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28
Book 6 Chapter 2
침대 위에 묶여서 발버둥 치는 사토를 바라보는 주상혁의 눈으로 다양한 장면들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띠링.
Q. 원인 불명의 환자 [돌발] (완료).
달성 조건: 같은 증상의 환자를 진맥할 것 (1/1).
실패 조건: 제한시간 내에 환자를 진맥하지 못하거나 환자의 사망.
제한시간: 6시간 13분 31초.
실패 페널티: 의술 관련 스킬 등급하락.
퀘스트의 완료를 알리는 이 같은 알림창과 인체모형처럼 변한 사토의 모습.
그리고…….
『Lv.77 사토 (강제적인 변태에 부작용 발생).』
―마나 감응도가 인간의 종족 값을 벗어남.
―부작용으로 정신 혼란.
처방전
『비약 글레이나.』
정제수: 0/1
쿨라: 0/1
크리마: 0/1
릴리: 0/1
사토의 상태를 알리는 여러 가지 정보들과 처방전이었다.
평소라면 여유롭게 처방전이라도 읽어 보며 선심 쓰듯 치료할지 고민해 봤을 법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단 말이지.”
아쉽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사이렌이 울리는 급박한 상황인 만큼 슬슬 몸을 빼야 했다.
주상혁이 사토에게서 손을 떼고 미련 없이 돌아서려 할 때였다.
주상혁이 못 볼 걸 본 것처럼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처방전
기경팔맥 봉인: 0/1
“처방전이 두 개라고?”
헛것을 보는 건 아니었다.
시선을 살짝만 올리면 전혀 다른 퀘스트가 존재했기 때문.
“혹시 중급 진맥의 효과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진맥이 중급의 단계에 오르고서는 한 번도 환자에게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잠깐이지만 신기한 현상에 멈춰있던 주상혁이 이번에야말로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하…… 내가 이럴 때가 아니잖아.”
띠링.
주상혁의 발걸음을 붙잡는 또 다른 알림창이 떠올랐다.
퀘스트였다.
Q. 전설의 비약 [돌발 퀘스트].
「환생 의원 주상혁은 우연히 마나 감응도를 조작당한 실험체를 만났다. 비정한 인체 실험에 정신이 붕괴된 실험체를 본래대로 돌이킬 방법은 한 가지. 비약의 반열에 해당하는 글레이나를 제작하는 것이다.」
달성 조건: 비약 글레이나를 만들어 실험체를 치료하자.
실패 조건: 제한시간 내에 실험체를 치료하지 못하면 실패.
달성 보상: 던전 의약학 (중).
제한시간: 3개월.
※단, 던전 의약학 (중)을 익히고 있을 경우 잼으로 지급된다.
※새로운 경지와 동시 수락 불가능.
“퀘스트도 2개인거냐…?”
Q. 새로운 경지 [전직 퀘스트].
「침술의 달인으로 많은 명성을 쌓은 당신의 앞에 새로운 경지가 열렸다. 기경팔맥 봉인의 단서를 던전 브레이크에서 찾아 귀수신의 경지에 다다르자.」
달성 조건: 기경팔맥 봉인을 터득하자.
실패 조건: 제한시간 내에 실험체를 치료하지 못하면 실패.
달성 보상: 귀수신의 전직.
제한시간: 3개월.
※단, 퀘스트 실패 시 이후 전직 퀘스트는 자연 발생하지 않는다.」
※전설의 비약과 동시 수락 불가능.
처방전처럼 두 개씩이나 떠올랐다.
하나는 평소와 같은 돌발 퀘스트. 심지어 페널티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아니었다.
페널티는 없을지언정 하필이면 전직 퀘스트다.
심지어 거절하면 재발생하지도 않는단다.
주상혁은 이게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았다.
비밀 상점에 있는 전직의 서로 나중에 전직해야 한다는 말이다.
참고로 전직의 서는 무려 1만 5천잼.
던전 의약학보다도 비싼 금액이었다.
몰아닥친 퀘스트의 등장에 머뭇거리던 주상혁이 한숨 쉬었다.
“하……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우르르.
주상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다수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문밖에 다수의 각성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주상혁이 퀘스트를 수락했다.
전직 퀘스트 새로운 경지를 수락하셨습니다.
전직 퀘스트를.
* * *
이번에야말로 주상혁이 연구소를 빠져나가기 전에 몰려든 각성자의 머리 위를 대충 쓱 훑었다.
“어디 보자 레벨은…….”
모두가 60레벨은 거뜬한 걸 확인한 주상혁이 혀를 찼다.
“칫, 제법이네.”
60레벨이라는 건 지금의 주상혁에게는 그다지 위협이 되는 레벨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A급 각성자들이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수준이었다.
일반적으로 전 세계 어딜 가든 A급 각성자 정도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열 명 넘게 제압하고 달아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용의자의 숫자를 좁히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하는 단서였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미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가지 단서만 조합해 봐도 이미 용의자 1순위는 주상혁이었다.
연구원의 아이디 카드를 탈취해 연구소에 잠입한 거수자.
A급 각성자 다수를 가볍게 제압하고 달아난 대범함.
사토를 비롯한 각성자들에게 관심을 보였던 주상혁.
‘이것만 해도 이미 빼박이긴 하지…….’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주상혁도 이미 제법 한가락 하는 각성자라 확실한 물증이 없다면 큰일이 되진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주상혁이 생각을 마치고 입구를 막고 있는 각성자 무리에게 쇄도했다.
빼도 박도 못 할 증거를 남기는 침은 사용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침을 사용하지 않고 손날로만 상대해도 충분했다.
주상혁이 마음먹고 움직이니 채 5초도 지나지 않아 서 있는 A급 각성자가 없었다.
상황을 정리한 주상혁이 연구실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인기척 하나가 입구 쪽에서 느껴졌다.
“훌륭한 실력이십니다.”
주상혁이 천천히 연구실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봤다.
『Lv.101 아르돈.』
‘이 사람이 또 이 시간에 왜?’
주상혁이 아르돈의 능숙한 한국어에 답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자신은 지금 얼굴을 가리고 있는 상태.
아르돈이 자신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볼 리 없었다.
‘괜히 한국어로 답하는 건 바보짓이지.’
주상혁이 아르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저렇게 입구를 대놓고 막고 있으면 나갈 법이 없는데…….’
아르돈의 레벨은 무려 101.
아무리 보조 계열 각성자라고 하더라도 저 정도 레벨이면 거의 SS급 초입 수준의 신체 능력은 거뜬할 터였다.
“지나가고 싶으십니까, 주상혁 씨?”
이미 확신 하고 있는 듯한 말투.
주상혁이 표정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힘으로 제압할 수야 있겠지만,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오히려 문제를 크게 만들 수 있었다.
주상혁이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만약 자신을 잡는 게 목표였다면 처음부터 공격적으로 나왔다거나 미츠오와 동행했을 확률이 높다는 판단이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대화? 그게 답니까?”
“그렇습니다.”
주상혁이 여전한 사이렌 소리를 귀에 담으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지금은 곤란한데.”
주상혁의 말에 아르돈이 막고 있던 길을 터 주며 말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대화할 수 없을 것 같더군요.”
뭐,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회가 됐다면 단번에 도망쳤을 테니까.
아르돈이 말했다.
“내일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문 앞을 지나가던 주상혁이 미리 준비한 듯한 아르돈의 쪽지를 받아들고는 복도를 내달렸다.
