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56
Book 11 Chapter 4
검은색 게이트가 직격하고 난 이후의 유럽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강대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국가들답지 않게,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 온통 폐허로 가득한 황무지였고 여러 문화재 역시 살아남은 게 하나 없는 수준이었다.
이후 아르돈이 교황다운 행보를 보인 건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고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간 비싼 의뢰비를 받아 가며 축적했던 교단의 금고를 열어 유럽을 구제하는 데 힘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교단의 지원은 주로 사라진 교육 시설과 의료 시설이 제대로 갖추는 데 우선적으로 쓰였다.
그 외에도 터전을 잃고 굶주리는 사람들이라거나,
피난길에 상처나 병을 얻은 사람들도 지원의 손길이 향하는 대상이었다.
아르돈과 교황청의 지원으로 유럽은 비교적 빠르게 이전의 활기를 되찾아갔다.
물론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전과 비교하면 이제야 들판에 풀 한 포기 자라난 것에 불과했지만,
교황청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적어도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고 일어서고 있었다.
“그럼 이틀 정도만 잘 부탁드립니다, 세리나.”
“…….”
세리나는 함께 다녀오고 싶은 듯한 기색이었지만 아르돈은 그런 마음을 알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쪽을 택했다.
“한 명의 손길이라도 절실할 때입니다. 세리나를 의지해도 되겠지요?”
세리나의 입이 머뭇거리다 열렸다.
“교황님의…… 뜻대로 행하겠습니다.”
이제야 좀 숨 트이는 상황이 되었다지만 유럽은 아직도 도움을 바라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아르돈도 손길을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도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러니까 방문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겠지요.‘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임을 알기에,
모두가 모르는 영웅이 또 하나 존재하는 걸 알기에,
아르돈은 사람들을 대표해서 그곳에 들러야만 했다.
세리나를 달래고 아르돈이 오른 비행기의 목적지는 한국이었다.
한국의 국제공항에서 내리자 기자들이 반겼다.
어떻게 알았는지 집요하게 따라붙는 기자들을 떨쳐내느라 고생이란 고생은 잔뜩 한 뒤에 아르돈이 도착한 곳은 지방의 작은 도시에 위치한 묘소였다.
후…….
“사정이 있어서 3년 만에 뵙게 되었습니다.”
주상혁에 의해 감금되어 있던 시기라거나,
눈 붙일 새 없이 병자들을 돌보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햇수로 3년 만의 방문이었다.
아르돈이 준비해 온 꽃다발을 내려놓으려는데 이미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보였다.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누가 다녀갔는지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가족이나,
그도 아니면…….
“주상혁, 그 사람이겠군요.”
아르돈이 꽃다발을 내려놓으려다 말고 도로 챙겼다.
“제 것보다야 이쪽이 더 달갑겠지요?”
어찌 되었든 아르돈은 그녀에게 있어서 그날 우연히 스쳐 갔을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도움으로 크디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본질을 따지자면 그랬다.
아르돈이 회상에 젖은 눈으로 말했다.
“당신의 말이 옳았습니다.”
정채연의 말대로 주상혁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들을 도와 달라는 말을 남겼지만,
사실 별다른 도움 없이도 그는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알고 스스로 위기를 대비하는 비범함을 보이는 그런 인물이었다.
인류를 위기로부터 구해 낸 건 정채연과 주상혁 오로지 두 모자였다.
그날 아이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태어날 아들의 자랑을 하던 그녀를 떠올린 아르돈이, 그답지 않게 사뭇 진지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인류는 당신에게 분명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 * *
네 번째 게이트가 전 유럽을 휩쓸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단체를 말하라면 유럽의 어느 국가도 아닌 클린트라는 조직이라 말할 수 있다.
몬스터 웨이브 당시 가장 큰 인명 피해를 입은 집단이기도 하고,
동시에 유럽을 기반으로 뿌리내리고 활동하던 조직이기에 그 피해가 막심한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좋아.”
지금 클린트라는 조직은 제2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폭삭 주저앉은 유럽일지라도 여느 대부호 못지않은 부를 축적하고 있던 클린트에게는 기회의 땅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빠른 피난으로 사실 유럽에 큰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 말은 달리 말하면 이렇게 해석된다.
자본만 존재한다면 급부상할 사업가나,
유력 정치인이 한둘이 아니라는 말.
클린트는 돈이 궁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장차 재건될 미래의 유럽을 담보로 하나둘 챙기며 큰 재미를 보고 있었다.
“보스,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
“편지?”
시답잖은 일 처리라면 평소엔 베르토프 선에서 항상 끝이 난다.
클린트에게까지 전해지는 내용이라면,
엄청난 난이도의 요인 암살이라거나,
큰돈이 움직이는 사안뿐.
‘한데 편지라?’
베르토프가 가지고 온 것이라면 보통 내용은 아닐 텐데 좀 의아했다.
클린트가 편지를 펼쳐 들었다가 표정을 구겼다.
“이건?”
“네, 아무래도 주상혁이 보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온 듯한 편지는 한글로 쓰여서 좀처럼 읽을 수가 없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래도 겉 포장지나,
편지지의 분위기를 확인하면 그렇게 심각한 내용은 아닌 듯한데…….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녀석은 없나?”
“그럴 줄 알고 지금 막 이곳으로 오라고 일러뒀습니다.”
“역시, 베르토프.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다.”
“감사합니다, 보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날 무렵이었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베르토프가 커다란 문을 열어 주자 빠릿빠릿한 신입 느낌의 조직원이 하나 들어왔다.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이걸 보스께 읽어 드려라.”
베르토프가 넘기는 편지를 받아 들고 조직원이 큰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했다.
클린트의 표정이 몇 자 읽지도 않았는데 탁 굳었다.
베르토프가 그걸 확인하고 조직원의 뒤통수를 탁 후렸다.
“멍청하긴 영어로!”
“죄, 죄송합니다.”
조직원의 입에서 의역된 편지의 내용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용을 끝까지 읽은 조직원이 슬쩍 눈치를 보자 클린트가 베르토프에게 물었다.
“이건?”
“네, 청첩장인 것 같습니다.”
* * *
주상혁은 산골 회관에서 보름 전부터 강혜영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문명의 중심인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외진 곳까지 온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닐 텐데도 강혜영은 군말 없이 따라왔다.
