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53
Book 11 Chapter 1
백호?
들고 있는 작은 고양이를 바라보던 장민주가 두어 번 눈을 끔벅이더니 말했다.
“그럴 리가요? 백호는 지금 저기 호방에 있는데요?”
장민주의 반응도 어쩌면 당연하다.
주주가 그랬듯,
이번 회차의 백호 역시 존재한다.
조금 전까지 길드 중심에 존재하는 호방에서, 백호를 길들이겠다며 갖은 고생을 다 하고 있었을 장민주다.
이렇게 말한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Lv.3 백호.』
‘하지만…….’
믿기 힘들어도 사실이다.
녀석은 백호가 맞다.
회귀를 겪으며 레벨은 호방에 있는 녀석에 비해 낮아졌을지언정 백호가 확실한 것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백호 맞아요.”
“그럴 리가…….”
역시 말보다는 직접 보여 주는 게 확실하겠네.
“백호, 마나를 조금 가져가도 되니까.”
소량의 마나가 빠져나가더니 백호가 신수화했다.
어지간한 경주마 크기의 호랑이가 나타났다.
백호를 보고 장민주가 움찔 놀랐다.
크기는 많이 작아도 자신이 알던 백호의 모습이었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겠지.
“이래도 믿기 힘들다면 다른 것도 보여 드릴 수…….”
“아뇨, 믿을게요.”
“네?”
“믿는다고요.”
의외로 순순히 납득한다.
백호의 장기인 마나 포라거나,
아니면 꼬리를 변형해서 싸우는 모습까지는 보여 줘야 믿을 줄 알았는데…….
무슨 이유인가 해서 장민주를 확인하니 서로의 눈을 확인하는 백호와 장민주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장민주가 손을 내밀자 손등에 볼을 비비는 백호가 보였다.
장민주가 말했다.
“이 아이, 저랑 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그건 왜요?”
“눈빛이 그런 거 같아서요.”
예리하다.
마치 기억이 존재한다고 해도 믿을 만큼.
“그건 잘 모르겠네요. 저 역시 만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래요?”
그렇게 말하고는 장민주가 다시 백호와 감정을 나눈다.
백호도 장민주라면 마냥 좋은 것 같고…….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 주상혁이 체념했다.
‘솔직히 말해서 주기 싫은 마음도 있었는데…….’
둘의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싹 가셨다.
똑같이 주주라는 소환수가 있는 소환술사의 입장에서 소환수와의 유대에 관해 절감하는 것이다.
옅은 미소를 지은 주상혁이 말했다.
“오늘 온 건 그 아이를 장민주 씨에게 주려고 왔습니다.”
“이 아이를요?”
SS급 소환수에 해당하는 백호는 엄청나게 귀한 소환수다.
일반 동물을 테이밍해 길들이는 소환수랑 다르게 영물답게 영리하고,
또 보통 소환수들보다 수십 배는 뛰어난 전투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걸 대뜸 넘긴다니…….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 돌아왔다.
“이유가 뭐죠? 바라는 게 따로 있나요?”
“목적은 딱히 없습니다.”
“조건 없이 이 아이를 주겠다는 거예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더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면 사기꾼이라나 뭐라나.
“소중히 길러 주세요, 이번엔 싸우지 말고요.”
냐아아아아.
때마침 고양이의 모습으로 백호가 돌아갔다.
백호를 조용히 바라보던 장민주가 말했다.
“그럼 이 아이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호야, 그렇게 불러 달라나 뭐라나.”
* * *
“호야…….”
장민주가 중얼거리자 백호가 와락 안겨들었다.
호방에 있을 그 녀석은 손도 못 대게 하는데…….
와락 품에 안겨 오는 백호를 보자니 감개무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근데 같은 이름이면 어떻게 구분해요?”
“그런 거라면 아마 걱정할 것 없을 겁니다.”
“네?”
주주가 그랬듯 녀석들도 적당히 타협을 볼 테니까.
“알아서 해결될 거란 뜻입니다.”
“믿어도 되는 거죠?”
“네.”
그보다…….
사실 시시껄렁한 이름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지금의 백호는 너무 비리비리하다.
한때나마 애정을 쏟아 기르던 녀석이니만큼 이렇게 놔둘 수는 없겠지.
인벤토리를 켜고 챙겨온 사료를 구석부터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장민주가 말했다.
“이게 뭐예요?”
“사료입니다. 밥을 많이 먹는 아이니까, 넉넉하게 챙겨 왔습니다.”
“넉넉…….”
인벤토리 가득 채운 사료를 내려놓는 데만 한세월이다.
접객실의 절반 이상을 채우고도 남는 사료를 방출하고서 주상혁이 마침내 손을 털었다.
쓰윽 접객실 안을 살펴보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 챙겨 왔나?
“뭐, 어때.”
어차피 약초로 만들어진 것들이라 쉽게 상하지도 않는다.
언젠가는 다 먹겠지.
“그보다 사료 다음엔…….”
장민주를 바라보고 말했다.
밥 달란다고 하루에 너무 많이 주진 말라든지,
산책 좋아하던데 이틀에 한 번 정도는 시켜 주라든지,
의외로 질투를 많이 하니까 신경 써 주라든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설교를 늘어놓고는 말을 마무리했다.
주상혁이 마지막으로 장민주의 품에 안겨 있는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말 잘 들어야 한다? 싸우고 오면 밥 안 줄 거니까.”
냐아아아
꼬리를 동그랗게 만들며 소리 내는 걸 확인하는 것으로 팔찌를 벗었다.
백호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자요.”
“이게 뭔데요?”
“일단 착용해 보세요. 그럼 알게 될 겁니다.”
장민주가 팔찌를 받아들고 망설이다가 이내 팔에 걸쳤다.
백호가 재소환되는 게 보였다.
『Lv.1 백호.』
소유가 바뀌면서 레벨이 다시금 1로 바뀌었다.
애초에 3레벨이었으니까 딱히 아쉬운 부분은 아니었다.
모든 걸 전해 줬는지 꼼꼼히 확인하고는 돌아섰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미련 없이 두어 걸음 옮기는데 장민주가 팔목을 덥석 붙잡는다.
“예? 그냥요?”
“그럼요?”
역으로 물었더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연다.
“그…… 고백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마음이 바뀌었다거나.”
아까부터 장민주가 계속 말하는 ‘고백’으로 말할 것 같으면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맘때쯤 주상혁을 처음 본 장민주는 광주의 각성자 학교로 전학을 온 것도 모자라 어떠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곁을 계속 맴돌았는데,
졸업한 뒤로 1년간은 얼굴조차 비추지 않다가 돌연 올 2월 모습을 드러냈다.
비장한 얼굴로 졸업식에 나타난 장민주는 급기야 주상혁에게 고백했다.
주상혁은 물론, 강혜영 때문에라도 거절했지만,
당시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주상혁 입장에서는 조금 당혹스럽기도 하고,
갑작스럽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설마설마하니 장민주가 고백할 줄은 상상도 못 했었으니까.
여하튼 이 사건으로 인해 강혜영과 장민주의 관계는 최악으로 변했다.
지금은 원수보다 조금 나은 관계였다.
장민주에게 말했다.
“아닌데요? 말했잖아요, 백호 주려고 온 거라고.”
“그럴 리가…… 그럼 백호를 줬으니 너도 뭔가를 줘야겠지 후후후, 같은 전개는…….”
“네, 그런 게 벌어질 일은 없습니다.”
장민주의 귀가 뻘겋게 달아올랐다.
