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49
Book 10 Chapter 3
두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꽃이 피던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금방이라도 찾아올 것처럼 슬슬 낮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주상혁은 그동안 순탄하게 학교생활을 보냈다.
학교, 보충제, 잠.
학교, 보충제, 잠.
학교와 보충제 잠뿐인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학교생활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문제랄 게 일어날 일도 없다.
덕분에 편하게 보충제를 만드는 나날을 보내던 주상혁이 밤늦게 홀로 보충제를 만들다가 미소 지었다.
“드디어…….”
주상혁이 미소 지은 이유는 간단하다.
끝났다.
무려 1만 명분의 보충제를 만드는 일이 끝이 난 것이다.
“한 세 달쯤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이른 날짜였다.
그 이유로 따지면…….
“녀석들 덕분이겠지.”
강혜영을 포함한 세 녀석.
녀석들의 도움이 제법 쏠쏠했다.
보충제를 직접 만들어 주는 건 불가능하지만,
유독 잡일이 많이 생기는 보충제를 만들 때 그걸 거드는 건 가능하다.
생각난 김에 답례도 하기로 했다.
“맛있는 거라도 만들어 줘야지.”
양갱이 좋을지,
아니면 초콜릿이 좋을지 생각하고 있자 주주가 왕왕 짖었다.
“그래, 주주도 만들어 줄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렇게 말했더니 주주가 신이 나서 방방 뛴다.
그렇게도 좋을까…….
“하긴 이번 회차에는 많이 못 만들어 주긴 했지.”
산삼이 넉넉하게 들어와야 간식으로 만들어 준다.
하지만 돈 문제 때문에 산삼을 수급하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정지호에게 가끔 부탁해서 산삼을 구해 먹는 정도였기에 이미 어느 정도 성장한 주주의 입에 물려줄 게 더욱더 없었다.
“하지만 이제 다르지.”
이번에 보충제가 판매를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돈을 긁어모을 수 있다.
아니 굳이 보충제를 파는 게 아니더라도 분위기를 봐서 이전처럼 침을 놓고 산삼을 받아도 된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단 말이지…….”
주상혁이 달력을 확인했다.
달력에 표시된 날짜는 5월 말일.
보충제의 첫 판매 날짜로 정해진 날이었다.
판매 날이 5월 말일로 정해진 이유는 하나다.
판매 절차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고심 끝에 보충제를 모두 만들고 동시에 판매 시작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이다.
주상혁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준비가 끝났으니 아버지께 알려야겠지.
밤이었지만 아직 9시 다행히 주재호와의 통화가 연결되었다.
주상혁의 전화를 세상 누구보다도 반갑게 받은 주재호가 한참을 떠들기 시작했다.
재혁이와 민혁이 이야기라거나,
막내딸 화영이의 이야기도 존재했다.
주재호가 말했다.
―아차…… 근데 그나저나 무슨 일로?
듣기 좋은 동생들 이야기를 듣던 주상혁이 빙긋 웃었다.
“슬슬 보충제를 판매해야 할 것 같아서요.”
―5월 말일로 정해진 판매 일을 당기겠다는 말이냐?
“네, 준비가 다 끝났거든요.”
* * *
―청초길드, 보충제 판매 일 앞당겨.
―보충제? 영약? 대중의 반응은 싸늘.
―문제의 보충제, 결국 판매 시작.
다음 날 아침 기사가 쏟아졌다.
쉴 새 없이 불타는 기사들의 댓글창은 오후까지 식을 줄 몰랐다.
어떻게 저런 식품이 판매 허가를 받을 수 있는 건지 의문이라는 둥,
과장 광고가 선을 넘어도 한참은 넘었다는 둥
다양한 관점에서의 비판과 비난이 쏟아졌지만, 공통점도 한 가지 있었다.
보충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의 댓글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당일 오후, 판매가 시작되고 5시간쯤 지났을까?
보충제의 후기랍시고 변호하는 댓글이 하나둘 달리기 시작했다.
무릎 아파하시던 할머니가 보충제 먹고 뛰어다니신다거나,
어제 각성자 평가 떨어졌는데 먹고 붙었다거나,
여하튼 아무리 봐도 믿기 힘든 글들이었다.
⌙그 보충제에 그 댓글 알바.
⌙⌙알바 엄청 티 나거든요? 하다못해 티라도 안 나게 하든가.
⌙이거 하나 달면 얼마나 받나요?
⌙으악 도망쳐 청초길드가 댓글 부대를 풀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 숫자가 적어 금세 역풍을 얻어맞고 사라졌지만,
분위기는 더욱 심각해졌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호기심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홍보가 본격적인 판매량으로 타나 난 것은 이튿날부터였다.
첫날 판매량 단 100개에서 이틀째에 1,000개를 판매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화제의 청초길드 보충제, 이틀 만에 1할이나 판매했다.
―커뮤니티 곳곳에 보이기 시작하는 호의성 댓글들, 보충제 어쩌면?
이틀째, 기사들도 조금 변화했다.
여전히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지만 말이다.
⌙말이 어 다르고 아 다르다지만, 1할이면 만개 한정 판매랬으니까 고작 1,000개인데 ‘이나’가 아니라 고작이어야지 맞는 거 아님? 기자님이 뒷돈 처 드셨나? 기사수준 왜이래?
⌙⌙옳소. 뉘앙스가 문제잖아 뉘앙스가!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판매량은 수직 상승.
사흘째가 되는 시점엔 5,000개.
나흘째엔 채 오전을 넘기지 않고 1만 개를 완판하는 기염을 토해 냈다.
―판매 4일째, 1만 개 완판
―추가적인 판매는 없냐고 길드로 문의 빗발쳐.
―청초길드 공식 입장 “추가적인 판매는 없다, 구매자분들께 그저 감사할 뿐.”
