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4
chapter 3
의외로 대리 판매인을 쉽게 구한 주상혁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이제 재료만 모으면 매듭 풀리듯 모든 일이 풀려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던전에 주상혁이 진입했을 때, 주상혁은 미뤄뒀던 고질적인 문제를 떠올렸다.
‘이거 진짜 굿판이라도 벌여야 하나……?’
정말로 이게 이래도 되나 싶은 심정마저 들었다.
“또 사막이라니…….”
주상혁이 맥이 풀린 표정으로 정면을 봤다. 자라나는 새싹마저 말려 버릴 지옥 볕이 내리쬐는 사막이 보였다.
‘부탁이니까 보스 운이라도 좋아라…….’
빨리 오늘의 던전이 끝이 나길 바라는 게 이제 주상혁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쿠구구궁.
한 시간쯤 던전을 헤집은 시점이었다.
‘오……!’
앞열이 시끄러워지더니 곧이어 3m에 달하는 거대한 전갈이 모래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Lv. 33 킹 스콜피온.』
그나마 보스 운이 따라줬다.
어느 때처럼 한혜지를 지키며 주상혁이 전투를 지켜봤다.
‘근데 저 사람들 진짜 D급 맞아?’
협회에서 붙인 끄나풀은 D급치고는 과하게 잘 싸웠다.
기분 탓이 아닌 게 전투 계열 각성자만 봐도 같은 D급인 송치수 일행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이었다.
『Lv.28 이연희.』
‘뭐, 레벨은 확실히 더 높긴 한데…….’
솔직히 이게 6레벨 남짓 차이의 갭이라면 놀라울 것 같긴 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만 봐도 단번에 전갈의 꼬리를 얼려 버리는 마법계 각성자의 모습.
또 그 꼬리를 단숨에 박살 내 버리는 전투계 각성자의 모습도 그랬다.
여세를 몰아 전갈의 머리 위에 올라타는 전투계 각성자의 모습이 보였다.
꼬리를 잃자 패턴이 단조로워진 전갈의 약점을 노린 듯했다.
‘진짜 쌀벌하다, 살벌해.’
머리를 주먹질 당할 때마다 전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십여 초간 지켜보며 상황을 파악하던 주상혁은 직감했다.
‘슬슬 끝인가?’
저 상태라면 당장 몇 십 초 후에 전갈이 서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언제쯤 전갈이 쓰러질까 주상혁이 그것만 기다릴 때였다.
‘어……?’
전갈이 양 집게를 번쩍 들어 올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비장함이 느껴졌다.
감춰 뒀던 한 수 같은 느낌.
머릿속에 의아함이 생겼다.
전갈의 집게는 전갈의 신체 구조상 머리 부분까지 닿지 않는 이유였다.
‘도대체 뭘 하려고?’
주상혁이 혹시나 있을 사태를 대비해서 긴장했다. 분명히 무슨 일이 벌어지긴 벌어질 거라고 직감한 것이었다.
잠시간 긴장감을 유지한 채 전갈을 노려보던 주상혁이 ‘엥?’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두두두두.
‘땅을 판다고?’
‘이 타이밍에 어째서?’라는 의문이 드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빠르게 피어나는 흙먼지가 주변을 덮어갔다.
점점 짙어지던 먼지가 완전히 시야를 가릴 때까지는 정말 한 순간이었다.
“이게…… 곱게 죽어!”
전갈과 사투를 벌이는 전투계 여성 각성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잠시 후였다.
쿠르르릉.
‘뭐야, 이 소린……?’
마치 천둥소리처럼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지?’
주상혁이 소리의 근원을 찾다가 발아래로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공대원 중 누군가의 경고가 들렸다.
“모두 피해 무너진다!”
주상혁도 밑으로 빠르게 스며들어 가는 모래를 목격하고 피하려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주변 일대가 일제히 싱크홀처럼 동시에 내려앉았다.
“…….”
거대한 굉음이 스쳐 지나간 그곳엔 광활한 사막이 여느 때처럼 존재할 뿐이었다.
* * *
으윽…….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뒤통수에서 통증을 느낀 주상혁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준혁 씨! 정신이 드세요?”
주상혁이 한혜지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했다.
“여긴 어딥니까……?”
“모르겠어요.”
한혜지의 답을 들은 주상혁이 ‘웅웅’ 울리는 목소리를 느끼고 주변을 살폈다.
빛 하나 스며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동굴.
석벽으로 된 통로 벽에는 유적을 연상시키는 무성한 이끼와 덩쿨이 보였다.
‘사막의 지하에 이런게 있었던 건가?’
주상혁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아마도 전갈의 마지막 행동은 이 유적으로 도망치기 위함인듯했다.
주상혁이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요?”
한혜지의 고개가 저어졌다.
“모르겠어요. 아마도 이 모래 너머에 있지 않을까요?”
주상혁의 뒤편에는 통로를 가로막은 모래가 한가득이었다. 모래 너머에서는 그 어떤 작은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통로를 가로막은 이 모래의 벽이 가벼이 볼 수준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주상혁은 떨어질 때 한혜지를 끌어안았다.
한혜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낙하의 충격으로 혹시나 외상이나 내상이 생겼을 때 상처를 회복하려면 그녀가 다쳐서는 곤란한 이유였다.
“괜찮습니다. 일단 둘 다 무사하면 됐어요.”
주상혁이 자신의 머리를 뉘고 있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은 반으로 깨져 있었지만 다행이었다.
번쩍.
다행히 작동하는 후면 손전등을 들고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조금 조사해 보죠. 혹시 다른 출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네.”
주상혁이 한혜지와 함께 걸으며 생각했다.
‘근데 다른 포탈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개죽음.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보스를 해치운 던전은 평균적으로 이십사 시간 남짓 유지되다가 일제히 포탈과 함께 사라진다.
만약 주상혁과 한혜지가 없어진 줄 모르고 보스를 이미 해치운 상태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몇 시간 뒤 던전과 함께 주상혁은 개죽음당할 운명이었다.
‘다음 생에도 금수저로 환생하려나?’
주상혁이 벌써부터 재수 없는 생각을 했다.
‘또 환생을 할지는 의문이지만 한다면 금수저로 태어나고 싶네…….’
최근에 조금 꼬인 감이 있었지만, 솔직히 이번 생은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
먹고살기 위해 무언가를 죽을 듯 살 듯 연마할 노력도 필요 없었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맛있는 밥이며 다양한 오락거리가 방안에 즐비했으니 말이다.
한혜지가 말했다.
“저희 나갈 수 있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었다. 괜히 한혜지가 동요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귀찮은 일이었다.
‘근데 이거…….’
옮기던 걸음 속도를 늦추고 벽을 유심히 바라봤다. 한혜지가 주상혁의 걸음이 미세하게 느려진 걸 느꼈는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이끼가 늘어난 듯해서요.”
“어, 그러고 보니…….”
처음엔 절반쯤 채우고 있던 이끼는 이제 돌벽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끼투성이였다.
주상혁이 이끼를 유심히 살피며 걷고 있을 때였다.
“어? 준혁 씨 저기!”
주상혁이 한혜지의 말을 듣고 시선을 통로로 옮겼다. 미세한 빛이 보였다.
‘뭐야? 어째서 빛이?’
혹시나 출구일까 싶은 생각에 주상혁이 통로 끝으로 달렸다.
통로 끝에는 굵은 넝쿨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주상혁이 악력으로 뜯어 버리고는 넝쿨 너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흠칫.
드넓은 공터를 본 주상혁이 움찔하며 굳었다.
『Lv. 48 스톤골렘.』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정보가 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 *
엄청난 넓이의 원형 공터.
공터는 어지간한 광장을 연상시킬 만큼 넓었다. 공터 중앙에는 10m 높이로 솟은 구조물이 있었고 스톤골렘은 바로 그 위에 있었다.
‘워프 포탈?’
세 방향으로 계단이 놓인 구조물은 게임에서나 보던 워프포탈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물론, 포탈은 보이지 않았다. 닮은 건 생김새뿐이었다.
주상혁이 압도적인 위엄을 뽐내는 5m 크기의 스톤골렘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근데 저게 뭘까요?”
뒤늦게 도착한 한혜지가 주상혁을 스쳐 공터로 걸음을 옮겼다. 주상혁이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네?”
주상혁이 말했다.
“저거 골렘이에요.”
“네?!”
한혜지가 화들짝 놀랐다.
“지, 진짜요? 아, 아무리 봐도 그냥 동상인데요?”
부정하고 싶은 한혜지의 마음은 이해한다.
솔직히 말해서 주상혁도 눈으로 보이는 정보가 아니었다면 그냥 동상이겠거니 생각하고 접근했을 것이었다.
골렘이라면 재질에 따라 난이도가 갈린다. 하지만 그 어떤 골렘이든 D급던전의 몬스터는 아니었다.
골렘은 그 정도의 위용이 있는 몬스터였다.
“어, 어떻게 하죠?”
“일단 침착하시고 기다려 보세요. 아마도 우리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 이상 움직이지는 않을 거 같으니까.”
제법 시끄럽게 떠들었음에도 아직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스톤골렘의 모습.
아마도 이 유적의 파수꾼 성향을 가진 골렘일 확률이 높았다.
한혜지가 주상혁의 말을 듣고 얌전해지자 주상혁이 고개를 들었다.
‘빛은 저기에서 들어오는 거였나?‘
스테인드글라스 재질의 천장이 보였다.
빛은 그곳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지하 유적인 만큼 천장도 모래에 덮여서 많은 양의 빛은 아니었다. 일부 덮이지 않은 곳을 통해 미약한 빛이었다.
‘저기로 나갈 수 있으려나?’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올라갈 수만 있으면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심히 관찰하던 주상혁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높군…….’
40m도 넘어 보이는 천장의 높이는 각성자라 할지라도 오를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주상혁이 결국 다시 스톤골렘을 바라봤다.
‘한마디로 저걸 쓰러트려야 한다는 건데…….’
주상혁이 한혜지를 의식했는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테이터스.“
스테이터스.
Lv.28 주상혁 (환생 의원).
―능력치
힘: 45 / 민첩: 43 /지식: 38 /행운: 37
회복: 13% / 체력: 88.
방어: 13 / 마나: 66 / 명성: 25.
―스킬
Lv.1 초급 의술 [passive].
Lv.5 초급 조제술 [passive].
Lv.1 초급 진맥 [active].
Lv.1 초급 침술 [passive].
오랜만에 켜 보는 스테이터스는 레벨 이외의 것은 변한 게 없었다.
‘어떻게 한다…….’
스테이터스를 얼핏 봐도 스톤골렘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48레벨의 스톤골렘이라면 각성자로 따지면 모르긴 몰라도 B급은 거뜬한 수준일 것이다.
‘뭔가 방법이 없나?’
주상혁이 스테이터스를 하나하나 살펴보다 스톤골렘을 바라봤다.
‘잠깐?’
자세히 보니 스톤골렘 뒤편에 문이 존재했다.
‘구태여 쓰러트릴 필요까지는 없는 건가?’
자신이 스톤골렘을 묶어 놓는 동안 한혜지를 보낸다. 그리고 한혜지가 통과하면 자신도 통과한다.
나름 두루뭉술한 작전의 틀을 세운 주상혁이 스테이터스를 보며 구체적인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역시 희망이 있다면 스킬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스톤골렘과 주상혁의 레벨 차는 거의 20레벨에 근접한다.