* * *
연구소를 빠져나와 전이 아티팩트를 꺼내 든 주상혁이 안도의 한숨 쉬었다.
“다행이네…….”
아르돈이 협조적인 것도 다행.
아티팩트가 충전 상태인 게 다행이었다.
현재 주상혁이 소지하고 있는 아티팩트는 하나다.
본래 생각했던 것보다 요란스럽게 일을 벌인 만큼 빨리 돌아가야 하는 주상혁의 입장에서는 아티팩트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몇 시간 전 사용한 거리가 짧았기 때문인가?’
정말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주상혁이 털썩 침대에 앉았다.
“일단 한숨 돌리긴 했는데…….”
주상혁이 퀘스트 창을 켰다.
Q. 새로운 경지 [전직 퀘스트].
「침술의 달인으로 많은 명성을 쌓은 당신의 앞에 새로운 경지가 열렸다. 기경팔맥 봉인의 단서를 던전 브레이크에서 찾아 귀수신의 경지에 다다르자.」
달성 조건: 기경팔맥 봉인을 터득하자.
실패 조건: 제한시간 내에 실험체를 치료하지 못하면 실패.
달성 보상: 귀수신의 전직.
제한시간: 3개월.
※단, 퀘스트 실패 시 이후 전직 퀘스트는 자연 발생하지 않는다.」
※전설의 비약과 동시 수락 불가능.
“딱 봐도 엄청 귀찮아 보이는데…….”
아무래도 금방 집에 가기는 글렀다고 할 수 있었다.
주상혁이 노가다의 냄새를 맡고 문뜩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주머니를 뒤졌다.
“퀘스트 말고도 이것도 있었지…….”
아르돈이 건네준 쪽지.
그러고 보니 이것도 있었다.
주상혁은 사실 말은 안했지만 이쪽이 더 골치아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작 자신과 대화에서 무슨 얻을 게 있다고 그런 행동을 했는지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정말로 대화만 하고 끝났으면 좋겠지만.”
주상혁이 침대에 누워서 아르돈이 넘겨준 쪽지를 확인했다.
약속 장소와 약속 시간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 주상혁은 결국 한숨도 못 잤다.
아침 해가 밝은 걸 주상혁이 확인하고 얼마 안 되어서였다.
주상혁이 벌떡 일어났다.
“올 것이 왔군.”
문밖에 인기척이 느껴진다.
미츠오일 게 분명했다.
띵동.
아침 일찍 숙소의 초인종 소리에 주상혁이 현관으로 향했다.
주상혁이 문을 열기에 앞서 현관 옆 거울을 바라봤다.
방금막 깨어난 듯한 부스스한 머리를 만들어 보이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Lv.77 미츠오.』
역시나 주상혁의 예상대로였다.
숙소로 찾아온 사람은 미츠오와 수행원이었다.
주상혁이 졸린 듯한 눈과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죠?”
“혹시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그런데요?”
어제 대화할 때처럼 웃는 듯한 얼굴과 표정.
하지만 주상혁은 알 수 있었다. 눈 한 편에서 느껴지는 의심이라는 감정을.
‘다행히 아르돈 그 양반이 이상한 말을 한 거 같지는 않네.’
심증만 있는 미츠오의 눈빛을 받으며 주상혁이 되려 다시 한 번 물었다.
“무슨 일이냐니까요?”
주상혁을 조용히 바라보던 미츠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숙소 대기가 끝났다는 걸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직접이요? 번거롭게시리 문자로 해도 되는데.”
미츠오가 묘하게 쓴 기운이 느껴지는 미소와 함께 퇴장했다.
현관문을 닫고 돌아선 주상혁이 거실로 들어와 시계를 확인하고는 중얼거렸다.
“어차피 눈 붙이긴 글렀고 슬슬 준비해 볼까?”
아르돈과의 만남의 시간이었다.
* * *
느긋하게 준비를 마친 주상혁은 짐을 챙겨 호텔을 나섰다.
어차피 절차상 머물러야 해서 머물었던 숙소였다.
전직 퀘스트가 생겨 버린 이상 어차피 더 머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뭔가 감시당하는 기분이라 별로기도 하고…….’
주상혁이 주머니에서 아르돈의 쪽지를 꺼내 쥐고는 호텔 앞에서 대기 중인 택시에 올랐다.
택시 기사에게 조용히 용지를 내밀자 택시 기사가 그곳으로 향했다.
‘이런 곳은 처음인데…?’
택시에서 내린 주상혁이 일본 전통 가옥처럼 된 일식집의 대문 앞에 서서 돌연 표정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연락할 방법이 없네……?”
주상혁이 쪽지를 다시금 확인해 봤다. 장소와 약속 시간 말고는 적힌 게 없는 용지.
주상혁이 막연하게 그 자리에서 서서 기다려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터벅터벅.
주상혁에게로 때마침 남자 하나가 걸어왔다.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본 검은색 신부복을 입은 남성이었다.
주상혁과 눈이 맞은 신부가 경건함이 묻어나는 듯한 분위기로 가볍게 인사했다.
‘따라오라는 건가?’
이어지는 행동에서 확신한 주상혁이 남자를 따라나섰다.
남자를 따라 일식집 대문 안으로 들어가서 5분쯤 걸었을까?
안내하던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
‘여긴가 보네.’
보아하니 안쪽에서 강력한 마나가 느껴진다.
남자가 열어 주는 방 안으로 주상혁이 들어섰다.
방 안에서는 아르돈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지는 남자를 확인하고 주상혁이 아르돈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식사하셨습니까?”
태연하게 건네오는 말에 주상혁이 답했다.
“식사나 하자고 만난 건 아니잖아요.”
“뭐, 그렇긴 하죠.”
“하고 싶은 대화라는 게 뭡니까? 참고로 교황청으로 오라는 제안 같은 걸 할 생각이라면 거절할 겁니다.”
주상혁의 말을 듣던 적발의 미남성 아르돈이 픽 하고 웃었다.
미형의 얼굴에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겹치니 뭐랄까 없던 신앙심도 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왜 웃습니까?”
“아뇨, 뭔가 크게 착각하고 계신 것 같아서요.”
“착각?”
아르돈이 옅게 남은 미소를 머금고 입술을 뗐다.
“주상혁 씨와 비슷한 수준의 각성자라면 교황청에도 많이 있습니다. 굳이 이제 와서 하나둘 늘린다 한들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말이죠.”
뭔가 분하긴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개인 조직 단위로 놓고 보면 클린트와 더불어 세계에서 최고를 다투는 게 현 바티칸 교황청이다.
인재라면 차고 넘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할 대화란 게 뭡니까?”
“그냥 흥미가 생겼습니다.”
“여흥 같은 겁니까?”
주상혁의 말에 아르돈이 영문 모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혹시 미래시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뭐 조금은? 그쪽이 예지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들어 봤죠.”
아르돈이 미래를 본다는 이야기는 제법 유명하다.
사실 그의 절대적인 축복과 힐보다 지금 그의 명성을 쌓게 도와준 건 이쪽에 가까웠으니까.
“그럼 이야기가 편하겠군요.”
아르돈이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저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뭐 미래를 본다고 해도 대단한 걸 보는 건 아니고 그 사람에게 펼쳐질 단편적인 사건뿐이지만.”
“그게 흥미가 생긴 이유랑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의 미래를 들춰 본 것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주상혁이 새벽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떻게 연구소에 아르돈이 왔나 했더니 이제야 이해가 됐다.
