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27
Book 6 Chapter 1
엄준식과 대화를 마친 주상혁이 연구소를 나와 중얼거렸다.
“주주.”
왕!
주주가 주상혁의 어깨 위에 소환됐다.
주상혁이 말했다.
“방금 그 사람한테 꼬리 하나.”
왕!
주주가 분신을 소환했다.
소환된 분신이 연구소 근처 나무 위로 올라가 연구소를 감시했다.
“뭐, 이러면 혹시라도 별탈은 없겠지?”
전이 아티팩트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물건이니만큼 엄준식이 언제 딴마음을 품어도 이상한 건 아니다.
분신으로 혹시나 하는 일에 대비할 생각이었다.
“혹여 수상한 낌새가 있으면 바로 알려 주고.”
왕!
분신의 대답을 듣고 주상혁이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올해 2월 한국에 S급 던전이 발생한 이후로 전 세계적으로 변화가 한 가지 생겼다.
바로 S급 던전의 출몰이 잦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1년에 많아도 다섯 번 남짓이던 발생 건수가 4개월 사이에만 벌써 스무 번을 넘겼다.
덕분에 전 세계의 정세는 불안정한 편이었다.
SS급 각성자가 존재하는 국가라면 모르겠지만, 아닌 국가에서는 힘 있는 국가에 손을 벌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방구석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주상혁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긴 했다.
주상혁이 그나마 관심을 가질 만한 건 본래라면 큰 사건으로 벌어질 예정인 S급 던전 브레이크였지 일반 S급 던전이 아니었다.
‘뭐, 까놓고 말해서 이럴 때 나한테 불똥 튀지 말라고 장민주 씨를 키워 놓은 거 아니겠어?’
여러모로 참 든든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상혁이 생각을 마치고 정면을 바라봤다.
“지금은 이게 먼저란 말이지.”
마침내 조합한 중급 레시피.
하급 때와 마찬가지로 초급 세 장을 모아서 조합한 레시피였다.
【마나 증폭의 탕약 중급 레시피.】
「긴 시간 마나를 한계까지 증폭시켜 주는 탕약의 레시피다. 던전에서 수집할 수 있는 다양한 약초들로 제작할 수 있다. 하급을 넘어 중급의 단계에 이른 만큼 지속 시간이 늘어났고 그 효과도 월등해졌다.」
멜팅: 0/8.
폴라나: 0/5.
겔트: 0/1.
정제수: 0/1.
마나 상승 +20%
오러 상승 +5%
※효과는 중첩이 불가능하며 지속시간은 6시간이다.
중급 폴라나 포션.
“오러 +5%…… 전엔 없지 않았나?”
주상혁은 사실 중급 폴라나 포션의 레시피를 조합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강원도에서 3년간 살 적에 이미 한 번 조합해 본 적이 있었다.
‘근데 그때는 분명히 오러 +5% 옵션이 없었을 텐데…….’
아무래도 던전 한의학 때문에 중급 스텟이 개방되면서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을 뿐이었다.
“뭐, 포션이 더 좋아진 건 좋은 일이니까.”
주상혁이 오러에 대한 실험을 위해 즉시 제작을 실시했다.
마나 상승 +15%
오러 상승 +3%
마나 상승 +14%
오러 상승 +3%
마나 상승 +10%
오러 상승 +3%
…….
대략 열 개쯤 연달아 제작하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오러는 3% 고정인가?”
마나에 대한 건 이미 강원도에서 실험해 본 주상혁이었기 때문인지 실험을 종료한 주상혁이 약탕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원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급 레시피에 이어 중급 레시피 이 녀석도 즉시 제작으로는 적자 보기 십상이라는 걸.
* * *
주상혁이 중급 폴라나 포션에 몰두하고 일주일.
옥상에서 탕약을 달이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이게 감을 되찾는 것도 꽤나 힘들긴 하네…….”
『완벽한 마나 증폭의 탕약(중급).』
「짧은 시간 마나를 한계까지 증폭시켜 주는 탕약이다. 폴라나 특유의 마나와 켈트를 적절히 조합하는 데 성공했다.」
마나 상승 +24%
오러 상승 +7%
※ 효과는 중첩이 불가능하며 6시간 지속된다.
강원도에서 한번 익혔던 제조법이었지만, 손에 놓은 지 제법 됐다고 되살리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솔직히 운이 좋았지.’
켈트라는 재료가 늘어난 만큼 배는 더 복잡했던 작업을 일주일 안에 되살렸다는 건 운도 따랐다고 볼 수 있었다.
와왕!
주주가 꼬리를 흔들었다.
“그래, 우리 주주 덕이지.”
그 좋아하는 뿌루루도 거르면서 주상혁이 탕약을 달일 때면 항상 옆에서 도와줬다.
물론 도와준다는 게 장작이나 나뭇가지를 날라 준다거나 목마르다고 하면 방에 가서 물을 가져다주는 수준이었지만, 그걸로도 제법 도움이 됐다.
주상혁이 주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겠지?”
오늘 저녁 강태섭과 약속이 있다.
슬슬 씻고 준비해야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상혁이 씻고 나름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답지 않게 남색 계열의 정장 차림을 하고 있자니 불편한 것도 불편한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어색했다.
인터넷의 힘을 빌려 넥타이를 매고 밀어 올렸을 때였다.
“아, 네, 협회장님.”
때마침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준비는 다 됐나?
“아, 예……. 지금 막 끝났죠.
―그거 다행이군. 지금 막 정문에 차량이 도착했다니까. 나가면 될 거네.
주상혁이 전화가 끊기자 방을 나섰다.
주상혁이 정문에 도착하자 차가 한 대 보였다.
차에서 내려 기다리던 협회의 각성자가 주상혁을 뒷좌석으로 안내했다.
주상혁이 차에 타고 각성자가 운전자석에 오르자 차가 출발했다.
차는 세 시간쯤 도로를 내달리다 운동장 크기의 정원 딸린 저택 중앙에서 멈춰섰다.
“도착했습니다.”
주상혁이 차에서 내렸을 때였다.
“오빠!”
먀먕!
저택 문을 열고 느린 걸음으로 뛰어오는 강혜영이 보였다. 주상혁이 강혜영보다 먼저 도착한 깜깜이를 안아 들었다.
강혜영이 주상혁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왜, 어디 가게?”
“보여 줄 게 있어요.”
주상혁이 강혜영을 따라 저택 뒤편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큼지막한 비닐하우스를 보고 주상혁이 물었다.
“보여 줄 게 이거?”
“그때 오빠가 그랬잖아요. 혹시 식물 같은 거 길러 본 적 있냐고.”
확실히 저번에 집에 놀러 왔을 때 물어본 적이 있긴 하다.
‘독초 기르기’라는 스킬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순히 공유받은 스킬 독초 기르기라는 걸 파악하기 위함이었는데 강혜영은 다르게 받아들였나 보다.
“그래서?”
“저 이번에 길러 보려고요.”
“뭐를?”
“약초를요.”
주상혁이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주상혁이 꼭 할 필요는 없었다.
강혜영이 해 주면 고마운 일.
“그래, 잘해 봐.”
* * *
강혜영의 비닐하우스를 구경한 주상혁이 저택으로 들어가 2층 복도 끝에 닿았다.
“여기야?”
“네.”
주상혁이 문고리를 잡아 열기 전에 강혜영에게 물었다.
“혹시 너도 들어가냐?
“왜요?
“가능하면 밖에서 기다리라고.”