한혜지가 문까지 뛰어가는 시간이라도 벌려면 적어도 지금 상태로는 안 됐다.
주상혁이 첫 번째 스킬, 초급 의술을 클릭했다. 스킬의 구체적인 정보가 펼쳐졌다.
Lv.2 초급 의술 [passive].
「초급 의술은 환생의원 주상혁의 모든 스킬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치는 스킬입니다. 초급 의술의 레벨이 올라가면 의술과 관련된 모든 스킬의 효율이 증가합니다.」
[보너스 효과: +11%]―초급 의술의 레벨은 조제술, 진맥, 침술의 평균 레벨로 측정됨.
―의술의 기본이 되는 세 개의 스킬이 일정 레벨 이상 돌파했을 때 하급으로 업그레이드됨.
막상 자신의 스킬이면서도 지금에 와서야 스킬을 확인해 본 주상혁이 다음 스킬을 확인했다.
Lv.5 초급 조제술 [active].
조제술을 보자마자 주상혁이 고개를 저었다.
약을 만드는 기술이 지금 상황에 필요할 리 없었다. 주상혁이 다음 스킬로 눈을 옮겼다.
Lv.1 초급 진맥 [active].
‘진맥은…….’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스킬이지?’
주상혁이 침술을 꾹 하고 터치했다.
진맥할 대상과 접촉해 주십시오.
‘접촉하라고?’
주상혁이 조용히 옆에서 기다리는 한혜지에게 말했다.
“혜지 씨.”
“네?”
“잠깐 손 좀 내밀어 보실래요?”
한혜지가 한쪽 팔을 내밀었다.
“이러면 되나요?”
“네.”
손목을 진맥하기 위해 주상혁이 한혜지의 몸을 잠깐 접촉했을 때였다. 구태여 손목을 통해 진맥하지 않았음에도 눈앞이 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Lv.18 한혜지 (정상).』
―불안을 느끼고 있다.
―창피함을 느끼고 있다.
―주상혁의 눈치를 보고 있다.
한혜지의 이름 옆에 상태가 떠오르며 작은 메시지 하나가 새롭게 생겨났다.
‘근데 창피하고 눈치를 보고 있다고? 왜?’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였지만 일단 메시지는 접어놓고 주상혁이 본론으로 돌아왔다. 진맥의 효과는 이게 다가 아니었던 것.
한혜지의 몸이 인체모형처럼 입체적으로 보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존재하는 붉은 반점과 푸른색 반점을 하나씩 확인하던 주상혁이 생각했다.
‘혈 자리인가?’
주상혁이 모르는 곳도 종종 보였지만 확실했다.
아마도 붉은 점의 위치를 볼 때 사혈(死穴), 침을 놓았을 때 부정적인 효과를 보이는 혈 자리였고 반대로 푸른색은 생혈(生穴)로 짚었을 때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는 혈 자리였다.
“꽤나 좋은 스킬이네.”
몬스터에게도 적용이 될지 모르겠지만 된다면 유용할지도 모를 스킬이었다.
“저, 준혁 씨?”
생각을 하던 주상혁이 한혜지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팔을 놓았다.
“아, 감사해요.”
주상혁이 팔을 놓자 어느새 한혜지는 평소의 모습처럼 돌아와 있었다. 진맥의 유지는 접촉한 순간에만 유지되는듯했다.
주상혁이 마지막 스킬을 확인했다.
Lv.1 초급 침술 [active].
‘이건…….’
조제술과 마찬가지였다. 구태여 말하자면 이 타이밍엔 쓸모가 없어 보였다.
한혜지에게 시침을 해서 레벨을 올린다는 사용처는 있겠지만 그것뿐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한 방을 맞으면 그 시점에서 끝이야.’
한혜지가 레벨 업을 해서 치유력이 올라가더라도 어디까지나 주상혁이 살아 있을 때나 효과를 본다.
하지만 골렘과 주상혁의 레벨 차이를 고려하면 치료할 틈도 없이 그대로 사망일 확률이 높았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지금 시점에서 괜히 한혜지를 레벨 업 시킬 필요가 없었다.
‘스킬 쪽은 별것 없는…….’
주상혁이 결국 미련 없이 침술에 대한 가능성도 접어 버리려다가 중얼거렸다.
“……게 아니네?“
주상혁이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시도해 봐도 좋은 방법이 떠오른 이유였다.
잠시 후였다.
웃통을 벗은 주상혁이 양반다리로 앉았다. 한혜지의 목소리가 주상혁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렇게 들고 있으면 되나요?”
“네, 그대로 움직이지 말고 들고 계셔 주세요.”
고개를 돌린 것도 모자라서 눈알까지 끄트머리로 옮겨 한혜지를 눈에 담았다.
한혜지는 휴대폰셀프카메라로 주상혁의 등을 찍고 있었다.
주상혁이 침을 집어 들었다.
‘거울이 두 개가 있으면 더 편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한혜지의 휴대폰은 유적으로 떨어질 때 박살이 난 상태였다.
이 상태로 침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침술의 등급이 낮아 대상에게 영구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주상혁이 메시지를 무시하고는 그대로 자신의 등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침술을 사용합니다.
우려와는 다르게 주상혁의 시침은 비교적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카메라는 사실 거드는 용도였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Lv.33 주상혁.』
‘됐다…….’
초급의 단계에 머무른 침술인 만큼 어차피 곧이어 돌아갈 레벨.
하지만 주상혁은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그대로야.’
십여 분쯤 지켜봤지만, 레벨이 하락하지 않고 있었다.
‘침을 뽑기 전에는 내려가지 않아.’
전에 박상운에게 시험해 봤던 경험이 있었기에 떠올릴 수 있었던 발상이었다.
주상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준혁 씨 괜찮으세요?”
고개를 돌리니 걱정스러운듯한 얼굴의 한혜지가 보였다. 하긴 갑자기 침을 꺼내 자신의 등에 박기 시작하는 주상혁이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네, 괜찮습니다. 그보다…… 아시죠?”
“전투가 나면 저기로 뛰어가라는 거죠?”
한혜지의 눈은 스톤골렘 뒤편에 존재하는 닫힌 문을 향하고 있었다.
주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통과하면 말해 주시고요.”
한혜지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알았어요.”
주상혁이 한혜지의 말을 듣고는 가방에서 보충제를 꺼냈다. 보충제는 손바닥만 한 길이의 약통에 절반쯤 차 있었다.
‘얼마나 효과를 보려나?’
이미 보충제의 효과는 끝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 이상은 오르겠지……?’
주상혁이 불안감을 안고는 보충제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언제 먹어도 적응 안 되는 쓴맛이 입안 가득 풍겼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Lv.35 주상혁.』
‘2레벨…….’
주상혁이 안도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1레벨이나 겨우 오를까 싶은 시기였는데 약발이 떨어져 가던 시점에서 2레벨은 큰 수확이었다.
“후…….”
준비의 심호흡을 하며 스테이터스를 종료했다.
주상혁이 마침내 통로에서 나와 공터로 진입했다.
터벅터벅터벅.
골렘을 향해 직선으로 걷고 잠시 후.
중앙의 구조물을 기점으로 미약한 지진이 지면을 흔들었다.
구구구구궁.
골렘의 전신에서 돌 가루조각들이 바닥으로 부스럭대며 떨어졌다. 요란스럽던 공터가 다시 조용해졌다.
번쩍.
골렘의 눈에 푸른빛이 들어왔다.
“침입자…… 박멸…….”
주상혁이 황급히 말했다.
“혜지 씨!”
“알았어요.”
주상혁이 말하자 한혜지가 달리기 시작했다. 한혜지가 재빠르게 공터 외곽을 통해 달라기 시작했다. 골렘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주상혁이 어림도 없다는 듯 도움닫기와 함께 튀어 올랐다.
“그렇게는…….”
단번에 골렘 머리 앞으로 쏘아진 주상혁이 골렘의 머리통에 주먹을 날렸다.
“안 되겠다만!”
골렘이 주먹에 얻어맞고 두어 걸음 뒷걸음쳤다. 골렘의 얼굴이 반쯤 부서져 내렸다.
‘혹시 효과가 있나?’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이라고는 해도 의외로 대미지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해치워 버릴 의향도 있었다.
“강력한…… 물리 대미……지 발생. 대미……지 복구 시작…….”
골렘의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후두두둑.
조금 전 으스러트렸던 얼굴로 바닥의 돌조각들이 날아와 달라붙기 시작했다.
멀쩡해진 골렘이 다시 눈을 빛냈다.
“츳, 그럼 그렇지…….”
10레벨이나 차이 나는 상대다. 어찌 보면 쉽게 이기겠다는 생각이 과한 욕심이었다.
‘그래도 도발 하나는 제대로 먹힌 거 같네.’
조금 전 주먹으로 한혜지에 대한 경계는 사라진 듯 보였다.
“손상 복구 완료…… 침입자 박멸.”
쿵. 쿵. 쿵.
상처를 회복한 골렘이 주상혁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골렘의 걸음이 이어질때마다 공터를 거대한 울림이 가득채웠다.
주상혁이 골렘을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천천히 물러났다.
주상혁의 목적은 시간을 끄는 것이다. 녀석이 여유롭게 다가온다면 맞서 싸울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흠칫.
골렘의 눈이 한차례 빛난 다음이었다.
주상혁의 한눈에 들어오던 골렘이 갑자기 일순간에 거대해졌다. 골렘이 엄청난 스피드로 주상혁에게로 쏘아진 이유였다.
콰아앙.
간발의 차이로 옆으로 굴러 겨우 골렘을 피했다. 주상혁이 으스러진 공터의 벽을 바라봤다.
‘개 깜짝 놀랐네. 저 덩치에 저렇게 빨라도 돼?’
참고로 위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주상혁 대신에 아작 난 공터의 벽이 그것을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맞으면 무조건 끝이다.’
주상혁이 벽에서 주먹을 뽑고는 돌아서는 골렘을 봤을 때였다.
부웅.
“윽…….”
골렘의 주먹이 주상혁을 향했고 이번에도 겨우 몸을 틀어 피해 낸 주상혁이 전신을 스치는 풍압에 중심을 잃고 쓰러트렸다.
‘씁…… 혜지 씨는?’
위태위태한 상황과 달리 한혜지가 도착하기까지는 몇 초 정도 더 버텨야 할 것 같았다
‘두 방? 아니, 혹시 모르니까 세 방이다.’
그 정도만 피하면 한혜지는 문에 도착할 것 같았다.
부웅.
우선 측면으로 날아오는 주먹을 몸을 바짝 엎드려 주상혁이 피했다.
쿠웅.
이어지는 반대쪽 손으로 내려찍는 주먹을 옆으로 굴러 피했다. 흙자갈이 주상혁의 얼굴로 날아드는 게 충격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마지막은 뭐냐?’
올려다본 골렘의 양손이 번쩍 들리는 게 보였다.
씨익.
입꼬리를 올린 주상혁이 단박에 땅을 차고 골렘의 가랑이 사이로 몸을 날렸다.
쿠웅.
공터 전체를 울리는 굉음이 들려왔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더 이상 녀석과 싸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
주상혁이 한혜지가 서 있는 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골렘이 제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저 작은 문을 통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한혜지가 서 있는 문에 도착한 주상혁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뭐 하세요?”
아직도 낑낑대며 문을 미는 한혜지의 모습이 보였다.
울먹울먹한 얼굴의 한혜지가 말했다.