어제에 이어 수기로 정성 들여 청첩장을 작성하던 강혜영이 물었다.
“오빠, 근데 벌써 청첩장 돌리는 건 좀 빠르지 않아요?”
결혼은커녕 아직 양가 어른들을 찾아뵙지도 않았는데 벌써 청첩장부터 돌리는 건 앞서도 너무 앞서 긴 했다.
“전혀, 반년 전엔 뿌려 놔야 그때 가서 아무 말 못 하지. 그때 닥쳐서 보내면 핑계 대고 안 온다?”
“아,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역시 오빠는 똑똑해.”
“그치?”
마땅한 지인이 몇 없는 주상혁을 강혜영은 잘 안다.
그나마 보낼 만한 사람들마저 안 오면 휑한 결혼식이 된다.
축의금이나 그런 걸 떠나서 그건 좀 꺼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또 설상가상으로 강혜영 역시 학창시절에 주상혁을 찾겠다고 전학을 자주 다닌 덕에 마음 깊이 사귄 친구가 전무하다.
청첩장을 굳이 돌릴 만한 친구를 찾는다면 몇 되긴 하겠지만,
그들 역시 올지가 의문.
물론 시대가 좋아져서 돈으로 하객을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지만,
그건 나중에 정 방법이 없을 때 사용하는 패로 여기고 있었다.
강혜영이 손글씨로 예쁘게 다시금 청첩장을 작성하다가 말했다.
“근데 오빠, 배고프지 않아요?”
와왕!
먕먕!
냐아아아!
강혜영의 질문에 거실에서 뿌루루를 보고 있던 주주도, 깜깜이도, 깜냥이도 한마디씩 뱉었다.
“하긴 점심때가 되긴 했네?”
시계를 확인하고 주상혁이 냉장고를 확인했다.
어제 먹었던 밑반찬은 조금 있긴 한데 뭔가 질리는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같이 장이나 볼 겸 점심은 바깥에서 먹고 올까?”
“네.”
펜을 놓고 일어난 강혜영이 바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주상혁은 강혜영이 준비하는 동안에 주주랑 다른 녀석들의 밥을 챙겨 주기 시작했다.
“주주 알지? 사고 치면 안 된다?”
와왕!
밥을 먹다 말고 주주가 답했다.
그래도 맏형답게 씩씩한 대답이었다.
“오빠 다 준비했어요.”
“그래.”
전이 아티팩트를 꺼내고 전개했다.
미리 위치를 찍어 둔 강혜영의 집 근처로 도착한 주상혁이 번화가로 나가서 함께 식사했다.
끼니를 때우고 카페에 들러서 시간을 보내다가 영화를 보러 나섰다.
영화관까지 걸어가는 데 강혜영이 팔짱을 껴 왔다.
“우리 같이 영화 보는 건 12년 만이죠?”
“지금 눈치 주는 거 아니지……?”
“맞는데요? 눈치 주는 거?”
아하하….
덕분에 눈여겨봤던 영화가 아니라 강혜영이 원하는 멜로 영화를 시청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자 저녁 무렵이었다.
“이제 천천히 마트에 가서 장 본 뒤에 돌아가면…….”
대략 밤 10시쯤.
오랜만에 하루를 알차게 보냈구나 싶을 때였다.
강혜영의 걸음이 멈추더니 옷을 잡아끌었다.
“왜?”
“그…… 집에서는요 주주나 애들 때문에 좀처럼 오붓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잖아요…….”
주상혁이 옆에 보이는 호텔을 확인했다.
돈이야 차고 넘치기도 하고,
강혜영의 말이 또 틀린 것도 아니다.
주상혁이 기억하는 기간만 해도 강혜영과 알고 지낸 지 백 년이 훌쩍 넘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뜨거운 밤을 보낸 건 정말 몇 안 된다.
주상혁은 항상 바쁘고 피곤했고,
주주는 잠귀가 밝아도 너무 밝았다.
강혜영과 함께 호텔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주주야, 어쩌면 막내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 * *
마이클은 주상혁의 급부상으로 최강의 자리에서 내려온 지 오래였지만, 요즘도 마이클하면 여전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각성자로 꼽을 정도로 인식이 높다.
그도 그럴 게 말이 좋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각성자이지,
여전히 그의 전략적인 가치는 엄청난 것이다.
그 때문에 마이클은 유럽이 복구에 전념하는 요즘 타국의 SS급 던전을 처리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건 오랜만이로군…….”
한 달 만에 귀국한 마이클이 곧바로 향한 곳은 백악관이었다.
마이클은 개인적으로 길드를 운영하는 사업가라기보다는 국가에 고용당한 에이전트에 가깝다.
고용인인 대통령에게 보고는 필수였다.
대통령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낯익은 얼굴들이 아는 체했다.
올리비아와 로버트.
예전에는 미국에서 엄청난 입지를 자랑하던 SS급 각성자였지만,
전 세계적으로 각성자들이 강해지면서 꽤나 애매해진 상황에 봉착한 둘이었다.
참고로 마이클은 이 둘과 그다지 친하지 않다.
“마이클 잠깐 대화 좀 괜찮을까?”
“중요한 용무가 아니면 거절하고 싶군.”
단호하게 답하고는 걸음을 옮기는데,
두 사람이 양옆으로 잽싸게 따라붙으며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 우리가 산삼을 세 뿌리나 구했는데 말이야.”
“산삼? 그걸 내게 선물하겠다는 건 아닐 테고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알다시피 주상혁이 우리를 묘하게 견제해서 말이지.”
꽤나 유명한 사실이다.
한때는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각성자였던 이들이 주상혁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도태된 것은 말이다.
“그래서?”
“주상혁에게 네가 대신 영약으로 좀 바꿔 줄 수 없나 해서 말이야.”
한 뿌리는 수고비로 준다는 녀석들의 말은 마이클로서도 그다지 손해 보는 제안은 아니었다.
요즘같이 산삼이 귀한 때에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게 산삼이었으니까.
복도 끝에 도착한 마이클이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한번 생각해 보지.”
두 사람의 표정이 밝아지는 걸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선 마이클이 대통령 넬슨의 앞으로 향했다.
