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57
Book 11 if 장민주
방과 후 장민주는 곧바로 옥상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에 만난 후배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이름이 주상혁이었던가?’
어떻게 된 게 이름까지 잘생겼다.
굳이 따라올 필요 없다는 데 따라온 친구 둘이 슬쩍 물었다.
“민주야, 근데 진짜 고백하게?”
“여자 친구가 없다면, 왜?”
여자 친구가 있다면 아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상도덕 정도는 지킬 생각이었다.
“왜 하필 그후배야?”
“맞아, 그 차민우 닮은 선배도 차 놓고서.”
왜냐고?
바보 같은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안 이성에게 호감을 느낄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었으니까.
장민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잘생겨서, 봤잖아 너희도.”
답을 들은 두 사람이 묘한 눈짓을 주고받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이런 말 하는 건 좀 그런데 솔직히 잘생긴 정도는 아니었지 않나?”
거리가 조금 있어서 장담은 못 하지만 멀리서나마 어렴풋이 본 주상혁은 솔직히 잘생긴 아우라가 풍기는 존재가 아니었다.
미남이라면 100m 밖에서도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여중생 레이더를 빗겨 나간 걸 보면 장담할 수 있었다.
“제대로 본 거 확실해?”
“음…… 솔직히 제대로 본건 아니지만…….”
피부가 조금 깨끗하고 묘하게 분위기 있던 거 빼면 별거 없는 인상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면 조금 다른가?’
가까이에서 대화까지 나누고 온 장민주가 저렇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하니 두 사람도 슬슬 자신의 레이더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뭐, 여하튼 잘생겼다니까…… 궁금하다.”
“빨리 안 오려나?”
장민주가 시계를 확인했다.
옥상에 도착한 지 10분쯤 지나 있었다.
“그러게 좀 늦긴하네.”
애초에 주상혁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세 사람 다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게 폭력에 가까운 장민주의 외모를 아니까 당연했다.
설령 여자 친구가 있더라도 나와서 정중히 거절 정도는 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없던 마음도 장민주의 얼굴을 마주하면 생기는 게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주상혁은 나오지 않았다.
30분이 지난 시점까지도 마찬가지였고,
1시간이 지난 시점은 더욱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민주야, 우리 그 기숙사 때문에…….”
“내일 봐…….”
요지부동인 장민주의 옆을 지키던 두 사람도 결국엔 지쳐 떠나갔다.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옥상에서 그렇게 장민주는 혼자가 되었다.
그 뒤로도 장민주는 옥상에서 1시간을 더 기다렸지만,
그런다고 2시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주상혁이 나올 리 없었다.
해가 지고도 30분쯤 더 지나서야 장민주는 쓸쓸히 하굣길에 올랐다.
정문에 대기 중이던 차량에 몸을 실은 장민주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상태였다.
길드로 향하는 도중에도
길드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차일 줄은 몰랐는데…….’
왜 안 나온 거지?
여자 친구가 있나?
그것도 아니면 내가…….
마음에 안 들었나 하는 생각을 하던 장민주가 고개를 털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건 애초에 고민할 가치도 없는 생각이었다.
외모에 호불호는 있겠지만,
절대적인 미의 기준은 분명히 존재한다.
굳이 말하자면 장민주는 무조건 스트라이크존에 꽂히는 얼굴이었다.
울던 유치원생도 빵긋 웃게 만들고,
지나가는 또래 애들이라면 돌아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얼굴!
저녁을 먹기 전에 씻을 때도,
저녁을 먹을 때도,
온통 주상혁이 나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생각을 하던 장민주가 이불에 철퍼덕 누워 있다가 생각에서 깨어났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테이밍 훈련 빼먹어 버렸네…….”
원래 방과 후에 돌아와서 하루도 거르지 않던 훈련이었는데,
고열에 시달려도 어거지로 하던 훈련이었는데,
이건 초등부에 입학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조금 충격이었다.
장민주가 진지한 얼굴로 의지를 다졌다.
“내일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왜 안 나왔는지,
어째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물어봐야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 *
전날 옥상에 나가지 않고 기숙사로 돌아온 주상혁은 동이 틀 때까지 보충제를 만들고 있었다.
주상혁이 옥상에 나가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바쁘다 그냥.
장민주가 할 말이 무엇일지는 궁금한 것과 별개로 어울려 줄 시간이 없었다.
“이런 퀘스트는 진짜 고역이란 말이지…….”
회귀를 하면서 가장 지치는 부분이라면 이쪽이었다.
회차를 거듭하면서 숙련도와 관련된 마스터 퀘스트의 경우엔 차도를 보이지만,
이렇게 일일이 만들어서 수량을 채워야 하거나,
몸을 움직여서 수치를 채워야 하는 경우에는 진짜 요령이 생기지 않으니 답이 없다 할 수 있다.
“후…….”
굳은 몸을 풀어 주고는 주상혁이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한 달 넘게 생활하며 어느덧 익숙해진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할짝.
주주가 뺨을 핥는다.
주상혁이 주주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왜? 배고파?”
도리도리.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손에서 벗어나서 갈비뼈 옆으로 딱 붙는다.
“졸린가 보구나? 하긴…….”
주주는 주상혁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항상 깨어 있다.
일주일 넘게 숙면다운 숙면을 못 하고 쪽잠 수준으로 보냈으니 주주도 그만큼 피로가 쌓였을 것이다.
“그냥 오늘은 학교 쉴까…….”
솔직히 말해 박상운과 한혜지를 이곳에 입학시킨 만큼 책임감을 느끼며 다니고는 있지만,
학교 측에서 편의를 봐주지 않으면 결국에 관둬야 할지도 모른다.
당장에 보충제를 만드는 일이 끝나면 약초를 구하러 다니며 제대로 출석할 수 없는 것.
‘그런 마당에 지금 하루 더 출석 하나 안 하나 달라지진 않겠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걸 느끼고 그대로 졸음에 몸을 맡기려는데 마침 복도에서 익숙한 마나 둘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으아아아아…….”
부지런한 녀석들 같으니…….
띵동.
박상운과 한혜지.
평소라면 현관에 모습을 드러낼 시간인데 안 나와서 데리러 온 듯했다.
‘그래, 출석하고 보건실에서 자자.’
괜히 녀석들에게 나쁜 물을 들이는 것도 끌어들인 입장에서 할 짓은 아니다.
현관문을 열어 주며 주상혁이 말했다.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려 금방 준비할게.”
주주의 밥을 구석에 미리 챙겨 놓고는 씻으러 들어갔다.
가볍게 씻고 나와 복도로 두 녀석과 함께 나섰다.
주상혁은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 쪽을 이용한다.
이 시간대 엘리베이터는 항상 붐빈다.
5층에서 지내는 주상혁이 3층쯤을 내려가다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나?”
1층이 조금 어수선하다.
의문은 주상혁이 1층 현관 앞에 도착하자 저절로 풀렸다.
다름 아닌 장민주가 장판파를 막고 있는 장비처럼 당당하게 서 있다.
‘돌아가는 것도 귀찮은데…….’
지금 다시 건물 뒷문으로 나가서 돌아나가기도 귀찮고,
막상 장민주의 얼굴을 보니 어제 옥상으로 나오라고 한 이유도 다시 궁금해진다.
주상혁이 그냥 현관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장민주가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다가왔다.
“어제 왜 안 나왔니?”
“바빠서요, 그냥.”
뭐 거짓말은 아니다.
진짜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근데 무슨 볼일이라도?”
“할 말이 있어서.”
용무가 궁금해서 말했더니,
답과 동시에 성큼 한 걸음 걸어오는 장민주 탓에 절로 한걸음 물러나 버렸다.
“뭔데요?”
“…….”
기세가 맹렬해서 뒷걸음질 치는데 어느덧 폐문에 등이 닿는다.
문을 쿵 짚으며 장민주가 말했다.
“너, 여자 친구 있어?”
“…….”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기세에 비해 맥빠지는 질문이다.
“그건 왜 묻는데요?”
“있어, 없어?”
강혜영과 한 약속이 있으니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현시점에서 없는 건 사실이니까 그대로 말하려는데 장민주가 냅다 입술을 들이박았다.
“없나 보네, 나랑 사귀자 그럼.”
* * *
어젯밤 주상혁을 다시 한 번 만나 보기로 한 장민주는 난생처음으로 연애 관련 서적을 읽었다.
임자가 없다는 걸 확인하면 고백할 멘트를 찾기 위함이었다.
200만 명이 선택한 베스트셀러.
순정 만화로 연애를 배운 장민주가 물었다.
“대답은?”
차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주상혁은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인상을 쓰더니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 낸다.
“대답…… 그런 걸 꼭 해야 합니까?”
충격.
그야말로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주상혁을 확인한 장민주가 넋이 반쯤 나가 있다가 다급히 돌아섰다.
“싫다고? 왜?”
“말해 주기 싫은데요.”
차였다.
처음 반해서 고백한 남자에게,
그것도 수많은 눈이 있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시선이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차였다는 건 충분히 멘탈이 나갈 법한 일이었다.
충격의 후유증은 제법 길게 갔다.
그날 하루 동안은 물론이었고,
보름쯤 지나서까지 쭉 이어졌다.
흠칫 정신 차린 장민주가 눈앞의 백호를 확인했다.
그냥 루틴대로 이곳까지 오긴 했는데,
멍하니 있다가 그냥 돌아간 지 벌써 보름째다.
오늘도 허탕을 친 장민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걷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러지?”
입맛이 없다.
잠도 잘 안 온다.
공부도 수련도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철퍼덕.
씻고 나와서 침대에 쓰러진 장민주가 조용히 누워 있다가 돌연 베개를 폭행하기 시작했다.
“이게 다 그 만화 때문이야.”
많이 늦었지만, 장민주는 깨달아 버렸다.
순정 만화는 그저 누군가의 망상.
그 대가는 참혹했다.
죄 없는 베개를 살해한 장민주가 오리털이 날리는 방 안을 확인하고는 중얼거렸다.
“사과해야겠지?”
누구나 하나쯤은 만드는 학창 시절의 흑역사 정도로 남겨 둘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장민주가 주상혁을 이대로 잊었을 때 흑역사가 되는 것이다.
장민주는 지금도 흑역사 진행형이었다.
지금도 심장은 가쁘게 뛰고 있다.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한순간에 빠져들게 만들 법한 사람이 또 없을 걸 확신한다.
나중에 후회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하고 싶다.
원 없이 고백하고 또 고백하고 싶다.
한 번 차여 봤으니 두 번 차일 건 두렵지도 않다.
“그래, 나 뜨거운 여자 장민주.”
주상혁에 진심인 편이었다.
* * *
주상혁은 보름 전부터 기분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다.
그날 아침에 있었던 장민주와의 일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 심하게 대했나?”
내심 주상혁도 그날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사실 그냥 입술만 포갠 거 정도는 주상혁에게 있어서 그냥 별 의미 없는 행동이다.
이미 강혜영과 더 깊은 마음도 나눠 본 입장에서 격하게 반응할 게 전혀 없었다.
그런데 강혜영과의 약속 때문인지 철없는 15살 소녀에게 너무 심하게 대한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저번 회차의 장민주라면 고백한 다음에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던 게 일상이었는데,
벌써 보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 것만 봐도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싫어도 한 번은 꼭 만나야 하는 사이인데…….”
백호를 주고받으며 만나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싫든 좋든 장민주도 나중에 검은색 게이트를 진압하는 인원 중 하나로 발전하는 만큼 기왕이면 완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이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사과하긴 좀 그런데…….”
애초에 모든 잘못은 장민주가 초래했다.
괜히 저번 회차까지는 기미도 보이지 않던 돌발 행동을 갑작스럽게 하니까 이쪽에서도 반사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등굣길에 오르던 주상혁이 1층 현관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날처럼 현관 앞이 어수선했다.
『Lv.45 장민주.』
주상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럼 그렇지.
“신경 쓰이게 하고 있어.”
주상혁이 현관을 통해 나서자 장민주가 다가왔다.
무슨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장민주가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편지?”
“기다릴게.”
저번처럼 기세등등한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춘기 소녀 같은 반응이다.
‘컨셉을 바꿨나?’
수줍게 편지를 넘기고 후다닥 모습을 감추는 장민주를 보고 주상혁이 주변을 살폈다.
저번에 이어 비슷한 장면이 또다시 연출되자 주변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제법 들렸다.
“뭐야? 그 소문 진짜야?”
“부럽다 젠장!”
“대체 이유가 뭐지?”
그러게 주상혁이야말로 이유가 궁금하다.
이번 회차의 장민주는 여느 때보다도 일찍 불이 붙었으니까.