“준혁 씨, 이상해요. 문이 안 열려요.”
주상혁이 다급한 마음에 말했다.
“비켜 봐요!”
한혜지 대신에 주상혁이 밀어 봤지만, 정말로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상황 파악이 끝난 주상혁이 등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침입자…… 박멸.”
골렘의 주먹이 등 뒤에서부터 날아왔다.
콰앙.
* * *
보고를 들은 전동욱이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보고를 하던 관리부장 박창수가 말했다.
“주상혁 씨와 한혜지 씨가 던전을 돌던 중 조난당했다고 합니다.”
“조난이라뇨? 자세히 말 좀 해 보시죠.”
던전을 클리어하다가 조난당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이 없다.
굳이 고르자면 사망자 쪽은 찾기 쉬워도 조난의 경우는 드문 것이다. 설령 조난을 당하더라도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해서 던전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상황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박창수의 보고는 전혀 아니었다. 던전을 클리어했는데 조난자가 생겼다는 말이었다.
박창수의 긴 설명을 들은 전동욱이 말했다.
“그러니까 지하 유적으로 떨어지면서 토사물 건너편으로 두 사람만 떨어졌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전동욱은 주상혁이 아직도 꽤 희귀한 케이스의 특질계 각성자라는 것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높은 확률로 의심하고 있었다.
‘이대로 포기하긴 너무 아까워.’
전동욱이 말했다.
“던전을 클리어한 시점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한 시간쯤 지났습니다.”
D급 던전임을 감안했을 때 약 스물세 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럼 지금 협회 소속의 마볍계 각성자들 중에 대지 속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각성자는 얼마나 됩니까?”
“D급 열 명에 C급 두 명 정도입니다.“
“전부 투입합니다. 당장!”
* * *
간신히 한혜지와 함께 몸을 엎드려 골렘의 주먹을 피한 주상혁이 뒤편을 돌아봤다.
주상혁을 한 끗 차이로 스쳐 지나간 골렘의 주먹은 문을 정확히 가격하고 있었다.
‘저런 위력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정말로 의외였다. 골렘의 무지막지한 파괴력에도 꿈쩍도 하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문을 여는 건 포기한다.’
주상혁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렇게 된 이상 죽을 때 죽더라도 발악은 해 볼 생각이었다.
골렘이 통로에서 주먹을 빼내자 틈을 보고 있던 주상혁이 한혜지를 허리에 끼고는 튀어 올랐다.
갑자기 튀어나온 주상혁의 공격에 차마 대비하지 못한 골렘이 머리에 또다시 공격을 허용했다.
“물리 대미지…… 발생…….”
골렘의 머리를 발차기로 반쯤 아작 내고는 주상혁이 반대편에 착지했다.
한혜지를 내려놓고 머리를 복구하는 틈에 여세를 몰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격이 골렘을 때릴 때마다 다리가 빠르게 부서져 갔다.
“혜지 씨, 이렇게 된 이상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원해 주세요”
“네, 넵!”
안전거리까지 나름대로 전력으로 뛰어간 한혜지가 피가 철철 흐르는 주상혁의 주먹에 힐을 퍼부었다.
주상혁이 멀쩡해진 주먹과 발로 계속해서 공격했다.
조금 전 회복된 다리를 부수고 반대쪽을 부수면 또다시 회복된 반대쪽 다리를 부수는 것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허억, 허억.”
주상혁도 한혜지도 사람이었다. 채 5분이 지나지 않아서 공격이 느슨해졌다.
레벨의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난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주상혁의 공격이 골렘의 회복력을 따라가지 못하자 대미지를 복구한 골렘이 돌아서서 주먹을 내리꽂았다.
쿠웅.
“씹…….”
주먹을 뒤로 간신히 피한 주상혁이 얼굴로 튀는 돌자갈에 표정을 구겼다.
마지막까지 하던 발악도 마침내 끝이났다.
주상혁이 자신의 주먹을 바라봤다. 살가죽이 벗겨진 채로 치료가 덜 된 상태였다.
뒤편에 서 있는 한혜지를 보자 헐떡이는 모습이 보였다.
‘차라리 이렇게 될 거 침술이라도 사용할 걸 그랬나?’
하지만 이미 후회해도 늦은 상태였다.
쿵, 쿵.
주상혁이 공터를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번뜩 정신을 차렸다.
반쯤 부순 다리를 회복하고 어느새 다가오고 있는 골렘이 보였다.
‘뭔가 방법이 없나?’
압도적인 골렘의 위용을 넘을 방법이 필요했다.
침술, 보충제, 시선 끌기, 공격을 할 때도 하나씩 떠올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다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역시 끝…….’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통로를 통해 토사물이 있는 곳까지 뛰어가볼까 생각하던 주상혁이 멈칫했다.
“진맥.”
사람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면 역시 꽝이다.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진맥할 대상과 접촉해 주십시오.
주상혁이 골렘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주상혁이 역으로 다가오자 골렘이 걸음을 멈추고 노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부웅!
주상혁이 일정 거리까지 다가오자 골렘이 뭉게버릴 기세로 직선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휙, 콰앙.
주상혁의 뺨을 스치고 골렘의 주먹이 바닥을 직격했다.
후두두둑.
볼에서 붉은 피가 한가득 흘렀다.
볼이 따끔따끔 아리는 느낌. 골렘과 주상혁의 절대적인 능력치 차를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씨익.
주상혁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바닥에 박힌 골렘의 팔을 전력으로 때렸다.
골렘의 오른팔이 그대로 끊어져 내렸다.
“물리적 대미지 발생. 우완 동력구…… 손상, 수복…… 불가.”
“그래, 친절한 설명 고맙다.”
주상혁이 소매로 피를 닦아 내고는 몸을 날렸다. 이번엔 골렘의 반대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역시나 회복이 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Lv. 40(-8) 스톤골렘.』
높게 점프한 주상혁이 레벨이 하락한 골렘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팔이 사라진 이유인지 골렘이 머리만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릴 뿐 저항은 없었다.
“진맥.”
조금 전까지 주상혁의 눈에 보이지 않던 정보가 보였다.
『Lv. 40(-8) 스톤골렘 (동력 일부 마비).』
“유언이라도 있으면 어디 지껄여 보던가?”
진맥은 사람뿐 아니라 몬스터에게도 유효했다. 골렘의 몸이 입체적으로 변해 있었고 동시에 사혈(死穴)을 나타내는 붉은 점이 보였다.
앞으로 남은 붉은 점은 세 개.
동력원이 세 개 남아 있다는 소리였다.
골렘의 남은 세 개의 동력원이 있는 장소를 파악한 주상혁이 어깨에서 뒤편으로 내려섰다. 낙하하는 와중에 골렘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후렸다.
갑자기 한쪽 발을 잃은 골렘이 중심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쿠우우웅.
쓰러진 골렘의 남은 다리 위로 주상혁이 폴짝 뛰었다.
터벅터벅.
천천히 걷던 주상혁이 걸어가다가 강하게 발로 내리 찍었다.
부스럭.
어김없이 골렘의 다리가 바위 조각이 되어 흘러내렸다.
“대미지…… 대미지…… 동력원 대량 파손 발생…….”
주상혁이 골렘의 가슴 위에 서서 녀석이 말하는 말을 듣고는 발을 내려찍었다.
쿠웅.
공터에 충격음이 들리고 잠시 후였다.
쩌적, 쩌저적.
조금씩 금이 가던 골렘의 상반신 색이 변하더니 바위가 되어 이윽고 갈라졌다.
“유언치고는 재미 없구만.”
* * *
전투가 끝나자 주상혁이 깊은 심호흡을 내쉬었다.
“후…… 심장에 안 좋네.”
더 이상 스톤골렘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진맥을 사용하고 말고를 떠나서 솔직히 처음 스톤골렘의 주먹을 피했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만약 스톤골렘이 다가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아까 보였던 스피드를 더해서 공격해 왔다면 주상혁은 이기지 못했을 것이었다.
심호흡을 통해 어느 정도 심장을 진정시킨 주상혁이 눈앞을 바라봤다.
주상혁의 눈앞에는 알림창이 하나 존재했다.
스킬 점혈을 획득하셨습니다.
“점혈이라…….”
모르는 기술명은 아니었다.
다만 무협지를 통해서나 들었던 기술이었다. 주상혁이 과거에 알고 있던 기술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Lv.1 점혈 [active].
「점혈은 ‘침술’이라는 동양의학에서 파생된 기술입니다. 혈 자리의 기본적인 지식을 ‘전투’라는 방식으로 소화해 낸 방법이며 사용법에 따라서 상대방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도 있고 강한 대미지를 입힐 수도 있는 등, 다양한 응용이 가능한 기술입니다.」
점혈에 대한 정보를 읽은 주상혁이 입에 옅은 미소를 품었다.
“재밌네. 나중에 제대로 연구 좀 해 봐야지.”
점혈의 정보는 무협지에서 통하는 점혈 그대로의 정보였다. 실제로 이런 기술이 있는지는 주상혁조차도 모르던 일이었다.
주상혁이 점혈에 대한 확인을 마쳤을 때였다.
“준혁 씨!”
한혜지가 주상혁에게 달려와 안겼다.
“해치운 거 맞죠? 우리가 살아 남은 거죠?”
내색은 안 했지만, 불안에 떨고 있었던 한혜지가 기쁜 얼굴로 물어 왔다. 주상혁이 한혜지의 말에 답했다.
“네, 해치웠…….”
아니, 답하려고 할 때였다.
구구구궁…….
주상혁이 말을 다 끝맺기도 전이었다. 발밑이 강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는…….
‘뒤…….’
주상혁이 뒤로 휙 돌아섰다. 뒤편에는 골렘이 처음 서 있던 10m 높이의 구조물이 존재했다.
지진은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돌아선 주상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지직…… 지지지직…….
‘뭐야 진짜 포탈이었나?’
공터를 푸른빛으로 가득 채우는 포탈이 보였다. 구조물 위에 존재하는 세 개의 피뢰침 형태의 기둥에는 푸른색 마나의 전류가 어느새 흐르고 있었다.
구조물 중앙에 포탈이 생겨났다. 주상혁이 던전으로 들어올 때 사용하던 포탈과 비슷한 형태였다. 하지만 다른 점도 존재했다.
‘저긴…….’
포탈 너머의 모습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포탈의 반대편으로 생각되는 곳에서는 모래를 퍼 나르는 송치수 일행과 못 보던 각성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혜지도 그 모습을 봤는지 포탈로 걸음을 옮겼다.
“준혁 씨, 출구예요!”
주상혁이 한혜지의 팔목을 붙잡았다.
“혜지 씨 잠시만요.”
“왜요?”
신이 나서 포탈로 달려가려던 한혜지가 멈춰섰다.
주상혁이 어느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거 궁금하지 않으세요?”
고개가 향한 곳은 아까 스톤골렘의 주먹으로도 꿈쩍도 하지 않던 문이었다.
던전에서 발견한 유적을 통해 엄청난 아티팩트를 얻은 각성자의 사례도 분명히 존재하는 만큼 확실히 한혜지도 호기심이 생기긴 했다.
“어, 그렇긴 한데 못 열잖아요.”
“아니요, 이제 그렇지도 않습니다.”
한혜지에게 그렇게 말한 주상혁이 골렘이었던 바위 잔해로 걸어가더니 주먹질을 날렸다.
