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44
Book 9 Chapter 3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던 주상혁이 입을 열었다.
“15분.”
세 번째 호문클루스를 쓰러트리고 그쯤 기다렸다.
하지만 호문클루스의 사체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질 않았다.
네 번째 호문클루스는 없다는 거겠지.
“이러면 정황상 두 가지 중 하나일 것 같은데…….”
네 번째 호문클루스가 없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해 봤다.
하나는 네 번째 호문클루스가 없으니 네 번째 검은 게이트도 없다는 가설.
또 하나는 네 번째 게이트가 존재하되 회귀를 하게 된 원인이 네 번째 호문클루스라는 가설.
물론 주상혁은 두 가지 가설 중 후자의 확률이 높다고 보고 있었다.
몰랐으면 모를까.
지금의 자신은 이미 수십 번의 실패를 통해 이 자리에 있다.
“회귀의 단추를 찾았다고 그냥 목적 없이 회귀했을 리는 없지.”
분명히 무언가 난관에 봉착했기에 실행에 옮겼다고 보는 게 여러모로 타당성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네 번째 호문클루스가 없는 것도 이해는 된다.
주상혁에게 시간은 곧 성장이다.
250레벨짜리도 겨우 해치운 지금 네 번째 호문클루스를 준비해 둔다는 건 죽으라는 말밖에는 안 된다.
여러 가지 정황이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 쪽의 손을 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뭐…… 그 외에도 가능성 낮은 가설이라면 몇 개 더 있지만…….”
말 그대로 가능성 낮은 가설이다.
예를 들어 던전 안에 가둘 수 있는 수준을 초과해 배치하지 못했다거나,
아니면 세 번째 호문클루스까지는 연금술의 힘으로 연성했지만, 네 번째 녀석까지는 능력 부족으로 제작하지 못했다거나 하는 등등의 가능성들.
터벅터벅.
연달아 피어나는 생각을 이쯤에서 끊은 주상혁이 탈출 게이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밝혀질 사실이다.
어떤 미래가 찾아오든 최선을 다할 주상혁에게는 영양가가 있는 고민은 아니라 할 수 있었다.
“…….”
던전 밖으로 나오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배웅하던 자리에서 기다리던 존재들이었다.
강혜영과 소환수들.
와왕!
먀먕!
주주와 깜깜이가 신이 나서 주변을 요리조리 뛰어다닌다.
무사히 돌아온 게 그렇게 좋을까.
냐아아아.
먀아아아.
백호와 깜냥이도 웬일로 다리에 볼을 비비며 아양을 떤다.
들어갈 때는 태연한 척하던 녀석들마저 이러니 그래도 한고비 넘기긴 넘겼구나 하는 생각이 피어났다.
마지막으로 조용히 서 있는 강혜영을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강혜영이 생긋 웃음 지었다.
“맛있는 거 드실래요?”
“맛있는 거 좋지, 뭔데?”
“제가 좋은 레스토랑 알아요.”
레스토랑이라…….
그러고 보니 강혜영과 시간을 보낸 게 제법 됐다.
“그러지, 뭐.”
“준비하고 올게요.”
신이 나서 길드 쪽으로 돌아가는 강혜영을 지켜보던 주상혁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레스토랑에 가기 전에 그래도 할 일이 있었다.
잠시 발신음이 들려오더니 박상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하실 일이 있으신 거죠?
“네, 알아봐 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요.”
―말씀하십시오.
“그 던전 말이에요. 측정기로 한번 체크 좀 해 주시겠어요? 클리어된 게 확실한지.”
* * *
며칠 뒤 전주의 초대형 던전은 사라졌다.
꺼진 불도 다시 보는 느낌으로 혹시 몰라 확인했지만, 우려와 달리 던전이 클리어된 것이다.
국내의 각종 언론과 매스컴이 다시 한 번 주상혁의 찬양으로 달아올랐다.
―전주의 초대형 던전 마침내 소멸, 역시 이번에도 주상혁.
―초대형 던전을 처리한 주상혁, 그는 지금 어디에?
―주상혁의 다음 행보는 아프리카?
―이쯤에서 다시 본다, 주상혁의 놀라운 과거 업적.
└저는 역시 믿고 있었어요. 그 증거로 집값이 떡락할 때도 팔지 않았습니다.
└└저도 청초길드 주식 떨어질 때도 계속 들고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다시 보는데 주상혁이 그동안 처리한 던전이나 몬스터들 엄청나네요.
└└얼마 전에 카자흐스탄에서 반인반수 몬스터 처리하는 것도 굉장했음
└아프리카 가는 건 확실한 건가요?
주식과 부동산을 매각하지 않고 들고 있었다는 무용담이라거나,
주상혁이 과거부터 행해 온 과거 행적의 관한 이야기라거나,
추후 주상혁의 행보에 관한 관심이 대부분.
주상혁도 처음엔 낯뜨거워서 반응을 체크하는 게 힘들었는데, 지금은 사실 별다른 느낌조차 없었다.
“그나저나 아프리카라…….”
가야 하긴 한다. 백요석은 물론이고 몇 주 후면 두 번째 호문클루스와 닮은 녀석이 출몰한다.
그걸 대비해서라도 아프리카에 가야 하는 건 확정된 일.
“어디 보자 타이머는……?”
주상혁이 구석으로 치워 놓은 타이머를 확인했다.
24일 5시간 12분.
“이제 진짜 별로 안 남았네.”
주상혁이 던전에 들어갔을 때가 한 달쯤 남았을 때니, 벌써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났다.
물론 주상혁도 절대 쉬고 싶어서 쉰 건 아니고 사라지지 않던 던전이 혹시나 돌발 상황을 보일까 봐 기다린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여하튼 시간이 그렇게 흐른 것이다.
“하지만 오늘로 그것도 끝이지.”
던전이 별탈 없이 소멸했으니 이제 더 지체할 것 없이 아프리카로 이동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주주랑 백호가 나란히 앉아서 시청하던 TV 화면이 갑자기 변했다.
―청초길드 대표 주재호, 중대 발표 기자회견.
“중대 발표?”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한 것과 달리 호기심이 일어났다.
주재호의 모습이 나오는 걸로 봐서 정말로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주상혁이 기자와 주재호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경영 은퇴하신다고? 대체 왜?”
혹시 무슨 오해가 있을까 싶어서 기자의 질문과 주재호의 이어지는 답변을 더 들어봤지만, 오해 따위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 뿐이었다.
―아직 정정하신데 은퇴하시는 이유가 혹시 아드님 때문일까요?
―아뇨, 아들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래전부터 제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냥 제 역할이 여기까지인 겁니다.
―그럼 역시 후계자는 장남인……
―네, 큰아들 주상혁이죠, 역시.
* * *
주상혁은 주재호가 기자회견을 마치고 들어왔을 때를 기다려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을 덜컥 열고 들어오는 걸 보고 주재호가 방긋 웃었다.
“녀석, 그게 그렇게도 좋으냐?”
“아니요! 그게 아니고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기자회견을 다 보긴 했지만, 중간부터는 덕분에 잘 기억도 안 난다.
주재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래 아버지 독단이라면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한 주상혁이 책상 앞까지 걸어가 말했다.
“저 경영 같은 거 할 줄 몰라요.”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은퇴라고 해도 아비가 어디 떠나는 건 아니지 않느냐? 옆에서 조금씩 알려 주마.”
주상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초졸이잖아요, 이제 국내 길드도 아니고 글로벌 길드니 뭐니 하는 마당에 대표가 초졸이면 되겠어요?”
“쭉 지켜봐 왔다만, 상혁이 네가 배우지 못해서 그렇지 멍청한 건 아니더구나. 또 굳이 필요하다면 검정고시라도 보면 될 일이지.”
그냥 독단적이고 우발적인 결정이라기에는 주재호의 답이 너무 즉각적이다.
주상혁이 판도를 뒤집기 위해 쌍둥이를 팔기로 했다.
“쌍둥이는요?”
“재혁이나 민혁이를 말하는 게냐?”
“네, 난데없이 저한테 물려주면 걔들이 억울하지 않겠어요?”
“이 마당에서도 넌 동생들 생각을 하는구나.”
“네?”
흡족하게 웃는 미소가 어쩐지 불안하게 느껴질 무렵 주재호가 추가로 입을 열었다.
“녀석들이라면 신경 쓸 것 없다. 오래전부터 이미 다 동의한 일이었으니까.”
주상혁은 얼마 전 후계자에 관해서 물어오는 쌍둥이들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히 두 녀석에게 대표는 관심 없다고 말했는데……?