‘근데 그나저나…….’
주상혁이 손에 들린 편지를 확인했다.
“어차피 편지 줄 거면 조용한 데서 주면 좀 덧나나?”
괜한 중얼거림도 잠시,
주상혁이 현관에서 기다리던 두 사람과 등굣길에 오르면서 편지를 뜯어 확인했다.
내용을 쭉 읽어 본 결과 점심시간에 교사 뒤편으로 나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뭐, 잘됐네.’
먼저 사과를 한다거나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적당히 달래서 보충제를 물려 주면 얼버무릴 수 있는 분위기였다.
“뭐라고 적혀 있슴까?”
“왜? 관심 있냐?”
“그야 뭐 신기해서…….”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붉힌다.
새삼 장민주가 대단하다 느낀다.
오가며 몇 번 마주친 것뿐인데 박상운이라는 추종자를 그새 만들었다.
“그냥 뭐 보자네.”
“사귀게요?”
박상운의 목소리가 아니고 반대편에서 걷고 있던 한혜지의 목소리다.
“아니, 연애는 딱히 관심이 없어서.”
주상혁은 점심이 되자 교사 뒤편으로 향했다.
물론 박상운과 한혜지는 떼어 놓고 갔다.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오라고.
넓은 학교 건물들을 지나쳐 외곽으로 걸을수록 인적이 드물어져 간다.
으슥한 길을 걷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혹시…… 이거 결투장 아니야?’
감히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은 걸 용서할 수 없다며 달려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생각하다 보니 교사 뒤편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축축한 이끼 냄새도 좀 나고,
그늘도 잔뜩 낀 게 일진들이 담배 피우기 딱 좋은 그런 장소였다.
“왔어?”
장민주는 먼저 와 있었다.
장민주에게 성큼성큼 걸어가서 말했다.
“용무가 뭔데요.”
“…….”
불러낸 이유를 물어봤는데 좀처럼 열리지 않던 장민주의 입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먹이 콰득 쥐어지는 게 보였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결투장이었다니…….
‘오는 거냐?’
혹여나 폭력을 사용하면 버릇이 잘못 들지 않도록 제대로 혼내 주려고 벼르고 있을 때였다.
장민주의 입이 열렸다.
“그…… 저번엔 미안해. 나는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거든?”
“사과하려고 부른 거라고요?”
“그런데? 그…… 미움받긴 싫어서…….”
살짝 주눅이 들어서 올려다보는 게,
요물도 이런 요물이 없다.
딱히 분위기를 살펴도 다른 의도는 없는 것 같고 주상혁이 말했다.
“뭐, 앞으론 그러지 맙시다. 그냥 넘어가는 건 이번뿐이니까.”
주상혁이 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 온 보충제를 꺼냈다.
“받아요.”
“이게 뭔데?”
“선물이요, 식후에 한 알씩 먹어요.”
“선물?”
보충제의 모습을 보면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는데 선물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냉큼 받는다.
장민주가 활짝 웃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 * *
그날 이후로 장민주는 매일같이 찾아왔다.
본래라면 강혜영이 거들어 줬을 보충제 만드는 일을 옆에서 도와줬다.
주상혁이야 작업 속도가 올라가니 달가운 일이었지만…….
“근데 이렇게 자주 와도 됩니까?”
“왜?”
“소문이 좀 안 좋게 돌던데?”
초창기에 요란스럽게 고백하고 차인 일이라거나,
공개적으로 편지를 전한 일이라거나,
그 후로도 주상혁의 기숙사 숙소를 대놓고 드나드는 모습 때문에 솔직히 말해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고 있다.
뭐 혜성길드라는 배경 때문에라도 그저 뒤에서 떠드는 수준이라고는 해도 긍정적인 일은 절대 아닌 것이다.
장민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 그거? 걱정하지 마, 고까운 시선은 어릴 때부터 제법 익숙하거든.”
“뭐, 면역이 있다니 다행이고요.”
주상혁이 다 만든 보충제를 박상운에게 넘겼다.
박상운이 박스를 테이프로 포장하고는 말했다.
“다 됐어요.”
“그래?”
예전엔 딱 1만 개만 만들어서 2,000개 남짓이 비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주상혁은 그 이후부터는 13,000개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한 번 더 수치를 채우기 위해 대량으로 만들어야 하는 걸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장민주가 시계를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주상혁도 따라 시계를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주상혁이나 한혜지, 박상운과는 다르게 오후에도 수업이 있는 장민주다.
장민주가 기숙사를 나서는 걸 확인하고 뒷정리를 하던 주상혁이 쇼핑백 하나를 발견했다.
“갈 때 잊지 말고 챙겨 가라니까…….”
장민주 몫의 보충제였는데 바삐 나가면서 깜박한 듯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또 찾아올 거 그냥 구석으로 치워 놓으려다가 고민 끝에 집어 들었다.
한혜지가 물었다.
“어디 가시게요?”
“이거 좀 전해 주려고.”
현관을 나서 장민주의 반으로 향했다.
장민주의 반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마법 계열 반이니까 2반일 것이다.
건물에 들어서서 2학년 교실이 있는 3층에 올라가니 딱 장민주가 문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장민주를 불러 세우려다가 주상혁이 묘한 분위기를 읽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장민주의 지척까지 가니 듣기 거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장민주는 또 없냐?”
“뭐, 그렇지 잘생긴 후배님 만나러 갔다는 거 아니겠냐.”
“솔직히 졸 어이없지 않냐? 은우 선배 차고 고른 게 그런 거니까?”
“은우 선배만 불쌍하지, 뭐.”
“그냥,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지금 장민주 따라 한 거? 개 똑같네, 한 번 더 해 봐.”
소문이 그리 좋지 않게 돌고 있었던 건 주상혁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근데 문제는 함께 뒷말하고 있는 무리에 친구랍시고 저번에 만난 적 있던 두 사람도 있다는 거였다.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주저하던 장민주가 돌아섰다가 주상혁과 딱 마주쳤다.
우연히 들어 버린 장민주의 치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어색하게 웃었다.
“이거 놓고 갔길래.”
* * *
장민주는 그다음 날부터 자연스레 주상혁을 찾아가지 않았다.
믿었던 두 사람의 뒷면을 봐 버려서 교실은 가시방석처럼 불편하기만 했지만,
이런 좌불안석의 공간보다 지금 주상혁과 마주하고 있는 게 더 불편할 것 같은 이유였다.
그날 친구의 배신보다 더 비참했던 건 주상혁에게 자신의 바닥을 보여 버렸단 사실이었다.
일전에 주상혁에게 가장 친한 친구들이라며 소개했던 게 부끄럽고,
소문 같은 건 상관없다고 잘난 척한 주제에 문 앞에서 주저하던 자신의 모습은 더욱 치욕스러웠다.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잘난 모습만 보여 주던 자신이 거짓임이 드러났다.
더 이상 주상혁을 이전처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생긴 거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
그의 옆에서 귀찮게 하는 것도 민폐는 아닐지.
냉수로 세수를 하고 교실의 문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날 이후로 생긴 버릇 같은 것이었다.
“어디 갔다 왔어?”
“아, 그냥 세수 좀.”
“화장실 갈 거면 나랑 같이 가지.”
자리에 앉아서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는데 우연히 주상혁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각성자의 레벨을 올리는 보충제란다.”
“그걸 믿음? 백 퍼센트 거짓말이지.”
“인터넷도 지금 난리더라 그거 때문에.”
주상혁의 보충제에 대해서는 먹어 본 장민주가 가장 잘 안다.
분위기상 언제나 그렇듯 조금 맞장구쳐 줘야 할 타이밍이겠지만, 장민주가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소리 냈다.
“그거 진짜야.”
싸늘한 적막이 흐른 후에 무리 속에서 들려오는 어색한 웃음소리.
막상 말하면 정색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애초에 그런 용기도 없던 애들이었나 보다.
‘난 도대체 뭐에 주눅 들어 있던 거지?’
갑자기 자신이 우스워졌다.
책상을 박차고 일어난 장민주가 말했다.
“나 조퇴한다고 말 좀.”
“어……? 어…….”
교실을 벗어난 장민주가 닫힌 문 너머로 들리는 쑥덕이는 소리에 중얼거렸다.
“그냥 학교 다니지 말까…….”
* * *
주상혁은 솔직히 말해서 그런 기분을 모른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혀 본 적이 없다.
전생에서도 그랬고,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회귀라는 이점이 존재했기에,
또 운이 좋았기에,
신뢰를 저버릴 법한 사람은 사전에 거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장민주는 아니다.
원래부터 마음을 틀 상대가 얼마 없었던 장민주에게 저번 경험은 뼈아팠을 것이다.
“근데 이건 갑자기 왜 만들어요?”
“쓸데가 있어서.”
주상혁은 그날 이후로 보충제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추가로 쓸 곳이 생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근데 민주 선배는……?”
“가 봤는데 며칠째 안 나오는 거 같더라고.”
“그래요?”
좀처럼 얼굴을 비추지 않길래 슬쩍 확인하고 왔더니 아예 등교 자체를 안 하는 듯했다.
주상혁은 그 일에 나름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주상혁이 광주에서 학교에 다녔거나,
이전 회차 때처럼 애초에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면,
장민주는 적어도 친구들과 멀어지는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이유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장민주가 자신에게 감정을 품기 시작하면서 교우 관계에 악영향을 끼쳤다.
생판 모르던 사람이 이런 사건을 겪는다고 해도 웃어넘기지 못할 텐데,
친분이 있던 장민주였기에 더욱더 나서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다 만들긴 했네.”
보름간 2,000여 개의 보충제를 추가로 만들었다.
주상혁이 옆에서 군소리 없이 도와준 한혜지와 박상운을 격려했다.
“고생했어. 내가 나중에 맛있는 거 사 줄게.”
“약속하셨슴다?”
“그래.”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혜지가 물었다.
“어디 가시게요?”
주상혁이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만날 사람이 좀 있어서.”
* * *
장민주는 그날 이후 등교를 하지 않고 있었다.
한 번 학교를 나가지 않기 시작하자 좀처럼 발을 떼기 힘들어지더니,
어느덧 열흘이 넘게 흘러 있었다.
“민주야 무슨 일 있니?”
“아뇨, 그냥 몸이 좀 아파서요.”
결석이 길어지자 이제는 부모님도 와서 걱정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나가기 싫긴 해도…….
“슬슬 나가야 하나……?”
침대에 드러누워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바깥을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바라볼 때였다.
복도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나 친구가 찾아왔는데?”
“몸이 안 좋아서 못 만날 거 같으니까 돌아가 달라고 해.”
“누나가 직접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부탁 좀 하자.”
“…….”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점차 멀어진다.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장민주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친구는 무슨.”
장민주도 알고 있다.
진짜 믿을 만한 친구 하나 사귀는 게 좀 힘든 일이라는 거.
하지만 그럼에도 그 둘은 친구라고 믿었는데,
사실 우정이라기보다는 그 외의 다른 걸로 묶인 관계였단 걸 이번에 알아 버렸다.
“뭐…… 원래 그런 거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한참 이어 갈 때였다.
다시금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민구겠지.’
동생 장민구라고 생각하고 물었다.
“돌아갔어?”
“아니, 안 돌아갔습니다.”
장민주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동생 장민구의 목소리가 아니다.
“친구란 게 너였어?”
“그럼 아닙니까?”
“우리가 왜 친구야 내가 한 살 많잖아.”
“장민주 씨도 나이 먹으면 알게 되겠지만 사실 사회에서 한 살 차이는 친구 먹기 딱 좋은 그런 겁니다.”
이건 또 무슨 애늙은이 같은 소리인가 싶을 때였다.
문밖에서 주상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됩니까?”
“안 돼!”
혹여나 문을 열고 들어올까 다급히 답했다.
얼굴을 마주할 용기는 여전히 없는 상태.
물론 보고 싶은 마음도 존재하지만, 그보다 지금은 만나기 싫은 기분이 더 큰 상태였다.
“예, 알겠습니다.”
휴…….
의외로 순순히 물러난다고 생각할 무렵,
주상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0초 뒤에 들어갈 테니까 그럼 그전까지 준비해 두세요.”
“뭐?”
난데없는 엄포에 어버버하다가 장민주가 가장 먼저 눈길이 간 것은 입고 있는 잠옷이었다.
새하얀 고양이가 바둑판 모양으로 그려진 잠옷.
멋진 선배임을 자처하는 입장에서 절대 보여서는 안 될 모습이었다.
8…….
7…….
6…….
들으라는 듯 문 앞에서 세고 있는 숫자도 어느덧 절반가량 지난 시점에서 장민주가 고뇌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
잠옷 위에 다른 옷이라도 걸쳐야 하나?