바위가 산산조각 나더니 안에서 물건 하나가 떨어졌다. 꽃 모양의 열쇠였다.
아까 골렘의 동력원을 확인할 때 우연히 발견했었다.
“확인해 보죠. 그 뒤에 나가도 늦지 않아요.”
한혜지가 조금 생각해 보는 듯하다가 말했다.
“음…… 알았어요.”
주상혁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혼자서는 조금 쫄렸기 때문이었다.
주상혁이 한혜지와 함께 열쇠를 들고 문으로 향했다.
‘아, 다시 긴장된다…….’
심장이 다시금 빠르게 뛰었다.
‘혹시나 더 강한 몬스터가 나오면 어쩌지?’
일반적인 D급 던전 수준의 몬스터라면 주상혁에게는 거뜬하다. 하지만 방금 스톤골렘을 쓰러트린 직후라 꼭 그 정도의 몬스터만 나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주상혁이 한혜지를 붙잡은 이유이기도 했다.
“후…… 그럼 넣습니다?”
주상혁이 꽃모양으로 비어있는 홈에 열쇠를 넣었을 때였다.
열쇠 구멍에서부터 철제문에 나 있는 홈을 따라 푸른빛이 흐르더니 문양이 떠올랐다.
‘튤립……?’
긴장감에 비해 약해 보이는 문양을 주상혁이 잠시간 보고 있을 때였다.
쿠쿠쿵.
거대한 소음과 함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주상혁이 표정을 와락 구기며 중얼거렸다.
“이런…….”
문은 놀랍게도 좌우로 열리고 있었다.
* * *
주상혁이 중얼거리고 잠시 후였다.
문이 활짝 열리고 몇십 초는 족히 지난 것 같은데 주상혁은 여전히 입구에 얼어붙어 있었다.
한혜지가 문 너머를 쓱 둘러보더니 말했다.
“음…… 별거 없는 거 같은데요?”
한혜지의 말에 주상혁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별것 없다고?’
『폴라나.』
『멜팅.』
『페냐.』
『갈랑.』
이 보물 창고를 보면서 이런 말을 뱉는 한혜지가 안쓰러웠다. 문 너머는 넓은 연병장 크기 수준의 화원이었는데 놀랍게도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약초들이었다.
마찬가지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스테인글라스 재질의 천장을 주상혁이 올려다보다가 걷기 시작했을 때였다.
“준혁 씨?”
주상혁이 걷기 시작하자 한혜지가 의아한 목소리로 불렀다.
“기왕 가는 거 조금 더 살펴보고 가려고요. 혜지 씨는 가려면 먼저 가세요.”
“음…….”
잠시간 생각하던 한혜지가 말했다.
“아니요, 저도 같이 볼래요.”
주상혁이 속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혜지를 붙잡는 게 아니었는데…….’
주상혁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이 연병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약초들은 지금 자신이 메고 있는 가방 말고도 인벤토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가방에 담으면 전부는 몰라도 상당한 양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한혜지에게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정당화 시키냐 하는 것이었다.
주상혁이 갑자기 화원에 피어 있는 꽃들을 꺾기 시작하면 한혜지가 그것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턱이 없었다.
‘사실대로 말할까?’
비밀을 지켜 주면 보상을 준다고 하면 덥석 물 수도 있었다. 보상으로 적합한 것은…….
‘침술…… 그래, 침을 놔 준다고 하자.’
침에는 엄청난 레벨 상승의 효과가 있다.
등급을 올려주겠다고 말한다면 한혜지가 딜을 거부할 리 없었다.
“저, 혜지 씨.”
“네?”
꽃을 둘러보던 한혜지가 주상혁을 바라봤다.
“오늘 이곳에서 있었던 일 비밀로 하면 안 될까요?”
“비밀이라면 골렘이라거나 그런 거 말인가요?”
“네…….”
주상혁이 정확히 짚어 오는 한혜지의 말에 땀을 삐질 흘렸다. 잠시간 생각하던 한혜지가 답했다.
“좋아요.”
더 복잡하게 이유를 물어 올 줄 알았던 주상혁이 ‘엥?’ 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네?”
“좋다구요. 비밀로 할게요. 근데 뭐라고 입을 맞춰야 할까요?”
주상혁이 말했다.
“그건 따로 생각해 둔 게 있는데 나갈 때 알려 드릴게요.”
“그래요, 그럼.”
한혜지가 꽃을 향해 쪼그려 앉자, 주상혁이 말했다.
“저, 근데 사실 그것 말고 다른 것도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하는데…….”
“어떤 건데요?”
“제가 폴라나 찾고 계신 건 아시죠?”
“네 당연하죠, 그거 때문에 던전도 D급으로 바꾼 거잖아요?”“사실 폴라나를 찾았습니다. 그것도 엄청 많이.”
“네? 어디요?”
한혜지도 폴라나를 꼭 한번 보고 싶었던 사람 중 하나이다. 한혜지가 엄청 많다는 폴라나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요.”
“그러니까 어디요?”
한혜지가 못 찾겠는지 주상혁을 바라봤다. 주상혁이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여기 있는 게 전부 다 폴라나예요.”
정확히는 폴라나를 비롯한 다른 약초들도 있었지만, 한혜지에게 자세한 것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네? 진짜로요?”
주상혁이 말없이 끄덕였다. 한혜지가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주변 흙을 들어내고 뿌리째 뽑아 든 한혜지가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정말이야…….”
방금 꽃의 모습과는 다르게 제비꽃 크기의 작은 풀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주변의 식물과 같은 모습으로 위장하는 식물.
적어도 한혜지가 알기로는 폴라나뿐이었다. 한혜지가 연병장의 크기를 가늠하더니 알아차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군요…….”
주상혁은 D급 던전으로 옮기자고 제안했을 무렵에 팀원들에게 폴라나에 대한 것은 협회 쪽 각성자들에게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아마도 주상혁이 비밀로 해 달라고 하는 건 비슷한 이유일 것이었다.
영리하게도 비밀로 해 달라는 이유까지 유추해 낸 한혜지가 말했다.
“알았어요. 이곳에서 있었던 폴라나에 관련된 일까지 전부 다 비밀로 해 드릴게요.”
한혜지가 화원을 쭉 둘러보고는 말했다.
“그런데 여기 있는 게 전부 폴라나라면 얼마나 할까요?”
한혜지의 말을 들은 주상혁의 표정이 구겨졌다. 은근슬쩍 돈에 대한 것을 짚어 오는 게 이제부터 한혜지의 본론이라고 생각한 이유였다.
‘역시 공짜로 해 주겠다는 건 아니겠지.’
당연한 일이다. 이유도 묻지 않고 편의를 봐 준다면 그쪽이 더 의심스러웠다. 한혜지 쪽도 마땅한 이익이 있는 편이 오히려 통제하기 좋았다.
“글쎄요, 수십억…… 아니, 수백억은 되지 않을까요.”
“그, 그렇게나 비싸요?”
“폴라나는 수요가 분명한 약초니까요.”
주상혁이 심호흡하고는 말했다. 번거롭더라도 더 큰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이곳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으니 피하는 것도 불가능.
주상혁이 직구를 던졌다.
“그래서 조건이 뭔가요?”
“네? 조건이라뇨?”
“비밀을 지켜주는 조건이요.”
한혜지가 멀뚱멀뚱 주상혁을 보다가 옅은 웃음을 그렸다.
“없는데요? 솔직히 수백억은 할거라니까 욕심이 나긴 하지만 애초에 준혁 씨가 아니었다면 살아남지도 못했을 텐데…… 그리고 심지어 이게 폴라나인지 알아보지도 못했는걸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수상했다.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한혜지가 유리한 고점을 잡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럼…… 정말로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겁니까?”
“음…… 아닌가? 역시 뭔가 받아 두는 게 좋으려나?”
‘이 여자가 지금 놀리는 것도 아니고…….’
주상혁의 타는 속도 모르고 장난치던 한혜지가 말했다.
“다음에 밥 한번 사세요. 맛있는 걸로.”
“밥이요?”
주상혁의 약간 심각해지는 얼굴에 한혜지가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말을 주워 담았다.
“아, 뭐 싫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요.”
“아니요 아닙니다. 꼭 사 드릴 테니 비밀만 지켜 주세요.”
뭔가 느낌이 찝찝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생각했던 손실보다 더 적은 손실로 대화를 마무리했다는 점은…….
‘좋은 거겠지?’
마음 같아선 한혜지의 본심까지 제대로 짚고 싶었지만, 주상혁이 생각을 접었다.
영리한 여자다.
어차피 목적이 있다면 비밀의 폭로가 아니라 자신에게 다른 형식으로 딜을 걸어올 것이었다.
“큼, 그럼 적당히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계세요. 최대한 빨리 채집해 볼 테니까.”
“네.”
주상혁이 구석으로 가서 잡히는 대로 뿌리째 뽑기 시작했다.
주상혁의 인벤토리에 약초로 가득한 가방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가득 찬 것을 넣고 비어 있는 가방을 꺼내 다시 채워 넣고의 반복이었다.
주상혁이 채집에 한창 열을 올릴 때였다.
“저, 준혁 씨!”
저 끝에서 한혜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이쪽으로 와보라는듯한 한혜지의 부름에 주상혁이 가방을 메고 뛰어갔다. 주상혁이 도착하자 한혜지가 말했다.
“이것 좀 봐봐요.”
한혜지가 가리킨 곳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깃털 펜과 굳어서 말라 버린 잉크. 그리고 제법 두꺼운 책이 존재했다.
주상혁이 호기심에 책을 잡았다.
“무슨 책일까요?”
첫 장을 펴서 읽던 주상혁이 말했다.
“일지네요.”
“일지요?”
“네, 여기요.”
주상혁이 책을 펴서 한혜지에게 보여 주자 유심히 보던 한혜지가 눈을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다.
“음…… 보여 주셔도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네?”
주상혁이 간혹가다 흐릿한 부분은 존재해도 평범하게 한글로 써진 책을 다시금 확인하고는 말했다.
“못 읽는다고요?”
“네,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걸요.”
“그, 그렇군요.”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영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혼자서 유심히 일지를 읽어 가던 주상혁이 말했다.
“저…… 그럼 염치없지만, 이거 제가 가져도 될까요?”
* * *
주상혁과 한혜지의 조난.
공대장 송치수는 이 사건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공대장이라면 눈앞의 보스가 아니라 지하로 떨어졌을 때 공대원부터 챙겼어야 했기 때문.
지면이 사라지며 낙하했을 당시, 유적에 떨어진 전갈은 이미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송치수는 등을 맡겼던 동료가 모두 무사한지 확인하지 않았다. 이건 송치수의 기준에선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다.
‘염병…… 뭐가 공대장이냐!’
입구에서 멋들어지게 명령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평소 연장자라는 이유로 공대장을 맡고 있는 건 아닌가 자신을 의심하던 송치수였기에 죄책감이 더했다.
‘준혁 군이었다면…….’
그래, 차라리 매번 신중하던 그가 공대장이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 같았다.
말없이 흙을 가랑이 사이로 퍼 넘기던 송치수가 멈칫했다.
“윽…….”
손끝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송치수가 손을 확인해보자 손톱 사이에는 돌조각이 박혀 있었다.
“…….”
돌조각을 빼 던지고는 송치수가 이미 피투성이의 손으로 다시 흙을 파기 시작했다.
“형님.”
송치수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허리를 폈다. 몸을 돌이키니 노일현의 모습이 보였다.
