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8
Book 2 Chapter 3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주상혁은 곧이어 일행의 끝에 닿을 수 있었다.
책임감 때문인지 제일 뒤에서 뛰고 있던 송치수가 주상혁을 반겼다.
“무사했군.”
“보기보다는 별거 없더라고요.”
송치수가 소리 없이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중에 주상혁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쿵. 쿵. 쿵.
송치수가 지축을 울리는 소리에 반응했다. 눈으로는 아직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아마 그 녀석 헤비 간트가 쫓아오는 소리일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 것 같나?”
“이십 분은 뛰어야 할 겁니다.”
송치수 일행이 달리기 시작한 지 벌써 이십 분이 넘었다.
이제 절반 뛰었다는 말이다.
주상혁이 송치수의 허리에 들린 한혜지를 흘기고는 말했다.
“힘드시면 제가 들까요?”
“미안하군.”
주상혁이 달리며 자세를 낮추자 송치수가 주상혁의 어깨에 한혜지를 올려놨다.
“자, 잠깐만요.”
한혜지의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일단 짊어진 주상혁이 허리를 펴고 물었다.
“예? 뭐가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하면 좋으련만 뭔가 얼굴을 숙인 채 별말이 없는 한혜지.
솔직히 한혜지가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딱히 별말은 하지 않았다.
한혜지를 넘겨받는 사이 보이지 않던 헤비 간트가 작게나마 보이기 시작한 이유였다.
쿠오오오오오!
고개를 돌려 헤비 간트를 확인한 송치수가 말했다.
“다리를 절뚝이는군. 자네 때문인가?”
“다리를 다치면 못 쫓아올 줄 알았거든요.”
근데 실수였나보다.
헤비 간트는 잔뜩 화가 났는지 절뚝이면서도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었다.
가로막는 나무는 몸으로 부숴 버리고 걸리적거리는 간트는 날려 버리며 직진, 그대로 직진이었다.
‘어떻게 하지…… 반대편 다리도 손봐 줘야 하나?’
주상혁이 진지하게 생각에 잠기고 잠시 후였다. 한혜지가 말했다.
“저 근데 말이에요. 원래 고릴라는 저렇게 뛰지 않아요?”
주변에 적막이 흘렀다.
“어…….”
주상혁이 잠시간 생각하다가 뻘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그러네요……?”
진맥으로 본 사혈을 공격한 탓이라고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고릴라는 원래 저렇게 뛴다.
주상혁이 지나가는 시선으로 송치수를 슬쩍 바라보자 송치수가 말했다.
“큼……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걸 깜박했구만.”
머쓱한 얼굴을 해 보이는 송치수를 주상혁은 애써 못 본 척했다.
고릴라가 어떻게 뛰는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별 효과가 없었단 거잖아?’
생각보다 심각한 이야기였다.
주상혁의 공격은 정확하게 들어갔었다. 그런데도 치명타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
‘잠깐의 마비 정도라…….’
분명히 지금 같이 일 분 일 초를 다투는 상황에서는 이마저도 충분한 효과겠지만, 눈에 혈안이 돼서 쫓아오는 저 간트 무리에 뛰어들어가 다시 빠져나올 수고를 하기에는 아쉬운 효과인 건 사실이었다.
주상혁이 뒤편에서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는 헤비 간트를 다시 슬쩍 바라봤다. 그새 제법 거리는 좁혀져 있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십 분은 무리란 말이지…….’
길어 봐야 오 분쯤 지나면 추월당할 거리였다.
‘뭔가 없나? 진짜 아무것도 없어?’
주상혁이 삼 분쯤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있자 한혜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 씨!”
“아, 네!?”
“저기 좀 봐요.”
주상혁이 한혜지의 손가락을 확인했다.
‘뒤? 뒤에 뭔 일이 있나?’
아무리 빨라도 벌써 따라잡힌다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추측을 하며 주상혁이 뒤편을 슬쩍 바라봤다가 잠시 후 발을 멈췄다.
“뭐야, 어째서……?”
심각해진 얼굴로 한참을 뒤편을 바라보던 주상혁이 한혜지에게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멈춰 서던데요?”
“갑자기…….”
눈이 돌아가서 쫓아오던 녀석들이 추격을 멈추고는 노려만 보고 있다.
“그러니까 저기에서 멈춰 선 게 맞죠? 더 쫓아온 건 아니고?”
“네.”
주상혁이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에 뭔가가 있다는 건가? 녀석들을 멈춰 세울 만큼 대단한 게?’
한혜지의 말을 듣고 주상혁이 주변을 살펴봤지만, 도저히 그럴만한 건 없었다.
‘혹시 다른 종의 몬스터라던가?’
잠깐 생각했지만, 주상혁이 곧이어 그 생각을 접었다.
B급 던전이나 A급 던전처럼 하루가 아니라 며칠씩 걸려서 클리어하는 규모라면 다른 종류의 몬스터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는 C급 던전이다. 두 마리 이상의 몬스터가 존재하긴 힘들다. 몬스터와 몬스터끼리도 적대 관계가 존재하는데 이좁은 공간에서 각기 다른 두 종의 몬스터가 같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주상혁이 간트를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돌아섰다.
‘이상해 거기에 도착하려면 좀 남았는데…….’
좀이 아니다. 전력으로 달렸을 때 못해도 십 분 이상.
주상혁이 나무 위에서 봤던 그것과 관계가 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주상혁이 한창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겁에 질린듯한 박상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 준혁 씨.”
“네!? 무슨 일 있어요?”
주상혁이 박상운의 목소리에 고개를 옮기자 숲속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뒷걸음치는 박상운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저기!”
철퍼덕 엉덩방아 찧는 박상운의 손가락 끝을 주상혁이 확인했다.
부스럭부스럭.
양옆의 풀숲에서 어째서인지 불안한 소음이 들려왔다.
* * *
간트는 기본적으로 개별 행동을 하는 습성을 가진 몬스터다. 그 때문에 일반적으로 무리를 짓더라도 두세 마리가 고작.
이건 그동안 수십 년에 걸친 경험담을 토대로 만들어진 정보이니 거의 불변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이 던전에서는 그것이 통용되지 않고 있었다.
수십 년의 데이터가 이곳에서만 어떠한 이유로 변화한 것이다.
주상혁은 당연한 말이지만 도망치는 순간에도 이것이 줄곧 의문이었다.
부스럭부스럭.
그리고 울창한 숲속 그늘진 곳에서 나타나는 녀석을 본 순간 주상혁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Lv.88 청운해태.』
『Lv.83 청운해태.』
『Lv.78 청운해태.』
『Lv.76 청운해태.』
이 녀석들 때문이라고 말이다. 간트들은 이 녀석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무리를 지었던 것이었다.
무려 5m에 육박하는 해태가 4마리.
레벨도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전설에서나 들어봤을 영물의 등장에 주상혁이 인상을 구겼을 때였다.
“이건…….”
“해태……죠?”
녀석들을 본 공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튀어나온 아랫송곳니와 도깨비의 눈을 빼닮은 듯한 커다란 눈 틀림없는 해태였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야말로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져 왔다.
위압감에 밀린 일행이 주상혁이 있는 곳까지 자연스럽게 몰려 등을 맞댔다.
‘어쩌지……?’
이제 와서 침을 놓든 보충제를 먹든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저 새끼들 왜 이쪽으로 안 오나 했더니…….’
이리 떼를 피하자고 호랑이 굴로 뛰어든 격이 되어 버렸다.
송치수가 말했다.
“그런데 준혁 군, 이 녀석들 어째서 공격해 오지 않지?”
“글쎄요…….”
주상혁 일행은 네 마리의 해태에게 벌써 포위당해 서로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신세였다.
도주로 따윈 이미 진작에 사라진 상태였다.
그런데 해태 녀석들은 어째선지 주상혁 일행을 공격해 오지 않고 있었다.
“제발 아까와 같은 이유만 아니면 좋겠는데요…….”
하지만 항상 불길한 예상은 빗겨 가지 않는 법.
쿵…… 쿵…….
주상혁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 * *
『Lv.? 청운해태.』
처음이다.
주상혁의 눈으로 레벨을 확인할 수 없는 존재의 등장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그 높게만 보였던 외할아버지 정지호도, 그보다 조금 더 강했던 전동욱도, 그간 주상혁의 눈에는 정확히 레벨이 측정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일까?
눈앞의 재앙의 깊이가 도저히 가늠되지 않았다.
‘이 녀석이 보스인가?’
푸른색 안개를 이끌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거대한 해태.
녀석을 본 주상혁이 송치수에게 말했다.
“죄송하네요, 저 때문에…….”
처음 정했던 대로 입구로 뛰어가서 사생결단을 했거나, 그도 아니면 포위당했던 곳에서 헤비 간트를 집중 공략했다면 어쩌면 공대원 몇 명 죽더라도 살 사람은 살았을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주상혁의 결정은 최악의 선택이 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해태의 커다란 눈알이 주상혁과 일행을 바라봤다.
‘미치겠네, 진짜…….’
청운해태의 거대한 앞발이 천천히 들렸다.
차마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끝까지 지켜볼 용기가 사라진 주상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부우우우웅.
그다음 순간 느껴지는 건 죽음에 이를 만한 고통이 아닌 원인 모를 엄청난 바람이었다.
그대로 날아가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강력한 풍압이 전신을 강타하자 주상혁이 온 힘을 다해 버텼다.
바람이 멈추고 소리도 들리지 않자 주상혁이 슬쩍 눈을 떴다.
‘어째서지……?’
진실을 확인한 주상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주상혁이 살아 있는 이유는 둘째 치고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
주상혁뿐 아니었다.
그건 바람에 버티지 못해 쓰러진 일행들도 마찬가지 같았다.
“헥헥헥…….”
사신처럼 느껴졌던 청운해태가 발라당 드러누워 배를 까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침묵.
돌아가는 상황이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하기 불가능해지자 장내는 해태의 ‘헥헥’거리는 소리 말고는 한참이나 침묵이 감돌았다.
주상혁도 마찬가지였다.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을 뿐 섣불리 별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의외로 한혜지였다.
“음…… 얘네 혹시 안전한 거 아니에요?”
주상혁도 이쯤 되니 떠올리지 않았던 생각은 아니었다.
당장에 눈 앞에 펼쳐진 저 모습에서 공격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멋대로 단정 짓지도 못하고 있었다. 바로 녀석의 레벨 때문이었다.
‘‘?’라니 얼마나 높은 거지?’
실제로 방금 드러누우면서 생긴 풍압에 쓸려나갈 뻔했던 주상혁으로서는 더욱더 속단할 수 없었다.
송치수도 결국 한마디 했다.
“이렇게 된 거 실험해 볼 텐가?”
주상혁이 해태들의 상태를 보고서 말했다.
“실험이요?”
“확인해 보는 거지 이 포위망을 빠져나가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야.”
그야말로 간 큰 실험이었다. 하지만 한혜지도 그렇고 송치수도 그렇고 공대원의 의견이 연달아 나오자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는지 주상혁이 말했다.
“그럼 이렇게 된 거 실험하는 김에 저 녀석을 노려볼까요?”
주상혁의 시선은 제법 먼곳을 향하고 있었다.
강 건너 불구경 하고 있는 헤비 간트였다.
* * *
한혜지가 말했다.
“헤비 간트를요?”
“네.”
“솔직히 다시 저 무리로 뛰어 들어간다고 해서 무사히 헤비 간트를 처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성공만 하면…….”
“탈출할 수 있다는 말이죠?”
“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해태 녀석들이 신경 쓰이긴 해도 헤비 간트만 공략에 성공하면 무사 귀환도 꿈은 아니었다.
주저하던 일행들이 속속들이 목소리를 냈다.
“저는 좋습니다. 가능하면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달까요…….”
박상운의 뒤를 이은 건 노일현이었다.
“이렇게 된 거 미친 셈 치고 해 보지.”
“나도 그럼 동의.”
“저도 무섭긴 하지만요.”
주상혁이 마지막으로 송치수를 봤다.
송치수가 주상혁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는 자네가 할 텐가?”
“예. 근데 그전에.”
주상혁이 가방에서 보충제를 꺼내 송치수에게 넘겼다.
“똑같이 배분해서 드세요.”
이미 제법 복용한 박상운의 경우라면 효과가 별로 없을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이라면 꽤 효과를 볼 것이었다.
“이게 뭔가?”
“영약입니다. 사실 전에 얻은 영약 조금 남아 있었거든요.”
자기 몫의 보충제를 받은 한혜지가 주상혁을 바라봤다.
유적에서 얻은 영약은 주상혁의 거짓말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드세요.”
끄덕.
한혜지가 보충제를 입에 털어 넣는 모습이 보였다.
『Lv.43 한혜지.』
‘제법 효과가 있네.‘
박상운을 제외한다면 한혜지를 포함한 일행 전부가 3레벨 이상씩 올랐다.
“자, 그럼…….”
주상혁의 말에 공대원 전원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준비했다.
헥헥헥.
주상혁이 등 뒤에서 여전히 벌러덩 드러누워 있는 청운해태를 확인한 뒤에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네 마리의 작은 해태를 순서대로 확인했다.
여전히 차분하게 앉아서 바라보고 있는 해태를 확인한 주상혁이 한혜지를 허리춤에 들고는 외쳤다.
“가요!”
주상혁이 일행과 함께 뛰기 시작하고 거의 동시였다.
옆으로 네 가닥의 바람이 거칠게 불어닥쳤다. 형체조차 확인할 수 없는 속도였다.
채 10m도 지나지 못해서 다시 멈춰선 주상혁이 주변을 서성이는 해태를 긴장한 얼굴로 바라봤다.
‘자, 어쩔 테냐…….’
털푸덕.
다행히 네 마리의 해태는 주상혁 일행을 빙글빙글 주시하며 돌다가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휴…….”
“준혁 군.”
주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놓아 줄 마음은 없는 것 같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네요. 이 녀석들은 저희를 죽일 생각까진 없는 거 같아요.”
송치수의 말에 답한 주상혁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근데 목적이 뭐지?’
목숨이 목적이 아니라면 도대체 해태의 목적이 무엇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여흥도 아닌 거 같고…….’
고양이가 생쥐를 가지고 놀 듯 즐기는 듯한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주상혁의 생각이 깊어졌을 때였다.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걸까요?”
주상혁이 한혜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왜 일단 던전에서 나오긴 했어도 해태는 우리가 알기로는 영물이잖아요.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 이러는 걸 수도…….”