‘분위기는 완전 자기들만 믿으라는 듯 말했잖아.’
그런데 통수를 쳤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진짜로요?”
“그래, 형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다더구나.”
사근사근하게 다가오던 쌍둥이 녀석들에게 제대로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주상혁의 머리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 아버지?”
“왜 그러느냐?”
“대표라고 함은 본디 길드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까?”
“음…… 뭐 그렇긴 하겠지.”
주재호의 말에 주상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럼 저는 역시 안 되겠습니다.”
“상혁이, 네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성향은 아닐 텐데?”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자신은 근본적으로 보면 전형적인 집돌이였으니까.
하지만 근래에는 아니다.
탕약을 달이느라 잘 태가 나지 않았겠지만, 레벨 업을 위해서 부단히 던전을 돌아다닌 적도 있다.
“요즘 검은색 게이트니 뭐니 해서 좀 바쁘지 않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
“근데 사실 그것 때문에 길드에 머물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사실 조만간 아프리카에 갈 생각이기도 했고요.”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앞으로는 해외로 떠나는 일이 더 잦을 것이고,
애초에 말할 수는 없지만, 신경 쓰이는 일도 한둘이 아니라고.
이번엔 다행히 조금은 효과가 있어 보였다.
말을 하면 거의 즉각적으로 반론을 하던 주재호의 답변이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 것만 봐도…….
‘탈출구는 여기뿐이다!’
주상혁이 확신을 가질 무렵 주재호가 말했다.
“그거라면 재혁이나 민혁이를 대신…….”
“그 얼마 전 죽은 볼프만도 SSS급이었죠?”
“…….”
“그런 녀석도 자칫하면 죽어 나가는 곳에 동생들을 보내라고요? 전 못합니다. 차라리 제가 가요.”
뭐라도 말을 해 주면 좋으련만,
답변 대신 주재호의 지긋한 시선이 계속된다.
시간이 정지한 듯 적막이 깔렸던 방 안이 수십 초쯤 지난 후 다시 돌기 시작했다.
주재호가 책상 위 서류를 도로 끌어당겨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뭐, 네 뜻이 그렇다면 당분간은 미루도록 하는 게 좋겠구나.”
“그냥 미루는 거 말고 재혁이나 민혁이 둘 중 한 명 잡아서…….”
주재호가 고개를 쓱 들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안 되겠구나.”
* * *
주상혁은 그 뒤로도 거듭 설득해 봤지만, 주재호의 뜻을 꺾기는 결국 무리였다.
‘대체 왜?’
주재호와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주상혁의 표정은 그래서 어두웠다.
이대로면 모든 일이 정리된 뒤 대표 자리를 물려받아야 할 판.
“저 형…….”
“저희 맘 알죠……?”
사무실을 나온 주상혁에게 주재혁과 주민혁이 다가왔다.
보아하니 문 앞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모양.
“너희를 믿었다만…….”
거짓말이나 하는 동생들이었다니.
실망스러워하는 눈빛을 받은 쌍둥이가 변명했다.
“그, 그렇지만 형을 놔두고 어떻게 저희가 대표를 해요…….”
“아니, 못 할 건 뭐냐, 그냥 하면…….”
소리를 버럭 지르려던 주상혁이 한숨을 삼켰다.
어떻게 이 녀석들 탓일까.
이건 다 자신의 탓임을 깨달았다.
너무 그동안 물렁물렁하게 대비했다.
‘지금부터라도 확실하게 주입을 하자.’
앞으로 이곳저곳 끌고 다니면서 기회가 되면 귄력과 명예 맛에 취하도록 만들어야지.
주상혁이 터벅터벅 걷기 시작하자 쌍둥이가 따라 걸었다.
“저 형…….”
“미안해요.”
“됐고 앞으로는 나랑 좀 같이 다녀야겠다.”
아프리카 좋아할지 모르겠네.
* * *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주상혁은 이틀 후 아프리카로 향했다.
예정에 없던 쌍둥이를 데리고,
또 기왕 쌍둥이를 끼운 김에 강혜영도 데리고 갔다.
괜히 혹을 달고 가는 것은 아닌가,
혹은 위험하지는 않을까 해서 고민한 적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건 문제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주상혁에게는 타이머가 있다.
시간을 체크하다가 적절할 때 전이 아티팩트로 따로 돌려보내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늦기 전에 도착했네.”
아직 동이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주간 웨이브가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30분쯤은 남은 듯했다.
몬스터는 한창 쏟아지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아직 군세를 이뤄 이곳까지는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여유도 있겠다.
장벽 위에 도착한 주상혁이 주변을 둘러봤다.
밀림 한복판에 위치한 수백 미터 높이의 장벽 위에는 다양한 국적의 각성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네.’
모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묘하게 슬쩍슬쩍 이쪽을 흘긴다.
주상혁이 그 부분을 의아하게 생각할 때였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곳의 현지인 관계자처럼 보이는 흑인 남성이 다가왔다.
주상혁이 내미는 악수를 받고는 답했다.
“이야기는 들어서 알죠?”
“물론입니다.”
“근데 저 사람들은 뭡니까?”
묘한 시선을 보내오는 장벽 위의 각성자들에 대해 물어보자 남자가 픽 웃으며 말했다.
“야간 웨이브를 끝낸 각성자들입니다.”
“근데 왜 휴식하러 안 가고요?”
“모두 구경하고 싶은 것이겠죠, 주상혁 님이 어떻게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나.”
주간 웨이브와 야간 웨이브가 쉴 새 없이 이어지다 보니, 나름대로 규율도 존재한다.
주간조와 야간조가 그 대표적인 규율이다.
야간 웨이브를 막아 냈다면 오늘 밤을 위해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런데 장벽 위에 남은 많은 사람들이 모두 주상혁의 실력을 구경하기 위해 남아 있단다.
뭔가 기대감을 충족시켜 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부담감을 느끼게 했다.
‘주주가 좋을까? 아니면 백호?’
원래는 침이나 대충 핑핑 뿌리려 했는데…….
생각을 바꾸는 게 어쩌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주나 백호같은 소환수를 사용하는 편이 시각적인 효과를 감안하면 훨씬 좋을지도 모른다.
의외로 고민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주재혁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말했다.
“형, 저기!”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서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두 A급 S급 던전에서나 볼 법한 대형 몬스터들이 끝도 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실제로 보니 영상으로 보던 때와는 상상 이상의 웅장함이 느껴졌다.
‘에이, 그냥 둘 다 쓰자.’
생각 이상으로 몬스터도 많기에 하나를 쓰면 비는 공간이 생긴다.
차라리 그럴 거 둘 다 사용하기로 했다.
먀먕!
주주와 백호를 소환해서 부탁하려는데 깜깜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 먕먕 짖는 깜깜이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깜깜이가 하고 싶다고?”
『Lv.121 청운해태-클론』
깜깜이 역시 강혜영의 마나를 받아 가면 레벨이 여기서 스무 단계 정도는 오를 것이다.
만약 그걸 감안한다면 눈앞의 몬스터 웨이브를 처리하는 데는 충분.
주상혁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고 보니 깜깜이가 싸우는 걸 본 것도 한 번뿐이네?’
예전에 병원 앞에서 김진성 무리와 싸우던 때뿐이었다.
그때보다도 월등히 성장한 깜깜이의 모습도 지켜볼 겸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깜깜이가 하자?”
먕!
깜깜이가 꼬리를 흔들다가 성벽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잠시 후 시꺼먼 해태로 변한 깜깜이가 등장하자 여기저기서 약간의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새까만 해태?”
“원래는 하얀색 아니었나?”
“아니, 저런 색도 있다는 말이 한때 있긴 했지.”
시꺼먼 안개를 일으키며 깜깜이가 천천히 발을 내딛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조금 전보다 약간 더 동요하는듯한 감상이 튀어나왔다.
“검은 안개?”
“혹시 독 안개?”
혹시 몰라 미리부터 해독제를 먹는 각성자들의 모습이 보이거나 말거나,
깜깜이는 지면을 밟으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깜깜이의 주변으로 대지가 일순간에 시꺼멓게 물들어갔다.
그뿐만이 아니고 지면이 뜨거운 용암처럼 늪이 되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부분도 하나둘 보였다.
주상혁이 그걸 보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일단 등장만큼은 그야말로 완벽.
‘이제 실력을 보여 줘.’