넬슨은 이번 회차에서도 엔키라도의 사건 이후 주상혁의 광적인 팬이 되었다.
덕분에 주상혁과의 관계가 몹시 좋은 인물이었다.
마이클에게 던전의 상황과 이후 처리에 대해서 조용히 듣고 있던 넬슨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에 바쁜 일정이 있나?”
“딱히 없습니다.”
“그럼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나?”
넬슨이 작은 편지 한 장을 내려놓았다.
마이클이 말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읽어 보니 청첩장이더군,”
주상혁의.
넬슨의 말을 들은 마이클이 제법 놀랐다.
“표정을 보니 아직 모르는 사실인듯하군.”
“…….”
“나에게도 왔는데 그대에게 가지 않을 리는 없고, 아마 집에 가 보면 도착해 있지 않겠나?”
“그럼 이후의 일정을 물은 것도?”
“그래 이것과 관련 있지,”
자리에서 일어난 넬슨이 집무실 중앙의 소파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의 얼굴도 볼 겸 참석할 생각이네,”
마이클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주상혁과의 관계가 좋아서 나쁠 건 하나도 없다.
주상혁과의 친분이 그의 정치 기반이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축의금을 물건으로 준다는 게 좀 그렇지만 산삼은 어떤가?”
마이클이 넬슨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생각에 잠겼다.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만, 최고의 선택은 아닐 것 같군요. 그건 다른 이들도 많이 준비할 테니까.”
마이클이 주상혁의 소환수인 강아지들을 떠올리고는 말했다.
“그는 강아지 애호가입니다. 소환수와 관련된 물건을 준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값비싸고 소환수가 즐길 거리가 뭐가 있느냔 말이지.”
“음…….”
마이클이 넬슨의 고민에 공감했다.
마이클도 넬슨처럼 청첩장이 온 이상 참석할 생각이다.
넬슨의 고민은 자신의 고민이기도 했다.
침음을 흘리며 한참을 궁리하던 마이클이 백악관을 떠난 건 이날 자정이 넘어서였다.
* * *
박상운은 게이트 당시 활약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큰 인지도를 얻었다.
유럽의 게이트 이후 박상운의 선택지는 두 가지.
청초길드에 가입하거나.
아니면 제3의 길드를 창설하거나.
물론 두 가지의 선택지 중 일반적으로 한 가지를 고른다면 대부분은 후자를 고를 것이다.
명예나 권력의 욕구를 가지는 게 인간의 당연한 심리다.
누군가의 수족이 되느니,
누군가를 부리는 쪽을 선택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상운은 이후에 청초길드에 가입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박상운의 선택을 두고 꽤나 이야기가 많았었다.
청초길드에서 엄청난 제안을 했다거나,
그도 아니면 무슨 커다란 약점을 잡혔을 것이라는 출처 모를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박상운의 선택에는 그런 복잡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이득이 없잖아?’
단순히 주상혁을 떠나서 발생하는 이득이 적은 데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태생적으로 비각성자였던 자신을 박상운은 잘 알고 있다.
박상운은 그런 자신을 지금의 위치까지 성장시킨 주상혁의 능력을 몸소 경험하기까지 한 입장이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옆에 있으면 앞으로 절대 망할 일은 없다는걸.
그런데 반대로 그런 주상혁의 곁을 떠난다는 선택지는 너무 리스크가 큰 결정이었다.
주상혁이 제2의 제3의 박상운을 필요하게 되는 날에 자신을 능가할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는 건 단순한 시간문제.
하루아침에 버려진 오리 알 신세가 될 게 뻔했다.
결국 그런 이유로 박상운은 주상혁이 신뢰하는 수족이 되는 쪽을 선택했다.
국내의 각성자로 따지자면 예전 국내를 휘어잡던 10대 길드의 대표들 이상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지만,
주상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만큼 떠날 이유가 없었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또 그렇다고 청초길드 쪽의 대우가 나쁜 것도 아니고 말이지.”
요즘같이 던전으로 바쁜 와중이지만,
박상운은 그럼에도 비상 전력으로 평가받아서 길드에 대기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SS급 던전에 한하는 수준의 상황이 떨어지지 않는 한 마땅한 업무를 하지도 않으면서 막대한 돈을 받고 있었다.
즉, 박상운은 현재 상황에 몹시 만족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SS급 던전이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큰 욕심만 버리면 누구보다 꿀 빠는 인생을 보내는데 만족한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시지?”
오늘은 무슨 일로 대표실에서 호출이 왔다.
SS급 던전이라도 발생했나 싶어서 대표실로 향했다.
‘막상 대표실 앞에 서니까 긴장되네’
주재호는 주상혁의 아버지다.
주재호가 평가를 박하게 해서 나쁜 말을 주상혁에게 전달하면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기에 긴장이 됐다.
후…….
“조심해야지.”
길게 심호흡을 한차례 마친 뒤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드 대표 주재호의 목소리였다.
방 안으로 들어가서 뻘쭘하게 서 있자 안주인 조수연이 소파 앞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으면 말했다.
“여기 앉으셔요.”
“아, 감사합니다.”
박상운이 조심해서 자리에 앉았다.
미리 맞은편에 앉아 있던 주재호가 말했다.
“일단 커피부터 드시고 이야기합시다.”
뭔가 사약을 먹는 듯한 기분이라 목 넘김이 불편하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고 박상운이 슬쩍 물었다.
“저 근데 오늘 어쩐 일로…….”
“부탁할 일이 한 가지 있어서 불렀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부탁이라면 신뢰를 쌓을 기회.
어려운 게 아니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방송에 좀 출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방송이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랬다.
제법 잘 나가는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
주상혁의 행방이 여전히 묘연하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 대안으로 방송국이 자신을 지목한 듯했다.
주상혁과 동창이라는 배경도 있겠다.
‘꿩 대신 닭으로 사용하기에 이만한 녀석이 없다고 판단이 들었겠지.’
때마침 생각하고 있는데 주재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드려도 되겠지요?”
* * *
박상운은 거절하지 못하고 프로그램에 출연을 택했다.
TV 출현은 처음이었기에 조금 긴장되긴 했지만,
주재호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었다.
세트장에 들어가서 어색하게 앉아 있으니 곧이어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고 진행자의 발랄한 인사가 들려왔다.
