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41
Book 8 Chapter 4
무더운 여름이 가고.
낙엽 날리는 가을이 가고.
추운 겨울이 찾아왔다.
약 5개월 남짓의 시간이 지나며 많은 게 변했다.
첫째, 청초길드가 전 세계 최고의 길드로 부상했다.
가뜩이나 주상혁의 후광에 연일 빠른 성장을 이루던 청초길드였지만, 반년 전쯤 침을 놓기 시작하며 일순간에 이렇게 됐다.
청초길드에 들어가면 굳이 산삼이 없더라도 강해질 수 있다.
청초길드에서 제법 오래 근무한 각성자들의 경우엔 오래전부터 도움을 받았다더라.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청초길드는 전 세계 최고의 길드가 되었다.
둘째, 던전의 난이도가 몰라보게 상승했다.
최하 등급의 던전이 E급 던전이었던 시절은 지났다.
요즘 E급 던전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으며 역으로 S급 던전의 위상이 예전 A급 던전 수준이 되었다.
뭐 누구는 갑작스럽다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같은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건 오래전 부터다.
한국을 시작으로 시작했던 S급 던전 브레이크 사건.
이 사건이 마무리될 때쯤 해서 던전의 난이도가 상승하고 있음과 관련한 이야기는 쭉 있어 왔으니,
어쩌면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 볼 수 있었다.
덕분에 예전이라면 E급 각성자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일반인이 되는 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지만, 이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이건 비교적 근래에 일어난 일이었다.
활발한 활동을 이어 오던 주상혁이 두 달째 자취를 감추며 일어난 변화였으니까.
* * *
“하…… 좋다.”
의원 문을 걸어 잠그고 모습을 감춘 주상혁.
그는 강혜영의 집에서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사백 년 된 산삼을 꿀에 절여서 만든 산삼차였다.
와왕!
냐아아아.
따듯한 산삼차를 할짝거리던 주주와 백호가 더 달라고 보챘다.
추가로 포트에 남아 있는 차를 조금씩 나눠 줬다.
두 녀석이 좋아하는 게 보였다.
피식 웃고는 은은한 꿀향이 풍기는 산삼차 잔을 다시 들어올리니 강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근데 의원 말이에요.”
“의원?”
“네, 그거 안 열어도 돼요?”
밖이 많이 시끄럽다.
산삼을 먹튀했니 마니 하는 그런 목소리도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뭐 이상한 일이 아니긴 하지.’
요즘 산삼 가격은 주상혁도 알고 있다.
어지간한 돈으로는 산삼 뿌리 하나 구하기 힘들다.
또, 가격도 가격이겠지만, 구하는 노력도 이전에 비해서 매우 까다로워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산삼을 먹고 소식이 없으니 화가 안 나는 게 되레 이상한 일일 것이다.
주상혁이 말했다.
“슬슬 열어야겠지 두 달쯤 쉬었으니까.”
벌써 두 달.
어쩌다 보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다.
‘본래 잠수를 탄 게 그렇게 심각한 이유는 아니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이유가 무색한 수준이 되었지만, 어째선지 돌아가기가 꺼려졌다.
노력후 닥친 극심한 번아웃 증상 때문에 도피한 당시와 달리…….
이곳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금세 멀쩡해졌지만, 하루에 두 시간, 세 시간씩 자가며 레벨 업에 모든 심력을 다 쏟는 일이 고통 이유일 것이다.
주상혁이 산삼차를 홀짝이며 답했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마.”
“네.”
가슴마저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차 내음이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줄 때쯤이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또 올랐다.
“이걸로 몇이지?”
『Lv.177 주상혁.』
정말이지 많이도 올랐다.
탕약을 하나도 의지하지 않고 이 정도 레벨이라니.
레벨업에 도움을 준 요소라면 약탕기도 있고 보충제도 있겠지만, 역시 으뜸은 사백 년 삼.
아멜리아가 그날 전해 준 사백 년 삼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거의 겨울이 시작하며 먹기 시작해서 총 10레벨 정도가 올랐으니…….
그야말로 효과는 발군.
‘심지어 혼자 마시지도 않았지.’
주주나 백호, 중간부터는 강혜영도 지금처럼 티타임을 함께 가졌음에도 이 정도가 올랐다.
그 때문에 주주와 백호도 반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레벨이 많이 올랐다.
『Lv.133 청운해태.』
『Lv.96 백호.』
주상혁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아쉬움을 다셨다.
“근데 이런 여유도 조만간 끝인가?”
물론 이곳에 지내면서 백날 펑펑 논 건 아니었지만, 이전에 비한다면 여유롭게 살았다.
잠도 8시간씩 푹 잤으며, 놀고 싶을 땐 놀고 쉬고 싶을 땐 쉬었다.
하지만 이제 곧 그것도 끝이다.
처음에 비하면 많이 미지근해진 찻잔을 비웠을 때였다.
주상혁의 방으로 강아지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꼬리가 둥글둥글 말린 게 인상적인 분신 주팔이었다.
와와와왕.
“따라오라고?”
왕!
도로 문밖으로 뛰어가는 분신을 따라 주상혁이 하우스 안으로 들어간 순간이었다.
“와 드디어…….”
자랄 듯 자라지 않던 중급 약초 녀석들.
몰피스, 리타를 비롯해 다양한 약초들이 드디어 봉오리를 맺었다.
띠링.
봉오리 진 영초 [히든 퀘스트].
아니나 다를까 퀘스트가 떠오른 것을 확인하고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쉴 날이…….”
진짜 며칠 남지 않은 건 확실해 보였다.
* * *
전 세계적으로 s급 던전이 예전의 a급 던전의 발생 빈도 수준이 되었다.
당연히 그건 국내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1월 한겨울.
지금 국내에는 s급 던전이 넘쳐나고 있었다.
“와…… 진짜 크다.”
“나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야.”
아니나 다를까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S급 던전이 생성됐다.
던전 발생 3시간째.
도로를 통제하고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하고 여유가 생길쯤 봉쇄선을 지나서 외부에서 중년 각성자가 포탈 앞으로 다가왔다.
던전 앞에서 현장을 관리하던 여성 각성자가 말했다.
“오셨어요?”
“어때? 차원 에너지 측정해 봤나?”
“네,”
“그래, 어떻지?”
“아슬아슬했습니다. 까닥했으면 SS급일 뻔했어요.”
다시 한 번 더 유독 거대한 포탈을 바라봤다.
“청초길드는?”
“당연히 연락해 봤습니다만, 거의 다 도착했으니 기다리라네요.”
S급 던전의 발생이 늘어나며 국내는 거의 완전히 청초길드에 의지하고 있었다.
광주의 대호길드 역시 S급 던전을 처리할 만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청초길드 수준은 아니었다.
여성이 이번엔 던전을 올려다보고 있는 중년에게 질문했다.
“근데 팀장님 이거 정말로 클리어 할 수 있는 겁니까? 아무리 청초길드라도 보통 사람들로는 안 될텐데…….”
“미안한데 그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은 아니다.”
“네?”
여자가 그렇게 되물었을 때였다.
“왔나 보군.”
뒤쪽이 웅성거리더니 도로를 봉쇄하던 각성자들이 길을 열어 주는 게 보였다.
그사이로 걸어나오는 네 사람을 보고 인도에서 구경하던 시민들이 입을 열었다.
“와 저거 송치수 아니야?”
“그럼 저 사람이 한혜지겠네? 화면보다 훨씬 예쁜데?”
“근데 그나저나 실제로 보니 아저씨들 등빨 더 쩐다.”
송치수 일행은 이미 국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전부터 충분히 유명했지만, 반년전부터는 어지간한 연예인 수준의 인지도였다.
중년 남성이 던전 앞에 도착한 송치수와 악수한 뒤 슬쩍 물었다.
“보시다시피 던전이 제법 큽니다. 괜찮겠습니까?”
포탈의 크기를 조금 가늠하던 송치수가 말했다.
“8시간뒤에 부산에서 다음 일정이 있지.”
“예?”
“그리 오래 머무를 여유가 없다는 뜻이요.”
송치수가 노일현에게 말했다.
“일현아 연장 챙겨라.”
송치수 일행이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 * *
다음 날 송치수 일행의 이야기는 뉴스로 보도됐다.
아침에 서울, 해 질 녘엔 부산.
S급 각성자 다수가 모여야 며칠에 걸려서 겨우 클리어할 수 있는 S급 던전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연일 클리어하는 모습은 당연히 질리지 않는 뉴스거리였다.
―와…… 저게 되네?
―근데 송치수 공격대가 언제부터 청초길드 소속이었음?
―반년 전쯤부터인가?
―정확히는 청초길드 소속이 아니라 주상혁이 고용한 거임. 전에 TV에 나왔을 때 그렇게 말함.
한때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던 십대 길드.
하지만 십대 길드도 어디까지나 다 옛말이다.
지금은 던전의 난이도가 급상승하면서 사파리에서 시체에 남은 살이나 바르는 독수리 신세가 된 지 오래였다.
신라길드의 대표 정성호가 한숨 쉬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A급 던전을 클리어하는 건 같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관심밖으로 밀려난 건 사실이었기에 아쉬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답은 산삼인데…….”
한때는 산삼에 전 재산을 투자해서 주상혁에게 침을 맞을 생각을 할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신라길드를 세우고 운영한 지 약 20년.
모아 놓은 돈은 평생 놀고먹을 만큼 많았지만, 문제는 산삼은 그보다 더 비싼 게 문제였다.
“이게 정말 맞나……?”
마지막으로 망설임을 중얼거린 정성호가 결의에 찬 얼굴을 만들었다.
“그래, 나는 각성자다.”
긴 시간 신라길드를 운영했지만, 기업가 이전에 정성호는 각성자였다.
각성자는 무릇 강함이 최우선.
정성호가 고개를 들어 눈앞을 확인했다.
벌써 서너 번 확장 공사를 한 만큼 으리으리해진 청초길드의 정문이 보였다.
학교 교문 같은 담벼락형 정문을 지나 정성호가 가장 큰 본관 건물로 들어갔다.
넓은 로비가 보였다.
크기만 놓고 보자면 협회 본부 그 이상이었다.
로비에 대기 중이던 각성자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입…….”
그래도 국내 한정으로 꽤나 유명했던 정성호다.
막상 입사 시험을 치르러 왔다고 말하려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큼큼…… 그…… 입사 시험장은……?”
“3층입니다.”
뻘쭘한 정성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향했다.
띠잉.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3층에 도착했다.
정면에 보이는 푯말을 따라 대기실에 들어간 정성호가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대, 대표님?”
“권허중?”
정성호가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신라길드를 창설하고 나서부터 쭉 자신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녀석이다.
녀석이 여기있다는 건…….
정성호가 권허중의 목덜미를 큼지막한 손으로 콱 잡으며 말했다.
“너, 이 자식, 네가 왜 여깄어?”
“그러는 대표님은…….”
“나는…….”
권허중의 목덜미를 강하게 움켜잡은 정성호의 손이 사르륵 풀렸다.
“됐다, 혼자 시험 보는 것보다 낫겠지.”
어차피 조만간 하나씩 신라길드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권허중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은 자신이나 자신에게 말하지 않고 시험을 보러 온 권허중이나 서로 나무랄 입장은 못 됐다.
“대표님, 진짜 입사 시험 보러 오신 겁니까?”
“그래, 대표 때려치우련다.”
정성호가 권허중의 얼굴을 쓱 훑었다.