“여하튼 그럼 저 진짜로 가 보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쪼르르 따라오며 장민주가 말했다.
“일단 그건 알았으니까 기다려 봐요. 아버지나 할아버지한테 여쭤보고 작은 답례라도…….”
“장민주 씨.”
휙 돌아서며 물었더니 장민주가 움찔 놀라며 멈춰섰다.
“왜, 왜요?”
“진짜로 답례인 겁니까? 아니면 그 외에 다른 마음이 있는 겁니까?”
“다, 답례인 게 당연하잖아요. 조금 전에 그 말 때문이라면 걱정할 것 없어요.”
조금 전에 있었던 대화로 믿음은 안 가지만 일단은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물었는데 쪽팔려서라도 그런 일을 하진 않겠지.
“그럼 그렇다니까. 딱 차 한 잔만 얻어 마시겠습니다.”
* * *
차를 얻어 마시기로 한 주상혁은 장민주의 방으로 함께 이동했다.
자신의 방까지 안내한 장민주가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요.”
“뭐, 그러죠.”
그렇게 말하고는 장민주가 방을 나선다.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는 장민주와 그 뒤를 짧은 다리로 쫓는 백호의 모습을 끝으로 주상혁이 문을 닫았다.
“뭐, 보아하니 조금 기다려야 할 거 같긴 한데…….”
적당히 앉아서 기다릴 곳을 찾다가 책상 의자에 앉았다.
할 일도 없겠다.
방 안을 쓱 살피던 주상혁이 마지막으로 책상 위를 바라봤다.
노트북 하나와 책들이 나열된 책꽂이.
비교적 평범한 책상에서 눈을 떼려다가 노트를 발견하고 관심이 그리로 향했다.
주상혁이 책꽂이에서 노트를 빼냈다.
“일기인가?”
본래라면 이런 거 훔쳐보면 안 되겠지만…….
몰래 보고 그대로 꽂아 두면 모를 텐데, 뭐.
주상혁이 노트를 펼쳤다.
첫 장을 펴자마자 주상혁의 표정이 딱 굳었다.
유심이 내용을 바라보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음…… 조금 뜬금없다 싶긴 했는데, 그래서인가?”
한 장 한 장 살피며 읽어 보던 주상혁이 적당히 보다가 일기를 덮었다.
제자리에 일기를 넣어 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세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한 이유였다.
선두의 발소리는 장민주일 테고,
남은 두 개는 각각 조부 장혜성과 부친 장민철일 것이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며 세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장혜성이 주상혁을 보더니 점잖게 말했다.
“우리는 구면이지?”
“예.”
일전에 장혜성도 주상혁의 의원에 들른 적이 있다.
그때 장민주와 얼마나 엮으려고 하던지, 난처해 죽을 뻔했던 기억이 있다.
“또 다른 백호를 민주에게 전해 주었다 들었네만.”
“녀석이 그러길 바랐거든요.”
“녀석이 바랐다? 백호가 말인가?”
“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장민철이 말했다.
“그러지 마시고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아버님.”
“그래. 민주 너도 들어와 앉거라.”
마주 보고 앉은 장혜성이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백호 이야기부터 하고 싶지만…….”
장혜성이 주상혁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네.”
장민주가 두 사람을 끌고 온 건 장민주의 독단이 아니다.
주상혁이 기왕 차를 마실 거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없겠느냐 부탁한 것이었다.
“7개월쯤 지나서 이곳 청주에서 S급 던전 브레이크가 있을 겁니다.”
“S급 던전 브레이크?”
주상혁의 표정을 확인하는 장혜성의 표정이 묘하다.
당장 내일도 아니고,
무려 반년 이후의 일이다.
예언가라도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것을 안단 말인가?
또 의아한 점은 이게 끝이 아니다.
무려 S급 던전 브레이크다.
그 말은 S급 던전 크기의 던전을 브레이크가 발생하기 전까지 모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그건 그러고 싶어도 힘든 일이었다.
“묻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래서?”
“그때 발생하는 몬스터를 온전히 제가 처리하고 싶습니다.”
언제 어떻게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는지는 주상혁이 익히 알고 있지만,
문제는 일일이 침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주주의 힘을 빌려서 싹 쓸어 버리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제법 시간이 걸릴 게 분명하고,
심지어 혜성길드에서 수습하기 위해 끼어들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조금 생각하던 장혜성이 말했다.
“그렇게 하지. 그대가 온전히 소탕할 수 있도록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게 된다면 협조하겠네.”
“감사합니다.”
던전 브레이크의 확답은 의외로 쉽게 받을 수 있었다.
침을 놓아준 답례인지,
아니면 백호를 건네준 것에 답례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순순히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
“실례하겠습니다.”
때마침 방 밖에서 목소리가 들리고 길드원이 차를 준비해 들어왔다.
네 잔의 차가 각자의 앞에 놓였다.
길드원이 나가자 장혜성이 말했다.
“그럼, 조금 전의 이야기를 다시 해도 되겠나?”
조금 전의 이야기?
던전 브레이크의 이야기는 아닐 테고 아무래도…….
“백호 이야기 말씀입니까?”
“그래, 녀석을 어디서 얻었는지 듣고 싶네만.”
“던전에서 만났습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믿지 않는데도 별수 없다.
회귀니 뭐니 이야기를 해도 믿지 않을 테니까.
“그럼 아까 녀석이 바랐다는 건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백호가 스스로 민주를 원했다?”
“네. 이것도 믿기 힘드시겠지만.”
장혜성이 다음 질문을 내뱉었다.
“그럼 저 팔찌는 무엇인가? 저 팔찌도……?”
“예, 던전에서 주웠습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 * *
팔찌의 존재.
장혜성은 무엇보다 팔찌의 성능에 주목했다.
백호도 백호지만, 저 팔찌는 진짜다.
소환술사에게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물건인 것이다.
본디 소환술사라는 게 기본적인 각성자로서 능력도 필요하고,
덩달아 테이밍의 숙련도도 몹시 중요한데,
저 팔찌는 그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물건이다.
이곳으로 오기 전 장민주가 백호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을 확인한 장혜성이기에,
무엇보다 얼마전까지 백호의 컨트롤이 불안정하던 장민주를 알기에,
저 팔찌의 가치를 절감한 것이다.
이건 어찌 보면 후세에 가보로 이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아티팩트.
그러나,
백호도 얻고,
팔찌도 얻은 만큼,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야 할 장혜성이었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가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휙 팔찌를 내어 준 존재 주상혁을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주상혁은 이미 장민주의 방에 없었다.
내어 줄 건 내어 주고,
취할 건 취한 뒤에,
미련 없이 방을 떠난 지 오래였다.
‘아쉽다, 아쉬워…….’
장민주와 엮어 보려고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실패.
전에도 그렇고 오늘도 거듭 권해 봤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정혼자가 있단다.
조금 전까지 주상혁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장혜성이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지 입을 열었다.
“민주야.”
“네.”
“저 아이에 대한 마음이 여전한지 묻고 싶구나.”
이곳에 오기 전 장민주를 슬쩍 떠봤다.
그에게 마음이 있다고 장민주는 말했었다.
이미 정혼자가 있다는 말까지 들어 버린 마당이지만,
장민주가 마음만 여전하다면 이대로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손녀 사윗감이었다.
장민주가 고민 없이 말했다.
“있어요.”
어차피 그와 친분이 존재하는 주변 사람으로 남든,
미움을 받고 멀어지든,
그와 편히 마주할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미련 남지 않을 때까지 표현해 보고 싶어요.”