“바라는 거라…….”
한혜지는 도중에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말끝을 흐려 버렸지만, 주상혁의 표정은 그럴싸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시도해 볼 가치는 있을지도?’
조금 전으로 확실해졌다.
주상혁 일행이 해태를 완력으로 처리할 확률은 제로.
이렇게 된 거 가능성만 있다면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시험해 볼 가치는 있었다.
‘근데 바라는 거라고 해도 말이지…….’
주상혁이 머리를 싸매고 한참을 생각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반려동물도 아니고 오늘 처음 만난 녀석의 마음속까지 떠올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자포자기 심정으로 주상혁이 길을 가로막는 해태의 앞까지 걸어갔다.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거냐?”
“…….”
픽.
혹시나 아주 약간은 답해 주길 기대했던 자신이 우스울 뿐이었다.
주상혁이 포기하고는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할짝.
해태의 혓바닥이 주상혁의 볼을 살짝 핥고 지나갔다.
깜짝 놀란 주상혁이 해태를 바라보자 해태의 눈빛은 따뜻한 감정을 비치고 있었다.
‘어디를 보는 거지?’
주상혁이 해태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돌아섰다.
헥헥헥.
녀석이 바라보는 청운해태를 보고 잠시간 굳어 있던 주상혁이 갑자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깐만 다녀올게요.”
“준혁 군 기다리게!”
“준혁 씨!”
주상혁의 돌발 행동에 한혜지와 송치수가 급히 움직였다. 멈춰 세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흠칫.
해태 한 마리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르릉.
해태의 처음 보는 공격성에 두 사람이 슬쩍 겁먹고 물러났다.
소란에 멈춰선 주상혁이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걱정 마세요. 이거 봐요, 이 녀석들도 보내 주잖아요.”
주상혁은 이미 해태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럼에도 해태들은 주상혁을 막는다거나 할 기색은 없었다.
주상혁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걸음 끝엔 거대한 청운해태가 있었다.
* * *
일행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청운해태에게 걸어가는 주상혁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하씨…… 진짜 나도 미쳐 버린 건가?’
근데 솔직히 말해서 이 녀석들이 원하는 거라고는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주상혁이 폴짝 뛰어 청운해태의 꼬리를 타고 청운해태의 배 위로 올라섰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반응이 없네.’
싫어할 거라면 바로 반응 좀 해 주면 고마울 것이건만 청운해태는 주상혁이 배 위로 올라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발라당 드러누운 자세 그대로였다.
마침내 해태의 가슴께까지 이동한 주상혁이 침을 꼴깍 삼켰다.
한참을 망설임에 주저하던 주상혁이 마침내 움직였다.
“어때!? 어떠냐 이 댕댕이 녀석아!”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주상혁을 미친놈이라고 할 게 뻔했다.
주상혁이 다름 아닌 해태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태의 가슴에 무릎 꿇고 그루밍을 하던 주상혁이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기분이 나쁘면 지금이라도 단박에 죽여 주면 좋으련만 별 반응이 없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주상혁이 제정신을 유지하기 슬슬 힘들어질 무렵이었다.
“어……?”
주상혁이 멈칫하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문뜩 사방에 깔렸던 안개가 어느새 짙어져 있었다.
‘착각은…….’
아니었다.
주상혁이 자신의 손을 바닥을 바라봤다.
점점 흐려지는 게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손이 완전히 안개에 삼켜지자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어쩌라는 거지…….”
그저 온통 세상은 푸른색.
이미 눈으로 무언갈 보고 행동하기에는 한 치 앞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헥헥헥.
‘녀석의 숨소리인가?’
아까처럼 천둥소리처럼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녀석의 숨소리가 분명했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한 걸음 걸으려던 주상혁이 멈칫했다.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함정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자신이 방금 했던 행동 때문에 벌을 내리는 것이라면 함정이 분명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망설이던 주상혁이 마침내 걷기 시작했다.
시각이 사라지고 오로지 청각에만 의존해 걷는다는 게 몹시 불안하고, 두렵고, 혹여 어딘가로 떨어질까 맹인의 심정이 되어 육수를 줄줄 뽑아냈지만 그럼에도 걸었다.
흐릿하게 들리는 녀석의 숨소리가 걸음을 내디딜수록 점차 커지는 것만이 주상혁이 느끼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몇 초.
몇 분.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는 모른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를 끝없는 안갯속을 계속 걸어 나가다가 주상혁이 멈칫했다.
“안개가…….”
옅어져 있었다.
주상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좌측이든 우측이든 여전히 짙었지만 한군데.
자신이 걷고 있던 곳만 길이 난 것처럼 안개가 옅어져 있었다.
헥헥헥.
주상혁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 안개의 끝이 출구일지 아니면 지옥으로 시작일지 모르지만 달렸다.
녀석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여긴…….”
안개를 빠져나온 주상혁은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눈 앞에 펼쳐진 구조물 때문이었다.
“유적…….”
주상혁이 본래 향하려고 했던 그곳이었다.
나무 위에서 발견했던 유적이 어쩌다 보니 펼쳐진 것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주상혁은 분명히 청운해태의 배 위에 있었다.
높낮이는 물론 굴곡 없는 직선로를 그냥 걸었을 뿐인데 주상혁은 지금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주상혁이 제자리에 굳어 있을 때였다.
왕!
주상혁을 깨우는 소리가 있었다.
번뜩 정신차린 주상혁의 고개가 들려오는 소리에 황급히 움직였다.
『Lv.? 청운해태.』
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주상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까 그 녀석이냐?”
왕!
머리 위의 정보를 보면 확실했지만 구태여 물어본 이유는 주상혁이 기억하던 녀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몰티즈나 푸들 정도 되려나?’
10m는 거뜬했던 녀석치고는 상당히 귀여워진 모습이었다. 도저히 같은 녀석이라고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왕!
“따라오라고?”
주상혁이 두어 걸음 앞서 걷더니 자신을 바라보며 한 번더 짖는 청운해태를 보고는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청운해태를 따라 유적 입구로 들어가던 주상혁이 긴 유적의 통로를 걷다가 중얼거렸다.
‘역시 착각이 아니야…….’
나무 위에서는 그저 비슷한 유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유적 안으로 들어와 걷다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일전에 조난당했던 유적과 이 유적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사람에게서 만들어진 유적이었다.
새하얀 재질의 석벽도 그렇고 통로에 낀 이끼나 넝쿨들이 그 증거였다.
‘그럼 이 녀석이 파수꾼일까?’
아마도 거의 확실할 것이다.
구태여 주상혁을 이곳으로 안내한 것도 그렇고 제집처럼 앞장서는 것도 그렇다.
‘근데 그렇게 따지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단 말이지…….’
스톤골렘은 주상혁에게 철저하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줬었던 것에 반해 어째서 이 녀석은 주상혁에게 호의를 보이느냐는 것이었다.
왕!
주상혁이 녀석이 짖는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해태가 짖는 곳을 본 주상혁이 말했다.
“여기도 밟지 말라고?”
왕!
앞장서 걷던 녀석은 이번으로 벌써 세 번째 같은 경고를 보내왔다.
“밟으면 어떻게 되는데?”
호기심이 생긴 주상혁이 장난스럽게 질문했을 때였다.
해태 녀석의 눈이 무섭게 빛나더니…….
구구구궁.
갑자기 유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주상혁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유적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통로 벽을 짚었을 때였다.
푹푹.
기다란 창이 솟아 나오더니 주상혁의 전신을 꿰뚫었다.
“헉, 헉…….”
주상혁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황급히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좀 전에 온몸을 꿰뚫렸던 전신은 다행히 멀쩡했다.
주상혁이 식은땀을 닦아 내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환각……이란 건가?”
그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됐다.
처음에 들어왔던 때처럼 조용한 통로도 그렇고 방금 꿰뚫렸지만, 상처 하나 없는 몸도 그랬다.
누가 그랬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주상혁이 품 안에 있는 청운해태를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로 확인했다.
할짝.
“그래, 괜찮아.”
주상혁이 조심스럽게 턱 끝을 핥는 해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이 조금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애초에 물어본 건 자신.
‘덕분에 다시는 밟아 보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주상혁이 말했다.
“가자.”
청운해태의 안내를 따라 다시 이동하기 시작하고 제법 시간이 흘렀다.
낯익은 광경이 펼쳐졌다.
넓은 원형 공터와 가운데 있는 게이트 그리고 천장에는 스테인글라스 재질의 천장이 존재했다.
천장을 올려다보던 주상혁의 시선이 맞은편에 보이는 2m 남짓의 작은 문을 향했다.
“이번에도 폴라나?”
제작자가 같다면 같은 식물을 준비해 놓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을 유지한 채 주상혁이 문 앞까지 도착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열쇠가 없는데…….’
저번에도 힘으로 하려다가 고생했던 기억이 뒤늦게 떠오른 주상혁이 게이트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해태를 바라봤다.
‘저번엔 스톤골렘의 몸 안에 있었는데…….’
혹시 해태의 몸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주상혁이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볼 때였다.
해태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주상혁을 바라봤다.
흠칫 놀란 주상혁이 황급히 문을 향해 돌아섰다.
“괜히 문제를 일으킬 건 없으니까…….”
애초에 녀석의 몸 안에 있다 하더라도 방법이 없다. 해를 가하려다가 되레 당할 게 뻔했다.
“그럼 결국…….”
주상혁이 가볍게 양손을 문에 올렸다. 그러고는…….
“끄으으으응.”
온 힘을 다해 먼저 문을 밀어본 주상혁이 꿈쩍도 하지 않는 문을 보고 금세 수긍했다.
‘그러시겠지.’
전에는 좌우로 열렸었던 것 역시 기억하고 있다.
‘한 번 당했으면 족하지.’
주상혁이 이번엔 열쇠가 들어가는 균열에 손가락을 넣고는 힘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헉, 헉…….
손가락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실랑이를 벌이던 주상혁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주상혁이 해태를 바라봤다.
별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해태가 주상혁을 바라봤다.
주상혁의 쪼그려 앉아서 이리오라는 듯한 신호를 보내자 해태가 신이 나서 달려왔다.
청운해태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잠시간 째려보던 주상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Lv.? 청운해태 (정상).』
‘없네?’
같은 파수꾼인데 어째선지 녀석의 몸 안에는 열쇠가 없었다.
주상혁이 해태 녀석을 보고는 물었다. 녀석이라면 뭔가 알지도 모를일.
“열쇠 어디 있는지 알아?”
주상혁의 물음에 해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선지 이해를 못 하는 듯한 해태의 말에 주상혁이 쉽게 풀어 말했다.
“저거 문 열어야 하는데 열쇠 어딨냐는 말이야.”
왕!
해태가 뭔가 떠올린 듯 반응하자 주상혁이 신이 나서 장단을 맞춰 줬다. 역시 영물이라더니 기억력도 좋으시다.
“오 뭔가 떠오른 거야?”
주상혁이 설레는 마음으로 녀석을 지켜볼 때였다.
해태 녀석이 갑자기 앞발을 굴렀다.
“오 그 아래 뭔가가 있는 거야?”
주상혁이 땅이라도 파 볼 생각으로 허리를 숙였을 때였다.
쌔-앵.
주상혁이 갑자기 엄청난 돌풍에 얻어맞고 뒤로 나자빠졌다.
콰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뜯겨 나간 30cm 두께의 철문을 바라보며 주상혁이 돌처럼 굳었다가 뒤늦게 떨어진 돌자갈에 이마를 얻어맞고 정신을 차렸다.
“딸꾹.”
* * *
‘그러고 보니 레벨이 보통 레벨이 아니긴 하지…….’
주상혁이 놀라운 장면을 만들어 낸 녀석을 바라봤다.
해태 녀석은 칭찬이라도 해 달라고 꼬리로 프로펠러를 만들고 있었다.
‘하긴 열쇠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네.’
파수꾼인 청운해태를 해치울 수 있을 정도의 각성자면 본인의 힘으로 부수면 될 일이었다.
딸꾹.
딸꾹질을 한 주상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나저나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베이칼.』
『폴라나.』
『멜팅.』
주상혁이 문짝이 뜯긴 화원 안에는 다름 아닌 주상혁이 필요한 재료들만 들어가 있었다.
‘마치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 같단 말이지…….’
저번에도 그렇지만 이번에도 공교롭게 딱 필요한 타이밍에…….
마냥 좋아해도 될지 수상함마저 들었다.
주상혁이 베이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왕! 왕!
어디론가 뛰어간 해태 녀석의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상혁이 해태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화원 구석에 보이는 이름을 본 주상혁이 그곳으로 향했다.
왕!
주상혁이 다가가자 해태가 반겼다.
해태가 물고 있던 물건을 발 앞에 내려놓았다. 주상혁도 상당히 낯이 익은 물건이었다.
『??? 일지.』
폴라나 포션을 만들 때 주상혁은 일지의 도움을 적잖게 받았던 기억이 있다.
주상혁에게는 상당히 의미 있는 물건이었다.
주상혁이 해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기쁜 얼굴로 책을 가방에 집어넣은 주상혁이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왕!
뒤편에서 해태의 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상혁이 반쯤 돌아섰던 몸을 돌이켰다.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해태가 보였다.
‘저번에는 일지 말고는 딱히 챙길 게 없었는데……?’
하지만 해태 녀석이 저렇게 반응하는 것도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의구심에 해태가 올라가 있는 책상 앞까지 이동한 주상혁이 의외의 물건을 발견하고는 집어 들었다.
『새벽의 로자리오.』
「차원의 마나가 가득 담긴 로자리오다. 천재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마나를 신성력으로 치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새벽의 기운이 최대치까지 차오르면 신비로운 일이 일어난다.] [마나 +15] [치유력 +30]“이건 아티팩트지……?”
로자리오를 집어 든 주상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던전에서 획득한 아티팩트는 일차적으로 해당 계열의 공대원에게 주는 것이 관례.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이 자리에 한혜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기준대로라면 혜지 씨한테 주는 게 맞는데…….”
그러나 지금만큼은 주상혁이 꿀꺽해도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근데 혜지 씨에게 이걸 주면 앞으로 도움은 될 거란 말이지…….’
한혜지는 일단은 주상혁과 한동안은 동업을 하기로 했다.
강해지면 주상혁도 상당한 이득이었다.
“음…….”
주상혁이 어느 쪽이 이득인지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주상혁의 머릿속으로 장면 하나가 밀려 들어왔다.
이미 한번 느껴 본 적 있는 감촉이었다.