“오늘은 우리나라의 간판 각성자 중 한 분이시죠? 박상운 님을 모시고 이야기 나눠 보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상운 님.”
“아, 네. 안녕하세요.”
어색한 미소와 어색한 반응.
진행자가 스튜디오의 경직된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능수능란하게 패널들과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5분쯤 지났을까?
분위기가 다시 무르익자 질문이 박상운에게 돌아왔다.
“요즘 인터넷에서 화제죠?”
“화제라면 어떤……?”
“어머 발뺌하시는 건가요? 박상운 님과 주상혁 님이 중,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말이 이야기요.”
그렇게 말한 진행자가 자연스럽게 눈신호를 보낸다.
아까 대기실에서 신호를 보내면 학창시절 이야기를 좀 들려 달라고 하던데 그 신호인듯했다.
“무슨 재미있는 얘기 없을까요?”
하지만 문제가 있다.
학창 시절의 무슨 대단한 우정을 담은 에피소드라거나,
그도 아니면 주상혁과의 추억을 팔아 달라는 이야기 같은데,
박상운은 단연코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주상혁의 자발적 꼬붕이었으니까.
이런 건 자칫 말했다가 주상혁의 이미지만 망칠 수 있다.
그냥 적절히 받아넘기려는데…….
“뭐, 그럴듯한 건 딱히 없는데요…….”
여성 진행자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처음 오프닝에 이어 또 한 번 분위기를 망치려고 하니 속이 타들어 가는 듯 보였다.
“아, 지금 생각하니까 하나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이대로 방송을 망쳐 버릴 수도 없는 노릇.
하는 수 없이 적절히 피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만 하기로 했다.
“그게 어떤 건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박상운이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아무거나 뱉었다.
“제가 대호길드의 인재 발굴 프로젝트의 첫 대상자잖습니까?”
“아, 예 그렇죠.”
“그때 당시에 저는 각성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상당히 의아했었죠.”
“그런데요?”
“나중에 궁금해서 대표님께 물어보니까, 그게 다 상혁이가 정지호 대표님께 콕 집어 부탁한 것 같더라고요. 혜지도 그렇고. 아마 지훈이도 마찬가지겠죠.”
진행자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포장하기에 따라서 제법 괜찮은 주제였다.
“와, 그러니까, 박상운 님이 지금 같은 거물로 성장할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가요?”
“뭐 그렇지 않을까요?”
진행자의 말에 패널들이 기다렸다는 듯 포장을 하기 시작했다.
과연 입으로 돈 버는 사람들이라, 훅 들어오는 타이밍이 적절했다.
“다음에 주상혁 씨도 여기 출현하면 주식 종목 좀 추천받아야겠어요.”
“주식이 문제예요? 저는 또또 당첨번호 받을 거예요.”
“네, 패널분들 쪽에서도 반응이 뜨거운데요. 그 외에 다른 이야기 좀 더 들려주세요.”
어떤 말을 해도 알아서 잘 받겠거니 자신감을 얻은 박상운이 말했다.
“뭐 그거 외에 다른 거라면 역시 단약에 관한 이야기도 있는데요……”
박상운의 생각은 과연 옳았다.
어떤 말을 뱉어 내든 그대로 이슈로 변했다.
처음엔 박상운의 딱딱한 분위기 때문에 낮았던 시청률도 주상혁과 관련된 얘기를 풀기 시작하고부터는 고공 행진을 기록했다.
방송국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갈아치운 그날 방송은 내내 인터넷을 시끄럽게 했다.
⌙주상혁 안목 무엇? 박상운 저 말이 사실이면 박지훈, 한혜지까지 건졌다는 거잖아?
⌙⌙진짜 미래를 보는 안목이라도 있나?
⌙⌙신내림이라도 받은 걸 수도? 검은색 게이트 때도 그렇고 그냥 아다리가 잘 맞아서 매번 나타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임…….
⌙⌙방방봐하셈, 다 대본이지 또 주빠들 난리 났네.
⌙나도 C급 각성자인데 저 단약 먹고 싶다.
⌙⌙저도요. 단약은 됐으니까 보충제라도 팔아 줬으면 좋겠어요. 그때 이후로 팔 생각을 안 하네…….
⌙나도 SSS급으로 만들어 줘, 주상혁!
⌙역시 답은 청초길드다. 길드원한테는 복지 차원으로 보급된다던데.
댓글은 결국 기승전 청초길드.
청초길드의 하반기 지원자가 한 번 더 미어터지게 할 법한 댓글이 줄을 이을 때였다.
⌙속보요. 주상혁 관련 소식이에요.
⌙⌙뭔데요?
⌙⌙주상혁이 결혼한대요!
주상혁의 결혼 소식이 인터넷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 * *
늦은 오후 한가롭게 TV를 켜 놓고 핸드폰을 만지던 주상혁이 화들짝 놀랐다.
―해외엔 벌써 청첩장이 돌기 시작했다? 진실의 행방은?
―주상혁의 그녀, 과연 누구?
―청첩장 관련 소문 사실 아냐, 청초길드 사실무근.
TV를 보다가 광고로 전환되길래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인터넷이 난리도 아니었다.
강혜영과 함께 보낸 청첩장이 문제가 된듯했다.
⌙에이 청초길드에서 아니라고 하는 거 보면 그냥 지라시 아님?
⌙⌙아니죠. 지금 주상혁이 바깥으로는 잠적 중이라고 되어 있는데 안 보이는 곳에서는 혼담이 오고 갔다? 이슈화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어요.
⌙여하튼, 그래서 누구래요?
⌙⌙장민주 아닐까요? 둘이 함께 있는 것도 제법 목격됐다면서요.
⌙⌙예전에도 열애설 몇 번 나긴 했었죠.
⌙⌙제 친구가 혜성길드 다니는데 들리기로 청초길드 쪽에 혼담 이야기를 많이 던졌다고는 하던데요.
⌙⌙진짜 장민주인가?
댓글을 읽어 가던 주상혁이 식은땀을 흘렸다.
짚이는 게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백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오이 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매긴 했다지만 결단코 오이를 딴 적은 없었다.
“이거 오해하진 않으려나?”
강혜영도 핸드폰은 있다.