“협회 쪽 각성자가 보잡니다.”
삽을 가지러 갔던 노일현이다. 그런데 어째선지 노일현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송치수가 노일현 뒤편으로 시선을 던지자 작업팀장이 보였다.
지금 던전에서는 대규모 작업이 진행 중이다. 팀원의 조난을 알렸더니 협회에서는 고맙게도 대지 계열 각성자들을 파견해 줬다.
송치수가 작업팀장에게 다가가자 작업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슬슬 철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인가 싶은 송치수가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포탈이 생성되고 어느덧 시간은 스무 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
‘벌써 시간이…….’
송치수가 말했다.
“한 시간만 더 도와주쇼.”
D급 던전은 탈출 포탈이 스물네 시간 정도 유지되어 있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었다.
그럴 일은 거의 없지만, 어떨 때는 포탈 생성 스무 시간 후에 포탈이 사라지기도 한다. 아주 작은 위험이라도 있는 한 철수해야 하는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작업팀장이 송치수의 피투성이의 손을 보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치수의 저 손, 이미 동료였던 힐러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힐을 퍼부었음에도 다시 저 지경이 되도록 파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두 사람을 위해서 이 많은 사람이 위험에 노출될 수는 없습니다.”
이게 매뉴얼이었다.
“그럼 삼십 분이라도 좋수.”
“죄송…….”
송치수가 죄송하다고 말하려던 작업팀장의 멱살을 잡았다.
“이십 분.”
“면목 없습니다.”
작업반장을 바라보는 송치수의 타오르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잠시 후 송치수가 잡고 있던 멱살이 풀렸다.
“먼저 나가쇼. 나는 한 시간만 더 작업할 테니까. 그건 상관없겠지?”
노일현의 손에 들린 삽을 낚아챈 송치수가 말했다.
“일현이, 너도 팀원들 데리고 나가라. 괜히 말려들지 말고.”
송치수가 다시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철수를 준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송치수는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 저들의 말대로 안전을 위해서라면 지금 나가야 한다는 것쯤 알지만, 애써 그것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송치수가 무념으로 흙을 퍼낼 때였다.
푹, 푹.
옆에서 삽 박히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딱 한 시간 만입니다. 형님.”
“오늘 뒤풀이는 정준혁, 그 형씨도 꼭 데려갑시다.”
백진호와 노일현이었다. 송치수의 눈이 다시 살아났다. 자신에겐 아직 의리 빼면 시체인 의동생들이 있었다.
“그래.”
* * *
정신없이 폴라나를 채집하던 주상혁이 허리를 폈다. 넓은 화원에는 폴라나가 아직 한가득이었다. 주상혁이 채집한 면적은 거의 사분의 일쯤.
‘쩝, 아깝네…….’
이대로 보내면 다시는 보지 못할 화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작업은 여기까지였다. 다름 아닌 시간이 없었다.
조난되고 어느덧 스무 시간, 너무 열중하느라 시간이 이렇게 지난 줄도 몰랐다.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리던 주상혁의 고개가 멈췄다.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한혜지가 보였다. 주상혁이 한혜지에게 걸어갔다.
“혜지 씨 일어나봐요.”
제법 깊게 자는지 한혜지는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주상혁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많이 지루했으려나?’
주상혁이 한혜지를 흔들어서 깨웠다.
“혜지 씨.”
한혜지가 번뜩 눈을 뜨며 기립했다.
“아, 네!”
그 모습을 본 주상혁이 옅은 웃음을 그렸다.
“서둘러서 나가죠. 마음 같아서는 더 채집하고 싶지만, 이쯤에서 나가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죠?”
“스무 시간쯤 됐습니다.”
“네?”
한혜지가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여전히 헐거워 보이는 가방을 보고 말했다.
“어…… 음, 부피를 줄여주는 아티펙트라고 그랬죠?”
“네. 뭐, 그랬죠.”
작업 시간이 길어지면 당연히 의심한다. 그래서 한혜지도 주상혁이 한 시간쯤 작업했을 때 그것에 대해 물어 왔었다.
결국, 주상혁은 특수한 아티팩트라고 거짓말을 했었다. 외형이 같은 평범한 여러 개의 작은 가방들을 동일한 하나의 가방이라며, 부피를 줄여주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며 거짓말한 것이었다.
한혜지가 분주하게 짐을 챙긴 뒤 말했다.
“그…… 스무 시간이 지났으면 꽤 아슬아슬한 거죠?”
“네…… 죄송합니다. 저도 채집에 집중하느라 시간이 이렇게 간 줄도 몰랐네요.”
“아니에요. 그보다 빨리 나가요, 우리.”
주상혁이 한혜지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혜지가 앞장서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잠시간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한혜지가 말했다.
“그래서 거짓말은 어떻게 할까요?”
이따가 말해 주겠다고 했던 유적에서 있었던 사건 대신의 가상 시나리오는 아직 입을 맞추기 전이었다. 주상혁이 생각해 둔 시나리오를 읊었다.
“유적의 반대편을 열 시간쯤 탐색하던 중 작은 방을 우연히 발견했고 그곳에서 영약을 하나 얻었다.”
“그러고요?”
“그리고 다섯 시간쯤 더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유적의 끝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포탈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골렘이 그것을 지키고 있었다. 쓰러트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제가 하나뿐인 영약을 먹었다. 이 정도로 합시다. 골렘은 우여곡절 끝에 저희가 쓰러트린 것으로 하고요.”
“흐음…….”
주상혁의 이야기를 듣던 한혜지가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수상쩍게 바라보는 한혜지의 눈을 본 주상혁이 반응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걸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시는 거구나?”
주상혁이 뜨끔했다. 한혜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주상혁이 결국 긍정했다. 잡아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뭐…… 그렇습니다.”
주상혁이 아는 한혜지는 영리했다. 주상혁과 던전에서 항시 붙어 있었던 그녀는 어느덧 어렴풋이 주상혁의 등급에 대해서 의구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사건이 터졌다. 한혜지의 눈앞에서 스톤골렘을 처리해 버렸다.
영리한 한혜지는 이 사건으로 자신의 의심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주상혁이 한혜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비밀 지켜 주실 거죠?”
“약속했으니까요.”
다행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한혜지는 주상혁의 비밀을 지켜 줄 모양이었다.
어느새 포탈 앞까지 도착한 주상혁이 포탈 앞에서 멈칫했다.
“왜 그러세요?”
“포탈 너머가 한적한 듯해서요.”
“그러고 보니…….”
아까 처음 봤을 땐 작업을 하는 사람이 제법 있었는데 지금은 다 철수한 듯한 분위기였다.
주상혁이 서둘러 나가야겠다고 다시금 깨달았는지 한혜지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세요.”
“알겠어요.”
주상혁의 말에 답한 한혜지가 포탈로 모습을 감췄다. 주상혁도 잠시 후 포탈에 몸을 실었다.
눈앞을 어지르는 빛 때문에 주상혁이 잠시간 몽환적인 느낌을 받은 다음 순간이었다.
주상혁은 어느새 유적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에서는 반대편으로 못 가는 건가?’
공터로 이어진 포탈이 없었다. 탈출 전용 포탈인 듯했다.
눈앞에 보이는 포탈을 확인하고 주상혁이 걷기 시작했다. 포탈 앞에 멈춰 서 있는 한혜지를 보고 주상혁이 물었다.
“뭐 해요?”
한혜지는 포탈을 등지고 유적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 안 들려요?”
푹, 푹, 푹.
그러고 보니 무슨 소리가 들리긴 한다. 주상혁이 한혜지의 말을 듣고 유적 안쪽을 지긋이 바라봤다. 그러자…….
잠시 후 주상혁의 눈에 무언가가 흐릿하게 보였다. 주상혁이 바쁘게 뛰어갔다.
‘설마…….’
지근거리까지 닿은 주상혁이 정체를 확인하고는 실소를 지었다. 낯익은 남정네 셋이서 조용히 삽질을 하고 있었던 이유였다.
주상혁이 말했다.
“공대장님.”
* * *
주상혁은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감동했다.
설마설마하니 송치수 일행이 이 시간까지 작업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이유였다.
주상혁과 송치수는 던전에서 만나고 이제 두 달도 되지 않았다. 즉, 목숨을 걸 정도의 깊은 관계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송치수는 그런 주상혁을 위해 이곳에 남아서 삽질을 하고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일세…… 정말 다행이야…….”
주상혁을 발견한 송치수가 전쟁터에서 생환한 아들 대하듯 와락 안았다.
“다친 데는 없는가? 혜지 양은?”
“몸이라면 멀쩡합니다. 혜지 씨도요.”
주상혁이 송치수의 말에 답했을 때였다. 주상혁 뒤편의 어둠에서 걸음 소리와 함께 한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송치수의 피투성이의 손을 발견한 한혜지가 호들갑을 떨었다.
“고, 공대장님 손이요!”
송치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별것 아니네.”
“별 것 아니긴요. 빨리 손 내밀어 보세요.”
한혜지가 송치수의 팔을 치료하자 금세 상처가 아물어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상혁이 노일현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 시간까지 작업하고 있는 겁니까? 다 철수한 거 아니었어요?”
“어째서라……? 글쎄?”
쑥스러운지 능청 떠는 노일현의 대답에 송치수가 픽 웃으면서 말했다.
“일현이 녀석이 준혁 군도 오늘은 꼭 뒤풀이에 데려가자더군.”
주상혁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이유라고요?”
“그래. 그러니 오늘은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게.”
* * *
늦은 저녁이었다.
던전에서 무사히 귀환한 주상혁은 송치수의 손에 이끌려 포차로 향했다. 장소가 포차로 선택된 이유는 간단했다.
일행들은 물론이고 주상혁도 흙먼지 투성이 꼴이었기 때문이었다.
“송치수 팀 쉰세 번째 무사 귀환을 위하여!“
주상혁이 잔을 비우고는 불 닭발 하나를 입에 집어넣으며 살아 있음을 느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가? 한적하네.’
주상혁이 불 닭발을 오물오물하며 포차 안을 살폈다.
들어올 때도 느꼈지만, 포차는 비교적 한산했다. 두 개의 테이블을 이어 붙인 주상혁의 테이블 이외에는 저 멀리 한 자리밖에 손님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혜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웬일로 준혁 씨가 오니까 이번엔 민국 씨가 빠져 버렸네요.”
강민국.
한혜지와 마찬가지로 송치수 팀의 남자 힐러의 이름이었다. 뒤풀이에는 항상 빠지는 주상혁과는 달리 매번 참석했다는 것 같았다.
‘나 때문이겠지……?’
주상혁은 던전에서 귀환했을 때 팀원 중 유일하게 던전 밖에서 기다리던 강민국과 눈이 마주쳤다.
강민국이 눈을 슬쩍 피하는 것을 느낀 건 주상혁의 기분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송치수와 노일현이 말했다.
“뭐, 피곤해서 먼저 가 보겠다는데 어쩌겠나?”
“뭐…… 그 형씨도 피곤할 만도 하지.”
강민국도 송치수 일행이 부상을 당하는 족족 치료하느라 거의 종반부까지 몸이 편할 시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상혁은 강민국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감정이 있었다.
하지만 주상혁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와는 별개로 강민국은 이미 주상혁과 한혜지를 껄끄러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설마 탈퇴하려나?’
여차하면 이번 일을 계기로 주상혁은 강민국이 탈퇴할 가능성도 열어 두고 있었다.