불특정의 미래를 보는 게 아니라 특정 개인의 사건을 볼 수 있다면 복면으로 가리고 있어도 주상혁이라는 걸 당연히 알 수밖에.
“한데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네……?”
“제가 읽는 미래는 보통 보름에서 한 달 남짓. 하지만 당신에게서는 어제 딱 연구소 거기까지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주상혁이 물었다.
“그럼 지금도 안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모르고요?”
아르돈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상혁의 표정을 읽었는지 아르돈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너무 불안해하실 건 없습니다. 그렇다고 죽거나 하는 건 아닐 거거든요.”
주상혁이 안심했다.
“전에도 안 보인 사람이 있었습니까?”
“두 번째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다행히 첫 번째가 있었나 보다.
“첫 번째는 누구입니까?”
“말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특히 당신에게는.”
뭔가 첫 번째라는 그 사람이 주상혁을 알고 있다는 듯이 들렸지만…….
‘기분 탓이겠지.’
아르돈이 미래를 읽지 못하는 두 번째 상대가 주상혁이라는 건 신이 아니고서야 모를 일이었다.
그냥 주상혁이 아닌 두 번째를 지칭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할 대화는 끝난 겁니까?”
주상혁의 말에 아르돈이 책상 위로 무언가 내밀었다. 휘황찬란한 반지였다.
“이게 뭡니까?”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미래도 안 보인다면서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어떻게 알고요?”
아르돈이 이번에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글쎄요.”
좀 찝찝하긴 해도 여하튼 선물로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보아하니 반지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보통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여하튼 잘 쓰겠습니다.”
주상혁이 반지를 품에 챙기고는 물었다.
“이만 가 봐도 됩니까? 아니면 할 대화가 더 남았다거나?”
“가셔도 됩니다.”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려는 주상혁에게 아르돈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십시오. 교황청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
“공짜입니까?”
“그렇습니다.”
주상혁이 방을 나가면서 픽 웃었다.
“자비로운가 보군요, 신은.”
* * *
주상혁이 방을 나가고 잠시 후였다.
뒤늦게 음식이 방으로 들어왔다.
아르돈이 가볍게 식사를 시작하자 조금 전 주상혁을 방까지 안내했던 신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됐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가 정말로 기다리던 분입니까?”
“확실하더군요.”
아르돈의 말에 신부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멘…….”
아르돈이 감격에 젖어 있는 신부에게 물었다.
“세리나에게 지시한 건 어찌 됐습니까?”
“주변을 기웃거리던 각성자가 있길래 완력으로 제압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렇군요.”
아르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잠시 후 아르돈이 다이어리 하나를 꺼내 읽더니 옅게 미소지었다.
“드디어 만났군요.”
* * *
그날 오후 일본의 협회장 미츠오는 보고를 듣고 표정이 굳은 상태였다.
주상혁에게 붙였던 S급 암살 계열 각성자가 미행에 실패했다는 이야기였다.
“놓쳤다고요?”
“주상혁만 신경 쓰다 보니 교황청 쪽 각성자가 이중 미행을 하는 줄은…….”
은밀하게 추격하라고 지시한 만큼 들킬 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교황청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처했다.
‘미래시인가?’
표정을 구겼던 미츠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닙니다. 애초에 주상혁이 만나는 대상이 아르돈일 줄은 저 역시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요.”
연구소를 잠입한 용의자인 주상혁을 이대로 놓쳐 버린 건 뭔가 찝찝하다.
하지만 애초에 사망자가 나온 것도 아니고, 무슨 특별한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닌 상황.
구태여 정의하자면 주상혁에게 미행을 부친 건 어제 연구소의 일보다는 그가 이 시국에 일본에 방문한 목적에 의문을 품은 것에 가까웠다.
‘던전 브레이크가 한창인 국가에 관광이라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미츠오가 대화를 나누고 있자 잠시 후 방문을 노크하는 남자가 있었다.
“들어오세요.”
미츠오의 말에 수행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떻답니까? 사토 씨들은?”
“빠른 속도로 회복 중입니다.”
오늘 오전 아르돈이 치료한 이후로 의식을 찾은 사토 일행이 급속도로 회복 중이라는 낭보였다.
미츠오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SS급 미즈키를 포함하면 이제 SS급에 준하는 전력이 무려 네 명.
이 정도면 중국에도 크게 밀리지 않는 전력으로 단번에 발돋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츠오가 한창 만족해하고 있자 수행비서가 말했다.
“저…… 그런데 협회장님 실은 던전 브레이크 쪽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 * *
아르돈과 헤어진 주상혁은 고민 중이었다.
방을 나서기 전에 아르돈이 전해 준 반지 때문이었다.
『교황 아르돈의 주술반지.』
「교황 아르돈이 준비한 수수께끼의 주술반지이다. 아르돈의 신성력이 가득 담겨 있다.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아르돈만 알고 있다.」
마나 +10.
“도움이 될 거라고 하긴 했는데…….”
막상 착용하자니 효과도 모르고 낀다는 게 찝찝했다.
‘저게 이로운 효과라는 보장도 없고…….’
마나 +10 증가라는 부분적인 효과에 혹해서 끼기에는 주상혁은 이미 강력하다.
고민하던 주상혁이 한 손으로 안고 있던 주주에게 물었다.
“주주는 어떤 거 같아?”
왕!
“그래…… 그렇단 말이지?”
주주가 언제나 같이 물음에 답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주주가 답한 건 언제나 최악의 결말을 불러오지는 않았다.
새벽의 로자리오 때도 그랬고 클론 팔찌를 강혜영에게 줬을 때도 그랬다.
“그래 끼지, 뭐.”
주주의 선택을 믿어 보기로 했다.
주상혁이 맞는 굵기의 손가락에 대충 반지를 꼈다.
반응을 지켜보던 주상혁이 잠시 후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달라진 건 없나?”
주술이란 게 착용 즉시 효과를 보이는 건 아니었나 보다.
주상혁이 하는 수 없이 일단 반지에 대한 생각은 접어 두고 이번에는 퀘스트창을 켰다.
Q. 새로운 경지 [전직 퀘스트].
「침술의 달인으로 많은 명성을 쌓은 당신의 앞에 새로운 경지가 열렸다. 기경팔맥 봉인의 단서를 던전 브레이크에서 찾아 귀수신의 경지에 다다르자.」
달성 조건: 기경팔맥 봉인을 터득하자.
실패 조건: 제한시간 내에 실험체를 치료하지 못하면 실패.
달성 보상: 귀수신의 전직.
제한시간: 3개월.
※단, 퀘스트 실패 시 이후 전직 퀘스트는 자연 발생하지 않는다.」
※전설의 비약과 동시 수락 불가능.
‘그럼 이번엔 이쪽인가?’
원치 않게 받았고 페널티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상혁은 퀘스트를 깰 생각이었다.
‘나중에 잼을 모아서 전직하려면 상당히 귀찮겠지…….’
이미 던전 의약학 때문에 잼을 모아 본 전력이 있는 주상혁이었기에 알 수 있다.
그 고생에 비하면 이 정도는 선녀라는걸.
그냥 기회가 왔을 때 후딱 끝내 놓기로 한 주상혁은 걸음을 도쿄로 잡았다. 그리고…….
“이걸 생각 못 했네.”
방어선에 도착해서 표정을 구겼다.
‘생각 이상으로 방어선이 두꺼워.’