뭐, 들어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모르는데 강혜영을 데리고 들어가서 좋을 건 없을 거 같았다.
“제가 들으면 안 돼요?“
”들어서 좋을 것도 없잖아.“
“알았어요.”
강혜영이 고맙게도 문고리를 놓고 물러났다. 주상혁이 말했다.
“대신 주주 줄게.”
주상혁이 품에 안고 있던 깜깜이를 먼저 넘겨 주고 주주까지 추가로 불러내 안겨 주고는 홀로 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주상혁이 조심스레 문을 닫자니 코끝으로 도서관에서나 날법한 잉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주상혁이 쓱 서재를 살폈다.
개인 서재치고는 책장 빽빽이 제법 많은 수의 책이 꽂혀 있었다.
주상혁이 방을 쓱 훑을 때쯤 강태섭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침 잘 왔네, 설탕은 몇 개나 넣으면 좋겠나?”
한쪽 모퉁이에 서서 차를 준비하던 강태섭을 확인한 주상혁이 말했다.
“2개면 됩니다.”
“알았네, 거기 잠깐 앉아서 기다리게.”
강태섭이 가리킨 소파에 앉아서 잠시 기다리자니 잠시 후 양손에 커피를 든 강태섭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주상혁이 찻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 들이켰을 때였다.
미리 소파 구석에 준비해뒀던 서류봉투를 강태섭이 집어 들더니 테이블 위로 건넸다.
“이게 뭡니까?”
“S급 던전을 클리어하고 얻은 마석과 재료들을 처분한 결산서네.”
주상혁이 봉투 안에서 클립으로 고정된 서류를 꺼내서 적당히 확인하다가 제일 뒷장을 확인했다.
‘3,000억이라…….’
생각 이상으로 금액이 크다. 하지만 딱히 기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주상혁이 돈이 궁한 시기도 아니었고 딱히 쓸 곳이 없어서 난처한 수준이었기 때문.
“확인했으면 거기 빈칸 여백에 작게 계좌 하나 남겨 주게.”
주상혁이 계좌를 적으며 말했다.
“저, 근데 그 선물이라는 게 이거는…….”
“그럴 리가 있나? 이건 그냥 업무적인 거고…… 내가 준비한 건 별건 아니네만…….”
강태섭이 품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 넘겼다.
주상혁이 받아 카드를 앞뒤로 확인했다. 검은색 바탕의 카드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이게 뭔데요?”
“협회 아이디 카드지,”
“이게요?”
주상혁이 의외라는 듯 카드를 다시 확인하고는 말했다.
“근데 제가 아는 생김새랑은 좀 다른데…….”
“그야 당연하지, 특수 제작한 것이니까.”
“네?”
아이디 카드.
협회의 소속이면 모두 지급되는 카드이며 혜택이 제법 쓸 만한 걸로 유명하다.
모든 던전을 관리하는 협회이니만큼 던전에서 발생하는 물건 대부분이 협회로 유통되고 덕분에 비교적 싼 값에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약초도 포함된다.
‘근데 듣기로는 직급에 따라 혜택이 다르다던데…….’
주상혁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등급이……?”
“등급은 나와 동일하게 설정해 뒀네.”
“네?”
협회장과 동급.
“그럼 할인은 어느 정도나……?”
“반값 정도일 테지.”
“반값…….”
모르긴 몰라도 그 정도면 거의 마진을 남기지 않는 가격일 게 분명했다.
허구한 날 약초를 사는 주상혁이 상당히 쓸모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뜩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는지 입을 열었다.
“근데 어떻게 아셨죠?”
주상혁에게 협회 아이디 카드가 있으면 요긴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자네에게 선물할 게 무엇이 좋겠냐고 물으니 약초를 많이 필요로 한다고 답하더군.”
“혜영이가요?”
강태섭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혜영이와는 자주 연락하고 지내나?”
“네?”
주상혁이 커피를 들이켜는 강태섭을 바라봤다.
찻잔에 가려져 얼굴이 반쯤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표정을 읽기 힘들었다.
‘혹시 견제하는 건가……?’
딸자식 가진 부모 입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싶었는지 주상혁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예, 뭐, 그…… 우연히 펜션에서 정이 붙었나 보네요.”
찻잔을 내려놓은 강태섭이 옅은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혜영이는 말이네…….”
딸바보 강태섭의 ‘투머치토커’가 시작됐다.
* * *
전날 귀에 딱지가 지도록 딸 자랑은 들은 주상혁은 저녁 식사를 한 뒤에야 집에 귀가할 수 있었다.
평소 때처럼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한 주상혁이 뉴스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두 번째 S급 던전 브레이크.
일본에서 들려온 속보였다.
“츠츳……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주상혁이 몇 달 전 강태섭을 통해 분명히 사실을 알려 줬을 텐데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이윽고 일이 터진 듯했다.
화면으로 보는 상황은 제법 심각해 보였다.
위성으로 찍은 동영상에는 새하얀 실타레로 온통 뒤덮인 모습과 피난하지 못하고 그대로 도로 위에 고치가 된 사람들이 보였다.
‘뭐, 그래도 어찌저찌 막겠지만.’
던전브레이크가 일어난 곳은 수도 도쿄.
타격이야 심각하겠지만, 일본에는 SS급 각성자가 있다.
초기대응에 실패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머지않아 수습이 가능할 터였다.
주상혁은 이번 일로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과거의 정보를 알고 있어도 만능은 아니라고.
이렇게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있다고.
과거 장혜성의 죽음도 거스를 수 없는 필연에 의한 것일 테고 던전 브레이크에 도쿄가 붕괴되는 것도 그쪽일 터였다.
TV를 보던 주상혁이 생각을 마치고 끙끙대는 주주를 바라봤다.
주주는 침대 위에서 끙끙대고 있었다.
“근데 아직 멀었어?”
『Lv.70 청운해태.』
주주의 기본 레벨이 70이 되면서 뭔가 보여 줄 게 있다는 주주였는데 벌써 10분째 앓는 소리만 내고 변화가 없었다.
‘레벨이 낮아서 그런가?’
하긴 분신을 처음 배웠을 때에도 만드는 데 상당히 버거워했던 걸 보면…….
‘지금은 뚝딱뚝딱 잘 만드는 분신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주상혁이 조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다려 볼까 하는 생각을 먹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파스스스스스.
가스 새는 소리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상혁이 소리가 들린 주주 쪽을 바라보자 푸른 안개가 피어났다.
‘이건 그때…….’
본적이 있었다.
주주와 처음만난 던전에서 이와 비슷한 안개를 본적이 있었다.
방안을 가득 채우는 안개 속에서 두리번거리던 주상혁이 멈칫하더니 침대에서 일어나 TV 앞으로 걸어갔다.
TV에서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게 왜 이러지?’
조금 전까지 잘 돌아가던 TV가 일시 정지된 것처럼 멈춰 있었다.
정확히는 아주 천천히 미세한 변화가 있는 걸 보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주상혁이 주주를 바라봤다.
“그래, 이런 능력이었구나.”
확실했다.
몇 시간을 보냈지만 불과 5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던 그 경험.
그때는 단순히 우연이나 추측정도로나 평가했지만 확실했다.
주주의 이 안개는 시간을 느리게하는 효과가 있었다.
“어……?”
주상혁이 능력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였다.
방 안에 퍼져 있던 안개가 돌연 주주의 몸속으로 사라지더니 TV가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다시 정상적으로 흐리기 시작한 것이다.
주상혁이 주주의 머리 위를 보고 흠칫 놀랐다.