‘약간 고마운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주상혁은 본의든 타의든 딱히 붙잡을 마음까진 없었다. 본인 싫다고 나간다는 사람을 붙잡을 이유도 없었고 탈퇴한다면 딱 거기까지인 인연이었다.
“그래서 먹었다고? 그 영약을?”
“예. 골렘을 쓰러트리려면 별수가 없었으니까요.”
유적에서 있었던 일은 좋은 안줏거리가 되고 있었다.
주상혁이 노일현과 백진호의 질문에 답하며 술자리를 지키다가 슬쩍 송치수를 바라봤다.
“여기 소주 두 병만 더 주쇼.”
주상혁이 깜짝 놀랐다.
‘뭐야, 벌써 다 마셨어?’
방금 세 병을 추가했던 것 같은데 벌써 추가 주문이 나왔다. 주상혁이 테이블 아래를 슬쩍 바라봤다. 테이블 아래에는 벌써 빈 병이 한가득이었다.
무슨 일인지 송치수는 중간부터 말없이 소주만 들이붓고 있었다.
노일현과 백진호는 그 모습을 보며 쓰게 웃을 뿐 별말은 없는 상황.
노일현이 담배 하나를 꺼내 백진호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기 전 빈속에 소주만 들이붓는 송치수를 위해 떨어진 안줏거리를 추가한 두 사람이 담배를 태우러 자리를 비켰다.
송치수가 소주병을 새로 텄다. 주상혁의 잔을 채우며 송치수가 말했다.
“혜지 양하고 준혁 군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하네.”
한혜지가 물었다.
“뭐가요? 무슨 일 있었나요?”
“내가 모자라서 오늘 같은 일이 벌어졌네.”
‘꽐라가 되어서 말하는 송치수의 말에 주상혁이 생각했다.
‘어쩐지 계속 들이키더니…….’
송치수가 주상혁을 보며 말했다.
“준혁 군, 공대장 말이네…… 자네가 하게.”
* * *
송치수의 말을 들은 주상혁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어쩌지 곤란한데……?’
자신은 공대장 같은 귀찮은 걸 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주상혁이 송치수를 설득할 변명을 황급히 물색했다.
“사실 전부터 쭉 생각하고 있었지. 이런 건 나이로 정하는 게 아니라 능력으로…….”
“싫습니다.”
적당한 변명거리를 생각한 주상혁이 송치수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주상혁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던 송치수가 픽 웃었다.
“내 눈치 보는 거라면 신경 쓸 것 없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주상혁이 말을 이었다.
“공대장이야 하라고 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능력으로 정해야 한다면 받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보기엔 나 같은 놈보다 자네가 백 배는 더 잘 어울려.”
“제가 생각할 땐 아니라서요.”
“아니라니?”
주상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팀원을 위해서 소멸 직전의 던전에 남을 배짱 따위는 없거든요.”
본인이 생각해도 참 좋은 변명거리였다. 나름 풀이 죽은 송치수의 기를 살려 줄 수도 있고 말이다.
“그건 단지 내 실수였으니까…….”
송치수가 여전히 찝찝한 듯 반응하자 주상혁이 망설였다.
‘어쩔 수 없지 가급적이면 여기서 말하긴 싫었지만…….’
잠시 후 주상혁이 입을 열었다.
“이건 가능하면 따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 기회에 말씀드려야겠네요.”
때마침 노일현과 백진호가 자리로 돌아왔다.
“공대장을 맡지 못하는 이유와 관계가 있는 건가?”
“네.”
“뭔가?”
주상혁이 송치수의 물음에 답했다.
“저 조만간 팀을 탈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네?!”
송치수에게 한 말인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혜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한혜지의 얼굴은 좀 전까지 보이던 취기 따위는 말끔히 사라진 얼굴이었다.
한혜지가 포차 안의 손님들의 시선을 느끼고 홍당무가 돼서 자리에 앉았다. 한혜지가 조금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째서요?!”
“집안 사정 때문입니다.”
한혜지의 질문에 주상혁이 답하자 이번엔 송치수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집안 사정이라면…… 음, 곤란하구만.”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가장 무난하지만 동시에 가장 위력이 강한 변명.
시대를 불문하고 ‘가정사’라는 실드는 거의 무적의 방패였다. 심지어 자세히 물어 온다고 해도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죄송합니다 몇 번해주면 만사 오케이였다.
지금 반응만해도 그랬다. 벌써부터 주상혁과의 이별이 결정된 듯한 분위기였다.
한혜지가 말했다.
“그…… 이미 확정 난 건 아니죠?”
“네, 확실한 건 아니에요. 근데 이런 상황인 제가 공대장을 맡기는 솔직히 팀 내부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좀 그렇달까요?”
“확실히 그렇겠지.”
주상혁이 긍정하는 송치수의 말을 듣고는 말했다.
“저…… 그리고 분위기를 깨서 죄송하지만 사실 슬슬 일어나야 할 거 같습니다. 집에 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휴대폰이 방전돼서 여태 연락을 못 했거든요. 걱정하실 겁니다.”
“아 그렇게 하게나.”
“그럼, 오늘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아니네. 고마운 건 나지, 살아 돌아와 줬으니까. 다음 일정이 생기면 연락하겠네.”
“예.”
주상혁이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포차를 나갔다. 조용히 듣고 있던 노일현이 송치수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준혁 형씨가 나간다니, 이제 D급은 조금 힘든 거 아니요?”
“아마도 그렇겠지.”
기정사실은 아니더라도 주상혁이 이대로 나가게 된다면 D급 허가 자체가 무산될 확률도 있었다.
송치수도 형사 짬밥이 있지 벌써 수차례 D급 던전을 돌면서 협회에서 알선해 준 각성자들이 주상혁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송치수가 잔을 들고는 노일현을 향해 말했다.
“일현아, 공대장 할 테냐?”
노일현이 씩 웃으며 소주잔을 들어 보였다.
“싫수다.”
* * *
주상혁이 팀을 탈퇴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 자체는 확실히 거짓말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더 지속할 필요가 있었던 던전행이었지만, 이번 던전에서 여러 가지로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더 이상 송치수 팀과 던전을 갈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결정적인 변화라면 이번에 다량의 폴라나를 채집한 데 있었다. 가장 문제였던 보충제 값을 탕약을 판매하기 시작하면 충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D급 던전을 들어갈 필요가 없어진 주상혁의 입장에서는 송치수 팀을 고집할 이유도 없어졌다.
또 두 번째 이유, 송치수 일행에게 매주 처방하던 탕약의 약효가 떨어져 가고 있는 이유를 들 수 있었다.
이 말이 무슨말이냐 하면 주간 퀘스트의 진료 수치를 올리려면 어느 정도 능력치의 상승은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약효를 잃어 가는 탕약들이 종국에 효과를 잃게 된다면?
주상혁은 주간 퀘스트를 위해서 탕약을 추가로 강하게 개량할 필요성이 생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매주 조금씩 쌓여 가던 능력치는 결국 레벨 업을 발생시킬 게 뻔했다.
‘그럼 전동욱이 가만 있을 리 없어.’
주상혁은 애초에 가능하면 송치수 팀에 오래 머물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별수 없이 떠나는 거라지만, 떠나려니 기분이 묘했다.
“끄으응, 복잡하구만…….”
막차 버스에서 내린 주상혁이 기지개와 함께 생각을 털어 버렸다.
송치수 팀의 문제는 앞으로 고민할 일이었지 당장 급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폴라나다.’
어서 집에 가서 폴라나에 관한 일이나 정리할 생각이었다. 일단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하기로 한 것.
십 분 남짓 걸음을 옮긴 주상혁이 방이 있는 후관 끝에 도착했다. 주상혁이 현관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인지 피로가 쫙 밀려왔다. 주상혁이 한숨 쉬고는 웃통을 벗었다.
“샤워부터 좀 하자.”
주상혁이 옷가지를 챙겨서 욕실로 들어가고 이십 분쯤 지났다. 샤워를 마친 주상혁이 방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인벤토리에서 가방을 빼는 일이었다.
“스물한 개라…….”
모두 채집하지 못한 걸 안타깝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스무 시간 동안 열심히 채집한 만큼 상당한 양이었다.
가방을 열어서 폴라나의 질을 살폈다. 다행히 채집한 지 얼마 안 된 약초들은 아직까지 생생했다.
“피곤하긴 하지만…….”
주상혁이 레시피를 꺼냈다. 가급적이면 폴라나가 생생할 때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뭐 작업이라고 해도 나한테는 레시피가 있으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가볍게 목 근육을 푼 주상혁이 구석에 준비해 둔 정제수를 가지고 와 레시피 위에 재료를 하나씩 맞춰 올려놓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폴라나 세 개, 멜팅 다섯 개…….”
멜팅 폴라나 정제수 필요로 하는 재료를 하나씩 레시피 위에 올려놨을 때였다.
띠링.
―마나 증폭의 탕약을 조제 하시겠습니까? Yse/No.
주상혁이 ‘Yes’를 클릭했다.
펼쳐진 레시피가 빛이 나더니 주변의 재료들이 사라졌다. 레시피 위로 액체가 담겨있는 반투명한 실린더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포션을 집어 들어 확인하던 주상혁이 자신도 모르게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어……?”
『마나 증폭의 탕약 (초급).』
「짧은 시간 마나를 한계까지 증폭시켜 주는 탕약이다. 폴라나 특유의 마나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효과 마나 상승 +5%]―효과는 중첩이 불가능하며 두 시간 지속된다.
“5%……?”
어째선지 성능이 반 토막이 나 있었다. 귀찮은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 * *
당황한 주상혁이 바닥에 펼쳐 놓은 레시피를 집어 들었다.
실체화한 레시피에는 인벤토리에서 확인했던 정보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
【마나 증폭의 탕약 초급 레시피.】
「짧은 시간 마나를 한계까지 증폭시켜 주는 탕약의 레시피다. 던전에서 수집할 수 있는 다양한 약초들로 제작할 수 있다. 초급이라 그 효과가 낮다.」
[멜팅 0/5] [폴라나 0/3] [정제수 0/1] [효과: 마나 상승 +10%]―효과는 중첩이 불가능하며 지속 시간은 시간이다.
“아닌데……? 그대로 맞잖아?”
10%.
주상혁이 기억하던 대로 레시피는 ‘10%’라고 말하고 있었다. 주상혁이 턱을 문지르며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한 번 더 만들어 볼까?”
주상혁이 다시 한 번 레시피 위에 재료를 올려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나 증폭의 탕약을 조제 하시겠습니까? Yse./No.
마찬가지로 레시피를 완성시켜 새로운 포션이 하나 제조했다.
“6%……?”
어째선지 방금보다 성능이 1% 더 좋은 포션.
주상혁이 두 개의 포션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뭔가 다른 점이 있는 건가?’
1%긴 해도 조금이라도 성능이 좋은 포션이 등장했다. 두 개에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것이었다.
‘뭐지? 도대체 이유가……?’
주상혁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두 개의 차이점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던 이유였다. 하지만…….
한참을 생각하던 주상혁의 생각도 마침내 끝이 났다.
“없는데……?”
재료, 재료를 레시피 위에 놓은 순서, 재료의 위치와 개수까지 전부 다 되짚어 봤지만, 다른 게 없었던 이유였다.
주상혁이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렇다는 건 혹시…….’