‘아니, 그보다 애초에 왜 들여보낸 거야?’
괜한 장민구도 탓해 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3…….
2…….
1…….
어느덧 숫자가 끝을 향해 달려가자 장민주가 하는 수 없이 침대 위로 향해 이불을 둘러썼다.
“자, 그럼 열겠습니다?”
* * *
“돌아가 달라고?”
“네, 그렇게 말해 달래요.”
혜성길드 정문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주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네?”
장민구를 내버려 두고는 주상혁이 혜성길드의 담벼락 위로 단번에 뛰어올랐다.
장민구가 깜짝 놀랐다.
“막아야 해요.”
입구를 지키던 길드원들도 10m도 더 되는 담벼락 위에 서 있는 주상혁을 발견했는지 금세 어수선했다.
길드원들이 빠르게 몰려들거나 말거나 길드 내부를 훑던 주상혁이 돌연 달리기 시작했다.
길드원들에게는 일순간에 사라졌다고 느껴질 만큼 빠른 속도였다.
“대충 이쯤이었던 거 같은데.”
혜성 길드가 워낙에 넓다 보니까 장민주의 방은 몇 번 와 봤음에도 의외로 찾기 힘들었다.
주상혁이 기억을 되짚어 보며 복도 모퉁이를 돌아섰다가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찾았다.”
혜성길드의 넓은 영지 중에 내원 구석에 존재하는 방 하나.
장민주의 방이었다.
주상혁이 장민주의 방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눈 뒤 10초라는 시간을 줬다.
주상혁도 짧은 시간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뻔히 담을 넘는 모습을 보여 준 상황에서 길게 시간을 줄 여유는 없었다.
쾅.
시간이 다 되자 문을 거칠게 젖혔다.
장민주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제멋대로 들어온 것에 대해서 손에 잡히는 베개라도 대충 집어 던질 줄 알았는데 장민주는 비교적 얌전했다.
주상혁이 방 중앙에 양반다리로 앉았다.
장민주가 물어왔다.
“여긴 왜 왔어.”
“걱정돼서 왔습니다. 며칠째 결석이라길래.”
지금 상황이 뭐가 그리 좋다고 장민주의 입꼬리가 약간 올라갔던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은 아니겠지.’
장민주가 슬쩍 물었다.
“걱정했다고?”
“친구니까 당연한 겁니다.”
“그래, 친군 거 나도 알거든?”
발끈하며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쭈그러드는 장민주를 보고 주상혁이 말했다.
“여하튼 본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학교 안 나오는 거 그날 그거 때문이죠?”
딱히 들려오는 말은 없었지만,
때로는 침묵이 긍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딱 지금이 그러한 상황이었다.
“왜 그쪽이 도망쳐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도망은 무슨……! 나갈 거야! 안 그래도 내일부터 나가려고 했어!”
눈을 들여다보니 거짓말은 아닌가?
“뭐, 그렇다니 다행이긴 한데. 부모님한테는 이거 말했습니까?”
“그건…….”
하긴 당연하게도 말 안 했나 보다.
말했으면 지금 같은 상황이 지속될 리도 없겠지.
장민주가 불안했는지 말을 꺼냈다.
“행여나 말하지 마.”
“내가 그런 아쉬운 짓을 왜 합니까?”
장민주는 주상혁이 혜성길드에 이 사실을 알리는 걸 바란다고 생각하고 말하나 본데,
그건 주상혁을 몰라도 너무 모르기에 하는 소리다.
사실 혜성길드에 이 사실을 알리면 아주 간단하게 일이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처벌 수위는 아무래도 전학 정도로 결정될 것이다.
따돌림이 강도가 높았던 것도 아니고,
실제로 장민주가 없던 곳에서 뒷담 조금 본 게 다다.
다만 그 뒷담을 들킨 게 문제다.
뒷담을 하던 친구가 믿고 신뢰했던 두 친구라는 건 더 큰 문제로 작용했지만, 현실만 놓고 보면 그렇다.
‘그런 거 가지고 문제 삼아 봐야 뻔하지.’
주상혁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는다.
적어도 장민주가 느꼈을 고립감을 그에게도 똑같이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아쉽다고?”
“네.”
“아쉽다니, 대체 어느 부분이…….”
장민주의 질문은 듣지도 않고 주상혁이 일어났다.
“저는 유감스럽게도 이만 가 봐야겠네요.”
“간다고? 벌써?”
“내일부터 학교 나온다니 더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주변이 소란스러운 게 이제 곧 사람들이 몰려들 것 같은 이유가 컸다.
“그럼 내일 봐요.”
주상혁이 옅게 웃더니 일순간에 사라졌다.
장민주가 깜짝 놀라 주상혁을 찾다가 잠시 후 표정을 되찾았다.
“하긴 그런 보충제를 만드는 녀석이니까 놀랄 것도 없나?”
* * *
이튿날 장민주는 약속대로 등교했다.
학교로 향하는 차 안에서 장민주는 하나의 뉴스를 봤다.
“보충제 오늘부터 파는구나…?”
인터넷의 댓글을 보는데 과연 난리도 아니다.
⌙와 이게 허가가 나네
⌙⌙ㄹㅇㅋㅋ 돈 좀 많이 받아드셨나 봐?
⌙⌙허위, 과장 광고로 신고하고 오세요. 링크 드림.
⌙he is chinese
⌙김치찌개 만드는 법…….
“나중엔 없어서 못 살 거면서 후회할 행동들 하네.”
보충제의 효과를 알고 있는 장민주의 눈에는 그저 우스운 상황일 뿐.
괜히 봐서 기분만 나쁠 기사는 그쯤 내려놓고 학교 건물로 들어갔다.
3층으로 올라가서 반으로 들어가기 전에 걸음을 멈추려다가 말고 장민주가 교실로 들어섰다.
“민주야.”
“무슨 일이었어?”
“몸은 괜찮아진 거야?”
평소와 다름없는 친근한 태도들.
아무래도 결석의 이유를 모르는 입장에선 지극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뭐, 간단해서 좋네.’
그냥 적당히 웃어 주며 인사를 받았다.
모르는 척 조용히 있으면 평소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반 분위기였기에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드디어 점심시간이네.”
오전 수업이 끝나자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난 장민주가 오랜만에 1학년 기숙사로 향했다.
어제의 일로 더 이상 반에서 불편하게 앉아 있을 필요가 없어졌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
‘의외였지…….’
한때 친구라 생각했던 애들은 아프다고 눌러앉아도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는데,
걱정된다며 찾아온 게 주상혁이라 아직까지도 참 웃기다.
숙소 현관에 도착해서 심호흡을 깊게 한 번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며 보고 싶던 얼굴이 보였다.
평소와 같은 주상혁의 얼굴이 보였다.
“왔습니까?”
“뭐 하고 있었어?”
“보충제 좀 만들고 있었습니다.”
“보충제?”
주상혁을 따라서 숙소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이었다.
혼자 쓰기엔 넓디넓은 숙소 거실엔 약초와 기구들이 난잡하게 널브러져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때 다 만들었다고 안 했어?”
“그렇긴 한데, 필요한 곳이 추가로 생겼습니다.”
영문모를 미소가 궁금하지만, 일단은 준비해 온 도시락을 내밀었다.
“자, 도시락.”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밥 먹고 다시 하자.”
“네.”
한혜지와 박상운도 주상혁과 함께 일어나서 부엌 쪽으로 이동했다.
5첩 도시락을 풀어 늘어놓고는 식탁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두어 젓가락 정도 먹었을 때였다.
구석에 쌓아둔 보충제가 가득 담긴 상자가 신경 쓰여 물었다.
“근데 또 필요한 곳이 어디야?”
주상혁이 픽 웃었다.
“그냥 뭐…….”
지켜보시면 알 겁니다.
* * *
장민주의 예상대로였다.
보충제는 첫날에 조금 판매율이 지지부진하긴 했지만, 이튿날부터 불티나게 팔리더니 나흘 만에 완판되었다.
불신의 시선으로 부정적인 이야기만 쏟아 내던 학교에서도 일주일 전부터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청초길드에 대해서 안 좋은 이야기만 하던 이들이 지금은 보충제의 가치를 알아보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언제나처럼 차로 등교하던 장민주가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다가 멈칫했다.
“어?”
―청초길드, 보충제를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길드의 큰아들?
그전까지는 주상혁이 청초길드의 큰아들이라는 사실은 장민주만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애초에 비각성자가 아니었으니 화제가 될 일도 없었고,
입학식 날 정지호를 통해 비밀리에 입학했기에 굳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딱 오늘 이 기사가 실리기 전까지.
이제 주상혁에 대한 비밀을 모두가 알게 된 것이다.
“뭔가 아쉽네…….”
주상혁과 공유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비밀이었는데,
그게 까발려졌다는 게 뭔가 아쉬웠다.
장민주가 학교에 도착해서 반에 들어갔다.
벌써 기사를 접했는지 장민주가 등교하길 기다렸던 애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자리로 슬며시 가서 앉는데 서로 눈치만 보기 바쁜 상황에 한 여자아이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 민주야.”
“왜?”
“너 그 주상혁이라는 아이랑 친해?”
질문의 의도를 어림짐작하기에 뭔가 머뭇거리게 된다.
말해도 되나?
‘그래도 그쪽에서 먼저 친구라고 말했으니까…….’
찰나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한데 왜?”
“그럼 민주 너도 알고 있었어?”
“어떤 걸?”
“뭐긴 뭐야, 보충제 말이지.”
평소 뭐든지 열심히 하는 모범생 이미지의 여학생이었는데, 방방 뛸듯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뭐, 일단은.”
“그랬구나…… 그럼 그때 현서랑 애들이 보충제 이야기할 때 그렇게 반응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네?”
최현서.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 중 하나의 이름이었다.
“그야 뭐…… 그렇지.”
답을 들은 여자아이가 설레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그 아이랑 사귀어?”
“그건 아닌데……?”
“그럼 짝사랑?”
뭔가 스스럼없이 물어 오는 게 약간 낯부끄럽게 만드는 그런 게 있는 아이였다.
‘김지수? 이름이 지수구나…….’
새 학기가 시작하고 꽤 지났는데 아직 이름도 모를 아이의 명찰을 확인하고는 답했다.
“일단은.”
“끄으으…… 고백은 언제 할 거야? 또 할 거긴 하지? 포기한 건 아니지?”
“그…… 질문은 하나씩만.”
자기 일도 아닌데 심취해서 질문을 던지더니 이번엔 또 어떤 질문부터 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보충제가 목적이 아닌가?’
뭔가 적당히 말을 던지다가 보충제를 구해 줄 수 없겠냐는 이야기를 자연스레 이어 갈 줄 알았는데,
연애 관련한 이야기만 주야장천 쏟아 내길 5분쯤.
이번엔 지켜보던 다른 애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남자아이도 있었고,
여자아이도 있었다.
개중엔 전에 보충제를 특히 험담하던 애들도 있었다.
“언제까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할 거야.”
“아니, 그래도…….”
김지수를 밀어내고 반 아이들이 묻는다.
“조금 전에 걔랑 친하다고 그랬지? 그 미안한데 보충제 좀 얻을 수 없을까?”
“민주야, 나도 아빠한테 부탁해도 청초길드에서는 추가로 안 판다고 해서…….”
“나도 좀 부탁할게,”
그런 거면 당연하게 안 된다고 말하려니,
때마침 교실 문이 열리면서 급우 하나가 들어와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기사 떴어. 우리 학교 재학생들한테는 주상혁이 따로 보충제 판대.”
급우의 말에 반 아이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집어 들어 기사를 확인했다.
장민주도 정말인가 싶어서 슬쩍 기사를 확인했다.
‘정말이네…….’
―청초길드, 모교 재학생들에게 보충제 한시적으로 판매하겠다.
각종 메인 포털 사이트에 기사가 큼지막하게 떠올라있었다.
뭔가 기사를 확인하자니 또 아쉬움이 잇따랐다.
친한 사람에게만 주는 건지 알았는데,
“아무한테나 다 주는 거야?”
* * *
점심시간이 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전교생이 주상혁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장민주도 도시락을 들고는 행렬에 동참했다.
같이 밥 먹을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기다릴지도 모르는 거니까.”
주상혁을 위해 장민주가 언제나처럼 숙소로 향하는데 기숙사 건물 바깥까지 늘어선 줄이 보였다.
줄 관리는 다름 아닌 강아지들이 하고 있었다.
‘누구의 소환수지?’