“그래, 내 손녀다운 대답이구나.”
장혜성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가 내다보기에 앞으로 10년 안으로 주상혁의 시대가 온다.
레벨을 올리는 능력은 두말하면 입 아프고,
대화 도중 모습을 드러낸 소환수.
보통 사람이라면 평범한 강아지 정도로나 여겼겠지만, 장혜성은 그 본질을 꿰뚫어 봤다.
백호와 다르지 않은 영물이다.
혜성이 격변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그와 어떻게든 줄을 대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마. 원 없이 시도해 보거라.”
* * *
백호를 돌려주고 집으로 돌아온 주상혁은 다시금 침술을 올리는 데에 집중했다.
좀처럼 레벨이 오르지 않던 고급 침술은 시간이 조금 흘러 이듬해 늦겨울 청주의 S급 던전 브레이크를 처리하면서 3레벨이 되었고,
예정대로 발생한 일본의 던전 브레이크를 겪으면서 기경팔맥 봉인을 얻는 것과 동시에 고급 5레벨.
또 이다음 미국의 세 번째 던전 브레이크와 폴란드의 네 번째 던전 브레이크와 다섯 번째 던전 브레이크까지 처리하면서는 6레벨이 되었다.
진짜 힘든 구간은 여기부터.
저번 회차에서도 주상혁은 여기서 막혀서 포기했던 기억이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 사건 이후에 벤티야스 던전을 시작으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S급 이상 던전을 모조리 클리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2살 가을.
Q. 감춰진 혈 자리 [승급 퀘스트]
「한의학의 태생부터 함께 발전해 온 혈 자리는 수많은 연구를 통해 인체 전체를 아우르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자잘하게 따지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준의 혈 자리. 하지만 단순히 의학적인 관점으로만 발전이 이루어진 건 아니다. 초기에는 모두가 관심이 없는 음지에서 의학적인 관점이 아닌 전투를 목적으로 한 연구가 분명히 이루어졌다. 지금은 그 위험성 때문에 숨어든 혈 자리의 사용법을 체득하라.」
달성 조건: 제한 시간 내에 감춰진 혈 자리의 습득.
실패 조건: 제한 시간 내에 감춰진 혈 자리 습득 실패.
제한 시간: 3년.
달성 보상: 의술 마스터.
“됐다.”
마침내 침술이 고급 10레벨이 되면서 퀘스트가 발생. 그리고…….
Q. 또다시 의원 [메인 퀘스트] [달성 조건: 의술 마스터] [보상: 최후의 비기: 절맥] [실패 페널티: 침술 스킬 레벨 10단계 하락]
확실히 메인 퀘스트의 정보도 바뀌었다.
모든 퀘스트 창을 닫고 기다린다.
앞선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영약도 아무런 힌트 없이 완성한 게 아닌 만큼,
길잡이가 되어 줄 퀘스트가 발생할 게 분명했다.
1분쯤 기다렸을 때였다.
띠링.
기다렸던 퀘스트가 떠올랐다.
Q. 자격 증명 [승급 퀘스트] – page1
「혈 자리가 음지로 감춰진 이유는 그 위험성 때문이다. 감춰진 혈 자리를 얻으려면 당신 역시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 오직 침술로만 1만 명의 환자를 치료해 당신이 참의원임을 증명하자.」
달성 조건: 1만 명의 치료.
치료한 환자: 0/10000
“그렇단 말이지?”
내용만 보면 조제술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미 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주상혁의 입장에서는 준비가 끝나 있는 상황.
지금 당장 퀘스트를 클리어하러 가려고 할 때였다.
띠링.
걸음을 옮기던 주상혁의 눈앞에 닫아 뒀던 퀘스트가 재차 떠올랐다.
Q. 자격 증명 [승급 퀘스트] – page1 (완료)
달성 조건: 1만 명의 치료.
치료한 환자: 10000/10000
“이게…… 왜?”
갑자기 완료된 상태창에 영문을 모르고 있을 때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 조제술 때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퀘스트를 받고 방으로 돌아와서 확인했을 때, 30명쯤 이미 수치가 차 있었던 상황 말이다.
물론 그때 주상혁은 이렇게 해석했다.
보충제를 정지호를 비롯한 외가 쪽 사람들이나,
아니면 이미 가족들과 한혜지 일행에게도 제공한 이후였으니까.
뭐, 마침 타이밍 좋게 보충제를 먹었나 보다 하고 말이다.
“근데 아니었어.”
제한 시간이 없는 만큼,
이미 진료해 둔 사람들 역시 포함된 것뿐이었다.
퀘스트를 완료하시겠습니까? Y/N
“그게 다 헛고생이 아니었다니…….”
감격에 벅차올라 퀘스트를 완료했다.
Q. 혈 자리의 응용 [승급 퀘스트] – page2
「감춰진 혈 자리를 온전히 이용하려면…… 승리하라.」
달성 조건: 혈 자리를 이용해 1,000번의 대련을 승리하라.
승리한 횟수: 0/1000
내용을 간단하게 해석하자면 혈 자리를 이용해 천 번 이상의 대련에 승리하라는데…….
띠링.
Q. 혈자리의 응용. [승급 퀘스트] – page2
승리한 횟수: 1000/1000
운 좋게도 이번에도 퀘스트가 곧바로 완료되었다.
아무래도 몬스터도 대상에 포함이 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았다.
“뭐야, 그럼 벌써 마지막이야?”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그렇게 중얼거렸더니 대망의 마지막 퀘스트가 떠올랐다.
Q. 혈 자리 비급. [승급 퀘스트] – page3
「비급에 적힌 혈 자리를 모두 1만 번씩 사용하라.」
“대충 세어 봐도 마흔 개는 그냥 넘겠는데?”
퀘스트창의 스크롤을 쓱 내리며 이름을 하나씩 확인하던 주상혁이 일단 인벤토리를 켰다.
두 번째 퀘스트를 클리어하면서 지급된 비급을 꺼내기 위함이었다.
비급을 꺼낸 주상혁이 첫 페이지를 펼쳤다.
인체모형처럼 생긴 그림에 핵심 혈 자리가 표시된 첫 페이지를 확인한 주상혁이 입을 열었다.
“이 혈 자리는……?”
주상혁이 익히 알고 있는 혈 자리였다.
하지만 의학적 가치가 있느냐 하면 아니었고,
그렇다고 침을 놓았을 때 막대한 부작용이 생기는 혈 자리도 아니었다.
“뭐지?”
다음 페이지도,
그다음 페이지도,
얼추 대부분의 페이지가 비슷한 부류의 혈 자리를 표시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걸 혈 자리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
솔직히 말해 그렇게 부르기도 애매한 자리들이 대부분이다.
감상이야 어찌 됐든 일단 47페이지로 이루어진 비급을 모조리 파악한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음…… 일단 다 본 것 같으니까 사용하러 가야겠지?”
* * *
주상혁은 곧바로 던전으로 향했다.
이번 주에 분양받은 던전은 이미 다 클리어한 상태였지만,
강태섭이라는 조력자가 있었기에 던전을 구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거 운 좋으면 진맥 쪽도 가능한 거 아닌가?”
진맥도 침술 레벨을 올릴 적에 몬스터를 사냥하며 꾸준히 사용한 만큼,
침술보다 먼저 고급 10레벨이 되어있는 실정이었다.
침술의 비기를 빨리 얻기만 한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만큼 진맥의 비기도 노리기 충분했다.
