태와 여섯 명의 닉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주상혁이 손에 걸었던 침을 다시 집어넣었다.
‘뭐야 의외로 세잖아?’
주주의 클론 아니랄까 봐 레벨보다 수배는 뛰어난 활약이었다.
76레벨에 달하는 각성자가 쓰러지고 멜레나도 쓰러졌다.
전투 멤버가 얼마 남지 않은 김진성이 패배를 직감했는지 멤버들과 함께 달아나기 시작했다. 검은색 해태가 그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주상혁이 김진성과 다른 닉스 멤버가 도망가는 방향을 보고 중얼거렸다.
“저 방향은…….”
씨익.
대충 어디로 가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 * *
김진성은 로이터 일행을 주상혁에게 보내고 곧바로 강태섭을 찾아 나섰다.
2인 1조로 의심이 가는 곳을 무작정 둘러보는 작전.
효율이 무척이나 떨어지는 방법이었지만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불과 반나절 만에 강태섭의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그런데…….
“해태……?”
병원의 입구에 닿았을 때 김진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흙빛의 해태.
누구의 작품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잘됐군.’
해태의 등장에 미리 겁먹고 대부분 피신한 듯했다.
거침없이 힘으로 강행 돌파해도 뒤탈이 없다는 말이었다.
김진성이 에반에게 말했다.
“강행 돌파한다.”
“오케이.”
남은 인원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에반이 선뜻 나섰다.
에반이 해태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미안하게 됐다. 똥개.”
에반과 해태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 때였다.
스멀스멀.
돌연 해태의 입에서 뿌연 보랏빛 안개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에반이 경계하듯 걸음을 멈췄다.
김진성의 미간이 다시 한 번 찌푸려졌다.
‘저건 뭐지?’
본래라면 확실한 정보가 없는 이상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다 김진성이 자신을 바라보는 에반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이 저 해태보다 강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에반이 해태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흩어져 있던 안개가 기다렸다는 듯 수십 갈래의 돌개바람을 연상시키는 형체를 가지고 에반을 덮쳤다.
순간 당황한 기색이 보이긴 했지만, 에반이 요리조리 여유롭게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기회를 틈타 연달아 공격을 피하던 에반이 기회를 포착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진성의 생각대로 에반이 저 해태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인듯했다.
‘끝났다.’
일순간에 거리를 지운 에반이 해태의 코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에반의 주먹이 어김없이 해태의 얼굴을 가격했다.
1.5톤 트럭 크기 정도 되어 보이던 해태가 옆으로 넘어가다 못해 주르륵 미끄러져 병원 입구를 박살 내고 모습을 감췄다.
해태가 사라진 건물 안으로 에반이 건들대며 들어설 때였다.
우뚝.
걸음을 멈춘 에반이 돌연 피를 게워 냈다.
비틀비틀 일어나는 해태와 털썩 무릎 꿇고 바닥을 짚는 에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어느새 눈코입 할 것 없이 모든 구멍에서 검붉은 피를 흘리는 에반의 모습이 말해 줬다.
김진성이 말했다.
“멜라나, 에반을 구한다 서둘러.”
“칫…… 알았어”
독에 대한 전문가인 멜레나가 에반을 구하기 위해 사방에 깔린 안개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절반쯤 빠른 속도로 지나던 멜레나가 에반이 그렇듯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쿨럭.”
마찬가지로 피를 토했다. 멜레나가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해독제 두어 개를 입에 때려 부었다.
검게 변해가던 멜레나의 피부가 점차 본래 색으로 돌아왔다.
아니, 돌아오는 듯했다.
“이, 이럴 리가……?!”
멜레나가 연거푸 해독제를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결국. 손에 쥐고 있던 포션을 떨어트리고 멜레나가 그 자리에 쓰러져 목을 움켜쥐었다.
패배.
믿을 수 없었지만, 저 해태에게 자신들이 발목을 잡힌 것이었다.
해태가 어느새 멀쩡히 다시 건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에반의 일격이 여전히 효과는 있는듯했지만…….
“도망간다!”
주저 없이 도망가는 김진성의 뒤로 멜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김진성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독은 상당히 껄끄럽다.
전문가 흉내를 내던 멜레나도 쓸모없이 드러누웠으니 상대해서 좋을게 없었다.
‘함께 죽을 수는 없지.’
김진성이 한참을 내달릴 때였다. “리, 리더!”
김진성이 뒤에서 들려오는 동료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1.5톤 트럭만 한 흙빛의 해태에게 짓눌린 보조계열 각성자가 보였다.
“제, 젠장!”
김진성이 다시 한 번 멤버를 버리고는 내달렸다.
그새 다시 쫓아오는 해태를 확인하고 김진성이 화를 냈다.
“뭐 해! 막으라고! 다 죽을 셈이야?”
김진성이 자신의 능력까지 사용해 일행에게 해태를 막는 방패로 사용하고는 도망쳤다.
* * *
숨이 가빠 온다.