모습은 귀엽고 조그마해도 꽤나 영특하고 날렵한 게 보통 테이밍에 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새치기하려고 하거나 소란을 일으키면 가차 없이 쫓아 버리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나 지나가도 돼?”
건물 현관을 지키고 있는 소환수에게 말했더니 왕하고 한차례 짖는다.
‘그러라는 거겠지?’
덕분에 현관을 지나 계단을 통해 줄이 쭉 이어진 5층 숙소까지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현관 앞에 도착하자니 새하얀 강아지가 있었다.
이번에도 소환수는 장민주를 막지 않았다.
“왔습니까?”
언제나처럼 반기는 주상혁을 보고 장민주가 슬쩍 구석의 박스를 확인했다.
“쓸 곳이란 게 여기야?”
“네, 그렇죠.”
이런 거면 굳이 비밀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것 때문에 섭섭하기도 하고,
여하튼 복잡한 기분으로 손님 한 명이 보충제를 구입하고 나가길 기다렸다가 물었다.
“밥 먹을 거야?”
“그래야죠.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주주 밥 먹고 하자.
주상혁의 외침에 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환수가 문을 닫고는 들어왔다.
“이 소환수들 네 거야?”
“보시다시피.”
주상혁이 한층 더 새롭게 보인다.
조부 장혜성왈, 테이밍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사람치고 악인은 없다고 말했었다.
‘그래도 내가 남자 보는 눈은 없진 않나 봐.’
새하얀 강아지들에게 밥을 챙겨 주는 주상혁을 지켜보다가 식탁으로 향했다.
도시락을 깔고 식사를 시작하는데 문뜩 거실 한쪽에 쭉 세워진 보충제 쪽으로 눈이 갔다.
“근데 이런 거면 굳이 비밀이라고 해야 했어?”
“그야 말하면 반대할 게 뻔하니까 비밀로 할 수밖에.”
“내가 반대를 왜…….”
드르르륵.
주상혁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먹게?”
“바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평소보다 식사를 빨리 마쳤다.
주상혁과 두 아이가 다시금 보충제를 팔러 가자 장민주는 홀로 남아 투덜거리면서 빈 통에 저녁에 먹을 수 있도록 옮겨 담기 시작했다.
“기왕이면 사람 말 좀 끝까지 듣고 일어나면 덧나나?”
주상혁은 꼭 이런 식이다.
아무리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입장이라지만 살갑게 대할 거면 쭉 그러든가,
“누구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5분쯤 걸려서 모든 통을 채우고 냉장고에 집어넣은 장민주가 도시락을 챙겨 거실로 나오다가 멈춰섰다.
그도 그럴 게 낯익은 사람이 보인 이유였다.
“안 판다니?”
“말 그대로예요, 선배한테는 안 팔 겁니다.”
최현서.
다름 아닌 최현서였다.
“나 몰라? 전에 봤잖아. 나 민주 친구야.”
“알죠, 민주 선배 험담하시던 분.”
주상혁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분위기가 딱 굳었다.
그저 뒷모습을 보고 있을 뿐인데도 최현서의 얼굴이 절로 예상된다.
이대로 최현서가 물러나나 싶었는데 이내 그 기세를 회복하고는 역으로 따지고 드는 게 보였다.
“그래, 했다 했어, 그래서 뭐? 뒤에서 흉 좀 본 게 죽을죄야?”
“죽을죄는 아니죠, 제가 언제 그런 말 했어요?”
“조금 전에 네가…….”
“근데 보충제를 팔지 않을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는 거죠.”
“……칫, 됐어. 더러워서 안 사고 말지.”
최현서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서 박차고 나가려다가 장민주와 딱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장민주가 이곳에 있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얼굴이 굳어진 최현서가 그대로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더니 숙소를 떠났다.
“혹시 보충제 팔던 게 이거 때문이야?”
“불만이 있으신가 보네요.”
“그야 당연하지. 왜 네 멋대로…….”
솔직히 말해서 지금 상황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최현서에게 실망했던 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뒷담을 한 게 큰 죄도 아니고,
역으로 갚아준다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방식을 원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무엇보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지 자체가 의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복수 때문이면 조금 심한 거 같아.”
“단순히 복수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럼?”
“그냥 알려 주려고 하는 거예요. 경솔한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걸.”
“그게 그거잖아…….”
주상혁 입을 열었다.
“이래서 비밀로 한 거예요. 불만이 있을 줄 알았거든.”
“그럼 그걸 알면서 왜…!”
“불만이 많을 건 알지만 일단은 조금만 더 지켜봐 주세요. 끝까지 본 뒤에도 불만이 있다면 그때는 사과할 테니까.”
* * *
그날 이후로 최현서와 그 일행은 빠르게 학생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가기 시작했다.
주상혁과 장민주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았는데 자연스레 최현서 일행과 학생들이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주상혁이 그들에게 보충제를 팔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더라도,
괜히 그들과 어울려서 책잡힐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주상혁이 재학생 한 명당 보충제를 공급한 것도 벌써 수차례.
고작 한 달 남짓 지났을 뿐인데 이쯤 되자 수준 차이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무엇하나 잘난 게 없던 그들이 선택한 것은 전학이었다.
“전학을 갈 때 무슨 기분이었을까요?”
“글쎄…….”
오늘 마지막으로 최현서가 전학을 갔다.
장민주는 교무실에서 나오는 최현서를 마주쳤었다.
분노나 증오 같은 게 느껴지는 얼굴은 아니었다.
뭔가 복잡한 그런 눈빛이었다.
장민주에게 질문을 던졌던 주상혁이 전에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는 듯 꺼냈다.
“그런 약속을 했었죠? 아직도 불만이 있으면 말씀하셔도 돼요.”
“…….”
전에 일이 다 끝나고도 방법이 들렸다고 생각한다면 그때 가서 말하라던 그 말.
물론 지금도 장민주는 주상혁의 방식이 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별말 하지 않았다.
주상혁의 방법도 다를 뿐 틀린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제 친구라고 부를 수는 없는 사이가 되었지만,
최현서든 자신이든 깨달은 게 있는 사건이 된 건 사실이다.
지금은 자신의 편이 되어준 주상혁에게 역정을 내기보다.
“고마워, 도와줘서.”
이런 말을 해야 할 때임을 아는 이유이기도 했다.
주상혁이 말했다.
“별말씀을.”
* * *
주상혁은 일이 끝나자 곧바로 학교를 떠날 준비부터 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어느덧 6월 중순.
page-1을 클리어했으니 이제 page-2.
가기 싫어도 지리산에 약초를 캐러 가야 하는 것이다.
‘이건 미리 할 수 없다는 게 꽤나 귀찮단 말이지?’
의술 마스터 퀘스트는 계열에 상관없이 어느 정도 선행해 두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균형을 알맞게 맞추려면 기운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건 레시피를 얻고 난 뒤에나 해금되는 기능이다.
당연히 선행해 둘 수 없기에 매번 번거로운 과정을 겪고 있었다.
“근데 학교는 괜찮아?”
“그러는 그쪽은요?”
같이 차에 타고 있는 장민주의 질문에 확인하듯 되물었더니 장민주가 말했다.
“나는 상관없어.”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어른들한테는 허락받고 온 거 확실하다는 거죠?”
“당연하지.”
이번 회차에는 강혜영이 아니라 장민주가 따라나섰다.
항상 강혜영과 함께하던 길이었는데 장민주랑 같이 간다는 게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뭐 별수 없다.
학교에서 의지할 친구를 없애 버린 건 다름 아닌 주상혁이었으니까.
“또 변했네.”
광주의 학교가 아니라 청주의 학교를 택하고 나서부터는 미래가 여럿 변했다.
장민주가 일찍 불붙은 일이라거나,
교우 관계에 문제가 생긴 일,
지금 고작 15살짜리 청소년에 불과한 장민주를 혜성길드가 풀어 놓은 것만 해도 그렇다.
아무래도 동행하는 게 주상혁이라는 걸 알기에 혜성길드의 웃어른들이 허락했을 확률이 높겠지만 여하튼 그렇다.
본래라면 장민주가 혜성길드에 허락을 받고 본격적으로 구애하는 건 이보다 3년은 나중 일이었을 텐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래가 바뀐다는 건,
‘강혜영을 살려야 하는 입장에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지?’
중얼거리는 걸 엿들었는지 장민주가 물었다.
“변해? 뭐가?”
“그런 게 있습니다.”
차에서 내려서 익숙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시계를 통한 회귀만 12번째니까 벌써 13번째다.
약초를 보이는 대로 캐면서 앞으로 걸어가자니 주주와 함께 뒤를 따르던 장민주가 물었다.
“어떤 걸 캐면 되는 거야? 도와줄게.”
‘고사리손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좋으려나?’
이맘때쯤 기억이 돌아온 강혜영보다야 도움이 덜되겠지만,
돕겠다며 나서는 게 기특해서 친절하게 하나씩 알려 줬다.
“일단 뭐 구분하기 편한 거만 몇 개 보여 주자면 이렇게 생긴 걸 캐면 됩니다.”
보여 준 약초를 유심히 하나씩 바라보더니 장민주가 말했다.
“알았어.”
“정말로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요?”
“나 기억력 좋거든?”
자신 있게 말한 만큼 장민주는 우려와 달리 실수 없이 족족 잘 캐 왔다.
“맞아?”
“네, 일단은요.”
장민주가 캐온 약초를 확인하고 인벤토리에 구분해서 적재하자니 또 다른 약초를 발견한 장민주가 눈을 빛냈다.
“어? 저기도 있다.”
“먼저 가고 있을 테니까 늦지 않게 따라와요.”
“알았어.”
신이 나서 주주랑 뛰어가는 장민주를 뒤로하고 먼저 스무 걸음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불쑥 약초가 보여 쪼그려 앉아서 호미를 들었다.
사박사박.
한 뿌리 캐고 다시금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마침 뒤에서 주주의 짖는 소리가 들렸다.
“와왕!”
다급한 주주의 짖는 소리에 뒤돌았다가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난데없이 쓰러져 있는 장민주를 발견한 주상혁이 황급히 되돌아갔다.
주상혁이 장민주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의식이 없다.
호흡이 고르고 맥박도 일정한데 갑자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어서 주주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왜 이래?”
와앙……
주주가 도리질 치는 걸 봐서는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나 본데…….
주상혁이 진맥을 사용했다.
장민주의 상태를 나타내는 정보창이 떠올랐다.
“정상이라고?”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장민주 정도 되는 각성자가 이유 없이 의식을 잃는다는 게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어쩐다…….”
낮 12시.
중천에 떠오른 태양을 확인하던 주상혁이 일단은 장민주를 등에 업었다.
* * *
본래라면 저녁이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왔을 텐데,
주상혁은 예정보다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이게 어쩔 수 없는 게 진맥은 장민주가 정상이라고 그랬지만,
그렇다고 기절한 상태인 장민주를 등한시하고 약초를 캐는 건 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약초는 내일부터 열심히 캐지, 뭐. 그나저나…….”
주상혁이 침대에 뉜 장민주를 확인하고 다시 한 번 진맥을 시도해 봤다.
결과는 여전히 같았다.
정상.
“더위를 먹었을 리는 없고…….”
장민주 정도 되는 각성자가 이 정도 더위에 쓰러졌을 리는 더더욱 없다.
혹시…….
“진맥도 잡지 못하는 병이라면?”
진맥의 레벨이 낮기에 가능성이 완전 없다고는 못하겠다.
주상혁이 괜한 스킬창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장민주의 의식이 돌아왔다.
“어? 정신이 좀 듭니까?”
“여긴……?”
“숙소입니다.”
주상혁이 물었다.
“아까 산에서 무슨 생긴 겁니까?”
“그냥 갑자기 어지러워서…….”
으윽.
장민주가 관자놀이를 짚고 약간의 두통을 호소했다.
“일단 조금 더 누워서 쉽시다.”
“응.”
장민주가 다시 눕는 걸 확인하고는 주상혁이 물었다.
“머리 아픈 거 말고는 다른 건 없는 거죠?”
“일단은.”
주상혁이 쓰러질 때 일었던 일이라든지,
아니면 평소에도 종종 이런 적이 있냐든지,
이후로도 나름 상세하게 물어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로 더위라도 먹은 건가?’
어느덧 A급에 가까운 수준의 각성자가 이 정도 더위로 쓰러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그 외에 딱히 짚이는 게 도저히 없었다.
“어디가?”
“기다려 봐요. 기력 회복에 좋은 죽 좀 만들어 올 테니까.”
방을 나온 주상혁은 근처 마트로 가서 닭고기를 비롯해 삼계죽을 만들 재료를 사 왔다.