레벨이 1 내려가 69가 되어있었다.
『Lv. 69 청운해태.』
“조금 전에 그거 때문이겠지?”
왕.
“그래, 그래. 고생했어.”
지친 기색의 주주를 주상혁이 쓰다듬어 주며 중얼거렸다.
“자주 쓸 건 아니겠네.”
* * *
일본은 생각한 것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도쿄에 살던 S급 각성자 세 명이 첫날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실종된 것도 문제였고 전국적으로 몬스터들이 확산하는 속도가 너무 빠른 것도 문제였다.
아직까지 한 번도 출현한 적 없는 나방형 몬스터들의 진격을 자력으로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했다.
물론 무상으로 지원을 요청한 건 아니었다. 일본 2년 예산에 이르는 약 2,000조 가까운 금액을 토벌 후에 지원국과 길드에 차등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음…….’
미국의 대통령 조지는 고민했다.
냉혹한 현대사회에서 제아무리 오랜 우방이라고 한들 손실 계산은 기본이었다.
괜히 아까운 인력을 일본에 투입했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당장에 2,000조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위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설령 각성자가 가겠다고 해도 위험하다고 생각이 들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출국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조지는 망설이고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올리비아의 건으로 속앓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나섰다가 덫에 걸린 게 컸어.’
미국이란 국가도 어떻게 보면 거대한 기업이자 브랜드다.
국제 사회에서 그 브랜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손실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
성공만 시킨다면 그런 손실쯤 가볍게 씻고 반등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국장.”
오랜 침묵을 깨고 대통령 조지가 입을 열자 헌터 국장 제이스가 말했다.
“네.”
“지금의 상황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가 나선다면 가능성은 있겠나?”
“로버트를 보낸다면 충분히…….”
조지가 진중한 분위기의 눈으로 흘겼다.
“신중하게 말하는 게 좋아. 자네나 나나 피차 막다른 길 아닌가?”
대통령도, 헌터 국장 제이스도 둘 다 내년에 재선이 있다.
비단 2,000조라는 금전적 이득을 제외하고 봐도 저번 사건으로 싸늘하게 식은 여론을 돌이켜 세울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재선의 가능성은커녕 미국이란 나라를 나락으로 빠트렸다며 거센 비난을 받고 정치 인생이 끝날수도 있었다
제이스가 조금전 느껴졌던 자신감을 지우고 고심 끝에 다시 말했다.
“스타크를 추천하겠습니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이름이 튀어나왔다.
모두 미국이 자랑하는 SS급 각성자였지만, 분명히 내부적으로 수준 차이는 존재한다.
스타크는 미국의 SS급 각성자들 중에서도 마이클을 제외한다면 전 세계에 내놓아도 최고 수준의 존재였다.
SS급 각성자가 된 한 번도 파병의 이유로는 해외로 출국한 적 없던 스타크를 헌터 국장이 추천한 것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조금 생각하던 조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을 좀 잡아 주게. 내가 직접 만나 보지.”
* * *
미국의 3대 길드 중 하나 아이언의 길드마스터 스타크의 참전 소식이 다음 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주상혁도 관련 뉴스를 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거, 얼굴 하나 기가 막히긴 하네.”
TV 화면 속에서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는 금발의 백인 각성자.
저자가 바로 스타크였다. 영화배우 저리 가라 할 훤칠한 미모의 남성을 본 주상혁이 말했다.
‘근데 이상하네, 내가 알던 미래에서는…….’
로버트.
분명히 그런 이름의 각성자가 일본에 지원을 갔을 텐데…….
“미래가 바뀌기 시작한 건가?”
주상혁이 이것저것 나서기 시작하면서 벌써 미래가 바뀌기 시작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뭐…… 별일이야 없겠지.”
적어도 이번에 한에서는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타크는 그만큼 거물이었고 계산기를 두들기던 수많은 국가들이 앞다퉈 참가하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연이어 나오는 것만 봐도 이전보다 공격대의 규모가 더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 일은 없어 보였기 때문.
주상혁이 하루 종일 시시각각 변화하는 뉴스를 듣다가 늦은밤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때마침 강태섭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예. 협회장님.”
―혹시 지금 바쁜가?
주상혁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아뇨, 무슨 일 있습니까?”
―무슨 일은 아니고 의견을 좀 듣고 싶어서 말이네.
주상혁이 짚이는 게 있었는지 물었다.
“혹시 이번에 일본 관련한 건가요?”
―뭐…… 그렇지.
주상혁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어디 보자 한국의 대표 각성자라면 장민주 씨인데…’
주상혁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민주 성격상 자처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장민주 씨가 가고 싶답니까? 그렇게 돈이나 명예욕이 있어 보이는 여자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조금 달라. 오히려 내가 부탁하려는 입장이니까.
“협회장님이 부탁하신다고요……?”
조금 생각하던 주상혁이 눈치 빠르게 답했다.
“뭔가 있는 거군요? 장민주 씨를 보내야 할 이유가.”
―…….
마치 전화가 끊긴 것처럼 침묵이 길어졌다. 주상혁이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확인했다.
‘전화는 안 끊어졌는데…….’
주상혁이 다시 귀에 휴대폰을 가져다 댈 때쯤.
강태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난처한 이유가 있지.
“그게 뭔데요?”
―15년 전에 S급 던전이 국내에 발생했던 걸 알고 있나?
주상혁이 고민 없이 답했다.
“네.”
국내에 S급 던전이 발생한 건 역사상 총 2번, 15년 전과 불과 몇 달 전 이렇게 두 번이었다.
제아무리 바깥일에 관심이 없던 주상혁이라도 모를 리 없는 사건인 만큼 큰 사건이었다.
심지어 최근 사건은 주상혁이 당사자가 되기도 했었다.
―잘 들어 주게 당시에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해 줄 테니.
강태섭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15년 전.
이야기는 국내 첫 번째 S급 던전이 발생한 시점의 이야기였다.
발생한 S급 던전은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다고 한다.
굳이 S급 던전의 난이도를 다섯 단계로 한 번 더 나누자면 2단계 수준의 던전.
하지만 아무리 그런 S급 던전이라고 한들 문제가 있었다.
지금이야 조금 나아져서 열 명에 가까운 S급 각성자가 존재하지만, 그때엔 S급 각성자 6명이 다였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던전 브레이크와는 다르게 한 번 들어가면 보스를 잡기 전에는 던전에서 나오지 못한다.
이 점 때문에 무작정 국내의 모든 전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S급을 모조리 투입할 수 없었던 사정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결과…….
당시 각성자 협회는 일본에게 손을 빌렸고 성공적으로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본이 다음에 도움을 요청할 때 들어 달라는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거지?’
비교적 합리적인 거래였다.
‘한 번 도움을 줘, 대신 나도 다음에 한 번 도움 줄게’라는 거래였으니까.
“그렇군요. 그래서 장민주 씨를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라는 것이죠?”
―그렇지 하지만 지금의 일본의 상태가 위험한 곳이라면 나 역시 장민주 씨를 보낼 마음은 없네, 국가의 빚을 개인이 부담하게 해서는 안 될 테니까.
계약서로 양국이 보관하고 있는 만큼 당연히 계약을 위반했을 시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강태섭은 주상혁의 대답 여하에 여차하면 위약금을 지불할 각오도하고 있는듯했다.
“음…….”
주상혁이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자신에게 강태섭이 자문을 구한 이유도 이해가 간다.