초록빛의 밀림을 순식간에 검은빛으로 물들이며 진격하는 깜깜이를 지켜보고 있자니 잠시 후 큰 소란이 일어났다.
깜깜이와 몬스터는 아직 충돌조차 하지 않았는데,
시꺼멓게 변한 밀림에 발을 들인 몬스터들이 그대로 바닥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쿠웅, 쿠궁.
하늘을 나는 녀석들도,
땅 위를 뛰어다니는 녀석들도,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하면 즉각적으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백 미터 떨어진 이곳까지 고통스러운 몬스터들의 비명이 선명하게 들려온다.
구오오오.
끼에에엑.
빠르게 독에 녹아내려 앙상한 뼈로 변하는 모습에 몬스터들의 청각적인 효과가 전해지자 주상혁마저도 소름이 다 끼칠 정도였다.
‘와…… 많이 강해졌네.’
역시 대량 살상에는 독만 한 게 없구나 하고 다시금 깨달은 때였다.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부터 말을 잃고 충격적인 장면을 숨죽인 채 지켜만 보던 각성자들 사이에서 순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내 손이…….”
“이봐 진정…… 히익!”
주상혁이 고개를 돌려 확인해 봤더니 바닥을 구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시꺼멓게 변한 손가락 끝을 타고 독이 번져 가는 모습.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을 보며 고통을 호소하는 남성.
썩어 들어가는 동료를 진정시키려다가 자신도 같은 신세가 되어 함께 뒹구는 모습.
조금 전 불었던 바람이 독을 장벽 위까지 실어나르며 벌어진 사고처럼 보였다.
누가 만든 독인데 싸구려 해독제는 효과조차 못 봤을 테지.
주상혁이 그 모습을 보고 황급히 침을 던졌다.
투척을 사용하셨습니다.
물약 투여를 사용하셨습니다.
물약 투여를 완료한 침이 자동 회수됩니다.
주상혁이 말했다.
“백호, 부탁할게.”
냐아앙.
주상혁의 말에 모습을 드러낸 백호가 꼬리로 상처를 치유해 줬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신체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백호 덕에 온전히 치료받은 각성자들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장벽 위가 안정을 찾아가던 순간이었다.
돌연 장벽 위의 각성자 몇몇이 귀신이라도 본 듯 달아나기 시작했다.
“으…….”
“오지 마!”
주상혁이 왜들 저러나 해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저 멀리서 신이 나 뛰어오는 깜깜이가 보였다.
“괴……물!”
“으아아아아!”
조금 전 달아난 각성자들과 같은 얼굴이 되어 장벽 위의 각성자 모두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휑해진 성벽 위를 보고는 쓰게 웃었다.
우리 개는 안 짖고 안 물어요, 하는 견주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무사히 돌아온 깜깜이가 강아지로 변해서 강혜영의 품에 안겼다.
먀먕!
칭찬해 달라는 듯 꼬리를 흔드는 깜깜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주상혁이 장벽 너머를 확인했다.
“근데 생각해 보니 이거 괜찮으려나?”
* * *
시꺼멓게 변한 밀림은 깜깜이가 본래대로 돌아가고도 여전했다.
하긴 한번 오염된 대지가 원래 모습을 되찾는 게 하루 이틀로 될 일은 아니긴 하다.
차마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주상혁이 사고를 친 것에 죄책감을 느끼다가 이내 말했다.
“에이, 몰라. 일단 사고 친 건 사고 친 거고.”
어차피 이대로 고민한다고 답이 뚝 하고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과하든 수습하든 그건 일단 일단 백요석을 줍고 난 뒤로 하기로 했다.
주상혁이 장벽 끝에 서서 뛰어내리기 전에 말했다.
“재혁이랑 민혁이는 여기서 기다려라.”
“네?”
주상혁이 성벽 아래로 뛰어내려 착지했다.
강력한 독 기운이 체내에 스며듭니다.
독 내성이 독 기운을 체내에서 몰아냅니다.
성벽 아래로 내려서자마자 지독한 독 기운으로 인해 연달아 알람이 떠올랐다.
알람들을 닫고는 주상혁이 장벽 위의 강혜영에게 말했다.
“너도 거기서 기다릴래?”
강혜영의 대답을 기다리자니 잠시 후 장벽 위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아니요.”
착지한 강혜영을 보며 주상혁이 말했다.
“가자.”
주상혁이 본격적으로 강혜영과 함께 아까 깜깜이가 신이 나서 뛰어가던 방향으로 걸었다.
높은 장벽 위에서 지켜보던 것과는 달리 걸어서 가기에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30분쯤 지나자 아까 전투가 가장 격렬했던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격전지는 직접 이동해서 확인해 보니 장벽 위에서 볼 때보다도 더 대단한 광경이었다.
온통 뼈다귀투성이.
어떤 몬스터의 뼈다귀와 또 다른 몬스터의 뼈다귀가 얽히고설켜서 또 다른 흰색 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어디 보자, 백요석은?”
두리번거리던 주상혁이 눈을 빛냈다.
뼈다귀 아래 떨어진 새하얀 마석이 보였다.
『새벽의 결정』
주상혁이 백요석을 집어 들자 때마침 저 멀리서 강혜영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오빠, 여기도 있어요.”
“일단 조금 더 찾아봐”
“네!”
깜깜이와 깜냥이도 본격적으로 여기저기서 백요석을 물어다가 나르고 2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백요석 회수가 마침내 끝이 났다.
“더 없는 거 같지?”
“네.”
샅샅이 뒤져서 쓸어 모은 백요석을 확인하던 주상혁이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다 해도 이것뿐인가?”
고작 스무 개 남짓.
생각한 것보다는 그 숫자가 적었다.
백요석을 인벤토리에 모아서 넣은 주상혁이 말했다.
“일단 장벽으로 돌아가자.”
* * *
백요석을 챙겨서 호텔로 돌아온 주상혁은 가장 먼저 몸을 씻었다.
깨끗하게 씻고 나온 주상혁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점심 무렵인가……?”
본래라면 주간 내내 몰려드는 몬스터를 사냥하는 데만 한나절이 걸린다.
그런데 한 시간도 안 걸려 모두 처리해 버렸으니,
백요석이 반응을 보이는 밤까지 반나절도 더 남은 상태였다.
냐아아.
배고프다고 다리에 볼을 비비는 백호를 보고는 주주와 백호의 밥을 챙겨 줬다.
인벤토리에 사료를 도로 집어넣은 주상혁이 이번엔 사료 대신 다른 걸 꺼냈다.
아까 주워 온 백요석이었다.
『새벽의 결정』
침대 위에 내려놓은 백요석을 바라보던 주상혁이 하나를 집어 들어 유심히 확인했다.
“과연 어떨지 궁금하네.”
백요석의 의문,
과연 일지대로 성장을 불러올까,
아니면 소문대로 성장 하락을 일으킬까.
그 의문이 마침내 풀리기 직전이었다.
주상혁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숙소 초인종을 누군가 눌렀다.
“왔나 보네.”
방문을 열어주자 먼저 씻고 쌍둥이를 데리러 간 강혜영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쌍둥이는 보이지 않고 강혜영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녀석들은?”
“아직 한 명이 덜 씻었다고 기다렸다가 같이 온대요.”
“그래?”
뭐 그렇다면 아직 시간도 충분하겠다.
일단 강혜영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강혜영이 방 안에 놓인 백요석을 보더니 말했다.
“오빠, 근데 이거 백요석이잖아요?”
강혜영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백요석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긴 성장을 하락시킨다는 백요석을 주워 온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법도 하다.
“일단 소문이 틀렸을 거 같아서.”
“왜 그렇게 생각해요?”
“일지에서 그러더라고.”
“일지요? 저번에 던전에서 얻은 거요?”
“그래.”
강혜영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상하다…… 그럼 왜 그런 소문이 퍼졌을까요?”
“글쎄다.”
주상혁이 강혜영과 대화를 나눌 때였다.
초인종이 또다시 눌렸다.
“제가 열어 줄게요.”
강혜영을 따라 쌍둥이가 들어왔다.
“저녁까지만 여기서 같이 있자.”
“알겠어요.”
호텔 방은 넓다.
쌍둥이 둘쯤 더 있다고 한들 불편함은 하나도 없었다.
강혜영과 TV를 보며,
쌍둥이와 그새 인터넷에 퍼진 오늘 몬스터 웨이브 사건과 관련된 기사를 보며,
오로지 시간을 보내는 데에만 열의를 쏟다가 소파에서 그만 끔벅 졸았을 때였다.
“오빠!”