촘촘한 인원 배치를 감안하면 강행 돌파를 했을 때 목격자가 안 나올 수가 없는 구조였다.
이미 연구소에서 소란을 일으켜서 경계망에 오른 주상혁이다.
이번에도 괜히 사고를 일으켜서 좋을 게 없었다.
“그렇다고 몇 명 때려눕히고 들어가기는 좀 그런데…….”
행여 방어선이 뚫리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
고민하던 주상혁에게 때마침 주주가 나와서 작게 짖었다.
주주를 향해 시선을 옮긴 주상혁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나?”
주상혁이 떠올린 건 주주가 근래에 터득한 시간을 왜곡하는 안개였다.
이것을 사용하면 별 탈 없이 방어선을 지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해결책을 떠올렸음에도 주상혁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근데 그러기엔 좀 아깝지 않나?”
『Lv.72 청운해태.』
레벨 주주의 레벨이 소모된다는 게 아까웠다.
주주의 레벨도 70레벨을 넘어서면서 오르는 게 많이 느려졌다.
두 달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3레벨밖에 상승하지 못한 게 그 증거였다.
그런데 안개의 도움을 빌리면 꼼짝없이 레벨이 하락한다.
주상혁은 이 부분이 신경 쓰였다.
왕!
제법 길게 고민하던 주상혁을 주주가 보챘다.
“알았어. 사용하면 되잖아, 사용하면.”
자기 레벨 떨어트리는 건데 뭐가 그렇게 좋은지 주상혁의 말에 주주가 꼬리를 신나게 흔드는 게 보였다.
“그럼, 부탁할게.”
와왕!
주주의 외마디 울음소리와 함께 곧이어 일대에 푸른 안개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고작 2레벨 올랐을 뿐인데 주주는 능숙하게 안개를 다뤘다.
잠시 후 안개로 덮이는 각성자를을 지켜보다가 완전히 삼켜지자 주상혁이 넌지시 물었다.
“된 거야?”
주주가 꼬리를 흔들어 보이며 답하자 주상혁이 주주를 안아 들었다.
혹시 몰라 조심스럽게 이동하던 주상혁이 돌처럼 굳은 모습의 각성자들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거참, 다시 봐도 신기하네.”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거나 얼굴을 들이밀어 봐도 별 반응이 없다.
그나마 좀 반응이 있는 곳이라고는…….
방어선 최전방에서 데스 모스를 저지하는 각성자들 정도였다.
전투를 하느라 전력으로 움직이는 상황이 되어야 지팡이 짚는 노인들 수준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혹시 몰라 전투 지역은 전력으로 달려서 지나친 주상혁이 그늘진 건물 뒤편에서 말했다.
“이제 됐어.”
주상혁의 말에 넓게 펼쳐져 있던 안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주의 몸속으로 소용돌이치듯 빨려 들어오는 걸 지켜보던 주상혁이 돌연 눈을 크게 떴다.
“어……?!”
『Lv.70 청운해태.』
안개를 사용하기 전에 주주의 레벨은 72.
하지만 어째선지 레벨은 70이 되어 있었다.
“뭐야, 왜 2단계나 떨어졌지?”
일전에 시험 삼아 사용했을 때도 1레벨이 하락했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주상혁이 주주를 바라봤다.
주주가 왕왕 짖으며 말했다.
“뭐야, 그런 원리였어?”
주주의 말은 대략 이러했다.
적용 대상이 많으면 레벨 감소 폭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그래, 근데 그런 거면 진작 말해 주면 좋았을걸…….”
“꾸웅…….”
주주는 주상혁의 뛰어난 전력 중 하나다.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더 모색해 본 뒤에나 사용했을 것이었다.
주상혁이 조금 기죽은 주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주주의 표정이 금새 풀어졌다.
주상혁이 레벨에 대한 해프닝을 마무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 녀석들 금세 많이도 몰려드네?”
『Lv.78 데스 웜.』
『Lv.77 데스 웜.』
『Lv.79 데스 웜.』
어느새 사방에 데스 웜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 안으로 들어왔다는 게 느껴졌다.
파지지직.
왕!
주주가 전투준비를 하며 말했다.
“그래, 이제 퀘스트 깨야지.”
주상혁의 전직 퀘스트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 * *
던전 브레이크에서 단서를 얻어라.
퀘스트가 지시한 대로 주상혁은 데스 웜과 데스 모스를 진맥으로 일일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근데 이거 이 녀석들한테 힌트 얻을 수 있는 거 맞아?”
오후 3시경 진입해서 해 질 무렵까지 주변을 휩쓸었다. 하지만 퀘스트는 전혀 진척이 없었다.
확인해 본 숫자만 해도 벌써 일천.
이번에도 역시 꽝을 확인한 주상혁이 손을 올리고 있던 눈앞의 데스 모스에게서 손을 뗐다.
“처리해.”
파지지지직.
데스 모스에 올라타 짓누르고 있던 해태 모드 주주의 전류가 강해졌다.
데스 모스가 시꺼멓게 타서 형체를 알 수 없을 수준이 되자 주주가 강아지 형태로 돌아왔다.
주상혁이 몬스터가 만든 시체의 산을 쓱 둘러보고 중얼거렸다.
“이걸로 끝인가?”
분명히 방어선을 막 넘었을 때만 해도 주주의 분신까지 동원할 정도로 한 놈 확인하면 다음 놈들이 오고 또 오는 연속이었는데.
방금 그놈이 마지막 놈이었나 보다.
주상혁이 주주를 안아 들고는 더욱 안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거 생각 이상으로 시간 오래 잡아먹겠네…….”
천여 마리 넘게 처리했는데 단서를 전혀 찾지 못했다.
어쩌면 보스를 처리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을 주상혁이 떠올렸을 때였다.
“어……?”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무언가를 눈을 찡그리며 노려보던 주상혁이 깜짝 놀라 몸을 숨겼다.
주상혁이 몸을 숨기고 5분쯤 지났을까?
주상혁이 몸을 숨긴 건물 앞으로 수십명의 사람이 지나갔다.
던전 브레이크를 진압하던 SS급 각성자들이었다.
공격대가 완전히 지나가자 모습을 드러낸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던전 브레이크라고 꼭 몬스터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사토라는 이름의 각성자가 그랬듯 마찬가지로 휘말린 사람들도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사토라는 인간은 제대로 살펴보질 않았네?”
가뜩이나 시간도 없었는데 퀘스트가 물밀 듯이 몰려드니 경황이 없었다.
뭔가 실마리를 찾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주상혁이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10분쯤 지났을까?
뭉쳐 있는 감염자 무리를 발견한 주상혁이 말했다.
“죽지 않게 부탁해.”
주주가 쏜살같이 분신들하고 튀어나가 시민들을 깨물었다.
파지지직.
저릿저릿한 마비에 걸려 옴짝달싹 못 하는 시민들을 확인한 주상혁이 천천히 걸어갔다.
선두에 서 있는 정장 차림의 회사원의 머리에 손을 올린 주상혁이 진맥을 사용했다.
혈 자리가 전개됐다.
“역시 몬스터보단 이쪽이 편하다니까?”
처음 보는 몬스터들보다야 여러 번 본 사람들의 혈 자리가 파악하기 편했다.
“어디 기경팔맥이랬으니까…….”
주상혁이 팔맥을 구성하고 있는 혈 자리들을 쓱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몬스터를 아무리 살펴봤지만, 힌트를 찾을 수 없기에 이쪽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팔맥을 살펴봤지만, 딱히 다른 게…….