지금이야 산책하러 나가면서 안방에 핸드폰을 두고 가기도 했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 사실을 모르겠지만,
여하튼 강혜영이 인터넷을 들여다보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냥 넘어가진 않을 텐데…….’
장민주를 싫어하는 강혜영을 알기에 주상혁이 기사를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딸랑, 딸랑…….
도어 벨이 울리며 주주가 들어왔다.
뒤이어서 다른 녀석들도 하나둘씩 들어오는 게 강혜영이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듯했다.
마지막으로 깜깜이를 품에 안고 들어온 강혜영이 한쪽에 깜깜이를 내려 주고는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주상혁을 확인한 강혜영이 말했다.
“등 뒤에 뭐 감췄어요?”
“뭐, 별거 아니야.”
본인도 모르게 뒤로 휴대폰을 숨겨 버렸다.
“별거 아니긴요. 오빠가 별거 아닌데 그렇게 숨길 사람이에요?”
거실로 올라와 등 뒤를 확인하려고 이쪽저쪽 오가다가,
철벽 방어에 막히더니 게슴츠레 눈을 뜬다.
“뭔데요. 진짜 수상하게.”
“진짜 별거 아냐 그냥 핸드폰이야.”
일단 화면을 닫고 핸드폰을 보여 주자 강혜영이 그제야 흥미를 끄고는 욕실로 향했다.
소환수들을 욕실로 옮겨서 함께 들어가 씻는 걸 확인한 주상혁이 안방으로 향했다.
침대 위의 강혜영의 휴대폰을 슬쩍 주머니에 챙기고는 욕실 옆 벽에 기대앉았다.
“근데 있잖아.”
굳게 닫힌 욕실 문 너머로 강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장민주 씨는 여전히 그렇게 싫나? 나랑 엮이는 것도?”
이번 회차에 자신이 장민주와 자주 붙어 있었던 사실을 강혜영은 알고 있다.
자신에게 찾아오던 날 장민주가 이것저것 도와준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강혜영은 근본적으로 장민주와 이래라저래라 간섭하고 있진 않지만…….
조금 뜸을 들이던 강혜영의 답이 들려왔다.
“솔직히 좋은 기분은 아니에요.”
“그래…… 역시 그렇지?”
하긴 입장을 바꿔 보면 당연한 대답이다.
만약 강혜영이 동문의 이성 친구와 친하게 지낸다면 당장에 주상혁만 해도 점잖게 말만 할 생각은 없다.
아마 그 남자는 은밀히 전기 고문 맛 좀 보여 줬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그나마 강혜영은 관대한 편이다.
그만큼 자신을 믿어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괜히 더 미안해지잖아…….’
문이 살짝 열고는 그 틈 사이로 수건에 싸인 주주와 소환수들을 내민다.
“일단 이 아이들 좀 말려 줘요.”
“어? 어…….”
세 녀석을 안아 들고 드라이기 앞으로 갔다.
휘이이이잉.
따뜻한 바람을 확인하고 녀석들의 털을 말려 주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결혼을 앞둔 커플이 과거사로 다투고 헤어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쯤은 알기에 더욱 걱정됐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달칵.
욕실 문이 열렸다.
옷을 입은 강혜영이 욕실에서 나와 안방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안방에서 부스럭부스럭 무언가를 찾던 강혜영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와서 물었다.
“오빠 제 휴대폰 못 봤어요?”
“그건 왜?”
“그냥 좀 아빠한테 안부 전화 좀 드리려구요. 알아요?”
더 이상 거짓말로 모면하긴 난처한 상황이다.
하는 수 없이 주머니에서 강혜영의 휴대폰을 꺼냈다.
“그게 왜 거기서 나와요?”
강혜영이 휴대폰을 받아 가려고 하자 본능적으로 손에 힘을 줬다.
“오빠, 안 빠지거든요?”
“그 오해하진 마라?”
“오해요? 뭘요?”
“여하튼 나 믿지? 진짜 무조건 오해다?”
강혜영이 오늘따라 별나다는 듯 바라보고는 휴대폰을 가져갔다.
강혜영이 강태섭과 통화를 시작했다.
주상혁은 강혜영이 통화를 하는 동안 밑반찬이랑 함께 저녁을 준비했다.
통화를 끝마친 강혜영이 와서 저녁을 함께 먹고는 뒷정리를 하다가 기억이 났다는 듯 물었다.
“근데 아까 그 오해하지 말라는 게 뭐예요?”
“어?”
“무슨 일인데요?”
어차피 핸드폰을 돌려줬으니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그 인터넷 들어가 보면 그런 게 있거든?”
“인터넷이요?”
강혜영이 정리를 끝내고 와서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주상혁의 그녀는 장민주?
―혜성길드와 오래전부터 혼담이 오갔던 정황.
강혜영이 조용히 기사들이랑 댓글을 읽다가 이쪽을 바라봤다.
“근데 오빠.”
“어?”
“이러면요. 아버님이나 우리 아빠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조금 난처하실 거 같은데?”
지극히 맞는 말이긴 한데,
이게 끝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심할 경우 네가 꼬리 쳤냐면서 장민주를 찾아가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럴 기미는 없었다.
“너는 괜찮고……?”
“뭐, 오빠를 믿기도 하고, 그쪽에서도 도와준 게 있으니까요.”
옆에 있던 장민주가 아니라,
그냥 놔뒀으면 기억도 떠올리지 못한 채 살아갔을 자신을 찾아간 데서 깊은 신뢰를 산 듯했다.
강혜영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보다 조금 늦긴 했어도 지금 말씀드리고 와요, 우리.”
* * *
강혜영의 말마따나 주재호는 지금 난데없는 기사에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난데없는 청첩장 소동.
처음엔 단순히 지라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시시각각 쏟아지는 기사들을 확인한 주재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진짠가?’
기사들은 비교적 구체적인 부분까지 짚고 있었다.
이 정도로 상세하게 소개가 된다면 잠적하고 있던 아들 주상혁이 결혼을 결심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경사이니 기뻐하긴 해야 할 텐데…….”
주재호의 머릿속으로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가장 먼저 밀어닥친 감정은 섭섭함이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결혼을 결정하고 배우자를 소개조차 해 주지 않다니,
주상혁을 아끼는 만큼 섭섭함이 상당히 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섭섭함은 가시고 그 자리에는 어느덧 걱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체 누구지?”