인벤토리에서 질 나쁜 산삼 하나를 꺼낸 주상혁이 죽을 만들어서 방으로 들어갔다.
장민주는 침대에서 노트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쉬고 있으라니까, 뭐 하고 있어요?”
“이게 쉬는 거야.”
익숙한 노트였다.
일전에 백호를 전해 주면서 장민주의 방에서 봤던 그 일기장이었다.
“그거 나 좀 보여 줘요.”
“어? 싫은데?”
하긴 당연한 반응인가?
주상혁의 예상이 맞는다면 저 일기의 내용은 장민주의 두통과 연관이 있을 확률이 높다.
가설에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보고 싶었다.
“보여 주면 나도 나중에 부탁 하나 들어줄게요.”
“…….”
좀처럼 답이 들려오지 않자 그냥 강짜를 놓기로 했다.
“싫으면 말든가, 죽이나 먹어요.”
아니나 다를까 고민하던 장민주가 덥석 물었다.
“알았어, 보여 줄게.”
슬그머니 일기장을 넘기면서 장민주가 말했다.
“웃으면 안 된다?”
무슨 일기의 내용을 읽으려고 하는 줄 아나 본데,
유감스럽게도 그건 아니다.
주상혁이 확인하고 싶었던 건 단지…….
‘역시 있네.’
예전에 장민주의 방에서 훔쳐봤던 일기장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다.
‘이런 걸 크로키라 그러나?’
특정 자세나 분위기를 담은 그림이었는데,
모델은 주상혁과 닮아 있었다.
극심한 두통과,
일기장의 그림.
주상혁이 장민주에게 물었다.
“기억이 돌아왔습니까?”
“기억? 무슨 기억?”
표정을 확인해 본 결과 그쪽은 아닌 듯했다.
하긴 저번 회차에서도 장민주가 기억을 되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일기의 내용과 두통과는 별개로 강혜영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그게 흔할 리가 없겠지.’
가족들도,
외가 쪽 식구들도,
한혜지도 송치수 일행들도,
모두 기억을 떠올린 일이 없다.
아무래도 두통의 이유와는 별개로 기억이 돌아올 일은 없겠구나 싶어서 일기장을 넘겨줬다.
“아니면 됐습니다. 그냥 죽이나 먹죠.”
“매번 궁금하게만 하고 답은 안 해 주더라?”
“됐고 받기나 해요.”
장민주가 죽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러다가 슬쩍 이쪽을 흘기더니…….
“그…… 먹여 주면 안 돼?”
뭐, 안 될 건 없긴 하다.
“부탁권 쓴다면야, 뭐.”
“나 환자잖아 그냥 좀 먹여 줘.”
평소라면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낮에 기절한 일도 있고 해서 마음이 약해졌다.
하는 수 없이 작게 퍼서 내밀었다.
“자요.”
“후, 불었어?”
순간 욱했지만, 이왕 선심 쓰는 거 꾹 인내하고…….
“후……“
적절하게 식힌 죽을 내밀었다.
앙, 받아먹은 장민주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맛있다, 밖에서 사 온 거야?”
“제가 만들었습니다.”
“직접?”
“네.”
죽을 한 숟가락 더 퍼서 식히고 있는데 장민주가 말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그냥저냥요. 자, 먹어요.”
한 숟갈 더 받아먹고는 복에 겨운 미소를 짓는 장민주를 보고 다음 숟가락을 준비하는데 장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배.”
“뭐요.”
“좋아해.”
그야말로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사실 툭 찔러보는 듯한 말이기도 한 것 같았다.
뭐, 원래 이런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게 장민주긴 하다만…….
‘그래도 이참에 말해 두는 게 좋으려나?’
주상혁은 이미 강혜영과 약속을 한 입장이다.
백호의 일도 있고,
이후에 장민주의 손을 빌리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곁에 두어야 하긴 하지만 지금보다 더 사이가 깊어지면 곤란하다.
선을 확실히 그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저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좀처럼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다가 장민주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데……?”
“있습니다. 착하고 예쁘고 틈만 나면 엉겨 붙던 애가.”
“나는 아니지?”
“네.”
아무래도 죽이나 한가하게 먹여 주고 있을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서 죽을 쟁반 위에 도로 내려놨다.
자리에서 일어난 주상혁이 말했다.
“죽 다 먹고 침대 아래로 내려놔요. 이따가 가지러 올 테니까.”
* * *
주상혁은 다음 날 약초를 캐러 나갈 준비를 했다.
전날 전이 아티팩트로 좌표를 지정해 뒀으니 차량으로 이동하지 않아도 돼서 그편은 간편할 것 같았다.
준비를 마치고 전이 아티팩트를 꺼내려는데 장민주가 방에서 나오더니 말했다.
“나도 같이 가.”
“저 나갔다가 올 테니까 쉬고 있어요.”
신발을 신고 일어서려는데 장민주가 말했다.
“어제 그 일 때문에 그래? 그거면 내가 미안해.”
“그런 거 아닙니다.”
“맞잖아, 거리 두려는 게 딱 느껴지네!”
“글쎄, 그런 게 아니래도…….”
장민주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할게, 좋아한다는 사람이랑 잘되라고 빌어 줄게.”
“그러니까…….”
돌아서서 한마디 하려다가 말문이 딱 막혀 버렸다.
장민주가 눈물을 보인 이유였다.
항상 성장한 장민주를 보아 왔기에 잘 몰랐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장민주는 여린 소녀라는걸 다시 한 번 자각한다.
매번 습관성 고백을 난발하던 장민주였기에 상처가 될 거라곤 생각 못 했었다.
“밤새 생각해 봤는데 좀처럼 정리가 안 돼서…….”
“…….”
“그냥 마음이 가실 때까지 옆에만 있게 해 줘.”
“부탁권…… 쓰는 겁니까?”
끄덕.
“그래요, 그럼.”
* * *
“장민주 씨.”
생각에 잠겨 있던 장민주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제멋대로 옷을 차려입은 주상혁의 모습과 회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그냥, 뭐…… 예전 생각 좀 했어요.”
“예전 생각이라면 무슨……?”
자세하게 말하면 괜히 그가 불편해할 것 같아서 둘러대기로 했다.
“뭐, 그런 게 있어요. 그보다 왜 보챘는데요.”
“이거 어떤 거 같습니까?”
여전히 패션 센스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복장이었다.
‘뭐…… 그 여자를 곤란하게 할 생각이라면 잘 고른 거 같기도 하고?’
고백으로 혼내 줄 생각이라면 아주 바람직한 선택.
주상혁의 옷차림은 딱 그러했다.
‘그래도 거짓말은 안 되겠지?’
그날 약속했으니까.
잘되라고 빌어 주겠다고.
“완전, 구려요.”
“그래요?”
주상혁이 다른 옷을 챙겨서 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방문이 닫히자 괜한 푸념을 늘어놨다.
“왜 그런 약속을 해서는.”
전 세계를 시끄럽게 만들던 검은색 게이트가 사라지고 1년.
잠적했던 주상혁에게 한 달 전쯤 연락이 왔다.
고백하러 갈 건데 도움을 달라나 뭐라나.
솔직히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은 장민주는 요청에 응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니까.
주상혁이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물었다.
“이번엔 어때요?”
“상, 하의 색이 완전 따로 놀잖아요. 좋아하는 색 말고 어울리는 색으로 배열하라니까요?”
“음…… 아무리 봐도 괜찮은 것 같은데…….”
거울에 모습을 비춰 보더니 결국엔 다시 옷을 고르기 시작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의 말을 꽤나 신뢰하는 듯했다.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잘생긴 옆모습을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 복에 겨운 여자란 말이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거절했는지 모르겠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에게 콩깍지가 씌었음을 알게 되었으니 외모적인 건 말하지 않겠지만,
굳이 그걸 떠나서라도 주상혁은 충분히 매력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제일가는 길드의 유력한 후계자일뿐더러,
재력도,
능력도 출중하다.
삼박자 중에 하나라도 갖추면 보통 일등 신랑감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텐데,
주상혁은 최소한 두 개 이상은 갖추고 있다.
이런 주상혁을 찬다는 건 어지간히 배가 부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다음 옷을 고르는 주상혁에게 물었다.
“근데 매번 이렇게 만나러 갈 때마다 저 부를 거예요?”
“제가 장민주 씨 말고는 의지할 사람이 딱히 없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란 걸 알기에,
주변에 여자라고 해 봐야 여동생과 한혜지 정도를 빼면 없다는 걸 알기에,
그렇기에 그냥 납득해 버렸다.
“그냥 좋을 대로 입고 가는 게 어때요? 어차피 뭘 입든 또 차이고 올 텐데.”
“이번에 잘 입고 가면 마음이 바뀔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주상혁이 강혜영이라는 여자를 찾아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 달 만에 네 번을 다녀왔고 모조리 까였다.
5번째 돌격을 준비하는 주상혁을 돕고는 있지만,
솔직히 이쯤 되면 스토커로 신고당해도 할 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좋나?’
듣기로는 갈 때마다 매몰차게 거절당했다던데,
오늘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 주상혁을 보니 못마땅하다.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아요?”
“뭐, 그렇다기보다는 정이죠.”
지금 니 옷 봐 주는 이쪽은 들 정도 없었다는 것 같아서 그렇게 야속하게 들릴 수가 없다.
누군 가지고 싶어도 못 가지는데,
복에 겨운 줄 모르고 벌써 네 번이나 깐 것도 모자라 다섯 번째 깔 예정인 그 여자의 실물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강혜영의 뒷조사야 이미 한 입장이니 뭐 하는 사람인지는 대충 알고 있지만,
여하튼 궁금한 것이다.
“이번엔 나도 같이 가요. 멀리서 구경이나 해야겠다.”
“전에는 관심 없다더니?”
“그냥 그쪽이 차이는 게 좀 보고 싶어졌어요.”
“글쎄, 안 차일 거라니까 그러네.”
장민주가 바닥에 쌓여 있는 옷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흰옷 보이죠. 그거하고 저기 회색 바지 들어 봐요.”
* * *
주상혁은 예전에 그렇게 말했다.
강혜영은 예쁘고,
착하고,
배려심 깊은 여자라고.
하지만…….
“그건 공감하지 못하겠네?”
물론 예쁘긴 하다.
하지만 그 외의 부분은 전혀 아니었다.
강혜영이 저택에서 나와 마트에 가는걸 졸졸졸 따라갔다가 오는 주상혁을 멀리서 지켜보는데 어찌나 주상혁을 대하는 태도에 무신경하던지 장민주의 속이 부글부글 끓을 지경이었다.
‘어느 배려심 깊고 착한 여자가 사람을 저렇게 대해?‘
물론 이해는 한다.
싫다고 거절한 남자가 다섯 번이나 찾아오면 장민주도 기분이 안 좋을 것이다.
실제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게 보살이라고 해도 옳은 말이긴 하다.
하지만 장민주는 누가 뭐래도 주상혁 편이다.
머리론 알아도 마음이 화합하질 않는다.
“내가 고작 이딴 대접이나 받으라고 양보한 줄 알아?”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장민주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장민주가 주상혁이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는 단숨에 달려서 저택으로 들어가려는 강혜영 앞을 가로막았다.
“뭐예요?”
뺨이라도 한 대 때려 주려고 나선 건데 막상 마주하니 주상혁의 얼굴이 떠올라서 그만두기로 했다.
입술을 콰득 깨문 장민주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 좋은 사람이야.”
“네?”
“착하진 않지만, 책임감도 있고, 가끔은 상냥하기도 하고, 어쩔 땐 듬직한 면도 있고,”
자신이 아는 한 주상혁의 모든 장점을 나열했다.
말하면서 알게 된 건데,
생각한 것보다 주상혁은 좋은 점이 훨씬 많은 사람이었다.
말할수록 부러워졌다.
그런 그에게 선택받는 강혜영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면 그쪽이 만나면 되겠네요.”
이성의 끈이 탁 끊어졌다.
“누군…….”
“네?”
“그러고 싶지 않은 줄 알아?”
울분이 터져서 갑자기 안구에 습기가 찬다.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 손이 저절로 강혜영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장민주 씨!”
언제 돌아왔는지, 주상혁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난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은 뱉었다.
“근데 난 안 된다잖아.”
“…….”
“너여야 된다잖아. 나로는 안 된다잖아.”
“그만! 그만합시다.”
“난! 안 되니까 너라도…“
“부탁입니다, 장민주 씨.”
어느새 옆으로 온 그가 애원하는 상황이 되어서야 정신이 번뜩 들었다.
멱살을 잡았던 팔에 힘을 빼자 늘어난 강혜영의 가슴 옷자락이 보였다.