여러번 신기에 가까운 정보들을 물어왔으니 의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쉽게 답하기가 그렇네…….’
로버트에서 스타크라는 인물로 대상이 바뀐 만큼 주상혁의 정보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근데 그래도 스타크는 최강의 각성자라며?’
솔직히 던전이 바뀌어 봐야 거기서 거기 주상혁이 말했다.
“그…… 보내도 될 거 같은데요? 제 생각에는.”
주상혁이 아는 미래에서는 일본의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열흘쯤 지나면 거의 끝이 난다. 심지어 바뀐 미래도 오히려 공격대에 좋은 영향을 불러올 일이면 일이었지 부정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었다.
‘아마, 별 탈 없을 거야.’
장민주의 출국 소식이 들려온 건 이틀 뒤였다.
* * *
일정에 맞춰 일본으로 출국한 장민주는 오사카에 도착했다.
이미 도쿄 쪽을 중심으로 일본 국토의 1/10 정도 브레이크에 잠식당한 상태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장민주가 내리자 일본의 협회에서 나온 차량이 대기 중이었다.
장민주가 트렁크에 집을 넣고 차량에 오르자 운전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편하게 질문하셔도 됩니다.”
유창한 한국어에 장민주가 편하게 질문했다.
“엄청 심각하다더니 생각한 것보다는 조용하네요?”
장민주의 시선이 차도 쪽을 향했다.
피난민이라도 북적일 줄 알았던 것과는 달리 평화로웠다.
운전하던 각성자가 말했다.
“이틀 전부터 많은 국가에서 참전하면서 확산을 멈춰 세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금은 덕분에 방어선 안쪽은 안전하죠.”
S급들이 대거 입국하면서 방어선을 빠르게 형성한듯했다. 이제 방어선 바깥쪽으로 파고들어서 보스를 해치울 공격대만 구성하면 빠르게 진압될 터였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편하게 말씀하시죠.”
“사진을 보아하니 커다란 고치가 있던데 그건 뭐죠?”
인터넷에 위성사진이 여럿 공개됐다.
그중에는 도쿄타워 크기만큼이나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는 거대한 고치의 사진도 있었다.
“아마 보스가 아닐지, 예상 중입니다.”
“보스라…….”
“이번 공격대의 목표도 그 고치를 처리하는 데 있습니다.”
2시간쯤 차량이 달렸을까?
호텔 앞에서 차량이 멈췄다. 건너편에는 임시 본부가 있었다.
“짐을 풀고 오후 1시까지 협회 전략실로 오시면 됩니다.”
“그럴게요.”
협회 바로 옆 건물이라 길을 헤맬 일은 없어 보였다.
숙소로 가서 가볍게 짐을 풀고 앉은 장민주가 30분전쯤 미리 방을 나섰다.
장민주가 전략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땐 회의실 안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존재했다.
장민주가 듣기로 공격대의 규모는 총 일곱 명.
장민주는 태극기가 놓인 자신의 자리로 가며 느껴지는 시선을 하나씩 확인했다.
일본의 SS급 각성자 미즈키를 시작으로 영국 독일 프랑스 중국까지.
각성자들은 다같이 각국을 대표하는 간판 각성자들이었다.
장민주가 의자를 빼고 앉아 한 여자를 바라봤다.
영국의 각성자이자 얼마 전 자신과 마찰이 있었던 올리비아의 쌍둥이 동생 아멜리아가 보였다.
‘보면 시비라도 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장민주 자신보다 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미국으로 전향했다고는 해도 자신의 친언니일 텐데 신기했다.
장민주가 아멜리아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을 때였다.
달칵.
방문을 열고 두사람이 들어왔다.
스타크와 일본의 협회장이었다.
스타크가 별이 잔뜩 그려진 성조기의 자리에 가서 앉자 협회장이 말했다.
“자, 그럼 전략 회의 시작하도록 하죠.”
* * *
남자의 말과 함께 전략실의 불이 꺼졌다.
잠시 후 테이블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며 어두운 방을 밝혔다.
사람들의 시선이 빛을 쫓아 모니터로 향하고 다음 순간, 모니터 화면에 사진이 한 장 떠올랐다.
도쿄타워의 사진이었다.
인터넷에 떠다니던 사진과는 조금 다른 사진을 확인한 중국의 SS급 각성자 샤오첸이 말했다.
그의 중국어가 출입할 때 지급 된 이어폰 형식의 번역기를 통해 들려왔다.
“조그만한 고치들이 많이 생겼군.”
협회장이 말했다.
“당연합니다. 인터넷에 떠돌던 사진은 초창기의 사진이고 이건 오늘 오전에 찍힌 영상이니까요.”
“영상?”
“네, 한번 쭉 지켜보시죠. 영상은 조금 전부터 쭉 재생 중이었습니다.”
일본 협회장의 말에 회중의 각성자들이 다시금 모니터 화면을 주시했다.
정지한 듯 보이던 화면에서 변화가 생겼다.
제법 큰 사이즈의 고치가 ‘쩍!’ 하고 갈라지더니 남자 하나가 나왔다
남자를 확인한 미즈키가 반응했다.
“저건…….”
“맞습니다. 사토 씨입니다. 던전 브레이크가 있던 날 실종됐던 S급 각성자죠.”
‘사토’라는 중년 남성은 등 뒤에 한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이마에 한 쌍의 더듬이가 뻗친 것 말고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주변의 나방 떼와 바닥을 기어 다니는 유충들의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배회하는 모습은 그가 아는 사토라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간편할 듯했다.
샤오첸이 말했다.
“재밌군, 녀석들한테 당하면 저렇게 되는 건가?”
“아마도요.”
협회장의 말에 조용히 지켜보던 프랑스의 각성자 게르앙이 말했다.
“근데 이 영상을 보여 준 이유가 뭐지? 단순히 조심하라고 말해 준 것 같지는 않은데.”
“시간이 없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없다라…….”
게르앙이 시선이 모니터의 거대한 고치로 향했다.
“저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장에 S급 각성자만 해도 고작 저 정도 크기의 고치입니다. 만약 마나의 양에 의해 고치의 크기가 정해진다면…….”
조금 전 사토가 뚫고 나온 고치는 거대한 고치의 1/10 크기 수준이었다.
“최소 SS급…….”
“그렇습니다. 아무리 이곳에 SS급에 준하는 각성자가 일곱 명이 존재한다고 한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골치 아파질 수 있겠죠.”
독일의 SS급 각성자 볼프만이 손을 들었다. 술배가 나온 곰상의 각성자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근데 S급 던전의 브레이크라고 안 했나? 그런 것치고는 말이 안 되는데.”
난생 처음보는 몬스터부터 몬스터의 수준까지 S급이라기에는 뭔가 석연찮긴 했다.
“사실 S급 던전이라고 발표가 되긴했지만, 구체적인 차원 에너지를 측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유는?”
볼프만의 물음에 모니터의 화면이 바뀌었다.
“던전 브레이크 당시의 도쿄 상공의 모습입니다.”
샤오첸이 말했다.
“얼마 전 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군.”
“그렇습니다.”
거대한 검은색 게이트.
그 안에서 나방과 그 유충들이 바글바글 쏟아지고 있었다.
볼프만이 말했다.
“즉발성 던전이…… 벌써 두 번째인가…….”
볼프만이 대충 납득한 듯 하자 게르앙이 말했다.
“뭐, 좋아. 시간이 없다는 건 대충 알았고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열흘 안에 승부를 보죠. 예정과는 다르게 3개의 조로 나눌 겁니다.”