이성에 대한 면역이 얼마 없는 아들이다.
나쁜 의도로 접근한 여자에게 속은 건 아닐지 걱정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민주 그 아이면 좋겠는데…….’
장민주는 그래도 그나마 몇 번 얼굴을 보며 확인한 적이 있다.
똑 부러지고 나름 웃어른께 싹싹한 면도 있었다.
‘상혁이를 챙기려는 모습도 종종 보였지.’
하지만…….
주재호는 알고 있다.
한때 혜성길드에서 혼담 이야기가 와서 주상혁의 의향을 물어봤지만 주상혁이 대차게 거절했던 사실을.
‘그래 놓고 이제 와 마음을 바꿨을 리는 없겠지.’
주재호는 지금에 와서는 그냥 겉모습은 둘째 치더라도 심성 고운 처자이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상혁의 결혼 소식으로 삭막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온다고? 지금 말이니?”
“무슨 전화?”
전화를 받고 온 조수연에게 슬쩍 물었더니 가족들의 관심 어린 시선을 느낀 그녀가 생긋 웃는다.
“결혼할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고 지금 온다네요, 글쎄?”
“지금?!”
안 그래도 짝이 될 아가씨를 확인해 보고 싶던 참이었다.
주재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였다.
전이 아티팩트를 사용했는지 작은방 문이 열리면서 주상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상혁과 함께 나오는 강혜영의 얼굴을 확인한 주재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고운 처자로구만.’
장민주도 장민주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고운 처자였다.
주재호가 고개를 급히 흔들고 잡념을 털어 버렸다.
‘본디 겉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해.’
포장만 좋아 봐야 그런 건 정말이지 한순간이다.
“큼큼…… 식사는?”
“거기서 먹고 왔어요.”
주상혁의 답변에 주재호가 조수연에게 신호를 보냈다.
오늘 저녁 식사는 여기서 그만 치우기로 했다.
가족들이 거실로 나가자, 조수연이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홀로 부엌에 남은 강혜영이 조수연을 거드는 게 보였다.
“밑반찬은 냉장 칸에 넣으면 되나요?”
“어머? 안 그래도 되는데.”
“아니에요, 도와드릴게요. 빨리 치우고 같이 나가요.”
주상혁과 거실로 나온 주재호가 부엌을 확인하고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연기일 수도 있겠지만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뒷정리를 마친 조수연과 강혜영이 나와 각자 자리에 앉았다.
주재호가 말했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될까요?”
“네, 아버님. 그리고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싹싹한 강혜영의 태도에 주재호가 서슴없이 물었다.
“우리 상혁이와 알게 된 지 얼마나 됐지?”
“꽤 오래됐어요.”
길어 봤자 1년 남짓이겠지 싶었지만, 딱히 사족을 더하진 않았다.
“그럼 우리 상혁이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 묻고 싶은데?”
“음…… 장점은 셀 수도 없겠지만, 착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이 좋아요. 또…….”
하는 말마다 옳은 소리에 또 옳은 소리였다.
물론, 반쯤 감긴 눈매가 마음에 든다거나,
자고 일어났을 때 삐친 머리가 귀엽다거나 하는 건 조금 공감할 수 없었지만, 여하튼 그랬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네.”
“네.”
지금까지는 뭐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지만,
솔직히 말해 결혼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기 이전에 가정과 가정의 만남이기도 하다.
집안 내력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님은 뭐하시는지 물어봐도 실례는 아니겠지?”
처자 쪽에 질문한 건데 듣고 있던 주상혁이 픽 웃는다.
주상혁을 슬쩍 확인하는데 곱고 가지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랑은 아니지만, 협회장이세요.”
“협회장?”
“네, 각성자 협회, 협회장이요.”
주재호가 움찔 놀랐다.
강태섭에게 딸이 하나 있는 건 알고 있었는데,
“혹시 처자의 이름이?”
“강혜영이라고 해요, 아버님.”
주재호가 주상혁을 바라봤다.
주상혁이 말했다.
“제가 아무나 만나진 않거든요?”
* * *
결과만 말하자면 주재호의 답은 승낙이었다.
청초길드가 세계 최고의 길드로 우뚝 섰다지만 국내에 기반을 두고 있는 길드인 건 변함없다.
지금 시점에서 주상혁의 배우자 조건으로 권력가 집안은 최고의 선택이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강혜영.
역시 집요하게 파고들어 단점을 찾으려면 찾을 수 있겠지만 상당히 좋은 며느릿감인 건 분명했다.
“자고 가도 된다니까?”
“이미 저쪽에도 말씀드려서 안 돼요.”
주상혁이 전이 아티팩트를 꺼내 전개하자 조수연이 강혜영에게 말했다.
“우리 아들 잘 부탁해요.”
“네, 어머니.”
인사를 주고받은 후 전개를 시작했다.
국내에서의 이동이기 때문인지 준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분쯤 지났을까?
주상혁의 눈앞 풍경이 바뀌었다.
따뜻한 색감이 주로 쓰인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방이었다.
주상혁은 이방을 안다.
다름 아닌 강혜영의 방이었으니까.
“저번에 돈가스 먹으러 올 때 저장해 두길 잘했네.“
한 달 넘게 자리를 비워 뒀음에도 강혜영의 방은 먼지 하나 없이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서재라고 그러셨지?”
“오빠 잘해야 해요.”
“알았어.”
주상혁이 강혜영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복도로 나왔다.
주상혁이 서재로 걷기 시작했다.
강혜영과 함께 들어가면 의지할 곳이 있기야 하겠지만 호출한 건 주상혁뿐이다.
주상혁이 서재로 걷기 시작하는데 방문이 도로 열리더니 강혜영이 따라 나왔다.
“방 안에서 기다리지, 왜?”
“불안해서 안 되겠어요.”
서재의 문 앞까지 도착해서 노크했다.
강태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올게.”
“파이팅.”
강혜영의 응원을 받으며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 안은 늘 그렇듯 잉크 냄새가 그득했고, 언제나처럼 방금 내린 듯한 커피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이리로 앉게.”
“네.”
맞은편에 가서 앉았더니, 강태섭이 한 모금의 커피를 목으로 넘기고 말했다.
“결혼한다는 소식은 들었네.”
“아, 네.”