환각에서 깨어난 주상혁이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해태를 바라보고는 픽 웃었다.
“알았어. 그러면 되잖아.”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답을 모른다면 자칭 영물이라는 이녀석의 판단을 따라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주상혁이 가방에 로자리오를 집어넣고는 돌아섰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이제 진짜 베이칼을 채집할 시간이었다.
* * *
베이칼을 세 시간 정도 정신없이 채집하던 주상혁은 한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그건 바로 인벤토리 안에 가방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빈칸에 바로 적재해야 하나……?”
주상혁은 평소에 인벤토리에 가방을 몽땅 넣어서 다닌다. 이유는 주상혁이 주로 취급하는 포션과 약재의 경우 그냥 적재하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하나에 한 칸씩 차지하는 아티팩트나 침통 같은 물건도 가방에 들어가면 한 칸에 적재할 수 있기 때문에 무척이나 효율이 좋았던 것이다. 그런데…….
시기가 안 좋았다.
특히 이번의 경우 항상 서른 다섯 칸 중 서른 칸을 채우고 다니던 가방이 포션이나 레시피 등 다른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퀘스트 깨는 데는 충분하니까.’
주상혁이 효율을 최대로 이끌어 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떨쳐 냈다.
어차피 아까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기 때문이었다.
모든 채집을 완료한 주상혁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얼마나 지난 거지?”
그러고 보니 던전에 들어오고 간트 무리를 만나기 직전 한번 확인한 거 말고는 시간을 체크한 적이 없었다.
“어디 보자 대략 여덟 시쯤 됐으려나?”
마지막에 확인했을 때가 오후 두 시쯤이었으니까 그 뒤로 이곳까지 오고 약초를 캔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못해도 오후 일곱 시는 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3:23…….
“세 시 이십삼 분?!”
믿을 수 없는 정보가 눈으로 들어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주상혁이 휴대폰을 바라봤다.
“고장 났나?”
불과 한 달 전쯤에 산 핸드폰이지만 도저히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주상혁이 돌연 구석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구석에서 쪼구려 자고 있는 해태가 보였다. 녀석을 바라보던 주상혁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리 영물이라도 시간의 흐름을 제어한다니 너무 억측이었다.
“나 이제 나가려고 하거든?”
주상혁의 말에 해태가 잠에서 깨어나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녀석의 토실한 엉덩이를 보며 걷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다들 무사하려나?”
해태 녀석들이 있기는 해도 언제든 달려들 것처럼 몰려 있던 간트 녀석들이 존재했다.
솔직히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었다.
왕!
걱정 말라는 듯 답하는 해태의 목소리에 새삼스러운 눈으로 녀석을 보던 주상혁이 픽 웃었다.
딱히 답을 바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묘하게 위안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
주상혁이 화원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통해 다시 공터로 나왔을 때였다.
폴짝폴짝 게이트 위로 해태 녀석이 뛰어 올라가는 게 보였다.
주상혁이 해태를 따라 게이트 위로 향하는 계단에 오르려 할 때였다.
구구구궁.
공터가 흔들리며 심상치 않은 빛이 게이트 위에서 새어 나왔다.
주상혁이 빠르게 게이트 위로 몸을 옮겼다.
게이트 중앙에는 해태 녀석이 서 있었는데 빛은 녀석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전신을 감싼 푸른빛이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자 주상혁이 자신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가 슬쩍 한쪽 눈을 떴다.
파직, 파지지직.
주상혁이 해태의 옆에 생겨난 포탈을 보고 말했다.
“대단하긴 하네…….”
설마설마하니 게이트도 자의적으로 여닫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일 줄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왕!
유적의 입구로 향하는 포탈에 쏙 들어가는 해태를 뒤따라 주상혁이 포탈에 몸을 실었다.
순식간에 입구로 도착한 주상혁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투덜거렸다.
“또 여기로 가는 거냐?”
저 멀리 푸른 안개 사이로 들어가는 해태가 엉덩이가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주상혁이 청운해태에게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은 지금 심각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시퍼렇게 짙은 안개가 끼더니 청운해태와 주상혁의 모습이 사라진 이유였다.
한혜지가 말했다.
“구해야 해요!”
자신을 가로질러 뛰쳐나가려던 한혜지를 송치수가 막아섰다.
“나도 그 의견은 동의하네만 어떻게 구한다는 말인가? 준혁 군이 어디로 사라진 줄 알고?”
“그건…….”
주상혁이 안개에 삼켜진 뒤 일행은 곧바로 주상혁을 불러봤다.
그러나 역시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비참한 말이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주상혁은 분명히 일행 중에서 제일 강하다.
그건 송치수가 어제와 오늘 던전을 함께 돌아보며 몸으로 느꼈으니 정확했다.
하지만 주상혁과 함께 사라진 해태는 강하다는 차원의 단어로 형용하기 힘들었다.
그야말로 괴물.
영물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주상혁과 함께 사라진 녀석이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주상혁은 진작에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송치수가 심란한 마음으로 한혜지를 멈춰 세웠을 때였다.
“다행히 모두 무사하셨네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의 고개가 급하게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옅어진 안갯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준혁 군!”
송치수가 뛰쳐나와 주상혁을 반겼다. 이성적으로 한혜지를 말렸지만 주상혁의 위기를 가장 애석하게 생각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무사했군.”
“네 의외로 말이 잘 통하는…… 엑?”
주상혁이 송치수의 말에 청운해태를 찾다가 깜짝 놀랐다. 녀석이 처음 봤을 때처럼 그사이 거대해진 이유였다.
“왜 그러는가?”
“아뇨…… 그냥, 뭐…….”
주상혁이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다.
“별일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면 조그마한 강아지 크기가 아니라 이게 청운해태는 본래 보습일 테니 요란 떨 일도 아니긴 했다.
주상혁이 송치수와는 달리 나오지 못하는 박상운을 보고 말했다.
“거기서 뭐 하세요?”
“그…… 이 녀석들 때문에.”
“아마 이제 나와도 될 겁니다.”
“정말입니까……?”
주상혁이 고개를 들어 청운해태를 바라봤다. 주상혁의 의중을 이해라도 하듯 잠시 후 네 마리의 작은 해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청운해태의 옆으로 이동했다.
해태들의 위협이 사라지자 박상운이 주상혁의 곁으로 달려왔다.
“걱정했습니다.”
주상혁이 살짝 감동했다.
“진짜요?”
“네 이대로 영영 못 나가는 줄 알았잖아요.”
주상혁이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탈출에 대한 이야기였어?’
주상혁이 물었다.
“제가 돌아왔어도 달라진 건 없는데요?”
“음…… 그래도 뭔가 변하긴 했습니다. 턱 막혔던 숨이 편해진 게 말이죠.”
박상운의 말을 들은 주상혁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냥 감이 좋은 건가?’
일단 박상운의 말은 결과만, 놓고 보자면 맞았다.
사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주상혁은 해태들이 자신의 편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청운해태를 올려다보며 주상혁이 말했다.
“여기서 나가려는데 도와줄 수 있지?”
왕!
아까 유적에서 질리도록 들었던 녀석의 울음소리였지만 느껴지는 위압감의 차이는 태산과 같았다.
천둥소리 같은 녀석의 울음소리에 네 마리의 해태가 네 가닥의 번개가 되어 간트 무리를 향해 쏘아졌다.
일방적인 살육의 시작.
해태가 물어뜯으면 간트가 종잇조각처럼 찢겼고 앞발로 때리면 일어나는 전류에 줄줄이 터져나가 다진 고기가 되는 장면은 아군인 줄 알면서도 겁이 다 날 정도였다.
다소 잔혹할 수도 있는 장면을 지켜보던 한혜지가 말했다.
“엄청나네요.”
“그러게요. 생각보다 차이가 더 심하네요.”
가장 큰 청운해태는 나서지도 않았는데도 앞일이 훤하다.
‘그래도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그동안 간트들이 버틸 수 있었던 건 무리를 지은 간트가 해태와 대등한 전력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해태 녀석들이 살려 뒀기 때문이었다. 그 유적을, 그리고 이 던전을 유지하기 위해 말이다.
주상혁이 해태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긴 헤비 간트가 발악하는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꼴좋다, 짜식.”
주상혁은 잊지 않고 있었다.
아까 건너편에서 지켜보며 비웃었던 녀석의 행동을.
* * *
헤비 간트가 죽고 탈출 포탈이 열리자 수백 마리의 간트는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놈들은 놓아 줘도 상관없었지만, 해태들은 그렇지 않았다.
빠짐없이 씨를 말려 버린 네 마리의 해태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이십 분이었다.
피 칠갑을 한 해태들을 본 주상혁이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던 가장 큰 청운해태를 바라봤다.
‘근데 이 녀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주상혁이 자신이 나간 뒤의 녀석들의 운명을 추측했다.
며칠 후 이 던전과 함께 소멸하는 모습.
어쩌면 던전과 함께 소멸하기 전에 뒷정리를 위해 들어온 각성자들에게 당하는 모습.
어느 쪽도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몇 시간 남짓이긴 해도 주상혁을 유독 잘 따랐던 녀석에게 정이 들어 버린 것이다.
헥헥헥.
주상혁이 자신의 앞에 엎드려 있는 거대한 해태를 향해 말했다.
“너 근데 이대로 가면 죽는 건 알아?”
“꾸응…….”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모호한 반응이었지만 주상혁은 녀석이 죽기 싫다는 것만큼은 큼지막한 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고민하던 주상혁이 물었다.
“그럼 아까처럼 작아질 수는 있어?”
그 정도 크기라면 눈에 띄지 않고 키울 수 있을지도 모를 일.
하지만 해태의 답은 애석하게도.
도리도리.
부정이었다.
도리질 치는 녀석의 모습에 주상혁이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너 그렇게 커서는 애초에 이 포탈 통과하지도 못해.”
그런데 그러고 보니 신기했다.
이곳은 C급 던전.
이만한 전투력을 가진 녀석들이 존재하는데 어째서 차원 에너지가 C급 수준이었는지가 의문이었다.
‘또 측정기 오류인가?’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아닌가 순간적으로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럴 걱정은 없었다.
만약 그랬으면 한참 전에 먼저 나간 공대원들이 난리였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생각을 마친 주상혁이 다시 녀석을 바라봤을 때였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청운해태가 주상혁의 얼굴을 커다란 혀로 살짝 핥았다.
주상혁이 침을 소매로 닦아 내고는 한소리 하려고 했다.
“아니, 그러니까…….”
주상혁이 말을 멈추고 달싹이던 입을 끝끝내 다물었다.
‘어……?’
방금까지 옆에 있던 작은 해태 한 마리가 사라져 있었다. 주상혁이 녀석을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청운해태에게 물어보려다가 주상혁이 멈칫했다.
때마침 주상혁의 눈에도 해태 한 마리가 푸른 안개로 변하는 게 보였기 때문.
안개는 청운해태에게 쑥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하나씩 하나씩 녀석의 몸으로 흡수되는 것을 확인한 주상혁이 새삼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기류가 천천히 변하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변하는 거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확실했다.
주변으로 펼쳐진 수백m에 달하는 푸른 안개가 조금씩 청운해태를 기점으로 돌풍을 형성하듯 좁혀 들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적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의 전조라는 것은 확신한 주상혁이 중심의 청운해태를 바라봤다.
별로 당황한 모습 같아 보이진 않았다. 이것이 녀석의 소행이란 말이기에 안심이 됐다.
휘이이이잉…….
주상혁이 청운해태가 하는 짓을 얌전히 지켜보고 있자니 바람은 금새 강력해졌다.
정신 안 차리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돌풍에 주상혁이 어떻게든 돌풍이 잠잠해질 때까지 버티며 기다렸다.
정점을 찍었던 돌풍이 어느 순간 싹 멎었다.
탱그랑.
조금 전까지 자신의 코앞에 서 있던 거대한 해태는 온데간데없었다.
『신령한 기운의 운령팔찌.』
그저 신비로운 문양의 팔찌 하나가 주상혁의 앞에 존재할 뿐이었다.
* * *
어찌어찌 뒤처리한 주상혁이 던전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주상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그렸다.
‘뭐지 어째서……?’
주상혁이 체감하는 바로는 던전에 들어간 지 열 시간은 꼬박 지난 상태.
그런데 어째서인지 밖에는 이른 초여름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점심 무렵에 들어갔으니 한밤중이어야 하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바쁘게 내보낸 것도 혹여나 누나가 던전으로 들어올까 싶어서였는데…….’
그런데 이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주상혁이 던전 앞에서 잠시간 서 있을 때였다.
주상혁을 발견한 송치수가 다가와 말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요, 그건 아닌데…….”
주상혁이 송치수의 손목에 걸린 시계를 보고 말했다.
“혹시 지금 몇 시죠?”
손목시계를 확인한 송치수의 입이 열렸다.
“오후 네 시 오 분쯤 되었군.”
주상혁이 질문과 함께 들여다본 휴대폰 액정에서도 이제 막 네 시 오 분에서 네 시 육 분으로 변하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주상혁이 질문을 바꿔 다시 말했다.
“저 제가 청운해태와 사라졌던 거 있잖습니까?”
“청운해태? 아…… 그 커다란 녀석 말하는 건가?”
“네, 얼마나 걸렸습니까?”
송치수가 턱 끝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했다. 송치수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오 분……? 아니지 그보단 조금 짧았던 거 같기도 한데…….”
송치수가 대략적인 시간을 답했다.
“아마 삼 분쯤 되지 않았나 싶군.”
“삼 분…….”
당연한 말이지만 주상혁은 못 해도 몇 시간을 안개 안에서 보냈다.
진땀을 빼며 안개 속을 걸었던 시간이 천고와 같은 시간같이 느껴졌었으니 착각이 아니었다.
그런데…….
삼 분.
고작 삼 분이란다.
그건 던전에서 베이칼 열 뿌리 캐는 수준의 시간이었다.
주상혁의 표정을 사뭇 진지하게 만들자 송치수가 말했다.
“혹시 약초 때문인가?”
“네?”
“그 왜 오늘은 약초를 캐지 않았지 않은가?”
주상혁이 던전에 들어간 이유는 약초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 송치수를 비롯한 일행 모두가 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주목표인 약초를 캐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다.
이렇게 착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요. 약초 때문이 아닙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인가 보군.”
“죄송합니다.”
송치수가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닐세 비밀 없는 사람이 어딨다고.”