눈빛을 예리하게 빛낸 주상혁이 수십 차례 포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5%, 5%, 5%, 5%, 6%, 5%…….”
포션이 빠른 속도로 쌓여 가기 시작했다. 제작되는 포션은 대부분이 5%였다. 오분의 일 확률 정도로 6%도 보였다.
‘6%보다 높은 건 없는 건가?’
주상혁이 포션을 찍어 내면서 생각했을 때였다. 마흔 개쯤 포션이 쌓였을 무렵.
“7%…….”
때마침 7% 포션이 등장했다.
“역시, 맞네. 확률이었어.”
즉, 한마디로 순전히 운이라는 소리였다. 재료의 질, 위치, 순서 등 그따위의 문제가 아니고 순전히 운이었다.
“8%…… 나와 주려나?”
주상혁이 멈췄던 포션 제작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 뒤로도 스물한 개의 가방 중에 열 개의 가방이 바닥 날 때까지 제작을 해 봤지만 8%의 포션이 제작되는 일은 없었다.
“이 정도 수준이면 운도 아니라는 건데…….”
아무래도 운이 통용되는 범위는 어디까지나 7%까지인 듯했다. 8% 이상의 포션을 제작할 수 있다면 얼핏 오백 개는 넘게 포션이 제작될 동안 하나쯤 나왔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지…….”
수제작.
레시피의 힘을 빌려서 단숨에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수제작으로, 그것도 나름의 노하우를 통해 제작을 해야 10%가 제작된다는 말이었다.
상황을 깨달았는지 주상혁이 한숨과 함께 푹 고개를 숙였다.
“하…… 골치 아프네…….”
탕약이라면 전생에서도 질리듯 달여 봤다. 하지만 이게 정답이라면 정말이지 그건 그것대로 골치 아픈 일이었다.
모든 약초는 최고의 성능을 발휘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어떤 건 신선도가 중요하게 먹히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바짝 말리는 것도 있을뿐더러 약초가 약재화해서 장기 보관하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일일이 약초들의 효능이 최고조로 나타내는 정도를 찾아낼 때까지 여러 가지 실험을 거쳐야 한다.
이건 주상혁의 능력과는 별개로 상당한 노력이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약초 건조시설은 옥상에 따로 만들어 두긴 했다만…….’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주상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딱히 방법이 없었던 이유였다.
남은 가방 열한 개로 주상혁이 시선을 던졌다.
『……일지.』
때마침 우연히 가방에서 일지가 삐져나온 게 보였다.
주상혁이 일지를 집어 들었다.
“어쩌면…….”
이곳에 폴라나에 대한 방법이 적혀 있을지 몰랐다.
일지를 펼쳐 들고 읽어 나가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근데 그러고 보니 도대체 이건 왜 이러는 거지?”
유적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도 느꼈던 부분이었지만 특정 조건에 한해서 흐릿하게 읽을 수 없는 부분이 존재했다.
한혜지와 다르게 글자가 안 보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일지의 이름만 해도 그렇다. 문맥상 고유명사인 거 같기는 하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것만 읽을 수가 없었다.
‘아, 여기도 그러네?’
이름이 아닌 것도 존재했다. 어떠한 사건인 것 같기는 했지만, 마찬가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뭐, 그래도 읽지 못할 수준은 아닌 걸로 만족해야 하나?’
그래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루뭉술하게나마 내용을 이해하는데 지장이 가진 않았다.
책을 들고 한참을 멈춰 있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던전의 생성 과정이 적혀 있는 내용이 존재했다. 방범용 골렘을 만든 일이라 거나, 골렘 안에 열쇠를 집어넣었다거나 하는 이야기였다.
“다음 장은…….”
주상혁이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불평을 흘렸다.
“여긴 글렀네…….”
거의 모든 글자가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약초들을 기르기 시작했다.」
제일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면 말이다.
뭐 문단의 구조상 약초를 기르게 된 이유 같기는 했다.
“뭐, 이건 그렇다 치고 그럼 다음 장은……?”
주상혁이 책을 한 장 넘겼을 때였다. 주상혁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빙고.”
주상혁이 원하던 폴라나에 대한 데이터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 * *
다음 날이었다.
밤새도록 일지에 적힌 대로 약초를 작업하던 주상혁이 시간을 확인했다.
‘뭐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주상혁이 황급히 방을 나섰다. 아침 일찍 만날 사람이 있었다.
길드의 본관 정문에 도착한 주상혁이 누군가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만날 사람 주화영이 보인 이유였다.
“화영아.”
주상혁을 발견한 주화영이 신이 나서 달려왔다. 아무래도 이틀 만에 보는 주상혁이 어지간히 반가운 모양이었다.
“왜요? 왜요?”
평소와 같이 보조개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는 주화영에게 주상혁이 말하려다가 망설였다.
저 멀리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Lv.43 주재혁.』
『Lv.42 주민혁.』
이 층 계단에서 주상혁의 이복형제들이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긴 이 녀석들도 등교 시간이려나?’
사이가 안좋은 것은 딱히 아니다. 하지만 괜히 남한테 보여서 좋을 것은 없었다. 주상혁이 주화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잠깐만 이쪽으로.”
외진 곳으로 주화영과 함께 이동한 주상혁이 주변을 살폈다. 주상혁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 쇼핑백을 내밀었다.
“자.”
“이게 뭐예요?”
내미는 봉투를 받아들며 물어 오는 주화영의 질문에 주상혁이 답했다.
“샘플. 이것 좀 민지한테 전해 줘”
“민지한테요?”
“응, 정확히는 민지네 오빠한테 주면 되는 거지만.”
10%라고 호언장담하긴 했다. 하지만 담긴 포션은 7%짜리 포션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샘플로 가치는 충분하잖아?’
딱히 문제 될 건 없을 터였다.
주화영이 실망한 듯 말을 흘렸다.
“치, 괜히 기대하게 만들지 말라구요.”
“그럼 부탁할게?”
“네.”
주화영이 정문에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타고 등굣길에 올랐다. 차량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주상혁이 기지개를 켰다.
“빨리 다녀와 볼까?”
벌써 수십 시간 잠을 못 잔 상태였지만 들를 곳이 있었다.
* * *
전주협회 지부장 전동욱은 지금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제 늦은 저녁.
아쉽지만 던전에서 철수를 감행한 직후 들려온 소식 때문이었다.
그 소식은 기적적으로 주상혁이 생환했다는 소식이었다.
‘스톤골렘을 쓰러트렸다고? 영약을 먹었고?’
전동욱은 물론 그 말을 진심으로 다 믿지는 않았다. 그저 주상혁이 한차례 더 성장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어쩌면 진짜로…….’
특질계 각성자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도 성장을 자의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타입의 각성자 말이다.
‘빨리 확인해 보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재각성 심사를 해 보고 싶었지만,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방법이 없었다.
저번에야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명분이 있었다. 그래서 주변의 분위기를 통해서 주상혁이 재심사받도록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명백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번 건은 그저 단순한 던전에서 발생한 사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이유였다.
‘이런 것까지 협회가 나서서 편의를 봐줬다는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추후의 던전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고에 대해서 전부 협회가 끌어안아야 한다는 리스크가 있었다. 그게 ‘공정성’이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마저도 만약 주상혁이 예상하는 성장 관련한 특질계 각성자였다면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그걸 감안해도 무조건 남는 장사일 게 뻔했다.
하지만 아직 의심이 높아졌을 뿐 확증은 없었다.
‘답답하군.’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머리를 굴리던 전동욱이 한숨을 푹 쉬었다.
책상 위의 인터폰을 조작한 전동욱이 말했다.
“잠시 안으로 들어오세요.”
잠시 후 방안으로 들어오는 남자 비서 한 명이 보였다.
“아직도 주상혁 씨는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까?”
“계속 연락을 시도해 보고는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답장은 없습니다.”
주상혁은 어째서인지 어제 던전 복귀 이후로 연락이 전혀 안 되고 있었다.
“허락만 해 주신다면 자택으로 전화를 넣어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편이 간단하고 확실하게……”
“아니요. 청초길드를 통하는 건 곤란합니다.”
전동욱이 단호하게 말했다.
전동욱이 생각하기에 청초길드에서도 주상혁이 각성한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박상운 씨를 제외한다면 다른 인원들은 정상적이었지.’
이건 주상혁이 길드 내부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정말로 평범한 전투 계열 각성자일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래도 괜히 청초길드 쪽에 주시하고 있다는 냄새를 풍길 필요는 없지.’
전동욱이 말했다.
“계속 연락을 시도해 보고 연락이 닿으면 알려 주세요.”
남자 비서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나갔다.
잠시후 골똘히 생각하던 전동욱이 중얼거렸다.
“이거 혹시 고의로 무시하는 건가……?”
* * *
당일 아침 피곤함에 찌든 주상혁이 향한 곳은 휴대폰 대리점이었다.
어제 유적에 떨어지면서 금이 간 핸드폰이 마침내 완전히 고장 난 것.
휴대폰을 사고 주상혁이 개통을 막 했을 때였다.
대리점을 막 빠져나온 순간 연달아 핸드폰에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영이 녀석 걱정했다더니 의외로 많이 넣었네.”
어제 점심 무렵부터 밀렸던 메시지가 제법 됐다.
“어디 보자 그 외에는……?”
개통이 완료됐다는 문자.
자신도 휴대폰을 구입했다는 한혜지의 안부 문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
협회에서 도착한 문자였다.
[Web발신] 주상혁 님, 협회입니다. 어제의 사건으로 가벼운 담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메시지를 보시거든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문자를 확인한 주상혁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미안하지만 감사할 일은 평생 없을 거다.”
무시할 생각이었다.
주상혁도 이번에는 저번과 다르게 각성 심사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구태여 전동욱의 뜻대로 놀아나기 싫었다.
주상혁이 마침내 길었던 일정을 끝내고 기지개를 켰다.
“끄으으응, 이제 집 가서 잠이나 잘까?”
* * *
집으로 돌아가는 주상혁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주화영에게 전해 줬던 폴라나 포션에 대한 것 때문이었다.
‘지금쯤 화영이 녀석이 잘 전해 줬겠지?’
자신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귀여운 여동생이다.
이미 점심 무렵이 지났으니, 박민지에게 잘 전해 줬을 터였다.
‘빨리 연락이 왔으면 좋겠네.’
주상혁은 당장에 연락이 오기를 기대하진 않았다.
빨라도 보름쯤.
독 기운이 가득한 폴라나라 조심스러울 것까지 감안하면 이마저도 짧게 잡은 거긴 했다.
주상혁이 물약의 판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구입할 리스트를 짜기 시작했다.
‘음, 가장 먼저 보충제고 그다음이…….’
주상혁이 산삼을 떠올렸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싸구려 약재가 들어간 보충제보다 종합적으로 주상혁의 레벨 업에 기여한 것은 산삼 초콜릿 쪽이었다.
“산삼은 이번에 오십년 삼으로 구하고 또…….”
주상혁이 무언가 생각난 듯 스테이터스 창을 켰다.
Lv.1 초급 침술 [active].
주상혁이 아직도 초급 단계에 머무르는 것도 모자라서 Lv1에 정체된 침술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확실히 레벨 업을 하려면 이쪽이 좋긴 하지.’
다만 스킬 레벨을 올리는 게 문제였다. 그 효과가 너무 뛰어나서 아무한테나 사용할 수가 없는 게 골치였다.
주상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가 왜 이딴 생각을 하고 있지…….’