단 나흘 만에 보충제 완판을 지켜보던 여론의 반응은 첫날과 이튿날에 비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구매자들은 알고 있다.
영약 그 이상의 물건이란 걸.
그리고 구매자들 중에는 때마침 한국에 머물고 있던 김진성 일행도 존재했다.
초창기의 닉스였기에 멤버는 김진성을 비롯한 5명.
로이터와 멜레나,
샤오링에 안드레까지 해서 5명이었다.
아지트에 모여서 마나를 확인해 보던 김진성이 물었다.
“어떻지?”
“올랐군.”
“나도, 리더는?”
“나도 그렇다. 첫날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여전히 조금 늘었어.”
김진성의 생각이 깊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능력을 써서 최대한 많이 구매해 뒀으면 좋았을 텐데…….”
보충제의 이야기가 언론에 뿌려질 때쯤 김진성은 어느 정도 가능성은 열어 두고 있었다.
여론의 반응은 냉담했지만,
‘그건 보통 사람의 경우지.’
특질계 능력을 타고난 김진성이다.
계열 특유의 그 자유분방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미리 일반인에게 암시를 걸어 보충제를 하나 더 구했다.
만약 보충제의 능력이 쓸 만하다면 샤오링의 복제 능력으로 필요한 만큼 찍어 낼 생각이었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복제가 안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던 적은 없었기에 당시엔 몹시나 당혹스러웠지만…….
여하튼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은 더욱이 보충제가 탐났다.
로이터가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리더?”
계획을 변경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강행할지를 묻는 듯했다.
본래라면 내일 던전으로 들어가는 강태섭의 습격이 예정되어 있다.
인원은 5명 전부다.
하지만 탐나는 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나타났다.
‘딱히 어딜 가는 것도 아니니 예정되어 있던 강태섭부터 처리하는 것도 좋겠지만…….’
늦장 부리다가 다른 누군가에게 선수를 빼앗길 수가 있다.
“조를 나눈다. 강태섭은 로이터 너와 멜레나가 처리하도록 해.”
“그럼 리더는?”
“주상혁을 확보해야겠지.”
공식적으로는 아직 보충제를 만든 게 주상혁이라는 정보는 없다.
하지만 두 달 전쯤 얻은 한 가지 정보가 있다.
주상혁이 특질계 각성자라는 정보였다.
정황상 누가 봐도 보충제를 만든 건 주상혁이었다.
작전을 들은 로이터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로이터와 김진성의 목숨은 연결되어 있다.
김진성이 죽으면 그의 능력으로 인해 로이터의 심장도 멈춘다.
주상혁은 일단 특질 계열이라고는 해도 SS급이다.
세 사람만으로는 조금…….
“조금 위험하지 않나?”
김진성이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할 것 없다. 다 생각이 있으니까.”
* * *
“흐음…….”
포션을 판매하고 닷새째.
주상혁의 표정은 심각했다.
Q. 자격 증명 [승급 퀘스트] – page1
치료한 환자: 7811/10000
그도 그럴 게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았다.
분명히 1만 명분의 포션을 제작했고,
또 판매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는 건…….
사재기를 한 사람이 있다는 거겠지.
“어느 정도 예상했다지만, 이건 좀 많이 비는데…….”
물론 주상혁도 이 같은 일이 일어날 걸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각성자를 성장시킬 수 있는 보충제의 등장.
모두가 손가락질하지만 만약의 경우를 놓고 도박을 거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걸 예상했다.
그 때문에 1인당 1개만 구입할 수 있도록 제한도 걸어 뒀고,
보충제를 모두 완성하고서 한 번에 판매를 시작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지만.
그럼에도 이 같은 일이 일어났다.
“2,000명이 넘는 다는 건데…….”
누구지? 대체 누가……?
사재기꾼의 정체.
몹시 궁금하다.
마음 같아서는 습격해서 혼쭐을 내주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처리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적고,
하물며 번거로운 일이다.
주상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수치는 어떻게 채울지 고민이군…….”
재판매하는 건 힘들다.
지금 추가적인 생산을 해서 재판매해도 사재기꾼들의 먹잇감이 될 뿐.
“이참에 길드원들에게도 좀 먹일까?”
청초길드의 복지 차원으로,
또 슬슬 길드의 전력을 강화할 마음으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또…….
“겸사겸사 대호길드도 챙기자.”
이번에 약초값을 대 준 정지호다.
답례하는 차원으로 대호길드의 길드원들에게도 하나씩 공급하는 것도 좋겠지.
그걸로 그치지 않고 주상혁이 빈 수치를 채울 대상을 모색할 때였다.
침대에서 낮잠을 자던 주주가 벌떡 일어났다.
“뭔데? 왜 그래?”
대답을 할 것이지 주주의 환상이 눈으로 날아들었다.
머릿속으로 펼쳐지는 환상을 지켜보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알았다지만…….”
예상외의 거물이 걸렸다.
환상에서 깨어난 주상혁이 입꼬리를 쓰윽 올릴 때였다.
‘하나가 또 있어……?’
또 하나의 환상이 곧바로 이어졌다.
전혀 다른 공간 다른 위치에서의 환상을 보고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이제 어떻게 한다?”
보충제도 보충제인데 지금 환상으로 본 일에 대한 것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어떻게 할까?
어떤 것부터 처리해야 할까?
조금 고민하던 주상혁이 입을 열었다.
“좋아, 그쪽부터 가 볼까?”
* * *
주상혁의 이복동생인 쌍둥이는 교내에서 꽤나 유명하다.
그 이유로 말하자면 역시 나이에 맞지 않게 특출난 신체 능력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초등부는 각성 등급을 정확히 측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워낙에 활발한 녀석들이니만큼 은연중에 보여 주는 신체 능력에서 그 비범함은 충분히 드러나는 것이다.
“최소 A급 이상이겠죠?”
“쌍둥이들이요?”