송치수와의 대화를 일단락한 주상혁이 저 멀리 그늘에서 땀을 식히는 일행들을 보고는 말했다.
나가기 전에 기본적인 입단속은 했지만, 기회가 된 김에 마저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른 분들을 잠시 모아 주실 수 있을까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가?”
“네, 아까 드신 영약에 관련한 거니까요.”
송치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금방 데리고 오지.”
* * *
위기의 상황.
보충제를 먹인 것은 목숨이 오고 가고 하던 상황에서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전동욱이 주상혁의 상황 봐 가며 이해해줄 이유 따위 존재할 리 없었다.
전동욱은 송치수의 성장이 다음에라도 나타난다면 주상혁과 연관 지어 생각할 게 뻔했다.
즉, 전동욱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송치수 일행에게도 협조를 구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이었다.
“음…… 그러니까 던전 안에서 먹었던 영약에 대해서 비밀을 지켜 달라는 건가?”
“네, 그렇죠.”
주상혁의 말을 들은 송치수가 노일현과 백진호 두 사람과 눈을 맞췄다.
끔벅끔벅 시선을 주고받던 세 사람이 동시에 ‘픽’ 하고 웃었다.
“어이 형씨, 우리를 뭘로 보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염치가 있지 은인을 팔아넘기진 않는다고.”
오늘 있었던 일은 철저하게 따지면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 던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오히려 고용주에게 도움이 되기보단 짐이 되었다는 것쯤 송치수 일행은 이미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덤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들이 살아 돌아온 건, 어떤 방법을 쓴 건지는 몰라도 주상혁이 청운해태를 구워삶은 덕택이었으니 말이다.
송치수가 말했다.
“걱정 말게, 아무리 이미 공직을 내려 둔 몸이라도 전직 형사였던 놈들이니까. 최소한의 양심은 가지고 사는 인간들이네.”
송치수 일행의 반응을 본 주상혁의 머릿속에서 세 사람의 신용도가 빠르게 상승했다.
“감사합니다.”
“아니 당연한 일이지, 그보다 전동욱이란 자가 누구였지? 묘하게 낯이 익은 이름이긴 한데…….”
만난 지 제법 오래된 탓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듯한 얼굴로 송치수가 노일현을 바라봤다.
“거, 왜 있잖수 전주협회 높으신 분.”
“아, 그러고 보니 그때 면담했던 양반 이름이 그랬던 거 같기도 하군.”
송치수가 주상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다지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던데 뭔가 일이 있는 겐가?”
“네, 있었습니다.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순 없지만…….”
송치수는 형사 일을 하면서 제법 사람 보는 안목도 높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송치수가 보기에 전동욱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젊은 나이에 성공 가도를 달리거나 높은 직함을 가진 사람의 경우 자칫 거만함이 느껴질 법한데 인성 면에서도 그랬고 말투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주상혁과 인물평이 완전히 갈린 것이었다.
고집을 부릴법한데도 송치수가 자신의 의견을 내려놓고 말했다.
“알았네. 일단 전동욱이란 그사람은 특히 더 조심할테니 걱정말게.”
송치수가 노일현과 백진호를 바라보자 두 사람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혜지 씨랑 상운 씨도 부탁할게요.”
“걱정 마세요.”
“저도 입 무겁습니다.”
역시 선별하고 선별한 사람들이기 때문인지 비교적 간단하게 이야기가 마무리됐다.
노일현이 말했다.
“그나저나 정 사장.”
“정 사장? 저 말인가요?”
일단은 정준혁이란 가명을 쓰고 있는 주상혁이 말하자 노일현이 말했다.
“월급 주는 사람이니 사장이지”
주상혁이 픽 웃었다.
“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말씀하세요.”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는데 입에 기름칠 좀 해주나?”
노일현의 말을 재치 있게 알아들은 주상혁이 내리쬐는 햇볕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조금 시간이 애매하긴 해도 소고기나 구울까요?”
* * *
정지원은 인근 카페에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 주상혁이 했던 말 때문이었다.
‘뭐?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으라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차기 대표자리는 굳이 후보를 말해 보라면 경쟁자가 한 명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지원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고작 던전에 같이 들어가는 조건으로 그걸 포기하라니 말도 안 됐다.
던전에 들어가도 딱히 각성자는 성장하지 않는다.
성장하는 것은 오직 게임이나 소설에서뿐.
그런 이득 하나 없는 일에 내려놓기엔 대표직은 정지원이 가진 제일 값진 것이었다.
“까짓거 치사해서 내가 안 들어간다.”
정지원이 얼음이 반쯤 녹은 거피를 빨대로 들이키다가 사레가 들렷다.
“콜록콜록.”
정지원이 못 볼 거라도 본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쟤가 왜 벌써…….’
Pm4:37
커피숍 내부의 시계를 확인한 정지원이 생각했다.
‘이제 네 시간쯤 지났는데?’
보스 운이 좋으면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어제는 던전을 클리어하고도 몇 시간을 안에서 서성였던 녀석이다.
벌써 밖으로 나왔다는 게 의아할 뿐이었다.
정지원이 뒤집어 두었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은 주상혁은 곧이어 정지원이 있는 커피숍 안에 들어왔다.
“야, 여기야.”
정지원의 말에 주상혁이 맞은편으로 와서 앉았다. 주상혁이 피곤한지 소파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뭐야, 급한 일?”
“……”
정지원이 말없이 주상혁을 바라봤다.
‘어릴 때는 그냥 순둥순둥 귀여웠던 거 같은데.’
잘 생각해 보니 아닌 거 같기도 하다.
‘예전에도 간혹가다 갑자기 이상한 데서 진지했던 거 같기도 하고…….’
정지원이 말했다.
“어디 가는 길이야?”
“공대원들이랑 저녁 좀 먹으려고.”
“저녁?”
정지원이 시계를 다시 봤다가 대충 넘어갔다.
다섯 시쯤이면 이르긴 해도 저녁을 하기에 이상한 시간대는 아니었으니까.
“오늘은 빨리 나왔네? 보스 운이 좋았나 봐?”
피식.
정지원이 자신의 말에 의미 모를 옅은 웃음을 그리는 주상혁을 보고 물었다.
“왜 웃어?”
“내가 웃는 것도 허락받아야 해?”
“그건 아니지만, 기분 나쁘잖아.”
주상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스운 뭐 그래, 굳이 말하면 나쁘지 않았지. 좋았다고 그래야 하나?”
주상혁이 정지원의 물음에 답하더니 이번엔 되려 질문했다.
“근데 그거 물어보려고 부른 거? 나 빨리 가 봐야 하는데?”
“그건 아닌데 아까 그 질문 의미가 뭐야?”
“질문? 뭐가?”
정지원이 미간을 구겼다. 자기는 그거 때문에 방금까지 섭섭했는데 주상혁의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다.
“아까 던전에 들어가려면 대표직 관두라며 그거 진심이냐고.”
“아 그거? 당연히 진심이지, 생각은 해 봤어?”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어이없어서 한 말인데 되려 주상혁의 반응이 더 압권이다.
“말이 왜 안 돼?”
뻔뻔해 보이기까지 하는 주상혁의 즉답에 정지원이 말했다.
“넌 대호길드가 우스워 보여?”
“왜 말이 또 그렇게 되는데?”
골 아프다는 듯 주상혁이 말했다.
“그럼 누나는 내가 우스워? 하긴 고작 E급 각성자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지금 말장난하자는 거야?”
“그건 아니고. 거래의 의미를 이해 못 한 거 같다는 말이야.”
평소 항상 졸린 사람처럼 살짝 처진 눈을 유지하던 주상혁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말해 줄 테니 잘 들어.”
“…….”
“대호 길드 굉장한 길드지. 역사와 전통이 있겠지, 그래서 그게 뭐?”
“뭐?”
“난!”
“…….”
“누나 개인하고 거래하고 있는 거야 대호길드가 아니라.”
“뭐라고?”
“누나 자신을 대호길드에서 떼어 놓고 한 말이었다고.”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보아하니 방금까지 그 생각하고 있었나 본데 헛생각했겠네, 잘 생각해 봐 애초에 내가 가지고 있는데 누나가 내려놓을 거보다 가벼울 거란 그 생각 오만일 수도 있지 않겠어?”
주상혁이 카페를 나가고 잠시 후였다.
정지원의 핸드폰으로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주상혁이 보낸 문자였다.
“그리고 한가지 충고하자면…….”
주상혁의 문자를 따라 읽던 정지원이 인상을 팍 구겼다.
“소멸 타임 동안 유적에 들어가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권하지는 않는다고……?”
정지원이 짜증 섞인 중얼거림을 뱉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 * *
다음 날 아침이었다.
정지원은 어제 던전을 양도한 11팀 팀장을 길드 로비에서 기다리다가 조용히 끌고 휴게실로 향했다.
팀장 구병규가 말했다.
“또 던전입니까?”
오히려 반기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어제 새벽에 던전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상혁에게서 문자가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아니요. 이제 던전은 괜찮습니다.”
구병규가 약간 실망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틀간 휴가 못지않은 시간을 보냈으니 당연한 반응.
“그보다 부탁이 있습니다.”
정지원에게서 유적에 대한 설명을 들은 구병규가 답했다.
“네? 어제 거기서 유적이 나왔다고요?!”
정지원이 구병규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주변이나 휴게실 내에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자칫 큰일 날뻔했다.
“진정하시고요. 다른 사람들에게 정보가 들어가서 좋을 건 없겠죠?”
꿀꺽.
구병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지원이 손을 떼주자 구병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데 그걸 왜 들어가지 말라는 겁니까?”
던전 내에서 발견된 유적은 아티팩트를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게 일반적인 것이다.
“함정이 많이 있대요. 듣기로는 살아남기 힘들 거라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발견 못 한 거면 몰라도 발견한 유적을 안 들어갔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만…….”
정지원도 솔직히 말하자면 이 부분이 의문이었다.
‘상혁이가 괜히 그러진 않았을 텐데…….’
“여하튼 안 들어가는 게 좋을 겁니다.”
“하지만 아가씨, 그건 D급 각성자들이니 당연히 그렇게 느꼈을 테고…….”
“D급 각성자요? 그거 진심이세요?”
구병규는 B급 각성자다.
C급 던전이 어느 정도 난이도인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안다.
자신을 포함해 열한 명이 들어간 날에도 심할 땐 부상자가 속출하는 게 C급 던전이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인지 그 팀은 부족한 전력으로 이틀 모두 C급 던전을 무사히 클리어했다.
“그래도 말입니다, 아가씨. 저는 유적을 그냥 버린다는 건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저랑 같이 들어가시죠? 그 안에 엄청난 아티팩트나 영약이 있을지 어떻게 압니까?”
“솔직히 저도 탐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정지원이 유혹을 뿌리치고는 말했다.
“그래도 역시 안 되겠네요. 느낌이 안 좋아요.”
“느낌이요?”
“네, 부탁한 대로 할아버지께도 권해 주세요. 입구 근처는 대충 수색해 봤지만, 위험도가 너무 높아서 유적을 포기해야겠다고.”
* * *
“흐음, 유적이라…….”
정지호의 시선을 받은 정지원이 움찔했다.
정지호가 무슨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괜히 거짓말이 틀통난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정지호하면 직감 하나는 좋기로 유명한 사람인 것이다.
“진심인가 구병규 팀장? 유적을 그냥 포기하자고?”
던전내에서 클리어 도중 발견된 유적은 팀장에게 처분 권한이 일차적으로 있다.
물론 내부에서 얻어지는 아티팩트야 대표인 대호길드가 50%의 지분을 가지게 되어 있지만 이건 탐사를 끝냈을 때에 해당하는 이야기.
구병규는 유적이 위험하니 포기하자고 말하고 있었으니 유감스럽긴 해도 팀장의 마음을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구병규도 정지호의 매서운 눈빛을 받고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곧이어 답했다.
“네. 입구 근처를 탐사해 봤습니다만, 함정이 너무 많아서 탐색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탐사를 결정하는 건 어디까지 팀장의 권한이니 어쩔 수 없겠지.”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구병규를 바라보던 정지호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그렇게 처리하도록 할 테니 나가 보게.”
정지호의 말에 꾸벅 인사한 구병규와 정지원이 사무실을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정지호가 정장 안주머니에서 일전의 수첩을 하나 꺼냈다.
“어디 보자…….”
수첩을 들여다보던 정지호가 달력으로 시선을 옮겨 비교하다가 말했다.
“사흘 후인가?”
* * *
전날 늦게까지 이어진 회식 때문에 주상혁이 일어난 건 늦은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주상혁이 가슴 위에 묵직함이 느껴지자 고개만 슬쩍 들어 확인했다.
『Lv.1 청운해태.』
왕!
“뭐야, 너였냐?“
똘똘한 눈동자로 반기는 청운해태를 본 주상혁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고는 목에 힘을 풀었다.
철퍼덕하는 소리와 함께 주상혁의 귀에 베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암…….”
늘어져라 하품을 하던 주상혁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주상혁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슴팍 위에 있던 청운해태가 데굴데굴 굴러 주상혁의 허벅지로 떨어졌다.
“어, 어떻게 나왔냐 너?”
꼬리로 주상혁의 양쪽 허벅지를 번갈아 가며 때리던 청운해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주상혁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의 팔목으로 향했다.
팔목에는 어제 던전에서 얻어 착용한 팔찌가 있었다.
3mm 남짓 되어 보이는 푸른색 바탕의 얇은 두께의 팔찌에는 구름문양이 새겨 있었다.
『신령한 기운의 운령팔찌.』
「신비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팔찌다. 제작자가 누구인지 누가 사용하던 것인지 나아가 제작 시기까지도 알려진 바가 없다. 팔찌 안에 존재하는 신성한 기운이 착용자의 신체 능력을 큰 폭으로 성장시켜 줄 것 같다.」
『[힘 +25] [민첩 +35] [마나 +30]
―착용자는 청운해태를 소환할 수 있다.
청운해태와 팔찌를 번갈아 가며 보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뭔가 달성 조건이 있는 줄 알았더니 그냥 자의적으로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건가?”
어제 회식 자리가 꽤나 길었음에도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녀석이었기에 어떤 조건을 달성해야 소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제 보니 녀석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구조였나 보다.
‘근데 1레벨이라…….’
측정이 불가능했을 만큼 아득히 높았던 청운해태의 레벨을 주상혁은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선지 지금은 고작 1레벨.
이정도면 신생아 수준의 레벨이었다.