얼마 전까지의 아무 생각 없이 늘어질 수 있었던 일상이 벌써 그립기 시작했다.
“하아…….”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키고는 주상혁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당장에 전동욱만 봐도 각성자가 성장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알 수 있다.
지금부터 레벨 업을 꾸준히 해 두는 편이 능력을 들켰을 때 신변을 보호하는데 좋을 터였다.
주상혁이 눈앞의 침술을 바라보다가 두어 번 눈을 끔벅였다.
‘응……? 아닌가?’
있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는데 여태 떠올리지 못한 방법이 떠올랐다.
침술의 레벨을 올리는 방법은 의외로 가까이 존재하고 있었다.
* * *
박지훈은 전주에서 제법 알아주는 포션 제작사였다.
물론 D급 각성자였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포션의 양은 한정적이지만 상관없었다.
양은 적더라도 이 바닥은 포션의 질로 승부하는 곳이다.
마법 계열 각성자 중에서도 적은 숫자만 각성하는 연금술 스킬은 전투 능력과는 거의 무관.
연금술의 숙련도로 더욱 좋은 포션만 만들면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상대적으로 저 등급의 각성자가 고 등급의 각성자보다 불리함을 지니는 것은 이 바닥도 똑같다.
선천적으로 더 많은 마나를 타고난 만큼 시간 대비 더 많은 포션을 제작하고 이것이 스킬의 숙련도와 직결되는 이유였다. 하지만…….
겨우 전주 바닥에 한해서지만 박지훈은 그런 C급 B급 각성자들의 가게와 견줄 만큼 나름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바로, 박지훈이 초보 각성자일 무렵, 우연히 던전에서 아티펙트를 하나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다.’
박지훈이 자신의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의 푸른색 보석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박지훈의 목에서는 아티팩트가 푸른색 빛을 아름답게 뽐내고 있었다.
‘벌써 삼 년 전인가?’
아티팩트와 박지훈의 만남은 거의 운명이었다.
삼 년 전 용돈 벌이나 할 겸 E급 던전에 들어갔을 때 우연히 습득한 것부터 모든 것이 우연으로 이루어졌다.
던전에는 장비나 액세서리가 드롭되면 해당 계열 각성자가 가져가는 관례가 있다.
임시 감정 결과 마법 계열 아티팩트였던 목걸이를 박지훈이 얼떨결에 얻게 된 것도 이 ‘관례’라는 우연.
박지훈이 드물게 연금술 스킬을 가지고 각성하는 마법계 각성자였던 것도 우연.
그날따라 임시 편성된 마법 계열 파티원이 불참해서 경쟁 없이 얻은 것도 그저 우연의 연속이었다.
‘난 운이 참 좋단 말이지.’
심지어 이 녀석은 성장형 아티팩트였다.
박지훈도 이건 포션 장사를 시작하고 나서 꼬박 일 년이 넘은 무렵에야 Lv2로 성장하면서 알게 된 일이지만 여하튼 이건 운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우연의 연속이었다.
연금술로 제작한 물건의 성능을 일정량 올려준다는 아티팩트의 능력 떄문에 시작한 포션 장사는 순항중이었다.
아티펙트의 성장과 함께 박지훈의 포션은 날이 갈수록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있었다.
습득 당시에는 Lv1이었던 목걸이도 지금은 Lv3이 되어 있었다.
‘빨리 Lv4의 모습을 보고 싶다.’
벌써부터 Lv4가 되었을 때의 상상에 기분이 설렜다.
“그럼 부족한 재고를 채워 볼까?”
박지훈은 하루 장사가 끝이 나면 그날 팔린 물건의 개수만큼 포션을 제작해 채워 둔다.
가게에서 작업실로 들어가려던 박지훈이 멈칫하고 멈춰 섰다.
카운터 위의 쇼핑백이 보인 이유였다.
‘샘플이랬던가……?’
박지훈이 쇼핑백을 들여다보자 작은 상자가 하나 보였다.
상자 안에는 얇고 부드러운 재질의 스티로폼으로 되어 있었다.
스티로폼의 안에는 검지 크기 정도의 세 개의 포션이 존재했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건가?”
그때는 솔직히 혹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니 지금은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애초에 마나 1% 상승 포션도 수년의 연구를 거쳐서 겨우 시중화되었다.
그런데 10%라니, 당시에는 가게의 명성이 오르면 더 많은 포션을 팔 수도 있다는 생각에 샘플을 요구했지만 괜한 짓을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더 컸다.
“10%가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나마 2% 아니 3%까지만 돼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10%는 너무 허황된 이야기라고만 느껴졌다.
‘근데 이건 뭐지?’
샘플을 바라보며 잠시간 생각에 잠겼던 박지훈이 상자 뚜껑 안쪽에 달린 포스트잇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다.
“샘플은 7%짜리니까 일단 확인해 보고 연락을 달라고?”
포스트잇을 읽은 박지훈이 픽 웃었다.
10%는 아니었지만, 7%도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수치인 건 똑같았다.
‘그전에 진짜 샘플이 맞긴 맞는 건가?’
어쩌면 라이벌의 업체에서 박지훈의 가게에 타격을 주려고 수작을 부리는 걸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중급 감정 스크롤을 쓰기는 아까운데…….’
감정 스킬을 가진 각성자도 물론 있다.
하지만 아닌 사람이 태반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각성자들은 아티팩트나 드랍 아이템을 확인할 때 제작된 스크롤을 사용한다.
‘하급으로는 어림도 없겠지?’
하급 스크롤은 싸지만, 그 감정 범위가 좁다.
“쯧, 역시 안 되나?”
혹시나 싶어서 사용해 봤지만 스크롤에 변화는 없었다.
감정에 성공했다면 스크롤에 포션의 글자가 새겨져야 할 텐데 물음표만 떠올랐다.
‘하긴 7%짜리 포션이라면 당연한 거긴 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 검증을 넘길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박지훈이 작업실에서 중급 스크롤을 가지고 와서 포션을 감정했다.
양피지 모양의 스크롤을 펴고 그 위에 박지훈이 포션을 올려뒀을 때였다.
번쩍.
스크롤이 한번 빛나고 난 뒤였다. 박지훈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감정 불가.
[이름: ?] [설명: ?] [효과: ?]그도 그럴 게 마찬가지의 물음표투성이 결과가 보인 이유였다.
* * *
박지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거 설마 진짠가?”
중급 스크롤은 박지훈이 단 한 장 보유하고 있는 물건이다.
가격으로 따지면 한 장에 천만 원은 호가하는 물건이었다.
제법 유명세를 얻고 있는 박지훈이라고 해도 특정 지역, 전주 한정으로 이름 좀 날릴 뿐이다.
박지훈에게 이보다 좋은 수십 배는 더 비싼 고급 스크롤이 존재할 리 없었다.
박지훈이 진지한 얼굴로 포션을 들었다.
“어쩌지?”
지금의 상황을 놓고 보면 크게 두 가지의 상황이었다.
안티 감정 마법이 부여된 물건이거나 혹은 중급 감정으로도 감정하지 못할 정도의 진품이거나.
물론 둘 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중급 안티 감정 스크롤은 고급 감정 스크롤과 가격이 비슷하다. 박지훈 하나 몰락시키자고 그 정도 돈 쓸 사람은 애초에 몇 되지 않았다.
“직접 마신다.”
한쪽으로 무게 추가 기울자 박지훈이 진지한 눈으로 포션의 뚜껑을 땄다.
본래라면 정체도 불확실한 포션을 마실 리 없었다. 그러나 박민지의 소개로 만난 사람이다. 동생을 믿어 보기로 한 것이었다.
꿀꺽꿀꺽.
“음…… 일단 독약은 아닌가?”
폴라나의 기운이 제대로 중화조차 안 된 물건이었다면 그대로 몸에 반응이 왔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다.
‘묘하게 몸이 가벼워 진거 같기도 하고.….마법이라도 한번 써볼…….’
박지훈이 효능을 확인하려는 찰나였다.
덜컹덜컹.
가게의 문이 거칠게 흔들렸다.
출입문 쪽으로 눈을 옮긴 박지훈이 유리문 너머의 손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박지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엑…….“
단골 손님이라고 하면 단골손님이다.
그러나 협회 소속이라는 점의 껄끄러운 점과 ‘C급 각성자’라는 점에서 항상 갑질을 부리는 손님이었다.
썩 달갑지 않은 손님이 문을 열어 달라는 듯 손짓했다.
박지훈이 마음 같아서는 못 본 척하고 싶었지만, 이미 눈이 마주친 상태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가게 문을 열었다. 각성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아니 문을 퍼뜩퍼뜩 열 것이지 왜 이렇게 굼떠?”
“아…… 그, 죄송합니다.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송치수 저리 가는 등빨에 위축된 박지훈을 보고 각성자가 픽 웃었다.
“뭘 쫄고 그래? 누가 보면 삥 뜯는 줄 알겠네.”
박지훈이 속으로 생각했다.
‘외상값이나 갚고 말해라 등신아.’
항상 갚겠다는 돈이 벌써 천만 원을 넘은 상태였다.
“항상 쓰던 걸로 몇 개 줘 봐.”
“저…… 항상 쓰던 건 재고가 다 떨어졌는데요?”
박지훈은 반년 전쯤에야 아티팩트가 Lv3에 도달했다.
그래서 그때와 맞물려 손님이 많이 늘어나 신품은 항상 재고가 부족했다.
“내일 팔 거 있을 거 아니야?”
“내일 팔 것도 없습니다.”
“그럼 저건 뭔데?”
각성자가 구석의 진열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약 딱지가 붙어 있는 포션 꾸러미였다.
“저건 이미 예약 손님이 있는데요?”
“그래서?”
“네?”
“있는 거잖아. 없는 거냐?”
박지훈이 험악해지는 각성자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세금 낼 거 안 내고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왜 나한테만 지랄인데?’
박지훈이 차오르는 분을 삭이고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예약 손님께는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렇지?”
그제야 표정이 풀어진 각성자를 놔두고 박지훈이 구석에서 포션을 꺼내 카운터로 가지고 왔다.
“주인장 근데 이건 뭐냐?”
“그, 그건.”
박지훈이 깜짝 놀란 얼굴로 손을 뻗었다. 남자가 손길을 휙 피하면서 말했다.
“아니 이게 뭐냐고.”
“샘플……인데…….”
“샘플? 잘됐네. 이거 내가 가져간다? 나 단골이잖아 하나만 줘”
“안됩니다!”
용도가 뭔지는 알고 달라는 건지 평소처럼 막무가내로 나오는 녀석.
박지훈이 포션을 낚아채기 위해 다시 전력을 다해 손을 뻗었다.
박지훈의 저항을 보고 각성자가 생각했다.
‘네깟놈쯤 저항이야 아까처럼 보지도 않고…….’
그런데 이상했다.
이상해도 뭔가 심하게 이상했다. 박지훈의 손이 빨라도 너무 심하게…….
콰앙.
빨랐기 때문이었다.
피하려다가 오히려 박지훈의 손에 가슴팍을 얻어맞은 각성자가 가게 벽을 부순 것도 모자라 도로를 가로질러 반대편 전봇대에 들이박는 모습이 보였다.
“커억…….”
전봇대가 거미줄처럼 금이 가더니 도로변으로 쓰러졌다.
눈앞의 상황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던 박지훈이 깜짝 놀랐다.
“에에에엥?!”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