그가 강혜영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오늘만 너그럽게 넘어가 주세요.”
“친한 사이인가 보죠?”
“네…….”
“뭐, 좋아요, 근데 오늘만이란 건 어떻게 확신하고요?”
“저도 이 사람도 이제 앞으로 안 올 겁니다.”
그가 쓰게 웃는다.
매일같이 잠을 설쳐 가면서도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은 없었는데,
멋대로 다 망쳐 버렸다.
“그동안 불쾌했다면 다시 한 번 사과하겠습니다.”
“알았어요.”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에 경호원들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가는 강헤영을 붙잡으려는데 그가 만류했다.
“집에나 갑시다. 갑자기 피곤해지네요.”
* * *
회관으로 돌아온 그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괜찮은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괜찮은 건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평범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조용히 TV를 보는 그 때문에 묘하게 가시방석에 앉은 것만 같은 기분이다.
딱히 옆에 있으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어쩌지도 못한 채 저녁때가 되었다.
그가 어두컴컴해진 거실을 확인하고 일어나 불을 켰다.
“주주, 밥 먹을래?”
품에 안겨서 자고 있던 주주의 귀가 팔락였다.
구석에 내려놨던 백호도 밥 이야기가 나오자 다리에 비비대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와왕!
냐아아아.
주주와 백호의 사료를 챙겨 주고는 주상혁이 반대편에 깜깜이와 깜냥이의 사료도 마저 챙겨 준 뒤에야 말했다.
“갈비찜 할 건데 괜찮죠?”
“네? 네…….”
뭐지?
최후의 만찬인가?
때깔 좋게 맛있는 걸 먹이고 처형하려는 생각인가 해서 부엌을 슬쩍 흘겼다.
주상혁은 앞치마를 두르고 냉장고에 있던 재료들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두어 시간쯤 부엌에서 요리를 끝낸 그가 상을 폈다.
준비한 반찬을 상위에 차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먹어요. 대추 조금 넣었어요.”
“…….”
그의 맞은편에 가서 조용히 숟가락을 들었다.
눈치를 보면서 상 가운데 놓인 갈비찜을 한 점 맛보는데 달짝지근한 게 입맛에 딱이었다.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만 요리도 참 잘하는데…….
낮에 그의 장점을 소개할 때 이것도 말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스치더니 이어서 멱살을 잡고 난리 쳤던 상황이 떠올라서 숟가락이 돌연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뭘요.”
“나 때문에 다 망했다고 말해도 돼요.”
“…….”
적막이 깔리더니 그가 돌연 고개를 휙 들었다.
본의 아니게 움찔 놀라 버렸다.
“그래요, 말하라니까 말하죠, 뭐.”
“…….”
“저랑 약속했어요? 안 했어요?”
“했는데요…….”
무슨 일이 있게 되든,
무슨 일을 보게 되든 끼어들지 않기로 약속했다.
“근데 약속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그걸 깨요?”
“미안해요.”
“미안하면 다입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정 그러면 제가 지금이라도 가서 다시 사과할게요.”
“됐고, 그쪽이 책임지던지,”
“네?”
“낮에 자기는 안 되니, 뭐니 말하던데.”
“…….”
“왜 말이 없습니까? 그새 마음이라도 바뀌셨나?”
“나로 괜찮아요?”
“그렇게 울고불고하는데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가 있어야지.”
“그럼 강혜영 그 여자는요?”
“다섯 번이나 갔는데 반응이 없는 거 보면 인연이 아니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저 그 여자의 대타일 뿐인데,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꿈이라도 꾸는 건 아닌가 싶어서 볼을 꼬집었다.
볼이 아픈데 이상하다.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기분 나쁘게 웃지 말고 대답은요? 싫다고 하면 그냥 혼자 살고.”
“혼인신고부터 할까요?”
“아니요, 뭐든지 천천히 합시다. 저도 이제부터는 장민주 씨 제대로 바라볼 테니까.”
* * *
“헉!”
전날 회관에서 잠이 든 장민주가 번뜩 눈을 떴다.
어젯밤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자 장민주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옆을 확인했다.
휴…….
“다행히 꿈은 아니네…….”
옆자리에는 주상혁이 자고 있었다.
10년 만의 짝사랑이 결실을 맺었다.
항상 다른 곳을 바라보던 주상혁이 드디어 이쪽을 돌아봐 준 일.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근데 막상 아침이 되니까 부끄럽긴 하네…….’
장민주가 뜨거웠던 어젯밤을 떠올리고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확인했다.
옷을 주섬주섬 주워서 조용히 입은 장민주가 거실로 나갔다.
굳게 닫힌 방문을 열고 나갔더니 문밖엔 소환수들이 대기 중이었다.
백호는 몰라도 항상 같이 자던 주주나 깜깜이 깜냥이는 기분이 상한 듯한 기색이었다.
무섭게 쏘아보는 녀석들에게 장민주가 사과했다.
“그…… 미안…….”
조용히 문을 닫은 장민주가 한쪽에 치워 둔 사료를 꺼내 대신 밥을 챙겨 줬다.
그래도 일단은 단순해서 다행이다.
밥을 주니 조금 기분이 풀린 듯했다.
와구와구 밥을 먹는 아이들을 놔두고 장민주가 화장실로 들어가 가볍게 씻고 나왔다.
주주나 소환수들은 TV 보기에 여념 없었고,
빈그릇을 치우는데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자나?’
안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서 침대 위를 확인하자 자세만 조금 변했지 여전히 자고 있는 주상혁이 보였다.
장민주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침대로 향했다.
이제 자신만의 특권인 주상혁의 옆자리에 쏙 들어가 자고 있는 주상혁의 얼굴을 오목조목 뜯어봤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이게 왜 못생겼단 거지?’
조각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장민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주상혁을 처음 봤던 그때의 충격을 떠올리며 조용히 입꼬리 올렸다.
‘뭐, 내 눈에만 잘생겼으면 더 좋지.’
이제부터는 사수해야 하는 입장이라 경쟁자가 적은 게 좋다.
주상혁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디 다녀왔습니까?”
“화장실 좀…… 왜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더 잘 거예요?”
“일단은 뭐…….”
적당히 답했더니,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를 주상혁의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잠든 듯했다.
‘근데 참 신기하긴 하네.’
어젯밤에도 느꼈던 거지만 주상혁이 잠드는 속도는 참 신기하다.
항상 부지런한 모습만 봐와서 실감이 잘 안 됐는데 원래는 잠이 많은 성격이라고 하더니 그게 진짜인가 보다.
장민주가 다시 주상혁의 얼굴을 감상할 때였다.
지이이잉.
휴대폰이 울리자 주상혁이 깨어났다.
장민주가 화들짝 놀라 딴청 피웠다.
전화를 받은 주상혁이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네 알았어요. 일주일 뒤라는 거죠?”
“누구예요? 상당히 공손한데?”
“어머니입니다. 일주일 뒤에 아버지 생신인데 같이 점심 식사라도 하자고 하시네요.”
다시 자리에 누워서 자려는 그에게 장민주가 물었다.
“그거요.”
“그거?”
“생신 파티에 저도 가도 돼요?”
* * *
장민주는 아쉽긴 해도 일단 혜성길드로 돌아가기로 했다.
할아버지나 부모님께도 사실을 알려 드릴 필요도 있었고,
일주일 뒤를 위해 준비할 것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조심해서 다녀와요. 안전 운전하고.”
주상혁은 전이 아티팩트를 빌려주겠다 했지만 차를 끌고 와서 어쩔수 없는 일.
이왕 돌아가기로 결정한 거 발이 떨어져야 하는데 아쉬워서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말만 하지 말고 다른 건 없어요?”
“다른 거요?”
“그 뽀뽀라거나, 애인들은 그런 거 하지 않나?”
막상 입으로 말하자니 쑥스러워 미치겠어서 괜한 주주를 흘기는데 주상혁이 한걸음 더 다가왔다.
“다음 건 나중에 이어서 합시다.”
“알았어요. 금방 다녀올게요.”
신이 나서 혜성길드까지 차를 몰고 돌아갔다.
그와의 발전을 어른들께 터놓았더니 조부 장혜성도 부친 장민철도 모두 축하해 줬다.
“흥, 결국에 넘어올 거면서 갈팡질팡하기는!”
“조만간 시간을 내서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고 전해 주거라.”
“네.”
두 분은 물론이고 어머니에게도 잔뜩 이야기하고는 방으로 향했다.
눈눈누.
답지 않게 멈추지 않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에 도착하자 백호가 사료 봉지 안에 들어가서는 밥을 먹고 있었다.
장민주가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 주고는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혜성길드로 들어온 이유는 어른들께 말씀드리는 목적도 있었지만, 일주일 뒤의 준비를 위함도 있었다.
그쪽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됐다.
“혹시 반대라도 하시면 안 되니까.”
점수를 따 놓을 수 있을 때 확실하게 따 놓는 게 좋을 것이다.
장민주가 침대에 앉아서 절친 김지수에게 전화를 넣었다.
헤어지는 인연이 있으면 찾아오는 인연도 있다고,
최현서 사건 이후로 찾아온 인연으로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음…… 시가에 드릴 선물 말이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두 살 많은 남자와 일찍 결혼한 김지수는 이쪽 방면에서는 선배였다.
―원래 이런 건 취미도 조금 알아보면 정하기 쉬운데…… 아는 거 없어?
“취미…….”
조금 생각해 봤지만 짚이는 게 없다.
그도 그럴 게 주상혁의 부친과는 제법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오가며 잠깐잠깐 얼굴을 마주한 게 다였기 때문이었다.
―없다는 거지?
“어, 그렇네…….”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냥 남자 쪽에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상혁 씨한테?”
―응.
“알았어, 일단 물어볼게, 고마워.”
통화를 종료한 장민주가 곧바로 주상혁에게 연락했다.
―무슨 용무라도?
곧바로 주상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쩜 목소리도 이렇게 멋있을까.
“선물을 좀 하려고 하는데요……”
이야기를 쭉 듣던 주상혁이 말했다.
―그런 거면 통화로 하긴 좀 그런데…… 이쪽으로 올래요?
취미가 대체 뭐길래?
“일단 알았어요.”
길이 조금 멀긴해도 아직 1주일이나 여유가 있다.
아침에 봤는데 그새 주상혁의 얼굴도 보고 싶어졌겠다.
겸사겸사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장민주가 결국엔 3시간을 운전해서 왔던 길을 돌아갔다.
깜깜해 져서야 회관에 도착한 장민주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담요와 쿠션 그리고 간식거리를 내려놓고는 주상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예요?”
“같이 영화나 한 편 볼까 해서요. 영화관은 불편하니까.”
장민주도 주상혁과의 시간을 보내는 게 싫은 건 아니다 보니 일단은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장민주가 슬쩍 물었다.
“근데 그 취미요…….”
“없어요, 그런 거.”
“네? 아까는 오면 알려 주겠다면서요.”
“그야 거짓말이죠. 보고 싶어서 장난 좀 쳤습니다, 안 돼요?”
“그…….”
주상혁이 손을 조용히 잡았다.
“나는 기왕 사귀기로 한 거 같이 이것저것 하고 싶은데, 민주 씨는 아닌가?”
“아니 그건 아닌데…….”
“우리 바쁘게 살았잖아요, 이제 좀 쉬어요, 근심 없이.”
* * *
“헉!”
악몽을 꾸던 장민주가 벌떡 일어났다.
주재호의 결사반대,
요리하나 할 줄 모르는 자신을 고깝게 보던 조수연.
당신 같은 하찮은 전투력을 가진 여자에게는 오빠를 내어 줄 수 없다는 주화영의 철벽.
믿었던 쌍둥이들까지 돌아서자 주상혁이 하는 말이 악몽의 화룡점정이었다.
―반대가 너무 심해서 안 되겠네요, 민주 씨
꿈인 걸 알면서도 괜히 옆에서 자고 있는 주상혁에게서 배신감이 느껴졌다.
‘네가 선물 같은 거 필요 없다며!’
괜히 주상혁의 볼을 꼬집었더니 주상혁이 깨어났다.
볼을 꼬집은 손을 살짝 흘기더니, 주상혁이 말했다.
“왜요? 제가 뭐 잘못했어요?”
“그냥 뭐…… 장난.”
볼을 놓아 주자 주상혁이 다시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주상혁이 잠이 든 걸 확인한 장민주가 이마를 짚었다.
“하…… 내가 왜 그랬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선물을 마련해야 한다고.
하지만 마련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면 주상혁의 말에 현혹돼서 미루고 미루다가 정신 차렸을 땐 꼭 다음 날 아침이었다.
장민주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혹시 선수 아니야?”