‘나보다 한 살 어렸던가?’
“왜 그러십니까? 대표님?”“대표는 무슨 때려치운다니까. 그러고 보니 너 뱀띠던가?”
“네.”
“앞으로는 대표 말고 형이라 불러라.”
“아…….”
“왜 불편해?”
권허중이 말했다.
“아뇨, 그건 아닌데…”
“그럼 왜?”
“저 사실 빠른입니다.”
하여간 개같은 빠른들…….
* * *
두 사람이 형 동생 관계이냐, 친구 관계이냐를 두고 족보를 정리하는 일은 제법 오래 걸렸다.
대표직은 내려놓았어도 형 자리를 내려놓을 수는 없었는지, 8월생 정성호의 반발은 거셌다.
결국 두 사람의 족보는 시험관이 들어오며 급히 마무리되었다.
형 동생 관계.
정성호의 승리였다.
중간에 들어온 중년 시험관 하나가 시계를 체크하다가 정각이 되자 말했다.
“시간이 다 됐군요. 따라오시죠.”
정성호가 대기실을 쓱 훑었다.
시험관 뒤를 따라 걸으며 정성호가 권허중에게 슬쩍 물어봤다.
“20명뿐인데? 어떻게 된 거냐?“
“모르셨습니까? 얼마 전에 상시 채용으로 바뀌었습니다.”
어쩐지 신청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일정이 잡히더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상시 채용으로 바뀌면서 시험 빈도가 늘었으니 지원자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뭐…… 오전은 별것 없군.”
다행히 오전 시험 일정은 크게 특별한 건 없었다.
등급 심사를 다시 한 번 정밀하게 하는 거라거나, 기본적인 적성 평가를 하는 게 다였다.
“본격적인 건 오후라는 건데…….”
점심시간에 식사를 끝마친 정성호가 대기실로 돌아가며 권허중에게 물었다.
“넌, 뭐, 아는 거 없냐?”
“소문으로는 실전 능력 평가를 한답니다.”
“어떤 방식으로?”
측정하는 방법이야 여러 개가 있을 것이다.
미리 준비해 둔 인근의 던전에 들어가서 평가한다거나,
최근 개발된 가상 시뮬레이션을 통해 확인한다거나,
그도 아니면…….
“시험관과 대련이라고 들었는데…….”
역시…….
“뭐, 확실하진 않습니다.”
정성호가 대기실에서 권허중과 기다리자 점심시간이 끝나고 시험관이 들어왔다.
오전이랑 다르게 오후에는 시험관이 모두 넷이었다.
“오후 일정 시작하겠습니다.”
오전에 그 시험관이 말했다.
“전투 계열 각성자 분들은 저를 따라서 오시죠.”
정성호는 전투 계열.
저 시험관을 따라가야 할 것 같았다.
‘우락부락한 체형부터가 전투 계열일 것 같더라니….’
시험관이 앞장서 걷기 시작하자 정성호와 권허중를 비롯한 전투 계열 지원자들이 따라 걸었다.
시험관이 안내한 곳은 같은 건물 한 층 아래에 위치한 단련실이었다.
정성호가 벽을 노크하듯 살짝 두들겨 확인했다.
두께도 두께였지만,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서 어지간해서 무너지는 염려는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날뛰어도 끄떡도 없겠구만.”
미리 준비된 자리에 지원자들이 끝자리부터 순서대로 앉았다.
시험관이 말했다.
“그럼 가장 우측 지원자님부터 시작하시죠.”
정성호는 6명 중 우측에서 3번째였다.
제일 우측은…….
여성 지원자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험관이 말했다.
“측정 시간은 5분, 준비되셨다면 들어오셔도 됩니다.”
시험관을 중심에 두고 간을 보던 여자가 달려들었다.
여자와 시험관의 전투를 유심히 지켜보고 권허중이 속삭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합격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 보이냐?”
“그렇지 않습니까? 저 여자 아무래도 B급 초입 수준밖에 안 돼 보이는데 비등하잖습니까?”
정성호가 말없이 조금 더 지켜보자니 측정이 종료됐다.
아쉬운 표정으로 여자가 자리로 돌가는 게 보였다.
권허중 말처럼 시험관을 우습게 본 남자가 자신 있게 일어나 나섰다.
남자와 시험관의 싸움을 지켜보던 권허중이 표정을 구겼다.
“눈치챘냐?”
“수준을 맞춰 준 거라고 봐야겠군요.”
“그래, 저 시험관 제법이야.”
처음 대기실에 들어왔을 때는 마나를 완전히 억누르고 있어서 긴가 민가했는데 확실해졌다.
처음 여자와 달리 두 번째 지원자는 A급 각성자 수준은 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험관은 그에 맞춰 여전히 움직임이 쉽게 대응하고 있었다.
상대가 변했음에도 수준이 같다는건 시험관이 힘을 조절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
정성호가 보아할 때 시험관은 최소 S급 수준은 되어 보였다.
‘도대체 합격자를 뽑을 마음이 있긴 한 거야?’
고작 5분으로 저런 괴물을 어떻게 이기란 건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성호뿐만 아니라 대련 중이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는지…….
“자리로 돌아가시죠.”
“내가 불합격이라고?”
시험을 마치고 남자가 언성을 높혔다.
“경고하겠습니다. 일단 자리로 돌아…….”
휙.
남자가 소매에서 꺼낸 나이프를 휘둘렀다.
시험관의 귓불 끝에 옅은 상처가 생겨난 순간이었다.
콰앙.
남자가 벽에 박혔다.
얼굴이 약간 함몰된 남자는 움직임이 없는 걸 봐서는 기절한 듯 보였다.
나이프를 발로 차서 구석으로 밀어내고 시험관이 말했다.
“다음 분 오시죠.”
정성호가 천천히 걸어서 시험관 앞에 섰다.
“들어가면 되나?”
시험관이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성호의 시험은 유독 거칠고 사나웠다.
조금 전 남자처럼 흉기를 휘둘러서가 아니고 시험관이 정성호의 공격을 이전처럼 여유롭게 대처하지 못하며 벌어진 일이었다.
시험관은 처음엔 정성호의 공격을 이전처럼 피하며 상대하려고 했지만, 힘을 조절해 가며 피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이섰는지 정성호의 공격을 몸으로 받으며 상대했다.
퍽, 퍼억, 퍽.
어느덧 시험장엔 거친 숨소리와 주먹질 소리만 연이어 들렸다.
그 자리에 서서 서로 주먹만을 주고받았다.
땀 냄새 나는 남자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권허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호야, 힘내라!”
새끼, 형이라니까…….
숨이 가뿐 자신과는 다르게 비교적 멀쩡한 시험관의 모습이 보였다.
정성호가 있는 힘을 다해 마나를 쥐어짜 내질렀다. 지금과는 다른 강력한 한 방이었다.
‘어디 이걸 처먹고도 버티나 보자.’
퍼억.
주먹은 당연하게도 시험관의 뺨을 후렸다. 하지만…….
“…….”
시험관은 정성호보다 월등히 강했다.
단련실에 구석에서 구경하던 지원자들의 머리칼이 흩날릴 정도로 강한 주먹이었는데……,
시험관은 멀쩡히 정성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퍼억.
이번엔 시험관의 주먹이 이어졌다.
정성호의 뺨에 시험관의 주먹이 직격했다.
때린 위력만큼 되돌려받은 느낌이었다.
조금 전이랑은 비교 할 수 없을 법한 묵직한 주먹에 얻어맞자마자 머리가 핑 도는 게 느껴졌다.
털썩.
무릎을 꿇은 정성호가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마지막 생각을 끝으로 시험관이라는 벽앞에서 정성호가 의식을 잃었다.
‘한때는 10대길드의 대표였던 내가 청초길드에선 불합격자라고……?’
* * *
청초길드가 전 세계 최고의 길드라는 소리를 듣는 건 분명 주상혁의 후광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결과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상혁을 뺀다고 해서 청초길드의 전력이 별 볼 일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청초길드의 용병 느낌으로 활동하고 있는 송치수 공격대를 제외하더라도…….
길드 대표 주재호 SS급.
길드 차남 주재혁 SS급.
길드 삼남 주민혁 SS급.
당장에 이 셋만 해도 전 세계에 내로라하는 길드를 웃도는 전력이며 심지어 이전부터 쭉 청초길드에 몸을 의탁한 팀장들의 경우엔 기본적으로 S급이 되어 있었다.
주상혁이 균형 잡힌 길드의 발전을 위해 보충제 정도는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단기 복용자면 몰라도 초창기부터 쭉 길드를 지켜 온 각성자들의 경우엔 장기 복용의 결과 대부분 S급.
그야말로 지구상에서 제일 강한 단체라고 해도 허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고태영 시험관이 부상을?”
“네, 저도 방금 막 듣고 오는 길입니다.”
주재호가 깜짝 놀랐다.
고태영 정도면 적어도 국내 지원자들을 상대하면서 부상을 입을 리가 없었다.
그 역시 S급 각성자였고 시험관들중에서도 제법 수준이 높은 사람이다.
먼저 고태영을 부상 입힌 남자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보다 고태영의 안부를 물었다.
“고태영 팀장의 부상은 어느 정도입니까? 심각합니까?”
“다행히 그리 심한 부상은 아닌듯합니다. 제가 소식을 들었을 무렵엔 이미 보조 계열 각성자들에게 치료를 마친 상태였고. 멀쩡했습니다.”
주재호가 근심을 내려놓고 슬쩍 물었다.
“그래도 고태영 시험관을 부상 입힌건 의외로군요. 누군지 아십니까?”
“정성호 대표였습니다.”
주재호가 잘못 들은 건가 싶은 얼굴로 재차 물었다.
“정성호? 신라길드의 정성호 대표 말입니까?”
“예.”
예상외의 인물에 주재호가 순간 당황했다.
정성호 정도면 국내에서는 네임드 각성자다.
“장난 삼아 지원했을 리는 없고…… 정말로 지원이 목적이랍니까?”
“그건 알아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어째서죠? 그가 답을 안 해 줍니까?”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고 아직 기절한 상태입니다.”
“아… 그렇군요.”
하긴 정성호가 뛰어난 각성자인 건 사실이지만, S급 초입 수준의 각성자다.
고태영을 부상 입혔다면 반대로 정성호는 더 심하게 다쳤을 게 분명했다.
“정성호 대표는 무사합니까?”
“그건 걱정하실 것 없을 것 같습니다. 고태영 시험관이 적절히 힘 조절한 것 같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주재호가 말했다.
“깨어나면 제가 직접 물어보겠습니다. 그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 * *
정성호가 눈을 뜬 건 그날 해 질 녘이었다.
권허중이 눈을 번쩍 뜨는 정성호를 보고 물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정성호가 권허중의 머리를 한 대 후렸다.
아까 대련 도중에 은근슬쩍 말을 놓는걸 기억하고 있었다.
“왜 때리십니까?”
“됐고 여긴 어디냐?”
“청초길드의 의료실입니다.”
의료실이라…….
시험관에게 얻어맞고 기절한 순간이 떠올랐다.
츳…….
정성호가 권허중에게 물었다.
“시험은 어떻게 됐냐. 너도 떨어졌냐?”
“아뇨?”
“네가 시험관을 이겼다고?“
“무슨 소리십니까? 합격 조건은 이기는 게 아니었는데요?”
“뭐?”
조금 생각하다가 정성호가 이마를 탁 부여잡았다.
그 정도의 시험관을 이겨야 합격이라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되긴 했다.