“츳……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린다 싶더니”
한숨을 푹 내쉰 주상혁이 실망스러운 결과와는 달리 청운해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온 지 얼마나 됐냐?”
주상혁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묻자 때마침 청운해태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꾸르르륵.
“배고픈 거냐?”
왕왕!
녀석의 꼬리가 더욱 빠르게 왕복하는 게 그렇다고 답하는듯했다.
“기다리고 있어 봐.”
자기 집이 아니라 냉장고를 터는 게 눈치가 좀 보인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주상혁은 움직였다. 이런 조그만 녀석이 먹을 양 정도 슬쩍한다고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것이었다.
방을 나선 주상혁이 잠시 후 기쁜 얼굴로 방에 돌아왔다.
냉장고에서 들고 온 것은 소고기 팩이었다. 주상혁이 랩을 뜯어 적당한 크기로 썰린 고깃덩이를 내밀었다.
“자.”
“꾸웅.”
“뭐야 안 먹냐?”
주상혁이 혹시나 싶어서 입 주변에 내밀어봤지만, 반응이 시큰둥했다.
“야, 잘 생각해 보라니까? 이거 마블링 제대로 본 거 맞아?”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게 보통 놈이 아닌 게 느껴졌다.
적어도 어제 주상혁이 회식 자리에서 먹은 고기보다는 훨씬 좋은 고기가 아닐까 싶었다.
고기 팩을 통째로 놓고 물러나 봤지만, 입에 댈 생각을 하지 않는 청운해태를 보고 주상혁이 말했다.
“배가 불렀구만 배가 불렀어, 너 그렇게 입이 고급지면 나랑 살기 힘들걸?”
“꾸우웅.”
주상혁의 말 때문인지 청운해태가 고기를 핥짝 핥아 보더니 결국 기운 없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털푸덕 앉았다.
꾸르르르륵.
배에서 나는 소리는 여전했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녀석을 보고 주상혁이 한숨 쉬었다.
양손으로 청운해태를 들어 올린 주상혁이 물었다.
“야 그러지 말고 그럼 니가 말해 봐. 뭐가 먹고 싶은데?”
주상혁이 알기로 청운해태는 자신에게 환상을 보여 줄 수 있다.
청운해태도 알아먹은 건지 녀석의 눈이 푸른색 마나로 번뜩이는 게 보인 직후였다.
비슷한 형태의 마나가 주상혁의 눈에도 피어났다가 잠시 후 가셨다.
주상혁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 채식주의자였냐?”
* * *
삼 분 뒤.
주상혁이 허겁지겁 밥을 먹는 청운해태를 보며 한숨 쉬었다.
‘입 한번 고급이네.’
고급?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수준일지 모른다.
청운해태가 먹고 있는 건 폴라나를 비롯한 약초들이었으니 말이다.
주상혁의 생각이 깊어졌다.
‘어디 보자 한 끼에 저 정도씩 먹으면 한 달이면 얼마야?’
물론 오늘은 값싼 약초가 없어서 폴라나로 대체했다지만, 앞으로는 값싼 약재를 먹일 생각이긴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 끼에 수천만 원 이상은 거뜬할 것 같은 계산이 나왔다.
‘쪼그마한 놈이 많이도 먹네.’
물론 맛있게 먹는 모습이 귀엽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주상혁은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자신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주상혁이 침대에 앉아서, 청운해태가 먹는 모습을 흡족함 반 안타까움 반인 감정으로 보고 있을 때였다.
『Lv.2 청운해태.』
“어?”
청운해태의 레벨이 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주상혁이 먹고있는 청운해태를 기쁜 얼굴로 들어 올렸다.
“밥을 먹으면 레벨이 올라가는 거였니? 요요 귀여운 녀석 같으니.”
주상혁이 자리에 다시 내려놓자 그릇에 담긴 약초를 전부 비운 청운해태가 고개를 드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과 달리 살가워진 목소리로 주상혁이 물었다.
“더 먹을래?”
속 쓰려 할 때는 언제고 주상혁의 손에는 베이칼과 폴라나가 들려 있었다.
꺼억.
주상혁의 말에 대답 대신 트름을 한 청운해태가 침대로 폴짝 올랐다. 주상혁의 허벅지 위에서 자리를 틀고 낮잠에 드는 모습이 보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뭐.’
『Lv.3 청운해태.』
가만히 놔둬도 어차피 레벨은 오른다. 그 가능성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개구쟁이여도 상관없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3레벨이 된 녀석을 주상혁이 흡족한 모습으로 바라볼 때였다.
똑똑똑.
“야, 주상혁 들어가도 돼?”
노크 소리에 반쯤 몸을 일으켜 문을 바라본 청운해태가 안개가 되어 팔찌로 돌아갔다.
주상혁이 영리한 녀석의 모습에 한 번 더 감탄함과 동시에 말했다.
“들어와.”
* * *
방에 들어온 정지원이 침대 쪽으로 걷다가 방바닥에 놓인 소고기와 빈 그릇을 발견하고 물었다.
“웬 소고기? 저 빈 그릇은 또 뭐고?”
“그냥 그런 게 있어.”
“하긴 그렇게 답하시겠지.”
“알면 물어보지 말아 줘, 나도 거절하며 미안함을 느끼지 않게.”
정지원도 더 캐물어 봤자 주상혁이 말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푹 쉴 때 주상혁이 물었다.
“그보다 무슨 일인데?”
“그 유적 말이야 그냥 버리기로 했어.”
“아, 그래?”
“반응이 왜 그래?”
“그야 내가 권했다지만 솔직히 포기할 줄은 몰랐거든.”
주상혁이 알기에도 유적은 귀중한 아티팩트를 얻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물론 C급 던전에서 발견된 유적이라 그다지 기대치가 낮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거기서 영약이나 아니면 특수한 아티팩트를 얻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걸 포기한다라…….’
역시 외할아버지 정지호에게는 뭔가가 있음을 주상혁이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주상혁이 정지원을 보고는 슬쩍 물었다.
“여하튼 이거 말하러 온 거?”
“아니, 그건 아니고.”
정지원이 주상혁을 보고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대표 자리는 내려놓을 수 없어. 솔직히 난 네가 그렇게 말해도 이것보다 너의 비밀이 가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거든.”
“그래, 그렇겠지.”
주상혁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지원에게 있어서 자신은 조금 호기심이 가는 존재일 테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는 생떼를 부리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걸 말해 주려고 했어.”
주상혁이 바라는 대로 됐다.
정지원의 흥미를 식히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럼 쉬어라.”
정지원이 문을 닫고 방을 나가자 주상혁이 씩 웃었다.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인벤토리를 켰다.
인벤토리에서 베이칼과 폴라나가 담긴 가방을 꺼낸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그것만 해결하면 되나?”
주상혁이 치료제를 찍어 내기 위해 퀘스트창을 켰다가 멈칫했다.
[누적 사망자: 1명.]여태까지 없었던 첫 번째 사망자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 * *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하고 사흘 후.
주상혁은 지금 큰 고민거리가 한가지 있었다. 다름 아닌 치료제가 있어도 환자를 치료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환자를 치료하려면 환자가 누구인지, 또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하지만 주상혁은 그걸 알아낼 정보력이 없는 게 문제였다.
[누적 사망자: 6명.]사흘째 여섯 번째 사망자까지 발생한 현재 국내 언론과 인터넷은 이 문제 때문에 밤낮으로 시끄러웠다.
첫 증상인 가벼운 근육통이 시작되고 며칠 사이 증상이 악화되며 결국엔 전신 마비와 함께 피를 토하며 죽는다.
이건 대중을 공포로 몰아넣고 각종 유언비어를 일으키기에 딱 좋은 증상이었다.
주상혁이 이도 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혹시나 해서 휴대폰으로 관련 기사를 찾아보다가 기사 하나를 발견한 주상혁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전염병 걱정 이제 그만, 전염병 초기 방역 위해 각성자가 나선다.
8일 새벽 광주광역시에서 첫 번째 사망자가 의문의 질병으로 사망했다. 초기 증상은 가벼운 근육통이며 종국엔 전신 마비를 비롯한 각혈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일 새벽 세 시경, 여섯 번째 사망자까지 발생한 수수께끼의 질병을 조기 진압하기 위해 오후 한 시에 광주협회에서 전라도의 지부장들과 각 길드 대표들이 모일 예정이란 소식이 들려왔다. 삼 년 전 경주에 수수께끼 질병이 퍼져 사망자가 속출할 때도 길드들과 지역 사회의 협력으로 극복해 낸 만큼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예상된다.
⌙근데 경주 사건 때는 차예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 아닌가? 축복도 힐처럼 클라스가 있는 거 아님?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안 될 텐데…….
⌙솔직히 쪼금 걱정되긴 하는데 여차하면 차예설도 부르겠죠. 국내 유일한 S급 보조 계열 각성잔데 당연한 일.
⌙빠른 대처 좋네요.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사를 읽은 주상혁이 방긋 웃었다.
“이거다.”
* * *
광주협에의 소집 시간은 오후 한 시.
하지만 그것보다 한 시간 정도 이른 시간, 정지호와 전동욱은 함께 협회 인근 일식집에서 식사 중이었다.
신기하게도 방안에서는 작은 대화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적막했던 방안에 목소리가 들린 것은, 식사를 마무리한 정지호가 입가심을 한 물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은 직후였다.
“자, 그럼 건네줄 건 건네줘야겠지.”
정지호가 정장 앞주머니에서 라이센스 두 장을 꺼내 식탁 위로 밀었다. 전동욱이 손을 뻗어 두 장의 라이센스 위에 손을 올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번 빚진 걸로 알겠네.”
“물론입니다.”
멈칫한 전동욱이 라이센스를 정장 앞주머니에 이내 챙겨 넣었다. 그것을 보던 정지호가 말했다.
“아! 그리고 말이네.”
“네.”
“혹여나 해서 하는 말이네만 두 번은 없다는 것, 알고 있겠지?”
강압적이지도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노년의 분위기가 전달력을 살렸다고 말할 수 있었다.
주상혁을 더 이상 뒤로 캐고 다니지 말라는 말을 단번에 이해한 전동욱이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전동욱은 주상혁에게서 관심을 끌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도 딱히 아니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주상혁이 아닌 주상혁 주변을 조사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볼일은 마친 정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슬슬 가세.”
정지호가 일식집을 나오자 앞에 대기시켜 놓은 검은 세단이 있었다.
세단의 뒷좌석에 정지호가 오르자 곧이어 세단이 협회로 출발했다. 전동욱도 자신의 고급 승용차를 몰고 협회로 향했다.
협회 지상 주차장에 운행하던 두 대의 세단이 멈춰섰다.
앞서 주차된 차량에서 운전기사가 내려 바쁘게 뒷좌석 문을 열었다. 정지호가 그곳에서 내렸다.
정지호가 잠시간 서 있자 전동욱이 다가왔다. 두 사람이 함께 걸어 일 층 로비로 들어섰을 때였다.
두 사람을 발견했는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보기 드문 조합이로군요.”
정지호가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틀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전동욱과 마찬가지로 삼십 대 초중반 수준의 외관에 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말끔한 남성이었다. 정지호가 익히 아는 얼굴에 인사차 말을 건넸다.
“바쁘다고 들었는데 빨리 오셨군, 유 대표.”
유성에 유정.
전라도 지방에 유일한 일류 길드, 유성의 대표였다.
“피차일반이지요, 그보다 두 분은 어쩌다가 함께……?”
정지호가 전동욱을 바라봤다. 전동욱이 답했다.
“사소한 볼일이 있어서 식사 한 끼 했을 뿐입니다.”
“식사라…….”
유정이 알기로 전동욱과 정지호의 개인적인 친분은 거의 전무하다.
그런 상황에서 두 사람이 식사를 가질 일이라면 유정의 머릿속엔 하나뿐이었다.
‘스카우트…….’
요즘 협회 내부적으로 전동욱의 입지가 아슬아슬하다는 건 제법 유명한 소문이다. 굳이 저 정도 되는 수준의 각성자가 지방 거점 도시 지부장도 아니고 전주 지부장을 하고 있는 것만 해도 그랬다.
즉, 각성 심사 당시 모든 길드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협회를 택한 전동욱이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었다고 한들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으로 구워삶았느냐 하는 건데…….’
유정의 생각은 머릿속은 복잡했다. 대호길드의 세력에 전동욱이 가세한다면 탑클래스 A등급 각성자가 둘이 된다.
이류 길드라고 하더라도 가뜩이나 광주에서 입김이 센 대호길드의 팽창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정이 진지하게 생각을 이어갈 때였다. 그의 생각을 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나저나 유 대표.”
“예?”
“안 탈 생각이신가?”
유정의 눈에 어느덧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유정이 빠르게 엘리베이터 안에 오르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 근처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물급 인사 세 명의 존재 때문인지 엘리베이터에 동승하는 사람은 없었다.
집합 장소인 사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문이 열렸다.
30m미터쯤 떨어진 곳에 넓은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회장 내부에는 벌써 제법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로비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수군거리는 소리는 물론이고 모세의 기적이라도 일어나듯 갈라서는 사람들 사이로 세 사람이 걸었다. 세 사람 중 한 사람, 유정이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대호길드 쪽은 여유가 좀 되십니까?”
“여유라 하면?”
“이번에 보조 계열 각성자들을 지원해야 하지 않습니까?”
정지호가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답했다.
“뭐, 여유가 있어서 하는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해야 하니 하는 것이지.”
이번엔 정지호가 넌지시 물었다.
“그러는 유성길드는 어떻습니까? 듣기로는 지난달에 A급 각성자를 스카우트했다 들었습니다. 보조 계열로 말입니다.”
“그냥 한숨 덜었을 뿐입니다. 안 그래도 보조 계열 각성자가 저희 쪽에 많이 부족했지 않습니까? 양보에 감사할 뿐이죠.”
정지호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스치는 게 유정의 눈에 포착됐다.
‘뭐지……?’
정지호가 말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려.”
의미심장한 정지호의 말에 유정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평소 정지호라는 사람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의문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었다.
‘궁금하단 말이지…….’
태연하게 이야기는 주고받는다.
또 표면상으로도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유성과 대호는 명백히 라이벌 관계이다.
일류 길드와 이류 길드의 갭이 존재하기에 유성이 7:3 정도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일류 길드의 갭이 존재하면서도 고작 7:3밖에 유지하지 못한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어디까지나 정지호의 영입력.