잠에서 깨우는 강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깬 주상혁이 바깥을 살폈다.
어느새 바깥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호텔 거실에 쌓아둔 백요석은 빛을 발하며 쩍쩍 금이 가고 있었다.
마침내 백요석이 바스러지며 새하얀 빛이 숙소 안을 가득 채우길 잠시.
곧이어 빛이 몸으로 흘러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건…….”
익숙한 감각이었다.
따뜻한 햇볕이 피부에 닿듯 포근한 감촉.
탕약을 달이다가 약탕기가 레벨 업 효과를 발휘했을 때랑 같은 느낌이었다.
“오빠, 이거 제가 착각한 건 아니죠?”
“형, 이거……?”
물론 반응을 보아 할 때 주상혁의 착각은 아닌 듯했다.
강혜영도,
쌍둥이 녀석들도,
느낀 것이다.
새벽의 아티팩트를 사용했을 때 느낀 그 느낌을.
애초에 착각이라면 모두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럼 관련이 있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긴 했다.
가장 먼저 지금은 가루가 되어 버린 백요석의 본래 이름.
‘새벽의 결정이었지?’
백요석으로 불리지만 분명히 그런 이름이었던걸 기억한다.
왜 새벽일까.
‘대체 왜 새벽이지?‘
백요석의 이름을 말하는 게 아니고,
유적에서 구할 수 있었던 아티팩트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새벽의 로자리오,
새벽의 단검,
새벽의 장궁 등등.
아티팩트는 모두가 새벽이란 단어가 들어갔다.
‘이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이 역시 자신이 제작했다는 가설이었다.
‘조만간 엄준식 씨를 만나 봐야겠네.’
뭔가를 발명하고 제작한다면 당장에 생각이 드는 인물은 엄준식뿐이었다.
깊게 생각하고 있자니 문뜩 강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아, 미안. 일단 결과만 느끼자면 나도 같은 느낌을 받긴 했어.”
“역시…….”
그러고 보니 강혜영의 부름으로 생각에서 벗어났더니 문뜩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백요석의 결과는 어떻게 됐지?
레벨이 올랐을지,
아니면 내려갔을지.
주상혁이 시선을 살짝 들어 올렸다.
『Lv.146 강혜영.』
“올랐다.”
조금 전 강혜영의 레벨은 144.
하지만 지금은 145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Lv.136 주재혁.』
『Lv.135 주민혁.』
주재혁의 경우 3레벨이.
주민혁의 경우에는 4레벨이 올라 있었다.
“스테이터스.”
『Lv.217 주상혁.』
혹시나 해서 주상혁도 레벨을 확인해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고작 1단계 남짓의 성장이었지만, 레벨이 오르긴 올라있었다.
이로써 백요석의 능력 역시 레벨 상승을 일으킨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럼 어째서 그런 소문이 퍼진 거지?’
물론 소문은 한 사람의 근거 없는 허언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백요석은 그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저마다 경험자라며 주장하던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다.
“혹시 흑요석이 원인인가?”
* * *
주상혁은 그 뒤로도 아프리카에서 백요석을 집중적으로 모았다.
강혜영과 쌍둥이들은 일찌감치 돌려보내고 그야말로 미친 듯이 사냥했다.
덕분에 한때 게이트에서 소환되어 수십 갈래로 향하는 몬스터 무리를 주주의 분신들까지 배치해서 사냥하던 모습이 기사화되기도 했었다.
그 결과 주상혁은 지난 3주간 하루에 수백 개에 달하는 백요석을 긁어모아 사용할 수 있었다.
“어디 보자 타이머는…….”
23분 37초.
두 번째 호문클루스와 똑같은 녀석이 나타나기까지 20분 남짓 남은 지금.
주상혁이 다음으로 스테이터스의 레벨을 확인했다.
『Lv.241 주상혁.』
‘많이 오르긴 올랐는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몽골에 첫 번째 검은 게이트가 출몰했을 때.
그때도 백요석을 취했다면 더 높은 레벨을 달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아니지…… 실제로 손해인지는 모르지.”
백요석이라고 한들 괴물 같은 성장이 쭉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 증거로 하루에 수백 개씩 사용해도 근래에는 이틀에 한 번, 혹은 사흘에 한 번이나 레벨이 오르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이것.
설령 지금까지 획득한 백요석의 배 그 이상을 들여도 지금 레벨 업 한 수준의 반의반도 레벨을 올리지 못할 거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마냥 손해라고만 보기도 힘들긴 해.”
어차피 그동안 논 것도 아니고 포션의 효율을 꾸준히 증가시켰다.
기본 능력치의 상승만큼 포션의 효율 증가도 언젠가 이루어져야 한다.
성장과 포션 효율 간의 밸런스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건 말하면 입 아픈 이야기였다.
“슬슬 시간이 다 됐나?”
2초.
1초.
0초.
마침내 타이머의 시간이 끝이 났다.
주상혁이 하늘 위를 바라보니 하늘에 존재하던 검은색 게이트가 사라지면서…….
쿠웅.
시꺼먼 피부의 몬스터가 하나 떨어져 내렸다.
『Lv.200 갈마니아.』
익히 본 적 있는 모습 그대로의 녀석이 주상혁을 확인하고 대뜸 포효한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거나 말거나 가로지른 주상혁이 주먹을 복부에 박아 넣었다.
퍼엉.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며 포효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털썩.
언제 그랬냐는 듯 사방에 깔린 적막 속에서 놈이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상혁이 털썩 쓰러진 녀석의 사체를 어깨에 둘러메고는 전이 아티팩트를 작동했다.
이번에도 목적지는 협회 본부.
이번엔 타이머 시간을 보고 사전에 연락해 둔 이유인지, 협회 로비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손히 인사하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건 저에게 넘기시면 됩니다.”
“여기요.”
어깨에 들쳐 메고 있던 사체를 대신 짊어지고 한 사람이 사라진다.
남은 각성자가 로비 문을 열 어주며 말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주상혁이 안내를 받아 강태섭의 사무실까지 이동했다.
사무실 안에서 기다리던 강태섭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까지 이끌었다.
“거기 앉게나.”
“아, 네.”
자리에 앉은 주상혁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강태섭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하실 말씀이라는 건?”
“전에 연금술에 대한 대가를 찾아달라 그랬지?”
“찾으셨나요?”
“찾긴 찾았지.”
근데 반응을 보아하니 뭔가 좀 느낌이 이상하다.
“무슨 하자라도 있는 건가요?”
“하자라기보다는…….”
“혹여 인성이라거나, 비슷한 쪽에 문제가 있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어차피 비니니스 관계인데 인성 정도야 적당히 타협하면 될 일이다.
강태섭이 말했다.
“그게 아니고 자네와 제법 친분이 있는 사람이어서 물어봤네.”
“친분이요?”
“혹시 이 사람은 안 되는 건가 해서 말이지.”
“누군데요?”
“박지훈 씨, 포션상 박지훈.”
주상혁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래, 애초에 포션을 만드는 것도 연금술 스킬을 기본으로 한다.
주상혁의 도움을 받아 레벨도 잔뜩 올랐고,
오래전부터 연금술 쪽에는 재능이 있어 보였으니…….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그걸 잊고 있었네요.”
애초에 연금술사가 아니라 포션을 대행 판매하는 사람으로 고정관념이 박혀 있다 보니 바로 옆에 두고도 떠올리지를 못했다.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박지훈 씨도 찾아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러게.”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강태섭이 말했다.
“뭐… 혹시 모르니 추가적으로 계속 물색해 볼 테니 그렇게 알고 있게.”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장인어른이라…….
주상혁이 사무실을 나간 뒤 찻잔을 다시 들어 올리던 강태섭의 입가에 옅은 호선이 그려졌다.
“하긴 이제 그렇게 불려도 이상한 일은 아닌데…….”
묘하게 어색하단 말이지.
* * *
주상혁은 곧바로 박지훈의 가게로 향했다.
『Lv.115 박지훈.』
오랜만의 주상혁의 방문에 박지훈이 환대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활짝 웃는 박지훈을 잡아끌고는 뒤편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순순히 끌려 들어온 박지훈이 질문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혹시 박지훈 씨도 연금술로 다른 것도 만들 수 있습니까?”
눈을 끔벅거리던 박지훈이 물었다.
“다른 거라고 말씀하시면?”
“골렘이나 호문클루스 같은 거 말입니다.”
난데없는 질문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박지훈에게서는 자신감이 살짝 엿보였다.
“골렘이라면 만들 수 있습니다.”