정성호의 잘못은 없다고 볼수있었다.
괜히 정성호 앞 순서에서 남자가 오해해서 까분 덕분에 착각했을 뿐.
정성호가 물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됐냐?”
“그건…….”
권허중이 말하려고 할때였다.
달칵.
의료실 문을 열고 주재호가 들어왔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눈을 뜨셨나 보군요.”
“…….”
권허중에게 한 질문을 들었는지 주재호가 말했다.
“합격 여부라면 보류 상태입니다.”
“내가 떨어질 수도 있단 말입니까?”
“예. 대답 여하에 따라.”
정성호가 주재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다면 물어봐도 됩니다.”
“시험을 목적이 따로 있는 겁니까?”
정성호가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듯이 말했다.
“시험에 합격하려고 보지 다른 이유가 어딨습니까?”
“정말로 신라길드를 내려놓고 시험을 봤다는 겁니까?”
“…….”
정성호는 따로 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답은 될 수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주재호가 말했다.
“일단은 합격시켜 드리겠습니다만, 정성호 님과는 조금 더 대화를 나눠 봐야겠군요.”
“대화?”
“예, 신라길드의 인수합병에 관한 이야기 말입니다.”
“인수합병…….”
정성호가 물었다.
“지금 신라길드를 인수하겠다는 겁니까?”
“일단은 결론적으로 그렇습니다. 어차피 신라길드를 처분할 생각이시다면요.”
신라길드를 처분할 생각이긴 했다.
마음의 정리를 다 끝내고,
가능하다면 천천히.
갑작스러운 제안에 정성호가 고민에 잠겼다.
주재호가 말했다.
“조건은 만족할 만큼 맞춰 드리겠습니다.”
밑져야 본전.
일단 듣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찔러나 보듯 물었다.
“조건이라는 거 들어나 봅시다.”
“일단 돈은 둘째치고, 정성호 님의 레벨을 올려 드리겠습니다.”
“레벨?”
주재호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주머니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리모컨?”
삐빅.
주재호가 리모컨을 정성호에게 넘겼다.
리모컨의 중앙에 디지털 숫자가 보였다.
“71?”
“정성호 대표님의 현재 레벨입니다.”
정성호도 레벨에 대한 걸 모르지 않는다.
게임 같은 데서 흔히 강함을 표기하는 대표적인 방법이었으니까.
71이라…….
정성호가 물었다.
“이거 어떻게 사용하는 겁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측정하고 싶은 대상을 향하고 거기 붉은 버튼을 누르면 됩니다.”
정성호가 리모컨을 권허중에게 향하고 버튼을 눌렀다.
삐빅.
“65?”
정성호가 주재호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측정해 봐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삐빅.
“124?”
놀라운 숫자에 정성호의 눈이 커졌을 때였다.
주재호가 정중히 말했다.
“이만 돌려주시겠습니까?”
“아, 네.”
리모컨을 챙긴 주재호가 주머니에 다시 넣자 정성호가 넌지시 물었다.
“124면 어느 정도인 겁니까?”
저게 단순히 사기가 아니라면 눈앞의 주재호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주재호의 등급은 A.
주상혁이 있기에 이미 그 이상일 거라는 건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124라니?’
솔직히 당장에 기계가 사기는 아닐까 의심마저 들었다.
“저도 제대로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전해 들은 정보로 답해 드리자면 S급과 SS급의 경계가 85수준이며 SS급과 SSS급의 경계가 130레벨쯤 됩니다.”
“그럼 주 대표님이 SS급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되겠군요.”
주재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게 답했다.
정성호가 조금 생각하다가 물었다.
“S급과 A급의 경계는 혹시 어떻게 됩니까?”
“70입니다.”
S급 초입인 자신의 수준과 A급 끝자락 수준이던 권허중의 차이를 가늠하면 얼추 맞는 레벨이었다.
리모컨을 집어넣은 주머니를 향해 약간의 의심 섞인 눈길을 보내던 정성호가 말했다.
“그 기계 믿을 수 있는 겁니까?”
“믿기 힘드시겠지만, 나름 정확합니다.”
고민하던 정성호의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주재호가 조건으로 내건 레벨이라는 걸 어디까지 올려 줄 수 있나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레벨, 어디까지 올려 주실 겁니까?”
“100레벨까지는 올려 드리겠습니다.”
“100…….”
무려 100.
SSS급이 135레벨이라고 그랬으니, 적어도 SS급 초입 딱지는 떼게 해 주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주재호가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라길드를 넘기겠습니다.”
이번엔 고민할 것도 없이 답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가 급변하며 S급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좁아진 건 사실이었기에.
또 SS급이라는 꿈의 경지가 달콤했기에.
마음의 준비 같은 시답잖은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님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주재호가 잠시 의료실 밖으로 나가더니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읽어 보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정성호가 서류를 쓱 읽었다.
조건을 좋게 맞춰 준다더니 계약서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점이 꽤나 많았다.
당장에 막대한 레벨을 올려 준다는 것도 그랬는데 심지어 신라길드의 지분을 매입하는 단가도 후했다.
정성호가 혹시나 독소 조항이 있나 거듭 확인하고는 마침내 펜을 끄적일 때였다.
달칵.
의료실 문이 열리며 한사람이 들어왔다. 주상혁이었다.
“계약은 끝난 거죠?”
“그래.”
주상혁이 정성호에게 말했다.
“거기 웃통 벗고 누워 봐요.”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혈관을 타고 흐르던 마나가 온몸을 간질이는듯한 감각.
침을 한바탕 놓은 주상혁이 시간이 되자 침을 뽑았다.
정성호가 몸을 점검했다.
‘강해진 거 같긴 한데…….’
확실히 이전보다 압도적으로 강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정성호가 약속받은 건 100레벨.
월등히 강해진 건 느낄 수 있었지만, 어째 그 정도로 강해졌다기에는 한참 모자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죄송한데 조금 전에 그 리모컨 한 번만 더 빌릴 수 있겠습니까?”
주재호가 흔쾌히 리모컨을 빌려줬다.
삐빅.
“77……?”
역시나 그러면 그렇지,
100레벨은커녕 80레벨도 넘지 못한 상태였다.
정성호가 따지고 들었다.
“100이라고 안 하셨……?!”
주재호의 시선을 받고 주상혁이 귀찮다는 한숨을 흘렸다.
정성호를 침대에 강하게 눕힌 주상혁이 리모컨을 빼앗고는 중얼거렸다.
“어디서 이상한 걸 아셨어, 귀찮게…….”
“잠깐 날 어쩔 생각이지?! 놔라!”
벗어나려고 해 봤지만, 이상하리만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신비한 기분이었다.
“움직이지 마요. 입 돌아가니까.”
콕콕콕.
침이 다시금 박히기 시작했다.
깜짝 놀랐던 처음과 다르게 정성호가 안심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나의 감각.
잘못되는가 했더니 조금 전 그 감각이 느껴진 이유였다.
* * *
몰피스 녀석들이 마침내 봉오리 졌지만, 주상혁은 여전히 강혜영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주재호의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정성호 대표에게 침을 놔 달라고요?”
이유를 듣자 하니 이랬다.
던전의 난이도가 급변하면서 S급 던전의 처리를 청초길드에게 의존하는 게 커졌다.
지금이야 송치수 일행은 물론이고 쌍둥이들까지 열심히 던전을 해치우고 있지만, 이른바 인력난이라는 것이었다.
주재호는 이참에 신라길드를 인수해서 청초길드의 지부로 만들 생각을 한 듯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한때 전국구 길드였던 태산길드를 인수해 지금의 각성자 협회를 만들었듯.
필요하다면 신라길드를 청초길드의 지부처럼 만드는 편이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긴 장거리 이동이 불편하긴 하겠지.’
주상혁은 하는 수 없이 강혜영의 집 생활을 정리했다.
막상 결심은 섰는데 동기가 없어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을 뿐이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한때 10대 길드였던 신라길드, 역사의 뒤안길 속으로.
―청초길드, 신라길드 인수 완료.
―정성호, 신라길드 지분 매각,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대화는?
끄으으응.
“대화는 무슨 대화. 그냥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은 거지.”
정성호에게 침을 몽땅 놓고 옥상으로 올라온 주상혁이 기지개를 켜고는 옥상을 쓱 둘러봤다.
변하지 않은 옥상의 모습을 보자니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오랜만에 여기서 탕약이나 달여 볼까?”
마땅히 할 일도 없겠다 돌아온 기분 좀 낼 겸 조금 달이기로 했다.
자리를 잡고 탕약을 달이길 잠시.
겉옷 주머니에서 뭔가 잡혔다.
『첨단 레벨 측정기.』
“아, 이걸 가지고 왔네.”
아까 정성호를 제압하고 빼앗아서 주머니에 넣었던 게 생각났다.
이거 아버지가 사용하시는 건데…….
“내일 돌려 드려야지.”
주머니로 다시 집어넣고는 탕약을 다시 달였다.
30분쯤 탕약을 달였을 때였다.
주주가 왕왕 짖는 소리가 들렸다.
뭔 일인가 해서 고개를 들었더니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는 눈이 유독 많이 내리긴 했지.”
주상혁의 기억상 이번 눈은 유독 길고 많이 내린다.
회관을 떠나던 마지막 회차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제 끝이구나.”
3년, 남들은 몰랐지만, 주상혁은 알고 있는 미래의 기억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눈이었다. 하지만.
“뭐 이제 와서 상관없긴 하지.”
사실 툭 까놓고 말하면 크게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8개월 전쯤 엔키라도 던전을 처리하면서 미래가 완전히 바뀌었다.
던전과 관련된 큼지막한 사건들이라거나…….
이상기후 현상이나 날씨 같은…….
이런 불변의 정보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지식이 이미 알고 있던 미래와 많이 달랐다.
탕약을 달이던 주상혁이 본격적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복귀를 알리는 탕약은 이걸로 끝.
저 멀리 두 달여간 닫아 뒀던 의원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일부터는 의원도 좀 나가 볼까?”
* *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주상혁이 졸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알았어, 밥 먹자, 그래.”
주상혁이 주주와 백호의 밥을 챙겨주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가볍게 씻으려고 겉옷부터 벗는데 뭔가가 집혔다.
어제 주머니에 다시 넣어뒀던 레벨 측정기였다.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레벨 측정기에 관련된 기억은 딱히 아니고 꽤 오래전 엄준식과 했던 통화 일이었다.
“재미있는 걸 발견했으니 꼭 한번 방문해 달라는 내용의 전화였던가?”
미루고 미루다가 깜박해 버린 약속이 지금 막 생각이 났다.
괜히 엄준식에게 미안해졌다.
“의원 가는 길에 슬쩍 들렀다가 가지 뭐.”
어차피 엄준식의 연구소 역시 청초길드 근처로 옮긴 지 오래다.
삥 돌아가는 게 귀찮긴 하지만 외출하는 김에 들르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이것도 한번 물어보고 말이야.“
『첨단 레벨 측정기.』
「천재 발명가가 심심풀이로 만든 물건이다. 생명체의 전투력을 세부 측정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주상혁에게는 딱히 필요가 없어서 주재호에게 줬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제법 신기한 물건이긴 했다.
이걸 보면 엄준식이 좋아할지도…….
가볍게 씻고 욕실을 나왔다.
의원으로 갈 준비를 마친 주상혁이 방을 나섰다.
삥 돌아서 청초길드 뒤편에 엄준식의 연구소에 도착했다.