* * *
주상혁은 일본 소식을 틈이 날 때마다 찾아서 확인하고 있었다.
신경 꺼도 나무랄 사람 없었지만, 장민주를 보내도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낸 이유로 신경이 쓰인 것이다.
토벌 영상은 장민주 덕택에 국내 관심도도 크기 때문인지 그렇게 접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벌써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쭉 퍼진 링크를 한 번 클릭하는 수준으로 접근이 가능했다.
두어 시간쯤 영상을 시청하던 주상혁이 흥미가 식은 투로 소리 냈다.
“역시, 그럼 그렇지.”
혹시나 하고 토벌 영상을 둘러봤지만, 걱정할 건 없어 보였다.
거대한 나방도, 콘크리트 지면 속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는 유충도 그다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역시 SS급 각성자들이라는 건가?”
장민주는 3개의 조중에 3조 쪽에 속해 있었는데 일본 각성자 미즈키와 독일의 각성자 볼프만이 이쪽에 해당했다.
미즈키가 허리춤의 도를 뽑아 휘두르면 수십 마리의 나방이 토막이나 떨어져 내렸으며 모르만이 마법을 사용하면 수백여 미터 밖까지 녹여 버리는 화염이 모든 것을 태워 버렸다.
물론 이 부분은 사실상 장민주를 떼 놓고 보면 전부 각 나라를 대표하는 SS급 각성자들이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싶었다. 오히려 의외는 장민주였다.
SS급에 해당하는 환수종을 둘이나 소유하고 있는 장민주는 앞선 둘에 비해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달려드는 나방을 백호가 꼬리 낫으로 베어 버리는 것과 동시에 유니콘이 몬스터가 뭉쳐 있는 곳을 향해 질주하면 직선로에 있는 유충들이 일순간에 대량으로 터져 나갔다.
장민주가 두드러질 때면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일본 서버임에도 장민주의 활약을 보기 위해 몰려든 한국인들이 한국어가 채팅창을 뒤덮은 것이었다.
―와…….
―미모 완전 미쳤다…….
―뽕…… 국뽕이 차오른다…….
주상혁이 물밀 듯 올라오는 채팅들을 보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 올리비아 사건에 아직까지도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장민주가 자수하긴 했어도 백호를 주는 대가로 죄를 뒤집어쓴 게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면서 주상혁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건 결정타지.’
올리비아의 미간을 관통한 주된 사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겠지만, 장민주가 이렇게 발군의 활약을 보인 이상 그런 의견 따위 쏙 들어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앞선 SS급 각성자 둘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장민주의 활약을 주상혁이 지켜보다가 중얼거렸다.
“별문제 없는 거 같으니까 슬슬 볼일이나 처리할까?”
책상에 앉아서 시청하던 주상혁이 걱정을 떨치고 시청을 종료하려고 할 때였다.
―어? 저게 뭐임?
―사람처럼 생겼는데 사람은 아니겠지?
―에이…… 더듬이랑 날개가 있는데요?
―근데 저 사람 얼굴 어디서 본거같은데…….
주상혁이 채팅창을 확인하고 마우스를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화면을 바라본 주상혁이 채팅창이 북적인 이유를 파악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채팅창이 말한 게 저건가?’
누런 빛깔의 날개와 더듬이를 이마에 달고 있는 중년 남성이 보였다.
때마침 채팅창에 조금 전 본적 있는듯한 얼굴이라며 호소하던 유저의 채팅이 올라왔다.
―저 사람 사토잖아.
―사토? 일본 S급 각성자요?
―검색해 보니까 진짜네.
채팅을 읽던 주상혁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지금 한창 클로즈업되는 사토라는 남성 때문은 아니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조금 고된 전투를 하는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명백히 저 사토라는 남성 역시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퀘스트……?”
주상혁이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를 읽어 내려갔다.
Q. 새로운 증상의 환자 [돌발].
「환생 의원인 당신은 우연히 조금 특이한 환자를 접했습니다. 비록 바다 넘은 곳에 있는 환자이지만, 질병은 언제나 신에게 공평한 법. 내일은 감염자가 당신의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한생의원이라면 적어도 눈앞에 보이는 질병에 대한 관찰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달성 조건: 같은 증상의 환자를 진맥할 것(0/1).
실패 조건: 제한시간 내에 환자를 진맥하지 못하거나 환자의 사망.
제한시간: 48시간.
실패 페널티: 의술 관련 스킬 등급 하락.
“잠깐? 실패 조건이 환자의 사망?”
퀘스트를 읽은 주상혁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환자의 사망이라면 SS급 각성자들이 사토를 죽이기로 마음먹으면 실패로……
“안 돼!”
주상혁이 고개를 들기 무섭게 백호의 입에 서렸던 마나 포가 발사됐다.
화면을 멀게 만들 만큼 강력한 폭발이 있자, 주상혁이 퀘스트 창을 바라봤다.
“설마 죽었나?”
당연한 말이지만, 의술 관련 스킬의 하락은 몹시 타격이 크다.
가뜩이나 잘 오르지도 않을뿐더러 마음 놓고 숙련도를 쌓을 수 없는 구조이기에 더 그랬다.
십여 초 넘게 퀘스트를 지켜봤지만, 다행히 실패 알람이 울리지는 않자 주상혁이 안심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화면에서 사토라는 남성을 구속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앞으로도 죽일 마음은 없는듯했다.
“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주상혁이 핸드폰을 들었다.
주상혁이 강태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협회장님.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주상혁이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일본에 조금 가고 싶어서요.”
* * *
일본의 협회장 미츠오는 각기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승전 소식 흡족해했다.
본래라면 두 개의 조로 나누어 보름에 걸쳐 처리할 예정이었던 던전 브레이크였지만, 세 개의 조로 나누는 무리수를 뒀다.
자칫 도박일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다행이었다. 몹시 만족스러운 결과가 따른 것이다.
‘무엇보다 사토 씨를 비롯해 실종됐던 세 명의 S급 각성자를 포획한 건 엄청난 성과다.’
미츠오가 유리막 건너편으로 보이는 독방을 바라봤다.
실험대 형식의 테이블에 마나를 저해하는 사슬로 수십 겹 묶인 사토가 보였다.
미츠오가 잠시 사토를 지켜보고 있자니 잠시 후 하얀 가운의 연구원 하나가 차트를 들고 다가왔다.
“어떻습니까?”
“다행히 모든 게 다 정상입니다. 이성과 자아를 유지하고 있지 못할 뿐.”
“아직 인간이라고 봐도 된다는 말입니까?”
연구원이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더듬이와 날개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DNA 확인 결과 아직 인간이라고 연구원은 말하고 있었다.
“그럼 따로 부탁드렸던 등급 검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사토 일행을 포획한 SS급 각성자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S급치고는 상당히 껄끄러웠다고.
이번 등급 검사는 그것 때문에 미츠오가 연구원에게 따로 부탁한 일이었다.
“확인해 보시죠.”
연구원이 대답 대신 차트를 넘겼다.
미츠오가 차트를 살펴 보더니, 깜짝 놀랐다. 항상 차분한 미중년의 인상을 유지하던 미츠오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SS급?”
차트를 재차 확인한 미츠오가 물었다.
“확실한 겁니까?”
“혹시 몰라 세 번이나 재검사한 결과이니 틀림없습니다.”
물론, 마나 항목에 대한 한정이었지만 모든 파라미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마나다.