“네.”
“뭐…… 그렇겠죠.”
교사들의 평가는 두 녀석을 최소 A급으로 보고 있었다.
교사들 중에는 B등급 각성자도 있고,
A급 각성자도 종종 있다.
지금 당장 운동장에서 소환수랑 술래잡기를 하는 녀석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과 비교해 등급을 어렴풋이 짐작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교사들이 교무실 창문으로 쌍둥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음침한 분위기의 남자 교사 한 명이 슬그머니 비집고 들어와 창밖의 쌍둥이를 응시했다.
“윤 선생님 오셨어요?”
까닥.
윤 선생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평소에도 과묵한 편인 윤 선생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분위기가 묘하다.
평소에 그를 불편해하던 교사들은 물론이고,
오늘따라 무슨 말을 건네도 단답으로 일관하는 윤 선생의 태도에 불편함을 못 이기고 하나둘 흩어졌다.
결국 홀로 남은 윤 선생은 그 뒤로도 한참을 창가에 서서 쌍둥이를 바라보다가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등 뒤로 교사들의 불만이 들려오는 듯했지만, 별 신경 쓰지 않는듯했다.
윤 선생이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드디어 일팔이도 잡았다.”
“내일부턴 일칠이랑 놀아야지.”
계단으로 올라오는 쌍둥이가 보였다.
새하얀 강아지형 소환수를 품에 안고 있던 쌍둥이가 윤 선생을 발견하고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잠깐 나랑 어디 좀 가자.”
“지금요?”
난데없는 윤 선생의 말에 쌍둥이가 의아해할 때였다.
크르르르릉…….
윤 선생을 보고 일팔이가 왕왕 짖자 윤 선생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보통 소환수가 아니라는 건 예전부터 알았지만, 파직, 파직 스파크가 일어나는 소환수의 기운은 우습게 볼일이 아니었다.
윤 선생이 식은땀을 흘리며 난처해하자 주민혁이 일팔이의 등을 툭 쳤다.
“그러면 안 돼.”
꾸우우웅.
일팔이가 얌전해지자 주재혁이 말했다.
“근데 점심시간 10분도 안 남았는데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단다.”
쌍둥이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답했다.
“알았어요.”
“어디로 가면 돼요?”
윤 선생이 쌍둥이를 데리고 건물을 벗어났다.
초등부 교사 뒤편의 으슥한 곳으로 향하자 주재혁이 물었다.
“근데 어디 가는 거예요?”
“…….”
묵묵부답의 윤 선생의 뒤를 쌍둥이가 5분쯤 더 따라 걸었을 때였다.
으슥한 곳에 서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윤 선생이 쌍둥이들과 함께 그 앞으로 이동하자, 김진성이 윤 선생을 격려했다.
“고생했다.”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김진성이 천천히 걸어 쌍둥이 앞에 섰다.
“형이 부탁할 게 있는데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그게 뭔데요?”
* * *
김진성의 능력은 요약하자면 절대 최면.
상대에게 동료의 서약만 이끌어 내면 그 어떤 명령이라도 내릴 수 있다는 극강의 장점을 가진 능력이었다.
김진성은 이 능력을 이용해 그동안 못 이룬 것이 없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능력을 사용해 얻어 내면 되었고,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능력으로 마음껏 부릴 수 있었다.
이번에도 김진성은 그럴 자신이 있었다.
주상혁.
SS급 각성자긴 해도 애송이일 뿐이다.
“힘이 강한 녀석과 힘 싸움을 할 필요는 없지.”
김진성은 무르지 않았다.
주상혁에게는 가족이 있다.
가족을 인질로 주상혁을 굴복시킨다면 위험을 감내할 필요조차 없었다.
타깃으로 정해진 건 쌍둥이였다.
길드의 부모쪽도 관심은 있었지만, 자칫 증인을 많이 남길 가능성이 있다.
그걸 감안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쌍둥이를 끌어들이는 게 여러모로 편했다.
“당신이 윤지우인가?”
출근하는 초등부 교사를 포섭해 으슥한 곳으로 쌍둥이를 불러내는 건 간단했다.
이제 대답만 끌어내면 되겠지.
“나쁜 사람들이 있어서 말이다.”
“그래서요?”
“녀석들을 쫓아내 줬으면 좋겠어.”
듣기로는 너희 강하다며?
초등학생 구슬리는 거야 간단한 일.
적당히 치켜세워 주면 알아서…….
“그러니까 동료가 되어 달라는 거예요?”
일이 쉽게 풀리려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녀석들 입에서 동료라는 단어가 먼저 튀어나왔다.
김진성이 속으로 조소했다.
“그래.”
김진성의 말에 쌍둥이가 서로 끔벅끔벅 바라보더니…….
돌연 영문모를 대화를 시작했다.
“진짜네?”
“형 말이 맞았어.”
김진성이 이해할 수 없는 두 녀석의 대화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찰나였다.
쌍둥이가 대뜸 주먹을 휘둘렀다.
두 개의 주먹이 동시에 김진성의 안면을 후렸다.
김진성이 붕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구구궁.
“리더!”
샤오링과 안드레의 걱정 담긴 목소리가 들려온 직후였다.
으스러진 담벼락 사이에서 비틀비틀 일어나는 김진성의 코에서 피가 후드득 흘렀다.
코뼈가 주저앉은 김진성이 흥건한 손바닥의 피를 보고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뭐 해, 안드레. 힘으로라도 데려간다.”
“그, 그래.”
안드레가 쌍둥이를 향해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정직한 주먹이었지만,
강력한 위력이 담겨 있어 무시할 만한 주먹은 아니었는데…….
쌍둥이가 합심해 주먹을 받아 내려는지 손바닥을 내뻗었다.
“흥미롭군, 힘 싸움을 하자는 거냐?”
흐아압!