“그게 우리 혜영일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야.”
뭔가 약간 심기가 불편한 듯한 말투였다.
점잖은 신사 그 자체이던 평소의 강태섭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하긴 조금 경솔하긴 했지…….’
대화가 오가지도 않았는데 청첩장부터 사방에 뿌린다는 건 상당히 무례한 일이다.
주재호야 자신의 아버지니까 별말 없이 넘어갔다지만, 강태섭에게는 상당히 결례되는 일인 건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건 없네. 그런 걸 받자고 하는 말이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혹여라도 핀잔을 줬다가 혜영이가 눈치 보면 더더욱 문제 아니겠는가?”
보아하니 그래도 강태섭은 반대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화는 조금 난 듯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주상혁만 한 사윗감을 구하기 힘들다는 걸 인정한 듯했다.
물론 이마저도 이번 회차에서 깊은 호감을 쌓아 뒀기에 용서되었겠지만 말이다.
강태섭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혜영이는 말이지…….”
회상에 젖어 드는 강태섭을 확인하고 주상혁의 눈이 진지해졌다.
‘오는 건가?’
강태섭의 최고의 기술이라고 하면 바로 딸 자랑.
이 산을 무사히 넘겨야 결혼식이고 뭐고 존재한다.
1시간.
2시간.
3시간.
목이 아플 법도 한데, 강태섭의 말은 커피 한잔을 동무 삼아 계속 이어졌다.
“뭐, 그런 점에서 우리 혜영이를 택했다는 건 여자 보는 눈이 꽤나 있다는…… 자네, 내 말 듣고 있나?”
“아, 예 물론이죠.”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으니 다시 하자면 자네는 우리 혜영이의 매력이 뭐라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여섯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저물었던 해가 다시 뜨고 동이 밝았다.
강태섭이 아쉽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감이지만 오늘 오전에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말이야. 혜영이를 잘 부탁하네, 주 서방.”
“네…….”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는 강태섭을 확인하고 방을 나섰다.
문밖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강혜영이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반겼다.
“끝났어요?”
“어…….”
울레니아보다 더한 맞수였다.
강태섭은.
* * *
양가 부모님에게 인사드리고 나서부터는 큰 문제 없이 결혼 준비가 착착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년.
어느덧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하…… 이거 제법 떨리네.”
누구나 다 그렇듯 처음 하는 식이라 묘하게 긴장이 되면서도 아침부터 밀려드는 손님을 받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도 하객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 좋아해야 하나?’
한때는 조촐한 식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생각이 어리석었다고 느낄 수준이었다.
국내를 주름잡았던 10대 길드의 대표들,
엄준식과 박지훈,
협회의 이름 있는 임원 등등.
아침부터 인사를 나눈 손님만 해도 이 정도니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간다.
심지어 지금 이 시간에도 하객들이 오고 있었다.
손님을 받느라 타는 목을 잠시 축이고 있자니 새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축하해요.”
옆을 쓱 봤더니 장민주가 보였다.
허리까지 오는 머리칼은 어디 가고 지금은 어깨에나 겨우 닿을 법한 길이었다.
“머리 잘랐네요?”
“더워서 잘라 봤어요, 문제 있어요?”
“아뇨, 딱히.”
본판이 괜찮아서 그런지 장발이든 단발이든 어울리는 건 마찬가지다.
딱히 주상혁이 이래라저래라 할 건 아니지만…….
“혹시 나 때문에 자른 건 아니죠?”
이 부분은 조금 신경 쓰인다.
그녀가 자신을 근래까지 좋아했던 걸 아니까 더욱 그랬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질문에 질문으로 답해 왔지만, 사실 그 안에 답이 존재하긴 한다.
긍정.
아직도 장민주는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듯했다.
괜히 장민주를 불러서 옷을 골라 달라고 한다거나,
굳이 보내지 않아도 될 청첩장을 보낸다거나,
정나미가 뚝뚝 떨어질 만큼 모진 행동을 골라서 했음에도 아직까지 마음이 있는 것이다.
장민주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뭐, 물론 그것도 오늘로 끝이지만.”
“네?”
“귀가 먹었어요? 내일부터는 당신 안 좋아할 거라고 말하잖아요.”
“…….”
내가 미쳤다고 유부남을 좋아할 줄 아나…….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말로 중얼거린 장민주가 손을 내밀었다.
“후회할걸요? 그때 장민주랑 사귀어야 했는데, 하고.”
악수를 받으면서 말했다.
“아닐 거 같은데?”
바로 조금 전엔 축하한다더니,
아주 저주를 퍼붓는 게 과연 장민주스러워서 기분이 썩 나쁘진 않다.
이게 그녀만의 축하법이겠지.
* * *
결혼식은 무사히 끝이 났다.
준비했던 것에 비하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끝이 난 게 뭔가 꿈을 꾸는 듯했지만,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꿈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단순히 꿈은 아닐 것이다.
결혼식에 기억이 나는 것이라면 순백의 드레스 차림이 천사 같던 강혜영의 모습 정도.
어느덧 잊혀 가는 과거라는 말일 것이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주상혁 못지않은 집순이 강혜영이 웬일로 외출을 한다.
10월 마지막 날 오늘은 강혜영의 생일이니까.
친구라도 만나러 가겠거니……
강혜영이 문을 열고 떠나자 주상혁이 조용히 입꼬리 올렸다.
“운이 좋네.”
주상혁이 기뻐하는 건 당연히 흔한 유부남들의 그런 이유는 아니다.
결혼하고 첫 생일이다 보니 그럴듯한 걸 준비하려고 했는데,
강혜영이 옆에 붙어 있으면 생일파티를 준비하는 데 몹시 힘이 들기 때문이었다.
“슬슬 준비해 볼까?”
주상혁이 오랜만에 앞치마를 둘렀다.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던 주상혁이 점심 무렵이 되자 중얼거렸다.
“아…… 근데 뭔가 밋밋하긴 하네?”
요리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단순히 깜짝 놀라게 해 주기에는 뭔가가 부족했다.
고민하던 주상혁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된 거 유부남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한 것이었다.
―선물 말인가?
“그래.”
―여자의 경우엔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지.
선배 유부남 클린트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이 같은 답이 들려왔다.
클린트와의 전화를 끊고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반짝이는 거라…….”