“혈 자리가 47개라고 해도…….”
모두 1만 번씩만 사용하면 된다.
설령 기경팔맥 때처럼 중복이 안 된다고 해도 47만 마리만 처리하면 클리어된다는 말인 것이다.
주상혁이 급하게 구한 던전에 들어섰다.
C급 던전이라 오우거라는 제법 난이도 있는 몬스터가 등장했지만, 지금의 주상혁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는 녀석들은 아니었다.
“어디 보자…….”
오우거가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달려든다.
주상혁이 평소처럼 일단 침을 던져서 마비부터 시키려다가 멈칫했다.
‘아니지……?’
혈 자리의 수치를 채우기 위해서 온 것도 맞지만,
한편으로는 혈 자리의 효과를 알기 위해 온 것도 있다.
오우거에게 던지려던 침을 검지와 엄지로 옮겨 쥐고는 오우거가 접근하는 걸 지켜봤다.
가까이 접근한 오우거의 몽둥이질을 맞으면서 혈 자리를 확인한 주상혁이 콕 쑤셔 넣었다.
몽둥이를 연달아 후려치던 오우거가 몽둥이가 없는 손을 휘두른다.
오우거 스스로도 당혹스러운지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뭐지?’
곧이어 다른 손으로 몽둥이를 옮겨 들고 다시 휘두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주상혁이 의아함을 느꼈다.
“왜지? 왜 팔을 바꿨지?”
팔이 아파서 바꿔 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고 겉으로 드러나는 다른 특이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혹시 그건가?”
주상혁이 박아 넣었던 침을 다시 뽑았다.
그러자 이번에도 아까와 마찬가지의 상황이 펼쳐졌다.
처음 몽둥이를 들고 있던 손을 휘두르는 녀석이 보인 것이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인 상황을 확인한 주상혁이 오우거의 표정을 확인하며 다른 혈 자리도 하나씩 시험하기 시작했다.
두세 개 더 실험해 보다가 주상혁이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역시 그런 거구나…….”
신경 교란을 일으키는 혈 자리라…….
오른팔을 움직이라고 한 신호를 왼팔로 보낸다거나,
그도 아니면 오른팔을 움직이려는 신호를 왼발로 보낸다.
사용하기에 따라서,
아니, 모든 혈 자리가 일으키는 오신호를 적절히 이용하기만 하면 상당한 전력 차도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주상혁이 다음 혈 자리를 시험하며 중얼거렸다.
“재밌네, 이거.”
* * *
신이 나서 오우거의 혈 자리를 하나씩 짚어보기 시작했다.
혈자리의 반응을 체크하며 보낸 시간이 1시간쯤.
마침내 모든 혈 자리를 어느 정도 체득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대충 실험은 끝난 거 같고…….”
얼마나 찼으려나?
실험이긴 해도 일단은 그 개체만 백여 마리는 거뜬하다.
적어도 조금은 퀘스트의 달성에 가까워졌겠지.
설레는 마음으로 퀘스트창을 켰다.
Q. 혈 자리 비급. [승급 퀘스트] – page3
「비급에 적힌 혈 자리를 모두 1만 번씩 사용하라.」
강유혈 0/0
정두혈 0/0
소순혈 0/0
…….
퀘스트창의 스크롤을 쓱 내리던 주상혁이 한숨 쉬었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제지?”
수치가 그대로다.
실험을 시행한 백여 마리의 수치는 온데간데없고,
47가지 혈 자리 몽땅 0.
차근차근 이유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일단 시스템 오류는 아닐 테고…….”
퀘스트를 한두 번 해 보는 것도 아니고 절대로 퀘스트창의 오류는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일단 오류는 아니라는 전제를 놓고 생각하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능성이 한가지.
“혹시 그건가?”
가능성을 향해 몸을 휙 돌이켰다.
지나온 길바닥에 쓰러져 뒹구는 오우거들이 보였다.
딱히 보스도 아니라서 죽이진 않았지만…….
“죽여 볼까?”
몸 구석구석에 침이 박힌 채로 지금도 꿈틀거리는 오우거는 물 위로 올라온 생선 같았다.
오우거들을 바라보며 침술 키트에 마나를 주입했다.
다수의 침이 손가락에 걸리기 바쁘게 침들이 손끝을 떠났다.
강화 투척을 사용하셨습니다.
강화 투척을 사용하셨습니다.
…….
미간에 큼지막한 구멍들을 만들며 오우거들이 숨을 거두기 시작했다.
주상혁이 그걸 확인하고 시선을 살짝 밀어 올렸다.
퀘스트창을 확인한 주상혁이 스크롤을 내려며 확인하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닌가 보네?”
혹시나 혈 자리를 사용한 녀석들을 죽여야 수치가 오르는 건가 싶어서 해 본 것이었는데…….
조금 전 가설은 아닌 듯했다.
“그럼 다른 이유라는 건데…”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두어 가지쯤 더 떠오르긴 한다.
하나는 녀석들 종족의 문제.
앞선 퀘스트에서는 몬스터들도 포함 대상이었다지만,
이번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하나도 없다.
만약 이번 퀘스트에서는 몬스터가 해당이 안 된다면 지금 같은 상황이 충분히 벌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던전의 난이도지.”
실제로 잼 같은 경우엔 던전의 난이도에 따라서 차등 지급되기도 했었으니,
사실상 가장 확률이 높을 것 같다.
뭐, 어찌 됐든…….
“일단 여기에 더 있을 이유는 없어진 건가?”
오우거로 실험은 대략 끝낸 상황이고,
그렇다고 퀘스트의 수치가 오르는 것도 아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보스는 어디지?”
주상혁이 기감을 확장해 넓은 숲속을 느끼기 시작했다.
개중에 가장 강한 마나를 찾아내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숲 깊숙한 곳을 향해 주상혁이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휙휙 주변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찾았다.”
저 멀리 숲속에서 기지개 켜는 트윈헤드 오우거가 보인다.
주상혁이 속도를 한층 더 끌어 올려 하나의 선이 되어 오우거를 스쳐 지나갔다.
늘어지게 하품하던 오우거의 두 개의 머리가 동시에 데구르르 굴러떨어진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푸우우우.
피 분수와 함께 옆으로 쓰러져 내리는 보스를 확인하고 잠시 뒤,
오우거의 시체 위에 포탈이 생성되었다.
주상혁이 생성되는 포탈을 타고 바깥으로 나왔다.
“이걸로 S급 던전이 구해질 때까지는 좀 한가하겠네.”
B급도, A급도 시험해 볼 생각이긴 한데,
지금 당장은 아니다.
당장에 S급도 수치가 오를지 안 오를지 모를 마당에 A급 이하로 눈을 돌리는 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었다.
S급을 해 보고 수치가 오른다면 그 뒤에 등급을 낮춰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던전과 관련해서 강태섭과의 통화를 나누면서 집으로 돌아가던 주상혁이 멈칫했다.
‘제법 강하네?’
모퉁이 너머에서 마나가 느껴진다.
단언컨대 전주에 있으면서,
동시에 이 정도의 마나를 가진 상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이 마나는 적어도…….’
주상혁이 최근에 느껴 본 마나는 단연코 아니었다.
크기와 분위기 면에도 모두 해당하는 말이었다.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던 주상혁이 급히 통화를 마무리했다.
“협회장님, 제가 잠시 후에 연락 드려도 될까요?”
―급한 일이 생겼나 보군? 그럼 그렇게 해야지.
“감사합니다.”