“어?”
손을 떼려던 주상혁이 멈칫했다.
“있네?”
* * *
기경팔맥.
독맥, 임맥, 충맥, 대맥, 음유맥, 양유맥, 음교맥, 양교맥으로 구성된 혈 자리를 일컫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기경팔맥은 열두 경맥과 마찬가지로 혈 자리의 기본 중에 기본이니만큼 주상혁도 전생의 지식으로 기경팔맥 정도는 훤히 꿰고 있다.
하지만 그런 주상혁이라도 기경팔맥을 봉인하는 혈 자리가 존재한다는 건 처음 듣는 소리.
때문에 퀘스트를 처음 들었을 때는 주상혁도 흥미가 일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게 그 봉인의 혈 자리인 건가?”
수많은 붉은 점과 푸른 점 사이에서 작게 빛나고 있어서 모르고 넘어갈 뻔했지만, 분명히 녀석은 존재하고 있었다.
주상혁이 보랏빛을 주시하고 있자 잠시 후 새로운 퀘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띠링.
Q. 기경팔맥 봉인의 단서 [Skill].
「기경팔맥 봉인의 원리는 비교적 간단했다. 평소 마석을 통해 마나를 사용하는 몬스터가 다량의 마나를 다루게 되면서 인간의 팔맥이 해당하는 부위에 마나 하트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기경팔맥 봉인의 단서였다. 인간과 몬스터의 경계 어디쯤에 위치한 환자들을 접하여 여덟 곳의 기경팔맥의 지식을 쌓자.」
임맥 0/1000.
독맥 1/1000.
충맥 0/1000.
대맥 0/1000.
음교맥 0/1000.
양교맥 0/1000.
음유맥 0/1000.
양유맥 0/1000.
새롭게 생겨난 퀘스트를 확인한 주상혁이 입꼬리를 올렸다.
고작 혈 자리당 천 번.
왕년에는 눈감고 짚을 수 있을 때까지 수년에 걸쳐서 혈 자리를 꿰차고 있던 주상혁이다.
이 정도면 거저먹기였다.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 * *
주상혁이 한창 퀘스트에 전념하고 있던 나흘째.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던 던전 브레이크는 이날 제법 큰 국면을 맞이했다.
도쿄는 일본의 수도인 만큼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
다행히 무사히 피난한 사람도 있었지만, 못한 사람도 상당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미처 대피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사토 일행처럼 고치가 되어 있었는데 이게 토벌 나흘째에 문제를 일으켰다.
이들도 하나둘씩 고치를 뜯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열흘 안에 도쿄 타워에 매달린 거대한 고치를 처리할 목적으로 무섭게 던전 브레이크를 수습해 나가던 공격대는 이날 목표치의 반절도 성과를 내지 못한 상태였다.
고치를 뜯고 나온 시민들의 전투력이 거세기 때문이 아니라 시민이라는 인식 때문에 무작정 공격하기에 주저함이 생긴 것이었다.
이대로면 일주일은커녕 본래 계획했던 보름도 더 걸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하는 수 없이 미츠오는 다른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는 수 없이 수송선을 이용해서 고치 먼저 처리하고 돌아오는 작전이었다.
이틀의 준비 기간을 거치고 엿새째 도쿄 상공에서 미츠오가 말했다.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제법 위험한 작전입니다. 본래라면 수송선의 호위가 어려워 실행이 불가능했던 방법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틀 전쯤 완전히 회복한 사토 일행이 있었기에.
“수송선은 30km쯤 떨어진 공항에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모두 준비되셨습니까?”
어느 누구도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비장한 눈을 떠 보일 뿐이었다.
수송선의 출입구가 개방되고 소각 팀으로 배정된 토벌대 인원들이 수천 미터 상공에서 뛰어내렸다.
엄청난 속도로 지면에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소각 팀을 향해 거대한 나방 떼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볼프만.”
“그래.”
공대장을 맡은 스타크의 말에 볼프만이 기다렸다는 듯이 불꽃을 날렸다.
일격에 깡그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는 낙하산을 편 일행이 지면에 하나둘 내려섰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크기가 훨씬 더 굉장하구만.”
내려선 일행에게 달려드는 몬스터를 공격대가 해치워 나가자 조금 전보다 더 강력한 마법을 준비하던 독일의 각성자 볼프만이 말했다.
“그 안에서 그대로 녹아 버리라고.”
볼프만의 화염 마법이 그대로 도쿄타워를 향해 쏘아졌다.
직선로에 있던 모든 걸 일순간에 녹여 버리며 해일에 비견할법한 볼프만의 불꽃이 전진했다.
지면을 용광로를 연상시키듯 만들며 나아가던 마법이 마침내 성공적으로 고치마저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 * *
지금으로부터 약 열흘 전.
일본에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을 때였다.
아비규환이 된 도쿄의 한복판에서 혼자만 제자리에서 날갯짓하는 거대한 데스 모스 한 마리가 있었다.
다른 개체보다 유독 빛나는 날개와 수십 배는 더 큰 거대한 몸집을 가진 녀석의 이름은 데르트.
데스모스의 우두머리이자 이번 던전의 보스였다.
아비규환이 된 도쿄를 그저 말없이 바라보던 데르트가 생각했다.
‘언젠가…….’
본적이 있었다.
이와 똑같은 광경을 본 적이 있음을 데르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언제였지?’
당장에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분명히 본 적이 있음에도 동시에 존재할 리 없는 기억이라 혼란스러웠다.
‘그러면 꿈인가?’
아니.
데르트는 절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단순한 꿈이나 기시감 같은 감각으로 치부하기에는 한 남성의 얼굴이 떠오르자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자신의 두 날개를 베어 버리고 웃던 푸른 눈을 가진 남성의 얼굴이었다.
“녀석은 이곳으로 온다.”
그날의 전투를 대비해서 데르트는 스스로를 고치 속에 그렇게 가뒀다.
남들과는 다른 엘리트 몬스터인 자신은 끝없는 탈피를 통해 지금에 이르렀다.
앞으로 다가올 싸움을 위해 지금 다시 한 번 성장할 때였다.
“더욱 크고 더욱 견고하게…….”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지나가며 문뜩 데르트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신체가, 자신의 모습이, 역설적이게도 증오하던 그자와 흡사하게 변해 가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스스로 고치에 들어가고 열흘째.
“누군가 왔군.“
강력한 마나가 바깥에서 다수 느껴지더니 곧이어 엄청난 열기가 몰아닥쳤다.
기억 속의 자신이었다면 살갗이 녹아 버렸을 법한 열기.
하지만 데르트는 화염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이까짓 화염을 견디지 못한다면 결과는 뻔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화염을 몸으로 느끼던 데르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완벽해…….’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 * *
화염에 삼켜진 고치를 보는 볼프만의 어깨를 스타크가 쳤다.
도쿄타워는 물론이고 거대한 고치까지 녹여 버린 화염이다.
저 정도의 공격이라면 더 볼 것도 없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30km면 상당히 멀다. 이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어.”
도쿄의 중심부는 던전 브레이크의 시작점이라 그런지 몬스터의 밀도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지금 이 순간 몰려드는 데스 모스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체력 소모가 상당했다.
그것을 아는 볼프만이었기에 스타크의 말에 이내 돌아섰다.
마력을 발산한 손끝의 감각이 뭔가 석연찮게 느껴졌지만, 자신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던 이유였다.