단순히 떠올리면 보석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마땅한 게…….
목걸이나 반지 같은 액세서리를 떠올리고 있는데 주주의 짖는 소리가 들렸다.
와왕!
거실로 나가서 확인해 보니 주주는 다름 아닌 벽에 걸린 웨딩 사진을 보고 짖고 있었다.
“그래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네…….”
관건은 숙련도 하나 없이 손재주만으로 덤벼도 되는 일인가 싶었지만, 해 보지 않으면 모를 일.
주상혁이 인벤토리를 켜고 전이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회관을 떠났던 주상혁이 세공용 보석을 잔뜩 들고 돌아왔다.
조각칼을 들고는 주상혁이 보석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이거 생각한 거보다 제법 어렵네.”
마나를 적절하게 부여해 조각칼로 모양을 만든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시간쯤 조각에만 집중했지만, 여전히 형편없는 실패작.
“그래도 이 정도면…….”
점점 원하는 조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엔 조각칼에 싣는 마나의 양이 과해서 댕강 뭉텅이로 썰려 나가는 장면이 자주 연출됐지만, 지금은 오차가 조금 있을 뿐 모양을 하나둘 갖춰 가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이것도 실패네…….”
실패, 실패, 실패.
외눈 안경을 쓰고 땀을 뻘뻘 빼던 주상혁이 바깥을 확인했다.
어느덧 해가 지려고 하는 게 강혜영이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아오…… 살짝 깊었다.”
또 실패작을 만든 주상혁이 표정을 구기고는 다음 보석을 절반쯤 세공했을 때였다.
멀리서 강혜영의 마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상혁이 아슬아슬할 때까지 조각하다가 하는 수 없이 바닥을 정리할 때였다.
“뭐야? 갑자기 왜 달려?”
강혜영의 마나가 빠르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주상혁이 적당히 인벤토리를 열어 욱여넣으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딸랑딸랑.
무슨 기쁜 일이 있는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현관을 박차고 들어온 강혜영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피어났다.
“아…… 그건!”
실패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게 뭐예요?”
“어…… 그러니까…….”
“조금 전에 등 뒤로 숨긴 거 보여 줘 봐요.”
본래라면 놀라게 해 주려고 한 거지만, 어쩔 수 없다.
그중에 가장 잘 만들어진 걸로 꺼내 내밀었다.
강혜영이 조각상을 받아들고 웨딩 사진을 바라보며 대조해 보더니 감동한 눈으로 말했다.
“이거…… 우리 맞죠?”
“그렇지…… 생일 선물로 준비해 보려다가…….”
강혜영이 와락 안겨 들었다.
“고마워요, 생일 선물.”
과연 반짝이는 걸 좋아한다더니 정말이었나 보다.
클린트에게는 나중에 쓸 만한 보충제로 답례를 하기로 하며 주상혁이 강혜영을 부엌으로 안내했다.
“조금만 기다려 봐.”
강혜영을 자리에 앉혀 놓고 주상혁이 냉장고에서 꺼낸 음식을 급히 데우기 시작했다.
오늘 준비한 음식들은 하나같이 강혜영이 좋아하는 것들이다.
소고기를 듬뿍 넣은 미역국도 빠트리지 않았다.
메인으로 갈비찜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자, 아…….”
주상혁이 한입에 넣기 편한 크기를 확인하고 내밀었을 때였다.
강혜영이 그것을 받아먹기 바쁘게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웁…….”
싱크대에서 구역질하던 강혜영이 조금 괜찮아졌는지 사과했다.
“그 미안해요. 맛은 있는데…….”
주상혁이 강혜영의 말을 듣고는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4주라고?”
“네.”
결혼한 지 한 달.
아이 소식이 들려왔다.
* * *
강혜영은 요즘 신혼 생활이 너무너무 즐겁다.
1년 전쯤 태어난 재롱둥이 딸 주소희를 보는 재미도 있었고,
사랑하는 남편과 오순도순 산책하며 요리하며 사는 것도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눈이 많이 오네?”
바깥에는 눈이 펑펑 오고 있었다.
작년에 유독 많이 왔으니,
올해는 좀 뜸하려나 싶었는데 올해는 그보다 더한 것 같았다.
새하얀 바깥을 확인하던 강혜영이 중얼거렸다.
“저녁엔 어묵탕이나 만들어 먹어야지.”
추운 날엔 역시 어묵탕이 최고다.
소희가 태어나면서 본인이 직접 요리하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그 이의 팔을 빌리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거실에서 주주랑 놀고 있는 딸 주소희를 보고 강혜영이 씨익 웃었다.
캠코더를 집어 들고 안방을 나섰다.
“자, 공주님 여기 봐요.”
주주랑 같이 TV를 보며 놀던 주소희가 고개를 휙 틀었다.
소희는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묘하게 얼굴을 피한다는 것이다.
“이런 건 그 이를 딱 닮았다니까?”
주상혁도 카메라를 좋아하진 않는다.
결혼한 지 2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이곳 강원도에서 살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뭐 신혼 동안에는 마음 편하게 지내고 싶다는 그의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장차 소희가 유치원 다닐 나이부터는 도시로 나가야 할 것이다.
―속보입니다. 세계 최초 L등급 던전이 서울에 나타난 지 한 달째. 마침내 L등급 던전이 클리어됐다는 소식입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박예은 리포터와 연결을…….
보고 있던 뿌루루가 갑자기 꺼지고 뉴스 속보가 시작되자, 주소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장아장 걸어 화면을 팡팡 치기 시작했다.
“안 돼요. 엄마가 뿌루루 틀어 줄…… 어머 귀여워.”
TV를 끌어안고 볼을 빵빵하게 불리는 주소희를 보고 강혜영이 신이 나서 캠코더를 들었다.
―저는 현장에 나와 있는 박예연입니다. 현재 시각 오후 3시 20분, 약 20분 전 계측기가 클리어 상태로 변했습니다. 현장은 지금 저 이외에도 취재를 목적으로 달려든 전 세계의 기자들이 몰려 있는데요…… 아, 때마침 던전에서 주상혁 씨가 나옵니다.
주소희가 화면에 대문짝만하게 잡히는 주상혁을 보고 까르르 웃었다.
“아뺘…… 아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