연구소에 앞에 도착해서 연락을 넣자 잠시 후 엄준식이 바깥으로 나왔다.
“오랜만이네요.”
“제가 뭘 만들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습니까?”
“여하튼 궁금해서 왔잖아요.”
주상혁이 엄준식을 따라 연구소 안을 걷다가 말했다.
“그보다 재밌는 게 있는데요.”
“재밌는 거 말입니까?”
“이것 좀 봐주세요.”
앞장서 걷다가 걸음을 멈춘 엄준식에게 레벨 측정기를 내밀었더니…….
“왜 그러세요?”
엄준식이 레벨 측정기를 들고 유심히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뭘요?”
“일단 따라와 보시죠.”
엄준식이 다시 걸음을 옮기는 걸 3분쯤 따라 걸었다.
소장실에 도착했을 때였다.
엄준식이 주상혁과 마주 앉아 보란 듯이 레벨 측정기를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말했다.
“이게 주상혁 씨가 넘겨주신 거 맞죠?”
“네.”
“흠…….”
“왜 그러시는데요?”
“이거 보시죠.”
엄준식이 가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놨다.
『첨단 레벨 측정기.』
“제가 만든 겁니다.”
* * *
“제가 만든 겁니다.”
“어…… 네? 그쪽이 만들었다고요?”
엄준식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상혁이 책상에 모인 두 개의 레벨 측정기를 자세히 확인했다.
레벨 측정기는 크기부터 생김새까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누군가 같은 발명품을 떠올릴 수는 있다. 하지만…….
‘이건…….’
눈앞 두 개의 레벨 측정기는 단순히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도용.
그렇게 생각하는 게 합리적일 정도로 완벽하게 동일했다.
엄준식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거 어디서 나셨습니까?”
엄준식의 표정은 진지했다.
주상혁이 그랬듯 역시 도용을 떠올렸을 것이다.
정보가 새어 나간 곳이 있다면 재발생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일을 바로 잡을 생각이겠지…….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주상혁이 생각을 정리했는지 입을 열었다.
“반년 전쯤 누군가와 크게 다툰 일이 있습니다.”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에 엄준식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프랑스에 가신 일이라면 들었습니다.”
주상혁이 프랑스에 갔던 일은 유명하다.
당시 백호의 폭주로 난처해할 때, 갑작스럽게 나타나며 해결했던 게 주상혁이었으니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눈앞의 레벨 측정기는 거기서 우연히 얻은 물건입니다. 녀석들 중 한 명을 죽이고 말이죠.”
“그렇군요.”
“그리고 아마 도용 같은 건 아닐 겁니다.”
이건 제법 확신하고 있었다.
엄준식의 레벨 측정기를 본 순간 당황한 건 사실이지만…….
‘짐작 가는 부분이 있어.’
서로 같은 디자인의 레벨 측정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확신하시나 보군요?”
“네.”
엄준식이 단호한 주상혁의 대답에 사람 좋게 웃었다.
“뭐, 그렇게 장담하신다니 한편으로는 안심이 됩니다만…… 확실히 단언하시는 이유가 궁금하긴 하군요.”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않은데?”
“그전에 다른 발명품은 없습니까?”
추측이 맞는다면 반드시 다른 발명품이 있어야 한다.
“있긴 합니다만…….”
“그게 뭐죠?”
엄준식이 주상혁을 뻔히 보다가 머리를 벅벅 긁더니 말했다.
“뭐, 어차피 보여 드리려고 했으니 어쩔수 없군요.”
엄준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의 책상 서랍에서 물건 하나를 가지고 왔다.
야구공 크기의 흑색 구체였는데 사용처를 쉽게 예상하기 힘든 녀석이었다.
“바로 이겁니다.”
“그게 뭡니까?”
“재미있는 녀석입니다.”
“재미있는 거요?”
엄준식이 끄덕이더니 주상혁의 팔찌를 요구했다.
지금은 백호가 봉인된 팔찌였다.
“그거 잠시 빌릴 수 있겠습니까?”
“혹시 위험한 겁니까?”
위험한 거라면 절대 사양할 생각이었다.
팔찌 안에는 다름 아닌 백호가 봉인되어 있으니까.
“전혀 아닙니다.”
“괜찮다는 거죠?”
“네. 파손 위험을 생각하는 거라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조금 못 미덥긴 하지만 자신만만한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팔찌를 빼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잠시 후 엄준식이 주먹만 한 크기의 구체를 가지고 와 조작하기 시작했다.
엄준식이 조작한 구체를 팔찌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잠시 물러나시죠.”
“안 위험하다면서요?”
“위험한 건 아니긴 한데 일단 물러나는 게 좋습니다.”
엄준식의 말에 마지못해 조금 물러났을 때였다.
팔찌와 동그란 구체 사이에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네.”
팔찌와 구체의 스파크가 강해질 무렵 구체의 외벽이 조금씩 불에 달군 광석처럼 녹아 허물어지는 게 보인 순간이었다.
번쩍.
시꺼먼 빛과 함께…….
챙그랑.
“어……?”
테이블 위에 또 다른 팔찌 하나가 생겨났다.
조금 전 둥그런 구체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물건에 깜짝 놀라 팔찌를 집어 들었다.
『흙빛 마나의 운령팔찌.』
「흙빛의 마나를 머금고 있는 복제된 팔찌다.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만큼 진품의 능력을 대부분 복제했다. 팔찌 안에 존재하는 마나가 착용자의 신체 능력을 큰 폭으로 성장시켜 줄 것 같다.」
[힘 +15] [민첩 +25] [마나 20]―착용자는 백호의 클론을 소환할 수 있다.
언젠가 분명 본 적 있는 비쥬얼.
순천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을 당시 지하에 묻혀 있던 유적을 지키고 있던 깜깜이의 팔찌와 무척이나 흡사하게 생겨 있었다.
‘그동안 줄곧 어떻게 탄생했나 궁금했는데…….’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복제가 됐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그보다 중요한 건…….
‘이걸로 확실해졌네.’
그동안 경험했던 던전 속 유적의 정체는 다름 아닌 주상혁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눈앞의 엄준식도 함께 말이다.
‘근데 내가 생각한 발명품은…….’
이건 아니었다.
비밀이 밝혀진건 기쁜 일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주상혁이 떠올린 발명품은 회귀와 관련된 발명품이었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을 발명하는 엄준식이라면…….
천재라고 소문이 난 엄준식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다른 발명품은 없습니까?”
“발명이란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아쉽지만 다른 건 없다는 걸 의미.
주상혁이 깊게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회귀에 관한 걸 이곳에서 털어놓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지만…….
대화를 나눠 보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정말로 회귀가 그의 발명품과 관련이 있다면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큰 진전이 있을지 몰랐다.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진지한 말이라고 하시면?”
“아까 도용이 아닐 거라고 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엄준식의 표정도 흥미롭게 변했다.
“들어보죠.”
자리에 도로 앉은 주상혁이 말을 시작했다.
유적에서 발견된 깜깜이의 팔찌 이야기.
저자를 알 수 없는 일지에 대한 이야기.
유적에 항상 존재하던 다양한 약초에 대한 이야기 등등.
근래에 주상혁이 겪고 있는 수수께끼의 데자뷔까지 싹 다 이야기하자 엄준식이 말했다.
“그러니까 주상혁 님은 제가 회귀에 관련된 발명품과 던전을 생성할 수 있는 발명품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군요.”
“뭐, 그렇죠.”
이야기를 다 들었다면 주상혁을 미친놈 취급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텐데,
엄준식은 의외로 흥미로운 얼굴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엄준식이 물었다.
“왜요?”
“그…… 제가 한 말이 믿어지십니까?”
“많은 증거가 회귀를 말하고 있지요, 이 경우 믿을 수 있냐 믿을 수 없냐가 중요한 게 아니죠.”
과연 발명가다운 말투로 답해 온다.
“회귀를 가능하게 하는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냐 없냐가 중요합니다.”
그말을 끝으로 조금 생각에 잠겨있던 엄준식이 잠시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단언컨대 마나메탈로 만든 발명품으로 회귀는 불가능할 겁니다.”
‘회귀’는 불가능.
그 말은 즉 가능한 건 있다는 말이다. 가령…….
“던전을 만드는 건?”
“네,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이보다 자신에 찬 목소리가 존재할 리 없었다.
“단언하는 이유는요?”
“제가 마나메탈로 만든 발명품을 예로 들어서 이야기해 보죠. 전이 아티팩트, 던전 탈출 포탈 이건 말할 필요도 없겠죠. 차원이나 공간과 관련된 발명품입니다. 실제로 예전에 마나메탈의 특성 중 하나를 본적이 있으실 겁니다 어땠습니까?”
엄준식의 말마따나 예전에 엄준식이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있다면서 보여 준 적이 있었다.
마나메탈의 마나막 안에 있던 금속만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가 잠시 후 나타나던 모습을 떠올랐다.
“다른 차원으로 보냈다가 나중에 다시 불러오는 건 마나메탈을 이용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던전은 단순히 그 부피가 커졌을 뿐이니까요.”
* * *
엄준식은 이야기하던 중 당장에 던전 생성기를 만들겠다며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엄준식을 지켜보던 주상혁은 답답해서 연구소를 나왔다.
던전 생성기를 당장에 만들어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며 말하려고 해도 이미 엄준식에게 말을 닿지 않는 듯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엄준식과 대화를 하고 나온 주상혁은 머리가 복잡했다.
일단 던전하고 유적은 그렇다고 치고…….
“회귀는 어떻게 한 거지?”
솔직히 궁금하다 못해 의문이다.
정채연의 유품인 시계를 아까 팔찌처럼 복제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팔찌 안에 있던 백호까지 복제가 된 것 보면…….’
아마 현 상태와 똑같이 복제하는 물건일 확률이 높았다.
기대하긴 힘들었다.
물론 회귀에 관한 생각 말고도 다른 것도 궁금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 던전이 발생하고 있다.
회귀 전의 주상혁이 유적과 관련된 던전을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면 그 이유는 대체 뭘까?
혹시 유적이 발견된 던전 외에도 전세계에 발생하는 모든 던전이 주상혁과 관련이 있을까?
오히려 알아가는 게 많을수록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어느덧 익숙하다 못해 일상이 되어 버린 데자뷔가 펼쳐졌다.
예전엔 데자뷔와 함께 극심한 두통까지 잇따랐지만, 이제는 두통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일지?”
이번 데자뷔의 내용은 다름 아닌 일지와 관련된 장면이었다.
예전에 한혜지와 한번 본 적 있던 스톤골렘과…….
약초가 가득 피어난 화원.
그 화원 구석에 일지를 내려 두는 모습.
“일지…….”
주상혁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의원으로 걸어가던 걸음을 멈췄다.
인벤토리를 열고 한쪽 가방에 모아뒀던 일지를 전부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일지도 내가 썼단 말이 되는 건가 그럼?”
혹시나 당시에 놓쳤을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생각으로 일지를 펼친 주상혁이 깜짝 놀랐다.
“어……?”
예전엔 읽을 수 없는 부분이 선명하게 보였다.
당시 폴라나를 비롯한 약초가 필요할 자신을 위해 이곳에 폴라나를 기른 이유라거나…….
혹여나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골렘의 난이도를 정한 이유 등이 적혀 있었다.
다른 일지들을 꺼내서 확인해 봤다.
다른 일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엔 보이지 않던 부분이 일부분이긴 해도 적혀 있었다.