볼프만이 공항 쪽으로 휙 돌아섰을 때였다.
공격대 전원의 머릿속으로 동시에 주인 모를 음성이 들려왔다.
―놈은 어디 있지?
흠칫.
동시에 소름 끼치는 마나가 공격대 전원의 피부 위로 스쳤다.
“뭐, 뭐야 기분 나쁜 마나는.”
“저놈이 말한 건가?”
급히 돌아선 공격대의 눈에는 30m 밖에 서 있는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나체의 남성이 있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나? 그놈은 어디 있지?
“그놈?”
데르트가 공격대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모르는 얼굴이 둘, 아는 얼굴이 여섯.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이 찾던 남성의 얼굴은 존재하지 않았다.
―놈은 오지 않은 건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데르트를 보고 볼프만이 말했다.
“결정해야겠군, 스타크.”
여기서 놈과 싸울지 그도 아니면 일단 기회를 만들고 도망갈지 정해야 했다.
“여기서 처리한다.”
공격대의 표정이 일순간에 진지해졌다.
상당히 위험한 마나를 가진 녀석이었지만, 공대장인 스타크의 결단에 따라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고치를 강제로 제거한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놈이 상당히 불안정하다는 거다. 엄호를 부탁하지.”
스타크가 일행에게 뒤를 맡기고 일순간에 데르트를 향해 쇄도했다.
속도라면 스타크의 최고의 장기.
설령 전 세계 최고의 각성자 마이클이라고 하더라도 속도에서는 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단 한 순간에 놈의 코앞까지 이동해 수십 번의 칼질을 한 스타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베어 넘긴 데르트가 신기루처럼 갈라진 이유였다.
“쿨럭…….”
화려하게 헛방을 친 스타크가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황급히 뒤돌았다.
가슴이 관통당한 보조 계열 각성자의 모습이 스타크의 두 눈에 보였다.
일본 협회에서 밸런스를 위해 붙여준 S급 각성자였다.
“뭐 하나, 샤오첸.”
“샹…….”
스타크의 말에 뒤늦게 중국의 SS급 각성자 샤오첸이 달려들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유유히 사라진 데르트는 멀직히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상태는 어떻지?”
“이미 틀렸어.”
심장을 관통당한 보조 계열 각성자는 이미 명을 달리한 상태였다.
데르트가 피 묻은 검지를 들었다.
데르트의 검지가 가리키는 곳의 끝에는 바닥을 피로 물들이는 보조 계열 각성자가 있었다.
―저놈은 귀찮은 놈.
스타크의 표정이 구겨졌다.
‘보조 계열 각성자인 걸 알고 처리한 건가?’
솔직히 믿기 힘들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여러모로 맞아떨어졌다.
데르트의 검지가 이번에는 스타크를 향했다.
―모르는 얼굴, 네놈은 제법 빠르군.
스타크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그리고…….
스타크가 엄청난 속도로 데르트를 향해 접근했다.
조금 전보다 배는 더 빠른 스타크는 어느덧 인간의 형체가 아닌 그저 하나의 선이었다.
데르트도 뒤늦게 스타크를 향해 움직였다.
콰과광.
두 개의 선이 격돌하고 떨어지고를 반복했다.
두 존재가 충돌할 때마다 주변의 건물이 으스러져 무너지는 광경이 펼쳐지길 잠시…….
3분쯤 치열하게 이어지던 공방에 변화가 찾아왔다.
허공에 나이프를 쥔 팔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스타크의 팔이었다.
* * *
일본의 던전 브레이크 사태에 각성자를 파견한 선진국들은 처음부터 크게 한 가지를 노렸다.
그것은 자국의 간판인 SS급 각성자를 통해 생기는 홍보 효과였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어느 국가에나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지시키고 일본 사태를 보여 주며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굳건히 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일본이 지급하는 보상금은 처음부터 그저 덤.
애초에 대부분이 각성자들에게 지급되는 것이기도 했고 본 목적은 토벌 영상에 있었다.
때문에 가장 핵심이 될 도쿄 수복작전은 영상은 사전에 대대적인 송출이 협의 되어있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 말은…….
⌙스타크가 진 거임?
⌙이건 상상도 못 했는데…….
스타크의 팔이 잘려 나가는 장면 역시 생생하게 송출됐다는 말이었다.
스타크가 패배한 것도 패배한 것이었지만,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린 건 이어지는 모습이었다.
샤오첸의 거대한 도끼를 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막는 모습이나 아멜리아와 미즈키의 합동 공격을 가볍게 휙휙 피해 버리는 모습은 경악을 금치 못할 장면이었다.
⌙SS급이 다섯 명이나 되는데 S급 던전 보스 하나 못 잡을 줄이야…….
⌙혹시 살살하는 거 아니에요?
공격을 휘두를 때마다 콘크리트 바닥이 아작 나는 건 일쑤고 건물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모습이 보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지금 펼쳐지는 장면은 그만큼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세 사람의 공격이 연이어지며 점점 호흡이 가빠질 무렵.
세 사람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훌쩍 물러났다.
볼프만의 불꽃이 때마침 데르트를 삼켰다.
⌙해치웠나……?
순간적인 기대를 품었지만, 잠시 후 불꽃에서 걸어 나오는 데르트.
머리털 하나 타지 않은 모습으로 불길을 산책하는 데르트를 본 사람들의 머릿속에 끝이라는 통일된 생각이 떠올랐을 때였다.
평소보다 두어 배는 큰 백호의 마나 포가 데르트에게 적중했다.
마나 포에 맞은 데르트가 바닥에 선명한 11자를 그리면서 밀려나길 잠시 마나 포를 데르트가 배구공 띄우듯 위로 쳐 냈다.
마나 포가 유성우가 되어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데르트가 태연자약한 얼굴로 다시 공격대를 바라봤다.
장난도 여기까지라는 듯.
숨통을 끊기 위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우뚝.
⌙근데 저 녀석 왜 안 움직여?
데르트가 돌연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한참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 * *
치열한 공방 속에서 회심의 기회를 엿보고 날린 마나 포가 유성우처럼 하늘에서 내렸다.
장민주도 패배를 직감했다.
눈앞의 적은 너무나도 강했다.
SS급 각성자를 장난감 다루듯 하는 모습은 고양이 앞의 생쥐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이대로 녀석의 여흥이 끝나면 다 죽는다, 그런 확신이 들었을 때였다.
우히히히히힝.
장민주의 머릿속에 이 같은 소리가 들려온 다음 순간이었다.
극지방의 오로라처럼 찬란한 빛의 장막이 주변으로 생겨났다.
“이게 뭐지?”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공대원들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데르트의 상태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우리가 안 보이는 건가?”
자신들을 놔두고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게 그런 것 같았다.
푸히히히히힝.
장민주가 측면에 서 있던 유니콘을 바라봤다.
“혹시 네가 한 거니?”
공대원들의 시선도 유니콘을 향했다.
“그렇군, 이 녀석 짓이란 말이지?”
환상의 일각수 유니콘.
익히 사람들에게 알려진 유니콘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데르트의 반응은 딱 신기루에 홀렸다가 사라진 오아시스를 본듯한 그런 모습이었으니까.
“이봐! 놈이 온다.”
샤오첸의 말에 유니콘에 정신이 팔렸던 공대원들이 데르트를 바라봤다.
정말로 데르트가 장막을 향해 직선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대로면 잠시후 데르트가 이 안으로 들어올 상황이었다.