안드레의 기합과 함께 주먹을 받아 내던 쌍둥이가 건물을 부수며 날아가 버렸다.
주저앉은 건물 벽을 보며 안드레가 중얼거림을 뱉었다.
“이런, 죽어 버렸을지도 모르겠군.”
한 놈은 살아 있기를 바라며 무너진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였다.
후드득…….
자욱한 먼지 속에서 옷을 털며 일어서는 쌍둥이의 실루엣이 보였다.
안드레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생각 이상으로 단단한 놈들인가 보군.”
S급 끝자락에 해당하는 자신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주먹이다.
주먹을 정통으로 맞고도 정신을 잃지 않다니 의외였다.
“A급이 아니었나?”
윤 선생인가 하는 녀석에게 오전에 들을 때는 A급이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하여간 수준이 저 모양이니 보는 눈도 형편없었겠지.
정보가 잘못됐음을 느꼈지만, 안드레는 여유로웠다.
“재미있겠군.”
오랜만에 힘쓸 일이 생겼…….
중얼거리던 안드레의 눈이 불신으로 가득 찼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배를 확인한 그의 눈이 거칠게 요동쳤다.
명치에 박힌 고사리 같은 주먹과,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있는 주재혁.
거기까지 확인한 안드레가 눈을 까집고 털썩 무릎 꿇었다.
기절한 것이었다.
주재혁이 자신 쪽으로 쓰러져 내리는 안드레를 받아 옆으로 대충 밀어 버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조금 전 장면을 모두 지켜본 샤오링과 김진성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터벅터벅.
주재혁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김진성이 다급히 소리쳤다.
“샤오링!”
최고의 전투 요원인 안드레가 고작 일격에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눈으로 본 걸 불신하고 의심할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다.
전이 아티팩트를 사용해 도주할 생각이었다.
김진성의 외침에 품에서 전이 아티팩트를 꺼내던 샤오링이 꺼내다 말고 흠칫 굳었다.
일팔이가 샤오링의 다리를 콰득 문 이유였다.
파지지지직.
“끄아아아악.”
아니나 다를까 뒤이어 터진 전류에 잡아먹힌 샤오링의 비명이 장내를 울렸다.
김진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젠장…….”
전이 아티팩트로 도주하겠다는 방법마저 저지당한 김진성이 다급히 뒷걸음질 치다가 무언가에 부딪쳤다.
그 자리에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던 윤 선생이었다.
김진성이 황급히 윤 선생을 인질로 내세우며 말했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이 녀석을 죽인다.”
우뚝.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다가오는 주재혁의 걸음이 멈춰 섰다.
김진성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바람과 같이 김진성의 뒤편에서 나타난 주민혁이 김진성의 뒤통수를 후렸다.
털썩.
눈이 뒤집힌 김진성이 그대로 기절해 꼬꾸라졌다.
주민혁이 쓰러진 김진성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근데 큰형이 밖에서는 항상 힘 조절하라고 그랬는데…….”
“모르는 사람이 와서 친구 하자고 하면 혼쭐을 내주라고 했었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되는 건가……?”
* * *
주상혁은 곧바로 첫 번째 환상이 보인 곳으로 이동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두 번째 환상을 본 곳보다 위치가 가까운 이유였다.
전력으로 이동하면 10분 내외로 도착할 수 있는 장소에 도착하자, 이미 환상으로 본 장면이 눈에 보였다.
무너진 담벼락.
한쪽 벽이 통째로 내려앉은 건물.
이미 전투 불능 상태의 김진성 일행.
과연 환상으로 본 것과 똑같은 장면이라 할 수 있었다.
쌍둥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이다!”
“형!”
코앞으로 쪼르르 달려온 쌍둥이가 칭찬해 달라는 듯 눈빛을 보내왔다.
녀석들의 머리를 헝클어 주고는,
“어디 보자…….”
움찔.
샤오링 쪽으로 걸어가는데 눈이 마주친 샤오링이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추가적인 움직임이 있는 건 아니다.
일팔이에게 물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터벅터벅.
바로 코앞까지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전이 아티팩트를 먼저 챙겼다.
마비 기운 때문에 떨어트린 전이 아티팩트를 챙긴 주상혁이 이번엔 샤오링의 품으로 손을 쓱 집어넣었다.
“복제품도 하나 있을 텐데…….”
몸에 지니고 있을 복제품도 하나 더 챙기고 인벤토리를 닫았다.
일단 챙길 건 모두 챙긴 주상혁이 고민에 빠졌다.
이제 어떻게 한다……?
김진성 일행의 뒤처리.
단순히 모두 죽여 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주상혁이 이곳까지 오면서 생각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냥 죽이긴 좀 아까워.’
근데 그러려면 문제가 좀 있다.
다이어리로 인해 발생하는 인과관계는 모두 변할 걸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채연이 정해 준 레일 위를 달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더 나은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음…….”
사실 주상혁은 이전부터 다이어리의 존재를 의식해 왔다.
그러는 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바꾸지 않는 선에서 성장하겠다는 자신의 생각이,
미래의 장기짝에 행동에 변화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오히려 성장을 억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다이어리는 주상혁이 저번 회차를 기억 못 하는 걸 기준으로 쓰였다.
그래서 20살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주상혁은 이제 14살이다.
6년이면 정말 많은 걸 바꿀 수 있는 시간이다.
예전에는 이전 회차에 맺었던 인간관계 때문에라도 다이어리를 이용하는 입장이 되려고 했지만,
막상 이번 회차를 살아 보니 불편한 게 상당했다.
미래가 바뀌지 않는 선에서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행동에 조심성이 항상 강요됐고,
덤으로 신경 써야 할 것 또한 한두 개가 아니었다.
솔직히 정해진 길을 이탈해서 개척한다는 게 불안하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가 설계한 장기판 위에서 장기짝으로 움직이고 싶은 건 아니다.