“호문클루스는요?”
박지훈이 고개를 좌우로 한 차례 저었다.
“호문클루스는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럼 불가능합니까?”
“당장에는요, 적어도 숙련도를 쌓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골렘이랑 다르게 호문클루스는 조금 다른 방식이란다.
핵만 있으면 쉽게 만들 수 있는 골렘의 경우와 다르게 호문클루스는 다양한 재료가 필요하다나 뭐라나.
실제로 연금술의 숙련도가 높은 것과는 별개로 제작법을 익히는데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자니 표정을 들여다보던 박지훈이 슬쩍 질문했다.
“호문클루스가 필요하신 겁니까?”
“일단은요.”
“제가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딱히 박지훈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주상혁이 만들고자 하는 건 어중간한 호문클루스가 아니라 200레벨에 필적하는 호문클루스니까.
“숙련도가 제법 많이 필요할 겁니다.”
박지훈이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 예상은 했지만 꽤나 성능 좋은 녀석을 만들어야 하나 보죠?”
“네, 아주 수준이 높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어느 정도나……?”
“제 수준은 됐으면 좋겠습니다.”
박지훈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어째서 저렇게 깐깐하게 반응했는지 알아차린 것일 테지.
박지훈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두 가지요?”
“하나는 그렇게 강한 녀석을 만들려면 재료를 떠나서 호문클루스의 틀을 잡는데 상당히 시간이 필요할…….”
“연성하고 싶은 녀석의 시체가 비교적 온전히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오래 걸릴까요?”
박지훈이 눈만 끔벅이다가 물었다.
“시체가 있다고요?”
“네.”
“그럼 상대적으로 시간이 적게 들긴 할 겁니다만 근데…….”
“근데? 뭐가 더 있나요?”
박지훈이 말했다.
“두 번째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들어보죠.”
“호문클루스는 골렘과 다르게 생명체를 연성하는 겁니다. 골렘이야 필요한 값을 입력하면 제어권을 완전히 가질 수 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제어권 문제에 봉착한다는 말일 것이다.
음…….
주상혁이 잠시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부분은 저도 여기저기 물어볼 테니 일단 언제라도 만들 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호문클루스의 이야기에 대한 것이 끝이 났다.
주상혁이 박지훈의 가게를 나서려던 때 가게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손님은 아니었고 주상혁이 이곳으로 부른 강혜영이었다.
“딱 맞춰서 왔네?”
주상혁을 확인한 강혜영이 궁금했는지 넌지시 묻는다.
“무슨 일이에요?”
“부탁할 일이 있어서.”
박지훈과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받고 바깥으로 나왔다.
길게 늘어선 대기열을 흘긴 주상혁이 강혜영과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요? 걸어서 금방 갈 수 있는 곳이에요?”
“엄준식의 연구소 좀 가려고.”
주상혁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연구소였다.
주상혁의 인벤토리에는 지금 백요석이 다수 들어 있었는데 이것을 토대로 이야기를 조금 나눌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아티팩트는 무조건 필요한 물건이었다.
주상혁이 엄준식의 연구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연구소 앞에서 기다리는 하얀 가운 차림의 연구원이 있었다.
엄준식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엄준식 씨는요?”
“소장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계셔요.”
엄준식과 종종 통화할 때 밤잠 설쳐 가며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듣긴 했었는데…….
뭐, 이 시간에 연구소에서 눈을 붙이는 것만 봐도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들어가시죠.”
주상혁이 연구원의 안내를 받아 소장실까지 이동했다.
조용히 노크한 연구원이 안에서 들려오는 반응을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들어가셔도 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고는 제 할 일을 하러 가는 연구원을 보다가 주상혁이 문고리를 돌렸다.
“들어가자.”
“네.”
강혜영과 함께 소장실로 들어간 주상혁의 눈에 서류 쪼가리나 펜이 굴러다니는 소장실의 모습이 들어왔다.
전에 왔을 때랑은 다르게 어질러진 소장실의 모습을 확인한 주상혁이 마지막으로 소파 위에서 자고 있는 엄준식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많이 피곤한 건가?”
이거 이대로 깨워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안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인데…….’
한 30분쯤 지켜보던 주상혁이 결국 소장실 시계를 확인하다가 엄준식을 깨웠다.
“엄준식 씨.”
몸을 살짝 흔들어 깨웠더니 엄준식이 부산한 눈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눈 밑에 깔린 다크써클과 충혈된 눈 때문에 심히 걱정되는 몰골이 아닐 수 없었다.
시계를 확인한 엄준식이 말했다.
“아, 30분만 잔다는 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잠은 제때 자고 있는 거 맞습니까?”
“뭐, 그럭저럭 죽지 않을 정도로는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입꼬리를 올리는데 그마저도 생기가 하나도 없다.
소파에서 일어난 엄준식이 커피 머신 쪽으로 가려고 하자 강혜영이 말했다.
“아, 제가 타 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엄준식이 소파에 도로 앉자 주상혁이 물었다.
“연구는 잘되어 갑니까?”
“마지막에 말했던 그거 때문에 여전히 복잡합니다.”
저번에 통화를 나누어본 결과 던전을 생성하는 것에 대한 장치는 이미 발명되었다고 엄준식은 말했다.
하지만 엄준식은 만족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일에 잠을 설치고 있었다.
경량화라거나,
휴대성과 가성비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지금 엄준식이 매달리고 있는 부분은 그중에서도 가성비.
던전 생성기를 하나 만드는 데 마나메탈이 5개씩 드는 지금 어떻게든 2개까지는 낮추겠다는 마음 같았다.
“그럼 여전히 보름 전에 말한 그 연구를 하고 있는 겁니까?”
“네, 마나메탈의 요구량을 절약하려고 해 보는데 좀 복잡합니다.”
던전 생성기를 만든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일 텐데,
자신의 발명품이 부끄러운 모습으로 세상에 보이기 싫은 이유인지 엄준식은 좀처럼 만족할 줄 몰랐다.
“그래서 저하고 상담할 일이 있다는 건 뭡니까?”
“일단 이것 좀 보시죠.”
주상혁이 인벤토리를 켜서 손을 쓱 집어넣더니 가방을 하나 꺼냈다.
가방 안에서 주상혁이 안 쓰는 약탕기를 꺼냈다.
주상혁이 쓰고 있는 약탕기는 아니고 예전에 매튜의 공방에서 얻은 그 약탕기였다.
“이게 뭡니까?”
약탕기를 몰라보지는 않았을 테고…….
아무래도 이걸 왜 보여 주냐는 의미에 가까운 질문인 듯했다.
“평범해 보이는 약탕기지만, 사실은 이거 아티팩트입니다.”
주상혁이 약탕기를 들어서 바닥에 떨어트렸다.
일반적인 약탕기라면 최소한 금이라도 갔을 법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린 것과 다르게 약탕기는 금하나 가지 않고 멀쩡했다.
엄준식이 허리를 숙여 약탕기를 집어 드는 것을 보고 주상혁이 말했다.
“그걸로 탕약을 달이면 레벨이 오릅니다.”
“레벨 측정기의 그 레벨 말하는 겁니까?”
“네.”
주상혁이 엄준식과 레벨 업에 관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나누고 있자 강혜영이 커피를 내왔다.
“여기요.”
“나 먼저 줘 봐.”
강혜영이 내린 커피를 독이 있지 않을까 한 모금 마셔 봤지만, 평소라면 떠야 할 알림이 뜨지 않는 걸 보면…….
‘다행히 독은 없나 보네.’
엄준식의 몫도 전해 준 강혜영이 입을 삐죽이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설마 그런 것도 체크 안 했겠어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보다 그것 좀 꺼내 봐.”
“잠깐만요.”
혹시 몰라 챙겨 오라고 당부한 만큼 강혜영이 대번에 알아먹고 아티팩트를 전개였다.
기다란 삽의 형태로 변화한 아티팩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엄준식이 물었다.
“이건 또 웬 삽입니까?”
“이것도 같은 부류의 아티팩트입니다.”
“레벨 업에 관련된 효과가 있다는 겁니까?”
“네.”
주상혁이 말했다.
“제가 일단 궁금한 건 이겁니다. 이 두 아티팩트의 상관성.”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닌지.
이 부분을 알아보고 싶었다.
주상혁이 경험하기로 약탕기의 경우엔 퀘스트의 보상으로 얻은 물건인데 왜 아티팩트와 같은 효과를 보이는지도 궁금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는 백요석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다.