S급 중에서는 평범한 수준의 마나를 보유하고 있던 사토가 지금은 미즈키와 비견해도 크게 부족하지 않았다.
“사토 씨를 비롯한 다른분들은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원인이야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적어도 나방의 고치에 들어갔다가 나오며 마나의 상승을 동반한 게 분명했다.
진지한 얼굴로 사념에 잠겼던 미츠오가 말했다.
“원래대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유감스럽지만, 확률은 몹시 낮습니다.”
“낮다면 얼마나?”
“1% 언저리 정도 될 겁니다.”
여기서 이성만 그대로 되찾는다면 그야말로 대박이었는데 안타까웠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이로군요.”
“죄송합니다.”
“뭐, 어쩔 수 없죠. 여러분의 잘못도 아니고.”
미츠오가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유리막 너머의 사토를 바라봤다. 얌전히 눈만 끔벅끔벅 감았다가 떴다를 반복하는 사토가 그곳에 있었다.
‘포기하긴 너무 아쉬워…….’
아무리 가능성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예, 그렇습니까’ 하고 미련을 버리기에는 너무 아쉬운 일이었다.
“아르돈, 그자라면 어떻겠습니까?”
미츠오가 조금 인상을 쓰고는 말했다.
“가능할까요?”
“지금 교황청에 손을 빌리시겠다는……?”
아르돈.
로마 교황청의 현 교황의 이름이자 전 세계에서 유일한 SS급 보조 계열 각성자였다.
“답변만 해 주십시오.”
연구원이 조금 숙고하더니 입을 열었다.
“시도해 볼 가치는 있습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금액에 대한 거라면.”
교황 아르돈의 유명세는 아주 대단하다.
그의 신성력 앞에는 맹인도 벙어리도 절름발이도 정상으로 돌아오니 추종 세력도 아주 엄청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바다 건너 일본까지 오게 만드는 데에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겠지…….’
하지만 SS급에 준하는 전력 셋을 추가로 얻는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손실 따위 비할 바 아니었다.
“일단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비밀에 부치겠습니다.”
눈치 있게 답하는 연구원의 말을 듣고 미츠오가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총리의 허가를 받아서 한시바삐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대기해 뒀던 차량으로 미츠오가 향할 때였다. 연구소 바깥에서 줄곧 그를 기다리던 보좌관 한 명이 급히 미츠오에게 따라붙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간략하게 부탁드리죠. 급한 일이 있어서.”
미츠오의 말에 보좌관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주상혁이요……?”
바삐 걷던 미츠오의 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주상혁.
올초 한국의 S급 던전 브레이크가 있을 무렵부터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꽤나 애먹고 있던 남자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일본으로 난데없이 방문하겠단다.
‘이 시국에…… 무슨 용무로…….’
조금 고민하던 사토가 옅게 입꼬리 올렸다.
주상혁의 목적은 모르겠지만, 반가운 소식이었다.
“잘됐군요. 안 그래도 주상혁 그자를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당장 입국 허가를 내릴까요?”
“그렇게 하세요.”
* * *
S급 이상 각성자의 해외 출입국 절차는 제법 복잡하다.
먼저 첫째로 소속 국가의 협회에서 정식으로 타국의 협회에 입국 요청이 이루어져야 하고.
둘째로 허가가 떨어진 다음엔 머무는 기간과 입국의 사유를 분명히 밝혀야 하며.
셋째로 협회에서 제공하는 숙소에서 하루 가까이 대기시간을 가져야만.
그제야 입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일반인에 비해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미 신체 능력 하나만으로도 전략적 병기가 될 수도 있는 S급 각성자.
그들의 능력을 고려해서 혹여나 있을 물적 피해나 인명 피해 등의 불상사를 막기 위한다는 취지였다.
이건 이전에 올리비아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중에 놓쳐 버리긴 했지만.
“들어가시죠.”
장민주와 마찬가지로 공항을 통해 입국한 주상혁은 다음 날 점심쯤 일본의 임시 협회 정문이었다.
본래라면 대기시간을 보낼 숙소로 안내받아야겠지만, 그전에 협회장 미츠오가 면담을 요청해 왔기 때문이었다.
‘뭐, 면담 정도야 어려운 건 아니니까…….’
안내에 따라 면담실로 도착한 주상혁이 마침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남성치고는 가냘픈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주상혁님.”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까지 천천히 걸어와 악수를 건네는 남자를 확인한 주상혁이 습관처럼 머리 위를 흘겼다.
『Lv.77 미츠오.』
“조금 전에 운전수도 그렇고 두 분 다 한국어가 제법 능숙하네요.”
“뭐, 업무상 익혀 뒀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미츠오가 조금 전 앉아 있던 자리로 몸을 반쯤 돌리며 말했다.
“일단 자리에 앉죠.”
“…….”
미츠오를 따라 주상혁이 자리에 가서 앉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비서가 다과를 내려놓고 나가자, 주상혁이 말했다.
“면담은 입국의 목적 때문인가요?”
“뭐, 그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습니다.”
“다른 거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을 읽은 것인지 미츠오가 약간의 미성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허허롭게 웃었다.
“이런, 전혀 못 들으신 듯한 눈초리군요.”
“그러니까 어떤 걸요?”
“주상혁 씨께 우리 일본으로 귀화해 달라 요청할 생각이었습니다.”
주상혁이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미츠오의 얼굴을 살피다가 말했다.
“정말로 그것 때문이라고요?”
“네.”
이민이나 귀화를, 그러니까 스카우트를 하겠다는 사람치고는 뻔뻔한 표정이었다.
“그런 걸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해도 되는 거예요?”
“말씀드렸다시피 오래전부터 몹시 노골적으로 접근했었습니다. 왜 못 들으셨는지는 대충 알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죠.”
아마도 주재호나 강태섭 선에서 요청이 무마됐을 확률이 높았다.
강태섭의 경우엔 주상혁을 지키고자 하는 의도였을 테고, 주재호의 경우에야 주상혁의 부탁으로 그리했을 확률이 높았다.
미츠오가 방긋 웃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결정은 본디 당사자가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미츠오가 소파 앞 테이블 아래쪽에 부저를 눌렀다.
잠시 후 조금 전 주상혁을 방 앞까지 안내했던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의 손에는 미리 준비해 둔 듯한 서류가 들려 있었다.
미츠오가 그것을 받아 들어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는 말했다.
“저는 믿습니다.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절차보다 현대 사회는 노골적이긴 해도 이런 물질이 우선인 곳이라고 말입니다. 읽어 보시죠.”
주상혁이 서류를 들어 올려 쭉 읽었다.
‘계약금 200조에…… 도쿄 번화가에 길드가 들어설 부동산을 500평…….’
그 외에도 길드 설립 시 절차 생략하고 1급 길드를 허가 내주고 길드가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5년 동안 수조 원의 지원금, 길드 운영 시 발생하는 모든 세금의 90% 감세 혜택까지 존재했다.
“음…… 이걸 정말로 다 준다고요?”
주상혁이 모르긴 몰라도 삼류 길드 시절 청초길드를 운영하는 데에만 들어가는 세금이 한 해에 수십억에 달했다.
이류 길드가 된 지금이야 그것에 수십 배를 낼 것이고 일류 길드가 된다면 한해에 수천억 원은 거뜬할 텐데…….
“물론입니다.”
미츠오의 대답을 듣고 주상혁의 표정이 진지했다.
미국이 내밀었던 고작 수십조 단위의 계약보다 10배 아니 가치로만 따지면 수십 배는 더 좋은 계약이었다.