통화를 끊고는 골목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골목길을 나서 모퉁이를 돌았을 때.
모퉁이 너머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머리 위를 확인한 주상혁이 말했다.
“어쩐지 소식이 없다 했지.”
* * *
주상혁은 이번 회차에 한 가지 의아하게 생각하던 게 있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Lv.233 앤디.
바로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 녀석이었다.
본래라면 22살 여름쯤 만나야 했던 앤디가 어째선지 이번 회차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상혁은 이게 상당히 의아한 점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쉽게 설득됐었던 것 같은 감이 있기도 하다.
바로 아르돈이.
“아르돈이 시켰나?”
“…….”
묻는 질문에 앤디는 침묵으로 답했지만 주상혁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녀석이 자신에게 저렇게 적의를 풍길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녀석이 문제였다.
일본에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 말고,
클린트를 꿰어 내서 암살을 시도하는 것도 하지 말고,
앤디를 이용해 다투게 하지도 말랬더니,
최후의 최후에 약속을 어긴 것이다.
‘하긴 다시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기도 하네.’
아르돈은 나름 정채연을 신뢰하고 믿던 녀석이다.
난데없이 다른 미래를 만들자고 제안을 한들,
흔쾌히 이쪽의 생각대로 계획을 갈아 엎을 만큼 가벼운 녀석은 아니긴 했다.
“시험이라는 건가?”
이건 아르돈으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확인 같은 것일 것이다.
부탁대로 앞선 일들은 행하지 않았지만,
믿고 미래를 맡겨도 되는지 시험하는 것일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앤디의 레벨을 확인했다.
“233이라…….”
꽤 높긴 하다.
미리 포션도 먹었을 테고,
시간이 흐르면서 레벨도 추가로 올랐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레벨.
저번 회차에 기경팔맥을 봉인하고,
엔키라도의 갑옷도 이용하고,
주주의 도움까지 받아서 겨우겨우 이긴 게 자동으로 납득이 될 정도다.
하지만…….
‘그건 저번 회차의 기준이지.’
이번 회차는 전혀 다르다.
지금의 앤디의 레벨 정도는 저번 회차의 울레니아와 자신의 격차만큼이나 크다.
그 증거로 녀석은 마나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압도적인 전력 차를 가지고 있는 자신을 앞에 두고도 격차를 알지 못하고 적의를 풀풀 풍기고 있는 것이다.
피식
‘귀엽네.’
주상혁이 말했다.
“장소를 옮기자 괜찮은 곳을 알고 있다.”
조금 전 클리어하고 나온 C급 오우거 던전.
일단 설득은 해 보겠지만, 여차하면 싸울 것을 대비해서라도 그곳으로 가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러지.”
앤디가 순순히 따라나섰고,
주상혁이 앤디를 안내해 폐던전으로 들어갔다.
“싸우기 전에 말이야.”
“궁금한 것이라도 있나?”
말을 걸지 않았으면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한 눈빛의 앤디를 보고 픽 웃었다.
“아니다. 일단 싸우고 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네.”
까딱까딱.
들어오려면 들어오라는 듯한 손짓을 보냈더니 앤디가 즉각적으로 튀어 들어왔다.
대뜸 휘두르는 앤디의 주먹을 그대로 얼굴로 받고,
이어지는 주먹은 명치로 받았다.
가볍다.
펀치의 위력이나 쓸려 나가는 주변의 모습은 오우거의 몽둥이질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느껴지는 감촉은 조금 전 이곳에서 맞았던 몽둥이보다 조금 더 따끔한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우습네…….’
눈앞의 앤디를 보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과거의 울레니아에게 덤벼들던 스스로가 우스워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이런 느낌인 줄 알았으면 혜영이랑 어디 땅끝에라도 숨어서 좀 더 놀다가 올걸…….
연달아 펀치를 내지르던 앤디가 훌쩍 물러난다.
이쯤 되니 뭔가 이상함을 느낀듯했다.
“자, 그럼 이번엔 이쪽에서.”
앤디의 큼지막해진 눈동자를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다급하게 앤디의 주먹이 내질러진다.
채 주먹이 뻗어지기도 전에 앤디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받아내고,
남은 손은 팔맥 곳곳을 향해 물 흐르듯 움직였다.
『Lv.225(-8) 앤디.』
앤디의 레벨이 빠르게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경험상 팔맥은 항상 좋은 인질이 되어줬다.
클린트보다 마나에 대한 집착이 더 큰 녀석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Lv.211(-22) 앤디.』
앤디의 주먹이 점점 느려진다.
꼭 레벨 때문은 아닌 듯했다.
조금 전엔 그래도 위력을 떠나서 기세는 살벌했는데,
지금은 주먹에서 그마저도 느껴지지 않는다.
『Lv.193(-40) 앤디.』
결국 앤디의 레벨이 200 이하로 내려가고,
이제는 더 이상 녀석에게 가능성 따위 엿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길 수 없는 상대인 걸 알면서도,
또다시 쥐어지려는 주먹이 보인다.
슬슬 귀찮아 지기도 했고,
격차도 확실하게 알려 줄 겸 마나를 일순간에 몸 밖으로 방출했다.
콰과광.
갑작스레 일어난 폭발에 앤디가 주르륵 밀려나는 게 보였다.
바닥에 선명한 두 줄을 그리며 30m 남짓 밀려난 앤디의 눈이 심각하게 흔들린다.
바들바들 떨리던 주먹도 마침내 힘이 빠져 축 늘어지는 게 보였다.
주상혁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순간 움찔한 앤디가 결국엔 체념한 듯 두 눈을 조용히 감았다.
뭐, 현명한 선택이다.
이 상황이 되어서 도망친다고 해 봐야 열 걸음도 채 못가고 잡혔을 테니까.
앤디의 코앞까지 다가간 주상혁이 고민했다.
‘한 방에 목숨을 취해도 상관없지만…….’
역시 그냥 죽이긴 아깝다.
녀석은 울레니아에게라면 무리겠지만 호문클루스들에게는 효과가 있을 만큼 강하다.
제안을 거절한다면 죽이겠지만,
처음부터 마음먹었듯 가능하다면 적당히 타협점을 잡아서 이용하고 싶었다.
가장 먼저 무슨 일을 시킬까 고민하던 주상혁이 씩 웃었다.
“야.”
너, 돈 가진 거 좀 있냐?
* * *
주상혁이 앤디에게 그렇게 물은 이유는 간단하다.
앤디를 당장에 부려 먹기엔 마땅히 쓸 만한 구석이 없고,
그렇다고 그냥 놀리자니 아깝고,
즉 클린트처럼 산삼이나 구해 오라고 시킬 요량이었다.
클린트야 애초에 돈을 쌓아 놓던 녀석이었으니 그냥 구해 오라고 시킬 수 있었지만,
앤디의 주머니 사정은 어떤 상황인지를 전혀 모른다.
수백 년 단위의 산삼을 구하려면 엄청난 금액이 깨질 텐데 그걸 감내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건 갑자기 왜 묻지?”
두 눈을 감고 있던 앤디가 눈을 천천히 떴다.
물음을 던지면서도 내심 생존에 대한 기대를 품는 눈빛이다.
하긴 이렇게 갑자기 물어보면 놓으려던 삶의 끈을 다시 붙잡고 싶겠지.
“내가 산삼이 좀 필요하거든?”
“그래서? 나더러 구해 오라는 건가?”
“그래, 합법적인 방법으로.”