정지호와 전동욱과의 만남을 유정이 경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라면 정말로 전동욱도 구워삶아 버릴 것 같은 위기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이상해, 어째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거지?’
얼마 전 A등급 각성자의 영입에는 어째선지 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유정은 그게 의아했다. 강력한 대표의 존재도 분명 길드 간의 물밑 경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지만, 실제로 후진이 탄탄하다는 것은 플러스 요인이지 마이너스요인이 될 수 없었다.
즉, 못 먹는 감 찔러라도 보는 게 모두가 생각하는 정론인 것.
하지만 정지호는 어떨 때 보면 이번과 같은 행동을 해왔다.
어떨 때는 뛰어난 각성자가 나타나면 귀신같이 나타나 인재를 낚아채 가면서도, 또 어떨 때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승부사 정지호라…….’
나섰다 하면 50%를 넘기는 영입력 때문에 정지호는 국내에서는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유정이 복잡한 생각을 이어 갈 때였다.
“뜬금없는 이야기입니다만 그거 들으셨습니까?”
전동욱의 목소리에 정지호와 유정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거요?”
“인터넷에서 차예설 없이 이번 사태를 자체적으로 극복해 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여론이 제법 있답니다.”
“아, 그거요?”
유정이 알고 있다는 반응했다. 뭐 솔직히 유정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고 별 감흥 없는 이야기였다.
“알고 있으시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신성의 차 대표는 확실히 뛰어난 각성자니까.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죠.”
전동욱이 정지호를 바라봤다.
“어르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은 전동욱이 했지만, 유정이 관심 있게 바라봤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던 정지호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걸리더니 입이 열렸다.
“얼마 있지 않아 종식되지 않겠습니까?”
* * *
기사의 내용은 주상혁에게는 호재였다.
의심증세가 있는 환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군데로 모여들 것이라는 정보는 천금 같은 기회였던 것이다.
주상혁은 새벽 일찍 진료소 앞으로 출발했다.
당연히 정지원은 잘 설득해 떨쳐 놓은 상태.
오랜만에 만끽하는 자유였다.
오늘 오전부터 열릴 진료소 앞에 도착한 주상혁이 길게 늘어선 줄의 맨 앞에서부터 줄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어디 보자…….’
마스크와 야구모자를 푹 눌러써 얼굴을 가린 주상혁이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며 걷다 걸음을 멈췄다.
‘찾았다!’
일단 주상혁 정도 되면 안색만 봐도 대강 사람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호흡과 눈, 피부의 상태.
사람의 육체적인 상황에 심리적인 부분까지 더해지면 어느 정도 상황인지 견적이 대충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 발견했다.
유독 호흡이 거칠고 눈의 초점은 흐려 총기가 없는데다 피부위에 맺힌 작은 식은땀.
분명히 신체의 리듬이 정상인 사람은 아니었다.
주상혁이 슬쩍 다가가 환자의 어깨를 툭 부딪쳤다.
미리 발동해 둔 진맥으로 순간적으로 환자의 상태를 확인한 주상혁이 옅은 웃음을 그렸다.
‘77%라…….’
환자는 상당히 높은 진행률을 보이고 있었다.
주상혁이 바로 전에 어깨를 부딪쳤던 환자의 옆으로 슬쩍 돌아가서 조용히 속삭였다.
“제가 기막힌 약이 있는데 사실래요?”
주상혁을 향해 슬쩍 시선만 움직인 남자가 거친 호흡과 함께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
“됐고 저리……가쇼.”
쉰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남성의 날 선 반응에 주상혁이 장사치다운 웃음으로 다시 권했다.
“그러지 마시고 약이 효과를 보지 않으면 돈은 받지 않을 테니까 드셔 보시죠?”
“글쎄, 나는 됐……다니까?”
“줄을 좀 보세요. 이만한 줄 기다리려면 하루 종일 걸리지 않겠습니까? 가격도 쌉니다, 오만 원.”
진료소의 진료도 무료는 아니다.
십만 원이라는 진료비가 있었다.
그에 비해 주상혁의 약은 오만 원. 심지어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면 값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남자가 관심이 생겼는지 슬쩍 주상혁을 바라봤다.
“정말로 효……과가 없으면 돈을 받……지 않겠다는 거지?”“네.”
“하나 줘 보……게.”
주상혁이 가방에서 약을하나 꺼내 내밀었다.
약을 받아든 남자가 약을 마시려다가 말고 주상혁에게 말했다.
“이거 식약청 허가는…….”
“안 드시겠다고요?”
“아니, 먹지…….”
어차피 밑져야 본전 남자가 검지 크기 실린더의 액체를 들이켰다.
주상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오만 원입니다.”
“효과를 못 보면 안 받겠다면서?”
“효과가 안 느껴지신다고요? 그럴 리가 없거든요?”
“허어…… 처음부터 사기질이나 치려고 권했나?”
“…….”
주상혁이 별말 없자 남자의 배 째라는 듯한 말이 이어졌다.
“여하튼, 난 잘 모르겠으니까, 저리 가게.”
“네네, 그러죠.”
괜히 이목이 쏠릴 것을 우려해 주상혁이 쓱 물러났다. 남자의 호흡은 이미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으니까.
남자를 등지고 다시 걷던 주상혁이 혹시나 해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현재 감염자: 151명.] [누적 사망자: 6명.]분명히 감염자의 숫자는 한 명 줄어들어 있었다. 딱히 사망자도 늘어나진 않은 상태.
픽 웃은 주상혁이 다시 환자들의 얼굴을 살피며 걷기 시작하고 잠시 후였다.
주상혁의 눈치를 보던 남성이 줄을 이탈하는 모습이 보였다.
애초에 푼돈 벌자고 했던 게 아니다. 가격을 정한 이유는 약물에 대한 환자의 경계심을 낮추기 위한 용도였다.
처음부터 환자 본인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방법을 택한 것도 이것이었다. 일단 주상혁은 퀘스트가 목적이었으니까.
주상혁이 새로운 환자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유독 바쁠 것 같았다.
* * *
주상혁은 다음날도 똑같이 진료소 앞으로 향했다.
하루 가지고 모든 감염자를 치료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감염된 시기가 다르다.
아직 증세가 시작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고, 또 가벼운 증세가 있더라도 몸살 정도로나 치부하고 오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솔직히 하루 만에 모두 치료하기란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
[현재 감염자: 77명.] [누적 사망자: 7명.]그럼에도 감염자는 확실히 어제보다 반절 가까이 줄어 있었다.
진료 첫날이었던 만큼 앓고 있던 사람들이 몰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둘째 날인 오늘부터는…….
‘이거 아슬아슬하려나……?’
그 감염자가 줄어 있었다.
아무래도 확실한 개기가 없다면 일주일이 걸릴지 보름이 걸릴지 모를 것 같았다.
“골치 아프네…….”
주상혁이 푸념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저기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상혁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이십 대 중반 정도 되려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주상혁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여자는 아니었다.
주상혁이 눈알을 슬쩍 올려서 머리 위의 레벨을 확인했다. 각성자가 아님을 확신한 주상혁이 말했다.
“저요?”
“네네. 혹시 그 약 파는 분 맞나요?”
“악이요?”
주상혁이 고민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고민이 된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눈에 띄는 짓은 안 했는데…….’
오만 원을 주기 싫다고 강짜를 부리는 사람들도 소란을 일으켜 좋을 게 없어서 되도록 그냥 넘어갔다.
“아닌가요?”
여자의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질문에 주상혁이 결국 답했다.
“아니요. 맞습니다.”
여자가 어떻게 약을 팔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
여자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확인한 주상혁이 물었다.
“그럼…….”
“그 전에 질문이요.”
말하던 여자의 말을 끊고 주상혁이 물었다.
“근데 제가 약 파는 건 어떻게 아셨죠?”
타깃을 발견하면 슬쩍 진맥하고 환자일 때만 약을 판매했다. 정보가 어디서 이렇게 빨리 퍼져 나간 건지 궁금했다.
여자가 휴대폰 액정을 보여 주며 말했다.
“이거요.”
주상혁이 그곳을 들여보자 누군가 작성한 커뮤니티 글이 보였다.
―진료소 갔다가 오 분만에 무료로 진료받은 썰.
나는 이십 대 초반 남자임. 근데 어제부터였던가? 이유 없이 근육통이 허벅지에서 느껴지더니 점점 온몸으로 번지며 심해졌음. 몸살인가 싶었지만, 요즘 시국이 시국이라 진료소 감. 근데 어이없는 게 줄이 진짜 길었음. 난생 태어나서 그렇게 긴 줄은 처음 봄. 그래서 사실 돈도 아깝고 증세도 그냥 몸살이랑 비슷해서 이 줄 서 있느니 그냥 집에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음. 야구모자에 마스크 쓴 사람이 다가옴. 가방까지 메고 있었는데, 레알 좀 잘생겨진 공항도둑 패션이었음.
근데 중요한 건 이것보다 이다음 일이었음. 갑자기 직빵인 약을 오만 원에 판다는 거임. 먹고 효과 없으면 공짜 ㅇㅈㄹ 하면섴ㅋ. 솔직히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서 ‘오 개꿀’ 하면서 먹음. 근데 의외로 맛있었음(비타민 음료 느낌.) 여하튼 먹고 나서 막 몸도 개운해지고 정신도 맑아짐. 물론 오만 원은 처음부터 안 줄 생각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존나 아픈 척함. 배 째라 식으로 나오니까 그냥 감. 만약에 시국이 시국이니까 너희도 시간 없는데 근육통은 있어서 진료소 가야 할 거 같으면 소문나기 전에 한번 찾아가 보셈ㅋㅋㅋ 아, 시발 아직도 생각하니까 웃기네
⌙공항도둑 엌ㅋㅋ.
⌙⌙왜 나한테만 시비냐고 시x놈아.
⌙와 저도 아팠는데 가 봐야겠어요. 꿀팁 감사요.
⌙본문 시발…… 오만 원에 양심 팔아 처먹은 게 자랑이라고 이딴 글 올리냐? 어휴…….
⌙⌙내 말이…… 하다못해 거짓말해서 처먹고 효과 봤으면 부끄러운 줄 알고 미안한 줄 알아야지 진짜 금수 새끼네. 이게 대한민국 이십 대 수준이다.
⌙⌙이런 애들은 형욱 님한테 배변 훈련부터 다시 받아야 함.
글을 읽고는 주상혁이 말했다.
“내가 너 얼굴 기억하고 있다. 면봉같이 생긴 놈.”
“네?”
“그렇게 댓글 다세요.”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가 양심을 속이는 짓을 하진 않는다. 저런 반응을 하는 사람은 셋 중에 하나 정도.
덕분에 어지간한 사람은 주상혁이 얼굴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이십 대 초반 남성이라면 그 사람이 유일했으니까.
“아, 네…….”
여자가 휴대폰 액정을 보여 주고는 말했다.
“했어요.”
⌙내가 너 얼굴 기억하고 있다. 면봉같이 생긴 놈.
⌙⌙엌ㅋㅋ 본인 등판.
⌙⌙면봉 같이 생겼으면 어떻게 생겨야 함ㅋㅋ?
댓글을 막 달았는데 제법 이슈가 된 글인지 금세 대댓글이 달려 있었다. 여자가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는 말했다.
“이제 약 파실 거죠?”
주상혁이 여자의 안색을 쓱 살피고는 물었다. 아무리 봐도 아파 보이진 않았기 때문.
“본인이 드실 거예요?”
“아니요. 저희 엄마요. 어제부터 여기저기 근육통이 있다는데 걱정이 돼서요.”
“죄송한데 그럼 안 돼요.”
원재료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6억을 호가하는 물건이다.
오만 원이라는 미끼를 던진 건 맞지만, 수량도 한정적이고 확실하지 않은 환자에게까지 퍼 주다 보면 퀘스트 완료는 어림도 없었다.
“네? 어째서요?”
“본인이 직접 와야지만 드려요.”
“그러지 말고요.”
“어쩔 수 없어요. 일하는 거 때문에 바쁘신 거면 오늘 밤에라도 직접 오시라고 하세요. 오늘 하루는 날 샐 테니까.”
물들어올 때 노저으라는 말이있다.
지금이야말로 노를 저을 때였다.
* * *
주상혁은 순순히 인정했다.
솔직히 이번엔 운이 좋았다. 인터넷에 누군가가 입소문을 퍼트려 준다는 건 예상 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주상혁은 그 여자를 돌려보낸 이후에도 비슷한 이유로 찾아오는 사람을 많이 받았다.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아쉽게도 그런 사람의 대부분이 일반 근육통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문제였다.
환자가 늘어나자 진료소 근처 편의점 파라솔로 이동한 주상혁이 한숨 쉬었다.
“약은 못 드립니다.”
“네? 저는 제가 여기서 먹을 건데요? 오만 원 드릴게요.”
“됐고요. 어깨가 아프다 그랬죠?”
“그렇긴 한데요…….”
돌아가란다고 돌아갈 리 없는 환자들에게 주상혁은 침을 놓고 있었다.
“일어서서 이쪽으로 와 봐요.”
주상혁이 테이블 위에 미리 꺼내 놓은 침통에서 침을 집어 들었다.
콕콕콕.
환자의 어깨에 침 세 방을 순식간에 놓자 환자의 표정이 풀어졌다.
“흣, 흐응…….”
레벨 업에 관여하는 신체에 활력을 돋아 주는 혈 자리는 일절 건들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레벨 업의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근육통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피로가 풀리면서 들리는 신음이 상당히 거슬릴 뿐 완벽했다.
1분쯤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던 주상혁이 침을 회수했다.
사용한 침은 대충 테이블에 던지고는 주상혁이 말했다.
“됐죠, 가세요.”
환자가 어깨를 좀 풀어 보더니 테이블 위에 오만 원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얼굴로 뛰어갔다.
주상혁의 진료는 계속 이런 패턴이었다.
감염자면 간단하게 음료로.
근육통 환자가 온다면 환자에게 침을 쑤셔 버리는 식이었다.
“오만 원이라…….”
주상혁이 오만 원을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었다.
‘나중에 침값으로 써야지.’
이 많은 침을 수거해서 소독하는 것도 일이다. 차라리 다시 사는 편이 편했다.
흐읏…….
이어지는 손님도 침으로 피로가 한방에 쫙 풀리자 야릇한 소리를 냈다.
환자들의 효과음 덕분인지 편의점 앞까지 늘어선 대기열에서도 주상혁에게 넘어오는 손님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변장도 확실하게 하고 있으니까.’