엄준식이 유심히 삽을 들고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그 백요석이라는 거 지금 가지고 있으시다고 그랬죠?”
“네.”
주상혁이 백요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우르르 내려놓았다.
엄준식이 백요석을 하나 들고 살펴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이 아티팩트를 약탕기를 교본 삼아서 만들지는 않았을까 생각하신다는 거죠? 이 백요석을 써서.”
“네.”
“뭐, 그럼 간단하군요.”
엄준식이 백요석은 주머니에 아티팩트를 손으로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이걸 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엄준식이 소장실을 나가 어느 분석실로 들어갔다.
인큐베이터같이 생긴 곳에 백요석과 아티팩트를 나란히 넣은 엄준식이 옆자리의 컴퓨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뭘 하는 겁니까?”
“저 3가지 물건이 비슷한 물질로 만들어졌는지 확인 좀 해 보려고요. 뭐 만들어졌다면…….”
“졌다면?”
“주상혁 씨의 생각대로 누군가가 백요석을 이용해서 만든 물건이라는 거겠죠.”
엄준식이 말했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시고 결과가 나오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시죠.”
* * *
주상혁은 그렇게 아티팩트와 백요석을 맡기고 연구소를 나왔다.
“오빠, 근데 그거 들었어요?”
“뭘?”
“검은색 게이트요, 이번엔 미국에서 모습을 드러냈대요.”
“미국…….”
두 번째 게이트가 사라졌으니 3번째 게이트가 나타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이번엔 그쪽으로 가 봐야 하나?”
백요석 문제도 있겠다.
또다시 그곳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다.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강혜영이 이렇게 말했다.
“또 가는구나…… 그래도 3번째가 마지막이니까 다행이에요.”
“마지막?”
“네. 던전도 호문클루스가 세 번 나오고 끝났으니까 검은 게이트도 세 번뿐인 거 아니에요?”
아, 그러고 보니…….
주상혁은 강혜영이 왜 이같이 생각하는지 잘 안다.
주상혁과 다르게 강혜영은 회귀가 존재한다는 걸 모른다.
그렇기에 이 같은 결론에 도달한 듯했다.
다른 이야기로 돌아가서 다시 재잘재잘 떠드는 강혜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을 했다.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솔직히 그동안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회귀에 관한 정보를 공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됐다.
회귀는 강혜영에게 있어서 이별과 다르지 않다.
이전에 회관에서 엉엉 울던 것만 생각해도 그렇다.
‘팔자에도 없는 결혼 이야기는 괜히 꺼냈나…….’
솔직히 주상혁도 가능하면 회귀를 당장에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냉정하게 고백을 했던 것도 회귀를 하되 시간에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가 컸다.
이렇게 사건이 급하게 돌아갈 줄 알았다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말해야겠지?’
떠오른 김에 말하기로 했다.
“저, 혜영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던 강혜영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네?”
강혜영은 이미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상대다.
그런 녀석에게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
“있잖아…….”
결국 강혜영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강혜영은 조용했다.
회귀에 관한 이야기를 설명할 때도,
어쩌면 회귀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들었을 때도,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에도.
강혜영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돌연 강혜영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렀다.
갑자기 보이는 눈물에 적잖게 당황했는데 본인이 더 당황한 듯 눈물을 훔친다.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닌데…….”
마음이 착잡해졌다.
눈물을 닦은 강혜영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시시 웃는 녀석을 보자니 더욱더 그랬다.
“어차피 그 회귀라는 거 무조건 해야 하는 건 아니죠?”
“뭐, 그렇지…….”
“아, 진짜 울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깜짝 놀랐네.”
그렇게 말하고는 강혜영이 다시 걷기 시작한다.
녀석의 걸음에 맞춰 따라 걷기 시작하니 잠시 후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국엔 언제가요?”
“글쎄, 조만간 다시 가야지.”
강혜영이 돌아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저도 따라가도 돼요?”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수롭지 않은 듯 행동하지만, 크게 낙심하고 실망했을 녀석을 아니까.
“그래, 그러지, 뭐.”
* * *
방으로 돌아온 주상혁은 욕실로 들어갔다.
이미 협회를 나서던 길에 인벤토리의 여벌 옷으로 갈아입어 겉은 깔끔한 편이다.
하지만 여전히 전투로 꿉꿉함은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묘하게 말수가 적어져서 어색하단 말이지…….’
강혜영과의 어색한 기류에 못 이겨 욕실로 도망쳐 온 것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하…… 괜히 말했나?”
욕조에 앉아서 따뜻한 물에 담그자 급격한 후회가 몰려왔다.
냉정하게 말해서 강혜영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녀석이 슬퍼할 일도 없고,
또 어색해질 일도 없고,
여느 때처럼 둘이서 밥도 먹고 가끔은 시간 내서 데이트도 다니면서,
보통의 연인처럼 웃고 즐겁게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말하면서 모든 게 틀어졌다.
차라리 말하지 않았으면 강혜영은 행복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다가 회귀를 맞이했을 것이고,
주상혁만 나중에 정든 마음을 잘라 내기만 하면 조용히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쉬운 걸 판단 한번 잘못해서 날려 버렸다.
“하여간 이 입이 문제야.”
괜히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아서 주둥이를 한 대 쳤더니 주주가 왕왕 짖었다.
이 얼마나 기특한지 모르겠다.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면 언제나 위로해주는 해태님.
“그치? 주주도 말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
왕!
뭔가 괜히 말했나 하는 후회가 싹 가시진 않았지만,
그래도 주주의 위로 덕에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
“그래, 다시 생각해 보니 말하는 게 맞긴 해.”
당장에 회관 때 일만 떠올려 봐도 그렇다.
그렇게 펑펑 울던 녀석인데 말도 하지 않고 멋대로 끝내는 건 강혜영을 진심으로 여긴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래, 나가서 오랜만에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해야지.”
전에 갔던 레스토랑에서 강혜영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준비한 옷을 걸칠 때였다.
누군가의 마나가 느껴졌다.
“착각했나?”
평소라면 절대 이곳에서 느껴질리 없는 마나.
그래서 주상혁은 본인의 착각이겠거니 여겼다.
지금은 그 누군가의 존재보다 강혜영을 달래는 게 먼저였으니까.
주상혁이 욕실을 나와 주주의 털을 말려 주며 말했다.
“혜영아.”
“네?”
쪼그려 앉아서 주주의 분신들과 소환수들의 밥을 챙겨 주던 강혜영이 고개를 휙 돌린다.
“우리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네!”
평소처럼 좋아하기는 하는데 한쪽이 묘하게 그늘이 느껴진다.
강혜영과 단둘이 있을 때 평소에는 어떻게 행동했지?
지금의 이 상황이 호문클루스를 사냥하기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주상혁이 뻘쭘하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할 때였다.
‘근데 착각한 게 아닌가?’
아까 욕실에서 느꼈던 마나가 점점 가까워지고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3분쯤 지나니 결국…….
똑똑.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혜영이 말했다.
“제가 열어 줄게요.”
“응.”
강혜영이 현관문을 열어주자, 잠시 후 정지호가 방으로 들어왔다.
『Lv.116 정지호.』
* * *
주상혁이 아까 욕실에서 정지호의 마나를 처음 느꼈을 때.
주상혁은 말했듯이 자신이 착각했겠거니 했다.
이만한 마나를 가지고 있는 각성자는 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청초길드에 방문하는 사람 중에 이런 레벨의 각성자가 없는 건 아니다.
그래서 주상혁은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그런데 역시 아니었어.’
정말로 정지호였다.
평소라면 주상혁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던 외할아버지 정지호가 직접 방문한 것이다.
웬일도 언질도 없이 갑작스럽게 정지호가 찾아왔나 싶어서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걸 지켜보자 눈이 맞은 정지호가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참한 아가씨로구만, 듣기로는 곧 결혼한다더니 그 아가씨겠구나.”
하필이면 말을 해도 하필 지금 그런 말을…….
슬쩍 강혜영의 표정을 살폈더니 눈이 맞은 강혜영이 어색하게 웃는다.
‘아…… 미안해 괴롭게 할 맘은 없었다구…….’
주상혁이 괜히 정지호에게 원망하는 눈을 보내며 말했다.
“어쩐 일이세요?”
“별일은 아니고 줄 게 있어서 왔단다.”
“줄 거요?”
정지호가 양복 안쪽 주머니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그건…….”
둘 다 본 적이 있는 다이어리였다.
아르돈이 주상혁에게 넘겼던 다이어리와 같은 디자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오른쪽의 다이어리…….’