예를 들어 살인을 하고 강탈하지도 말고,
협박으로 뜯어 오지도 말고,
“돈으로 구하거나 직접 캐 오거나 해서 말이야.”
“…….”
싫으면 싫은지 좋으면 좋은지 말을 하면 될 텐데 조용히 얼굴을 응시하던 앤디가 입을 열었다.
“나를 살려 주겠다는 건가?”
“뭐, 내 일에 협조한다고 하면 말이야.”
앤디가 조용히 돌아섰다.
천천히 멀어지는 앤디를 바라보던 주상혁이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말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슨 할 말이 남았나?”
“아르돈 그 녀석에게 괜히 해코지하지 말라고.”
녀석에게 죄가 있다면 정채연이 시킨 일에 충실한 것 정도다.
그리고 죽이더라도…….
‘내가 죽여야지.’
앤디가 사라졌다.
주상혁도 탈출 포탈 쪽으로 향하려다가 멈칫했다.
이러다가 괜히 출구 쪽에서 만나면 서로 어색할 것 같은 이유였다.
“뭐,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구석에서 시간 좀 보내다가 나가기로 했다.
* * *
던전 안에서 10분쯤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온 주상혁은 지금 현시점을 점검하고 있었다.
‘지금이 23살 1월이니까…….’
울레니아가 나타나는 시기까지 고작 2년 남짓 남았다.
울레니아 하면 떠오르는 게 두 가지가 있다.
몇 달 뒤면 생성되는 검은색 게이트.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기에 생성되는 전주의 초대형 던전 포탈.
“뭐, 초대형 포탈의 경우엔 걱정은 없지만.”
실제로 노력의 덕분인지 주상혁은 많이 강해졌다.
초대형 던전에서 등장하는 호문클루스의 경우에는 셋이 한 번에 달려들어도 가볍게 해치울 자신이 있는 상태다.
하지만 그럼에도 검은색 게이트쪽은 다른 이야기다.
벌써부터 몽골과 미국 유럽 등.
클린트를 시켜 검은색 게이트가 발생할 장소의 국가와 게이트에 관련한 계약을 끝내 놓은 건 물론이고, 이번엔 박지훈도 처음부터 호문클루스의 제작을 바탕으로 성장시키고 있으며,
한혜지를 비롯한 송치수 일행도 저번 회차에 비하면 몰라보게 성장한 건 기본이요,
엄준식 역시 이번 회차엔 더욱더 발전된 발명품을 만들기 시작했음에도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다지만,
울레니아의 강함은 변수중의 변수라 할 수 있다.
저번 회차에서 너무나도 허망하게 당해 버려서 녀석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게 신경 쓰인다.
녀석의 한계를 모른다는 게 신경 쓰이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괜히 울레니아 때문에 불안해지자 주상혁이 스테이터스를 켰다.
『Lv.346 주상혁.』
“역시 이것만큼 마음이 편해지는 게 없지.”
346.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저번 회차에는 울레니아와 싸울 때 풀 도핑을 하고 이것과 비슷했는데,
지금은 포션하나 먹지 않고 이정도 레벨이니 당연할 수밖에없다.
주상혁은 요즘 들어 결전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불안해지면 레벨을 보곤한다.
자신이 바른 길을 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만 같은 유일한 이정표였으니까.
‘심지어 아직 2년이나 남았으니까…….’
여기서 레벨도 더 오를 테고,
그 외에도 남은 2년 동안 두 가지의 비기라거나,
최후의 영약이 운 좋게 한두 번만 더 만들어진다면.
그땐 울레니아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저…… 생각하시는 중에 죄송하지만,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혼자서 희망적인 사고를 이어나갈 때였다.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주상혁이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남자가 보였다.
“왜 벌써 엄살이지?”
주상혁이 천장에 매달아 버린 남자는 아르돈.
앤디를 쫓아내고 집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길래 홧김에 사슬로 묶어 매달아 버렸다.
‘1시간쯤 지났나?’
1시간이 짧은 시간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죽이지 않은 걸로 만족해야 할 녀석이 내려 달라느니
이 정도면 되었잖느니 말하는 게 참 웃긴 상황이다.
그래도…….
“뭐, 좋아.”
녀석을 향한 괘씸함도 제법 옅어졌겠다 특별히 이쯤에서 용서해 주기로 했다.
“스스로 내려올 수 있지?”
타앙.
말을 하기 바쁘게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는 착지한다.
새하얀 사제복 자락으로 땀을 닦아내며 아르돈이 어색하게 웃었다.
“앤디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뭐…… 죽이진 않았지. 쓸 만한 녀석이니까.”
“그것참 마음 편해지는 소리군요.”
신념 때문에 사지로 몰아넣은 녀석이 그렇게 말하니 웃기긴 한데…….
이것 역시 딱히 별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앤디 역시 이용당할 만한 녀석이니까 당했다는 걸 잘 아니까.
“받으시죠.”
녀석이 품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내밀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긴 한데,
오랜만에 한번 읽어 볼까?
다이어리를 펼친 주상혁이 다이어리를 읽다가 흠칫 놀랐다.
‘내용이 변했잖아……?’
물론 아는 부분도 어느 정도는 존재하지만,
마나를 잃고 술주정뱅이가 된 앤디에게 던전을 알려 주고 난 이후의 사건이 모조리 변했으니 대부분의 사건이 변한 셈이다.
아르돈이 전해 준 다이어리에는 앤디에게 레오나드와 벤티를 만나게 하라는 지시도,
엄준식을 클린트 경매장으로 보내라는 지시도,
일본에도 우연히 만남을 가지라는 지시도,
클린트에게 의뢰해서 두 사람을 엮으라는 지시도 없었다.
대신에 존재하는 거라고는 어느 날 대호길드에서 연락이 오거든 그것에 응할 것,
주상혁이 부탁하면 응해 줄 것,
그리고 앤디를 보내 시험할 것 등이 적혀 있었다.
이쯤이 되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하긴 회귀를 했다고 해서 딱 태어나는 시점으로만 시간이 되돌아갔다고 보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만약 그것보다 이전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면 주상혁의 행동이 변한만큼 정채연이 본 미래 또한 변하는 것도 특이한 일은 아니기도 하고 말이다.
주상혁이 질린다는 듯 말했다.
“하여간 대단한 분이네…….”
미래를 바꾼다고 말했지만,
이것 역시 정채연의 손바닥 위였다.
어쩐지 허탈한 한편으로 든든한 기분도 든다.
듬직한 후원자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 내용은 없네?’
아르돈에게 주상혁을 찾아가 다이어리를 전해 줄 것을 끝으로 내용은 끝이 났다.
더 이상 내용이 없는 걸 확인하고 주상혁이 다이어리를 덮으려고 할 때였다.
다이어리가 밝게 빛나더니 글씨가 모두 사라지고 그 위에 새로운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PS…….
새롭게 새겨진 메시지를 확인하던 주상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혜영이가?”
* * *
아르돈은 저번 회차와 마찬가지로 옆방에 감금시켰다.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녀석이다.
이번엔 중간에 풀어 주지 않고 마지막까지 가둬 놓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주상혁이 침대에 철퍼덕 앉았다.
그나저나…….
“그게 진짜인가?”
숨을 돌리자마자 조금 전 다이어리로 본 메시지가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상당히 충격적인 정보였기에 머릿속에서 쉽게 떨칠 수가 없다.
그도 그럴게…….
“죽는다고?”
강혜영이 죽는단다.
죽는 장소와 일시도 대략적으로나마 적혀 있다.