그동안 알고 있던 무뚝뚝한 주상혁이 맞나 싶을 정도로 밤만 되면 무드가 장난이 아니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장민주도 다정해진 주상혁과 보내는 시간이 행복에 겨워 발생한 일이었기에 그를 탓할 수만은 없었지만,
문제는 이미 되돌리기엔 늦었다는 점이었다.
어느덧 생신 당일.
이제 주상혁의 말을 믿는 방법뿐이었다.
옷을 걸치고는 거실로 나가자 주주랑 소환수들이 익숙한 일이라는 양 지긋이 바라봤다.
괜히 부끄러워진 장민주가 말했다.
“뭐, 왜, 뭐, 내가 내 사람이랑 잠 좀 잔 게 죄냐?”
일주일새 많이 뻔뻔해진 장민주가 자연스럽게 밥을 챙겨 주고는 준비를 시작했다.
한창 준비를 끝마칠 때쯤 일어난 주상혁이 준비를 끝마치고 전이 아티팩트를 꺼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죠?”
“괜찮을 거라니까요. 제가 워낙에 기대치가 낮아서 그런 거 따지실 분들이 아니에요.”
풍경이 변하고 열 평 남짓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전에 이 사람이 썼던 방이구나…….’
주상혁의 방에 온 건 처음이었기에 묘하게 설레기도 잠시.
“자, 그럼 나갑시다.”
“아, 네.”
주상혁과 함께 바깥으로 나가자 부엌에서는 조수연이 도우미 아주머니분들과 함께 열심히 상을 차리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가까워진만큼 푸짐하게 차려진 상이 보였다.
조수연이 인기척을 느끼고 밝게 인사를 건네왔다.
“어머, 왔어요?”
“안녕하세요, 어머님.”
내일모레 쉰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게 조수연은 아름다울뿐더러 상냥하기까지 했다.
“상혁이 너도 결국엔 남자구나? 역시 예쁜 게 최고지?”
주상혁이 옆구리를 콕 쑤신다.
“말해 봐요, 제가 쫓아다녔어요?”
“아니, 그…….”
음식 준비를 도와주시던 아주머니 두 분이 딱 좋은 타이밍에 인사했다.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네, 고생하셨어요.”
아주머니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자 조수연이 말했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금방 다른 사람들도 불러올게요.”
“네, 어머님.”
주상혁과 나란히 식탁에 앉아서 바짝 긴장하고 있으니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방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근엄한 얼굴의 주재호.
토끼처럼 귀여운 인상과 달리 심술이 난 듯한 주화영.
그나마 가장 대화를 많이 나눠 본 쌍둥이.
모두 자리에 앉자 주재호가 말했다.
“먹자.”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많이 먹어요.”
“네, 어머님.”
언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눈치를 보다가 일단은 조수연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으로 점수를 따기로 마음먹은 장민주가 두어 젓가락쯤 먹고 찬사를 하려고 할때였다.
주상혁이 돌연 입을 열었다.
“저, 결혼하려고요.”
“켁켁…….”
장민주가 난데없는 돌직구에 사레들려 기침을 할 때였다.
주재호가 별말없이 조용히 입을 뗐다.
“그래,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긴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상혁과 나누더니 주재호가 말했다.
“조만간 한번 만나 뵙자고 한 번만 어른들께 말해 줘요, 민주 양.”
장민주가 얼떨결에 말했다.
“네…….”
일단은 반대는 아닌 듯했다.
* * *
한 달 후.
결혼 관련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 상견례를 마치고 오늘 아침 공식 발표를 한 까닭이었다.
쏟아지는 기사들을 보던 장민주가 그제야 실감이 났는지 중얼거렸다.
“정말로 결혼하는구나…….”
물론 아직 식장이 정해지지도 않았고,
구체적인 식 일정이 잡히지도 않았지만,
작금의 기사들을 보아하니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반쯤 포기하고 있던 게 불과 한 달 전.
갑작스러운 변화에 불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노트북을 들여다봐도,
핸드폰을 들여다봐도,
심지어 TV를 켜 봐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결혼 소식을 접할 수 있으니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장민주가 소환수들과 TV를 볼 때였다.
부엌에서 요리하던 주상혁의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요?”
“네?”
“한참을 불렀는데, 못 들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보고 있던 TV를 확인한 주상혁이 뉴스 기사를 보고는…….
피식.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슬슬 상 좀 펴 줘요.”
“네.”
장민주가 한쪽에 상을 펴고는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 깔고 밥 두 그릇을 푼 다음에 소환수들의 밥을 챙겨 주기 시작했다.
밥그릇 앞으로 가서 앉아 기다리는 백호와 주주에겐 사료를 깜깜이와 깜냥이에게는 안전한 곳에 놓아둔 맹독을 조심히 꺼내서 콸콸 부어 줬다.
언제 봐도 신기한 독 먹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마침 주상혁이 부엌에서 나와 상차림에 마침표를 찍었다.
상 중앙에 내려놓은 음식은 제육볶음.
원래 돼지고기는 비려서 입에 별로 대지 않는 장민주였지만 주상혁이 만든 제육볶음은 예외다.
두말할 것도 없이 입맛에 딱 맞았다.
제육볶음을 먹으며 주상혁을 슬쩍 확인했다.
‘역시 나도 요리 좀 배워야겠지?’
주상혁이 만들어 주는 걸 먹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항상 얻어먹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본적인 건 배워서 신혼쯤엔 번갈아 가면서 하는 게 좋겠지 싶었다.
밥을 먹으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주상혁이 상 위로 전이 아티팩트를 내밀었다.
“아참, 여기요.”
“이걸 왜 줘요?”
“내일부터 식장 알아보잖아요. 외출할 일이 많으니까.”
주상혁도 한가하겠다.
가급적 함께 다니긴 하겠지만, 부득이하게 동행하지 못할 때도 있다.
오고 가고 운전하는 데만 한세월인데,
갈 때는 몰라도 올 때를 위해서라도 전이 아티팩트는 가지고 있는 게 유용했다.
“고마워요.”
* * *
강혜영은 요즘 자신이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 달 반 전쯤을 끝으로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고 있지 않은 주상혁 때문이었다.
귀찮고 불편한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찾아오질 않으니 뭔가 허전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내 스타일은 아닌데…….’
그때도 그렇게 느꼈지만,
지금도 TV에서 나오는 주상혁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근데 왜 이렇게 짜증 나지?”
며칠 전부터 오만 곳에서 들리는 주상혁의 결혼 소식.
그게 강혜영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럴 거면 그날 그렇게 기운 없이 웃지나 말던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말하며 보이던 미소는 그동안 어딘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던 요인이었다.
그런데 그새를 못 참고 결혼을 한다니…….
뭔가 갑자기 배신감이 들기도 하고,
아쉬움이 들기도 하고,
형용 못 할 허전함이 들기도 한다.
“아, 몰라…….”
띠리링.
TV를 끄고 침대에 드러누운 강혜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나, 진짜 왜 이러지?”
두 사람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다.
그건 알고 있다.
실제로 그날 장점을 늘어놓던 장민주에게 그럴 거면 둘이 만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한 것도 강혜영 자신이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한 말에 마냥 좋아했던 것도 강혜영 자신이었다.
강혜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래, 산책이나 하자.”
시원한 바깥 공기라도 좀 쐬면 정신을 차리겠지.
그냥 원래대로 돌아오길 바라면서 산책 준비를 시작했다.
가볍게 산책 나갈 준비를 마친 한 강혜영이 방을 나서면서 뒤를 돌아봤다.
“깜깜아, 산책 가…….”
강혜영이 중얼거렸다.
“아참, 나…… 개 안 키우지?”
종종 그런 느낌이 든다.
둘도 없이 아끼던 강아지가 있었던 느낌이…….
괜히 머쓱해진 강혜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바깥을 나가 걷기 시작했다.
근처 강변의 산책로에 도착해서 시원한 공기를 쐬자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전까지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복잡했던 생각을 훌훌 털어 버리려는데 마침 맞은편에서 새하얀 말티즈와 조깅하는 여자가 보였다.
와왕!
신이 나서 방방 달려가는 강아지와 바쁘게 쫓아가는 여자를 한참을 보던 강혜영이 중얼거렸다.
“주주?”
왜, 그런 이름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강아지를 지켜보고 있자니 그런 이름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다.
결국 머리만 복잡해져서 집으로 돌아온 강혜영이 중얼거렸다.
“그 사람한테 물어볼까?”
답은 주상혁,
그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어째선지 들었다.
* * *
요즘 들어 바쁘게 식장을 알아보고 다니던 장민주는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까 심심하네…….”
주상혁이라도 있으면 같이 장난이라도 좀 칠 텐데 주상혁은 모처럼 만에 외출한 상태다.
부산에서 거대한 규모의 게이트가 발생해서 그쪽을 처리하러 간 것이다.
전이 아티팩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저녁쯤이 되어서나 도착할 예정.
아직 점심 무렵도 한참 남은 시점에서는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게 그야말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아침이었다.
장민주가 열린 문으로 바깥을 바라보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청소라도 해야지.”
장민주는 가장 먼저 밀린 빨래를 시작했다.
세탁기에 넣고 돌린 뒤에는 바닥을 청소했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로 싹 닦았다.
“날도 많이 풀렸는데, 시트도 빨자.”
세탁기가 멈추길 기다렸다가 시트를 돌린 장민주가 앞선 빨래를 바깥에 널고는 들어오다가 현관을 확인했다.
청소할 때 졸졸 따라다니던 소환수들이 차례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흙발이 되어서 들어오지 못하는 녀석들을 안아 들고는 장민주가 말했다.
“할 일도 없는데 같이 목욕이나 할래?”
와왕!
냐아아아아.
좋아하는 녀석들과 함께 느긋하게 씻고 나와서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1시.
소환수들의 밥을 챙겨 주고는 장민주가 중얼거렸다.
“나도 좀 배고프네.”
한 끼쯤 안 먹어도 충분하겠지만,
망설이다가 이참에 요리 연습을 하기로 했다.
재료라면 냉장고에 존재하고,
요리책도 주상혁이 보던 것도 있다.
처음이라 조금 떨리긴 하지만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유튜브 좀 뒤져 보면 좋은 영상이 널리고 널렸는데 암흑 물질은 나오지 않겠거니…….
시키는 대로 유튜브를 보며 만들던 장민주가 30분쯤 실랑이를 벌이다가 자신이 만든 제육볶음을 확인했다.
“이게 맞나……?”
초보자도 쉽게 만들 수 있다기에 도전해 본 건데 맛이 괜찮을지 모르겠다.
“일단 겉모습은 괜찮긴 한데…….”
도저히 직접 간을 볼 용기가 안 난다.
발아래 있는 백호를 슬쩍 확인하고 먹여 볼까도 했지만 결국 포기한 장민주가 큰 용기를 냈다.
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왕 먹었다.
잔뜩 굳어 있던 장민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도 이 정도면…….”
주상혁이 만든 것보다는 못 해도,
그래도 익히 알고 있는 제육볶음의 맛이 느껴졌다.
“상혁 씨는 뭐라고 하려나?”
저녁에 제육을 먹였을 때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빈말에라도 맛있다고 할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 팩트를 폭격할지.
상당히 궁금했다.
“호야는 어떨 거 같아?”
백호에게 물었더니 백호가 하품과 함께 답했다.
냐아아아.
“역시 그렇지?”
답은 팩트 폭격이었다.
물론 장민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주상혁이 다정다감해졌다지만, 그래도 본연의 성격이 입바른 소리 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래도 내심 한편으로 맛있다고 말해 주진 않을까 기대하기도 하며 부엌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딸랑, 딸랑.
현관문에 설치한 도어 벨이 울렸다.
“누구지?”
외지디외진 곳이긴 해도 종종 이곳에 들르는 사람이 있긴 하다.
주변 주민들이 감자든 고구마든 김치든,
인근의 게이트를 처리해 준다고 감사의 표시로 먹거리를 제공하는 편이다.
이번에도 할머니나 할아버지겠거니 하고 현관으로 나갔다가 팍 굳었다.
현관에 보이는 사람이 다름 아닌 강혜영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주랑 깜깜이랑 놀고 있던 강혜영이 이쪽을 보고는 말했다.
“아, 드디어 찾았다.”
장민주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안한 마음이 갑자기 오감을 지배했다.
“그쪽이 여긴 무슨 일로?”
“대화를 조금 하고 싶어서 왔어요.”
“저하고요?”
“아니요, 그 사람이랑요. 그 사람은 없나요?”
안방을 슬쩍 살피는 강혜영을 보자니 의문이 한 가지 든다.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왔을까?