설령 장기판 위의 주인공인 왕일지라도,
“결국엔 좀 잘난 장기짝일 뿐이지.”
6년이란 시간은 길다.
생모 정채연의 의지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인다면 그 이상의 성과를 올릴 자신이 있었다.
막상 결심이 서자 재미있는 일이 많이 떠올랐다.
“어디 보자, 그럼 가장 먼저…….”
주상혁이 샤오링을 보고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을 마친 주상혁은 일단 샤오링의 뒷덜미를 강하게 후려쳤다.
샤오링의 의식이 끊어져 축 늘어졌다.
주상혁이 주주를 소환했다.
“이 녀석들 좀 옮겼으면 좋겠어.”
와왕!
어디로……?
잠시 고민하던 주상혁의 표정이 밝아졌다.
“대호길드로.”
대호길드 정도의 규모라면 안 쓰는 방들도 많이 있겠지.
주주가 소환한 분신이 세 사람을 실어서 대호길드로 사라지자, 주상혁이 기지개를 켰다.
“그럼 다음은 두 번째 환상인가?”
주주가 보여 줬던 두 번째 환상이 있던 곳.
그쪽에도 볼일이 있었다.
거대해진 주주를 본 쌍둥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형, 나도 탈래.”
“나도, 나도.”
“안 돼. 너희는 수업 들어야지.”
실망했는지 시무룩해지는 쌍둥이를 보고 주상혁이 말했다.
“수업 빼먹지 말고 꼭 들어가라?”
주상혁이 주주의 꼬리에 올라서자 꼬리를 들어 등 위에 올려 준다.
“가자.”
주주가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일순간 엄청난 풍압이 몰아쳤다.
깜짝 놀란 주상혁이 몸을 낮게 낮추고 떨어지지 않게 주의했다.
주상혁 정도 돼도 숨도 잘 가누기 힘들 정도의 신속함.
주상혁이 북슬북슬한 털에 몸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이거 생각한 거 이상으로 빠르네…….”
건물 빌딩과 빌딩을 시퍼런 안개를 이끌고 해태가 내달린다.
누군가 주주의 모습을 본다면 잘 뽑힌 동양화 한 장을 떠올릴 것이다.
바쁘게 달리던 주주가 멈춰 선 건 30분쯤 후 서울의 어느 던전 앞에 도착해서였다.
작게 변한 주주를 안고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와왕!
“저쪽이라고?”
A급 던전쯤 되니 사실 이곳저곳 누비지 않으면 지금의 주상혁의 능력으로는 힘들었는데,
이렇게 알려 주니 고마울 뿐이다.
주주가 안내하는 대로 30분쯤 이동했더니 곧이어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강태섭을 비롯한 협회의 각성자들,
전투 형태로 변한 분신 주삼이,
검게 타 죽은 로이터와 멜레나의 시신.
주상혁이 강태섭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인기척을 느낀 각성자들이 에워쌌다.
조금 전까지 멜레나와 로이터와 전투가 있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니 싶기도 했지만…….
“귀찮네…….”
일순간에 경계를 뚫고 강태섭의 앞까지 이동했다.
갑자기 나타난 주상혁을 보고 강태섭이 움찔 놀라는 기색을 보이고 잠시 후 얼굴을 확인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네, 저예요.”
주상혁을 놓쳤던 각성자들이 뒤늦게 몰려들었다.
“위험합니다, 여긴 저희에게 맡기고…….”
“괜찮으니 호들갑 떨 필요 없네.”
“예……?”
아는 사람이야.
아, 그러고 보니 그 SS급 소년!?
뒤늦게 주상혁을 알아본 듯한 반응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왔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는 듯하자 강태섭이 말했다.
“여기 온 건 이 사람들 때문이겠지?”
“네.”
시꺼멓게 타 죽은 두 구의 시체를 확인했다.
뭐, 죽일 필요성까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현장에 있던 주삼이가 그렇게 판단했으면 그게 최선이었을 테니 어쩔 수 없다.
강태섭이 말했다.
“자리를 이동해서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구나.”
물어볼 일이 많이 있는듯한 눈빛이었다.
* * *
던전을 빠져나온 주상혁은 차를 얻어 타고 강태섭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까지 이동하는 차에 오른 주상혁이 함박웃음을 그렸다.
(Q. 잊혀진 의원의 약속 (완료)
「완벽한 약을 만들어 강태섭을 깨워 주겠다고 한 약속은 잊혔지만, 당신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강태섭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쓰러지지 않도록 원인을 차단하자.」
달성 조건: 강태섭의 수면 상태 저지.
달성 보상: 의원의 비밀 상점, 명성+300
실패 시 페널티: 모든 능력치 20% 소실.
아까 던전에서 까맣게 타 버린 시체를 확인했을 때 완료된 퀘스트였는데 이로써 비밀 상점을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퀘스트를 완료하고 비밀 상점을 한 바퀴 쓱 훑어보고 있자니 강태섭의 저택까지는 금방이었다.
서재로 함께 이동한 주상혁이 강태섭과 마주 보고 앉았다.
먼저 말을 꺼낸 건 강태섭이었다.
책상 위에서 폴라나를 쩝쩝 먹는 주삼이를 보고 강태섭이 말했다.
“사실 그간 이 녀석을 키우면서도 믿기 힘들었단다.”
“그러셨겠죠.”
하지만 오늘 멜레나와 로이터가 습격한 걸 경험했다.
주상혁은 숯검정이 된 녀석들의 모습밖에 보지 못했지만, 강태섭은 아닐 것이다.
저번에 설명했던 인상착의와 상당히 유사한 두 사람을 봤으니,
‘신뢰하지 않을 수 없겠지.’
녀석들이 습격할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듣고 싶다고 물어온다.