장소는 유럽.
시기는 2년 뒤쯤이니까 울레니아가 원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는 정보였다.
물론 장소를 알면 어느 정도 방지할 수는 있다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네.’
정채연의 예언은 그동안 백발백중이었다.
하물며 회귀를 거듭하며 다이어리에 적힌 내용까지 정확하게 바뀌고 있다면,
아무래도 이 사건 역시 필연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죽어요? 누가 죽어요?”
“…….”
깜깜이와 주주를 데리고 산책 나갔던 강혜영이 조금 전 중얼거리는 걸 들었는지 물어온다.
아무 말도 안 했더니 주주와 분신들을 비롯한 깜깜이와 깜냥이까지 몽땅 불러서 밥을 챙겨 주고는 그제야 옆으로 와서 앉는다.
강혜영이 옆구리를 콕 쑤시며 물어 왔다.
“누가 죽어요?”
“몰라.”
“에이, 그러지 말고요, 말해 줘요. 네?”
“모른다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계속되고 있다.
그만큼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으니까.
둘 다 장단점이 있다.
먼저 말하지 않았을 때의 장점이라고 하면,
다이어리의 예언이 안 맞았을 때 발생한다.
한 번 들으면 2년 넘게 신경 쓰고 두려워해야 하는 일이다.
괜히 걱정되고 불안해해야 한다면 구태여 말하지 않는 게 당연히 좋다.
반대로 말했을 때의 장점 역시 확실하다.
말을 해서 상황을 인지시켜 주면 다이어리의 예언에서 벗어날 행동력이 될 테니까.
애초에 유럽에만 강혜영이 가지 않으면 피해 갈 수 있는 예언이라면 말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는 예언인 만큼 더더욱 장점은 빛을 발할 것이다.
한참을 생각하던 주상혁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래, 말하자.’
주상혁의 눈빛이 변하는 걸 보고 강혜영이 말했다.
“뭔데요? 말해 줄 거예요?”
“놀라지 말고 들어?”
“네.”
“2년 뒤쯤에 네가 죽는대.”
“네?!”
아니나 다를까 강혜영이 깜짝 놀랐다.
“안 놀란다며.”
“안 놀랄 내용이어야지 안 놀라죠? 누가 그래요?”
강혜영이 꼬치꼬치 캐묻자, 하는 수없이 다이어리를 보여 줬다.
강혜영도 저번 회차에서는 몇 번 본 적 있는 다이어리였기 때문인지 대번에 알아봤다.
“이건 그거네요? 오빠네 외할아버님이 줬던…….”
“그거랑 조금 다르긴 한데 일단 읽어 봐.”
다이어리에 관한 설명을 들은 강혜영이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음…… 그러면 유럽에만 안 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뭐, 그렇긴 하지…….”
틀린 말은 아니다.
강혜영이 유럽에만 가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근데…….”
“왜요?”
“아무렇지도 않아?”
죽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음에도 강헤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아니라,
티 없이 맑은 미소만 봐도 정말로 아무런 걱정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때 유럽에만 안 가면 된다면서요, 아니에요?”
거듭 말하지만 맞다.
하지만…….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강혜영이 배시시 웃는다.
“그리고 여차하면 오빠가 지켜 줄 거잖아요, 안 그래요?”
누구보다 강한 신뢰를 보내는 강혜영을 보자니,
덩달아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뭐, 그렇긴 하지…….”
* * *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주상혁은 그 뒤로 퀘스트에 다시 몰두했다.
첫 번째 검은색 게이트가 생기기까지 대략 반년쯤.
복잡한 생각은 일단 비워 두고 현재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번에 등록해 둘 걸 그랬나?”
일본 공항에 도착한 주상혁이 아쉬움을 토했다.
이렇게 일본을 다시 찾게 될 줄 알았다면,
저번에 기경팔맥 봉인을 획득하러 왔을 때 아티팩트에 좌표를 지정해 놨으면 좋았을 텐데…….
뭐, 물론 그때엔 일본에 갈 일이 있을 거라고는 알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지만.
여하튼 번거로운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한 심리였다.
공항 게이트를 통과하자 요즘은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빛을 뿜는 기자들의 카메라.
여기저기 몰려 있는 구경꾼.
일본을 대표하는 각성자들까지.
각성자의 등급을 촉진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진 이후로는 세계 어딜 가나 이런 모습이다.
침술 레벨을 올리기 위해 세계 각지를 돌아다녀 봤지만,
단언컨대 규모에 차이만 있을 뿐이지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기 위해 환대하는 건 항상 같았다.
플래시 세례를 뚫고 천천히 다가온 일본의 각성자들이 인사한다.
‘전부 아는 얼굴이네……?’
오로치 길드의 대표 미즈키와,
저번 회차엔 주상혁의 손에 죽었던 사토 히야마 사야로 이어지는 3인방,
그리고 현 일본의 협회장 미츠오를 포함한 다섯이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
활짝 웃는 사람들의 얼굴이,
사근사근한 말투가 어쩐지 어색하다.
‘기억이 있다는 건 이런 면에서 불편하다니까.’
이번 회차를 살아가면서 유일하게 불편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저번 회차엔 필요에 의해서 죽이거나,
관계의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던 녀석들이,
이번 회차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생긋생긋 미소 짓는 걸 볼 때마다 드는 이질감이란…….
경험해 보지 않고선 모를 것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뭐, 딱히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들을 때마다 유창한 한국어다 싶어서 말입니다.”
미츠오가 방긋 웃는다.
“그렇게 평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가시죠 던전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공항을 빠져나가 준비한 리무진에 올랐다.
대형 리무진이라 주상혁까지 6명이나 타도 꽤나 널널하긴 한데…….
‘왜 이렇게 많이 몰려왔지?’
이 점이 조금 의아하긴 하다.
이곳에 오기 전 주상혁은 던전에 혼자 들어갈 것을 강태섭을 통해 일본에 전달했다.
그런데 주상혁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만 해도 미츠오를 포함해 다섯 명이다.
고작 길 안내를 위해 동원된 인원치고는 과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정면의 협회장 미츠오에게 물었다.
“혹시 전달받지 못하셨습니까?”
“어떤 걸 말입니까?”
“던전은 저 혼자서 들어갈 겁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함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네 사람을 쓰윽 바라보자 미츠오가 말했다.
“예, 확실히 전달받았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인원이 좀 많은데 다른 이유라도?”
“사실 여기 있는 다섯 사람이 받을 생각입니다.”
아…….
무슨 말인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에 일본의 S급 던전을 쉽게 넘겨받은 이유는 하나다.
제시한 조건 때문.
던전을 넘겨주는 대가로 주상혁이 만든 영약 5개를 제시했다.
‘나중에 일이 끝나면 따로 받아 갈 줄 알았는데….’
성미도 급하네.
주상혁이 인벤토리를 켜고 손을 쓱 집어넣었다.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는 건 처음 본 맞은편에서 순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이어 그 표정 위에 탐욕이 자리했다.
주상혁이 단약이 담긴 함을 열었다.
다섯 개의 단약이 사이 좋게 담겨 있었다.
『일그러진 균형의 단약』
「다섯 가지 균형이 무너진 단약이다. 조화를 이루지 못한 단약이지만, 단약에 대한 깊은 이해가 느껴진다.」
+마나 400
+힘 200
+민첩 250
…….
주상혁에게는 이제 먹어도 내성 때문에 별 재미도 못 보는 그저 그런 단약.