데르트가 가까워지며 공대원들이 들고 있는 병기를 꽉 쥐었다.
한 호흡 돌릴 시간이라도 번 것에 감사한 일.
다시 한 번 죽기 살기로 싸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쑤욱.
데르트가 장막 안으로 들어오는 듯하더니 한순간에 반대편 끝으로 통과됐다.
마치 이곳만 공간이 격리된 듯한 모습이었다.
데르트의 시도는 그 뒤로 몇 번 더 이루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
턱 주변을 쓰다듬던 데르트가 결국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양반다리로 앉았다.
들어오는 건 포기한 것 같았지만, 저 앞을 지키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공대원들이 그제야 안심하고 철퍼덕 쓰러졌다.
“하…….”
“어찌 됐든 목숨 부지는 한 것 같구만.”
장민주가 위기를 넘기게끔 도와준 유니콘에게 말했다.
“고마워.”
푸히히히힝.
백호도 새끼고양이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장민주가 잠시 후 구석에서 지혈을 하는 스타크를 발견하고는 백호에게 물었다.
“저 사람 치료할 수 있을까?”
일전에 자신의 팔을 낫게 해 준 백호의 치유 능력을 본 적이 있었다.
백호가 스타크에게 천천히 걸어가더니 잠시 후 꼬리로 잘린 팔을 감쌌다.
초록색 반딧불 같은 마나 입자가 하나둘 모여들더니 팔의 형태를 갖추어 갔다.
1분쯤 지나자 스타크의 팔은 완치된 상태였다.
치료를 마친 백호가 고양이 자세로 하품했다.
스타크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장민주에게 말했다.
“놀랍군, 이 정도 치유 능력도 갖추다니…….”
스타크가 장민주의 백호를 보며 말했다.
“그 녀석이 백호인가?”
“네.”
“은혜는 잊지 않겠네.”
스타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출혈이 심해 조금 어지러웠지만, 그대로 조금 지나니 참을만한 수준이었다.
스타크가 말했다.
“여기를 벗어날 방법은 없겠지?”
“아쉽지만요.”
지금으로써는 데르트가 자신들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가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두어 시간쯤 시간이 흘렀다.
데르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먼 곳에 시선을 던지던 데르트가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라졌다.
“뭐야, 어디 간 거지?”
“그게 중요해? 이 틈에 빨리 벗어나는 게 중요하지.”
“스타크,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스타크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술을 뗐다.
“유인책일 수도 있으니 조금 기다려 보지.”
스타크의 말이 끝나기 끝나자마자였다.
쿠구구궁.
산사태라도 일어난 듯한 소음과 함께 저 멀리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 * *
주상혁은 이틀간 던전 브레이크 안에서 지냈다.
던전 브레이크를 공격대가 처리하기 전에 빨리 퀘스트를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잠도 거르고 몰두한 것이었다.
Q. 기경팔맥 봉인의 단서 [Skill].
임맥: 1221/1000.
독맥: 992/1000.
충맥: 1136/1000.
대맥: 1250/1000.
음교맥: 909/1000.
양교맥: 1310/1000.
음유맥: 987/1000.
양유맥: 945/1000.
“음, 이번엔 꽝이네…….”
퀘스트에 몰두하면서 주상혁이 알아낸 게 있다.
각 환자당 보랏빛 혈 자리는 하나라는 것.
또 하나는 보랏빛이 없는 봉인 혈을 짚더라도 효과는 볼 수 있을지언정 수치는 오르지 않는다는 것.
한마디로 완성한 임맥이나 충맥 같은 혈 자리를 보유한 환자가 걸리면 말 그대로 꽝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건 당첨이네.”
조금 전에 꽝과는 다르게 당첨을 고른 주상혁이 입꼬리를 올렸다.
주상혁이 음교맥을 확인하고 콕 짚었다.
『Lv.71(-7) …….』
레벨이 제법 높던 각성자의 레벨이 대폭 하락했다.
고작 음교맥 하나 짚었을 뿐인데 대단한 효과였다.
믿음직한 효과에 주상혁이 흡족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웬 비행기?”
주상혁이 던전 브레이크 영역에서 지낸 지도 오늘로 사흘째다.
근처에 공항이 있다지만, 비행기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의아했다.
퍼어어엉.
“허…… 뭐야 저건.”
웬 비행기인가 싶어 유심히 지켜보고 있자니, 잠시 후 도쿄타워가 그대로 녹아 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주상혁이 깜짝 놀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거 시간이 얼마 없는 거였어?”
당연한 말이지만, 이틀이 지났다. 주상혁의 휴대폰은 방전된 지 오래였고 외부 상황을 알 리가 없었다.
“어쩐지 조용하더라니…….”
난데없이 도쿄 쪽부터 손을 쓰기 시작한 것 같았다.
“환자…… 다음 환자는 어딨냐?”
닥치는 대로 도쿄를 누비며 수치를 채워갈 때였다.
연달아 들려오던 전투 소음이 뚝 하고 끊겼다.
“설마…….”
유성우 비슷한 폭발이 있고 바로 다음 순간 소리가 뚝 끊기자 괜히 불안해졌다.
“보스를 잡아 버린 건가?”
만약 그렇다면 곧이어 잔당 처리를 하기 시작할 테고 이젠 정말 시간이 얼마 없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퀘스트를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모를까 이대로 실패하면…….
“억울해서 잠 못 잔다.”
퀘스트가 끝나면 치킨에 맥주 한 캔 조지고 기분 좋게 자려던 생각을 이룰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건 도심 쪽뿐인데…….”
재수 없으면 공격대랑 마주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던 주상혁이 결국 도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진원지에 가까워질수록 몬스터와 환자가 많아졌다. 그만큼 번거롭기도 했지만, 수치도 빠르게 채워져 갔다.
음교맥: 979/1000.
“좋아, 이제 음교맥만 어떻게 채우면 되는데…….”
한 시간쯤 발에 불나듯 움직이던 주상혁이 두리번거리다가 멈칫했다.
눈앞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갈색 피부의 남성이 나타난 이유였다.
“뭐지 이 신박한 변태는?”
바바리맨도 코트 정도는 걸치는 요즘 그냥 팬티 한 장 걸치지 않은 나체라는 게 당혹스러웠다.
『Lv.111 데르트[데스 모스].』
자유분방한 복장에 놀란 주상혁이 레벨을 확인하고 한 번 더 놀랐다.
“세 자리…….”
당연한 말이지만, 아르돈을 제외하면 처음 보는 숫자였다. 아니, 그 아르돈조차도 한참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몬스터겠지?”
괄호 안에 ‘데스 모스’라는 단어가 있는 걸로 봐서는 확실해 보였다.
―……그놈이 아닌가?
“그놈?”
―자비를 베풀어,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 주마.
제법 건방진 녀석의 대사에 너스레 떨려다가 주상혁이 화들짝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데르트의 속도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안 돼. 당한다…….’
일순간에 파고든 데르트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한다고 주상혁이 판단했을 때였다.
번쩍.
『교황 아르돈의 주술반지.』
주상혁의 손가락에 끼어 있던 반지가 빛을 내뿜더니 데르트를 밀어냈다.
콰과광.
날아온 속도 그대로 역으로 날아간 데르트가 부딪히며 건물 하나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모습이 보였다.
‘주술이란 게 이거였나?’
덕택에 위기를 넘긴 주상혁이 주주에게 말했다.
“주주, 안개.”