그때는 물어봤어도 답해 주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무한한 신뢰를 보내오는 강태섭의 눈을 볼 때 저번과 달리 어떤 말이든 믿어 줄 것 같았으니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우연히 몇 가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래를?”
“협회장님의 일도 그중에 하나였을 뿐 별다를 건 없습니다.”
“협회장? 나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엔 그렇게 될 거예요.”
듣는 강태섭의 표정은 근심이 약간 묻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긴 이번 회차에서는 아직 강태웅이 김진성과의 접촉이 있지도,
그렇다고 강태섭이나 강혜영에게 위해를 가하지도 않았으니 형을 밀어내고 회장직을 차지한다는 게 내키지 않겠지.
하지만 미안한 말이지만, 주상혁은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보다 강태섭의 지원이 필요한 주상혁이었기에 그가 회장이 되어 주어야 했다.
‘하는 수 없나?’
이렇게 된 거 슬쩍 동기부여 정도만 해 주기로 했다.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무엇이?”
“만약 오늘 던전에서 로이터와 멜레나를 제압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하는 일이요.”
강태섭이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말했다.
“듣고 싶구나.”
모든 이야기를 들려줬다.
강태섭이 혼수상태에 빠지는 일.
그 이후에 강태웅이 저지르는 만행.
강태섭이 쓰러지고 딸 강혜영이 어떤 상황에 처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강태웅을 밀어내고 강태섭이 협회장이 되는지.
“믿기 힘든 이야기구나. 분명 믿기 힘들긴 한데…….”
주상혁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않는다.
닉스의 습격을 예견한 것도 그렇고,
그걸 피해갈 방법을 제시한 것도 그랬다.
이건 강태섭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궁금한 게 있구나.”
“말씀하세요.”
“그 혜영이를 도와서 나를 회장으로 만든다는 사람.”
“그 사람이 왜요?”
“그게 혹시 자네인가?”
자네,
14살 솜털 뽀송뽀송한 애송이에게 사용하기에는 어색한 단어라 할 수 있다.
주상혁이 말했다.
“글쎄요.”
조용히 얼굴을 응시하던 강태섭이 돌연 픽 웃었다.
“그래, 뭐 말하기 싫으면 더 캐묻지는 않겠네”
“감사합니다.”
“또 회장직도 이제부터는 체면 차리지 않고 쟁취할 수 있게 노력하겠네. 그러는 걸 원하는 것 같으니까.”
눈치 빠른 강태섭이 그렇게 말하자 내심 뜨끔했지만,
뭐 들켰더라도 뜻대로 움직여 주기만 한다면 별 상관없었다.
대화를 마무리한 강태섭이 난처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왜 그러시죠?”
“내가 가진 게 없어서 마땅히 줄 게 없군.”
습격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도,
회장이 되는 것도,
주상혁이 바라긴 했어도 결국엔 강태섭에게 득이 되는 일뿐이다.
여하튼 도움을 받았으니 뭔가 돌려줄 게 필요할 텐데 아쉽게도 강태섭에게는 딱히 줄 게 없었다.
주상혁이 말했다.
“꼭 주셔야겠다면, 그건 회장이 되시고 난 이후에 주시면 됩니다.”
강태섭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싫은 기색은 아니다.
“뭘 요구할지 벌써부터 걱정되는군.”
* * *
강태섭과의 일도 마무리되었겠다.
주상혁은 곧바로 대호길드로 향했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주주를 타고 일순간에 대호길드에 도착한 주상혁이 로비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정지호가 다가왔다.
“그나저나 사람 참 당황스럽게 하는 재주가 있단 말이지, 우리 외손주는.”
“녀석들은요?”
“부탁한 대로 일단 밀실에 처박아 두긴 했다.”
안내에 따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걷자니 함께 걷던 정지호가 슬쩍 이야기 꺼냈다.
“그나저나 뭐 하는 놈들이더냐? 보통 놈들은 아닌 것 같던데.”
정지호가 S급을 넘어 SS급을 코앞에 두고 있고,
정지원이나 대호길드의 직계가 주상혁 덕분에 S급이 되었다고 한들,
S급이라는 등급이 허접한 등급은 아니다.
딱 봐도 비범한 녀석들이 업혀 왔으니 의문을 품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나쁜 놈들이에요, 죽여도 시원찮을 만큼.”
“그럼에도 죽여 버리지 않았다는 건 고문이라도 할 셈이냐?”
“뭐, 비슷하긴 해요.”
그러고 보니 김진성 일행의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다른 건 어떻게 됐지?
호기심이 일어 정지호에게 물었다.
“그보다 다른 부탁은요?”
“뭐, 일단 부탁한 대로 연락은 해 봤다.”
“뭐래요?”
“오겠다고 하더구나. 돈 이야기는 조금도 꺼내지 않고.”
“그렇겠죠.”
주상혁이 시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전해 달라 했으니 지금쯤 녀석은 궁금해서 안달이 났을 것이다.
지하 복도에 도착해서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예요?”
끄덕.
정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열 평 넓이의 독방이 눈에 들어왔다.
방 가운데 놓인 의자에는 결박된 샤오링이 있었다.
안대를 쓰고 있던 샤오링이 방이 밝아진 걸 느꼈는지 입을 열었다.
“누구지……?”
“그걸 알아서 뭐 하게?”
변성기도 제대로 안 온 목소리를 듣고 샤오링이 말했다.
“주상혁……? 나를 어쩔 셈이지?”
“그전에 한 가지 제안을 좀 하려고.”
“제안? 살려 주겠다는 건가?”
“그래 이해관계만 맞아떨어지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샤오링이 말했다.
“그게 뭐지?”
“닉스를 나와서 나와 함께 일해 볼 마음 없어?”
제안을 들은 샤오링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조소 같기도 하고,
역으로 자조적인 것 같기도 한 미소였다.
‘물론 이해가 되긴 해.’