하지만 초회 복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정도면 던전에서 우연히 등장하는 그 어떤 영약보다도 뛰어날 것이다.
S급 초입 정도의 각성자라면 SS급을 코앞에 둔 각성자로 변모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고,
처음부터 S급 중반쯤에 들어서 있는 각성자라면 SS급으로 바꿔 주고도 남을 법한 그런 영약.
주상혁이 침 흘리는 사냥개에게 고기를 물려 주듯 내밀었다.
“약속한 영약입니다.”
“그럼 감사히…….”
적당히 눈치를 보던 각성자들이 하나씩 단약을 집어 들었다.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단약에서 눈을 못 떼는 사람들을 보고 주상혁이 말했다.
“근데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문제라면?”
“많이 쓸 겁니다.”
역하다 싶을 정도로.
말을 하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들을 짓는다.
농담이 아니고 진짠데…….
어쩐지 몇 초 후의 반응이 벌써부터 눈에 훤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사토였다.
“그럼 나 먼저 먹지. 사실 참는 것도 이제 한계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이쪽을 슬쩍 바라보는데…….
딱히 이미 경고도 했겠다 좋을 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들썩여 답했다.
사토가 입안으로 단약을 쏙 던져 넣었다가,
“쿠훕…….”
도로 거칠게 토해 냈다.
리무진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는 단약은 그새 3분의 1쯤 녹은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사토의 레벨이 3레벨 남짓 오르는 게 보였다.
“켁켁…….”
고통스러운 기침을 연발하던 사토가 눈길을 보낸다.
영약이 확실한지를 묻는 듯한 눈초리였다.
“말했잖습니까. 쓸 거라고.”
그리고…….
“의심하는 것도 좋지만, 마나부터나 확인해 보시죠.”
“…….”
3레벨 남짓이래도 S급 수준에서 그 정도의 수치가 올랐다면 몰라볼 수가 없다.
군말 없이 체내의 마나를 확인하다가 사토가 표정을 구겼다.
마나가 오른 것은 기쁘지만……
자신이 섭취한 단약은 고작 3분의 1.
사토의 시선이 급히 바닥의 단약을 향했다.
조금 더럽긴 해도 주워서라도 먹을 생각을 했겠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입에서 나온 순간부터 녹기 시작하던 단약은 이미 액체가 되어 사라진 이후였기 때문이다.
주상혁이 조용히 말했다.
“약속한 단약은 5개입니다.”
더 줄 마음도,
이유도,
의무도 없다는 의미였다.
* * *
리무진에 타고 2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차가 멈췄고 주상혁이 그곳에서 내렸다.
차 안에서 있었던 영약 복용은 사토를 제외한 모두가 완벽히 섭취하는 걸로 끝났다.
사토가 옆에서 실수하는 걸 지켜본 만큼 지능이 부족한 게 아니고서야 도로 뱉어 낼 리가 없었던 것이다.
“리무진은 이곳에 대기시켜 놓을 테니 천천히 다녀오시면 됩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운전기사를 제외한 다섯은 돌아가려는 모양새였다.
하기야 애초에 길 안내를 위해 동행한 것도 아니었고 오로지 영약을 섭취하려던 목적으로 모인 것이니 당연하다고 봐야 했다.
‘뭐, 사실 이쪽도 혼자가 편하기도 하고.’
주상혁이 미련 없이 다섯을 돌려보냈다.
각자 이야기를 나누며 떠나는 다섯을 보다가 돌아선 주상혁이 던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 일본과 거래한 던전만 세 개.
그 안에 퀘스트의 수치가 오르지 않았던 이유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주상혁이 던전에 들어섰다.
푸른색 초원 위에 두 발로 서 있는 몬스터는 베론.
생김새를 굳이 표현하자면 누런색 털을 가진 예티라고도 하고, 빅풋이라고도 하는 그런 모습과 가장 알맞은 외견이었다.
인간이라고 하긴 애매하고,
그렇다고 곰이라고 하기엔 인간의 모습이 공존하는 몬스터 베론이,
영역에 침범한 주상혁을 발견하고 달려든다.
주상혁이 베론의 공격을 진맥을 사용한 뒤에 몸으로 받았다.
주변의 지면이 지진이 난 것처럼 쩍쩍 갈라지는 괴력이었지만, 주상혁에게 느껴지는 타격은 하나도 없었다.
그보다…….
열심히 눈알만 움직이던 주상혁이 혈 자리를 확인하고 침을 콕 쑤셨다.
이어지던 베론의 공격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이유는 당연히 주상혁이 사용한 혈 자리 덕분이었다.
주상혁이 퀘스트 창을 켜서 확인했다.
“조금 전이 천보혈이었지……?”
스크롤을 올려서 수치를 확인하던 눈이 순간적으로 빛이 났다.
“올랐다.”
역시 난이도 때문이었나?
그런 거라면 의외로 쉽게 클리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일본에서 받은 던전만 해도 2개가 더 있다.
심지어 그중에 하나는 SS급이기까지 하다.
이후에 다른 곳에서 S급 이상의 던전을 클리어하거나,
혹은 A급이나 B급 던전에서도 수치를 올릴 수 있다면 생각 이상으로 쉽게 클리어할 수 있는 것이다.
주상혁이 지금도 열심히 따귀를 때리는 베론을 확인하고 다른 혈도 연달아 짚기 시작했다.
하나씩 혈 자리를 짚을 때마다 손발이 꼬이던 베론이 결국 바닥을 나뒹구는 게 보였다.
“중복 상승은 안 된단 말이지?”
혹시나 해서 개체 하나로 47가지 수치를 동시에 쌓을 수 있나 해서 확인해 봤더니 그건 아닌 것 같다.
“뭐, 애초에 이 정돈 처음부터 기대 안 했으니까.”
주상혁이 바닥에서 파닥이는 베론의 숨통을 끊고는 던전을 누비기 시작했다.
한 마리에 마지막 한 마리까지.
놓치지 않고 던전을 클리어한 주상혁이 4시간쯤 걸려서 던전을 빠져나왔다.
“제법 쌓았네.”
이번 던전에서만 전부 합하면 3,000 이상의 수치를 채운 것 같다.
전 세계적으로 S급 던전의 발생률이 높아진 지금이라면 석 달.
아니 두 달 안에 완료할 수 있을 것 같은 페이스였다.
“다음 장소로요.”
리무진에 올라서 다음 던전으로 향할 것을 지시하자,
6시간쯤 차를 타고 이동해 던전에 도착했다.
SS급 던전이었다.
주상혁이 곧바로 던전으로 들어갔다.
닥치는 대로 몬스터들을 쓸어 버리던 주상혁이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와서 퀘스트창을 켰다.
퀘스트의 내용을 확인하던 주상혁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어……?!”
수치가 오르지 않았다.
기분 탓이 아니다.
기분 탓이라기에는 쓰러트린 숫자가 이미 수천이 넘는다.
“대체 왜지?”
일단 난이도는 아니다.
처음 건 S급.
이번 건 SS급이었으니까.
주상혁이 급하게 생각하다가 한 가지 차이를 떠올렸다.
“혹시……?”
던전에서도 수치가 오르길래 막연히 종족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릴지도 모르겠다.
처음 던전과 이번 던전의 결정적인 차이.
그건 몬스터의 생김새다.
첫 번째 던전은 적어도 이족 보행을 하는 등 인간과 비슷한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번 몬스터는 완전히 다른 골격을 보유하고 있다.
“이거 난이도에 골격까지 고려해야 한다면…….”
생각보다 오래 걸리려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