어찌나 전력으로 뛰었는지 이런 기분을 맛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한참을 벽을 짚고 호흡을 고르던 김진성이 독기에 찬 눈을 떴다.
“그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다.”
기회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있고 핵심 멤버인 로이터와 안드레가 아직 살아 있었다.
‘침쟁이…….’
심지어 녀석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노예로 만든다면 지금 입은 피해는 손해도 아니었다.
“뭐지……?”
멜레나에게 연구실로 떼어 줬던 임시 아지트에 도착한 김진성이 멈칫했다.
어째선지 잠금장치가 부수어져 있었다.
김진성이 의아함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씩 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지?’
단언컨대 처음 보는 남자였다.
“이제 오냐?”
주상혁을 유심히 살피다가 옆에 벗어놓은 선글라스랑 마스크를 발견했는지 김진성이 화들짝 놀랐다.
“네놈이 어떻게 여길…….”
“아, 몇 번 와 본 적 있거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멜레나 그년이 배신했던 건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랬다면 자신의 능력이 멜레나의 심장을 겨냥했을 터였다.
주상혁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서 한걸음 내디뎠다.
김진성이 말했다.
“자, 잠깐 대화를 하지.”
“대화?”
주상혁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대화를 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너 상대에게 제약을 걸 수 있지?”
김진성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드러났다.
“내 능력이 쓸 만하다는 걸 안다면 더 대화가 필요하지 않겠나?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김진성의 말이 뚝 끊겼다.
그의 미간에 생긴 작은 구멍 때문이었다.
미간에서 흐르는 피에 당황하던 김진성의 모습도 잠시 피를 뿜으며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대화는 다음에 하자.”
주상혁이 선글라스를 걸치며 말했다.
“앞으로 한 열한 번쯤 더 죽고도 살아 돌아오면 말이야.”
* * *
김진성을 죽이고 병원을 나서자 비로소 실감이 난다.
끝났다.
지긋지긋했던 닉스와의 싸움이 드디어 끝난 것이었다.
이제 모든 게 주상혁이 원하는 대로 돌아올 것이다.
강혜영은 아빠랑 행복하게 살 것이고 쌍둥이 녀석들은 주상혁의 도움을 받아 학폭에서 벗어날 터였다.
“길드도 승급할 테고…….”
이미 S급쯤은 찜 쪄 먹을 수준이 된 주상혁이다.
생각해 보니 꼭 길드 승급을 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어차피 늦가을쯤 되면 간이 심사를 해야 한다.
“뭐, 달라질 것도 없는데 미리 하지, 뭐.”
주상혁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집이다.”
와왕!
정말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주상혁이 침대로 달려가려는 주주를 안아 들었다.
“안 돼, 씻고 자야지.”
주주랑 같이 피로를 씻어 낸 주상혁이 침대에 누웠다.
눕자마자 배 위에 자리를 잡고 주주는 잠자리에 들었다.
주상혁도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의 감촉이 느껴지자 졸음이 밀려드는 느낌이었다.
서서히 감기던 주상혁의 눈이 잠시 후 중얼거림과 동시에 천천히 뜨였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네?”
Q. 의원으로서의 약속 (완료).
「처방전에 따라 탕약을 제조했지만, 어째서인지 강태섭은 깨어나지 않았다. 완벽한 약을 만들어 강태섭을 일어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당신. 환자의 생명을 걸고 한 약속이니만큼 의원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달성 조건: 강태섭의 수면 상태를 정화.
달성보상: 환생 의원 전용 상점 오픈, 명성 +300
실패 시 페널티: 모든 능력치 20% 소실.
강태섭을 치료하고 완료된 퀘스트의 보상을 수령하지 않은 상태였다.
보상을 수령하시겠습니까? Yes/No.
달성 보상이 지급됩니다.
주상혁이 알림창을 지우고 인벤토리를 켰다.
인벤토리를 보자마자 주상혁은 하단에 새롭게 생겨난 의미 모를 숫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잼……?”
보아하니 보상인 전용 상점에 사용하는 화폐가 분명했다.
숫자 옆에 주황 불이 들어온 새끼손톱만 한 버튼을 주상혁이 누르자 직사각형 형태의 창이 떠올랐다.
‘이게 전용 상점이란 말이지?’
각종 약초부터 장비에 레시피까지 다양한 상품을 들여다보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멈칫했다.
‘던전 의약학?’
주상혁이 획득한 상권 말고도 획득하지 못한 중권과 하권도 있었다.
‘1만잼이라…….’
주상혁이 지금 가지고 있는 잼은 대략 4,500쯤.
아쉽지만 구매하기에는 힘이 드는 가격인 걸 깨닫고 주상혁이 상점을 닫았을 때였다.
Q……. [연간 퀘스트].
주상혁이 상점을 들여다보는 사이 떠 있던 퀘스트를 확인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배에서 데굴데굴 굴러 주주가 깨어났다.
“이런 개 같은…….”
꾸우웅?
“너 말고.”
퀘스트를 읽은 주상혁이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한동안 쉬기 힘들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