샤오링 역시 김진성의 능력에 당했을 확률이 높다.
김진성을 배신하면 가령 죽는다거나 하는…….
“왜 구미가 당기진 않나?”
“…….”
딱히 별말이 없자 주상혁이 말했다.
“김진성의 능력 말이야, 정신 계열이지?”
“…….”
“그래, 말하지 못하시겠지.”
안 하는 게 아니고 못 하는 거다.
저것 역시 김진성에 대한 배반 행위일 테니까.
“대충 무슨 상황인지도 이해가 가.”
“…….”
“근데 말이야.”
샤오링의 분위기를 확인하며 슬쩍 말을 던졌다.
“만약에 녀석의 능력을 제거할 수 있다면?”
“…….”
조금 흥미가 생기려나?
“풀 수 있다고……?”
불신이 약간 느껴지는 목소리.
어차피 처음부터 신뢰를 주길 바랐던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확답을 받길 원했던 것도 아니다.
“왜, 거짓말 같아?”
“…….”
“사실 그쪽 능력에 관심이 있단 말이지.”
“내 능력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데?”
“알지.”
샤오링의 능력은 복제.
다이어리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이니 확실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능력을 들킨 샤오링의 동요가 느껴졌다.
“어떻게 능력이 복제란 걸 알고 있는지 궁금하겠지?”
닉스의 전원은 김진성의 능력으로 묶여 있다.
내부의 정보를 유출하는 것 역시 김진성에 대한 적대 행위.
당연히 고문을 한다고 해서 스스로 나불나불 불어 댈 리 없었다.
그건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하는것과 다름없는 것.
이전에 멜레나를 고문해 봤기에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똑똑.
이제 막 대화가 진득해지려는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번거롭긴 해도 잠시 나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비스듬히 돌아 문고리를 잡고 말했다.
“잠시 고민하고 있어. 나갔다 올 테니까.”
문을 열고 나가자 복도에는 외할아버지 정지호가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호출한 녀석들이 도착했다.”
“네? 벌써요?”
김진성을 비롯한 세 명을 확보한 직후.
주상혁은 정지호에게 두 가지 부탁을 했다.
하나는 김진성 일행을 맡아 줄 것.
또 한가지는 교황청에 연락을 넣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단 오라고는 했다지만,
당장 오겠다고는 했다지만,
글쎄 그 교황이 벌써 도착했단다.
일단 비행기를 타도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인데 벌써 왔다는 것은…….
‘어디서 전이 아티팩트라도 빌려 쓰고 왔나?’
뭐, 어찌 됐든 기다릴 시간이 줄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주상혁이 정지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딨는데요?”
“먼저 대표실로 올려 보냈다.”
그렇단 말이지…….
뭐, 여기서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주상혁이 정지호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1층까지 올라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자니 정지호가 물었다.
“그나저나 그 시련이라는 것 말이다.”
“궁금하세요?”
“음…… 뭐, 그렇지.”
그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교황이다.
무일푼으로 오라 가라 하는 장면을 목격했으니 일흔 먹은 노인이라도 궁금할 수밖에.
“당장은 좀 그렇고 때가 되면 말씀드릴게요.”
주상혁이 정지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대표실이 위치한 층에 내린 주상혁이 정지호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아르돈은 주상혁이 아는 모습보다 거의 10년쯤은 더 젊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건 새하얀 사제복을 입고 소파에 가지런한 자세로 앉아 있는 아르돈뿐 아니라, 그 옆을 지키고 서 있는 세리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방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끈적하게 느껴진다.
아르돈의 경우엔 호기심과 관심에 가까웠고,
세리나의 경우엔 경계였다.
아르돈을 호위해야 하는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 SS급으로 알려진 존재는 위험인물일 테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르돈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르돈이 다짜고짜 질문해 왔다.
“시련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그전에.”
“그전에?”
“다이어리에 적힌 길 말고 다른 길을 만들어 볼 생각은 없나? 교황 양반?”
* * *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아르돈이 잠시 후 적막을 깨고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다이어리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보아하니 시치미를 뗄 생각인 듯한데…….
일단 이 부분부터 쓸데없는 짓이란 걸 짚어 줘야 할 것 같았다.
“정채연 씨에게 다이어리를 받았죠?”
아르돈의 시선이 정지호를 슬쩍 흘긴다.
마지막 다이어리를 혹시 벌써 넘긴 것인지 반응을 살피고자 함인듯했다.
“할아버지는 모르십니다.”
“…….”
실제로 아르돈도 정채연에게 다이어리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자 놀라는 정지호의 얼굴을 봤을 것이다.
오해할 소지가 전혀 없겠지.
아르돈이 말했다.
“그걸 주상혁 씨가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그건 말해 줄 수 없습니다.”
회귀에 대한 것을 공개하라고?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아르돈은 어느 정도 신뢰하긴 하지만,
회귀의 존재를 알고 그가 변심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자, 대답하시죠. 미래를 바꿔 볼 마음이 있습니까?”
일본에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 말고,
클린트를 고용해서 의뢰하지도 말고,
앤디를 보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미래.
다이어리에 적힌 내용을 전부 꿰뚫어 보듯 말하자, 아르돈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말했다.
“다른 길을 원한다는 겁니까?”
“정확히 말하면 그렇지.”
“좋습니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의외로 순순히 협력하는 아르돈을 보고 주상혁이 말했다.
“사람 하나만 봐 줬으면 좋겠어. 특질 계열의 최면 같은 것에 당한 걸 풀어 주면 돼.”
“언제는 시련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더니…….”
“그건 물론 거짓말.”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르돈이 이곳까지 오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건 아르돈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그 사람은 어딨습니까?”
“따라와.”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까지 안내를 시작했다.
“여깁니까?”
“그래.”