광주에서 있을 오염된 마나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골머리 썩을 주상혁을 위한 베이칼을 심은 내용.
주주에게 그곳을 부탁한 내용.
강혜영에게 팔찌를 돌려받아 순천의 유적에다가 깜깜이를 배치한 내용.
아티팩트가 잔뜩 발견되었던 그 일지에서는 아티팩트의 사용자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보이면 좋았을 텐데…….”
안 보이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근본적으로 어째서 던전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여전히 찾을 수가 없었다.
회귀라거나 던전에 관한 정보가 적혔을 것으로 예상되는 부분은 여전히 읽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다시 원점인가…….”
실망감이 스쳐 지나갈 때였다.
문뜩 하나가 떠올랐다.
반년 전쯤 아르돈이 말한…….
“혹시 큰 위험이라는 놈이 원인인가?”
* * *
청초길드에는 하루 종일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몰려들었다.
어제저녁 신라길드의 인수합병 소식이 원인이었다.
―신라길드를 넘긴 이유 말입니까?
정성호는 늦은 시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거액의 금액도 금액이었지만, 주상혁을 통해 등급을 올려 주겠다는 약속이 결정적이었다고.
낮 12시, 주재호의 고등학교 동창 최정석이 방문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인터뷰의 내용대로 침만 맞을 수 있다면…….’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운영해 온 길드였지만,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다.
요즘 A급은 확실히 위상이 예전답지 않았으니까.
본관 1층의 안내 데스크에 도착한 최정석이 말했다.
“주재호 대표를 만나고 싶은데요.“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최정석입니다.”
안내원이 인터폰을 들고 잠시 비서실과 연락하기를…….
“기다려 주시면 사람을 보내겠답니다.”
최정석의 입에 옅은 호선이 그려졌다.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이유였다.
로비에서 잠시 기다릴 때였다.
‘저사람은?’
혜성길드의 장민철이었다.
작년에 장민주가 죽으면서 성장세가 완전히 꺾여 버렸다지만…….
‘저런 거물도 인수합병을 노리는 건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마 후에는 오랫동안 경상도 지방을 지탱해 오던 서재준 차예설 커플이라거나.
광주의 유성길드의 대표 유정, 한때 수도권을 주름잡던 10대 길드 중 한 곳, 신화의 추성현 대표의 모습까지 확인했을 때였다.
정장 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공손히 고개 숙였다.
최정석이 슬쩍 고개를 숙여 남자의 가슴팍 명찰을 확인했다.
비서실장 박상운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표실로 들어가시죠. 기다리십니다.”
“큼, 그러지.”
박상운을 따라 최정석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대표실이 위치한 15층 복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까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일류 길드의 대표들은 물론이고…….
‘저 사람은 중동의 석유 재벌 타만?’
그 외에도 이번에 미국의 헌터국장으로 당선된 넬슨이라거나.
중국의 각성자 협회장.
독일의 부총리까지.
TV나 인터넷 기사로나 보던 인물들도 상당히 있었다.
지긋한 시선을 받으며 최정석이 대표실에 들어갔다.
넓은 사무실을 확인하고 있자니 자리에서 일어난 주재호가 문 앞까지 걸어와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이야.”
“아, 그래.”
악수를 받고 자리로 이동했다.
소파에 앉은 주재호가 말했다.
“그나저나 여기엔 어쩐 일로?”
“친구 보러 오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만 오냐?”
“뭐, 그건 아니긴 하지.”
커피잔을 들어 올리는 주재호를 보던 최정석이 말했다.
“근데 그 재호야 인수합병 말이다.”
“인수합병? 그건 왜?”
조금 갑작스럽지만 재고 있을 생각 없었다.
학창 시절 어눌하던 주재호의 성격을 감안하면 쉽게 구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거 몇 자리 더 구한다며? 우리 길드는 안 되겠냐? 2류길드긴 해도 내가 나름 관리 잘해놔서…”
“몇 자리 더 구하는 건 맞는데, 공정하게 구해야지. 안전하고도 관련되니까.”
“자꾸 섭섭하게. 저번에 동창회에서 얼굴 한번 보자고 통화할 때도…….”
“정석아.”
최정석의 말을 자른 주재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되는 건 안돼.”
최정석의 표정이 구겨졌다.
학창 시절에는 별것도 아니던 B급 각성자 주제에 아들 하나 잘 낳아서 거만하게 구는 꼴이라니…….
최정석이 소리 높이려고 할 때였다.
콰앙.
복도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잠시 후 대표실 문이 열리더니 박상운이 꾸벅 사과했다.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박상운의 뒤편으로 신화길드의 추성현 대표가 걸레짝이 돼 기절한 모습이 보였다.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지는 박상운을 보던 최정석의 입안에 원인모를 마른침이 고였다.
꿀꺽.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예전에 자신이 알던 주재호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나이가 들면서 주름이 좀 생긴 거 말고는 익숙한 인상 때문에 사고를 칠 뻔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주재호는 그 주상혁의 부친.
주재호가 B급 각성자 그대로일 리 없었다.
‘강경책은 안 돼.’
최정석이 빠르게 뇌를 굴려 플랜 B를 세웠다.
‘그래, 차라리 우리 아영이랑…….’
다리를 놓는다는 계획.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아이였지만, 주상혁의 장인이 된다는 건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최정석이 말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괜히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야.”
“거절해서 미안한데, 어쩔 수 없는 부탁이었다.”
“알아, 인마, 나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내가 사과하는 의미로 오늘 저녁에 술이나 한잔 대접할게, 어때?”
“술이라…….”
조금 고민하던 주재호가 말했다.
“그래, 뭐 어려운 일이라고. 진수나 다른 애들도 좀 불러서 마시자.”
“그래 서로 자식 키우는 가장 입장에서 자식들 이야기도 좀 하면 좋겠네.”
최정석이 던진 떡밥을 주재호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정석이 너도 딸이 있었던가?”
“있지, 올해로 스물하나인데 네 아들보다 두 살 어려.”
최정석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딸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떡밥을 던졌는데 덥썩 물어주다니…….
“그러고 보니 상혁이는 애인은 있나?”
“애인?”
“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괜찮은 남자가 없다고 여간 떠들어 대서 말이다. 괜찮으면 만나서 이야기라도 나눠 보라고…….”
팡.
대표실 문이 급하게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왔다.
깜짝 놀라서 확인하니 그곳엔 참한 아가씨가 서있었다.
자신의 딸인 아영이도 외모로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데…….
잡티 하나 없는 백옥 같은 피부나 또렷한 이목구비에 늘씬한 허리까지 남자라면 쉽게 잊지 못할 그런 외모였다.
주재호가 말했다.
“혜영이구나? 무슨 일이니?”
“무슨 일은요, 꼭 일이 있어야만 오나요?”
강혜영이 쪼르르 주재호의 옆으로 가서 아양을 떨었다.
“혹시 아침 식사 하셨어요?”
“바쁜 일이 있어서 아직 못 했구나.”
“그럼 안 돼요. 건강 챙기셔야죠.”
강혜영이 도시락 가방을 풀면서 말했다.
“샌드위치 좀 드세요, 아버님”
“아버님?”
“네, 상혁 오빠 아버님인데 아버님이죠.”
강혜영이 생글생글한 미소로 웃다가 최정석을 슬쩍 노려봤다.
움찔한 최정석이 한숨 쉬었다.
아무래도 아영이와 선을 놓겠다는 방법도…….
‘글렀군.’
* * *
주상혁은 예정대로 의원으로 향했다.
오전 10시.
엄준식의 연구소에 들렀다 오면서 시간을 조금 빼앗겼다.
‘어떠려나?’
말도 없이 2달 동안 잠수를 탔다.
어제 얼핏 보기에 의원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던데 이제 와서 얼굴을 들이밀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환불해 달라고 하면 곤란한데…….’
이미 주주랑 자신의 배 속으로 대부분 사라졌다.
차라리 멱살을 잡는 거면 괜찮은데…….
주상혁이 모퉁이를 돌아 의원 앞에 도착했다.
의원 앞에는 주상혁의 생각대로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
중동 쪽 까무잡잡한 피부.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 등이 해당되는 극동아시아 계열의 피부.
서유럽 쪽 백인이라거나 흑인도 존재했다.
주상혁을 발견한 사람들이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손을 뻗기에 멱살을 잡으려나 했더니 양손을 잡고 눈물을 보였다.
“드디어 오셨군요.”
“기다렸습니다.”
머쓱.
환불해 달라고 생떼를 쓰거나 멱살을 잡을 거라는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오래전 헤어진 가족이 생환한 것처럼 극진히 반겨 주자 괜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주상혁이 의원 문을 열면서 말했다.
“날도 찬데, 일단 들어오시죠.”
사람들이 안으로 우르르 따라 들어왔다.
“주주랑 백호도 부탁할게.”
주주와 백호에게 접객을 맡기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래도 복귀 첫날이니까…….’
그동안 얌전히 기다려 준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베풀기로 했다.
평소 귀찮으면 진료를 마치고 휙 모습을 감췄었지만, 오늘은 이전과는 다르게 밤을 새워서라도 모두 진료해 줄 생각이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5명 제한이던 3순위 대기자들도 제한도 없애 주자.’
오랜만의 진료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손님은 많았고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슬슬 점심시간인데…….’
오늘 하루만큼은 사죄의 의미로 점심시간을 거르려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강혜영이 의원에 들어왔다.
와왕!
“주주, 안녕?”
주주와 인사를 나누고 진료실로 강혜영이 들어왔다.
“여긴 어쩐 일?”
“그냥 오빠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근데 점심 언제 먹어요?”
“오늘은 거르려고.”
“왜요?”
“그냥 그런 게 있다.”
“샌드위치 싸 왔는데 아깝다…….”
“샌드위치?”
“네.”
“아주머니 거?”
“네. 당연하죠, 오빠 제가 만든 건 안 먹잖아요.”
강혜영의 저택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의 샌드위치는 저택에서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특제 드레싱 소스가 일품이란 말이지…….
주상혁이 대기실로 이어진 문을 닫으며 말했다.
“2시까지 점심 좀 먹고 올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주상혁의 결심은 샌드위치에 쉽게 무너졌다.
진료실에 붙어 있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도시락 반합을 푸는 걸 지켜 보다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슬쩍 물었다.
“근데 위쪽은 비어 있네?”
“오는 길에 길드에 들려서 아버님 드렸어요.”
“아, 그래?”
뭐 다른 사람이 먹은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먹었다는데, 뭐…….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들었다.
한입 베어 물었더니 신선하고 아삭한 야채와 담백한 햄과 어울리는 드레싱 소스의 풍미가 전해졌다.
금세 하나를 다 먹고는 새 거를 집어들던 주상혁이 퀘스트를 떠올렸다.
‘근데 이건 어쩐다…….’
한 손으로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퀘스트를 확인했다.
몰피스들이 봉우리 지며 발생한 퀘스트들이었다.
Q. 봉오리 진 영초 [히든 퀘스트].
「신성한 영물의 은혜가 영초로 거듭나도록 만들었다. 다물고 있는 봉오리가 만개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관리가 필요하다. 시시각각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 완전히 꽃피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자.」
란투스의 핵: 0/1.
몰피스 이외에도 비슷한 퀘스트가 무려 열 개쯤.
물론 가지고 있는 재료로 처음에는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줬지만, 문제는 주상혁이 모르는 몬스터의 부산물이 관건이었다.