혹시라도 정체를 들키는 일에 대해서는 걱정 없었다.
마스크와 야구모자, 거기에 선글라스까지 추가했다.
아는 사람이 봐도 주상혁이라고 알아보기 힘든 복장이었다.
‘뭐 정 느낌이 싸하면 도망치면 되고.’
주상혁이 사람들을 빠르게 진료해 나갔다. 호평 일색이었다.
“힛, 히읏.”
“캬…… 맛있네요”
“진짜 비타민 음료 느낌이네.”
[현재 감염자: 69명.] [누적 사망자: 7명.]‘두 시간에 여덟 명인가?’
손님들이 알아서 몰려오니 이편이 번거롭긴 해도 효율면에서는 훨씬 좋았다.
도리어 진료소에서도 진료를 받은 환자마저 나가는 길에 와서는 받고 갈 정도였으니 놓치는 환자도 없고 최고였다.
* * *
주상혁이 새벽부터 점심 무렵까지 반나절 가까이 환자의 진료를 하고 있을 때였다.
“와, 저 정도면 진짜 생활의 달인 나가야 하는 거 아니냐?”
진료를 대기하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주상혁의 눈앞에 변화가 일어났다.
주상혁의 눈앞에 퀘스트창 하나가 떠올랐다.
환자가 늘어나면서 어느새 두 명씩 동시 진료를 보던 주상혁이 침을 놓으며 퀘스트를 읽어 나갔다.
Q. 침술의 달인 [전직 퀘스트].
「세상에서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종사자들을 그렇게 부릅니다. 하지만 현생 당신의 명성은 아직 달인이라 부를 수준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기적을 이루고 달인의 이름을 얻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입니다.」
[달성 조건: 해가 지기 전에 이천 명의 환자를 치료할 것.] [현재 치료한 환자: 533명.]―침술의 달인 전직 시 조제의 귀재, 진맥의 대가 전직 불가능. (단, 어느 선택을 하든 의술 마스터에 도달하는 데 부작용은 없음.)
주상혁이 환자들이 놓고 간 돈을 가방에 대충 챙기며 중얼거렸다.
“재밌네.”
주상혁의 손이 빨라지기 시작한 건 이 무렵부터였다.
* * *
주상혁의 진료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진료소를 찾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너 나 할 것 없이 주상혁에게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가격도 진료소보다 저렴한 것은 물론이고 환자 한 명당 이 분을 넘기지 않을뿐더러 절차까지 더럽게 간단하다. 환자들의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밀려드는 환자들은 물론 전부 감염자는 아니었다.
주상혁이 진료한 환자만 수천여 명에 달했지만, 그중에 감염자는 서른 명 남짓.
[현재 감염자: 29명.] [누적 사망자: 7명.]‘일곱 명…….’
일곱 명만 더 치료하면 주상혁은 사실상 퀘스트를 완료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덤으로.
[현재 치료한 환자: 2,033명.]이미 전직 퀘스트는 완료가 되어 있었다.
전직에 필요 이상의 수치를 달성했습니다. 전직 보상에 더해집니다.
주상혁이 사라지는 알림창을 확인하고 돈을 챙겼을 때였다.
다음 환자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이번 환자는 서른 살 언저리의 남성이었다.
주상혁의 시선이 슬쩍 남자의 머리 위를 훑었다가 심각해졌다.
‘하긴 너무 나대긴 했나?’
남자는 각성자였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주상혁의 감이라면 100% 진료소 쪽에서 일하는 각성자일 것이었다.
‘튈까……?’
주상혁이 섣부른 도주는 포기했다.
남자에게서 도망치지 못할 거라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일곱 명.
지금 도망가면 퀘스트 달성까지 남은 최소 수치 일곱 명을 달성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주상혁이 웃으며 말했다.
“네 말씀하시죠.”
주상혁의 말을 들은 남자가 영업용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알고 계셨을지 모르겠지만,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능력이 뛰어나시더군요.”
“그래서요?”
주상혁이 남자의 뒤편을 보라는 듯 고갯짓과 함께 말했다.
“보시다시피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데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용건만 간단히 해 주세요.”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강하게 나가야 함은 알고 있다.
자신에게 무슨 용무가 있냐는 듯 뻔뻔하고, 예민하게. 그래야 주상혁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주상혁의 강짜가 먹힌 것인지 남자가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남자가 명함과 동시에 라이센스를 꺼내 내밀었다.
‘김진성? 유성 쪽 사람이네?’
남자는 김진성이라는 유성 쪽 사람이었다. 직급도 제법 높았다.
‘하긴 애초에 진료소엔 각 길드에서 파견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곳에 유성 쪽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요?”
주상혁이 명함을 받아들자 라이센스를 다시 챙긴 남자가 말했다.
“각성자이시죠?”
주상혁이 쓰레기통에 수북이 쌓인 빈 포션 병을 흘겼다.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딱히 발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주상혁이 말했다.
“그렇다면요?”
김진성이 상긋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소속된 곳이 없다면 저희 유성 쪽에서 함께 일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보통 각성자라면 유성에 들어가는 걸 꿈처럼 생각한다.
괜히 일류 길드 일류 길드 하는 게 아닌 것이다.
각성자라면 유성에서 몇 년간 커피만 말다가 퇴직해도 이력서를 채우는 데 강점이 되니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주상혁 이외의 각성자들에게나 통하는 말이었다.
“유감스럽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이유를 들어보고 싶군요.”
너무나도 깔끔한 거절을 당한 터라 당황할 법도 한데 김진성은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평가가 그렇게 좋지 않았나?’
그럼 오히려 좋았다. 적당히 둘러댄다면 그리 끈질기게 달라붙지 않을 테니까.
“그냥요, 저는 보시다시피 유성에 들어가지 않아도 돈이라면 얼마든지 벌 수 있습니다.”
“그런 푼돈에 만족하십니까?”
“푼돈이요?”
주상혁이 남자를 비웃듯이 쓰레기통을 바라봤다. 남자도 주상혁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수북이 쌓인 실린더를 본 남자가 실언을 인정하며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멍청한 소리를 했군요.”
증상이 심하든 약하든, 마비 기운 때문에 다리를 절든 피를 토하든 포션 한 방이면 정상인이 되어 돌아간다.
주상혁이 오만 원에 팔고는 있었지만, 본래라면 수천만 원, 아니 수억 원에 팔아도 수요가 있을 것이었다.
“됐고요. 환자 기다리잖아요? 볼일 끝났으면 이제 가시죠?”
끄덕.
김진성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여라도 마음이 변하시면 언제라도 연락하시죠.”
퇴장하는 김진성의 뒷모습을 보고는 주상혁이 생각했다.
‘최대한 빨리 떠야겠어.’
* * *
김진성이 처음 주상혁을 목격한 것은 오후 세 시쯤.
부쩍 대기열이 짧아짐을 느낀 시점이었다.
“호오…… 침인가?”
주상혁을 처음 발견한 김진성은 주상혁에게 흥미를 느꼈다.
얼굴을 꽁꽁 가린 특이한 저 복장 때문이 아니었다.
‘일 분 삼십 초쯤 걸리는군’
신속함과 정확함.
이것 때문이었다.
주상혁의 처방과 환자의 응대는 두 가지를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진료소를 상회하고 있었다.
간소화된 절차와 더불어 실력까지 겸비되어 있으니 진료소를 찾는 사람이 줄어드는 건 당연했다.
주상혁을 유심히 살펴보던 김진성이 팔짱을 끼고 한참을 지켜봤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쌓여 가자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제법 긴 시간 제자리에서 지켜보면서도 김진성이 자리를 뜨지 않았던 이유는 한 가지 의문 때문이었다.
‘이상한데…….’
구분이 되지 않았다.
‘무슨 차이인 거지?’
침을 놓는 환자와 포션 처방을 하는 환자의 차이.
도대체 그 기준이 무엇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단언컨대 증상이 심하고 약하고의 기준은 아니었다.
똑같이 발을 절고 있는 환자에게도 어쩔 땐 포션 어쩔 땐 침이었고, 어깨가 조금 결린다는 환자가 왔을 때도 어떤 환자에게는 침을 어떤 환자에게는 포션을 건네주는 일정하지 못한 처방을 보인 것이었다.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결국 주상혁에게 다가가 영입을 제안해 보고 퇴짜를 맞은 김진성이 진료소 안으로 들어왔다.
줄은 끊긴 지 오래였지만, 진료소 안은 시끄러웠다.
치료하지 못한 일부의 환자 때문이었다.
응급실에 걸어간 김진성이 문 옆 벽에 기대서 상황을 지켜봤다.
A급 보조 계열 각성자가 둘이나 되었음에도 비명을 토하고 있는 환자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A급 보조 계열 각성자의 축복으로도 치료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 포션이라면 어떨까…….”
본인이 아니면 팔지 않는다는 제약 때문에 말조차 꺼내 보지 않았지만, 김진성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잠시간 지켜보던 김진성이 응급실을 나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래, 매튜인가?”
김진성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드문 삼 층 휴게실을 가기 위해서였다.
“일은 어떻게 됐냐?”
김진성이 3층 휴게실에 도착해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하, 그렇구만, 아쉽게 됐어 꽤나 괜찮아 보이는 능력인데 말이지.”
김진성이 담배에 불을 지피고는 창틀 난간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이냐고?”
김진성이 열린 창가 너머를 바라봤다. 한창 진료를 하고 있는 주상혁이 그의 눈에 보였다.
“괜찮은 녀석이 있거든 여기에, 뭐 능력?”
픽.
김진성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비쳤다.
“이 녀석도 포션 쟁이더라고.”
* * *
다음날 자정이 막 지난 순간이었다.
드디어 남은 감염자가 스물한 명.
그사이 한 명이 사망하긴 했지만, 어찌어찌 퀘스트 성공이 확정되었다.
주상혁이 황급히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 가시게요?”
“네, 오늘은 이만 바빠서요.”
“내일도 또 오실 겁니까?”
주상혁이 말했다.
“물론입니다.”
물론, 내일 이곳에 다시 올 일은 없다. 이미 퀘스트는 안정권으로 들어섰으니까.
저절로 완료될 퀘스트에 위험을 감수할 이유 따윈 없는 것이다.
하지만 주상혁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도 올 것이라고.
길게는 몇 시간씩 기다린 사람도 있을 텐데 내일은 안 온다는 말을 했다가는 맞아 죽기 십상.
주상혁이 황급히 자리를 떠나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열 걸음.
스무 걸음.
서른 걸음.
주상혁의 몸이 점점 진료소 정문과 거리가 멀어질 즈음이었다.
주상혁의 걸음이 갑자기 뚝 멈췄다.
“퀘스트.”
주상혁의 말에 퀘스트 목록이 떠올랐다.
Q. 또 다시 의원 [메인 퀘스트].
Q. 의원으로서의 의무 [일일 퀘스트].
Q. 명성의 대가 [주간 퀘스트].
Q. 침술의 달인 [전직 퀘스트.].
Q. 오염 그리고 정화 [돌발 퀘스트].
주상혁의 선택은 돌발 퀘스트였다.
Q. 오염 그리고 정화 [돌발 퀘스트].
「십 년 만에 외가에 방문한 주상혁은 우연히 던전에서 오염된 마나에 노출된 환자를 발견했다. 작은 오염도 취급하기에 따라서 거대한 질병으로 변질되기도 하는 법. 참된 의원이라면 역병을 예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오염된 마나를 정화하자.」
달성 조건: 1. 오염의 근원을 정화할 것 (완료).
2. 오염된 마나에 노출된 상태의 모든 환자를 치료할 것.
실패 조건: 1. 환자 천 명 돌파 시 실패.
2. 누적 사망자 서른 명 돌파 시 실패.
달성보상: 던전 의약학 (상).
― 실패 시 스킬 레벨 페널티.
[현재 감염자: 21명.] [누적 사망자: 8명.]“스물한 명…….”
주상혁이 비스듬히 돌아섰다. 외면하고 온 사람들이 보였다. 저 중에 어쩌면 스물한 명에 포함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일 다시 이곳에 오는 건 너무 무모했다.
이미 자신을 너무 드러냈고 이 이상 이곳에서 지체했다가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처방전.
『정화의 탕약.』
[정제수: 99/1] [베이칼: 335/3] [폴라나: 231/2]주상혁의 눈이 퀘스트창 밑에 달린 처방전으로 향했다. 처방전을 바라보며 한참 멈춰 있던 주상혁이 결심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제작.”
주상혁이 남은 재료를 몽땅 포션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팔았다면 수백억 원의 이득을 남길 수 있는 재료임을 알았지만, 결정을 내린 행동은 거침없었다.
편의점으로 되돌아간 주상혁이 택배를 부치기 시작했다.
주소는 편의점 앞 진료소였다.
“미안하지만, 이게 내 최선이다.”
포션을 모조리 때려 부은 주상혁은 그렇게 양심의 가책도 담아 택배를 부쳤다.
* * *
주상혁이 전주를 떠나고 제법 긴시간이 흘렀지만, 청초길드는 다를 게 하나 없는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애초에 주상혁이라는 사람 자체가 방밖으로 많이 나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동시에 청초길드 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 또한 아닌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평화로운 청초길드를 조금 멀리 떨어진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감시하는 남녀가 있었다.
일전에 박지훈의 가게에 들러서 포션을 사 갔던 외국인 남녀였다.
“어때?”
“감이 오는 대로 말해도 돼?”
“어차피 네가 그렇게까지 논리적인 사람은 아니잖아?”
여자의 말에 남자가 픽 웃더니 옥상 난간에 기댔다.
“틀린 말이 아니라 슬프구만 그래.”
남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팔짱을 낀 채 청초길드를 지긋이 응시하던 여자가 물었다.
“그래서 어떤데?”
“내 예상엔 저기도 아니야.”
“아니야? 그럼 왜 하필 전주인데?”
“난들 아나?”
남자와 여자는 폴라나 포션에 관심을 가지고 전주에 왔다.
그리고 가장 먼저 박지훈의 포션 가게에 들렀다. 표면적으로나마 폴라나 포션은 박지훈이 제작했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지훈 그자의 재주는 아니라고 그랬잖아.”
남자가 자신의 손바닥을 뒤집어 바라보다가 곧이어 확신하듯 답했다.
“그래. 직접 확인해 봤는데 아니었지.”
이게 이상했다.