초대형 던전 안을 뒤질 때 발견한 다이어리와 얼룩이라거나 미세한 흔적까지 비슷했다.
그때 어째서 던전 안에 그런 게 있었을까 궁금했는데…….
‘할아버지가 넘겨주는구나…….’
궁금한 점이 하나가 해소됐다.
그리고 그러기 바쁘게 이번엔 다른 의문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근데 어째서…….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거지?’
그것도 두 개씩이나 가지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걸 왜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셔요?”
“이야기하기 전에 이것부터 읽어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구나.”
정지호가 대답 대신 왼쪽 손에 들린 다이어리를 넘겼다.
하는 수 없이 다이어리를 받아들었다.
당장에 이야기해 주면 좋겠지만…….
‘솔직히 궁금하기도 하니까.’
다이어리에는 뭐가 적혀 있을지.
아르돈이 넘긴 다이어리처럼 예언 중심의 이야기가 적혀 있을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적혀 있을지.
호기심에 벅차 마침내 다이어리를 펼쳤다.
“이건…….”
1페이지.
2페이지.
3페이지.
빠른 속도로 다이어리를 읽을수록 주상혁은 이해가 안 됐다.
주상혁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정보가 적혀 있었기 때문.
“이게 뭐예요?”
“보는 대로다.”
주상혁이 다시금 다이어리를 바라봤다.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경 어떤 B급 각성자가 나타난다거나,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경에는 A급 각성자가 나타날 거라는 둥.
주상혁이 보기에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꼭 스카우트 리포트 같은 느낌이랄까.
이 사람은 접촉하면 스카우트할 수 있을 거라느니.
이 사람은 우호적이긴 하지만 까다로울 거라느니.
장점 단점을 시작으로 취미와 특기까지 없는 게 없었다.
‘기간으로 보면 거의 23년 전쯤부터인가?’
1페이지 제일 처음 적힌 정보가 1월 3일 정보니까.
주상혁이 태어나고 8일쯤 지났을 때부터 아주 빼곡했다.
이걸 자신에게 보여 주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자 주상혁이 정지호에게 물었다.
“이걸 저한테 주는 이유가 뭐예요?”
“그걸 준 게 채연이기 때문이다.”
“채연? 엄마가요?”
정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네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다고 그랬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튀어나오자 머리가 혼란스러웠지만, 일단은 호기심이 먼저였다.
정채연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채연이는 말이다. 특질계열 능력자였단다. 뛰어난 미래시를 가지고 있었지.”
정지호의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아르돈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령, 일본의 어느 일식집에서 첫 번째 미래를 볼 수 없었던 사람이 비밀을 지켜 달라고 그랬다거나 하는 이야기라거나…….
혹은 그때 자신에게 멱살을 잡혔을 때 믿는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느니 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서 이걸 엄마가 쓴 건 그렇다고 치고요. 갑자기 이제 와서 이걸 주시는 이유가 뭐예요?”
아르돈의 다이어리와 달리 정지호의 다이어리는 아주 빼곡하고 상세하게 쓰여 있었다.
“제일 뒷장을 확인해 보거라.”
“제일 뒷장?”
정지호의 말대로 다이어리의 제일 뒤편을 확인하자 의문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정지호의 수첩이라고 앞에서 봤던 그런 정보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아르돈처럼 행동 강령 같은 것도 분명히 적혀 있었다.
가령 제일 마지막 끝부분에 적힌 것은,
―미국에 3번째 검은색 게이트가 발생하면 상혁이에게 다이어리를 전해줄 것.
미국의 하늘에 3번째 검은색 게이트가 떠오르면 주상혁에게 다이어리를 전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그 외에도 만약에 주상혁이 난데없이 찾아와 부탁하거든 이유를 묻지 말고 도와주라는 등의 내용.
또 4년 전 주상혁이 각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며칠부터 며칠까지 주상혁을 대호길드에 붙잡아 두는 것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근데, 그럼 이상한 게 있어요.”
그래 말이 안 된다.
정채연이 미래시 능력자라면…….
죽을 이유가 없다.
무려 수십 년씩 미래를 내다보는 정채연이다.
그런 그녀가 주상혁을 낳다가 허무하게 죽는 건 더욱이 말이 안 됐다.
정지호가 미소 지으며 다른 수첩을 내밀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이것도 전해 주라고 하더구나.”
정지호가 꺼냈던 두 번째 다이어리.
이미 던전에서 한 번 확인한 적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 궁금했다.
그때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정지호의 태도를 보아하니 분명히 무언가 적힌 게 분명했다.
대체 뭐가 적혔을지 모르는 다이어리를 열었을 때였다.
빼곡히 적힌 다이어리의 글자가 보랏빛으로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 이게 왜 이러죠?”
“왜 이러냐니?”
주상혁이 정지호의 의아한 반응에 다이어리를 지목했다.
“이거 빛나잖아요?”
“빛?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정지호의 저 표정 시치미 같을 걸 떼는 건 절대 아닌 것 같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그런 표정…….
‘즉, 나만 보인다는 건가?’
슬쩍 확인해 봤더니 같은 방에 있는 강혜영 역시 정지호와 비슷한 반응이다.
주상혁이 대체 무슨 경우지 싶어 난처한 얼굴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다이어리 첫 장에 존재하던 글자가 하나씩 사라지는 게 보였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글자가 사라지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주상혁이 더 늦기 전에 빼곡히 쓰인 글자를 빠르게 읽기 시작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글자가 증발하는 속도는 사람이 눈으로 쫓아가기 힘든 수준.
주상혁은 하는 수 없이 제일 끝부분으로 가서 그곳을 읽기 시작했고, 앞부분부터 사라지기 시작한 글자가 마침내 마지막 장까지 모조리 증발한 순간…….
툭.
주상혁의 손에서 들고 있던 다이어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트렸구나.”
정지호가 다이어리를 주워 주상혁을 바라봤을 때.
주상혁의 눈동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 *
모든 글자가 사라지는 순간 주상혁은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었다.
‘주주의 환상?’
아니, 다르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간 여러 차례 주주의 환상을 경험한 주상혁이다.
주주의 환상과는 분명히 다름을 바로 직감했다.
주주의 환상은 제삼자의 느낌으로 장면을 잠시 보여 주는 게 보통이다.
허나, 그것과 달리 지금은 완벽히 누군가의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
시각도,
청각도,
촉각도.
일단 이 현상이 주주의 환상은 아니라고 치고,
대체 이 하굣길 풍경을 바라보는 이 시점이 누구일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쯤이었다.
궁금증을 풀어 줄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연아.
하교하는 수많은 학생의 사이에서 저 멀리 손을 흔드는 남성이 보였다.
정지호,
주상혁이 착각한 게 아니라면 한 30년쯤 젊은 모습의 그였다.
‘채연? 그럼 이게 엄마의 시점이라고?’
무슨 원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주상혁은 지금 수십 년의 시간을 거슬러 정채연과 오감을 공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지호의 부름에 걸음을 옮긴 정채연이 대기 중인 차량에 올랐다.
차량이 대호길드로 향하기 시작했다.
운전석에서 운전을 하던 정지호가 넌지시 물었다.
―학교에서 별 탈은 없었지?
―네.
―무슨 고민거리는 없고?
―네. 없어요.
그 외에도 정지호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어느 정도면 딸을 귀여워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듣고 있는 주상혁이 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계속됐다.
‘엄마를 과보호하며 키웠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주상혁은 정채연과 모든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딸바보 정지호는 잘못 비친 왜곡된 정보.
오히려 딸 정채연에게 과하게 의존하는 느낌이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딸을 향한 사랑이 과하다기보다,
정지호의 모습은 딸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느낌에 더욱 가까웠다.
‘하긴 이상한 일도 아니긴 해.’
정채연이 미래를 보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걸 알고 있다면,
그 누구보다 정채연의 능력의 위력을 잘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되려 대호길드가 상정 외의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정채연의 능력이 개입됐을 걸 감안한다면 정지호의 반응은 지극히 예상 안의 행동이었다.
정지호의 질문이 시작될 무렵부터 당연하다는 듯 뒷자리에 놓인 서류를 살펴보던 정채연이 이번엔 입을 열었다.
―여기 첫 장에 적힌 최민이라는 각성자는 아무래도 스카우트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고요. 그보다 이 구태성이라는 각성자를 데리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렇게 하마.
―또 터미널 근처에 발생한 던전이요, 측정기 오류로 등급이 잘못 측정된 것 같아요, 인원 편성을 B급에 맞춰서 재구성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것도 참고하마.