S급 던전의 발생률이 많이 늘어난 주상혁은 어지간한 재료들은 다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란투스의 핵을 비롯한 여러 재료들로 인해 깰 수가 없는 상태에 놓인 상태였다.
그래서 주상혁은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SS급 던전에서 발생하는 몬스터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국내에 말고 해외에도 슬쩍 소문을 내볼까?”
물론, 그러기에 마침 좋은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 * *
점심시간이 끝이 나고 다시 진료를 시작했다.
처음에 날을 새서라도 모든 환자를 진료하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밤 8시쯤 되니 손님이 끊겼다.
복귀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인지 손님이 추가로 오지 않은 이유가 컸다.
“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갈까?”
와왕!
냐아아앙!
주주랑 백호도 피곤했는지 뒷정리하는 걸 도와줬다.
점심에 와서 오후 진료 보는 동안 도와준 강혜영이 말했다.
“오빠 이거 수건은 어떻게 해요?”
“수건은 세탁 한번 해서 버릴 거니까 세탁기 옆에 둬.”
“네.”
의원 문을 닫고 돌아섰다.
미리 나와서 기다리던 주주와 백호를 품에 안고 걷기 시작했다.
옆자리에서 따라 걷는 강혜영에게 말했다.
“근데 진짜 여기서 자고 간다고?”
“네, 왜? 안 돼요?”
“뭐, 안될 거까지야.”
강혜영의 집에서 두 달 넘게 신세를 졌다.
역으로 좀 머물다 간대도 딱히…….
“근데 알지? 막 고용인 아주머니들이 있고 그러진 않아.”
“네, 알아요.”
뭐 강혜영이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니고 본인도 안다는데 더 말할 마음은 없었다.
길드로 돌아와서 3층 복도를 걸을 때였다.
와왕!
“그래, 잘 지키고 있었어, 주육이?”
아르돈이 머물고 있는 방 앞을 지키고 있던 주육이가 인사했다.
주육이와 조금 놀아 주다가 슬쩍 방문을 바라봤다.
아르돈을 감금한 지 벌써 8개월.
슬슬 불만을 가질 법도한데…….
‘뭐가 이렇게 조용하지?’
아르돈은 가두면 가둔 대로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죽은 건 아니었다.
안에서 마나가 느껴지는 걸 봐서 딱히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거나.
몰래 창문으로 달아났다거나 하는 건 절대 아닐 것이다.
평소처럼 그냥 지나가려다가 말고 노크를 했다.
아르돈이 방문을 열었다.
새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는 아르돈을 보고 주상혁이 말했다.
“뭐 하고 있었냐?”
“기도를 좀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 무슨 기도?”
여기서 나갈 수 있는 지혜를 달라며 기도라도 했나 싶어서 물어봤더니…….
“미래에 빛이 깃들기를 빌었습니다.”
신앙인다운 답이 들려왔다.
아, 맞다, 이 녀석 교황이었지?
“미래? 누구 미래? 네 미래?”
“글쎄요.”
항상 그래 왔듯, 녀석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말해 주기 싫으면 차라리 싫다고 말할 것이지…….
“답답하진 않냐?”
“그럭저럭 좋은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경험?”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이 늘어나자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제 스스로 올바른 신앙인이었나 하는, 덕분에 회개하고 뉘우치는 시간이…….”
“됐고.”
시답잖은 말이나 하길래 말을 끊어버렸다.
“좀 기다려 봐.”
아르돈을 세워 놓고 방으로 걸어가자니 강혜영이 따라왔다.
“오빠, 저 저 사람 알아요.”
“그래? 누군데?”
“교황님 맞죠?”
잘 알고 있다. 하긴 저렇게 보기 드문 적발에 상큼한 얼굴.
순백의 사제복을 걸친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강혜영을 믿긴 하지만 그래도 주의 주기로 했다.
“어디 가서 말하지 마라?”
“네? 네…… 당연히 그러긴 할 건데.”
강혜영이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괜찮은 거예요? 바깥이 엄청 시끄럽던데.”
교황이 실종된 지 7개월이 넘게 지났다.
아니 정확히는 그전부터 교황청을 비우고 있었으니 자잘하게 따지면 그보다 훨씬 길 것이다.
그 때문에 교황청에서는 아르돈을 찾기 위해 각성자를 잔뜩 뿌려 놓은 상태였다.
방으로 들어간 주상혁이 컴퓨터 책상 서랍에서 편지지랑 펜을 들고 다시 방을 나섰다.
주상혁이 들고 있는 물건을 아르돈에게 넘겼다.
“편지 정도는 쓰게 해 주마.”
“편지 말입니까?”
“그래 교황청이 요즘 시끄럽던데 안부 편지라도 쓰라고.”
아르돈이 눈만 끔벅끔벅하다가 곧이어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과연, 편지 안에 감금당했으니 도와 달라는 암호를 풀어 넣으면 되는 겁니까?”
“그것만은 하지 마.”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생긋 웃는다.
이거 영 못 미더운데…….
“하여튼 편지 다 쓰면 문 앞에 놔두든가.”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렇게 말하고 방으로 방향을 잡았다.
물론 나중에 따로 검수할 생각이었으니까.
따라 들어오는 강혜영에게 말했다.
“너, 방 따로 구해 줄까?”
“에이, 그냥 여기서 잘래요.”
그렇게 말하더니 강혜영이 넓은 침대 위에 얼굴을 파묻는다.
귀찮다라…….
하긴 뭐 그 말 그대로 귀찮긴 하다.
이 시간에 본관으로 가서 아버지와 대화하고 카드키를 새로 받아오는 건 말이다.
혼자 쓰기에는 침대가 넓긴 했으니까…….
“뭐, 너 좋을 대로 해라.”
* * *
전 세계적으로 던전의 난이도가 올랐지만, 비교적 세상은 빠르게 상황에 적응했다.
예전 S급 던전의 출몰 빈도만큼 SS급 던전이 생겨났지만, 잠수 타기 전까지 침을 맞은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이야 마이클이 있으니 SS급 던전이 발생한다고 해도 문제없었다.
중국은 웨이동이 주상혁에게 침을 몇 차례 맞으면서 그럭저럭 대처하고 있었고.
유럽의 경우 아멜리아가 핵심이 되어 대처하고 있었다.
사백 년 삼을 바치고 쫓겨났지만.
이후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시 불러 침을 더 놓아 주면서 거의 유럽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클린트는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도 여전히 산삼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주상혁이 언제라도 복귀하면 이것이 성장의 발판이 되어 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주상혁이 다시 진료를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산삼을 사용할 때가 됐음에 클린트는 기뻐했지만…….
의원에 들러서 산삼으로 대량의 초콜릿과 교환한 뒤 침을 맞고 있자니 주상혁이 슬쩍 새로운 퀘스트를 불쑥 제안했다.
“란투스의 핵? 그렐린의 혈액? 그게 다 뭐지?”
클린트도 의뢰를 받고 S급 던전을 제법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런 몬스터는 알지 못했다.
주상혁이 말했다.
“SS급 던전에서 발견되는 몬스터의 부산물 같단 말이지.”
주상혁의 의뢰는 등급 업과 관련된다.
“이거 추가로 누구한테 말했지?”
“아직은, 그쪽이 처음이야 어중이떠중이한테 맡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클린트는 이게 기회라고 여겼다.
슬슬 산삼을 구하는 데 힘들어지기 시작한 참이었다.
“리스트를 하나 적어 주겠나? 내가 한번 구해 보지.”
* * *
『Lv.156 클린트.』
주상혁이 의원을 나가는 클린트를 보고 씩 웃었다.
“역시 이용하기에 따라 듬직한 녀석이란 말이지.“
마이클은 경계하는 게 좋다고 말했어도.
본디 검은 휘두르는 방법에 따라서 이롭기도 하고 해롭기도 한 것이다.
역으로 베일 걸 두려워한다면 세상에 검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클린트는 검과 같은 녀석이다.
잘 다룰 수만 있다면 필수적인 녀석이었다.
주상혁은 누구보다 잘 다룰 자신이 있었고 말이다.
“오빠, 이거 어떻게 해요?”
클린트가 넘긴 묵직한 가방 더미를 들고 강혜영이 물었다.
“저기 휴게실에 일단 넣어 놓자.”
“알았어요.”
주상혁이 진료실을 대충 정리하고 대기실을 흘겨봤다.
파리가 날리는 대기실의 모습.
예전이라면 낯선 모습이겠지만, 요즘은 익숙한 광경이었다.
질 좋은 산삼이 생겨나려면 긴 시간을 요구한다.
물론 찾아보면 고산지 어디에 산삼이 존재하긴 할 테지만…….
“발견하기 힘들어진 건 사실일 테니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요즘은 진료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한정적이다.
하루에 많아 봐야 열 명 남짓.
그마저도 대부분 오전 시간대에 깔려 있었다.
주상혁이 남은 가방을 하나 들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강혜영이 가방을 쟁여 놓은 곳에 가방을 턱 올려놓고 휴게실 TV를 틀었다.
TV를 좀 보고 있자니…….
딸랑딸랑.
현관문의 도어 벨이 딸랑거렸다.
“손님 왔나 보네.”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대기실로 나가 보니 주주와 놀고 있는 마이클이 보였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마침 두 번째 퀘스트를 수령할 녀석이 찾아왔다.
『Lv.153 마이클.』
“진료를 다시 시작했다더니 정말이었군.”
“뭐, 슬슬 일할 때가 되긴 했지.”
주상혁이 마이클이 한쪽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슬쩍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무슨 목적?”
“여기에 온 목적이야 뻔하지.”
넘기는 가방을 받아들여 슬쩍 안을 확인했다.
삼백 년 삼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멜리아가 들고 왔던 녀석에 비한다면 부족한 게 사실이지만…….
‘이 정도도 감지덕지하지.’
요즘같이 장사가 안 되는 때에는 이 정도면 가뭄에 단비가 아니라 홍수가 날 정도로 비가 내린 거나 다름없었다.
“일단 저쪽에 대충 누워 봐.”
마이클이 웃통을 까고 병상에 누웠다.
주상혁이 침을 놓자니 마이클이 찌릿함을 참다가 말했다.
“언제 맞아도 굉장하긴 하군.”
“그래?”
『Lv.160 마이클.』
굉장하지, 아무렴 굉장하다고 느껴야지.
무려 7단계나 레벨이 상승했으니 마이클이 느끼지 못했을리 없었다.
레벨을 슬쩍 확인한 주상혁이 마찬가지로 슬쩍 퀘스트를 내밀었다.
“근데 말이지.”
“말하는 걸 보니 무슨 할 말이 있나 보군.”
“내가 새롭게 필요한 게 있어서 말이야.”
“산삼은 이제 필요 없다는 건가?”
“아니, 산삼도 필요하고 이것도 필요하다는 거지.”
조금 생각하던 마이클이 물었다.
“그게 뭐지?”
“란투스라는 몬스터 알아?”
* * *
주상혁의 작전은 먹혀들었다.
클린트, 마이클을 제외하고도 쓸만한 각성자들에게 리스트에 적힌 부산물을 구한다고 슬쩍 흘려 주면 각성자들은 하루가 멀다고 의원으로 찾아들었다.
이미 SS급 던전에서 구해 놓은 재료들로 인해 차곡차곡 퀘스트가 클리어되어 갔다.
두 달, 약초들이 개화하기만을 기다리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밤.
“드디어.”
일과를 마치고 하우스에 들렀다가 주상혁이 감격에 차올랐다.
이슬 몰피스.
이슬 리타.