주주가 레벨이 떨어진 탓인지 끙끙대다가 겨우 푸른색 안개를 주변에 뿌렸다.
조금 전 충격 정도에는 생채기 하나 없던 데르트가 안개에 닫자 느려졌다.
‘느려져도 저 정도면 얼마나 빨랐던 거야?’
방어선에서 목격했던 어중이떠중이들이랑은 다르게 느려졌음에도 육상선수만큼이나 빨랐다. 하지만…….
“너, 잘 걸렸다.”
지금껏 봉인의 혈 자리를 사용하고 싶었던 주상혁에게 딱 좋은 실험 재료였다.
데르트의 팔맥 중 두 곳을 주상혁이 봉인했다.
『Lv.100(-11) 데르트 [데스 모스].』
프스스스스…….
『Lv.69 청운해태』
때마침 주주의 레벨이 69로 변하면서 안개가 주주의 몸으로 빨려드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 정도여도 이미 충분해.”
『Lv.103 주상혁.』
주상혁의 풀 도핑 레벨은 103.
레벨이 비슷해진 녀석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왜, 뭐가 잘 안 되냐?”
레벨이 갑자기 하락해 당황해하는 데르트에게 접근해 또다시 혈 자리를 짚었다.
Lv.93(-18)…….
주상혁과 충돌하면 충돌할수록 데르트의 레벨이 빠르게 하락했다.
Lv.85…….
Lv.77…….
Lv.69…….
주상혁의 속도에 어느덧 따라오지 못하던 데르트가 당황해 두리번거릴 때였다.
데르트의 팔이…….
푸우우우…….
피 분수와 함께 하늘로 떠올랐다.
* * *
데르트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30분.
처음 있었던 굉음 말고는 추가적인 소음이 들려오지 않자 공격대는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 거지?‘
함정이라면 가만히 있어야 했고 그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수송선을 대기시킨 공항으로 가서 탈출할 절호의 기회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스타크의 선택은…….
“증원을 기다린다.”
스타크의 판단은 합리적이었다.
지금의 상황은 미국도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자국에서 증원이 올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패배를 맛보고 이곳에 움츠리고 있다는 게 수치스러웠지만, 무리해서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스타크의 생각대로 불과 몇 시간 뒤 미국은 빠른 반응을 보였다.
한 번도 미국을 벗어난 적이 없던 최강의 각성자 마이클을 파견한 것이었다.
턱수염이 까끌까끌하게 자란 중년 남성 마이클의 작전 목표는 하나.
스타크의 구출이 아닌 던전 보스 데르트의 사살이었다.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스타크의 구출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날 해 질 녘 마찬가지로 도쿄에 진입한 마이클은 베테랑답게 차분한 시선으로 도쿄를 훑었다.
‘놈은…….’
감각을 최대로 끌어 올려 마나를 감지하려 해 봤지만, 녀석으로 추정되는 마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나를 갈무리한 건가?’
하긴 몬스터답지 않게 겉모습부터 인간과 흡사한 지성을 가진 녀석이다.
마나를 감추었다고 한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이클이 걷기 시작했다.
날아드는 몬스터는 주먹으로 가볍게 터트려 처리하면서도 언제 습격당해도 대비할 수 있도록 데르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마이클이 잠시 후 공격대와 합류했다. 마이클이 지급받은 무전기에 대고 속삭였다.
“여기는 마이클, 본대와 합류했다. 지금부터 수색을 시작하겠다.”
마이클이 본대를 이끌고 데르트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1시간쯤.
수색에 전념하던 마이클은 표정을 구겼다.
한쪽 팔과 목이 떨어져 나간 데르트의 시체 때문이었다.
‘누구 짓이지?’
시체를 보아하니 거의 학살에 가까운 전투였음이 분명했다.
마이클이 스타크를 바라봤다. 짚이는 사람이 있느냐는 의미였다.
적잖게 당황한 얼굴의 스타크가 시선을 느끼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긴 짚이는 곳이 있을 리 없나?’
보스가 누군가에게 이미 죽은 줄 알았다면 애당초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마이클이 데르트의 시체에 시선을 주다가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녀석이 나타났나 보군.”
* * *
그날 저녁.
던전 보스 데르트의 사살 소식이 전 세계에 퍼졌다.
유감스럽게도 보스를 처리한 공로자는 주상혁이 아닌 마이클이 되었다.
애초에 중간부터는 외부 송출을 차단한 지 오래였다.
공로자를 바꿔치기하는 것쯤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역시 마이클.
⌙괜히 세게 최강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에 비해 스타크는? 그냥 얼굴만 반반한 동네 형인 걸로.
데르트의 압도적인 무용을 봤기 때문인지 인터넷은 온통 마이클에 대한 추앙뿐이었다.
기사를 쓱 둘러보던 미츠오가 표정을 구겼다.
‘반응이 없군.’
혹시라도 거짓 기사를 내면 모습을 감춘 당사자가 정체를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렸지만, 반응이 전혀 없었다.
‘도대체 누구지?’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미츠오는 내심 기뻤다.
정체불명의 각성자가 정황상 일본인일 확률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이 가져다준 이득이 상당하군.”
사토를 비롯한 SS급 각성자에 준하는 전력이 세 명이나 추가된 것도 모자라서 수수께끼의 각성자의 존재까지 깨닫게 해 줬다.
“어쩌면 미국을 뛰어넘는 것도 일이 아니겠어.”
미츠오가 그답지 않게 집무실이 떠나가라 웃었다.
* * *
주상혁은 그날 데르트를 처리하고 곧바로 퀘스트를 마쳤다.
전이 아티팩트가 있었기에 들키지 않고 방어선을 통하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와 푹 쉰 주상혁도 데르트에 대한 기사를 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음…… 이렇게 발표가 난 건가?”
해치웠던 녀석이 던전 보스라는 건 직감으로 알 수는 있었지만, 발표가 이렇게 날지는 몰랐다.
하지만 딱히 분하거나 억울한 기분은 아니었다.
어차피 주상혁의 목적은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닌 조용히 지내는 것.
의심받지 않고 잘 넘어갔다니 다행이란 기분이 먼저였다.
『교황 아르돈의 주술반지』
‘근데 신기하단 말이지…… 어떻게 알았던 거지?’
결과적으로 아르돈이 넘겨준 반지는 그의 말대로 주상혁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되었다.
그날 주상혁의 목숨을 구하고 찬란한 빛을 잃어버린 반지를 바라보며 고민하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나중에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네.”
왕!
주상혁의 고개가 돌아갔다. 주주가 밥을 더 달라고 보채는 소리 때문이었다.
주주가 원하는 대로 밥을 주고는 주상혁이 생각에 잠겼다.
『Lv.69 청운해태.』
‘그러고 보니 우리 주주도…….’
이번에 제법 고생해 줬다.
잃어버린 레벨을 복구시켜 주기 위해서라도 맛있는 걸 몽땅 먹여 주고 싶었다.
“슬슬 사용할 때가 된 건가?”
기존에 사 뒀던 약재가 충분해서 아직까지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지만, 협회의 아이디 카드를 슬슬 사용할 때가 온 것 같았다.
할짝할짝.
밥을 다 먹고는 물을 먹는 주주를 보고는 주상혁이 퀘스트 창을 켰다.
Q. 새로운 경지 [전직 퀘스트] (완료).
“이쪽도 이제 끝내 볼까?”
한숨 거하게 자고 일어났으니 퀘스트를 결산할 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