물론 돈이 급하지도, 한국을 떠날 마음이 있지도 않은 주상혁이기에…….
‘거절할 생각이긴 한데…….’
솔직히 궁금했다. 도대체 어째서 자신에게 이 정도 조건을 제시하는지.
혹시나 주상혁의 능력을 알고 있는 건 아닌지.
주상혁이 말했다.
“근데 제가 이 정도 가치가 있나 싶은데요? 미국은…….”
“이것의 1/10 남짓을 제시했다죠?”
주상혁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표정을 짓자 미츠오가 말했다.
“그냥 정보통을 통해 은밀하게 입수했다고만 알려 드리겠습니다.”
“정보통이라…….”
일단 주상혁은 당연히 아니고 장민주는 아닐 테고 올리비아는 죽었으니 짚이는 것이라고는 그때 올리비아의 수행원 정도밖에 없었지만, 여하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는지 주상혁이 물었다.
“여하튼 알고도 이 정도로 제시했다는 거네요? 어째서죠?”
“주상혁 씨는 모르겠지만, 올리비아 사건 이후로 주상혁 씨의 몸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이건 우리 일본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마찬가지겠죠.”
뭐, 이유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장민주가 유니콘을 공개하기 전까지 올리비아를 죽인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던 이유.
여전히 시체의 미간에 남은 관통상 때문이리라.
결과적으로 SS급에 준하는 수준.
즉 장민주 수준 정도로나 보고 있기에 이 정도 금액을 불렀다고 봐야 했다.
주상혁이 능력이 발각된 게 아니라는 확신이 생기자 바로 거절했다.
이미 더 이상 얻을 정보는 없다고 판단했다.
“아쉽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이유는요? 몸값이 올랐다고는 한들 다른 국가들보다 몇 배는 더 높게 제시한 것입니다. 혹시 가족 때문이라면 모두 함께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도록…….”
“아뇨.”
미츠오의 말을 자른 주상혁이 말했다.
“노골적인 물질이 가식과 위선보다는 낫다는 그 말 상당히 인정합니다.”
“그럼…?”
주상혁이 픽 웃었다.
“근데 제가 제물욕은 그다지 없어서요.”
“…….”
주상혁이 테이블 위로 내려놓은 서류를 조용히 몇초간 응시하던 미츠오가 아쉬운 입맛을 다시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여러모로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럼 또 다른 주제로 넘어가 볼까요?”
“그렇게 하시죠.”
이야기가 좀 새긴 했지만, 본래라면 입국에 관련한 면담이 목적이었다.
“일본에 입국한 이유가 사토 씨를 만나러 왔다고 되어 있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사토 씨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흠…….”
잠시 생각하던 미츠오가 말했다.
“유감이지만 사토 씨는 지금…….”
“알고 있습니다. 상태가 조금 편찮으시겠죠?”
“알고도 만나게 해 달라는?”
주상혁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제가 고칠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주상혁 씨는 전투 계열의 각성자일 텐데요?”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서류상 분명히 그러니까.
주상혁이 말했다.
“꼭 각성 능력을 이용해서만 고치란 법은 없잖아요?”
미츠오가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테이블을 바라보며 제법 길게 생각하던 미츠오가 마침내 시선을 들고 주상혁을 바라봤다.
“거절하겠습니다.”
들려온 건 의외의 답변이었다.
* * *
미츠오와의 대화를 마치고 면담실을 나오는 주상혁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거절당할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귀화 제안을 거절했으니 부탁을 들어주기 싫은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무상으로 고쳐 주겠다는데 기회조차 안 줄 줄은 상상하지도 못한 것이다.
Q. 원인 불명의 환자 [돌발].
달성 조건: 같은 증상의 환자를 진맥할 것 (0/1)
실패 조건: 제한시간 내에 환자를 진맥하지 못하거나 환자의 사망.
제한 시간: 16시간 13분 31초.
실패 페널티: 의술 관련 스킬 등급하락.
‘이제 어쩐다……?’
퀘스트가 실패하지 않았다면 아직 누군가 고쳤다거나 환자가 죽은 건 아닐 텐데…….
중요한 건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퀘스트를 그냥 포기하자니…….”
가장 핵심이 되는 의술 관련 스킬 페널티가 적용된다.
등급 하나 올리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걸 아는 만큼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됐다.
주상혁이 생각에 잠겨 느린 걸음을 옮기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띵동.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사람이 타 있었다.
‘이 사람은…….’
엘리베이터에는 4명이 타 있었는데 그중에 2명은 적어도 주상혁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주상혁을 이곳까지 안내했던 수행원이었기에 그랬고, 가운데 휘황찬란한 사제복을 입고 있는 이십 대 후반 남짓 외관의 미남성 이 사람은…….
『Lv.101 아르돈.』
더군다나 아무리 방구석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보내던 주상혁이라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못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레벨이나 복장을 보면 동명이인일 리는 없고…….’
대충 어째서 미츠오가 주상혁의 요청을 거절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기야, 이미 믿음직한 구석인 아르돈이 있는 마당에 사토 일행의 치료를 하겠다는 주상혁에게 의뢰하는 게 되려 이상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비켜 주시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는 사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잡은 수행원이 그렇게 말해 왔다.
“아, 네…….”
주상혁이 뻘쭘해져서 반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정작에 주상혁이 길을 터줬음에도 아르돈은 여전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주상혁을 뻔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상혁의 겉이 아닌 속을 파헤치는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르돈에게 수행원이 말했다.
“교황님……?”
“아, 잠시 생각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가시죠.”
아르돈이 마침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함께 타 있던 신부 복장의 남성과 수녀 복장의 여성이 내려 수행원과 함께 면담실로 향했다.
주상혁이 텅 빈 엘리베이터에 올라 사라졌다.
* * *
아르돈과의 찰나의 만남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주상혁의 표정은 곱지 못했다.
제한 시간: 15시간 31분 31초.
이제 남은 시간은 15시간 남짓.
이대로 내일 오전쯤이 되면 퀘스트는 자동으로 실패였다.
‘근데 시간도 시간이지만…….’
사실 주상혁이 더욱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아르돈.
그야말로 기적의 각성자인 아르돈이 치료하는 데 성공해 버리면 시간과 관계없이 퀘스트는 실패.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주상혁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을 때였다.
와왕!
와구와구 밥을 먹던 주주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현관을 향해 한차례 짖었다.
주상혁의 시선이 현관으로 향하자 때마침 문밖에서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냐아아아.
열어 달라는 듯한 울음소리를 듣고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고양이……는 아니겠고.”
호텔 한복판에서 난데없는 길고양이가 출현할 리 없다. 무엇보다 느껴지는 마나가 제법이었다.
예상 가는 녀석이 없는 건 아니었는지,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주상혁이 문을 열자 때마침 백호를 안아 드는 여자가 보였다.
“야, 너 또 멋대로 돌아다니면…….”
『Lv.72 장민주.』
주상혁과 장민주의 눈이 허공에서 딱 만났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는지 주상혁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보네요.”
“어, 어째서 여기에 있죠?”
주상혁과는 다르게 제법 당황한 장민주의 목소리에 주상혁이 답했다.
“뭐, 그냥 볼일이 있어서 오게 됐습니다. 장민주 씨도 여기 머물러요?”
“오늘은요.”
“오늘은? 왜 오늘은이죠?”
“볼일이 있어서 잠깐 여기로 돌아온 거니까요.”
주상혁의 표정이 약간 의문스럽게 변했다가 곧이어 풀어졌다.