이슬 노리암.
마침내 약초들이 활짝 폈다.
Q. 영초의 조화가 담긴 묘약 [?].
「청운 해태의 정성으로 길러진 영초로 비약 등급의 탕약을 만들자. 빼어난 재료들과 환생 의원의 진심 어린 정성이 만난다면 묘약이 탄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달성 조건: 묘약 등급의 탕약을 제조 0/1.
실패 조건: 제한 시간 내에 묘약 등급의 탕약 제조에 실패.
제한 시간: 6개월.
달성 보상: ?
퀘스트가 떠올랐다.
이슬 폴라나 때는 저번엔 비약 등급이었는데…….
“이번엔 묘약 등급이라고?”
한 단계 높은 단계인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게…….
제한 시간이 6개월이었으니까.
* * *
퀘스트를 모두 확인한 주상혁이 분신들에게 말했다.
“좀 거들어 줄래?”
와왕!
주상혁은 분신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혼자라면 제법 걸렸겠지만, 분신들이 도와준 덕에 2시간 남짓 걸려서 모두 채집할 수 있었다.
인벤토리 가득 약초를 담은 주상혁이 꼬리를 흔드는 여섯 마리의 분신을 확인했다.
3마리는 하우스에서 뒹굴고 뛰어노느라 꼬질꼬질해진 상태였고 3마리를 주상혁이 함께 데리고 온 녀석들이었다.
“그럼 잘 부탁할게?”
와왕!
주상혁이 꼬질꼬질해진 녀석들과 교대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갔다.
약초를 캐느라 시간이 제법 걸렸는데 자지 않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는지 강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었네요?”
시간은 이미 새벽 2시.
하우스에 들르는 일은 일과의 끝에 잠시 확인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넓은 하우스의 약초를 캐고 오느라 시간이 상당히 소모됐다.
주상혁이 욕실로 들어가 분신 녀석들을 씻겨 주며 물었다.
“약해영.”
“어! 그렇게 부르는 거 진짜 오랜만이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배시시 웃는다.
알고 지낸 지가 벌써 수년이니 면역이 생길 법도 한데…….
‘여전히 예쁘긴 해.’
강혜영의 요망한 눈웃음은 여전히 예뻤다.
별말을 하지 않자 강혜영이 물었다.
“근데 왜요?”
“딱히 눈치 주는 건 아니고 너 그냥 여기서 눌러앉게?”
“왜요? 나중에 책임지라고 할까 봐 무서워요?”
“무섭긴.”
강혜영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눈치 주는 정도도 아니고 대놓고 공사를 친 지도 제법 오래됐다.
주상혁 정도나 됐으니까 이 정도라도 버텼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혼인서류 제출하고 식장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뭐…… 슬슬 날짜나 잡을까?”
어지간히 놀랐는지 눈만 끔벅끔벅하다가 강혜영이 입을 뗐다.
“지, 지금 프로포즈 하는 거예요?”
와왕.
주상혁이 손을 바라봤다.
샴푸가 칠해진 강아지가 보였다.
빨리 거품을 지워달라는 듯한 분신의 말에 손을 움직이자니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강아지를 씻기면서 이런 말 하는 건 좀 아닌가?’
본인이 생각해도 분위기 없긴 하다.
당장에 드라마나 영화만 봐도 이벤트니, 뭐니 공들여서 하기도하고,
심지어 주상혁의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 봐도 목걸이니, 가락지니, 그럴듯한 예물 정도는 주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왜 싫냐? 싫으면 말고.”
“아뇨, 싫긴 왜 싫어요.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렇게 말하고는 강혜영이 말했다.
“다음 달은 어때요?”
그건 너무 빠르잖아.
* * *
분신들을 씻겨 준 주상혁이 욕실에서 나와 말했다.
“얘들 물기 좀 닦아 줘.”
“어디 가시게요?”
“탕약 좀 더 달이려고.”
“그렇게 달이고 또요?”
의원을 닫고 집으로 돌아오면 주상혁은 자정까지 탕약만 달인다.
6시에 진료를 끝낸다고 가정해도 무려 6시간.
이런 반응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잠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Q. 영초의 조화가 담긴 묘약 [?].
이게 있다.
새로 생겨난 퀘스트.
예전에 비약 등급의 물약을 달이라는 퀘스트 때는 제한 시간이 3개월.
그러나 처음 본 순간 눈치챘듯 6개월이었다.
‘그만큼 더 어려운 녀석이니까.’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어쩌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지금부터 부단히 노력해 두는 게 좋았다.
주상혁이 현관 문고리를 잡고 배웅나온 강혜영에게 말했다.
“기다리지 말고 자.”
“저 정말로 안 기다릴 거예요.”
“그래, 자도 된다니까?”
애초에 괜히 안 자고 기다리면 불편하기만 하다.
문을 닫고 나왔다.
주상혁을 따라 나온 주주가 보였다.
“주주도 같이 자도 되는데.”
도리질 치는 주주를 주상혁이 안아 들었다.
옥상에 도착해서 탕약을 달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4월의 봄날이었지만, 새벽 시간은 아직 많이 쌀쌀했다.
“그래도 불을 좀 지피니까, 좀 낫네.”
그리고 이제 추위가 좀 가셨으니 본격적으로 탕약을 달일 차례였다.
“시작은 기본부터 해 볼까?”
주상혁이 이미 마스터한 중급 폴라나 포션 달이는 방법을 기준으로 놓고 탕약을 달여 가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불 세기를 바꿔보고,
어떨 때는 표준으로 맞춰진 재료들을 하나씩 건드려 가며.
수십 번의 탕약을 달이던 주상혁이 다음 탕약을 달이려다가 멈칫했다.
‘전에는 어떻게 했더라?’
비약 등급의 물약을 만들 때.
그때도 상당히 고생했다.
이슬 멜팅과 이슬 폴라나를 추가해서 만드는 건 완전히 새로운 포션을 달이는 것처럼 난해한 일이었고 동시에 심오한 과정이 필요함을 체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상혁은 의외로 빨리 성공했다.
‘달이다 보니 어느 순간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 뒤였지.’
귀신에 씐 듯.
부채질 하나하나가.
약초를 넣는 몸짓 하나가.
심지어 피부로 전해지는 불의 온기와 장작 타는 소리까지 모두 귀신에 홀린 듯한 몸짓에 녹아들어 나온 듯한 느낌.
‘그날…….’
포션을 만들자마자 발생한 데자뷔 때문에 오래 생각할 틈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한 경험이었다.
‘어쩌면 과거에 내가 만들었을 수도…….’
그래 완전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접신이니 기적이니 따지는 것보다 지금에 와서는 그편이 더 현실성 있었다.
회귀와 함께 사라진 감각이 깨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확신은 없었다.
실제로 정화의 탕약을 만들 때도.
중급 폴라나 포션을 만들 때도.
심지어 하급 폴라나 포션을 만들 때마저도 그런 감각을 느껴 본 경험은 없었으니까.
하는 수 없이 다시 탕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오전 9시.
동이 트고도 한참을 탕약을 달이던 주상혁이 한숨 쉬었다.
‘이거 각오하긴 했지만, 허탕 제대로 쳤구만.’
하는 수 없이 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슬슬 준비해서 의원 문을 열어야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주상혁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침대 옆에서 옹기종기 모여 밥을 먹고 있는 하얀 녀석들이었다.
백호를 비롯한 주주의 분신들.
‘혜영이가 챙겨 줬나?’
정작 보이지 않는 강혜영을 찾자니 때마침 욕실 문을 열고 강혜영이 나왔다.
이미 외출 준비를 완전히 끝마친 듯한 모습의 강혜영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다녀온다 그랬지?”
어젯밤에 오간 이야기를 집에 가서 아빠한테 전해 준단다.
어찌나 신이 나 있던지.
‘설마…… 반대하시진 않겠지?’
그럴 가능성은 작겠지만, 딸바보 강태섭이라면 혹시나 하긴 했다.
“저 없어도 괜찮죠?”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 뭐.”
예전이나 바빴지, 요즘은 의원에 손님도 없다.
강혜영이 딱히 없대도 일손이 비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강혜영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갔다.
“나도 슬슬 준비해야지?”
오전 9시.
보통 9시 30분 전에는 다 씻고 의원을 열었으니까…….
부지런히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주주와 함께 욕실에 들어가서 씻고 의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세 명인가?”
문 앞에서 기다리는 손님은 적었다.
모두 다 해 셋.
참고로 오늘 진료할 총 손님 숫자까지 대충 머릿속에 그려졌다.
오전에 문 앞에서 기다리는 손님에다가 두셋쯤 더하면 보통 그날 진료하는 숫자였다.
“날이 갈수록 줄어가네.”
산삼은 단기간에 무한대로 구할 수 있는 영초는 아니다.
그 때문에 점점 구해 오는 손님이 적어지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의원을 열고 들어간 주상혁이 손님들에게 산삼을 받고 침을 놓아 줬다.
손님이 모두 돌아가자 의원은 더할 나위 없이 한가해졌다.
하아아암.
늘어져라 하품했더니 주주도 따라 하품했다.
“어디 보자 오늘도 끽해 봐야 한두 명 더 올텐데…….”
이럴 거 분위기 봐서 오전만 진료하고 탕약이나 달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주상혁이 퀘스트창을 켰다.
Q. 영초의 조화가 담긴 묘약 [?].
“약초는 뭐 아직 그럭저럭 여유 있긴 한데…….”
그렇다고 또 차고 넘치는 수준은 절대 아니다.
새벽에 소모한 분량의 아홉 배 수준이었으니까.
무심코 탕약을 달이다가 새벽에 뒤늦게 눈치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6개월이란 제한 시간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이슬 몰피스의 수량이었다.
물론 이슬 몰피스 말고 다른 이슬 약초를 사용해서 묘약 등급만 만들면 상관없는 것이니 사실상 약초에 조금 더 여유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재료는 6개월은커녕 1달쯤 달이면 바닥을 드러낼 게 뻔한 수량이었다.
“즉 지금 들고 있는 재료가 다 떨어지면 끝이라는 건데…….”
뭔가 마음이 조급해졌다.
1년,
몰피스 녀석들을 기르는 데에는 무려 그 정도의 시간이 들었기에 더욱 그랬다.
“저번처럼 운 좋게 기적이라도 일어나면 좋겠는데.”
주상혁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시간을 때울 만한 게 없나 해서 인터넷을 켠 주상혁이 포털사이트 메인에 걸린 기사를 보고 멈칫했다.
“뭐야, 이건?”
* * *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법한 사건이 발생했다.
드넓은 몽골 초원 하늘에 블랙홀을 연상시키는 듯한 포탈이 생겨난 이유였다.
어둠이 깔린 초원.
주상혁은 저걸 본 적이 있다.
아니 아직 전 세계가 저걸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S급 던전 브레이크 사건 당시 나타난 포탈과 흡사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황급히 TV를 켜서 채널을 찾았다.
“이만한 이슈라면 특보로 방송하는 게 당연하지.”
역시 어렵지 않게 채널을 찾을 수 있었다.
인공위성에서 찍었다는 포탈의 사진을 걸어놓고 전문가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나저나 진짜 크네…….”
포탈의 크기는 그야말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거의 몽골 초원 대부분을 뒤덮고 있었다.
어림잡아 전문가가 말하 건데 이전 S급 포탈에 비해 일흔 배 이상 크단다.
주상혁이 화면을 지켜보다가 중얼거렸다.
“근데 몬스터는 안 나오는 건가?”