그가 말해 줬을까?
“그 사람은 지금 외출 중이에요,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찾았죠?”
“일전에 대화를 통해서 들었어요, 강원도 어느 마을 회관에서 살고 있다고.”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주저리주저리 하는 말을 듣고는 있었나 보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나요?”
“안 돼요.”
장민주가 앞을 가로막자 강혜영이 눈을 끔벅이다가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밖에서.”
“일단 돌아가요. 그 사람 돌아오려면 며칠 걸릴 거니까.”
조용히 바라보던 강혜영이 입을 열었다.
“비겁한 짓은 안 하실 거라고 믿어도 되는 거죠?”
“무슨 의미예요?”
“…….”
강혜영은 딱히 답을 하지 않고 강아지 두 녀석과 작별 인사를 했다.
“주주랑 깜깜이 다음에 봐.”
와왕!
먀먕!
강아지들을 쓰다듬어 주다가 현관을 나서려던 강혜영을 향해 물었다.
“그 애들 이름.”
“뭘요?”
“어떻게 알았어요?”
강혜영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아, 진짜로 주주랑 깜깜이에요?”
그리고 이내 혼잣말로 중얼거리길…….
“정말로 뭔가 있긴 한가 보네?”
* * *
장민주는 강혜영이 다녀간 후로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주상혁이 강혜영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십 년 동안 주상혁을 쭉 좋아한 자신인 만큼 강혜영을 쫓던 주상혁의 마음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도 있었지……?”
주상혁이 스치듯 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떠올릴지도 모른다거나,
오늘은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거나 하던 말들.
지금 생각해 보면 꼭 강혜영이 잊은 기억이 존재한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더군다나 아까 회관을 나서기 전에 깜깜이와 주주의 이름을 알고 있던 것을 보기도 했으니 불안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장민주가 강혜영의 일로 한참을 고민했을 때였다.
해 질 무렵이 되자 주상혁이 돌아왔다.
“불도 안 켜고 뭐 해요?”
“그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뭔가 속마음을 읽힐 거 같아서 짧은 말로 적당히 답했더니,
그가 잠시 머물다가 이내 옷가지를 챙겨서 욕실로 들어갔다.
“비겁하다고 해도 상관없어.”
장민주의 결단은 비장했다.
두 번이나 양보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온 주상혁이 물었다.
“진짜로 아무 일도 없습니까?”
“그냥 친구랑 좀 다퉈서 그런 거예요.”
장민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보다 배고프죠? 밥이나 먹어요, 우리.”
상을 차리는 걸 지켜보던 그가 말했다.
“웬 제육? 전에 만들어 놓은 게 남았던가?”
“설마요, 내가 만든 거예요.”
“그쪽이요?”
주상혁이 의외라는 듯 바라보더니 젓가락으로 집어 한 입 먹었다.
그걸 유심히 지켜보다가 슬며시 물었다.
“어때요?”
“먹을 만하네요.”
맛있다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의 성격을 알기에 이것저것 비평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다음엔 더 맛있게 만들어 볼게요.”
“기대하겠습니다.”
저녁을 먹고 난 이후에는 여느 때와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같이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보고,
―이 결혼 인정 못 해
어느 영화의 대사를 듣고 괜히 움찔하기도 했다.
식장에 난입하는 치정극이 어째선지 앞날 같아서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건 지금 상황에 당연한가?
어느덧 자정이 넘은 시간.
평소라면 속편히 잠에 들었을 텐데 잘 시간이 돼서 누웠음에도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이대로 자면 악몽을 꿀 것 같은 확신.
괜히 그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손 좀 잡아 주면 안 돼요?”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덥석 깍지를 껴 오는 손을 타고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잘 자요.”
“네.”
용기를 내서 눈을 감았다.
잠에는 의외로 쉽게 들 수 있었다.
그리 길게 이어지진 않았지만.
“헉!”
아니나 다를까 악몽은 피할 수가 없었다.
흥건한 식은땀을 식히고 있자니 옆자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몽이라도 꿨어요?”
“안 자고 있었어요?”
그가 조용히 일어나서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옆에서 계속 끙끙거리는데 잘 수가 있어야죠.”
“그…… 미안해요.”
“사과할 일은 아니고, 아까 그거 거짓말이고 사실은 털어놓을 게 있죠?”
“네?”
들킨 걸까?
하긴 눈치가 빠른 그이니 눈치챘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털어놓을 거라니요?”
어물쩡거리다가 시치미를 뗐더니 그가 포기했다는 듯 말했다.
“뭐, 말하기 싫으면 말고.”
그가 다시 자리에 눕는 걸 지켜보다가 말을 꺼냈다.
“그…… 부탁이 있어요.”
“뭐, 들어나 봅시다.”
“다른 데로 이사 가면 안 돼요?”
여기보다 더 깊은 산골이어도 되고,
외딴섬이어도 되니까.
“한 3년 정도만”
“결혼식은 어쩌고요.”
“그냥 그런 거 안 해도 되니까…….”
조용히 눈을 바라보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이사 가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근데…….”
“…….”
“결혼식은 할 겁니다. 도망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 * *
주상혁은 장민주의 부탁대로 이사를 했다.
외딴섬도 아니고,
더 깊은 산골도 아니었지만,
전라도의 어느 마을 회관이었으니 인적이 드문 촌구석이라는 건 충족한 이사였다.
결혼식을 준비하다 보니 시간은 비교적 금방 흘렀다.
반년 정도의 시간이 정말 정신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민주의 근심은 여전해 보였다.
같이 데이트를 해도,
밥을 먹어도,
넋이 반쯤 나가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물어봐도 좀처럼 답을 하지 않으니 답답하긴 했지만,
때가 되면 말해 주겠거니…….
“어때요?”
“예쁘네요.”
예쁘게 드레스를 차려입은 장민주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대로 전했다.
본판도 억 소리 날 만큼 예쁜데 새하얀 옷까지 걸치니 단연코 누구보다 잘 어울렸다.
“그걸로 하는 겁니까?”
“다른 것도 좀 보고 싶은데…….”
“그렇게 해요. 우리만큼 한가한 사람도 없잖습니까?”
뭐, 빈말이 아니었다.
지구상을 통틀어서 가장 한가한 예비부부가 주상혁과 장민주일 테니까.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는 장민주를 확인하고 저녁 메뉴를 생각하는데 마침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약해영?”
“네, 저예요.”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긋 웃는 모습이 괜한 심장을 폭행한다.
너무 뜬금없는 강혜영의 등장이 의외라서 질문을 했다.
“여긴 어떻게?”
“대화를 하고 싶어서요.”
“나랑?”
“네.”
생각해 보니 결혼한다고 온 사방에 떠들어 댔으니 찾아내려고 했다면 못 찾을 것도 없나?
자리에서 일어나 장소를 옮기려는데 드레스 룸 안의 장민주가 밟혔다.
“오래 걸리려나?”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 말 좀 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말을 하면서 드레스 룸 쪽을 바라봤더니, 강혜영이 답했다.
“뭐, 좋아요, 저도 반응이 조금 궁금하긴 하네요.”
강혜영의 묘한 웃음을 확인하고 3분쯤 더 기다렸을까 갈아입은 장민주가 문을 열고 나오기 바쁘게 얼어붙는 것도 잠시…….
다급히 다가와 손을 잡아끌었다.
평소라면 그대로 끌려서 나가 줬겠지만 주상혁도 사실 강혜영의 용무가 궁금하던 차였기에 양보하지 않고 버텼다.
조금 해 보다가 끌려 나오지 않자 이내 장민주의 팔이 풀렸다.
기어코 이쪽을 보지 않는 장민주의 등을 향해 말했다.
“대화 좀 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대화요?”
“잠깐이면 돼요.”
“…….”
장민주를 놔두고 강혜영과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낙엽 날리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강혜영에게 물었다.
장민주의 허락을 받지 않고 나온 게 내심 마음에 좀 걸리기 때문에 가능한 한 짧게 용무를 마칠 생각이었다.
“그래서 할 말이 있는 거지?”
“네.”
“본론만 말해 줄 수 있을까?”
막상 말하라고 판을 깔아 주자, 떨리는지 좀처럼 강혜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깊게 심호흡을 한 뒤에야 강혜영은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사실 그날 이후로 후회 많이 했어요.”
“후회했다고? 꼭 내가 좋아졌다는것처럼 들리는데?”
“네, 맞아요. 저…… 주상혁 씨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갑자기 좋아졌다니 혹시 기억이 돌아왔나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아닌 듯했다.
‘주상혁 씨라…….’
강혜영이 말했다.
“늦었을지 모르지만, 우리 잘해 볼 수 없을까요?”
큰 용기를 냈음을 알고 있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고민할 것도 없는 것이다.
‘아니, 설령…….’
기억이 돌아왔더라도 답은 같았을 것이다.
강혜영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것과 녀석을 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저했겠지만,
반년 전쯤부터 쭉 불안해하던 장민주를 알기에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미안.”
“역시 그렇겠죠……?”
쓰게 웃는 강혜영을 향해 물었다.
예상은 가지만 확인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반년 전에 나 없을 때…….”
말을 다 하지도 않았는데 강혜영이 답했다.
“네, 찾아갔었어요. 저 사람은 말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구나…….”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더니 장민주가 왜 그동안 불안에 떨었는지 답이 그려졌다.
선택의 기로에 놓이면 강혜영을 선택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하튼 미안하네.”
식장으로 들어가려고 돌아서는데 강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축하해요, 결혼.”
“그래.”
걸음을 옮겨서 장민주를 떼어 놓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초상집을 방불케 하는 암울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조용히 의자에 앉아서 우울한 분위기를 내뿜는 장민주에게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장민주가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요?”
“돌아갔습니다.”
“뭐라고 해요?”
“좋아한다네요.”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그래서 뭐라고 답했어요?”
솔직히 방에 들어오기 전에는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냐고 한마디 해 줄생각이었는데,
그런데 또 막상 예쁜 얼굴이 죽상이 되어 있자 굳이 그래야 하나 싶기도 했다.
검지로 이마를 툭 치며 말했다.
“답하긴 뭐라고 답합니까? 결혼할 사람이 있는데.”
“거절했다고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진짜로요?”
믿기 힘들다는 반응이었다.
강혜영을 쫓았던 자신을 긴 시간 지켜봐 왔기에 그런 것이겠지.
“저는 누구처럼 거짓말하지도 않고 숨기지도 않습니다.”
“미안해요.”
주상혁이 말했다.
“드레스는 그 정도면 된 거 같은데…… 일어나요,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갑시다.”
* * *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장민주의 다리 위에 앉아 있던 주예빈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올해로 네 살배기 주예빈은 다행히 주상혁이 아니라 장민주를 닮아서 미래가 기대되는 귀여운 소녀였다.
장민주가 답했다.
“어떻게 되긴 그대로 결혼했으니까 우리 예빈이가 태어났지.”
“아빠가 화 안 내써?”
“그래, 오히려 그 뒤에 꼭 안아 줬지.”
“왜? 왜? 안아 줬는데?”
“그야 엄마를 누구보다 사랑하니까.”
장민주의 ‘결혼썰’을 듣던 주예빈이 말했다.
“그러면 나도 아빠랑 결혼할래.”
장민주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건 안 되는데?”
“싫어! 예빈이도 아빠랑 결혼할 거야.”
주예빈이 다리에서 벗어나서 바닥을 쾅쾅 찍으며 고집을 부리자 장민주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똑같이 따라 했다.
움찔한 주예빈이 제 딴에는 최고로 나쁜 말을 쏟아냈다.
“엄마 싫어! 바보!”
“응,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주예빈이 바닥에 드러누워서 떼를 써도 장민주의 고집은 단호했다.
밖에서 탕약을 달이던 주상혁이 점심때가 되자 주주랑 함께 들어왔다.
“예빈이는 왜 또 바닥 청소를 하고 있습니까?”
“글쎄, 커서 당신이랑 결혼한다잖아요.”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예요, 당연히 안 된다고 했지.”
“그럴 때는 그냥 져 주면 되지, 꼭…….”
“세상에 자기 남편을 양보하는 여자가 어딨어요!”
“누가 양보하래요?”
“아빠!”
바닥을 뒹굴면서 울던 주예빈이 주상혁의 품으로 쏙 안겼다.
주예빈이 슬그머니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 아빠랑 결혼할래.”
장민주의 딸 아니랄까 봐 그것참 요망하다.
어려서 마냥 귀엽긴 해도 자기의 무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럴까?”
“응.”
주예빈이 언제 그랬냐는 듯 헤실헤실 웃었다.
장민주가 버럭 말했다.
“바람피우지 마!”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