아르돈의 능력이 만능이 아님은 주상혁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주상혁이 팔맥을 봉인했을 때 아르돈은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르겠지만 그걸 풀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현시점 주상혁은 이것만큼은 알고 있다.
아르돈이 풀어내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풀어내지 못할 것이다.
주상혁이 아르돈과 함께 독방으로 들어갔다.
“누구지?”
인기척에 긴장한 샤오링의 질문은 깔끔하게 무시.
아르돈이 샤오링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간 아르돈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찬란한 금빛 마나가 샤오링의 몸으로 스며 들어가는 걸 확인한 잠시 후였다.
쩌쩍…… 쩌저적…….
검 형태를 한 마나가 샤오링의 몸에서 빠져나와 잠시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사라졌다.
* * *
아르돈의 도움으로 주상혁은 샤오링을 무사히 포섭할 수 있었다.
샤오링의 암시를 푼 주상혁이 곧바로 찾아간 건 김진성이었다.
유감스럽지만, 김진성과의 대화는 결렬.
능력만 놓고 보면 가장 쓸모 있는 녀석이었지만, 허튼수작을 부리기에 깔끔하게 죽여 버렸다.
‘결과적으로 얻은 건 복제 능력뿐인데…….’
신이 나서 이것저것 시켜 보던 주상혁은 실망만 한가득 얻었다.
퀘스트 좀 편하게 깨려고 보충제를 복사해 보랬더니 수치는 오르지 않고,
전이 아티팩트를 복사하랬더니 마나가 많이 들어서 하나가 한계였고,
여러 약초나 산삼을 구해다가 복사를 시켰더니…….
『인공 오십 년 삼』
「자연의 기운을 온전히 복사하지 못해 볼품없는 산삼이다.」
산삼은 또 이꼴이다.
기운을 복돋아 주지 못하는 산삼은 산삼이 아니다.
약초로는 한 줌 의미도 없다.
“하…….”
주상혁이 찌릿하고 노려봤더니,
샤오링이 움찔한다.
“왜, 왜요.”
“너는 중국인이 돼서 모조품도 제대로 못 만드냐?”
“그게 중국인인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말투가 건방지길래 좀 두들겨 줬더니 존댓말은 꼬박꼬박한다만,
저저 한마디도 안 지려고 입을 여는 건 여전히 불만스러웠다.
“후…… 됐다, 말을 말아야지.”
주상혁이 인벤토리를 켰다.
‘결국 이번에 제대로 얻은 건 이거뿐인가……?’
비밀 상점.
이것저것 탐스러운 녀석을 잔뜩 파는 녀석이자,
닉스 사건을 해결하며 얻은 유일한 보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잼은 또 어디서 구하냐?’
벌써부터 어질어질하다.
잼이란 게 본디 던전을 클리어했을 때 얻는 식이다.
하지만 문제는 당장에 주상혁이 던전을 돌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돌더라도 문제가 있다.
그나마 등급에 맞는 던전을 클리어해야 유의미한 수준의 잼이 지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주상혁의 레벨이 너무 높다.
어쩔 수 없이 레벨을 올리긴 했지만,
현재 주상혁의 레벨이라면 S급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는 이상 충분한 잼을 공급하기란 힘들었다.
‘최초의 SS급 던전은 8년 후에나 등장하는데…….’
막상 얻었어도 그림의 떡인가 싶을 때였다.
주상혁의 눈에 비밀 상점의 판매 버튼이 보였다.
“혹시 이런 것도 팔리나?”
주상혁이 인공 산삼을 인벤토리에 넣어 판매 버튼을 눌렀다.
판매는 구매 가격에서 -300잼을 차감합니다.
오십 년 삼을 정말로 판매하시겠습니까?
-300잼.
주상혁은 이런 방식이 왜 존재하는지 알고 있다.
폴라나를 비롯한 던전 약초들을 외부에서 구해 잼을 불리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원리였다.
실제로 던전 약초 중에는 S급 약초마저 300G을 넘지 않는다.
약초를 역으로 팔아서 잼을 쌓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팔아지네?’
설마……?
주상혁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산삼을 팔았다.
그랬더니…….
비밀 상점에서 파는 오십 년 삼의 가격인 500잼에서 -300잼을 차감한 200잼이 지급됐다.
“버그다…….”
그것도 잼이 복사되는 버그.
샤오링을 바라보는 주상혁의 눈이 따스하게 변했다.
“너도 쓸 만한 구석이 있구나?”
스킬북이 공짜.
약초가 공짜.
던전 의약학이 공짜.
그야말로 다 공짜였다.
“이거 산삼 당장 복사 좀 더 해 봐.”
“얼마나…요?”
“할 수 있는 만큼 잔뜩.”
주상혁의 말에 샤오링이 산삼을 무한정 복사하기 시작했다.
복사가 되면 인벤토리에 넣어 팔고, 팔고, 또 팔고의 반복이었다.
대충 잼이 천만 잼을 돌파하자, 주상혁이 말했다.
“아, 이 정도면 되겠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샤오링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복사기가 숨 넘어가려 하자, 주상혁이 손수 만든 원기회복 탕약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전해 줬다.
덤으로 생활할 카드까지.
“괜히 어디서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지내고 있자?”
탕약을 마시는 샤오링을 보고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저것 실험해 본다고 일주일을 꼬박 결석했는데 내일부터 학교도 다시 나가려면 이쯤에서 돌아가야 했다.
“주팔이, 주칠이”
와왕!
“이 녀석 혹시나 허튼짓하려고 하면 콱 물어 버리고.”
주팔이랑 주칠이가 맡겨 달라는 듯 왕왕 짖는다.
샤오링이 탕약을 마시다 사레들렸는지 컥컥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마침내 일주일간 머물렀던 대호길드의 골방을 벗어났다.
보기만 해도 든든해지는 천만 잼을 보고 주상혁이 흐뭇하게 웃었다.
“뭐부터 해 볼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