남자는 자신의 스킬로 박지훈의 스킬을 분석했지만, 도저히 폴라나 포션을 직접 제작했을 법한 깜냥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근처의 길드들을 탐색하고 있었는데 결과는 마지막인 청초길드까지 뒤져봤지만, 허탕이었다.
“차라리 박지훈 쪽을 잡아다가 고문이라도 해 보는 건 어때?”
“말했잖아, 그건 안된다고.”
박지훈의 능력은 확실히 탐난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것만큼은, 박지훈이 직접 만들어서 파는 게 아닌 만큼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오히려 박지훈에게 문제가 생기면 폴라나 포션의 진짜 제작자는 영영 숨어 버릴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지고 싶어. 단순히 내부적으로도 도움이 많이 될 능력이거든.”
여자가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쉬고는 물었다.
“뭐 좋아.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 아직도 그 진짜라는 녀석을 찾을 거야?”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긴 하지만 일단은 후퇴랄까? 때마침 리더한테 연락도 왔고 말이야.”
“리더가?”
“그래, 포션쟁이를 하나 찾았다더라고.”
여자가 이제 포션이라면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말했다.
“큭…… 또 포션?”
남자가 여자의 반응에 픽 웃고는 품에서 물건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10% 폴라나 포션이었다.
“이걸 나한테 주는 이유는?”
여자의 능력은 분석과 복제.
처음 폴라나 포션의 소문을 듣고 전주로 왔던 것도 여자의 분석 능력을 믿은 이유이기도 했다.
성분을 분석하면 재구성하는 것도 간단하니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자의 능력은 의지할 것이 못 됐다.
이 분야에서 만큼은 만능이라 여겼던 여자의 능력도 폴라나 포션의 성분을 분석하지 못한 것이었다.
“혹시 나 맥일 생각?”
“그쪽 말고 복제를 하라는 말이야.”
여자가 인상을 구겼다. 그렇다면 더욱 이해가 안 됐다.
“십 년이거든? 머리라도 다쳤냐? 내 능력 알잖아.”
여자가 남자와 함께 다닌 지 벌써 십 년 지났다.
“그래서 말하는 거야. 그래야 제작자가 관심이라도 갖지 않겠어?”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갈 때 가더라도 우릴 헛걸음하게 한 놈한테 선물은 주고 가자고.”
여자가 남자의 말에 씩 웃었다.
“뭐야 그런 거면 진작 말하지.”
여자가 폴라나 포션을 받아든 순간이었다.
여자 주변의 기류가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주변으로 강력한 마나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단언컨대 S급 각성자인 정성호와도 필적한 수준의 마나였다.
“몇 개나 만들면 돼?”
남자가 말했다.
“아주 덮어 버릴 정도.”
* * *
새벽에 대호길드에 도착한 주상혁은 오랜만에 늦게까지 잠들었다.
대호길드에 오고 나서 바로 발생한 퀘스트 때문에 그동안 잠도 편히 못 잤는데 비로소 어제 그 퀘스트가 끝난 것이다.
오후 늦게까지 여유로움을 만끽하던 주상혁이 일어난 건 오후 다섯 시.
이마저도 외부의 요인 때문이었다.
“어, 화영아.”
주화영과는 그동안 연락했던 바가 있었다.
예비용 폴라나 포션을 박지훈에게 보급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하…….”
주화영의 말을 듣고 주상혁이 한숨 쉬었다.
“10%가 이제 하나도 없단 말이지?”
주상혁이 잠시간 생각하다가 답했다.
“일단 내가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오늘은 거기 있는 것만 적당히 주는 걸로 하자 할 수 있지?”
주화영과 통화를 끝낸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나…….”
정지호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아서 별말 없이 붙잡혀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폴라나 사업이 중단되는 것은 상당히 곤란했다. 결판 지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주상혁이 방문을 열고 정지호의 사무실로 향했다.
슬슬 퇴근 준비를 하던 정지호가 절차대로 사무실로 들어온 주상혁을 보고 말했다.
“요놈 식탁 앞에서밖에 얼굴을 안 비추더니 무슨 일이더냐?”
주상혁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저 집에 가겠습니다.”
사무실에 순간적으로 적막이 흘렀다. 정지호가 말없이 달력을 확인하더니 턱 주변를 쓰다듬다가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내일 가는 건 어떠냐?”
“네?”
주상혁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이요?”
“그래 내일, 점심쯤 해서 차편도 준비해 주마.”
주상혁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도 그럴 게 정지호의 반응이 예상을 벗어난 반응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무슨 조건이나, 심하면 강압적인 태도로 변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다. 그저 하루 후에 가라는 제안이었으니까.
‘어쩌지……?’
정지호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꼭 오늘 가야만 하는 일이라도 있느냐?”
하루.
아니, 이미 오후 여섯 시를 향해서 시침이 달리기 시작했으니 정확히 스무 시간도 남지 않았다.
고민하던 주상혁이 말했다.
“그럼…… 그냥 내일 가죠, 뭐.”
* * *
‘뭐지…… 진짜 뭐였던 거지?’
다음날 점심 청초길드로 돌아가는 대호길드의 차를 탄 주상혁은 어리둥절했다.
모든 상황을 돌이켜 봤을 때 최종적으로 정지호가 이득을 본 게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정지호는 다음날 주상혁을 미련 없이 보 내줬다.
심지어 배웅까지 나와서 앞에서 손도 흔들어 줬다.
‘그나마 어젯밤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가벼운 커뮤니케이션마저 없었고 저녁에 있었던 식사 이후에는 평소와 같은 시간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거짓말을 써서 불러들여 주상혁을 붙잡아 두려고 했던 정지호가 보인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하…… 나도 이제 모르겠다.”
머리가 과열된 주상혁이 포기하듯 좌석에 몸을 묻었다. 창가를 바라보며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딱 열흘 만인가?“
짧은 일정이었지만 퀘스트에 시달렸기 때문인지 족히 한 달은 대호길드에 머물렀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문을 열어주는 기사의 도움으로 차에서 주상혁이 내렸다. 곧이어 출발하는 세단을 바라보다 주상혁이 돌아섰다.
‘그래도 일단 인사는 드려야겠지?’
열흘 만에 집에 돌아온 주상혁이 아버지 주재호에게 향했다.
주상혁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재호가 주상혁을 반겼다.
“그래, 건강히 잘 다녀왔느냐?”
“…….”
주재호의 말에 주상혁이 답이 없자 주재호가 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었느냐? 혹, 장인어른이 생각보다 많이 편찮으시더냐?”
“아뇨, 건강하시더라고요. 그것도 엄청.”
“그래? 그거 잘된 일이구나.”
흡족하게 웃은 주재호가 주상혁의 시큰둥한 표정을 보고 오해했는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많이 피곤하겠구나, 항상 방에만 있던 녀석이니 그럴 테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줘도 도니 이만 가서 쉬어라.”
“네.”
멋대로 의미를 해석하고 대화를 마친 주재호의 말대로 주상혁이 돌아서서 방을 나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였다.
주재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참, 상혁아, ‘어서 오너라’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했구나.”
옅은 웃음을 입가에 그린 주상혁이 비스듬히 돌아 답했다.
“다녀왔습니다.”
* * *
주화영은 주상혁이 전주를 떠난 그 날부터 주상혁의 방에 심심찮게 드나들었다.
폴라나 포션을 박지훈에게 공급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정확히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킁킁.
주상혁의 이불을 둘러앉고 냄새를 맡던 주화영이 투덜거렸다.
“원래는 안 이랬는데…….”
본래라면 주상혁의 향기로 가득 차야 할 방.
하지만 어째선지 몇 달 전부터 주상혁의 방 안에 다른 냄새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바로 한약재 냄새였다.
“뭐, 물론 이것도 오빠 냄새면 상관없지만…….”
그래도 주상혁 특유의 체취가 옅어진 건 불만스러운 사항이었다.
주화영이 주상혁의 방을 쓱 살펴볼 때였다.
띠띠띠띠, 띠로링.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상혁이 돌아온 것이었다.
호다닥 달려간 주화영이 주상혁의 앞까지 이동해 조용히 냄새를 들이켰다.
“역시, 진짜가 좋네요.”
방긋 웃으며 말하는 주화영의 목소리에 영문 모를 얼굴의 주상혁이 말했다.
“그보다 네가 방엔 왜 있어.”
“비밀이에요.”
“그래, 그럼 비밀스럽게 나가 주렴, 나 피곤해.”
“네”
주화영이 그렇게 말하고는 방을 나가려고 할 때였다.
주상혁이 시큰둥한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보다 도어락 비밀번호 바꿀 거니까 그렇게 알아.”
주상혁의 말에 주화영이 언제나 그렇듯 귀엽고 착한 동생을 연기하며 말했다.
“치사해요!”
* * *
주화영을 쫓아낸 주상혁은 폴라나를 챙겨서 먼저 옥상으로 향했다.
“이 짓도 오랜만에 하니까 재밌을…… 콜록콜록…….”
리가 없었다.
오랜만에 마셔 본 연기 역시 최루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맵기만 했다.
주상혁이 기침을 하느라 나온 눈물과 콧물을 닦아 내고는 한숨 쉬었다.
“그나저나 아무리 달여도 요령이 안 는단 말이지…….”
전생까지 포함하면 수천수만 재의 탕약을 달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이 탕약이란 놈을 달일 때 연기를 마시지 않는 방법은 생기지 않았다.
애초에 바람이 언제 갑자기 방향을 틀어 버릴지 알아야 한다는 거 자체가 신급 난이도인 것이다.
왕!
주상혁이 옥상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청운해태의 짖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Lv.13 청운해태.』
불과 일주일 사이에 제법 레벨 업을 한 청운해태의 입에는 약재로 쓰려고 건조시키던 폴라나가 들려있었다.
주상혁이 말했다.
“그거 먹고 싶어?”
왕!
“그래, 먹어라, 먹어.”
며칠 사이 알게 된 일이었지만 청운해태의 입맛은 까다로웠다.
기껏 준비한 값싼 약초는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입맛을 꾸짖으며 값싼 약재를 먹여 봤지만, 레벨 업의 효과가 거의 없었던 것도 있다.
그래서 주상혁은 지금은 녀석이 먹고 싶어 하는 걸로 먹이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편이니까.’
성장만 해 준다면 그깟 약초쯤 얼마든지 줘도 상관없었다.
주상혁이 다 달인 탕약을 한쪽으로 옮겨서 담으며 중얼거렸다.
“근데 그러고 보니 별로 소득이 없진 않네.”
더럽게 귀찮긴 했어도 광주에서 나름 소득이 많았다.
가장 먼저 무조건 주상혁의 힘이 되어 줄 청운해태를 얻었고 둘째는.
Lv.9 하급 침술 [active].
하급1 레벨이었던 침술이 무려 하급 9레벨로 올랐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뿐만이 아니었다.
광주에서 얻은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한다면 다른 게 있었다.
“퀘스트.”
주상혁이 전직 퀘스트를 띄웠다.
Q. 침술의 달인 [전직 퀘스트] (완료).
「세상에서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종사자들을 그렇게 부릅니다. 하지만 현생 당신의 명성은 아직 달인이라 부를 수준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기적을 이루고 달인의 이름을 얻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입니다.」
[달성 조건: 해가 지기 전에 이천 명의 환자를 치료할 것.] [현재 치료한 환자: 3,533명.]―침술의 달인 전직 시 조제의 귀재, 진맥의 대가 전직 불가능. (단, 어느 선택을 하든 의술 마스터에 도달하는 데 부작용은 없음).
3,533명.
그야말로 미쳐 버린 수치였다.
그날 주상혁은 완료한 것도 모자라서 요구 수치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를 달성한 것.
“냉큼 전직하면 제법 괜찮은 보상이 주어지긴 할 텐데…….”
그럼에도 주상혁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한 번 전직하면 ‘조제의 귀재’나, ‘진맥의 대가’ 같은 다른 두 방향의 전직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
“고민된단 말이지…….”
주상혁도 게임이라면 질리도록 해 봤기에 안다.
그 어떤 갓겜이라 불리는 게임에서도 완벽한 직업 밸런스를 구현해 낸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즉 주상혁이 고민하는 이유는 설령 압도적인 달성도를 채우고 전직했지만, 혹시나 이쪽 계열의 직업이 개똥 직업은 아닐까 생각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퀘스트를 완료하시겠습니까?
망설이던 주상혁이 냉큼 퀘스트를 완료하려고 입맛을 다시다가 멈칫했다.
찹찹찹.
폴라나를 맛있게 먹는 중이신 영물님이 보였다.
한혜지때와 마찬가지로 녀석에게 결정을 부탁해 볼까 생각하던 주상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그러고 보니 얘 이름이 뭐지?’
주상혁이 괜찮은 이름을 떠올렸다.
‘마법의 소라고동…….‘
혹시 이름이 없다면 앞 자를 줄여서 ’마소‘라고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주상혁이 물었다.
“있잖아.”
폴라나를 먹고 있던 청운해태가 주상혁을 바라봤다.
“너 이름이 뭐냐? 그보다 이름은 있어?”
폴라나를 먹던 청운해태가 반쯤 먹던 폴라나를 내려놓고는 폴짝폴짝 뛰어서 화단 쪽으로 갔다.
뒷발질해서 주변의 잡초를 파헤쳐 버린 청운해태가 주상혁을 보고 왕왕 짖었다.
이쪽으로 와보라는 의미인 걸 단박에 알아먹은 주상혁이 걸었다.
“그래그래, 간다.”
주상혁이 도착하자 청운해태가 앞발로 흙밭에 휙휙 한 획씩 긋기 시작했다.
“주주?”
완성된 글자는 ‘주주’였다.
“그게 이름이라고?”
왕!
“누가 지었는지 완전 촌스럽네…….”
아쉽게도 마소라고 짓기는 글렀다는 것을 깨달은 주상혁이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보다 주주.”
왕!
녀석이 기쁜 듯이 어느 때보다 꼬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할까 말까, 엄청 고민 중이거든? 할까 말까?”
“…….”
주상혁의 말을 들었을 텐데, 어째서인지 주주가 조용했다.
들었다면 뭔가 몸짓이라도 할법한데 여태까지 보였던 녀석과는 괴리감이 있었다.
‘못 들었을 리는 없고…….’
재차 물어봤지만 별 반응이 없는 청운해태를 놔두고 주상혁이 한숨 쉬었다.
“다시 원점인가…….”
주상혁이 퀘스트 창을 다시 켜고는 말했다.
“까짓거 전직하지, 뭐.”
주상혁의 결정은 전직이었다.
* * *