그 후로도 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정채연이 마침내 서류를 내려놓고 말했다.
―그리고 내일이요. 프랑스에 좀 가고 싶은데요.
―내일 당장 말이냐?
―네. 만나 볼 사람이 있어요.
* * *
다음 날 새벽 정채연은 프랑스로 출국했다.
학업도,
길드 관련 스케줄도 다 미뤄 놓고.
갑작스럽게 출국을 감행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확실히 딸바보처럼 비쳤을 것 같기도 해.’
비단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채연이 그러자고 하면 했을 것이고,
또 하지 말아 달라고 하면 안 했을 것이다.
딸의 말 한마디에 쉽게 휘둘리는 정지호의 모습을 주변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근데 그건 그거고…….’
프랑스에 막상 도착하자니 주상혁도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지?’
이 시기의 정채연은 한낱 여고생에 불과하다.
해외까지 이동해서 그녀가 만나야 할 사람이란 게 누구일지 문뜩 궁금해졌다.
‘미래를 본다는 그녀라면…….’
혹시 벌써부터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닐지 호기심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어때요? 사진 잘 나왔어요?
―그래, 예쁘게 잘 나왔구나.
―아빠도 같이 한 컷 찍어요. 저기요!
‘이거 솔직히 맥 빠지네.’
누군가를 만나겠다던 정채연은 그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오전부터 관광 명소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또래의 여고생 소녀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철없는 여자아이 같기도 해서,
팔자 좋게 사진 찍는 모습이 안심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맥이 빠지기도 하는 그런 상황이 계속될 때였다.
반나절쯤.
신나게 돌아다니던 정채연이 마침내 굳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 슬슬 가요.
‘간다고? 드디어 만나는 건가?’
점심 무렵이 되자 차를 타고 이동하던 정채연이 도착한 곳은 파리의 헌터 협회였다.
혹시 만나려는 사람이 프랑스 협회 쪽에 관계된 사람인가 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또 아닌가 보네?’
정채연은 정지호와 함께 로비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낼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안내 데스크에 가서 누군가를 찾지도,
그렇다고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고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1시간쯤.
수많은 사람이 오가던 협회 로비에 앉아 있던 정채연이 일어나 입구로 걷기 시작했다.
정채연이 가로막은 건 마침 로비로 들어오는 스무 살 남짓의 노란 머리 백인 남성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하긴 한데……?’
주상혁이 분명히 떠오를 듯 말 듯 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정채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앤디 님이시죠?
‘앤디?’
이름을 듣고 나니까 앤디가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주상혁의 기억에 존재하는 앤디는 중년 남성이었지만,
비슷한 시간이 거슬러 올라갔다면 이 나이쯤이었겠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를 아나?
―네.
―어떻게 알지?
―음…… 7일 전쯤 각성하셔서, 오늘 이곳에 각성 심사를 받으러 오시는 길이라는 것 정도로요?
앤디의 눈에 노골적인 경계심이 드러났다.
하긴 주상혁이라도 누군가 불쑥 찾아와서 이같이 말해 오면 앤디처럼 반응했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건 말씀드리자면 조금 긴데. 자리를 옮겨서 대화를 나누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답해 드릴게요.
―좋다, 이동하지.
두 사람이 이동한 곳은 인근의 카페였다.
정채연과 나란히 앉은 앤디가 말했다.
―아까 했던 이야기를 마저 하지, 내가 7일 전에 각성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제가 미래시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미래시? 그게 뭐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이에요.
조금 믿기 힘들다는 눈초리의 앤디가 말했다.
―뭐,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미래를 볼 줄 아시는 분이 나를 찾아온 목적은? 유감이지만 스카우트라면 흥미가 없는데?
―미리 알려 드릴 게 있어서요.
―알려 줄 거?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있는데 어느 것부터 들어 보실래요?
앤디가 말했다.
―좋은 것부터 듣지.
―오늘 각성 심사를 받으면 S급 판정을 받으실 거예요.
본인이 높은 등급의 각성을 이룬 건 앤디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S급이라니…….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에 놀란 표정을 짓는 것과 별개로 앤디가 말했다.
―그럼 안 좋은 소식은?
―10년 후쯤 마나를 잃고 B등급이 되는 일이 있을 거예요.
앤디의 표정이 구겨졌다.
―믿기 힘드신가요?
―아니, 오히려 그 사건이라는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듣고 싶군?
정채연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드릴 수 없답니다.
―어째서지?
―나중에,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 드릴게요. 그때 마나를 되찾고 싶으시면 저를 찾아오세요.
* * *
주상혁이 바라본 정채연은 그 뒤로도 비단 앤디뿐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
산속에서 수련하던 레오나드를 만나 포섭하기도 했고,
독에 조예가 있는 각성자 벤티를 만나기도 했다.
물론 모두 곧바로 정채연의 동료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
사람들은 다시금 그녀를 알아서 찾아와 동료가 되었다.
정채연은 그런 그들을 데리고 모든 역경을 헤쳐 나갔다.
미래를 본다는 건 단순히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영약이 나오는 던전,
각별한 아티팩트가 존재하는 던전,
추후에 백요석과 흑요석에 대한 정보의 독점,
가능성이 보이는 최적의 각성자들을 끌어모아 최단기간에 최정예 공격대를 구성했다.
하지만, 몽골의 첫 번째 게이트, 아프리카의 두 번째 게이트, 미국의 세 번째 게이트까지 모두 뛰어넘은 정채연이었지만…….
네 번째 게이트는 무리였다.
수십,
수백 번을 회귀를 반복하며 재도전했어도 정채연은 놈을 넘을 수 없었다.
손짓 한 번에 지면을 갈아엎고,
천재지변에 버금갈 광경을 서슴없이 일으키는 녀석은 도무지 처리할 수 있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존재였다.
수십,
수백,
수천,
수만 가지의 미래를 보고 항상 최선의 길을 선택했다고 자부했지만, 항상 같은 결과가 찾아오는 매트릭스.
이미 지금이 몇 번째 도전인지조차 기억에 없고,
또다시 정해진 미래를 향해 발악해야만 하는 삶이 반복될 때였다.
실의에 차 있던 정채연은 우연히 한 남자의 미래를 들여다보고 그곳에서 희망을 찾았다.
네 번째 게이트를 마침내 극복한 인류.
전 세계에 찾아온 이전과 같은 평화.
하지만…….
―없어…….
그곳에 정채연은 없었다.
저 남자와 가정을 이루고 낳은 아이가 고난과 역경 끝에 극복해 낸 결과였지만, 자신은 그 아이를 낳다가 생을 달리해야만 하는 그런 미래였다.
살기 위해 발악하면 찾아오지 않고,
그저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찾아오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이미 수십 수백 번 같은 시간을 반복해 오던 정채연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다는 결정은 쉽지 않았다.
하물며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이 전제되어야 하는 일.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을 텐데…….
―근데 뭐가 저렇게 행복해 보이지…….
주재호의 미래를 유심히 들여다보니 그곳에서의 자신은 아득바득 힘쓰던 자신의 일평생 여느 때보다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네 번째 게이트를 넘어서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벗어난 이유일지.
아니면 생긴 외모와는 달리 자상한 그의 매력에 빠진 덕분인지.
신혼을 보내는 자신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도 그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진짜 부럽네, 저 여자…….
정채연은 결국 자신을 희생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잔뜩 있었다.
먼저 다시 한 번 결과가 정해진 미래를 최선을 다해 발악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아들인 주상혁을 위한 손목시계를 만들려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회귀의 단추는 다름 아닌 세 번째 게이트에서 출몰한 몬스터의 뿔에 있었다.
하나의 뿔로는 회귀를, 하나의 뿔로는 손목시계를 만들어 회귀 후 자신에게 전달한다.
회귀하면 마나도 기억도 모두 잃어버리지만, 미래를 볼 수 있는 자신은 항상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기에 손목시계를 얻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손목시계는 됐고…….
정채연의 다음 준비물은 다이어리였다.
작성된 다이어리는 익히 알던 사람들에게 뿌려졌다.
방황하는 청소년 김진성에게도 전해졌고,
10살 된 소년 교황 아르돈을 납치범에게서 구해 주고 자연스럽게 전해 주기도 하고,
대호길드를 이끌어 갈 정지호에게도 다이어리를 전해 줬다.
모든 준비를 마친 만삭의 정채연은 자신이 봤던 예언처럼 웃는 얼굴로 출산을 하다 숨을 거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