예전에는 발생과 동시에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사라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몬스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뭐지……?
* * *
거대한 먹빛 포탈이 등장하고 세상은 그것에 주목했다.
S급 던전 브레이크 때와는 다르게 그 크기부터가 이미 압도적.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거대한 먹빛 포탈은 상공에 그저 떠 있을 뿐.
딱히 몬스터를 뱉어내거나.
그렇다고 폭발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포탈과 달리.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기이한 현상들이 지구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이유였다.
각성자들의 마나가 이유 없이 조금씩 늘어 간다거나.
각성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거나.
던전에서만 발견되던 폴라나를 비롯한 약초들이 세계 곳곳에서 하나둘 발견되기 시작하는 건 물론이고.
이전엔 인간에게 한정되었던 각성이 동물들에게도 일어났다.
동물원의 침팬지들이 어느 날 우리를 뜯고 소동을 부리는 간트 무리가 된다거나,
습한 산지에서 각성한 프로그맨 떼의 등장은 이제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이었다.
“오늘도 또인가?”
오늘도 각성한 동물로 인한 인명피해 사건이 헤드라인 뉴스로 자리 잡았다.
주상혁이 TV를 끄고는 창가를 바라봤다.
『Lv.141 청운해태.』
주주는 며칠 전부터 영 기운이 없었다.
괜히 멍해 있는 시간이 많이 생겼고.
우울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끼니를 거르는 때가 많이 늘었다.
“왜 입맛 없어?”
혹시나 해서 이미 수십 번도 넘게 해 본 진맥을 사용해 봤지만…….
‘아무 이상 없는데…….’
주주는 더할 나위 없이 건강했다.
필요 여하에 따라 기분 상태까지 진맥하는 진맥이었지만.
주주가 우울하다는 것 말고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그동안 전혀 그렇지 않던 녀석이 이런 모습을 보이자 걱정이 점점 쌓여갔다.
주주를 들어 올려서 물어봤다.
“뭔데 그래”
물어보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주주가 웬일로 입을 열었다.
와왕!
“어디 좀 다녀오겠다고?”
왕!
“돌아오는 거지?”
주주가 폴짝 뛰어내리더니 말했다.
와왕!
주상혁은 차마 주주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강원도에 살 적에 그렇게 뛰어다니는 걸 좋아하던 녀석이었으니까.
마음껏 바람 좀 쐬고 나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꼭 돌아오는 거다?”
* * *
주상혁은 사실 주주를 그렇게 과보호하며 키우지는 않았다.
강원도에 살 때만 해도 하루 종일 뛰놀게 놔둔다거나.
딱히 할 일이 없으면 길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도록 방임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거 묘하게 신경 쓰여.’
근 몇 주간 유독 기운이 없던 주주였기에 걱정이 됐다.
그래서 주상혁은 주주를 일단 보내주는 한편 몰래 뒤를 쫓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유기견이나 유기묘가 부쩍 늘었네…….’
무슨 이유인지는 솔직히 말해서 주상혁도 알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해하기도 한다.
각성해 버린 반려견에 치여 죽고 짓눌려 죽는 사건 사고 역시 종종 일어난다. 그러는 만큼 키우던 녀석들을 내놓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근데 그나저나 어디 가는 거지?’
아침에 주주의 뒤를 쫓고 벌써 점심 무렵.
전주에서 대전 인근까지 주주의 뒤를 쫓던 주상혁이 드디어 걸음을 멈췄다.
‘더 가지는 않는 건가?’
주주는 어느 공원 벤치에 폴짝 뛰어오르더니 그곳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도대체 뭘 하는 거지?’
꼬박 이틀.
말이 이틀이지,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주주는 이틀 동안 옴짝달싹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딱 보기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거 같기는 한데…….
문뜩 누군가 떠올랐다.
‘혹시 전 주인?’
물론 주상혁은 주주의 전 주인이 회귀전의 자신이라고 예상하고 있는 입장이긴 했다.
과거의 데자뷔에서도 주주를 키우겠다고 말하던 자신이었기에 영락없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전에 주인이 있었을 수도 있잖아?’
역시 그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주상혁이 본 기억은 그야말로 단편의 파편 같은 것이었으니까.
근처 슈퍼에서 산 빵을 우물우물하던 주상혁이 생각했다.
‘주주는 배 안 고픈가?’
오전 10시경이다.
평소라면 대체로 주주가 밥 달라고 보채는 시간.
분명히 배고플 텐데……
‘밥 주고 싶다.’
꼬박 이틀을 굶었으니 얼마나 배고플지 괜히 걱정이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출발할 때 든든히 먹이기라도 할걸…….
주상혁이 당장에라도 달려가 잔뜩 사료를 먹여 주고 싶은 마음은 겨우겨우 붙잡았을 때였다.
“또 저 녀석들인가?”
공원이 조금 시끄러워졌다 했더니 교복 차림의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근처 고등학교의 학생인 거 같았는데 딱 봐도 껄렁껄렁 불량해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이틀 연속 땡땡이를 친 건지 이 시간대면 공원을 지나가는 녀석들이 평소처럼 그냥 지나가면 되련만 주주 앞에 멈춰 섰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는 주주를 보더니 한 녀석이 말했다.
“야 우리 재밌는 거 할래?”
“재밌는 거, 뭐?”
“버림받은 줄도 모르고 기다리는 유기견 새끼 맞추기 어때?”
조약돌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말하던 녀석이 먼저 던지는 걸 시작으로 녀석들이 주주를 향해 돌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저, 저 못 배워 처먹은 새끼들이…….”
당장에 뛰쳐 나가서 대가리를 쥐어박으려던 주상혁이 멈칫했다.
이대로 모습을 드러내면 여태 주주를 미행했던 게 허사가 된다.
다행히 압도적인 레벨 차이 때문에 생채기도 나지 않은 주주의 모습을 위안 삼아 견디기로 했다.
“칫, 재미없어.”
돌멩이 몇 개 얻어맞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주주의 모습 때문인지 녀석들은 금세 흥미를 잃고 사라졌다.
주상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쁘게 움직였다.
견딘다고 했지, 용서한다고는 한 적 없었다.
공원을 나서는 녀석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 뭐야 당신.”
이유도 묻지 않는 구타가 시작됐다.
“너희 인성이 덜된 놈들은 처맞아야 돼.”
한참을 정신없이 처맞다가 이대로는 죽겠다 싶었는지 양아치들이 애걸복걸했다.
“형, 제발 이유라도…….”
“잘못한 게 있다면 뭔진 모르겠지만 사과할게요.”
씨익씨익 대던 주상혁이 말했다.
“우리 주주.”
“주주? 그게 뭔데요.”
“니들이 돌 던진 강아지다 호랑 말코 새끼들아.”
주상혁이 다시 한참을 더 패다가 전신에 피멍이 된 녀석들을 보고는 말했다.
다행히 힘 조절은 했는지 수백 대 가까이 맞고도 피멍 정도로 그쳐 있다는 게 기적이었다.
“행여라도 너희 내 눈에 보이지 마라, 진짜 뒤진다.”
* * *
미행 3일째 새벽.
벤치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던 주주가 마침내 움직였다.
난데없이 벤치 아래로 숨는 주주를 보고 주상혁이 의아하게 여겼을 때였다.
공원에 행인 한 명이 들어섰다.
왕!
품에 안고 있던 새하얀 강아지를 조심스럽게 놔둔 행인이 말했다.
“쉿! 이따가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알았지?”
와왕!
벤치 앞에 강아지 하나를 세워 두고 사라지는 행인이 보였다.
딱 봐도 유기하는 건데…….
“그럴 거면 기다리라고나 하지 말지.”
괜한 강아지만 불쌍하게 됐다.
‘근데 주주는 여전하네.’
행인이 사라지자 벤치 아래에서 나온 주주는 벤치 위로 돌아가 자리를 지켰다.
다시 날이 밝고 출근 시간대가 끝날 무렵.
어제 전신에 피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은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팔에 깁스를 한 녀석,
목발을 짚고 있는 녀석,
다리를 절뚝이는 녀석까지 세 녀석 모두 있었다.
“오, 씨바 깜짝이야.”
앞장서 걷던 양아치가 길 한복판에 앉아 있는 유기견을 보더니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주주와 오해하고 주상혁을 찾는 듯했다.
잠시 후 벤치 위에 앉아 있는 주주를 확인한 양아치들이 씨익 웃었다.
“뭐야, 이건 딴 놈이네?”
마침 주주와 생김새도 비슷하게 생겼겠다.
화풀이하듯 양아치가 강아지를 걷어찼다.
그것도 모자라 큼지막한 돌멩이를 던져 대기 시작하자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가 깜짝 놀라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주주를 보고 괜히 움찔한 양아치들이 공원에서 사라졌을 때였다.
무려 3일간 꼼짝도 하지 않던 주주가 본격적으로 공원을 나섰다.
주주를 따라 거리를 유지하며 걷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뭐야, 기다리는 게 저 개였어?”
내심 전주인일 거라고 생각하고 질투하고 있던 주상혁의 마음이 사르륵 녹았다.
역시 조금 더 미행하며 분위기를 살펴보니 주주가 기다린 건 유독 비슷하게 생긴 말티즈 같았다.
근데 그런 것 치고는…….
조금 이상한 게 있었다.
저 개가 처음 등장했을 때가 떠올랐다.
애타게 기다린 것 치고는 주주는 무척이나 침착했다.
심지어 지금만 해도 그렇다.
‘지금도 다리를 절뚝이며 걷는 데 딱히 도움을 주려는 듯한 느낌도 없고…….’
주주는 그저 유기견과 떨어져 얌전히 미행만 할 뿐이었다.
주주의 미행은 며칠이 계속됐다.
유기견은 도심을 쭉 배회하다가 근처 뒷산에 자리를 잡았다.
불과 몇 달 전이라면 사람들에게 애교라도 부려서 끼니라도 때웠겠지만…….
요즘은 유기견이 도심에서 어울려 살기에는 민심이 너무 각박했다.
‘근데 저런 것도 먹어도 되나?’
주주야 좋아하는 음식이라지만…….
뒷산을 배회하던 녀석은 먹을 수 있을 법한 건 다 먹었다.
나무 밑에 자란 버섯도.
풀 사이에 자란 쑥도.
근래에 이곳저곳에서 서식하기 시작한 폴라나도 그냥 되는 대로 먹는 분위기였다.
마음 같아서는 주상혁이 슬쩍 소시지라도 사서 먹이고 싶었지만…….
역시 그럴 수는 없었다.
주주가 대체 뭣 때문에 저 유기견을 미행하는지가 궁금했으니까.
‘뭐, 죽지는 않나 보네.’
폴라나를 먹고도 다행히 유기견은 멀쩡했다.
며칠간 주주를 따라 유기견을 미행하던 주상혁은 한가지 새롭게 안 사실이 있다.
다리를 저는 이유가 양아치의 발길질이 원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꾸우웅.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얼마 후 놈의 배가 크게 불러오더니 앓는 소리를 내는 걸 보고 깨달았다.
새끼를 밴 거라고.
다섯 중 넷은 죽은 건가?
밤새 힘겹게 낳은 강아지들은 대부분이 죽은 상태였다.
‘근데, 이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그나마 하나 꿈틀거리는 하나.
잘 나오지 않는 어미젖을 먹는 눈도 뜨지 못한 새끼를 보고 주상혁이 눈을 의심했다.
『Lv.1 청운해태.』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