“혹시 그 볼일이란 게 사토라는 각성자랑 관련 있습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그럼 그렇지 싶었다.
사실 토벌 사흘 차인 오늘 장민주가 이곳에 있을 이유 따위 단 한 가지.
아마도 포획한 사토 일행을 인계하기 위한 이유 정도뿐이었다.
주상혁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일이 잘 풀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장민주가 주상혁의 답을 기다릴 때쯤이었다. 백호가 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야, 이리 와.”
주상혁의 발에 볼을 비벼 대던 백호가 장민주의 손을 피해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냐아아아.
주상혁이 주주의 밥그릇 옆에서 구슬프게 우는 백호를 보고는 말했다.
“저 녀석도 배고픈가 본데 잠깐 들어올래요?”
잠시 후 장민주를 방 안으로 들인 주상혁이 두 녀석의 밥을 먹는 걸 지켜보며 넌지시 물었다.
“던전 브레이크 쪽은 어떻습니까? 보기엔 잘되어 가는 거 같던데.”
“봐요? 뭘로요?”
“인터넷 중계로 봤습니다. 한국에선 장민주 씨 멋지다고 난리도 아닙니다.”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저요? 저야 뭐…….”
주상혁이 잠깐 머리를 굴려 지금은 칭찬을 아끼지 않을 때라는 판단을 내렸는지 나름 준수한 평을 내렸다.
“뭐, 제법 능숙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냐아아아아.
“알았어, 더 줄게.”
밥을 더 달라고 보채는 백호에게 주상혁이 밥을 더 부어 줄 때였다.
띠링.
제자 장민주와의 관계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난데없이 떠오른 알림에 주상혁이 고개를 들어 장민주를 바라봤다.
장민주는 방금 전보다 더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표정이 왜 그럽니까?”
“그냥 그런 게 있어요.”
궁금하긴 한데 딱히 캐묻지는 않았다.
강원도에서 조금 알고 지낸바 하루에도 서너번씩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지는게 장민주다.
이해하려고 해봐야 괜히 주상혁만 피곤했다.
주상혁이 그보다 장민주를 숙소안으로 들인 본 목적을 슬쩍 꺼냈다.
“그…… 사토 씨 말입니다.”
“그 사람이 왜요?”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일본에 온 이유가 그 사람이랑 관련 있어요?”
“비슷합니다.”
장민주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도시 외곽에 연구소 하나가 있어요.”
“연구소?”
지이이잉.
장민주가 재차 입을 떼려고 할 때 장민주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도착했다.
“전 이만 가 볼게요. 호출이 와서.”
“그러시던가요.”
마음 같아서는 더 자세하게 듣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수상하다고도 느낄지도 모를 일.
백호를 안아 들고 방을 나서는 장민주를 확인한 주상혁이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연구소란 말이지…….”
* * *
장민주가 방을 나선 후 주상혁은 새벽이 오길 기다렸다가 곧바로 외출을 준비했다.
인벤토리에서 전이 아티팩트를 꺼낸 주상혁이 변장을 확인하고는 이동했다.
아티팩트로 주상혁이 이동한 곳은 1층 호텔의 화장실.
조금 전 미츠오와의 대화를 마치고 올 때 저장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사용할 기회가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호텔을 벗어난 주상혁은 먼저 건물 옥상과 옥상을 뛰어넘어 이동하며 도시 외곽을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다.
연구소 비슷한 시설을 찾기 위함이었다.
“찾았다.”
2시간쯤 지났을까?
동이 트긴 아직 이른 시간 연구소를 찾은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일단 발견한 건 좋은데 말이지…….”
문제는 어떻게 들어가냐 하는 일이었다.
주상혁이 출입 방법을 모색하다가 때마침 바깥으로 나온 연구원을 발견하고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CCTV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다가 주상혁이 연구원의 목 뒤를 손날로 가볍게 후려쳤다.
“보통 이런 데 보면 아이디 카드 같은 걸…….”
쓰러트린 연구원의 품을 뒤지던 주상혁의 표정이 밝아졌다.
연구원이 걸치고 있던 하얀 가운 주머니에서 아이디 카드가 발견된 이유였다.
“이것도 실례한다.”
주상혁이 하얀 가운도 벗겨서 걸쳤다.
내부로 잠입했을 때 근본적으로 숨어 다니더라도 복장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면 행여라도 눈에 띌 가능성 때문이었다.
주상혁이 아이디 카드를 인증하고 연구소 안으로 들어섰다.
‘한적하니 활동하긴 편하겠네.’
연구소 안에는 새벽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이 없었다.
휑한 연구소를 활보하던 주상혁이 모퉁이를 나가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인기척이 느껴진 이유였다.
슬쩍 시선만 던져 확인하자니 흡연실에서 담배를 태우는 두 남자가 있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별것 없어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목소리나 표정을 보아 할 때 저번에 있었던 술자리 이야기, 신세 한탄하는 이야기, 어디에서나 있을 근무 환경에 대한 욕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아오이라는 새끼 아주 개새낀가 보네.’
얼마나 개새낀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언급이 자주 되는 걸로 봐서는 상당한 개새끼임에는 틀림 없었다.
주상혁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얌전히 듣고 있을 때였다.
‘사토? 방금 사토라 그랬나?’
정확히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상혁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녀석들이 말하는 사토와 주상혁이 찾는 사토가 같은 인물임을 말이다.
달칵.
두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주상혁이 흡연실 문을 열고 나오는 두 사람 보고 몸을 숨겼다.
흡연실에서 나온 두 남자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주상혁이 따라나섰다.
은밀하게 미행하길 5분쯤.
아이디 카드를 대고 들어가는 모습까지 확인한 주상혁이 모퉁이에 기대 고민했다.
‘분위기를 보니까 저기가 맞긴 하는가 본데.’
문제는 문 앞을 지키는 각성자가 두 명 있었다.
레벨도 60대에 달하는 게 제법이었다.
‘소란 없이 제압하긴 힘들 텐데.’
두 남자가 들어간 방까지는 정확하게 직선로.
문제는 제아무리 주상혁이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다고 해도 100m가 넘는 복도를 들키지 않고 접근해 A급 각성자 둘을 소리 없이 제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정도 거리면 침 아슬아슬할 테고…… 주주도 큰 소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다.’
진지하게 고민하던 주상혁이 어쩔 수 없이 도박에 걸기로 했다.
‘어쩔 수 없지. 도박이다.‘
주상혁이 모퉁이를 나와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주상혁을 발견한 각성자가 급히 무전기를 집어 들고 중얼거리길 잠시.
투둑.
주상혁이 일순간에 접근해 두 남자를 제압했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순탄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삐이이이이이이잉.
사이렌 소리가 연구소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칫…….”
주상혁이 두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디 카드를 이용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연구실 안에서 사이렌 소리에 어리둥절하던 두 사람을 주상혁이 일순간에 제압하고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행이네.”
유리막 너머에 다행히 사토가 보였다.
이제 주상혁을 가로막는 문 하나만 넘으면 퀘스트는 완료였다.
주상혁이 문 앞에서서 아이디 카드를 들었다가 인상을 구겼다.
하필 이쪽 문만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방식이었다.
숫자를 대충 몇 번 눌러 보던 주상혁이 인상을 와락 쓰고는 주먹으로 냅다 후렸다.
피슈우우웅.
기압 빠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살짝 열리자 주상혁이 힘으로 열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기계는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주상혁 마침내 사토의 앞에 섰다.
“진맥.”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